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16:50:06

테이무라즈 1세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f2a2a, #b73535 20%, #b73535 80%, #8f2a2a);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바그라티온 왕조
기오르기 1세 알렉산드레 1세 기오르기 2세 레반
바그라티온 왕조
알렉산드레 2세 다비트 1세 콘스탄틴 1세 테이무라즈 1세
바그라티온 왕조
아르칠리 에레클레 1세 다비트 2세 콘스탄틴 2세
바그라티온 왕조
테이무라즈 2세 에레클레 2세 }}}
}}}}}}
카헤티 왕국 8대 군주
თეიმურაზ | 테이무라즈 1세
파일:테이무라즈 1세.jpg
제호 한국어 테이무라즈 1세
조지아어 თეიმურაზ I
라틴어 Teimuraz I
가족 다비트 1세(아버지)
케테반(어머니)
바크탕(동생)
엘레네(누이)
마르타(누이)
안나 구리엘리(첫째 아내)
호라샨(둘째 아내)
레반(장남)
알렉산드레(차남)
다비트(삼남)
티나틴(장녀)
네스탄-다레얀(차녀)
생몰 년도 1589년 ~ 1661년
재위 기간 1605년 ~ 1616년(1차 재위)
1625년 ~ 1633년(2차 재위)
1634년 ~ 1648년(3차 재위)
서명
파일:테이무라즈 1세 서명.svg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카헤티 왕국 8대 군주.

2. 생애

카헤티 왕국 6대 군주 다비트 1세와 무크라니 공작 아쇼탄 1세의 딸 케테반의 장남이다. 남동생으로 바크탕이 있었고, 누이로 엘레니, 마르타가 있었다. 1601년 아버지 다비트 1세가 할아버지 알렉산드레 2세를 폐위시키고 수도원에 유폐한 뒤 왕위에 올랐다가 1602년 10월 21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 후 복위한 알렉산드레 2세는 자신을 쫓아냈던 아들의 아내와 자식들을 페르시아 궁정에 보냈다. 그는 페르시아 궁정에서 페르시아어와 문헌을 배웠고 어머니의 양육을 받았다.

1605년 3월, 콘스탄틴 1세가 페르시아 샤 아바스 1세의 지령을 받들어 아버지 알렉산드레 2세, 형 기오르기, 카헤티 귀족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 콘스탄틴 1세는 케테반과 재혼하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귀족들은 그의 폭거에 분노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1605년 10월 콘스탄틴 1세가 반란 진압에 실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아바스 1세는 이 소식에 진노했지만, 카헤티 왕국을 공격하기엔 여건이 좋지 않다고 판단해 테이무라즈 왕자를 그곳으로 돌려보내 왕으로 삼게 했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사냥에 열중했고, 정무는 어머니 케테반이 도맡았다.

1613년, 아바스 1세는 그에게 사냥에 참여하라고 권유했다. 그는 샤가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여 거부했다. 아바스 1세는 이를 명분으로 삼아 1614년 대군을 이끌고 카헤티로 진격했다. 그는 이에 당황하여 두 아들 레반과 알렉산드레를 인질로 보내겠다고 제안했으나, 아바스 1세는 단호히 거부하고 카헤티를 침략하여 무자비한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다. 페르시아군은 뒤이어 카르틀리 왕국도 공격해 역시 막대한 인명을 학살했다. 그와 카르틀리 왕 루아르사브 2세 이메레티 왕국으로 망명했다. 아바스 1세는 두 사람을 용서할 테니 복귀하라고 권유했고, 루아르사브 2세는 이를 믿고 돌아갔다가 이슬람교로 개종하라는 제안을 거부했다가 처형당했다. 하지만 그는 아바스 1세를 믿지 않고 이메레티 왕국에 남았다.

그는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루스 차르국에 사절을 보내 미하일 1세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혼란 시대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상태였기에 캅카스 문제에 개입할 의지가 없었다. 1615년 9월 15일, 카헤티 귀족들은 다비트 잔디에리의 지휘하에 봉기하여 아바스 1세가 선임한 카헤티 총독 이사 칸을 축출했다. 카르틀리에서도 잇따라 반란이 일어났고, 페르시아는 조지아 동부 일대에 대한 통제력을 일시적으로 상실했다. 조지아 귀족들은 그를 조지아 동부 전체의 왕으로 추대했다. 아바스 1세는 알리 굴리칸에게 군대를 맡겨 이들을 토벌하게 했지만, 그는 치차무리에서 그들을 섬멸했다.

아바스 1세는 이 일련의 상황에 분노하여 1616년 친히 대군을 이끌고 조지아로 쳐들어갔다. 카헤티 전역이 파괴되었고, 6~7만 명이 학살당했으며, 10만 명 이상이 페르시아로 끌려갔다. 이리하여 공백이 발생한 카헤티에는 투르코만인들이 정착했다. 아바스 1세는 여세를 몰아 카르틀리마저 정복하기로 하고, 조지아계 장군인 기오르기 사카제에게 이 임무를 맡겼다. 이메레티 왕국에 망명해 있던 그는 이에 맞서 백성들에게 이슬람교 수용을 단호히 거부하고 끝까지 맞서라고 호소했고, 백성들은 이에 호응해 침략자에 끝까지 대항했다. 이에 분노한 아바스 1세는 1624년 9월 13일 포로로 잡혀 있던 그의 어머니 케테반을 고문해 죽이고 그의 아들 레반과 알렉산드레를 거세했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რად, სოფელო, სხვა არ დასწვი ჩემებრ, მე მქენ დასადაგე?!
გლახ, ლახვარი სასიკვდინე ყველა მე მკარ, დასად აგე!
დამიკარგე ძე, ასული, ძმა, არ ვიცი და სად აგე!
სხვა ნაყოფი მათებრ ტურფა რა აშენე და სად აგე?
마을이여, 왜 나 같은 놈을 태우지 않았느냐? 날 태웠느냐?!
행복하고 행복한 죽음, 나를 완전히 죽여라!
내 아들, 딸, 형제를 잃었다. 그들의 유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잔디와 같은 다른 과일은 무엇을 재배했으며 어디에서 재배했는가?

한편, 기오르기 사카제는 동족을 심하게 박해하는 아바스 1세에게 반감을 품고 반기를 들었다. 아바스 1세가 임명한 카헤티 총독 페이카르 칸이 그를 진압하려 했으나, 1625년 3월 25일 마르코피 전투에서 완패했다. 사카제는 투르코만인 이민자들을 모조리 축출하고 테이무라즈를 카르틀리와 카헤티의 왕으로 복위시켰다. 1625년 7월 1일, 아바스 1세가 친정하여 마라브다 전투에서 조지아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조지아인들이 고지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끝까지 저항한데다 오스만 제국의 침공이 가시화되자, 아바스 1세는 어쩔 수 없이 조지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기오르기 사카제와 추종자들은 테이무라즈 1세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걸 우려해 카르틀리의 새 왕으로 이메레티 왕 기오르기 3세의 아들 알렉산드레 왕자를 추대하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카헤티 귀족들과 함께 사카제를 공격하여 1626년 말 바잘레티 호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사카제는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여 이브라힘 1세 밑에서 복무하다가 1629년에 반역 혐의로 처형되었다. 그 후 아바스 1세가 사망한 뒤 페르시아가 내란에 휩싸이면서, 그의 왕국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과거 사카제와 함께 페르시아군에 맞서 싸웠지만 그에 동조하지 않고 자신을 지지했던 아라그비의 주라브를 의심한 끝에 처단했다.

그는 사파비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페르시아의 영향력을 조지아에서 완전히 박멸하려 했다. 1631년 카헤티의 파괴에 적극 가담했던 다케스탄의 산악 부족들을 정벌해 몇몇 정착지들을 파괴했다. 1633년 파르스, 라르, 바레인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맘쿨리 칸이 사피 샤에게 살해되자, 이만쿨리 칸의 처남이며 간자와 카라바흐의 총독인 다우드 칸이 그에게 망명했다. 그는 다우드 칸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그의 부대를 조지아군에 배속시켰다. 한편 니콜라스 이르바치를 서유럽으로 보내 스페인의 펠리페 4세와 교황 우르바노 8세에게 구원을 청하게 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통치자들은 30년 전쟁에 몰두하고 있었기에 조지아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사피 샤는 다우드 칸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테이무라즈 1세의 폐위를 선언하고 로스톰을 새 왕으로 내세워 조지아를 침공하게 했다. 1633년 로스톰이 이끄는 페르시아군이 카르틀리와 카헤티를 휩쓸었고, 그는 또다시 이메레티로 망명했다. 1634년 카헤티로 이동한 뒤 카헤티 왕을 선포하고 로스톰에 맞서 싸웠다. 양자의 대결은 수년간 이어지다가 1638년 카헤티 왕으로 인정받는 대신 페르시아에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전쟁을 종식했다. 그는 페르시아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1639년 4월 23일 미하일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1641년, 로스톰에 반감을 품고 있던 카르틀리 귀족들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카르틀리 왕국의 수도인 트빌리시로 진격했다. 그러나 음모가 발각당하여 귀족들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1648년, 로스톰은 페르시아군과 함께 카헤티로 쳐들어가 마가로에서 그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그의 마지막 아들 다비트가 전사했다. 그는 이메레티로 망명한 뒤 그곳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მე გასაძლებლად დავწერე ხან ისი, ხან ეს რამეო,
გული ამაზედ დავაპყარ, ბევრი დღე დავაღამეო;
სრულად ფიქრშიგან ჯდომითა გული არ შევიღამეო,
ჩარხი უკუღმა დაბრუნდა, ბედი დამტერდა, ვა მეო!
나는 가끔 이런 글, 이런 글을 썼는데,
이것에 마음을 정하고 많은 날을 밤에 보냈다.
나는 완전히 생각에 잠겨서 마음을 잃지 않았다.
시세는 거꾸로 가고, 내 운명은 망했구나. 아!
ღმერთო, ნუ მიწყენ ამ ცუდსა ლაყაბსა, მიდმოდებასა,
ვეღარ გაუძელ შვიდ ზაფხულ მოწყენით ცუდად გდეგასა,
შეჭირვებისა ცეცხლთა და გულსა სახმილთა დებასა.
მოველი შენგან ხსნასა და შენსავე იმედებასა!
신이시여, 이런 나쁜 형벌로 저를 다치게 하지 마십시오.
일곱 번의 여름을 참을 수 없어 지루하디 지루합니다.
고난의 불과 마음의 칼로 인한 분쟁에서,
나는 당신과 당신 자신의 희망으로부터 구원을 기대합니다.

그러면서도 루스 차르국의 원조를 마지막으로 기대한 그는 1653년 손자이자 유일한 후계자인 헤라클리오스 1세를 모스크바로 보냈고, 1658년 6월엔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를 직접 대면했다. 그러나 러시아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하자, 그는 이메레티로 귀환한 뒤 수도원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1661년 이메레티의 왕위에 오른 바크탕 츠추나슈빌리에 의해 사파비 제국의 수도 이스파한에 보내진 그는 아바스 2세의 영접을 받았다. 그러나 손자 헤라클리오스가 러시아에서 돌아와 카헤티를 장악하려 시도하자 투옥되었고 얼마 안가 옥사했다. 그의 유해는 훗날 조지아로 옮겨진 뒤 알라베르디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는 1609년 구리아 공작 마미아 2세 구리엘리의 딸 안나 구리엘리와 결혼하여 두 아들 레반, 알렉산드레와 두 딸 티나틴을 낳았다. 레반과 알렉산드레는 페르시아군에 생포된 뒤 거세형에 처해져 얼마 안가 사망했고, 티나틴은 1637년 사파비 왕조의 사피 샤와 결혼했다. 이후 카르틀리 왕 기오르기 10세의 딸 호라산과 결혼하여 아들 다비트와 네스탄-다레얀을 얻었다. 다비트는 사파비 왕조와의 전재엥서 활약했으나 1648년 마가로 전투에서 전사했다.

딸 네스탄-다레얀은 1623년 아르그비 공작 주라브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후 1629년 이메레티 군주 알렉산드레 3세와 결혼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레 3세 몰래 바크탕 츠추나슈빌리와 내연 관계를 맺었고, 1661년 알렉산드레 3세의 아들 바그라트 5세를 실명시키고 폐위한 뒤 애인과 함께 공동 왕에 취임했다가 귀족들의 반란으로 축출되었다. 1668년 아할치헤의 아슬란 파샤에게 2만 알틴을 뇌물로 주고 그의 후원에 힘입어 바크탕 츠추나슈빌리와 함께 이메레티 왕으로 복위했으나, 레흐후미의 수장인 코시야 라슈키슈빌리의 정변으로 피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