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22:03:49

이소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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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000000>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가
이소선
李小仙|Lee Sosun
파일:이소선여사_.jpg
<colcolor=#FFFFFF> 출생 1929년 12월 30일
경상북도 달성군 월배면 본리리
(現 대구광역시 달서구 본리동)
사망 2011년 9월 3일 (향년 81세)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묘역 남양주시 모란공원
본관 광주 이씨
직업 노동운동가
수훈 국민훈장 모란장 (2020년 추서)
종교 개신교
가족 아버지 이성조 (1901~1933)
어머니 김분이 (1899~1968)
언니 (1920~1964)
오빠 이상일 (李相一, 1924~1981 이후)
배우자 전상수 (1968년 사별)
장남 전태일 (1948~1970)
차남 전태삼 (1950년생)
삼남 전태이[1] (1952~1958)
장녀 전순옥 (1953년생)
차녀 전태리[2] (1958년생)
경력 전국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장
최종 당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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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결혼
3. 노동운동4. 사망5. 기타

[clearfix]

1. 개요

여러분! 여러분이 전태일입니다. 내 아들 전태일이라고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전태일, 전태일 하고 외치니까 전태일입니다. 여러분이 없다면 무슨 전태일이 있겠습니까? 자신의 권리를 찾고 모든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게 하기 위해 외치는 사람 모두가 전태일입니다!
노동운동 연설 중 노동자의 어머니-이소선 평전에서 발췌
대한민국 노동운동가. 모든 노동자의 어머니[3], 노동운동의 대모라는 칭호로 불리며 박정희 정부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며 분신항거한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의 모친이다. 아버지 이성조 열사는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적이 있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1929년 12월 30일(음력 11월 09일), 대구광역시 달서구에서 빈농 이성조와 김분이의 1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4] 농촌마을에서 태어난 그녀는 아버지 이성조로부터 작은 선녀라는 뜻의 '소선' 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

이소선이 4살이던 1933년, 그녀의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하게 되었다.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셔 어머니 혼자 집안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고, 어머니는 자신의 첫째딸을 어쩔 수 없이 친정집에 보내어 그야말로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5]

이후 이소선의 어머니와 오빠, 그리고 이소선은 이곳저곳 다니며 힘들게 살았고, 어떤 동네에 정착하게 되었지만 그 동네에서 찬밥 신세를 받고 만다. 어머니가 동네에서 소작농으로 활동하며 겨우 먹고 살았지만 이소선은 이러한 어머니의 심정도 모르고 투정만 부렸다.

1934년 어머니는 자신보다 무려 20살 연상인 정씨와 결혼하게 되었고, 이소선은 어머니의 재가에 만족하지 못해 새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한편 그녀의 오빠는 서당을 다니고 싶은 마음이 아주 강했지만, 가정형편 탓에 한국에서 공부하지는 못하고 일본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그녀는 오빠와도 어린 나이에 이별하게 되어 어머니와 둘이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오빠가 공부 때문이 아닌 일제의 징용으로 인해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된 이소선과 그녀의 모친은 말없이 눈물만을 흘렸다.[6]

이후 이소선은 자신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집안 몰래 일본이 세운 학교를 다녔지만, 금방 들통나게 되어 집안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2.2. 결혼

1920년대에 태어난 옛날 사람답게 1947년, 만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했다. 남편 전상수는 의류 공장에서 대구 10.1 사건 등에 가담했고, 경찰의 아주 강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결혼 후 1년 뒤에는 전태일을 출산하게 되었다.

6.25 전쟁 직전에는 이소선은 둘째를 임신한 상태로 남편, 아들과 함께 부산에 내려가 자갈치시장에서 지냈고, 1950년 6월 15일에 둘째 전태삼을 출산했다. 아무래도 부산 지역이 타 지역에 비해 피난민이 많아 인구가 급증했고, 이에 따라 전상수의 장사가 잘 돼서 잠시 평탄하게 살았으나, 이때다 싶어서 시작한 공장을 크게 늘린 것이 실패해 급격히 생계가 어려워졌다.

이런 사업 실패로 인해 그녀의 남편은 점점 술에 중독되고 포악해졌으며, 많은 빚을 가재를 팔아 갚았고, 가족들을 길바닥에 두고 방황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1953년에는 셋째 전순옥을 출산했다.

이후 남편을 따라 서울에서 잠시 살다가 1958년 막내 전순덕을 출산했다. 그 후 다시 대구로 내려갔고, 가족들은 그곳에서 재봉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또 전상수가 시작한 사업이 망했고 그는 자식들을 때리며 더욱 폭력적으로 변했다. 이소선은 이를 보고 절망을 느꼈고, 전상수는 집을 나가버렸다. 이후 그녀는 집안의 생계를 위해 홀로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자식들도 아버지의 매질을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가 있던 서울로 올라왔고, 막내인 전순덕은 전태일이 서울로 상경하던 중에 미아보호소에 맡겨 생이별하게 되었다. 이후 이소선은 고된 노동으로 인해 하혈을 했고, 서울에서 번 돈의 상당 금액을 병원비로 충당했다.

이후 구두닦이, 신문팔이 등 각종 힘든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갔고, 평화시장에서 미싱사로 정착하며 근무하게 되었다. 이후 가족들은 다시 서울로 모였고, 전상수는 이소선에게 술을 절대 다시 마시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며 다시 함께 살게 되었다. 한편 가족들이 정착했던 판자촌에 화재가 나며 졸지에 이재민이 되었고, 이소선은 이때의 충격으로 눈이 일부가 멀었으며, 가족 모두가 함께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이후 가족들은 쌍문동으로 이주했고, 전태일도 이소선과 함께 평화시장의 미싱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한편 남편 전상수는 1969년에 지병으로 작고하고 말았다.

전태일과 이소선이 평화시장에서 미싱사로 근무하던 도중, 전태일 박정희 정부의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평화시장 앞 거리에서 분신했다. 급히 옮겨진 병원에서 전태일은 어머니에게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어달라고 부탁하고 2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이소선은 죽어가는 아들에게 몸이 가루가 되어도 끝까지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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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전태일의 빈소에 갑자기 어떤 남자 둘이 찾아왔다. 바로 노동청 관계자들과 평화시장 업주들이 온 것이다. 그들이 갑자기 온 이유들은 빨리 장례를 치르라고 말하려 온 것이다. 그래야 사건이 잠잠해지니까. 그치만 이소선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이소선은 "태일이의 뜻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장례를 치르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며칠 후, 또 그들이 찾아왔다. 이번엔 큰 보스턴백을 가져왔다. 그 안에는 거액의 돈이 가득 들어있다. 그러고 그들이, "어머님, 남은 애들 잘 키우셔야죠."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소선은 전태삼, 전순옥, 전순덕(전태리) 3남매를 부른다. 이소선이 이렇게 말한다.
저기 책상 위에 있는 파란 가방 봤니.
그 안에는 돈이 가득 들어있어. 저 돈을 받을 지 말지는 너희가 결정해야 돼.
그래서 장녀인 전순옥이 "저 돈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엄마?"라고 물어보자, 이소선은 이렇게 말한다.
저 돈을 받으면, 우린 더 좋은 집으로 이사 갈 수 있고,
너희들 공장 안 다녀도 되고, 대학도 갈 수 있어.
그 대신, 오빠를 머리 속에 잊어버려야 돼.
그래서 전순옥이 이렇게 얘기했다. "그럼 이 돈 받지 말고, 제가 공장에 계속 다닐게요."라고 말한다. 이소선은 자식들의 뜻에 따라 그들한테 돈을 도로 가져가라고 하지만, 그 관계자들은 끝까지 들이믿어 강요를 한다. 결국, 분노한 이소선은 가방문을 열고, 공중에 돈을 뿌려버린다. 그리고 이소선은 이렇게 말한다.
돈 좋아하는 놈들, 다 가져가!
우리 이딴 돈 필요없고, 내 아들 태일이의 뜻을 따를테니까 그렇게 알아, 이 돈바가지에 미친놈들아!
그 이후로도 온갖 협박과 회유가 끊임없이 이어짐에도 아들과의 약속을 위해 끝까지 흔들림 없이 소신을 지켰다. 자신을 찾아온 노동운동가였던 장기표 김문수[7] 등과 친해진 것도 이때부터였다. 결국에는 노동청장이 평화시장에 노동조합을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소선은 약속을 받고 그제서야 장례식을 치러지고, 이소선은 그제야 목놓아 울었다.

이후 이소선은 아들의 목숨과 맞바꾼 약속을 이루기 위해 노동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설할때 항상 노동운동하는 이들에게 더이상 죽지말고 살아서 싸우라고 말하기도 했다.

3. 노동운동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니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께서 죽어가는 아들과 한 약속이다.

이소선 여사는 온몸에 화상을 입고 죽어가는 아들 전태일 열사가 못다 이룬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이뤄달라고 부탁하자 반드시 이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아들의 죽음과 맞바꾼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평생동안 노동운동에 투신하였고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라고 불리게 되었다.

전태일의 작고 이후 이소선은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전태일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아들이 일하던 평화시장에 피복노조를 설립한 것이 시초이며, 노동교실을 개소하여 노동자들을 상대로 노동법과 관련된 소정의 교육을 제공했다. 청계피복노조는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이 집권한 이후 강제해산당했지만, 법외 노조로서 제야에서 활동하며 버텼다. 1970년대부터 작고하기 전까지 장장 40여년간을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1975년 인혁당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정권이 사형당한 피해자 8명을 황급히 화장터에서 화장시키려고 했을 때 이를 저지하며 경찰과 대치했다. 전두환 신군부가 집권한 뒤, 이소선은 여러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수 차례 구속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소선은 노동운동을 하며 총 250여차례 구속되었고, 3년 넘게 옥살이를 했다. 이 과정에서 장기표, 조영래, 김문수, 유시민, 노회찬, 심상정, 박원순 등 여러 인권변호사와 노동운동가들과 인연을 맺었다. 이소선은 헌옷을 팔아 노동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등 금전적으로 좋지 못한 형편이었지만, 민주화 운동가들과 노동운동가들을 자신의 집에 숨겨주고 재웠으며 이들을 자신의 아들처럼 대했다. 수배중이던 장기표를 자신의 집 장독대에다가 숨겨준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 때문에 많은 노동운동가들은 이소선을 '엄마', '어머니' 라고 불렀으며 곧 이소선은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 라는 칭호까지 받게 된다. 1986년에는 민주화유가족협의희(민가협)을 결성하여,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다 희생된 운동가들의 유가족들을 돌보는 사업을 하였다. 이 때 민가협의 사무실을 마련해준 사람이 당시 인권변호사로 활동중이었던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었다.

1986년 노동자 박영진이 근로기준법 준수와 노동 3권 보장을 외치면서 분신하는 일이 일어났고 박영진 열사는 전신 95%에 화상을 입게 됐다. 분신 이후에는 형체를 못 알아볼 정도의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고 하고 심지어 박영진 열사가 분신 직후 쓰러질 때 경찰은 불을 끄려고 하는 노동자들을 막았다고 한다. 결국, 박영진 열사는 10분 동안 불길의 휩싸여 방치되었다. 이소선은 박영진의 병상을 지켰고 3월 18일 박영진은 사망했다. 이소선은 전태일이 죽었을 때처럼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이소선은 80년대 재야운동가로 활동했던 양김,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 두 사람 모두와 인연이 있었다. 특히 노무현과는 이석규씨의 장례식과 원진레이온 사태 때 함께 활동하였고, 이석규씨 장례식 때는 노무현 혼자만 구속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이석규씨의 장지로 가던 중 경찰이 사거리에서 검문검색을 시작하자 노무현이 자신이 가서 해결해보겠다고 짐까지 두고 나갔는데, 노무현은 차 밖으로 나가자마자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소선은 노무현의 짐을 들고 그대로 산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훗날 6.10 항쟁 20주년 기념식 참석 차 청와대에 찾아갔을 때, 노무현이 이소선과 악수하면서 이 때의 일을 얘기하기도 했었다고.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이소선은 장례위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국민장에도 직접 참석하여 조문했다.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민주화가 쟁취된 1990년대 2000년대에도 이소선의 노동운동은 멈추지 않았다. 노동현장에서의 활동과 함께, 주 5일제와 노동시간 단축 등 정책을 제안하는 노동계의 원로로 활동하였으며 민주노동당의 창당 이후에는 진보정당의 원내 진입을 위하여 민노당을 지원하기도 했다. 2003년 분신자살한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씨, 고공크레인에서 농성 중 사망한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주익, 곽재규 씨의 장례식을 참석하고 주도했다. 이소선의 투쟁활동은 한 때 노동운동을 함께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상대로도 예외가 없었다. 2004년 4월 민주노동당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원내진입에 성공하자, "태일이의 한이 풀렸다" 며 감격의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이 후에도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에도 적극적으로 나섰고 2007년 이랜드 사태 당시에는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이던 노조원들을 직접 방문하고 격려하여 축사를 읽는 등 노구의 몸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노동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용산사태 당시에도 팔순이 넘는 나이였지만 직접 영결식에 참석했고 한나라당 당사를 항의 방문하여 과거사 위원회의 통폐합을 규탄하기도 했다.

그리고, 반전운동 등 여러 사회활동에도 참여했다. 2002년 미군 여중생 압사 사고 당시에는 촛불집회에 참석해 SOFA 개정을 촉구하였으며, 이듬 해 이라크 전쟁 당시에는 정부의 한국군 파병을 규탄하며 반전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4. 사망

2011년 7월 18일, 심장마비로 병원에 입원했으며, 이후 2달여 뒤인 9월 3일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녀의 장례식에 각종 정·재계 인사들이 참여했으며, 많은 노동자 및 시민들의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시신은 아들이 잠들어있는 모란공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10년 만인 2021년 12월 21일에 1980년 선고된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었다. 과거사 반성의 일환으로 2021년 4월에 서울북부지검에서 이 여사를 포함한 민주화 운동가 4명에 대해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했고 이후 동년 11월 25일에 검찰에서 그녀에게 무죄를 구형했다. # 그리고 법원에서도 무죄가 선고되었다.
  • 사건번호: 서울중앙지법 2023가단5015427
  • 재판부: 서울중앙지법 민사93단독 김병훈 판사

서울중앙지법 민사93단독 김병훈 판사는 2023년 9월 1일 이 여사의 자녀인 전태삼, 전순옥, 전태리 씨(소송대리인 법무법인 창조 이덕우, 이용우 변호사)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국가는 세 자녀에게 각 560여만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일부승소 판결했다. (단독) '계엄위반 재심 무죄' 전태일 열사 어머니 故 이소선 여사 유족에 국가배상 판결

5. 기타

  • 그녀를 모티브로 '어머니' 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 아들이 분신자살로 생을 마쳤기에, 이소선은 생전 노동자들이 자살을 통해 투쟁하는 방식에 반대했으며 노동자들에게 "제발 살아서 싸우라"고 권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사회의 노동운동가들의 절대다수는 전태일 평전을 읽고 노동운동에 뛰어든 경우가 많았는데, 이 때마다 이소선은 노동운동이라는 험난한 길에 뛰어드는 이들이 마치 자신과 아들의 잘못인 것처럼 느껴져 괴로워했다고 한다.[8]
  • 생전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 여러 노조들의 통합과 연대를 주장했고, 때문에 두 노조가 한창 적대관계일 때는 직접 집회에 참석해 손 잡고 싸우라며 다그치기도 했다. 2009년 전태일 39주기 때 마침내 두 노조의 갈등이 봉합되고 함께 추도식을 열게 되자 무척 기뻐했다고.

[1] 영아 사망률이 높은 시대라 태어난 지 몇 년 안 되어 사망했기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물론 이후 이소선이나 전태삼이 언론에 전혀 알리지 않은 것은 아니고 어쩌다 한번씩 말하곤 했었는데, 딱히 주목받을 가정사는 아니라 묻혔다. [2] 개명 전 이름은 전순덕. [3] 그녀는 전태일 사후 노동운동을 시작하면서 실제로 청계천 노동자들에게 자신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걸 허락하고 권유했었고, 노동운동하던 노동자들 중 고아인 사람들이 명절에 어머니 대신으로 찾아온 적도 꽤 많았다. 그녀는 그들에게 음식을 주고 그냥 진짜 자식처럼 대해주었기에 당시 50대라 고령까지는 아니었음에도 진짜 어머니라 불렸다. [4] 부친이 호적에 늦게 등록해 호적상 1930년 12월 30일으로 되어있다. [5] 이소선의 언니는 이후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고, 1964년에 불과 향년 44세로 별세했다. 당대의 평균수명을 감안해도 심하게 짧은 나이다. [6] 헤어진 오빠와는 1981년 36년만에 극적으로 재회하게 되었다. # [7] 경기도지사로 유명한 보수 정치인 그 김문수가 맞다. 김문수는 정계 입문 이후 점점 보수주의적으로 변했지만 그 전인 1970~80년대에는 20년간 노동운동에 투신한 운동권의 전설이였다. 이소선은 김문수가 정계 입문 후 보수정당에서 3선 국회의원과 경기도지사까지 역임했음에도 말년까지 김문수를 장기표와 함께 자신의 아들이라 칭하는 인터뷰를 했었다. 실제로 이소선 여사가 별세했을 때도 김문수가 빈소를 찾아 지켰다. [8] 이건 전태일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한 친구의 증언할때 모습만 봐도 이해가 간다. 당시 모습을 목격한 이 친구는 굉장히 충격을 받아서 꼬꼬무에 출연해서 지금까지 머리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다고 하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에 출연했을 때도 오열하기 일부 직전 상태의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