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21:00:08

봉두완

대한민국 제11·12대 국회의원
봉두완
奉斗玩
파일:봉두완.jpg
<colbgcolor=#878787><colcolor=#fff> 출생 1935년 12월 8일 ([age(1935-12-08)]세)
황해도 수안군
(現 황해북도 수안군)
본관 하음 봉씨
학력 경복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 영문학 / 학사)
아메리칸 대학교 대학원 ( 신문방송학 / 석사)
종교 천주교 ( 세례명: 다윗)
소속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의원 선수 2
의원 대수 11, 12
경력 한국일보 주미특파원
중앙일보 논설위원 겸 동양방송 논평위원
유엔총회 대표
제11,12대 국회 외무위원장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민주정의당 상임위원ㆍ특임촉탁위원
민주정의당 대변인
통일국민당 상임위원ㆍ전임위원
신정치개혁당 전임위원
신정치개혁당 최고위원
신민당 상임고문
자유민주연합 상임고문
(재)클린인터넷 국민운동협의회 의장
천주교 한민족돕기회장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공동대표
대한적십자사 부총재, 봉두완 중앙협의회의장
원음방송 명예회장
광운대학교 석좌교수

1. 개요2. 일생3. 여담4. 선거 이력5. 소속 정당6. 출연작
6.1. 앵커/MC6.2. 광고
7. 저서8. 수상경력9. 참고 자료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언론인, 정치인이다. 호는 다위(多爲)이다. 종교 가톨릭이며 세례명 다윗이다.그런데 원음방송 명예회장을 지냈다. 본관은 하음(河陰). # 언론인 생활 동안 정부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독설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1981년 민주정의당 국회의원이 되면서 친여 보수인사로 변신했다.

2. 일생

1935년 황해도(현 황해북도) 수안군에서 태어났다. 경복고등학교,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59년 동화통신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하여 1962~1968년까지 한국일보 미주특파원으로 근무했고,[1] 1969년부터 중앙일보 논설위원 겸 동양방송 논평위원으로서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의 앵커를 맡았다. 이 때 박정희 정권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며 "1호 앵커맨"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봉두완의 뉴스전망대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논평을 내놓기도 했는데, 육영수가 애청하던 방송이었다고 전해진다.[2]


기자로 재직하며 'TBC 뉴스전망대'라는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이 프로그램의 클로징 멘션이[3] 유명했다. 당연하겠지만 1970년대 당시에는 2010년대의 손석희와 비슷한 이미지였다. 더군다나 당대 언론통제가 일상화 되던 시절임을 감안하면[4] 어찌어찌 해고당허가나 고문받지 않는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물론 너무 유명했던 인물인지라 함부로 집어넣었다가 난리가 날게 뻔해서 못 집어넣은것에 가깝다고 봐야되겠지만 말이다. [5]

1970년대에는 라디오의 뉴스전망대와 뉴스논평, 2시취재현장, TV의 TBC 석간, 동서남북, 봉두완입니다까지 거의 모든 시사보도 프로그램을 전담하다시피한 스타앵커였다. 그는 미국 CBS 뉴스앵커 월터 크롱카이트에 비견되어 '봉카이트'란 별명으로 불렸다.

하지만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 직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면서 용기있는 참 언론인에서 신군부의 부역자로 전락하게 된다.[6][7] 허삼수, 허화평이 가톨릭 신자인 것을 인연으로 끌어들인 것. 더 골때리는 건 허삼수와 한강동 본당에 다녔는데 주임신부가 민주화에 앞장선 함세웅 신부였다고(...)

파일:external/www.dtoday.co.kr/20120515164140_4037.jpg

1981년 1월 15일 민정당 창당 당시 사회를 맡았고,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후보로서 서울특별시 마포구- 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한국당 김재영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는데 이름값이 있었고, 이때 거물인사 상당수가 출마하지 못한 영향도 있기에 46.8%로 이종찬에 이어서 서울에서 2번째로 득표율이 높은 민정당 당선자라는 타이틀을 달기도 했다. 같은 해 4월부터 1982년 5월까지 민주정의당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1983년에는 국회 외무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외무위원장으로 선출된 직후 테드 카플이 진행하는 미국 ABC 나이트라인에 1983년 11월 10일[8] 출연해 당시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김대중과 한국의 인권과 안보 상황에 대해 영상 토론했다. 능변과 교묘한 논리로 전두환 정권을 방어하였다.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KBS 스튜디오가 가장 악랄한 북한 공산군과 대치하고 있는 휴전선으로부터 고작 28마일밖에 안 되는데 민주주의 한답시고 그런 위협 속에 민주적 절차에 의한 두 번째 총선을 치르고 있다. 국회도 선거를 통해 구성했고. 우리는 아직도 남북이 대치 중에 있어. 미국하고는 달라. 나도 너처럼 앵커맨 출신이야. 그 당시 방송할 때 정부 정책을 정면 비판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나는 그래도 몇 마디 지껄이고 살았어.[9]"

이 말은 당시 ABC 나이트라인의 앵커맨이던 테드 카플에게 한 것으로, "나도 너처럼 앵커맨" 이라는 말은 봉두완, 테드 카플이 앵커맨의 경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 봉두완의 회고를 다시 인용
"지금까지 김대중 씨가 말한 인권 유린은 박정희 때의 일이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전두환 정권은 모든 인권을 보장하고 있다. 어떤 형태의 인권 유린도 없다."

하지만 김대중은 카플에게 발언을 끝내 얻어내어 유엔 국제사면위원회와 미국 국무성의 1982년 보고서를 인용했다는 말로 논란을 잠재웠다. 봉두완의 승리를 예상하고 전 교포들에게 라디오를 홍보했던 정부로서는 제대로 관광당한 셈(...) # 이희호 여사의 회고. # 김대중 본인의 회고 전두환은 일단 김대중과 토론에 나선 자체를 칭찬한 반면, 권익현 사무총장에게 한소리 들었다고 한다. # 봉두완의 회고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정의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여당 후보로서 최다인 16여만표를 기록해 신한민주당 노승환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중선거구제라 2위임에도 당선되었고 득표율도 27.5%로 저조했다. 같은 해부터 1987년까지 국회 외무위원장으로 연이어 활동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노태우 5공 색깔 지우기로 공천에서 탈락했고, 그 충격과 배신감으로 3개월간 팔다리 마비와 실어증에 걸리기도 했다. 1989년 10월부터 MBC 라디오 <여성시대> MC를 거쳐 1990년부터 <전국패트롤 봉두완입니다> 앵커를 맡아 노태우 정권을 저격해왔고, 특히 1991년 수서사건 논평에선 청와대 개입설까지 제기했다. 그러나 정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992년 통일국민당에 들어가 선거방송 특별대책위원장 등을 맡았고,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특별시 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가 민주자유당 서정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3년부터 8년간 광운대학교 인문사회대학 신문방송학과 교수로서 강단에 섰고, 2001년 석좌교수로 추대됐다. 그 와중에도 1994~1998년까지 KBS 제1라디오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 진행을 맡아 1995년과 1996년에 광장커뮤니케이션 및 KBS 정책연구실에 의해 '가장 영향력 있는 프로그램'으로 각각 선정됐고, 1997년에는 <시사저널>의 '가장 영향력있는 언론인' 10걸 중 9위에 뽑혔다. 다만 1997년 15대 대선정국 때는 이회창 편들기로 선거방송특별위원회의 주의를 세 차례 받았고, 방송기자클럽 주최 이회창 후보토론회 사회자로 나선 바 있다. 그러나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승리하자 입장을 바꾸어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국민과의 대화>를 진행했고, 계속 반 한나라당 논조로 가다가 한나라당으로부터 교체 요구까지 받아 결국 KBS 측으로부터 경고 조치를 받았다.

1999년 1월부터 2년간 <SBS 전망대> 앵커를 맡으며 특유의 카리스마로 고등학생에까지 이르는 폭넓은 팬층을 보유했고, 이후 아리랑TV를 거쳐 2002년에 iTV 토론방송 <봉두완의 진단 2002>를 통해 지상파 브라운관으로도 잠깐 복귀했다가, 2005년 한방건강TV <봉두완의 의료계 진단>으로 돌아왔다. 그해 9월부터 원음방송 시사프로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 MC를 맡기도 했다. 그 사이 선거 때마다 출마설이 나돌곤 하지만 정치와는 담을 쌓고 있다.

그 외에 1998년부터 4년간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지냈고, 보수/가톨릭 인사로서 성 라자로마을돕기 회장을 비롯해 천주교북한선교후원회장, 남북한장애인걷기운동 고문, 생활개혁실천 범국민운동협의회 운영위원장, 바른사회를 위한 시민회의 대표, 천주교민족화해센터 및 천주교한민족돕기회의 회장 등을 맡았고, 2003년 3.1절 집회에서는 이철승 당시 자유민족민주회의 회장을 두고 " 전라도 사람입니다. 하지만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 이후 '반핵반김국민협의회'를 결성해 재정위원장을 거쳐 2004년에 4기 위원장으로 재직했다. 2006년에 전/현직 주미특파원 친목단체 '한미클럽'을 결성해 초대 회장을 맡다가 2018년에 자문위원장이 되어 운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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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언론계와 정치권 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말이 많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천주교 신앙에 따라 도덕적이고 이타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히 1997년 KBS 노동조합(1노조)이 공개한 바에 따르면 출연료는 1년간 7,650만원(한달 600~700만원)을 받지만 사적으로 쓰지 않고 자신이 관여한 봉사단체들의 운영비와 옛 동료들의 밥값으로 썼다. 특히 그는 40년 이상 나환자촌 성 라자로 마을을 자주 다니며 봉사했다고 한다.

4.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2[10]

158,603 (46.83%) 당선 (1위) 초선[11]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109,226 (27.55%) 당선 (2위) 재선[12]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용산

[[통일국민당|
파일:통일국민당 글자.svg
]]
32,177 (22.95%) 낙선 (3위)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80 - 1981 정계 입문


1981 - 1988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88 - 1992 탈당


[[통일국민당|
파일:통일국민당 글자.svg
]]
1992 - 1993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93 탈당


[[신정치개혁당|
파일:신정치개혁당 글자.svg
]]
1993 - 1994 입당


1994 - 1995 합당[13]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2002 합당[14]
정계 은퇴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02 - 탈당

6. 출연작

6.1. 앵커/MC

  • TBC
    • TBC 뉴스전망대
    • 2시 취재현장
    • 뉴스논평
    • TBC 석간 (1972~1980)
    • 봉두완입니다
    • 동서남북
  • KBS
    •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 (1994~1998)
    •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국민과의 대화 (1998)
  • MBC
    • 여성시대 봉두완 이효춘입니다 (1989~1990)
    • 전국패트롤 봉두완입니다 (1990~1991)
  • SBS
    • 봉두완의 SBS 전망대 (1999~2001)
  • iTV
    • 봉두완의 진단 2002 (2002)
  • 아리랑TV
    • In Focus
  • 한방건강TV
    • 봉두완의 의료계 진단
  • 원음방송
    •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

6.2. 광고

7. 저서

  • 워싱턴 정가: 대권을 향한 질주(번역) - 케네스 P. 오도넬/데이빗 F. 파우어 저. 한서출판사. 1976.
  • 안녕하십니까? 봉두완입니다: 현장을 누비는 특파원 리포트 - 물결. 1977.
  • 뉴스 전망대: 봉두완이 살펴보는 오늘의 세상 - 우신사. 1980.
  • 정치전망대: 봉두완이 바라보는 오늘의 세계 - 우신사. 1984.
  • 봉두완의 목소리: 문민시대는 과연 올 것인가 - 아카데미. 1988.
  • 봉두완 칼럼: 안녕하십니까 MBC전국패트롤 봉두완입니다 - 성현출판사. 1991.
  • 뉴스 전망대: 봉두완이 살펴보는 오늘의 세상 2 - 우신사. 1995.
  • 봉두완의 세상읽기: 여자가 좋다 사람이 좋다 - 삶과 꿈. 2000.
  • 앵커맨: 대한민국 앵커맨 1호 봉두완의 못다한 이야기 - 랜덤하우스중앙. 2004.
  • 착한 이웃 따뜻한 세상(강은교 등 43명과 공저) - 착한이웃. 2007.
  • 너 어디 있느냐: 대한민국 앵커맨 봉두완의 신앙고백 - 중앙북스. 2010.
  • 신문인 방우영 : 대한민국 名士 90인 '방우영을 말한다' : 미수(米壽) 문집(공저) - 21세기북스. 2016.
  •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켜준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김동길 등 8명과 공저) - 기파랑. 2017.
  • 취재현장의 목격자들+.2, 명기자, 명데스크 못다한 뒷이야기 28(공저) - 대한언론인회 편. 청미디어. 2018.

8. 수상경력

  • 제5회 한국방송대상 해설부문 (1978)
  • 연세를 빛낸 자랑스런 동문상 (2001)
  • 자랑스런 연세인상 (2003)
  • 연문인상 (2006, 최인호 및 신극범과 공동수상)

9. 참고 자료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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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로 인해 영어에 매우 능통하다. '봉카이트'라는 그의 별명처럼 월터 크롱카이트의 발음을 연상시키는 당시 미국 방송가의 억양으로 말한다. [2] 이 영향으로 인해 청와대에 초청되기도 했었다. [3] "0000년 0월 0일 TBC 뉴스전망대에서 봉두완이 바라본 오늘의 세계"라는 멘션으로 시작해서 그날 그날의 시국 상황 등을 요약한 멘션을 날렸는데 이 멘션에 뼈가 있어서 촌철살인이었다는 평이 전해지고 있다. 예를 들면, 3선 개헌 직후에 "봉두완이 바라본 오늘의 세계, 깜깜합니다. 왜냐면 밤이니까요." 라는 멘션을 날리기도 했다. 이 멘트는 코미디언 김병조가 MBC <일요일 밤의 대행진>에서 진행하던 뉴스 형식의 코미디 코너에서 이 멘션을 거의 비슷하게 마무리 멘션으로 쓰기도 했다. 70년대 생들은 이쪽만 기억하는 경우가 있으며 후술할 1998년 겔포스 광고에서도 써먹었다. 최일구 앵커도 어릴때 이 앵커를 보고 인상깊어서 후에 특유의 멘션스타일을 정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4] 예를 들면 민족일보 사장을 사형에 처한 일이나 경향신문을 강제로 야당지에서 여당지로 만든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독재정권에 저항하자 동아일보에 각종 압력을 행사하여 굴복시키고 기자들을 해고시킨 일을 예시로 들수있다. [5] 마찬가지로 고바우 영감의 작가인 김성환도 당대에 독재정권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곤 했는데 고문이 당연시되던 시절임에도 딱히 고문같은것을 당해본적은 없다고 전해진다, 다만 검열때문에 상당수 연재분이 검열삭제되는 비운(?)은 맞기는 했다. [6] 더군다나 1980년 7~8월에 걸쳐서 신군부의 압력으로 기자들과 PD들이 대규모로 해고당하는 일이 벌어진데다가 언론통폐합으로 자신이 근무하던 회사가 사라졌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도의를 저버렸다고해도 할말이 없었으니 더더욱 까일수밖에 없었다. [7] 게다가 동양방송 폐국 다음날인 12월 1일 민정당 발기인 명단에 봉두완의 이름이 있었다. 동료 강용식 보도국 부국장 역시 폐국 전에 KBS로 이직해 보도국장으로서 땡전뉴스 제작을 총지휘했다. [8] 당시 보도 제목은 A Fragile Peace: North and South Korea였다. 조선일보에서는 봉두완이 미국 방송에 출연한다는 소식만 짧게 전하고, 김대중이 나온다는 소식은 전하지 않았다. 당시 토론에는 리처드 홀브룩(Richard Holbrooke) 당시 미국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도 함께 참석했다. 원래 나이트라인은 AFKN에서도 매일 방송분을 녹화했다가 틀어줬는데, 이날 방송만큼은 원래 편성표에 있었는데도 결방되었다. 당시는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이 예정되어 있던 타이밍이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을 인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던 레이건 행정부 입장에서는 괜히 이를 방송해서 김대중을 띄워주고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드느니, 조용히 넘어가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방송분은 시라큐스 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다. [9] 민완기자 출신의 앵커였던 테드 카플은 봉두완의 이 발언에 대해 '몇 마디?'라고 되물으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당시 카플은 김대중에게 동정적이었다. [10] 마포구, 용산구 [11] 민주한국당 김재영 후보와 동반 당선 [12] 신한민주당 노승환 후보와 동반 당선 [13] 통일국민당과 신설 합당 [14] 자유민주연합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