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9 12:33:00

인민궁전

파일:external/www.exclusivnews.ro/casa_poporului.jpg
파일:external/www.local-life.com/b.968_palace-of-parliament.jpg
한국어 명칭 국회궁전
루마니아어
명칭
Palatul Parlamentului
위치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착공 1984년 6월 25일
완공 1997년
면적 340,000㎡
높이 86m
270m
너비 240m
연면적 33만㎡
방의 수 1,100개
층수 지상 12층, 지하 8층[1]

홈페이지

1. 개요2. 건설배경3. 건축가4. 건설과정5. 미완공6. 여담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Palatul Parlamentului(국회궁전, 현 명칭)
Casa Republicii 혹은 Casa Poporului (차우셰스쿠 당시 명칭)

인민 궁전은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 있는 초대형 건물이다. 공산정권 시절 독재자였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시절에 만들기 시작해서 그 끝을 못보고 미완성인 채 남아있다. '인민의 집'이라고도 불린다.

공적 건축물로는 미국 펜타곤, 태국 신 국회의사당, 중국 지난시청에 이어 세계에서 4번째로 큰 건물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로 유명하다.[2] 또한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건물로서 그 무게가 무려 410만 톤에 달한다.[3]

2. 건설배경

일설에는 북한 금수산태양궁전이 된 주석궁을 보고 무턱대고 따라서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좀 복잡한 요인이 있었다. 1977년 3월 4일 리히터규모 7.2의 강진이 루마니아에서 발생했다. 피해가 특히 수도였던 부쿠레슈티 쪽에 집중되어 전체 사망자 1,578명 중 1,424명이 부쿠레슈티에서 나왔을 정도였다. 또 부쿠레슈티 시내의 5층 이상 건물 중에 내진 설계를 해서 지었던 호텔 하나를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4] 이로 인해서 부쿠레슈티에 재건 작업이 활발해진 시점이었다. 지진 피해 복구를 위한 대규모 토목사업이 필요해짐과 동시에 좋은 곳에 살고자 하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욕심이 결합되어 탄생한 작품이었다. 이 인민궁전이 지어지기 전에 소련이 제작한 군사 지도와 위성사진을 비교해보면 인민궁전 자리가 원래는 시가지의 일부였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차우셰스쿠가 토목사업을 명목으로 부쿠레슈티의 건물들을 하도 불도저로 밀어낸 나머지 해외에서는 '차우셰스쿠가 지진 매몰자가 생존해 있던 상황에서도 구조 작업으로 시간이 낭비된다며 지진으로 인한 잔해를 불도저로 싹 밀어버리도록 했다'는 식으로 와전되기도 했다.(...) 실제로 차우셰스쿠는 지진 소식을 듣고는 국빈으로 방문하던 나이지리아에서 곧바로 귀국하고는 생존 한계로 간주되는 기간을 넘어서도 희생자들을 계속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즉 지진 수습 자체는 정상적으로 했지만, 사후 처리가 워낙 막장이었기에 이런 악성 루머가 나왔다고 해도 무리는 없는 셈.[5]

3. 건축가

건설에 관여한 설계자는 최대 700명이었는데, 수석 설계자는 당시 28세의 건축가였던 앙카 페트레스쿠(Anca Petrescu, 본명은 Mira Anca Victoria Mărculeț Petrescu. 1949–2013)였다. 독재정권에 흔히 있는 낙하산도 아니고 의외로 정상적인 콘테스트를 거쳐서 선정된 결과였다. 이 건축가는 이 콘테스트 당선으로 인해 출세길을 걷게 된다.

인민궁전 건축 공모전에서 뽑혀 유명해졌고 차우세스쿠의 도시 계획에 참여하면서 성공가도를 달리기도 했지만, 혁명 직후에는 시민들에게 차우세스쿠의 앞잡이라며 한동안 나쁜 취급을 받기도 했다. 물론 인민궁전이나 도시계획으로 인한 국민의 고충은 페트레스쿠의 잘못도 아니고, 페트레스쿠가 건축 인부들을 닦달하거나 한 적도 없었으나 그저 인민궁전의 설계자와 도시계획의 주역이었다는 이유 때문에 독재자 차우셰스쿠의 끄나풀이자 악녀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후엔 좀 사정이 나아져서 대 루마니아당(Partidul România Mare)[6] 소속 국회의원으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재직했으며, 인민궁전 관련 해외 다큐나 방송 등에서 관련 인터뷰에 자주 등장하기도 했으나 2013년 8월 5일에 자동차 사고를 당한 후, 동년 10월 30일에 향년 64세로 별세했다.

4. 건설과정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Unirii_Boulevard_%281.May_1986%29.jpg
1986년 5월 1일 건설사진

부지는 지진으로 인해서 피해가 컸던 옛 도심을 기반으로 몰수 및 철거하여 시작하였다. 정확히 말하면 인민궁전 자체는 언덕 위에 지어졌는데 그 언덕을 중심으로 주변 경관을 7km 가량을 밀어내 그동안 살던 4만 명을 강제로 퇴거시켰고, 터를 닦기 위해 성당 20곳과 유대교 회당 6곳을 포함한 10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주거 지역이 철거되었으며,[7] 인민궁전의 건설에만 국가 예산의 1/3이 소모되었다고 한다.

인민궁전과 함께 계획되어 건설된 게 인민궁전 옆에 위치하는 루마니아 학술 아카데미 건물[8] 그리고 정면에 위치하는 광장과 그 양 옆의 당원용 아파트 건물, 그리고 상젤리제 거리를 본따 만든 중앙 대로[9], 국립 역사 박물관,[10] 새 대법원[11] 등이 계획되었다.

1983년에 착공된 후 1984년 6월 25일에 본격적인 건설이 시작되었는데, 이 건물을 짓기 위해 무려 7㎢나 달하는 부쿠레슈티의 구 시가지가 철거되었고, 4만 명의 사람들이 강제로 이주당했다. 공사 현장에서는 인부 2만~10만 명과 루마니아군 병사 5,000명이 근무했는데, 이 노동자들은 서로 교대되며 24시간 내내 일해야 했다. 군인들을 건설에 동원했기 때문에 전체 건축비에 비해 인건비에 들인 돈은 별로 없었다고 하며, 이는 자유로나 북한의 상당수 건축물과 비슷하다.

거의 모든 건축 자재는 루마니아산을 썼지만,[12] 니콜라에 발체스쿠[13] 홀의 문에 사용하는 목재만은 콩고민주공화국(당시에는 자이르)의 독재자였던 모부투 세세 세코[14]가 선물해준 콩고민주공화국산 마호가니 나무를 썼다. 다른 목재들은 전부 다 자국산 참나무 체리나무를 사용했다. 1989년까지 들인 건축비용은 17억 5천만 달러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는 2022년 가치로 42억 달러(약 5조 7천억 원)이다. 참고로 1989년 기준으로 루마니아의 전체 GDP가 421억 1천만 달러였으니, 차우셰스쿠는 나라 GDP의 무려 4.1% 정도를 건물 건설에 쏟아부은 것이 된다![15][16] 즉, 인민궁전을 적당한 규모로 건설하고 남는 부분을 복지와 공공서비스같은 민생에 썼으면[17] 차우셰스쿠가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할 일도 없었다는 얘기다.

5. 미완공

원래 완공 예정 기간은 1986년이었으나, 차우셰스쿠가 처형 당할 때까지 완공되지 못했다. 차우셰스쿠는 건설 현장에 방문해서 직접 지시를 내릴 정도로 이 건물에 애착(?)을 들였으나, 정작 차우셰스쿠는 이 건물을 하루도 이용해보지 못하고 1989년에 일어난 혁명으로 총살당해 죽었다. 당연히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건설은 중지되었다. 건물의 기본적인 구조는 대부분 완성했고 마치지 못한 부분은 외관과 정원, 내부를 꾸미는 미술품과 가구 등의 내장 정도였다.

당시에는 거액의 돈을 들여 건설했던지라 아예 안 쓰기에도 뭐했기 때문에, 명칭만 개명한 채로 그대로 쓰기로 하여 1994년부터 루마니아 의회 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이외에는 관광과 장소 대여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하지만 건물이 워낙 거대해서 남는 공간이 많고 수리 비용이 많이 드는데다가 민간 기업 오피스로 이용되기에도 애매해서 애물단지다.

6. 여담

  • 인민궁전이라는 건물은 여러 공산주의 국가들에도 있다. 독일민주공화국 북한 등이 대표 사례. 다만 루마니아 인민궁전은 처음에는 공화국 궁전이라는 명칭이었고, 인민궁전이라고 이름이 붙여진것은 혁명세력에 의해서였다.
  • 워낙 거대한 건물 답게 내부에는 홀과 라운지 30곳, 식당 4곳, 도서관 3곳, 콘서트 홀, 야외에는 차량 2만 대를 수용할 수 있는 주차장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 독재자였던 차우셰스쿠는 대중에게 연설하기를 상당히 좋아했는데 그 때문에 이 건물에도 그런 일을 하기에 적절한 공간이 아주 많이 건설되어 있다. 그 중 백미는 광장을 바라보는 테라스인데[18] 그 테라스에서 보면 프랑스의 샹젤리제 거리를 본따 만든 광장과 중앙 대로가 정면에서 한눈에 들어온다. 물론 챠우셰스쿠는 이용 못 해보고 죽었다. 대신 마이클 잭슨이 1992년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그 테라스를 통해서 대중에게 말한 사람이 되었다. 그 때 치명적인 실수를 했었는데 루마니아의 수도는 부쿠레슈티인데 마이클잭슨은 hello! Budapest[19] 라고 말했다고 한다. 부쿠레슈티를 영어권에서는 Bucharest(부카레스트)로 부르기 때문에 발음이 비슷해서 헷갈렸을 수 있다.
  • 루마니아가 민주화된 이후 1990년에 미디어 사업가인 루퍼트 머독은 이 궁전을 사들여 활용해 보려고 루마니아 정부에다 10억 달러를 내놓았지만, 루마니아 정부측에서는 고심 끝에 거절했다고 한다.[20]
  • 관광은 할 수 있으나 패키지 형태로 루마니아에 잠깐 들리기 위해 왔다면 관광하기가 상당히 힘든 편이다. 지하 1층과 1~2층을 제외한 나머지 층은 국회가 사용하기 때문에 출입이 까다로운 편으로 공항 검색대와 같은 금속탐지기가 마련되어 있고 1번에 일정 인원수 이상이 관람할 수 없다. 게다가 관광 입장시간이 딱 정해져있다. 마지막 시간은 오후 4시. 모든 코스에는 가이드가 따라붙으며 1~2층만 간단하게 도는[21] 코스는 루마니아 돈으로 1인당 25레이로 7,500원 가량이 들고 카메라 촬영을 할 경우 카메라 하나당 30레이의 추가요금이 든다. 가이드가 까다롭게 제재하지는 않으나 만약 무단으로 사진 찍다가 걸리면 카메라를 압수당할 수도 있다고 한다. 방을 이동할 때마다 가이드는 일일이 관광 인원을 센다. 워낙에 넓어서 관람객이 길을 잃으면 다시 찾기가 어렵고 국회 건물이라는 특성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코스는 지하를 추가하거나 고층 테라스에서 부쿠레슈티의 전경을 볼 수 있는 코스가 있다. 물론 코스를 추가하면 그만큼 시간이 더 걸리고 요금도 추가된다. 최대는 1인당 45레이. #
  • 1~2층에 넓고 높이 17m에 이르는 방들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돈을 내면 거의 다 빌릴수 있다고 한다. 나디아 코마네치가 결혼식을 올린 홀은 인민궁전에서 가장 큰 방인데 이곳을 하루 빌리는데 15,000 유로 가량 든다고 한다. 참고로 이 방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단일 양탄자가 깔려있다.[22] 무게만 해도 2톤이라고, 이것은 외부에서 주문한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기계를 가지고 짠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방의 천장은 유리인데, 이 탓에 위에 천장이 열리는 구조가 아니냐는 루머가 인터넷에 떠도는데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그 위층에도 거대한 홀이 자리잡고 있다. 단순히 광원 반사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 건물에 사용된 샹들리에만도 2,800개를 훌쩍 넘는다. 방 수는 최대 1,100개 정도로 추산되는데 복도든 방이든 간에 천장 전등에는 무조건 상들리에가 달려 있다.
  • 몇몇 홀은 에어컨이 없고 대류 현상을 이용해서 냉방을 한다. 난방은 벽에 잘 가려진 라디에이터를 사용한다.
  •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촘촘한 편인데 이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키가 작아서 오를 때 힘들어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실제로 이 계단은 무려 두 번이나 다시 만들어져야 했다고 한다.
  • 지하 8층에는 핵 벙커가 있다고 한다.
  • 관광을 위해서 진입하는 층은 1층이 아니다. 위의 사진을 기준으로 봤을때 관광객은 우측에서 진입하고 정면에 보이는 1층은 한층 더 올라가야 한다. 그게 1층이다. 층 기준은 광장을 바라보는 기준이라고 한다.
  • 대재난을 맞은 수도의 피해 복구를 위한 대규모 토목사업의 필요성 + 좋은 곳에 살고자 하는 독재자의 욕심이 결합되어 탄생한 작품이고 그 결과가 독재자의 죽음이었다는 점, 건물 건설의 요인이 된 재난의 초기 수습은 나름 잘했는데 사후 대처가 워낙 막장이라 지도자에 대한 악의적인 헛소문이 퍼졌다는 것에서 네로의 '황금궁전'과 판박이다.
  • 부쿠레슈티를 배경으로 하는 토니 에드만에서 쇼핑몰을 풍자하던 도중 '알맹이도 없는 텅텅 빈 공간'이라 덩달아 까인다.

7. 관련 문서


[1] 이 중 4층만 사용한다. [2] 건설 당시에는 펜타곤에 이어 세계 2위였다. [3] 때문에 매년 건물이 5~6mm 정도 땅에 가라앉는다고 한다. [4] 사실 1980년대 루마니아의 경제침체도 이러한 대지진과 연관이 있다. 부쿠레슈티 대지진이 터지기 직전시기인 1970년대 초중반은 차우셰스쿠의 기행 및 악정으로 인한 이미지와는 별개로 고도경제성장으로 자가용 자동차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고 해외여행도 일반화되었을 정도로 루마니아인들에게 경제적으로 풍족한 시절이었다. 대략 한국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중반 정도의 분위기였으나 오일쇼크로 수출이 줄어들며 점차 외채가 늘어나던 참이었는데 대지진으로 인한 복구비용으로 외채를 추가로 빌려야 했고, 또한 당시 미국에서 고금리 정책을 펼쳤는데 이자율도 급속히 올라가며 체감 외채는 더욱 많아졌다. 결국 1980년대 내내 루마니아는 빚갚느라 경제가 침체되었고, 국민들의 생활수준이 급속히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고, 그 후유증은 90년대 말까지도 지속되었다. [5] 이와 비슷하게 로마 대화재 네로 황제도 화재 소식을 듣자마자 휴양지에서 전차를 몰고 로마로 달려가서 화재 진압을 손수 진두지휘했지만, 도시 재건 과정에서 화재로 폐허가 된 곳에다 '황금 궁전'처럼 자기 취향에 맞는 건축물을 짓는 부적절한 처사를 보이면서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식으로 와전되었다. [6] 루마니아의 극우정당이다. 1992년 총선때 처음으로 원내 진출한 이래 2008년 총선 직전까지 의석을 보유하고 있는데다가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연립정권에 참여해보기도 했고 특히 2000년 총선에서 거의 20%에 달하는 득표를 기록했던적도 있지만 2003년을 기점으로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하여 2008년 총선 때 군소정당이 되었다. 참고로 루마니아에서 차우셰스쿠에 대한 향수를 대놓고 내세웠던 정당이 이 정당이었다. 루마니아 사회민주당는 공산당 후신 정당이었지만, 까놓고 말해 차우셰스쿠를 내다버려서 처형시킨 사람들의 정당이었고, 타 우파정당들도 차우셰스쿠 처형에 직접 참여하지 않을뿐, 역시 차우셰스쿠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대루마니아당은 그런것이 없어서 거리낌없이 차우셰스쿠에 대한 향수를 내세웠던것이었다. [7] 이 와중에 차마 밀 수 없었던 수도원 건물은 통째로 옮겼다고 한다. [8] 엘레나 차우셰스쿠는 무식했지만 독재자의 부인이었기때문에 학술원장이었고 이 때문에 함께 건설되었다고 한다. 물론 엘레나는 이 건물을 이용해보지 못하고 처형당했다. [9] 총연장 3.5km에 폭이 92m에 달했으며, 도로 중앙 분리대에 40여개의 대리석 분수를 심으려고 했다. 물론 완성되지 못했다. [10] 이쪽은 건물의 전면만 세워졌다. [11] 부쿠레슈티 외곽에 있는 18세기에 세워진 수도원을 불도저로 밀면서까지 세우려고 했지만, 시공조차 하지 못했다. [12] 루마니아는 질 좋은 시멘트와 대리석이 나오는 국가이니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인민궁전에 사용된 목재는 95% 이상이 루마니아산이었다고 한다. [13] Nicolae Bălcescu, 1819~1852. 루마니아의 혁명가, 역사학자, 작가. [14] 참고로 모부투는 적어도 부정부패 면에서는 세계사에서 한 손에 꼽히는 독재자다. 항목 참조. [15] 참고로 부르즈 할리파 건설에 든 금액의 총합이 40억 1천만 달러였으며, 롯데월드타워 건설에 든 금액은 3조 8천억 원~4조 2천억 원 정도였다. 그리고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쓰인 돈이 당시 한국 GDP의 1.5%, 4대강 정비 사업에 쓰인 돈이 당시 한국 GDP의 1.6%, 아폴로 계획에 쓴 돈이 당시 미국 GDP의 1.8%, 인민궁전도 능가하는 희대의 괴작 류경호텔 건설에 쓰인 돈이 당시 북한 GDP의 2.9%(이것도 미완성이라 예정보다 훨씬 적게 든 돈이며 완공되었으면 당시 북한 GDP의 5.7%가 들어갈 예정이었다고 한다), 1988 서울 올림픽에 든 돈이 당시 한국 GDP의 3.9%, 마셜 계획에 쓴 돈이 당시 미국 GDP의 5.3%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겨우(?) 지하까지 합해 20층짜리 건물 건설에 이 정도 비율의 거액을 들였다는 게 얼마나 정신 나간 짓인지 알 수 있다. 특히 인민궁전을 지을 당시 루마니아는 2차 대전 종전 후 변함없이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은 커녕 전술한 마천루를 지은 두바이, 대한민국과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는데도 그런 거액을 쏟은 것이다. [16] 심지어 고베 대지진의 피해액이 당시 일본 GDP의 3.6%였다. [17] 이 당시에 예산안의 상당수를 외채를 갚는데 썼는데 그 여파로 민생 예산이 감축되어서 식량도 상당부분 배급으로 해결하고, 전기도 하루 몇 시간씩 끊기는 일이 일상적이었다. 거기에 이 시기에는 '전력난'을 이유로 평일 TV 방송 시간도 단 2시간에 불과했다. [18] 위사진에서 정면의 붉은 카펫이 깔린 위층이다. [19] 옆나라인 헝가리 수도. 양국은 1차 세계 대전에서 서로 싸운데다가, 영토 분쟁이 있어서 상당한 앙숙이다. [20] 실제로 위키 문서에 따르면 "In 1990, Australian business and media magnate Rupert Murdoch wanted to buy the building for US $1 billion, but his bid was rejected."라고 쓰여있다. [21] 그래도 하도 넓다보니 50분 가량 걸린다. [22] 대부분의 큰 양탄자들은 여러 개를 이어붙였다. [23] 공교롭게도 차우셰스쿠가 가장 존경한 독재자가 바로 김정일의 아버지인 김일성이었다. 그래도 인민궁전의 경우 지상 12층 중 4개 층이 의회로 사용되고 있지만 류경호텔은 약간의 유지보수 정도를 빼면 빈 건물로 방치되고 있는지라 후자가 훨씬 비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