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21:22:47

야야 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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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야 투레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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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디디에 드록바
(2006~2014)
야야 투레
(2014~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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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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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야 투레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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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야 투레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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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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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000,#ddd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fff> 순서 선수 이름 출전 횟수 첫 경기 마지막 경기
1 디디에 조코라 123회 2000.4.23 2014.6.19
2 콜로 투레 120회 2000.7.2 2015.2.8
3 막스 그라델 110회 2011.6.5 2024.3.23
4 디디에 드록바 105회 2002.9.8 2014.6.24
5 야야 투레 101회 2004.4.28 2015.3.29
6 시아카 티에네 100회 2000.4.9 2015.6.14
}}}}}}}}}}}}}}} ||
المنتخب العربي السعودي لكرة القدم
파일:uJNTUCrPBlLdT0LbPva9wf3zacomLlNcObdQCYrbgJFk8GFkLQZEWOSo5YRzUw0QKPyjs2umhePscH2T0LVFosteEi3KnYzTIGErpaag6GGBtismSEByHj2GDvYNlvq0QD8eV35xcI94vNbi8r65PJHVrYpe3sGy-i07dqrHvk.jpg
<colbgcolor=#006000><colcolor=#ffffff> 이름 야야 투레
Yaya Touré
본명 녜녜리 야야 투레
Gnégnéri Yaya Touré
출생 1983년 5월 13일 ([age(1983-05-13)]세)
코트디부아르 부아케
국적
[[코트디부아르|]][[틀:국기|]][[틀:국기|]]
|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1]
신체 190cm / 체중 90kg
직업 축구 선수 ( 미드필더[2][3] / 은퇴)
축구 코치
주발 오른발
소속 <colbgcolor=#006000><colcolor=#ffffff> 선수 ASEC 미모사 (1996~2001 / 유스)
KSK 베베런 (2001~2003)
FC 메탈루르흐 도네츠크 (2003~2005)
올림피아코스 FC (2005~2006)
AS 모나코 FC (2006~2007)
FC 바르셀로나 (2007~2010)
맨체스터 시티 FC (2010~2018)
올림피아코스 FC (2018)
칭다오 황하이 (2019~2020)
감독 FC 올림피크 도네츠크 (2021 / 수석 코치)
FC 아흐마트 그로즈니 (2021 / 코치)
토트넘 홋스퍼 FC (2022~2023 / U16 코치)
스탕다르 리에주 (2023 / 수석 코치)
사우디아라비아 대표팀 (2023~ / 코치)
국가대표 101경기 19골 ( 코트디부아르 / 2004~2016)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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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000><colcolor=#ffffff> 가족 콜로 투레
동생 이브라힘 투레[4]
종교 이슬람[5]
}}}}}}}}} ||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
6. 사건사고 및 논란7. 여담8. 야야 투레에 대한 언사9.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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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디부아르 국적의 축구 선수 출신 코치. 선수 시절 포지션은 미드필더.

현역 시절 바르셀로나에서 수비형 미드필더 센터백으로 활약하며 2008-09 시즌 트레블[6]에 기여하였고 이후 프리미어 리그로 넘어와 2010년대 중후반까지 맨체스터 시티에서 전성기를 보내며 핵심 자원으로 활약했다.

거구의 피지컬에 걸맞지 않는 유연함, 스피드, 슛, 패스, 드리블, 밸런스를 모두 갖춘 육각형 미드필더로 아프리카 올해의 선수를 4회 연속 수상하는 등 강력한 전성기를 보인 선수이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파일:6015.jpg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야야 투레/클럽 경력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2. 국가대표 경력

파일:150208181027-afcon-final2.jpg

국가대표팀에서도 클럽에서의 활약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폼을 보여주면서 꾸준히 코트디부아르의 중원에 힘을 주며 오랜 기간 뛰었고 곧 센추리 클럽 가입이 머지 않았다.

국대에서 디디에 드록바와 프리킥을 나눠 차고 있는데 2013년에는 7경기 6골에 팀내 최다 골이라는 무시무시한 득점수를 올리고 있다. 결국 은퇴한 드록바에게서 주장직을 넘겨받은 뒤 2015 아프리카 네이션스컵에서 조국 코트디부아르를 31년 만에 아프리카 정상에 등극시켰다.

이후 본인의 국가대표 커리어에도 완벽한 마침표를 찍으며 2016년 9월 20일 자로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2017년 12월 26일 박싱데이 때 에이전트를 통해 국가대표 복귀를 선언했다. 맨시티에서 경기에 나오는 일이 드물다보니 경기 출전 욕심이 생긴 모양이지만 정작 국가대표팀에 호출되자 가족 사정으로 불참했다.

3. 지도자 경력

3.1. FC 올림피크 도네츠크

2021년 1월 22일 선수은퇴와 동시에 우크라이나 키이우의 클럽[7] FC 올림피크 도네츠크의 수석코치로 부임한다고 알렸다.

올림피크는 2020-21 시즌 리그 14팀중 13위를 하며 겨우 잔류에 성공하였다. 이후, 올림피크 도네츠크에서 사임하였다.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FC 아흐마트 그로즈니의 코치진에 합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심지어 무료로 일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3.2. FC 아흐마트 그로즈니

파일:E31tpoIXEAQyLGy.jpg

이후 2021년 6월 14일, FC 아흐마트 그로즈니의 코치로 공식 부임하였다.

보직은 안드레이 탈랄라예프 감독에 의하면 추후에 정해질 예정이다. 그러나 현재 러시아 대사관에 의해 취업비자의 발급이 거부당한 상태이며, 이를 위해 아흐마트 그로즈니가 러시아 외교부와 연락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후, 외교부와 코트디부아르 대사관의 협력으로 취업비자를 받는데 성공하였다.

인터뷰에 의하면, 우크라이나에서 일할 때부터 안드레이 탈랄라예프 감독과의 접촉이 있었고, 그의 축구에 대한 열정과 다른 감독들과는 달리 선수시절에 뛰어났던 선수를 코치로 선임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는 점에 감명을 받아 아흐마트 그로즈니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연고지인 그로즈니가 이슬람교를 주로 믿는 체첸 공화국을 연고로 하고 있는 점도 이점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현재는 구단에서 부상으로 인해 경기력이 떨어진 선수들의 경기력을 올리는 역할과 특정 경기에 맞춰서 몸상태를 맞추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은 돈 때문에 러시아에 온 것이 아니라, 체첸 공화국의 축구를 발전시키기 위해 온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아흐마트 그로즈니에서 받는 모든 급료를 체첸 공화국의 아이들을 위한 재단에 기부할 예정이다.

2021년 12월 13일, 아흐마트를 떠난다고 발표하였다.

최근에는 토트넘 유스 팀에서 UEFA A 라이선스 취득을 위해 연수를 받고 있다가, 2022-23 시즌부터 정식으로 코치직으로 합류한다고 보도가 나왔다. #

3.3. 토트넘 홋스퍼 FC

2022년 7월 26일, 토트넘 홋스퍼 FC 아카데미 코치로 저메인 데포와 함께 정식 합류했다.

3.4. 스탕다르 리에주

2023년 6월 20일, 스탕다르 리에주의 수석 코치로 부임했다. #

3.5. 사우디아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2023년 11월 3일, 스탕다르 리에주를 떠나 사우디아라비아 대표팀의 코치로 부임해 로베르토 만치니와 재회하게 되었다. # 하지만 16강 한국전에서 패하게 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


데뷔 후 바르셀로나 시절까지는 좋은 신체 조건을 바탕으로 수비에 강점이 있는 전형적인 수비형 미드필더로 평가받았고, 때때로 센터백을 겸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바르셀로나에서 경력이 쌓이며 드리블 능력을 비롯한 공격 능력이 조금씩 향상되었고, 이에 따라 스타일도 조금씩 공격적으로 변하더니 맨체스터 시티 이적 후 리그에 적응한 뒤로는 박스 투 박스 중앙 미드필더로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며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약 4년간 전성기를 구가했다.

전성기 때의 야야 투레는 역대 아프리칸 미드필더 중 역대 최고로 꼽을 만한 경기력을 보여주는, 당시 세계 최고를 다투는 선수였으며 다비드 실바, 세르히오 아구에로 등 여러 에이스급 선수가 즐비했던 맨시티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선수라 할만했다. 당시 중앙 미드필더의 교과서라는 찬사를 얻었으며, 실제로 그 기간 동안 그 어떤 선수보다도 완벽한 육각형 툴을 지닌 선수로 멀티 플레이어의 레전드 루드 굴리트와도 비교될 정도의 활약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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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투레의 파괴력의 첫번째를 차지한 요소는 우월한 신체조건이다. 노쇠화로 전반적인 신체능력이 급락해 말년병장 소리를 들을 때도 웬만한 선수를 상대로도 피지컬 대결로는 밀리지 않는 거구를 자랑했다.[8] 하지만 거칠기로 유명한 프리미어 리그에서 투레에 밀리지 않거나 오히려 더 큰 거구들은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으나, 그럼에도 투레가 신체적인 부분에서 충격적인 임팩트를 남길 수 있었던 건 두 가지 요인이 더 있다.

첫번째는 볼을 차는 테크닉이 최고 수준에 이르렀던 것이고, 두 번째는 뛰어난 신체능력에 더해진 엄청난 유연성이었다. 따라서 여러 명의 떡대 수비수들이 좁은 공간에서 달라붙었을 때에도 투레는 저 모든 장점을 십분 이용해 수비를 벗겨내고 공격을 이어갈 수 있었으며, 속공과 지공상황을 가리지 않고 수차례 상대방을 제끼며 전방으로 돌진할 수 있었고, 전방에서 수비를 등지고 돌아설 수도 있었으며, 패스를 할 공간을 확보하고 시간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자신에게 수비를 집중시켜 공격 옵션을 늘릴 수도 있었다.

이에 더해 훌륭한 신체능력의 덕으로 전성기 때는 스피드도 아주 빨랐으며, 훌륭한 테크닉에 걸맞게 드리블 스킬도 뛰어났다. 몸싸움이 강한 거구의 미드필더가 발도 빠르고 드리블 테크닉까지 좋으니 전성기 투레의 드리블은 말 그대로 탱크 한 대가 전진하는 것과 같았고, 덕분에 투레의 드리블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전술로 작용해 레알이나 첼시와 같은 최상위권 팀들의 우수한 수비진들도 투레를 막는데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2012년 챔스에서 레알 마드리드 수비를 순식간에 도륙낸 드리블과 같은 장면이 대표적인 예시. 이렇게 뛰어난 신체조건, 우월한 신체능력과 빠른 스피드, 거기에 유연성이 더해지고 당시에는 체력도 나쁘지 않아 신체적인 부분에서는 완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줬고, 여기에 테크닉이 더해지며 투레는 공격적인 부분에서 상당히 활약할 수 있었고, 덕분에 만치니 감독의 후반 투레 전방 푸시와 같은 공격전술도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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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까지는 득점력이 아주 특출난 수준은 아니었으나, 득점에 필요한 모든 툴은 이미 이때부터 갖추고 있었으며, 특히 2011년 FA컵 결승이나 2012년 시즌 런인 뉴캐슬전에서 결승골을 넣는 등 클러치 능력이 뛰어났다. 수비를 서서히 버리기 시작하면서 공격 포텐이 온전히 터진 2013-14 시즌에는 미드필더로서 리그에서 무려 20골을 넣을 정도의 득점력을 보이며 정점을 찍었다. 드리블 돌파의 마무리로 보여주는 골 결정력도 준수했고, 여기에 엄청난 발목 힘에서 나오는 강력한 오른발 슈팅 능력 덕분에 감아 차는 슈팅이나 발등에 얹은 강슛 모두 상대를 효과적으로 위협했다.

이러한 킥 능력을 바탕으로 페널티킥과 오른발 프리킥을 전담했고, 특유의 가볍게 툭 차는듯한 폼으로 강슛을 꽂아대며 많은 골을 만들어냈다. 킥력 자체는 오래 전부터 투레의 장점이었고 쭉쭉 뻗어나가는 중거리를 어디에서나 날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나 이 때 그 능력이 가장 농익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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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메이킹을 하는 미드필더로서 필수적인 능력인 패싱력도 뛰어났다. 한솥밥을 먹었던 사비 에르난데스, 다비드 실바, 케빈 더 브라위너 등 월드클래스 패스 마스터들의 임팩트가 워낙 강력해 다소 주목받지 못하는 감도 있으나, 피지컬의 이점을 이용해 얻어낸 넓은 시야폭을 활용해서 전방으로 길게 날려주는 롱패스, 점유율을 유지하고 팀을 앞으로 이끌어내는 숏패스, 실바와 함께 템포를 조율하며 플레이 방향을 바꾸는 패스 등 상황에 따른 모든 패스를 적절하게 뿌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전성기가 한참 지나 거의 모든 장점을 잃어버린 2015년 이후에도 패스에서만큼은 리그 최상급의 스탯을 찍었으며, 아무리 페르난지뉴가 2015-16 시즌의 퍼포먼스로 칭찬받았다 해도 투레의 패스, 그리고 빌드업과는 클래스 차이가 많이 있어 투레가 뛰지 않을 때는 중앙에서부터 치고 올라가는 빌드업을 쉽게 하지 못했다.[9]

다만 투레도 인간인 만큼 전성기에도 단점이 없는 선수는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꼽는 약점은 떨어지는 수비 가담, 그리고 볼 처리 속도 정도. 수비 가담은 맨시티 이적 후 꾸준히 줄어들었고 수비 복귀 속도도 그닥 빠르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팀 수비 밸런스가 투레의 중원 파트너나 중앙 수비수에게 쏠리는 결과를 가져다줬다.

그나마 12-13 시즌까지는 괜찮은 정도였으나 13-14 시즌에는 수비를 거의 손 놓은 수준. 또한 자신의 드리블 능력을 과신하고 볼을 소유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아무래도 상대의 압박이 강해질수록 볼을 키핑하다가 템포를 잡아먹고 전방으로 제대로 연결하지 못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나왔다. 특히 역습시에 전방으로 빠르게 볼을 전개할 타이밍에 드리블로 공을 끌다가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도 꽤 나왔다.

이러한 단점들로 인해 발생하는 부가적인 단점이 큰 경기에서의 활약이 비교적 미진하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12-13 시즌 조별리그 레알전을 제외하면 전성기 시절에도 빅클럽과의 대결에서는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는 상대 팀의 수준이 비교적 높아 수비 압박이 촘촘하고 공격력이 좋다는 점에서 기인하는데, 수비 압박이 촘촘하니까 투레가 드리블로 볼을 끌다가 뺏겨 턴오버를 만들거나, 역습 상황에서 템포를 놓치고 기회를 날리는 경우가 적지않았다.[10]

하지만 그럼에도 투레는 이를 제외한 수많은 장점을 가진 선수였고, 이를 통해 가질 수 있던 수많은 선택지를 이용해 리그에서 거의 모든 수비수들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었으며, 약점이라는 수비나 활동량도 12-13 시즌까지는 그래도 기본은 했으므로 단점 없는 육각형 미드필더로서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13-14 시즌부터 나이가 들며 투레의 속도와 체력에는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이 시즌까지는 폼이 좋은 페르난지뉴와 역시 폼이 좋았던 뱅상 콤파니가 뒤를 봐줄 수 있어 수비에 능하지 않은 2선 미드필더들을 껴넣은 투톱 투미들이라는 위험한 전술에도 단점이 나타나는 것을 최소화하고 공격 면에서의 장점을 한없이 뽐낼 수 있었으나, 2014-15 시즌부터는 투레의 노쇠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며 더 이상 이러한 전술을 가동할 수 없었다.[11]

안 그래도 하락세를 타던 수비력이 가장 먼저 바닥났으며, 주력의 하락으로 탱크같은 드리블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신체능력의 하락으로 완벽한 피지컬에 균열이 가면서 상대의 압박에 대처하기 더 힘들어졌고 자연스레 2선에서의 공간 창출 능력도 떨어졌다. 이러다보니 전방에서 득점 기회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뻘 중거리슛만을 계속 날리기 시작했고, 절대적인 킥력도 심하지는 않지만 천천히 하향세를 탔다. 거기에 체력이 점점 더 떨어지면서 웬만한 공격수보다도 수비가담을 안 하기 시작했고, 이 모든 요인들이 페예그리니 감독의 대책없는 전술과 더해져 역효과를 일으켜 페르난지뉴의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모든 경기에서 전방위적으로 엄청난 공간을 상대에게 내주게 되었다. 결국 2015년부터는 출전할 때마다 팀에 커다란 부담을 안기는 계륵이자 짐덩이가 되고 말았다. 전성기 때 팀에서 갖던 비중이 컸던 만큼, 기량이 하락하자 그 피해 또한 엄청났다.[12]

16-17 시즌 야야가 펩에게 사과하고 복귀한 다음에는 전성기와는 다른 방법으로 활약하고 있다. 야야는 강제 휴식을 취한 후 매우 좋은 몸상태로 복귀했는데, 전성기에 보여주던 2선에서의 파괴력은 없지만 여전히 패스 센스와 축구지능은 살아있고 킥력의 하향세도 비교적 덜하기 때문에 수비형 미드필더로 자리를 바꿔 볼 배급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펩의 지시를 잘 따라 팀 단위 압박과 수비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으며, 아무리 신체능력이 하락했다 해도 특유의 거구에서 나오는 몸싸움 능력은 건재한 만큼 이를 수비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중. 한 때 볼 탈취 횟수가 몇 경기 연속으로 출전 선수들 중 1위를 차지할 만큼 매우 늘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는 어쩔 수 없는지 17-18 시즌에 들어서는 신체능력이 더욱 하락해 병장모드로 롤백되었다. 아무래도 16-17 시즌이 마지막 불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 아프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2011, 2012, 2013, 2014
  • CAF 올해의 팀: 2008, 2009, 2011, 2012, 2013, 2014, 2015
  • PFA 올해의 팀: 2011-12, 2013-14
  • 코트디부아르 올해의 축구 선수: 2009
  • FA 커뮤니티 실드 MOTM: 2012
  •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토너먼트의 팀: 2008, 2012, 2015
  • ESM 올해의 팀: 2013-14
  • BBC 아프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2013, 2015
  • 맨체스터 시티 올해의 선수: 2013-14
  • 프레메오 불가렐리 넘버 8: 2013
  • IFFHS 올타임 아프리카 드림팀: 2021
  • IFFHS 10년의 CAF팀 (2011–2020)
  • IFFHS 올타임 코트디부아르 드림팀: 2021
  • FWA 공로상: 2023

6. 사건사고 및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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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담

  • 형제들도 프로 축구선수였다. 형인 콜로 투레는 아스날 무패우승 시절을 이끈 주역이고, 동생 이브라힘 투레는 자신이 뛰었던 ASEC 미모사에서 뛰다 2014년 6월 19일 28살의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야야 투레는 동생의 사망 이후 이러한 논란을 만들었다.
  • 디디에 드록바와는 파벌이 있어서 둘의 사이는 미적지근 했었지만, 디디에가 콜로 투레의 약물 스캔들 사건에서 콜로를 옹호해주면서 지금은 관계가 많이 원만해졌다고 한다.
  • 독실한 무슬림으로, 라마단을 꼭 지키고 도 일체 마시지 않는다고 한다. 때문에 야야 투레가 금식하는 날에 경기가 있으면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게 금방 확 눈에 띈다. 하지만 이 문단의 서술이 무색하게도 음주운전에 걸려 벌금을 낸 경력이 있다. 텔레그래프 기사
  • 바르셀로나 시절엔 24번을 달았고, 맨체스터 시티 이적 후에는 42번을 달고 있는데, 24번과 42번이라는 다소 생소한 등번호를 달고 있는 이유는 입단 시에 아내가 그 번호를 골라준 것이라고.
  • NBA 농구선수 제임스 하든의 수염 민 모습이 야야 투레와 판박이 수준으로 닮았다.
  • 팀 내의 어린 선수들인 라힘 스털링 리로이 자네가 투레를 야야 삼촌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공식 인터뷰에서 스털링은 아예 대놓고 삼촌이라고 칭할정도. 사네의 인터뷰에 따르면 스털링이 야야를 약올리기 위해 먼저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는데 현재 야야 본인은 해탈했다. 실제로 구단 영상에서 나온 투레를 보면 정말 조카들과 노는 삼촌같긴하다.
  • 맨시티가 챔피언스리그에서 부진한 것이 투레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으나, 사실 투레가 주전을 먹던 기간에는 딱히 그렇지는 않다. 일단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1-12시즌부터 13-14시즌까지는 좋은 활약을 보여줬고 그 이후에도 페르난지뉴 정도를 제외하면 중앙 미드필더에서 특출나게 좋은 폼을 보여준 선수도 없기 때문. 팀의 발목을 잡았다고 하기에는 잘 했거나, 애초에 경기를 안 나왔거나 둘 중 하나이다.
  • 탱크같던 플레이와 거대한 체구와는 달리 목소리는 굉장히 여리여리하고 소년같다.
  • 2018년 6월, 퇴단 직후의 펩에 대한 인터뷰로 인하여 현지와 국내 시티 팬들 사이에서 평판이 깎였다. 여전히 투레를 옹호하는 측의 주장은 문제의 인터뷰가 펩에 대한 비난이지 맨시티 구단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는 것이나 위에 서술된 생일 사건, 동생 사건, 2016년 4월 치키 베히리스타인 풋볼 디렉터를 비난한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충분히 구단에 대해서도 존중을 보여준 적이 없다고도 생각할 여지가 있다. 논란이 된 인터뷰에서도 맨시티가 열어준 송별회가 기쁘지 않았다는 등 불과 한달전에 투레에게 성대한 송별회를 연 구단을 모욕했다.
  • 퇴단 후 펩 감독을 향한 근거없는 비난과 악담을 퍼부은지 3년이 지난 후에 본인의 실수를 바로잡고 싶다고 언론에 공개했으나 맨시티 구단으로부터 무시당했고, 투레는 여전히 구단이 주최하는 공식 행사에는 초대받지 못하고 있다.[15] 이는 투레와 갈등이 있었던 치키 베히리스타인 풋볼 디렉터,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모두 구단을 떠나기 전까진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 그럼에도 팬들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던 선수임은 분명하다. 2021년 8월, 세르히오 아구에로 다비드 실바, 뱅상 콤파니의 동상이 에티하드 스타디움에 세워진 이후 야야도 동상을 세워줄 만한 레전드인가에 대한 팬들 간의 논의가 활발했었다. 과연 이 셋처럼 팀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구단을 사랑하고 오랜 기간 헌신한 선수들과 야야가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있는지가 핵심. 이 셋처럼 비교적 오래, 꾸준한 폼을 보여주며 뛰지 않았고 몇몇 심각한 스캔들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리스펙을 받는 것을 보면 본인 스스로의 행동으로 이름에 먹칠한 것이 너무나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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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안정환, 김성주가 출연하여 축구해설시의 애로사항을 이야기하였는데 그 와중에 이름을 말하기 껄끄러운 축구선수들이 많다며 그 명단을 공개할 때 나왔다.
  •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엄청난 피지컬과 육각형의 능력치로 국내 피파 온라인 시리즈에서 많은 사랑을 받는 선수다. 피파 온라인 4에서는 서비스 이후 5년 동안 시즌이 하나밖에 없어 이 점을 아쉬워하는 축구팬들이 많았지만, 2022년 12월 8일 두 개의 시즌이 추가되어 이제 투레를 피파 4에서도 볼 수 있게 됐다.
  • FIFA 시리즈에서도 FUT 히어로 등급 카드로 상당한 인기를 자랑하는데, 역시나 육각형의 능력치로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와 함께 육각형 미드필더로 거의 최고등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23에서 출시된 월드컵 히어로 버전 카드는 CAM 포지션까지 장착하여 박투박, 공미, 수미까지 폭넓게 활약이 가능하다. 월드컵 버전은 가격도 매우 비싸며 좀처럼 가격이 내려가질 않는다.
  • 2016년 5월 7일 인터뷰를 통해 처음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할 당시, 푸른 유니폼을 보기 전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하게 되는 건 줄 알았다는 이적 비화를 밝혔다. 물론 농담.

8. 야야 투레에 대한 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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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야가 없는 경기에서는 모두가 그를 그리워할 것이다. 그는 90분 내내 그의 능력을 발휘하며, 모든 동료 선수들의 신뢰를 받는 선수다. 그는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마누엘 펠레그리니
투레는 정말 최고다. 그는 그 자신이 원할 때 경기를 바꿀 수 있는 선수다.
티에리 앙리
내가 중원에서 마주한 가장 힘든 상대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경기를 바꿀 수 있는 선수다.
프랭크 램파드
난 그 동안 팀에 또 다른 야야 투레를 찾아 봤지만 야야 투레에 버금가는 선수는 없었다. 그는 팀에 매우 중요한 선수다.
야야 투레는 모든 것을 갖춘 환상적인 선수다. 강하고, 빠르고, 기술적이며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다. 그는 나에게 마치 루드 굴리트 같다.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유럽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하나다.
로베르토 만치니
투레는 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최고의 미드필더이다. 그가 볼을 가졌을 때는 정말 강력하며 뭐든지 할 수 있다. 골도 넣고 수비도 하고 공격도 한다. 그가 아프리카 출신이 아니었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를 전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라고 말할 것이다. 만약 투레가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출신이었다면 몸값이 4~5,000만 파운드에 이를 것이다.[16]
사미르 나스리[17]
투레는 중앙 미드필더지만, 20골이나 넣었다. 완성된 선수이며 세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파블로 사발레타
나에게 투레는 여전히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이다. 투레가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맨시티 선수들은 투레가 최고라는 것을 매일 느낀다. 그는 여전히 팀에 많은 기여를 한다. 나는 그와 함께 뛸 수 있어서 행복하다.
페르난두 헤제스
투레는 프리미어 리그 최고의 선수다. 그는 공격적으로나 수비적으로 모두 플레이가 가능한 완벽한 미드필더이다.
요안 카바예

9. 관련 문서


[1] 2018년 8월 잉글랜드 시민권을 취득했다. 출처 [2]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3] 바르셀로나 시절에는 수비형 미드필더와 센터백으로 뛰었고 맨체스터 시티 이적 후에는 중앙 미드필더로 뛰었다. [4] 현지 시간으로 2014년 6월 19일 으로 인해 28살에 사망했다. [5] 무슬림 전통복을 입은 야야 투레와 콜로 투레의 사진 [6] 2008-09 시즌 6관왕 [7] 돈바스 전쟁으로 키이우를 임시 연고지로 삼고 있다. [8] 단 전성기 시절에도 공중볼은 키에 비해선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9] 이러한 한계점은 펩 과르디올라 부임 이후 페르난지뉴의 발밑 패스 능력 자체가 향상되고 더 브라위너와 실바를 3선 미드필더로 기용하면서 해소되었다. [10] 이 문제는 펠레그리니 체제 하에서는 2015-16 시즌 케빈 더브라위너의 영입 후 KDB를 중심으로 역습 전술을 펼치면서 해소되었고, 맨시티는 이를 바탕으로 사상 첫 챔스 4강에도 오를 수 있었다. 펩 부임 이후로는 역습보다는 강팀 상대로도 볼 점유를 통해 맨시티의 축구를 만들어나가는 방식으로 경기를 풀어가는 중이다. [11] 이에 더해 2014-15 시즌에는 투레를 받쳐줄 다른 선수들의 퍼포먼스가 아쉬웠던 점도 한 몫 했다. 페르난지뉴는 월드컵 후유증으로 지난 시즌에 비해 부진했고, 새로 영입한 페르난두 헤지스는 빅 클럽 수준에는 못미치는 경기력을 보여줬다. 뱅상 콤파니는 한동안 건재했으나 파트너 센터백인 엘리아킴 망갈라 마르틴 데미첼리스의 삽질을 커버하기 바빴고, 여기에 부상을 한번 당한 이후로는 콤파니 본인의 폼도 추락하며 수비가 안됐다. [12] 축구에서 피지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전성기 때도 수비가담이 좋은 선수가 아니었는데 피지컬이 하락하면서 힘들어지니 아예 수비 복귀를 안하게 되고 드리블이나 패스도 몸이 안 따라주니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공격시 좋은 위치로 이동이 불가능해지고 애매한 위치에서 중거리슛을 차지만 상술했던 피지컬 하락으로 정확도와 강도도 떨어지게 된다. 그래도 기본적인 피지컬에서 오는 경합 능력도 점차 노쇠화가 진행되며 떨어지니까 완벽했던 육각형이 작은 육각형이 되어버린 것. [13] 원곡은 1993년의 유로댄스 곡인 투 언리미티드 No Limit이다. [14]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제라드다. 자세히 보면 헨더슨, 루카스도 보인다. [15] 다른 맨시티 우승 멤버들이 골고루 구단 행사에 등장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16] 한화로 약 714억~893억 원이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이적료 인플레이션이 엄청 심한 수준은 아니어서 저 정도면 월드클래스 선수를 영입하고도 남는 돈이었다. [17] 나스리는 시티에서 뛰던 기간 동안 대체로 투레와 가장 가까운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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