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1-03 21:25:34

윤보은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무송 윤씨[1]
출생 1898년 3월 22일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 노하리
(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사망 1945년 7월 18일[2]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3.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200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8년 3월 22일 경상남도 밀양군 부내면 노하리(현 밀양시 내이동)에서 윤치득(尹致得)의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3월 윤세주· 윤치형 등은 경기도 경성부에서 있었던 고종황제 인산 행렬에 참여했다가, 우연히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하여 이 사실을 밀양군 동화학교(同和學校) 교장 전홍표에게 전했다. 이에 3월 12일 밤 윤세주의 집에서 윤보은을 비롯해 윤세주· 박만수·정동찬(鄭銅燦) 등과 모여 이튿날인 3월 13일 밀양면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의논했다.

이때 윤보은은 전홍표의 지도에 따라 권재호·김병환(金鉼煥)·이장수(李章守)· 윤방우·김소지(金小池) 등과 함께 밀양면사무소와 부북면사무소 등지에서 등사판을 몰래 빼내어 아북산(衙北山)에서 밤을 새워 수백 매를 인쇄하고, 수백 장의 태극기를 제작했다.

거사 당일인 3월 13일 오후 1시 30분, 윤보은 등은 윤세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장터에 모인 수천명의 시위 군중들에게 배포하고는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그러나 얼마 뒤 부산부에서 출동한 일본군 헌병 및 수비대에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개월형을 선고받고 부산형무소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윤보은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3. 여담


[1]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밀양 문중 26세 은(殷) 항렬. [2] 무송윤씨대동보 권인(人) 946쪽에는 1946년 6월 20일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3] 족보상으로는 윤보은의 둘째 남동생 윤태은(尹台殷, 1906. 4. 15 ~ 1978. 10. 18)에 입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