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09:18:37

어른들은 말이 안 통한다

1. 개요2. 이유
2.1. 묻는 젊은이가 모자란 사람일 경우2.2. 대답하는 어른이 모자란 사람인 경우2.3. 완곡표현을 써서 구체적인 대화를 거절하는 경우
3. 관련 문서

1. 개요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의 반대 개념.

젊은층이 자신들이 하고 싶은 걸 어른들이 반대하거나 무시하고 계속 자신들의 논리를 강요할 때 쓰는 말이다. 인류 역사상 세대 차는 언제든지 존재했고, 이 이해불가라는 '장벽'을 허물기 위한 노력 역시 존재했지만, 현대로 오면서 세상이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급속도로 휙휙 바뀌다 보니 세대 차와 괴리가 더욱 커지는 경향이 있다.

2. 이유

노인들이 세상을 개탄하고 세속을 비꼬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청년들의 반역을 조성한다.
린위탕(林語堂; 중국의 문학자)[1]
일단 태도 등의 부수적인 이유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시대적 환경이 다른 만큼 가치관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윗 세대가 살아오며 옳고 좋다고 믿었던 사실들, 실제로 좋게 했던 사실들이 아랫세대의 환경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점에서 시각 차가 생긴다. 이에 대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랫 세대가 뭘 몰라서, 윗 세대가 시대를 못 따라가서' 그렇다는 결론을 내게 된다.

예를 들어 1980년~ 2000년 즈음에 사회 생활을 한 세대에게는 '대학 가야 성공한다'는 시각이 있었고 실제로 대학만 들어가면 밥 먹고 살 수 있었지만 현재는 취업 시장이 전문성을 크게 요구하고 있고 경쟁도 심화되어 대학이 취업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실정이다. 학벌 및 높은 어학점수와 많은 자격증으로 무장한 취준생들조차 스스로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답을 내놓지 못한 채 허덕이는 상황이다.

또다른 예로 20세기에 국민/초등학교를 졸업한 세대는 대체로 노력이 성공을 보장한다고 자신하며 거친 대우를 받고 적은 임금을 받더라도 최소한의 의식주가 충족될 수 있다면 살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지만, 반대로 21세기 초등학교를 졸업한 세대는 환경이 성공을 보장한다고 믿으며 자신의 인격을 존중해줄 수 있고 양심적이며 준법적인 급여가 제공되어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곳이 아니면 일선에 쉽게 발을 들이지 않으려는 의식을 갖고 있다.

다시 다른 예를 들자면 서비스업을 비롯 손님을 상대하는 직종에 대해 어른들은 그래도 자기를 먹여살려 주니 고마워하고 존중해야 하며 진상이라고 해도 일단 떠받들어줘야 한다는 의식이 있는 반면 젊은 세대는 장사는 그저 일정 가치의 재화를 받고 동일한 가치의 물건을 제공하여 상호간 동등한 입장에서 거래하는 경제활동의 일종으로 인식하고 있다. 때문에 알바들이 사업주와의 마찰을 빚는 경우가 종종 일어나며 젊은이가 근무하는 영업장에서 일어나는 진상의 십중팔구가 기성세대다.

사실 욕구계층이론에 따르면 신세대의 요구는 자연스러운 것인데, 기성세대가 만들어둔 사회기반환경 덕에 최소한의 '굶어 죽지는 않는' 수준의 의식주를 확보한 신세대는 이제 의식주를 넘어 그 이상의 욕구와 발전을 바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람이 사는 사회라면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문제는 기성세대의 입장에선 신세대의 이런 요구가 가진 것 하나 없는 놈이 자신들이 일궈놓은 작물을 받아먹으며 사치 부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신세대나 기성세대나 한숨이 나오는 상황인 것이다. 신세대는 쪽방 대신 집, 라면 대신 식사, 더 나아가 문화생활과 자기 실현까지 바라는데 환경은 고사하고 왜 노력하지 않냐는 힐난만 돌아오니 신세대가 대화를 포기해버리는 것도 당연하다. 반면 구세대는, 배가 고프다는 것이 정말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일인데도 의식주가 충족되어 배가 고프다는 개념조차 잘 이해하지 못하는 신세대의 여러 반론을, 설사 머리로는 이해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가슴으로는 전혀 와닿지가 않기 마련이다. 신세대 역시 구세대가 배가 고팠다는 얘기를 하면, 그건 그 때 사정이 그랬으니 당신이 당연히 고생한 것이고, 우리가 그런 의식주 등이 당연히 충족된 상태에서 더 나아가 우리 나름대로의 요구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따위의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그러니 이런 세대간의 가치관을 이해하고 타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재밌는 것은 기성세대는 의지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신세대에게 거친 환경에 적응하기를 바라고, 신세대는 의지를 갖고 거친 환경을 이겨내라는 기성세대에게서 좋은 환경과 최대의 지원을 바란다는 점이다. 의식주는 기본으로 깔고 그보다 더 나은 삶을 원하는 세대에게 기성세대는 '굶어 봐야 정신을 차린다'며 생물학적 생존을 담보로 한 역경과 극기를 장려하니 신세대 입에선 '말이 안 통한다'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대비와 모순으로 가득한 상황에서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2.1. 묻는 젊은이가 모자란 사람일 경우

주된 원인은 청소년들이 인생 경험이 없기 때문이며, 이 때문에 경험과 지식, 논리가 풍부한 어른들(주로 부모님)이 자신들이 터득한 "해답"을 청소년들에게 설명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본인에게 안 맞을 수도 있으나, 다른 어른들에게 조언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비슷한 세대이므로 유사한 해답을 내놓는다. 즉, 대부분의 어른들이 하는 생각과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하는 생각이 충돌하면서 '어른들은 말이 안 통한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유 중 하나로는 젊은이는 어떤 집단에서 합심해서 숨기거나, 창피해 보이기 싫어서 일부러 과장해서 말하거나, 튀어 보이기 싫어서 일부러 겸손하게 말하는 것에 대한 진실을 정보력의 부족으로 알아채기 힘들다는 것이 있다.

어른들이 자주 이야기하는 "해답"의 언변이 부족해 청소년들의 의문점을 제대로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 역시 이에 일조한다. 즉 알아도 설명을 못한다 청소년들은 인생 경험이 적기에 '모르는 것'에 대해 어른들보다 많이 의문을 가지는데, 어른들이 전달해주는 지식의 상당수는 그들이 구체화하지 않고 경험으로 체득한 것이라서 그것을 설명할 능력이 없거나 참 쉽죠를 생각해보자 설명하더라도 아예 유효하지 않은 해답인 경우도 있다. 청소년들에게 기껏해봤자 "사회 생활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한다" 식의 얼토당토 않은 대답이 언제까지 통할 것 같은가? 자신들이 찾은 "해답"을 청소년들에게 설명하려면, 어른의 언어가 아닌 청소년의 언어로 설명해줘야 비로소 알아먹기 시작하는 시늉이라도 한다.[2]

그러나 어른들 중에는 굳이 그렇게까지 해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꽤 친절한 사람인데 어른이고 어린이고를 통틀어서 이렇게 친절한 사람들의 비율 자체가 많지 않다. 즉, 어른들은 알아들으려면 알아듣고, 아니면 말고와 같은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알려주는 것만 해도 상당한 친절을 베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친절이 가지고 있는 사전적 정의에는 잘 들어맞지는 않는 태도긴 하지만, 실제로 그 정도의 친절을 베풀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는 친절을 베풀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중간층인 청년들은 어른들과 비슷한 테크를 밟고 있기(즉 과도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산 증인이 된다. 여기에 청년들까지 청소년들에게 '내가 살아봤는데 그게 아니야' / '어른들 말 틀린 거 하나 없다'고 한다면 효과가 배가 된다. 다만 '과도기'를 살아가는 청년들 역시 전부 같은 의견을 내세우진 않는다.[3]
  • 은어·비속어, 유행어의 남발.
    • 일상생활에서 쓰던 은어와 비속어, 유행어들을 대학교 수업, 발표, 과제, 회사등 공적 장소에서 사용한다. 당연히 상대방은 이게 무슨 말인지 혼란이 온다. 심지어 이것을 쓰는 본인들조차도 이후 시간이 좀 지나서 자신들도 후배, 후임이 들어와서 후배, 후임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표현들에 대해 무슨 말인지 몰라서 곤혹을 치른다. 자신들이 일상생활, 온라인에서 쓴다고 해도 이것을 마구잡이로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다. #
  • 탁상공론
    • 이론을 가지고 현장을 직점 경험해 보아야만 파악할 수 있는 지식들과 노하우들이 있다. 이에 대해 마냥 꼰대들의 주장이라고 하는데 틀렸다. 실제로 학계에서도 암묵지로 설명되었다. 공돌이들이 이러한 것에 대해 이해가 좀더 빠른데 기술 전수등으로 설계도와 기술과 제품등에 대한 설명서를 다른 곳으로 보내면서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기술자들을 함께 보내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 사회에서 경력자를 뽑는 것이 이러한 맥락이다.
젊은이의 오만은 그들이 아직 삶을 통해 겸허함을 배우지 못했으며 사회 환경의 압력을 경험해보지 못했음에서 비롯된다. 젊은이는 스스로가 모든 것을 안다고 믿으며, 그 사실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는다.[4]

2.2. 대답하는 어른이 모자란 사람인 경우

이러한 현상을 고착화시키는 원인으로 아시아 특유의 집단주의를 들기도 한다. 전체의 평화를 깰 수 있기 때문에 소수 의견, 특히 젊은 사람들의 의견이라면 쉽게 묵살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서양에서도 코미디든 다큐멘터리든 말이 안 통하는 사례(예시: 베트남전 반대 시위, 히피 문화)가 있었지만.

어른들이 얘기하는 ‘해답’이라는 게 현재 청소년들이 어른이 되었을 시기에도 유효하지 못한 것들도 있다.

가장 최악의 경우는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 젊은 것들은 패야 말을 잘 듣는다. 여기선 설명 따위 집어치우고 무력으로 관철시키므로 자연히 말이 안 통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 번 먹히면 계속 사용되어 악순환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례는 아니지만 체면 문제도 들 수 있다. 즉, 나이도 많고 경험도 많은 내가 어린 녀석들에게 말에서 밀린다,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라는 걸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 이럴 경우엔 말싸움 특유의 패턴인 목소리 높은 쪽이 이긴다를 시전하거나, 논조를 슬쩍 다른 데로 돌려서 “그래도 내가 옳다”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이런 부류의 어른들은 상대 쪽, 즉 젋은이들의 말이 타당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기 때문인지 체면상 현장에선 반발하며 큰소리를 내지만, 이후에는 젊은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언동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긴 있다.물론 많지는 않다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와 마찬가지로 중2병 정도로 무시하기보다는 귀담아 들을 필요가 어느 정도 있다. 사회가 발전해야 되는 순간에 구세대의 퇴보한 논리 때문에 진행이 안 되는 상황이라든가.

그런데 조금 뒤집어 생각해보면 청소년과 어른이 겪는 세상은 다르다. 시대는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의 인생 경험이란 게 얼마나 유효할 지는... 사실, 온갖 산전수전 다 겪어보고 극한의 자기통제 속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냥 평범한(?) 어른이라면 청소년이나 어른이나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이를 항문 주름으로 먹는 게 아닌 이상 겪은 인생 길이의 차이는 좁힐 수가 없긴 하지만, 아주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부분이나 삶의 태도 정도라면 모를까 조금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도 청소년에게는 거의 도움이 안 된다. 하다못해 공부법 같은 이야기를 해도 지금 어른들이 학창시절 했던 공부와 청소년, 청년이 하는 공부는 방향성, 깊이, 유형, 범위, 용어 등이 많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어른들이 공부한 방식은 실제로 지금의 학생들에게는 영 와닿지 않는다. 정 도움을 주고 싶거들랑 '공부가 안 될 때 마음을 다스리는 법'처럼 예나 지금이나 변할 수 없는 부분에서만 조언을 해 주는 게 낫고, 이 이상의 간섭은 신세대에게는 알지도 못하면서 오지랖 부리는 것일 뿐이다.
모든 세대는 자기 세대가 앞선 세대보다 더 많이 알고 다음 세대보다 더 현명하다고 믿는다.
조지 오웰
노인들이 세상을 개탄하고 세속을 비꼬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청년들의 반역을 조성한다.
린위탕

2.3. 완곡표현을 써서 구체적인 대화를 거절하는 경우

  •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진짜 상대의 뜻을 밀고 나가라는 건지, 아니면 어른들 말 무시했다가 망해 보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 '너희 세대가 사회의 지도층이 되는 때가 오면 모든 것이 좋게 변할 것': 성공해서 직접 바꾸라는 것인지, 아니면 젊은 층이 햇병아리라서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런 표현으로 대화가 종결되는 이유는, 어른들 입장에서 대화를 지속하고 싶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별로 흥미도 없기 때문에 완곡표현을 이용해 대화를 종결시키는 것이다. 어른들의 경우 그 자신 역시 어렸을 때 기성세대의 말을 듣지 않았던 사람이 많기 때문에 말해 봐야 소용없는 부분이 있는 것은 오히려 젊은이들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다.

이것에 관한 해답은 한 마디로 결론을 내기 어렵고 결국 해당 개별 사례나 상황에 따라 맞춰서 생각하는 것이다. 어른이라고 젊은이들의 생각보다 언제나 나은 해답을 낸다는 보장은 없으며, 마찬가지로 많은 생각을 하는 젊은이들의 생각이 모두 옳다는 보장 또한 없다. 위에서 예시로 든 토마스 에디슨과 찰리 채플린 같은 사람들의 판단이 아주 크게 틀렸으니 어른들의 판단도 틀릴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 역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속한다. 왜냐면 그 사람들은 전 생애에 걸쳐 다른 평범한 사람들보다 좋은 판단 등을 많이 내려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에디슨의 판단도 틀렸을 때가 있으니 상대의 판단도 틀릴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어른들에게 반문한다면, 이런 경우 십중팔구 어른들은 완곡화법을 통해서 입을 다물긴 할 것이다.

3. 관련 문서


[1] 1895년 출생 [2] 이걸 잘 하는 사람들이 유명한 청소년 대상 강연자가 되고 소위 말하는 멘토가 되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3] 청년사업가들도 있긴 하지만 이 사람들이라고 딱히 젊은 세대의 편을 든다거나 한다는 보장은 없다. 이 사람들은 엘리트에 속하기 때문에 같은 세대나 어린 사람들과도 별로 말이 안 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4] 출처: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그러나 스스로가 모든 것을 안다고 믿는 것은 언어의 역사성, 유행 따위의 시대별 변화, 세대 차,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