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1-03 21:24:41

윤방우(1896)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방우(芳優)
본관 무송 윤씨[1]
출생 1896년 3월 2일
대구부 밀양군 부내면 노하리
(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사망 1927년 2월 13일[2]
묘소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성덕리 백마산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200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6년 3월 2일 대구부 밀양군 부내면 노하리(현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에서 윤치열(尹致悅)의 1남 1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윤치완(尹致完)에 입양되었다.

1919년 3월 윤세주· 윤치형 등은 경기도 경성부에서 있었던 고종황제 인산 행렬에 참여했다가, 우연히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하여 이 사실을 밀양군 동화학교(同和學校) 교장 전홍표에게 전했다. 이들은 3월 12일 만나서 이튿날인 3월 13일 밀양면 장날을 거사일로 정했는데, 이때 윤방우는 전홍표의 지도에 따라 권재호·김병환(金鉼煥)·이장수(李章守)· 윤보은·김소지(金小池) 등과 함께 밀양면사무소와 부북면사무소 등지에서 등사판을 몰래 빼내어 아북산(衙北山)에서 밤을 새워 수백 매를 인쇄하고, 수백 장의 태극기를 제작했다.

그리고 거사 당일이던 3월 13일 오후 1시 30분에 윤방우 등은 윤세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미리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장터에 모인 수천명의 시위 군중들에게 배포하고는 시위대의 선봉에 서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얼마 뒤 그는 부산부에서 출동한 일본군 헌병에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태형 90대를 선고받고 형벌을 받은 뒤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에는 태형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다가 1927년 2월 13일 별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윤방우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1]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밀양 문중 26세 선(善) 항렬. 족보명은 윤방선(尹芳善). [2] 무송윤씨대동보 권인(人) 937쪽에는 1928년 1월 12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