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6:29:47

압하지야 전쟁

압하지야 전쟁
აფხაზეთის ომი
Аԥсны Аџьынџьтәылатә еибашьра
Война в Абхазии
War in Abkhazia
조지아 내전의 일부
기간
1992년 8월 14일~ 1993년 9월 27일
장소
조지아 압하지야
원인
압하지야의 분리독립 시도
교전국 및 교전 세력
[[틀:깃발|]][[틀:깃발|]][[조지아|]] [[틀:깃발|]][[틀:깃발|]][[압하지야|]]
파일:캅카스 산악 민족 연합 깃발.png 캅카스 산악민족연합
[[틀:깃발|]][[틀:깃발|]][[러시아|]]
지휘관
파일:조지아 국기(1990-2004).svg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파일:조지아 국기(1990-2004).svg 텡기즈 키토바니
파일:조지아 국기(1990-2004).svg 텡기즈 시구아
파일:조지아 국기(1990-2004).svg 자바 이오셀리아니
파일:조지아 국기(1990-2004).svg 기오르기 카르카라시빌리
파일:조지아 국기(1990-2004).svg 게노 아다미아
파일:조지아 국기(1990-2004).svg 다비드 테브자제
파일:조지아 국기(1990-2004).svg 구자르 쿠라시빌리
파일:조지아 국기(1990-2004).svg 로티 코발리아
파일:조지아 국기(1990-2004).svg 지울리 샤르타바
파일:UNA-UNSO 깃발.svg 발레리 보브로비치
파일:압하지야 국기.svg 블라디슬라프 아르진바
파일:압하지야 국기.svg 블라디슬라프 아르시바
파일:압하지야 국기.svg 세르게이 드바르
파일:압하지야 국기.svg 무시니 흐바르츠키야
파일:압하지야 국기.svg 바가르샥 코샨
파일:압하지야 국기.svg 세르게이 마토샨
파일:캅카스 산악 민족 연합 깃발.png 아슬람벡 압둘하지예프
파일:캅카스 산악 민족 연합 깃발.png 술탄 소스날리예프
파일:캅카스 산악 민족 연합 깃발.png 샤밀 바사예프
파일:캅카스 산악 민족 연합 깃발.png 루슬란 겔라예프
파일:캅카스 산악 민족 연합 깃발.png 투르팔알리 아트게리예프
병력
5,150~12,150명[1] 9,260~11,090명[2]
결과
압하지야의 승리
영향
압하지야의 사실상 독립
압하지야의 초토화
조지아 난민 20만~25만 명 발생
조지아 내전의 심화
피해규모
군인 및 민간인 4,000~9,000명 사망
군인 및 민간인 10,000명 부상
군인 및 민간인 1,000~1,500명 실종[3]
군인 1,680~2,220명 전사
군인 7,000~8,000명 부상
군인 122명 실종
민간인 1,820명 사망
1. 개요2. 배경3. 전쟁
3.1. 조지아군의 공세3.2. 압하지야 반군의 반격3.3. 전쟁의 절정, 수후미 공방전3.4. 전쟁범죄
4. 영향5. 기타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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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아 압하지야 분리주의 세력 사이에서 1992년 8월부터 1993년 9월까지 일어난 전쟁으로, 조지아 내전의 일부다. 압하지야에서는 이 전쟁을 특별히 압하지야 조국전쟁(압하스어: Аԥсны Аџьынџьтәылатә еибашьра; 러시아어: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в Абхазии)이라고 부르며, 그 밖의 언어권에서는 중립 입장에서 압하지야 전쟁(War in Abkhazia, Война в Абхазии)으로 부른다.

2. 배경

파일:압하지야_지도.png
압하지야 전도
러시아 제국 시절 압하지야 지역은 캅카스 부왕령에 속한 수후미 특별구(Сухумский округ)의 일부였다. 1917년 러시아 제국이 붕괴된 지 1년여 뒤인 1918년 6월 압하지야는 단명한 독립 조지아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았으나 조지아 중앙정부와 압하지야 자치정부 간의 갈등은 1921년 소비에트-조지아 전쟁으로 조지아가 멸망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조지아가 멸망한 후 압하지야에는 그루지야 SSR과 별개인 SSR 압하지야가 수립되었으나[4] 1931년 스탈린의 조치로 그루지야 SSR의 자치 공화국인 압하스 ASSR로 격하되었다.[5] 하지만 10년이나마 조지아와 분리된 독자적인 공화국을 운영해본 기억은 압하스인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고 이후 조지아로부터의 분리를 추진하는 원동력이 된다.

1936년 12월 말 압하스 ASSR 중앙집행위원장이자 당대 압하지야의 실권자였던 네스토르 라코바[6] 라브렌티 베리야에게 독살당했고, 그의 죽음을 시작으로 살벌한 숙청이 벌어진다. 스탈린과 니콜라이 예조프가 주도한 대숙청으로 1937년 7월부터 1938년 10월까지 압하지야에서 최소 2,186명이 탄압을 당했으며 그 중 754명이 총살되고 377명이 감옥에서 실종되었다. 이런 대규모 탄압은 특히 압하지야의 토착 엘리트를 거의 절멸시켰다. 1937년 5월 제15차 압하지야 당대회에서 선출된 그루지야 공산당 압하지야 지역위원회 위원 51명 중 39명이 처형되었고, 1936년 압하지야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120명 중 78명이 탄압을 당했다. 1937년 10월부터 11월까지 수후미에서 열린 공개재판에서는 잘 알려진 지역인사 13명이 전원 사형 판결을 받았다. # 제1민족이었던 압하스인 엘리트의 절멸에 이어 1949년에는 제5민족이었던 흑해 그리스인(1939년 당시 압하스 ASSR 주민의 11.1%)이 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의 오지로 대거 추방되었다.

그 결과 압하스 ASSR의 "조지아화"가 일어난다. 조지아인은 스탈린의 의도치 않은 고향 사랑의 최대 수혜자로서 압하스 ASSR로 대거 이주하여 기존 토착민들의 빈자리를 채웠다. 따라서 1989년이 되면 압하스 ASSR은 명색이 압하스인의 자치구역인데도 불구하고 조지아인이 제1민족(45.7%)이 되고 압하스인은 17.8%로 오히려 소수민족으로 전락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7] 조지아화의 결과로 압하스인과 조지아인의 분쟁은 점점 심각해져갔다. 조지아 본토는 야권을 중심으로 반소 독립운동이 벌어지는데 반해 압하스 ASSR에서는 압하스인을 중심으로 오히려 친소 성향이 강해지면서 조지아와 자신들이 별개의 공화국으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지게 된다. 1957년, 1967년, 1978년, 1989년에 압하스인 지식인들은 수차례 소련 중앙정부에 독자적인 압하스 SSR을 재건하거나 또는 중앙정부가 아예 압하스 SSR을 "직할통치"해줄 것을 청원했다. 조지아인과 압하스인의 분쟁은 18명의 사망자와 448명의 부상자를 낳은 1989년 7월 수후미 폭동으로 극단에 치달았다.

1991년 12월 소련 붕괴와 함께 조지아는 반체제 인사인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가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다시 독립국이 되었다. 하지만 조지아는 독립과 함께 극심한 정쟁을 겪었다. 감사후르디아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했고 오히려 1991년 12월 말 반정부 세력이 일으킨 쿠데타로 이듬해 1월 초에 내쫓겼다. 때문에 조지아 정부는 압하스 ASSR의 민족분포 상황이 자기에게 유리한데도 불구하고[8] 압하지야 분리주의자들을 제어하는데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압하스 ASSR은 1992년 7월 23일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 대응으로 조지아는 7월 25일 압하지야에 부여되었던 자치권을 일방적으로 회수했으며 8월 10일 질서 회복을 위해 압하지야와 밍그렐리아[9]로 군대를 진주시켰다. 이 군대는 경찰과 조지아 방위군(National Guard of Georgia)뿐만 아니라 일부 죄수들도 석방 조건으로 입대시켜 구성한 군대였다. 12일 밍그렐리아에 입성한 조지아군은 계속 북서쪽으로 전진하여 이틀 후 압하지야와 조지아 통제지의 경계선을 넘었다. 이에 압하스 분리주의자들이 조지아군 행렬에 총격을 가했고 이로써 압하지야의 독립전쟁/무장반란이 시작되었다.

3. 전쟁

3.1. 조지아군의 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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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압하지야전쟁제1도.svg.png
전쟁 초 수후미를 접수한 조지아군 1992년 8월~1992년 9월 압하지야 전쟁의 전개
최소 2천에서 최대 5천명에 달하는 조지아군의 압하지야 진공 직후, 압하지야 최고소비에트 의장이자 분리주의 지도자 블라디슬라프 아르진바는 텔레비전 연설로 조지아군이 압하지야를 점령했으며 압하지야의 주권을 침해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아르진바는 대(對)조지아 전쟁을 선포하고 러시아와 북캅카스의 캅카스 산악민족연합(КГНК)에 원조를 요청했다.[10] 이에 대해 조지아 국무원장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11]는 자기 영토를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모든 나라는 자기 영토에서 군대를 움직일 권리가 있고 또 선제 발포한 것은 압하지야 측이었다고 일축했다.

개전 당시 조지아군은 막장이었지만 압하지야 반군은 그보다 더한 막장이어서 병력은 압하지야 방위군(Abkhaz National Guard)[12] 소속 1,000명에 중화기는 장갑차 3대에 불과했다. 당연히 조지아군은 전광석화로 진격했고 압하지야 내로 진공한지 하루만에 수후미 인근까지 진격했다. 15일 다른 조지아군 1천명이 압하지야 북서해안 가그라(Гагра)에 상륙하여 압하지야와 러시아 사이의 통로를 차단했다. 압하지야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한 조지아는 협상장에서 압하지야 대표에게 아르진바의 분리주의 성향을 이유로 그의 퇴진을 요구했고 압하지야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18일 조지아군은 수후미 시내에 입성하여 재빠르게 압하지야 반군을 격파했다. 조지아군은 전차 APC를 보유한 반면에 압하지야 반군은 대전차무기는커녕 바리케이드에서 기관총이나 화염병으로 저항하는 형편이라서 조지아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날 조지아군은 압하지야 의회와 장관회의 건물을 점령하고 장관회의 건물에 조지아 국기를 게양했다.

수후미의 시가전에서 패배한 압하지야 반군은 구미스타 강[13] 너머로 퇴각하고 에셰라에 재집결했다. 이곳은 압하지야 전쟁의 "서부전선"을 형성하게 된다. "동부전선"은 남동해안 오참치라(Очамчира) 인근에서 형성되었는데 오참치라 자체는 조지아인 다수지였으나 압하지야 반군은 오참치라에서 북동쪽으로 25km 떨어진 광산도시 트크바르첼리(Ткварчели)와 인근의 압하스인 마을들을 통제하고 있었다. 한편 아르진바 자신은 북서쪽 구다우타(Гудаута)로 피신하여 18세부터 49세까지 모든 압하스인 남성의 동원을 선포했다. 훗날 이곳은 압하지야 반군의 작전을 조율하는 사령부가 된다.

하지만 전선을 형성한 것과는 별개로 압하지야 반군은 조지아군의 공세에 압도적인 수세에 몰린 상태였다. "동부전선"의 압하지야 반군은 말이 전선이지 실상은 조지아군에게 포위된 사면초가의 상태였고, "서부전선"의 압하지야 반군도 수후미와 가그라 양쪽의 조지아군에게 샌드위치 당하고 있었다. 셰바르드나제는 텔레비전 연설에서 자신만만하게 "이제 조지아 정부가 공화국의 영토를 전부 회복했음을 선언한다"고 말했다. 그 와중에 조지아군은 수후미를 포함한 압하지야 지역 도시와 마을에선 비조지아계 주민을 표적으로 살인과 폭행, 약탈을 자행하여 현지인의 여론을 악화시켰다. 사실 압하지야와 조지아 모두 동원한 병력의 수준은 개판 5분전이 따로 없었고 조지아군, 압하지야 반군, 캅카스 의용군 모두 현지 주민을 대상으로 조지아인이든 비조지아인이든 상관하지 않고 갖가지 인권유린을 일삼았다. 다만 비조지아인 주민들에게 반군과 캅카스 의용군은 우리 개새끼고, 조지아군은 우리 개새끼가 아닌 놈들인지라 조지아군의 인권유린이 더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1992년 9월 3일 모스크바에서 양측의 합의하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일시적으로 평화가 찾아왔다. 협정에 따라 조지아는 압하지야 대부분에 대한 통치권을 인정받고 그 댓가로 가그라 지역의 조지아군을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실제로 가그라에서 우선 조지아군 1,200명과 중화기 대부분이 철수하고 제13 "샤브나바다" 보병대대 소속 수백명만이 남았다. 이로써 가그라는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3.2. 압하지야 반군의 반격

압하지야측은 이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우선 러시아로부터 T-72 전차, BM-21 다연장로켓을 포함한 각종 중화기들과 심지어 Su-25 전폭기 및 Mi-24 헬리콥터까지 지원받았다. 거기에 캅카스 산악민족연합, 카자크 의용군, 아르메니아인 의용군[14]들까지 주축이 되어 반군에 합세했다. 1992년 9월까지 캅카스 산악민족연합 병력 1,500명이 러시아-조지아 국경을 넘어 압하지야로 이동했다.[15] 지리멸렬한 압하지야 반군과 달리 이들 의용병들은 최신 T-72 등 각종 중화기로 단단히 무장한데다 전문적인 훈련도 받아서 이후 가그라와 수후미 방면 공세의 주력을 담당했다.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압하지야에 대한 조지아의 영토주권을 인정했지만 현지 러시아 주둔군의 분위기는 달라서 압하지야의 대의에 공감하는 장병들이 훨씬 많았고 캅카스 산악민족연합 병력의 합류를 묵인하거나 심지어 반군에게 물자를 공급하거나 아예 같은 편으로 참전하기도 했다.[16] 여기에 전 대통령 감사후르디아를 지지하는 조지아 내 친감사후르디아 반군이 조지아군의 후방을 습격하는 트롤링을 자행하여 병력과 물자 보급을 방해했다.
파일:압하지야전쟁제2도.svg.png
1992년 10월~1993년 7월 압하지야 전쟁의 전개
압하지야 반군과 캅카스 의용군은 우선 대부분의 병력이 철수하여 조지아군 수백명만 남아있는 가그라를 공격하기로 했다. 먼저 압하지야는 가그라의 조지아군이 철수한다는 합의 사항이 충실히 이행되지 않았다고 항의했다. 곧이어 샤밀 바사예프가 지휘하는 반군과 의용군 3천~4천명이 10월 1일 가그라를 기습했다. 이들은 전차와 로켓포를 보유하고 전폭기와 헬리콥터의 지원도 받고 있었다. 가그라를 수비하던 "샤브나바다" 보병대대의 병사들은 전쟁이 사실상 끝났다고 생각하여 마음을 놓고 있었으므로 기습을 당하자 거의 모든 장갑차량을 상실하고 도시의 서부에 몰렸다. 이날 조지아군은 포병의 화력지원을 받아 위기를 넘겼지만 다음날 반군과 의용군은 증원을 받고 추가로 공세를 벌여 6일 가그라를 완전히 점령했다. 서방측 소스에 따르면 조지아군은 100명이 전사했고, 러시아측 소스에 따르면 300명이 전사했다. #

가그라 전투 승리의 결과 압하지야측 후방의 압력이 해소되었고 조지아 국경지대의 요지들도 압하지야 쪽으로 넘어갔다. 조지아군 패잔병과 난민들은 러시아 국경을 넘어 목숨을 구했다. 가그라 전투는 대규모로 벌어진 최초의 전투였다. 8월 수후미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는 대개 소규모 교전에 그쳤고 사망자도 100명 정도였으며 9월은 휴전으로 소강 상태였기 때문이다. 반군은 기세를 몰아 가그라에서 구미스타 강까지 진격하며 조지아군을 몰아냈고 12월에 이르면 수후미를 포격할 정도로 조지아군을 수세에 몰아넣었다. 동부전선에서도 반군은 10월 오참치라를 2번 공격했고, 11월 29일 트크바르첼리 인근 조지아인 마을 코차라도 점령하여 조지아인을 인종청소했다. 조지아 국회는 이듬해 2월 러시아가 조지아 영토에 침략을 감행했다고 비난하며 압하지야 영내에서 모든 러시아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셰바르드나제 또한 "다른 나라에서 온 다양한 군부대가 구타우타와 구미스타 지역에 집결했다"며 사실상 러시아를 겨냥하는 발언을 했다.

3.3. 전쟁의 절정, 수후미 공방전

파일:압하스군.jpg
조지아군이 장악한 수후미를 공격하는 압하지야 반군[17]
3월 16일 새벽 압하지야 반군과 캅카스 의용군은 구미스타 강과 수후미의 조지아군 진지에 대한 사전 포격을 시작으로, 러시아군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수후미에 대한 총공세에 돌입했다. 반군과 의용군은 구미스타 강을 도하하여 아차다라(Ачадара) 일부를 점령했지만 조지아군의 방어에 막혔다. 반군과 의용군은 19일까지 공세를 벌였지만 결국 작전은 실패했고 압하지야측 소스에 따르면 222명 전사 및 23명 실종, 조지아측 소스에 따르면 600명이 전사하는 엄청난 피해를 냈다. 조지아군도 조지아측 소스에 따르면 최소 100명이 전사했다. # 5월 14일 또다른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오래가지 않아 이 또한 파기되었다. 반군은 7월 초 수후미에 대한 재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파일:압하지야전쟁제3도.png
파일:압하지야전쟁제4도.svg.png
1993년 8월~1993년 10월 압하지야 전쟁의 전개 1993년 11월~1993년 12월 압하지야 전쟁의 전개
반군은 지난 3월 수후미 공세의 실패를 교훈삼아 이번에는 수후미에 대한 공격 경로를 서쪽이 아닌 북쪽과 동쪽으로 설정했다. 7월 2일 반군은 우선 수후미 인근 타미시(Тамыш)에 300~600명의 병력을 상륙시켜 양동 작전을 벌였다.[18] 상륙부대는 부대의 절반이 전사하여 거의 궤멸되었지만 9일까지 압도적인 숫적 우위의 조지아군을 상대로 교두보를 유지하는데 성공한다.

그 사이 반군과 의용군의 주력 부대는 러시아군의 지원 하에 구미스타 강에 면한 마을들을 공격했다. 반군의 경로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조지아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반군은 조지아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5일에는 수후미 구(Сухумский район)에 속하는 아할셰니(Ахалшени), 구마, 시로마를 점령했고, 반군은 스반인(Svans, 조지아인의 근연민족) 마을인 카마니(Камани)에도 공격을 퍼부어 점령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이로써 반군은 수후미 주변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산악 고지들을 거의 모두 점령한 상태에서 수후미에 대한 포위공격을 개시했다. 27일 러시아 정부가 중재한 또다른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이는 사실상 반군의 승리나 다름없었다. 이 휴전협정에 따르면 조지아군은 수후미에서 모든 중장비와 대부분의 병력을 철수하기로 했고 그 댓가로 반군과 그 동맹군은 도시를 공격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 수후미의 함락은 시간 문제였다.

9월 16일 오전 8시, 반군과 의용군은 휴전을 파기하고 수후미에 총공세를 벌였다. 수후미의 조지아군은 소화기만 보유한 반면에 반군과 의용군은 포병을 보유했고 러시아군에게도 화력지원을 받았다. 반군은 조지아 측에게 대피 통로를 보장할 터이니 그 쪽으로 철수하라고 제안했지만 이미 불신이 극에 달했던 조지아군은 반군의 제안을 거부했다. 수후미는 처절한 항전 끝에 9월 27일 함락되었다. 이때 상황은 실로 지옥을 방불케 했는데 20일과 23일 사이 여객기 3대가 공항으로 탈출을 시도하다 반군에 격추되어 136명이나 죽는가 하면 조지아 정부가 임명한 현지 압하지야 정부 각료들이 거의 전부 학살당하고 함락 후에는 조지아계 주민들[19]이 부모나 자식이 보는 앞에서 참수당하고, 죽을 때까지 도끼에 찍히고, 우물에 던져져 수류탄에 몸이 산산조각나고, 살해된 후 눈알이 파이는 인외마경이 벌어졌다. 3월 4일부터 수후미에 머물던 셰바르드나제 자신은 이 지옥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간발의 차로 도망쳤다. #

수후미 전투를 끝으로 조지아는 압하지야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동부전선 트크바르첼리 인근 조지아군도 9월 29일 철수하여 동부전선에서도 전쟁이 끝났다. 압하지야군은 조지아의 셰바르드나제와 감사후르디아 사이의 내전을 이용해 러시아와 접경한 조지아 북서부 스바네티 지방과 갈리, 코도리 지역으로 진격하였다. 단 일반적으로는 수후미가 압하지야에 함락된 9월 27일이 전쟁의 종전일로 간주되며, 전쟁 후에도 압하지야 북동부 코도리 계곡 일부는 조지아 정부가 지배했다.

3.4. 전쟁범죄

3.4.1. 조지아

비록 전쟁범죄의 스케일은 압하지야 측이 훨씬 크게 벌였지만, 적어도 조지아에 우세하던 전쟁 초기에는 조지아 측의 전쟁범죄도 심각했다.[20] 조지아군은 압하지야 영역으로 진군하여 점령지 내의 비조지아인들에게 잔혹행위를 벌였으며 이는 당초 중립을 유지하고자 했던 비압하스계 주민들마저 반군에 가담케 할 정도였다.
처음에 우리는 가만히 있으려고 했지만, 조지아인이 아르메니아인을 지나치게 학대했으므로 우리는 압하스인들을 지원해야 했다. 조지아인은 집에 난입하고 도둑질하며 사람을 고문한다. 라브라(Labra)에서 그들은 구멍뚫린 의자에 부부 한 쌍을 앉히고 산채로 불태웠다. 그들은 여자를 강간했다. 중립을 유지하기는 불가능했다.
"ABKHAZIA ARMENIANS: HOLDING A HOME IN AN UNSTABLE TERRITORY". Armenian General Benevolent Union. 1 November 2004.
실제로 압하지야의 비조지아계 및 비압하스계 소수민족들은 대체로 압하지야 분리주의자들을 지지한 편이다. 예를 들어 전쟁 당시 압하지야 분리주의자의 군대의 주력 부대 중 하나인 바그라먄 대대는 아르메니아인 1,50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병력은 분리주의자 군대의 25%를 차지했다. 20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최고 훈격을 지닌 압하지야 영웅 훈장(Hero of Abkhazia)을 수여받았고 242명이 전사했다.

3.4.2. 압하지야

압하지야군이 어린 소녀 하나를 붙잡았는데, 얘는 살해당한 부모의 집 근처 덤불 속에 숨어있었죠.
아이는 여러 번이나 강간당하곤 군인들 중 하나에게 살해당한 다음 난도질을 당했습니다.
반으로 토막당했는데 군인들이 메세지를 남긴 거였죠. 소녀의 시체는 결코 하나가 되지 않는 것처럼 조지아와 압하지야 또한 결코 통일되지 않을 거라고.
압하지야 전쟁에서 살아남은 한 조지아 노인의 증언.
전쟁 기간 동안 압하지야 곳곳에 거주하던 5천여 명의 조지아인들이 학살당했고, 20~25만여 명의 실향민들이 발생했다. 자료에 따라서는 조지아인 2~3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이는 과장으로 보인다.

가그라에선 조지아인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조직적으로 살해당했고 여자들은 나이 상관없이 압하지야 무장세력에게 붙잡혀 강간 고문을 당했다. 샤밀 바사예프가 지휘하는 체첸인 부대는 가그라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조지아군 포로 100명을 참수한 다음 그 머리로 공놀이를 하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21]

수후미에선 압하지야 반군과 캅카스 의용군에 의해 1천여 명의 조지아인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당하는 참변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4. 영향

파일:독립일_기념_압하스군.jpg
2017년 9월 30일 독립기념일에 압하지야 전쟁 전몰자에 헌화하는 압하지야군[22]
조지아는 압하지야에 대한 지배력을 사실상(de facto) 상실했다. 압하지야는 조지아로부터 사실상 독립했으나 미승인국가로 남았다. 러시아는 압하지야를 조지아의 영토로 명목상 인정했으나 2008년 남오세티야 전쟁 후 기존 입장을 번복하고 압하지야를 주권국으로 승인했다. 조지아는 2008년 전쟁으로 기존 코도리 계곡 일부의 지배력마저 상실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조지아는 압하지야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압하지야는 전쟁으로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압하지야와 조지아 양측에서 1만~3만 명이 사망하고 조지아인 난민만 20만~25만 명이 발생했다. 소련 시절 압하지야는 캅카스 지방의 장수촌, 담배 등 특용작물과 오렌지, 레몬 등 감귤류의 재배지, 흑해에 면한 관광 천국으로 유명했지만[23] 전쟁으로 기존 인프라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장기간 극심한 경제적 침체를 겪었으며 압하지야 주민들은 한동안 영세농으로 근근이 먹고 살아야만 했다. 또한 지역 곳곳에 매설된 엄청난 양의 지뢰들로 전후에도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

압하지야 전쟁은 압하지야의 인구 구성에 급격한 변화를 초래했다. 첫째, 인구가 격감했다. 1989년 조사에서 압하스 ASSR의 주민은 52만 5,061명이었다. 2003년 조사에서 압하지야의 인구는 21만 5,972명으로 줄었다. 이는 출생에 따른 인구의 자연회복 및 조지아계 난민 일부 귀환 등으로 그나마 복구된 것으로, 유엔난민기구 보고서를 참고하면 1994년 압하지야의 인구는 19만명 전후로 거의 1/3 정도로 격감한 것으로 보인다. #[24] 둘째, 압하지야의 "재압하스화"가 이루어졌다. 1989년 조사에서 압하스인은 주민의 17.8%를 차지했으나, 압하지야 전쟁 당시 조지아인 추방 및 피난, 러시아인과 흑해 그리스인의 피난으로 2003년 조사에 따르면 43.8%를 차지하여 제1민족으로 다시 떠올랐다. 이로써 압하지야는 압하스인의 민족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압하지야 전쟁 자체는 압하지야의 승리로 끝났으나 그 여파로 조지아는 군대, 경제, 정부 리더십 등이 붕괴하고 서부에 귀환한 감사후르디아가 반셰바르드나제 세력을 결집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등 또다른 내전으로 치달았다. 압하지야에 파견되었다가 패주한 조지아군은 친감사후르디아 반군에 대거 가담했고 이들은 주요 항구인 포티를 점령하여 수도 트빌리시에 공급되는 식량을 막아버렸다.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자 셰바르드나제는 마지막 수단으로 CIS에 가입하고 러시아군의 주둔 연장에 동의했다. 그 댓가로 러시아는 압하지야에게 진격 중단을 "권고"하고 조지아에 군사원조를 보내 서부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11월 초 감사후르디아의 반란은 진압되었고 그는 다음 달 의문사했다.

러시아는 다양한 경로와 수단으로 압하지야 전쟁에 참여한 양측을 모두 지원했다. 비록 압하지야를 지원한 것만 주목받고 실제로도 그게 더 많았지만. 소련 붕괴 후 러시아는 현지의 복잡한 민족분포로 인해 발발한 전쟁을 자국의 영향력 회복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으며 압하지야 전쟁은 그 예시 중 하나였다. 러시아는 압하지야 반군에 물자를 지원하고 캅카스 의용군의 월경을 묵인하며 화력지원도 적극적으로 하는 등 압하지야 반군의 승리에 혁혁히 기여했다. 물론 지원 자체는 현지 러시아군 부대의 결정이었지만 이들을 감독할 의무가 있는 러시아 정부는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려는 노력도 딱히 보여주진 않았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압하지야와 조지아의 협상을 중재하고 조지아에도 물자를 지원했으며, 조지아의 패색이 짙어지고 다시 러시아에 설설 기자 이번에는 압하지야의 행동을 자제시키고 조지아 정부의 친감사후르디아 반란 진압을 지원했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압하지야와 조지아를 모두 러시아의 세력권 내에 넣으면서도 동시에 압하지야를 무기 삼아 조지아를 압박할 수 있게 되었다.

5. 기타

우크라이나의 초민족주의 조직 UNA-UNSO(УНА-УНСО)가 조지아군을 지원한 바 있다. UNA-UNSO가 조지아에 파견한 아흐로 원정군단(експедиційний корпус Арго)의 병력은 150명으로 이들은 전쟁 막바지인 1993년 7월부터 전선에 투입되었다. 투입된 기간이 짧은데도 불구하고 8명이 조지아의 훈장인 바흐탄그 고르가살리 훈장(Орден Вахтанга Горгасали)을 받았고 7명이 전사했다. #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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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지아군 5,000~12,000명, UNA-UNSO(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단체) 150명. [2] 압하지야 방위군(Abkhazian National Guard) 4,000~5,000명, 바그라먄 대대(압하지야 아르메니아인 부대) 1,500명, 돈 코사크 1,500명, 카바르디노발카리야 출신 체르케스인 700~1,500명, 체첸인 1,000명, 아디게인 200명, 오세트인 150명, 북캅카스계 터키인 150명, 트란스니스트리아 60~90명. [3] 전쟁에 투입된 조지아군 상당수가 압하지야 현지의 조지아인이므로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기 힘들다. [4] 사실 이때도 압하지야는 실질적으로(de facto) 조지아와 분리되었지만 명목상으로는(de jure) 조지아와 연합한 이른바 '조약 공화국(treaty republic)'이라는 어정쩡한 체제를 유지하는 한 나라였다. 왜 어정쩡하냐면 SSR 압하지야 존속기 내내 도대체 조약 공화국의 정의가 무엇인지 명확히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5] 스탈린은 기존의 민족분포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공화국의 경계를 그리는 짓을 수차례 저질렀으며 이런 농간은 후일 소련이 무너지고 캅카스와 중앙아시아 지역에 민족분규로 피바다가 만들어지는 주요 원인이 된다. [6] 압하스어 이름은 네스토르 아폴론이파 라코바(Нестор Аполлон-иԥа Лакоба)로, 본 문서는 편의상 압하지야의 인명 및 지명을 러시아어로 표시한다. [7] 러시아 제국 시절인 1897년 수후미 특별구는 압하스인이 55.28%로 명백히 제1민족이었다. [8] 심지어 비조지아인이라고 모두 압하스 ASSR의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었다. [9] 압하지야와 남동쪽으로 접한 지역으로 당시 친 감사후르디아 세력에 점거된 상태였다. [10] 1989년 창설된 캅카스 산악민족연합은 러시아 내전 당시 건국되었으나 1922년 볼셰비키의 침공으로 멸망한 북캅카스 산악 공화국의 후계 국가를 자처하였다. 이 연합은 체첸인, 인구시인, 체르케스인, 압하스인, 아바르인 등 캅카스 산악지대의 민족들은 물론, 코사크와 압하지야 아르메니아인까지 포괄하는 광범위한 조직체였다. 캅카스 산악민족연합은 압하지야 전쟁을 산악지대 민족에 대한 침공으로 규정하고 압하지야를 위해 의용군을 파견했다. 2000년 지도자가 암살되어 사실상 해체되었다. [11] 조지아 공화국 국무원(State Council)은 조지아 정부이자 입법기관이다. 본래 조지아의 입법기관은 조지아 SSR 최고소비에트를 승계한 조지아 공화국 최고회의(Supreme Council)였으나 감사후르디아가 몰락한 뒤인 1992년 3월, 차기 총선까지 국가의 임시 통치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국무원이 창설되었다. 국무원은 조지아 국회(Parliament, 현행) 창설에 관한 법안을 통과한 후 동년 10월 16일 자진 해산했다. 즉 셰바르드나제의 직책을 한국에 대입하면 대통령+ 국회의장 정도 된다. 다만 당시 조지아 대통령은 공식적으로 공석이었으니 아주 들어맞는 건 또 아니다. [12] 압하지야 국군(Abkhazian Armed Forces)의 모태이다. [13] 수후미에서 서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서 흐르는 강. 동구미스타 강과 서구미스타 강이 합류하여 형성되며 북서쪽 노비 아폰(Новый Афон)과 남동쪽 수후미 사이 해안선으로 들어가 압하지야를 동서로 양분한다. [14] 바그라먄 대대(Батальон имени Баграмяна). 압하지야는 아르메니아인이 다수 거주하는 곳으로 1989년 당시 비중이 14.6%에 달했다. 오늘날에도 아르메니아인은 전체 인구의 17.4%를 차지한다. [15] 캅카스 의용군은 전쟁 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파견되었으며 압하지야 전쟁에 참전한 인원은 총 2,200~3,000명으로 추산한다. 카바르디노발카리야 출신 체르케스인 700~1,500명, 체첸인 1,000명, 아디게인 200명, 오세트인 150명, 북캅카스계 터키인 150명이다. 이외에도 돈 코사크 병력 1,500명이 파견되었다. [16] 러시아가 캅카스 의용군의 월경과 합류를 묵인한 이유는 조지아의 압하지야 점령을 저지하는 동시에 자기에게도 분리독립 단체인 캅카스 산악민족연합의 전력을 소모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력을 소모시키는 것은 대차게 실패했는데 여기서 활약하여 경험을 쌓은 최대 1,000명의 체첸인 장병들, 이른바 "늑대 무리"가 후일 체첸 전쟁에서 러시아군에 대항하는 체첸 반군의 핵심 전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작 캅카스 산악민족연합은 압하지야 전쟁 이후 친러파와 반러파로 편이 갈라져 자멸했다. [17] 이 사진을 찍은 타스통신 소속 안드레이 솔로비요프는 촬영 직후 저격을 당해 죽었다. [18] 압하지야측 소스는 이 상륙부대가 반군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조지아측 소스는 러시아군이 반군으로 위장했다고 주장한다. [19] 이들은 지난 7월 27일 휴전협정을 믿고 도시에 잔류한 주민들이었다. [20] 당장 조지아군 일부는 형벌부대였고 심지어 갱단이 참여한 경우도 있었다. 조지아군 사령부가 의도적으로 범죄를 계획하거나 실행하진 않았을지라도 이렇게 질 나쁜 군대를 적 영역에 들이밀었을 경우 어떤 범죄가 자행되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21] 이후 조지아군들은 체첸군이 나타났다는 얘기만 들리면 싸워 보지도 않고 그대로 달아나는 모습을 보였다는 기록이 있다. [22] 압하지야는 조지아군이 코도리 계곡을 제외한 압하지야의 모든 지역에서 완전히 물러난 9월 30일을 독립기념일로 삼는다. [23] 그래서 압하지야 전쟁 당시 압하지야에서 휴양을 즐기고 있던 러시아인들이 대거 피난하는 일이 벌어졌다. [24] 해당 보고서는 전전 압하지야 인구를 54만 명으로 잡았고 최대 35만 명이 다른 지역으로 피난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