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303030><colcolor=#fff> 아트 테이텀 Art Tat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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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아서 테이텀 주니어 Arthur Tatum Jr. |
출생 | 1909년 10월 13일 |
미국 오하이오 주 털리도 | |
사망 | 1956년 11월 5일 (향년 47세)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 |
국적 | 미국 |
직업 | 피아니스트 |
장르 | 재즈, 스트라이드 |
활동 | 1920년대 중반 ~ 195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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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피아니스트. 재즈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자 최고의 속주 피아니스트들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 생애
오하이오 주의 톨레도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부터 백내장으로 인해 사실상 맹인과 다름없는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1] 시력을 거의 잃어버린 대신 매우 예민한 청각을 가지게 되었고, 절대음감의 소유자이기도 했다.피아노 연주법은 어머니에게 처음 배우기 시작했고, 기타 연주자였던 아버지도 기본적인 음악 이론 등을 가르쳐 주었다. 배운 지 몇 년 되지 않아 벌써 출중한 연주 실력을 갖추게 되었고, 1925년에는 톨레도에서 나름대로 이름난 피아니스트였던 오버턴 레이니에게 서양의 고전적인 피아노곡을 비롯한 정통적인 연주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1927년부터는 톨레도 지역 방송국에서 라디오 프로그램의 막간음악 등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했고, 여러 재즈 클럽에서 가수들을 반주해 주면서 당대의 유명한 스트라이드 피아니스트들인 제임스 P. 존슨과 패츠 월러, 얼 하인즈 등의 연주법을 응용한 솔로 연주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1933년에는 뉴욕에서 열린 스트라이드 피아니스트들의 경연대회에 참가했는데, 여기서 '둘이서 차를(Tea for Two)' 과 '타이거 래그(Tiger Rag)' 를 무시무시한 스피드로 즉흥연주해 대박을 쳤다. 심지어 같이 참가한 대선배들인 존슨과 월러도 테이텀의 연주에 놀라 데꿀멍했을 정도.
이 성공으로 같은 해 브런스윅에서 솔로 네 곡을 데뷰 음반으로 내놓았고,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 오하이오 주와 미국 중서부 등지에서 연주하다가 1937년에 뉴욕으로 돌아왔다. 이 때부터 유명 클럽에서 장기 계약을 맺고 활동하기 시작했고, 1938년에는 영국에서 순회 공연도 했다.
1940년대 부터는 반주 역할에 그치던 왼손에도 오른손 못지 않은 속주 역할을 부여해 거의 관현악에 버금가는 풍성한 음향을 선보이기 시작했고, 솔로 활동 외에도 베이스나 기타, 드럼 주자를 대동한 그룹 활동을 병행했다.[2]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에 걸쳐서는 영화에 특별 출연하거나 텔레비전 쇼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는 등 본좌로 대우받았지만, 과음과 과식 습관으로 인해 점차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생애 후반이었던 1953년부터는 노먼 그랜츠의 음반사에서 대량의 녹음을 했고, 이 녹음들은 훗날 CD 세트로 복각되어 재발매되었다. 1956년에 서부 순회 공연 중 요독증 악화로 로스앤젤레스의 병원에 입원했고,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로스앤젤레스의 로즈데일 묘지에 묻혔고, 1991년에 글렌데일의 포레스트 로운 묘지로 이장되었다.
3. 연주 스타일
재즈 연주자의 필수 요건인 즉흥연주 실력 외에도, 오버턴 레이니 등으로부터 배운 서양 클래식의 고전적인 기교도 겸비한 터라 당대 재즈 피아니스트들 중에서는 가장 기교적으로 완벽한 연주자로 평가받았다. 더군다나 왼손을 거의 오른손에 종속시키는 형태에서 탈피시켜 동등한 위치로 올려놓았고, 1940년대 이후의 녹음을 들어보면 웬만한 클래식 피아니스트들 못지 않은 힘과 기교를 보여주고 있다.연주한 곡은 주로 당대의 유행가나 무드 음악이었는데, 이따금 드보르자크의 '유모레스크' 나 마스네의 엘레지 등 클래식 피아노곡도 연주했다. 다만 재즈 아티스트였던 만큼 원곡 그대로 연주하는 법은 절대 없었고, 자신만의 해석으로 즉흥 편곡해 연주했다. 심지어 원곡의 화음(코드)을 바꾸거나 변성화음, 대리화음 등을 곳곳에 끼워넣어 더욱 복잡한 구조로 탈바꿈시켰고, 갑작스럽게 흐름을 끊고 새로운 악구를 삽입하기도 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후반기부터 뉴욕에서 싹트기 시작한 비밥에도 영향을 주었다.
일부 비평가들은 너무 속주에만 집착해 음악을 스포츠로 인식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하기도 했으나, 초기에 반주자로서 일한 경력도 있어서 느린 템포의 서정적인 연주에도 강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특히 말년에 LP의 보급으로 녹음 시간의 제한이 적어진 뒤에 남긴 녹음들 중에는 차분하게 연주한 곡들도 많다.[3]
4. 후배들에게 끼친 영향
생전에도 이미 신처럼 추앙받았던 인물이었고, 사후에도 레코드 녹음을 통해 수많은 재즈 피아니스트들이 그의 스타일에서 영향을 받았다. 비교적 보수적인 성향이었던 오스카 피터슨에서부터 비밥 피아니스트의 대명사가 된 버드 파웰까지 거의 모든 재즈 피아니스트들의 연주에서 테이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피아니스트들 뿐 아니라 다른 악기의 연주자들도 테이텀의 속주와 즉흥 편곡 실력을 모방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대표적으로 색소포니스트 찰리 파커가 있다.[4] 파커 뿐 아니라 트럼페터 디지 길레스피도 테이텀의 연주를 높이 평가했다.
5. 에피소드
- 행크 존스와 레스폴의 회고에 따르면, 어떤 구린 상태의 피아노를 치더라도 최대한 아름다운 소리를 끌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건반 몇 개가 안먹는 (한번 누르면 다시 올라오지 않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서 "F#... 저건 B내추럴... D..." 하면서 맥주를 몇 병 마시더니, 무대에 올라가서는 안먹는 건반 키를 실시간으로 먹도록 고쳐가면서 연주를 했다(...). (Art Tatum - The Art Of Jazz Piano 발췌)
- 당대의 본좌 클래식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어느 날 뉴욕의 한 재즈 클럽에 들어갔는데, 거기서 테이텀의 연주를 보고 오히려 놀라버렸다. 그래서 장인어른이자 역사상 최고의 지휘자 중 한명인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며칠 후 다시 클럽에 찾아갔는데, 토스카니니도 테이텀의 연주를 듣고 떡실신. 호로비츠가 테이텀이 연주하는 Tea for Two를 듣고 그 편곡을 만드는 데 얼마나 걸렸냐고 물었더니 테이텀은 '지금 즉흥연주였는데요?'해서 또 호로비츠를 떡실신시켰다고 한다. 호로비츠 자신의 회고.
- 카운트 베이시는 테이텀을 '세계 8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 로 꼽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테이텀이 자신의 우상인 패츠 월러가 연주하던 클럽에 갔는데, 월러는 테이텀을 보자마자 공연을 멈추고 "나는 그저 피아노를 연주할 뿐이지만, 오늘 밤에는 여기에 신이 강림하셨습니다." 라고 말해 테이텀을 뻘쭘하게 했다.
- 행크 존스는 1935년에 테이텀의 연주를 라디오에서 처음 접했는데, 피아니스트 세 명이 같이 연주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 원래 피아니스트가 되려던 - 그리고 피아니스트로서 트리오 활동 중이었던 - 레스폴은 아트 테이텀의 연주를 듣고 그날 바로 상큼하게 피아노를 접었다고 한다. (Art Tatum - The Art Of Jazz Piano 발췌)
- 오스카 피터슨이 아직 초딩일 때 테이텀이 연주한 '타이거 래그' 의 레코드를 선물로 받았는데, 피터슨도 그 녹음이 피아니스트 여러 명이 참가해 연주한 걸로 들렸다고 한다. 하지만 테이텀 혼자 친 것을 알게 되자 열폭하며 몇 주간 피아노 연습을 관뒀다(...).
- 아트 테이텀이 막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 어느 가게에서 빠르고 복잡하게 연주하면서도 박자를 놓치지 않는 피아노 연주를 듣고 열폭하여 그 연주를 완벽히 따라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에 연습을 거듭, 마침내 그 연주를 똑같이 따라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그 때 들었던 피아노 연주는 사람이 연주한 것이 아니라 자동 피아노의 연주였다고. 이 일화가 대단한 것이 당시 막 시장에 출시된 상태였던 자동 피아노는 유명한 피아니스트 한 명 고용하는 값에 피아니스트 두 사람이 연주하는 것 같은 자동 피아노를 구입하라는 마케팅의 일환으로 주로 솔로 연주가 불가능한 복잡한 악곡이 연주되도록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초짜가 그저 맹렬한 연습끝에 두 명이 연주하는 악곡을 혼자서 연주할 정도의 연주 태크닉을 터득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1]
다만 한쪽 눈으로는 코앞에 물체를 갖다대면 색깔이나 모양을 어느 정도 구분할 수 있었다고 한다.
[2]
하지만 테이텀이 워낙 빨리 연주하는 스타일이라 웬만한 연주자들은 따라잡는 것도 힘들었다고 한다. 테이텀도 '밴드가 오히려 방해가 된다' 고 불평했다(...).
[3]
테이텀이 한창 활동하던 1930년대 초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는 주로 한 면당 수록 시간이 3~4분 정도밖에 안되는
SP가 유일한 음반 매체였다. 이렇다 보니 빨리 녹음을 마무리하기 위해 속주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4]
파커는 테이텀이 맨해튼의 한 레스토랑에 정기 출연할 때 뉴욕에 갓 도착해 접시닦이로 알바를 하며 연주를 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