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비슷한 미국의 농구선수 아이제아 토마스에 대한 내용은 아이제아 토마스(1989) 문서 참고하십시오.
아이제아 토마스의 수상 이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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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 1990 |
{{{#!wiki style="margin:0 -10px -5px" {{{#ddd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1950-51 | 1951-52 | 1952-53 | 1953-54 | 1954-55 |
에드 맥컬레이 | 폴 아리진 | 조지 마이칸 | 밥 쿠지 | 빌 샤먼 | |
1955-56 | 1956-57 | 1957-58 | 1958-59 | 1959-60 | |
밥 페팃 | 밥 쿠지 | 밥 페팃 |
엘진 베일러 밥 페팃 |
윌트 체임벌린 | |
1960-61 | 1961-62 | 1962-63 | 1963-64 | 1964-65 | |
오스카 로버트슨 | 밥 페팃 | 빌 러셀 | 오스카 로버트슨 | 제리 루카스 | |
1965-66 | 1966-67 | 1967-68 | 1968-69 | 1969-70 | |
애드리언 스미스 | 릭 배리 | 할 그리어 | 오스카 로버트슨 | 윌리스 리드 | |
1970-71 | 1971-72 | 1972-73 | 1973-74 | 1974-75 | |
레니 윌킨스 | 제리 웨스트 | 데이브 코웬스 | 밥 레이니어 | 월트 프레이저 | |
1975-76 | 1976-77 | 1977-78 | 1978-79 | 1979-80 | |
데이브 빙 | 줄리어스 어빙 | 랜디 스미스 | 데이비드 톰슨 | 조지 거빈 | |
1980-81 | 1981-82 | 1982-83 | 1983-84 | 1984-85 | |
네이트 아치발드 | 래리 버드 | 줄리어스 어빙 | 아이제아 토마스 | 랄프 샘슨 | |
1985-86 | 1986-87 | 1987-88 | 1988-89 | 1989-90 | |
아이제아 토마스 | 톰 체임버스 | 마이클 조던 | 칼 말론 | 매직 존슨 | |
1990-91 | 1991-92 | 1992-93 | 1993-94 | 1994-95 | |
찰스 바클리 | 매직 존슨 |
존 스탁턴 칼 말론 |
스카티 피펜 | 미치 리치몬드 | |
1995-96 | 1996-97 | 1997-98 | 1998-99 | 1999-00 | |
마이클 조던 | 글렌 라이스 | 마이클 조던 | (NBA 파업) |
샤킬 오닐 팀 던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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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1 | 2001-02 | 2002-03 | 2003-04 | 2004-05 | |
앨런 아이버슨 | 코비 브라이언트 | 케빈 가넷 | 샤킬 오닐 | 앨런 아이버슨 | |
2005-06 | 2006-07 | 2007-08 | 2008-09 | 2009-10 | |
르브론 제임스 | 코비 브라이언트 | 르브론 제임스 |
코비 브라이언트 샤킬 오닐 |
드웨인 웨이드 | |
2010-11 | 2011-12 | 2012-13 | 2013-14 | 2014-15 | |
코비 브라이언트 | 케빈 듀란트 | 크리스 폴 | 카이리 어빙 | 러셀 웨스트브룩 | |
2015-16 | 2016-17 | 2017-18 | 2018-19 | 2019-20 | |
러셀 웨스트브룩 | 앤서니 데이비스 | 르브론 제임스 | 케빈 듀란트 | 카와이 레너드 | |
2020-21 | 2021-22 | 2022-23 | 2023-24 | 2024-25 | |
야니스 아데토쿤보 | 스테판 커리 | 제이슨 테이텀 | 데미안 릴라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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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47 | 1947-48 | 1948-49 | 1949-50 | 1950-51 |
어니 캘벌리 | 호위 달마 | 밥 데이비스 | 딕 맥과이어 | 앤디 필립 | |
1951-52 | 1952-53 | 1953-54 | 1954-55 | 1955-56 | |
앤디 필립 | 밥 쿠지 | 밥 쿠지 | 밥 쿠지 | 밥 쿠지 | |
1956-57 | 1957-58 | 1958-59 | 1959-60 | 1960-61 | |
밥 쿠지 | 밥 쿠지 | 밥 쿠지 | 밥 쿠지 | 오스카 로버트슨 | |
1961-62 | 1962-63 | 1963-64 | 1964-65 | 1965-66 | |
오스카 로버트슨 | 가이 로저스 | 오스카 로버트슨 | 오스카 로버트슨 | 오스카 로버트슨 | |
1966-67 | 1967-68 | 1968-69 | 1969-70 | 1970-71 | |
가이 로저스 | 윌트 체임벌린 | 오스카 로버트슨 | 레니 윌킨스 | 놈 밴 리어 | |
1971-72 | 1972-73 | 1973-74 | 1974-75 | 1975-76 | |
제리 웨스트 | 네이트 아치발드 | 어니 디그레고리오 | 케빈 포터 | 슬릭 왓츠 | |
1976-77 | 1977-78 | 1978-79 | 1979-80 | 1980-81 | |
돈 부세 | 케빈 포터 | 케빈 포터 | 마이클 레이 리처드슨 | 케빈 포터 | |
1981-82 | 1982-83 | 1983-84 | 1984-85 | 1985-86 | |
조니 무어 | 매직 존슨 | 매직 존슨 | 아이제아 토마스 | 매직 존슨 | |
1986-87 | 1987-88 | 1988-89 | 1989-90 | 1990-91 | |
매직 존슨 | 존 스탁턴 | 존 스탁턴 | 존 스탁턴 | 존 스탁턴 | |
1991-92 | 1992-93 | 1993-94 | 1994-95 | 1995-96 | |
존 스탁턴 | 존 스탁턴 | 존 스탁턴 | 존 스탁턴 | 존 스탁턴 | |
1996-97 | 1997-98 | 1998-99 | 1999-00 | 2000-01 | |
마크 잭슨 | 로드 스트릭랜드 | 제이슨 키드 | 제이슨 키드 | 제이슨 키드 | |
2001-02 | 2002-03 | 2003-04 | 2004-05 | 2005-06 | |
안드레 밀러 | 제이슨 키드 | 제이슨 키드 | 스티브 내시 | 스티브 내시 | |
2006-07 | 2007-08 | 2008-09 | 2009-10 | 2010-11 | |
스티브 내시 | 크리스 폴 | 크리스 폴 | 스티브 내시 | 스티브 내시 | |
2011-12 | 2012-13 | 2013-14 | 2014-15 | 2015-16 | |
라존 론도 | 라존 론도 | 크리스 폴 | 크리스 폴 | 라존 론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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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로이트 피스톤즈 기록 보유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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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d428a><colcolor=#FFFFFF> 최다 출장 |
조 듀마스 (Joe Dumars) - 1018경기 (1985~1999) |
최다 득점 |
아이제아 토마스 (Isiah Thomas) - 18822점 (1981~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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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 어시스트 |
아이제아 토마스 (Isiah Thomas) - 9061개 (1981~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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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 리바운드 |
빌 레임비어 (Bill Laimbeer) - 9430개 (1982~19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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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 블락 |
벤 월러스 (Ben Wallace) - 1486개 (2000~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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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다 스틸 |
아이제아 토마스 (Isiah Thomas) - 1861개 (1981~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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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영구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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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cac00> - | - | No. 1 | No. 2 | No. 3 |
<rowcolor=#ffffff> 빌 데이비슨 (Bill Davidson) |
잭 매클로스키 (Jack McCloskey) |
천시 빌럽스 (Chauncey Billups) |
척 데일리 (Chuck Daly) |
벤 월러스 (Ben Walla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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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cac00> No. 4 | No. 10 | No. 11 | No. 15 | No. 16 | |
<rowcolor=#ffffff>
조 듀마스 (Joe Dumars) |
데니스 로드맨 (Dennis Rodman) |
아이제아 토마스 (Isiah Thomas) |
비니 존슨 (Vinnie Johnson) |
밥 레이니어 (Bob Lanier) |
|
<rowcolor=#ccac00> No. 21 | No. 32 | No. 40 | |||
<rowcolor=#ffffff>
데이브 빙 (Dave Bing) |
리처드 해밀턴 (Richard Hamilton) |
빌 레임비어 (Bill Laimbeer) |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등번호 11번 | ||||
밥 맥아두 (1979~1981) |
→ |
아이제아 토마스 (1981~1994) |
→ | 영구 결번 |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아이제아 토마스 | |
헌액 연도 | 2000년 |
|
|
<colbgcolor=#1d428a>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No. 11 | |
<colcolor=#fff> 아이제이아 로드 토머스 3세 Isiah Lord Thomas III |
|
출생 | 1961년 4월 30일 ([age(1961-04-30)]세) |
일리노이주 시카고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학교 | 인디애나 대학교 |
신장 | 185cm (6' 1") |
체중 | 82kg (180 lbs) |
윙스팬 | 187cm (6' 2") |
포지션 | 포인트 가드 |
드래프트 |
1981 NBA 드래프트 1라운드 2순위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지명 |
소속 팀 |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1981~1994) |
지도자 |
인디애나 페이서스 (2000~2003) 뉴욕 닉스 (2006~2007) 플로리다 인터내셔널 대학교 (2009~2012) |
프런트 |
토론토 랩터스 (1995~1998 / 부사장) 뉴욕 닉스 (2003~2008 / 단장 겸 사장) |
등번호 | 11번 - 디트로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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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농구인. 현역 NBA 선수 시절 Zeke[1], Baby-faced Assassin[2] 등의 별명으로 유명한 포인트 가드였다. NBA가 선정한 50인의 위대한 농구선수 중 한 명이며 1980년대 말을 주름잡던 디트로이트 배드 보이즈의 리더. 다만 선수시절 활약상과 별개로 은퇴 후 행정가로서나 감독으로서는 그리 성공하지 못했다.
2. 플레이스타일
팀이 배드 보이즈시절 피스톤즈고, 본인이 마피아 보스처럼 팀을 장악했기에 본인의 농구 스타일까지 터프하고 지저분한 타입으로 오해받기 쉬운 선수지만 선수 토마스는 굉장히 정석적이면서도 화려한 농구를 할 줄 아는 선수이다. 그를 싫어하는 마이클 조던조차 매직 존슨에 이어 최고의 PG로 꼽는 선수.[3][4]토마스에 관해 얘기하는 것중에 의외로 운동능력을 등한시하는데 아이제아는 엄청난 운동능력을 갖고있던 선수였다. 스피드는 배드 보이즈 시절에 상대였던 조던의 수비를 겪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할거 다 할 정도로 빠르고 날랬으며 키가 작은 가드라도 틀어막을 수 있었던 조던도 토마스를 속도에서 완벽히 제압하지는 못했다. 그만큼 토마스가 빨랐기 때문에. 점프력도 엄청났는데, 점프볼 상황에서 상대 7피트 짜리 센터를 이기고 점프볼을 딴 적이 있다. 아래 영상을 보면 각도빨이 있기는 하나, 제자리 점프임에도 그 신장으로 머리가 림 근처까지 올라간 것을 알 수 있다.[5]
워낙 옛날 선수고 덩크를 거의 하지 않아[6] 그의 점프력을 간과하기 쉬운데, 단신임에도 억소리나는 덩크를 성공시키곤 했다. 장신들을 제치고 올라가 풋백덩크를 꽂아넣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식의 풋백덩크는 속공상황에서 덩크와 달리 도움닫기도 거의 없이 뛰어올라야 하기 때문에 185cm 단신이 성공시키려면 정말 어마어마한 점프력이 필요하다.
더불어 공격에 있어서는 포인트 가드의 기본기에 매우 충실한 선수이다. 포인트 가드는 드리블로 찬스를 만들면서도, 드리블 중에도 언제든지 팀원을 살리기 위한 다음 전술을 이어갈 수 있는 시야 확보와 패스 전개를 위해 공은 낮게 드리블 하고 고개는 세운채로 팀원들의 위치를 볼 수 있으며 항상 다음 플레이를 준비해야한다. 토마스는 이런 포인트 가드의 기본 자세가 완벽했던 선수로 뛰어난 드리블과 스킬로 다소 투박한 타입의 선수들이 많던 피스톤즈의 오펜스를 진두지휘했다.
여기에 팀 특성상 1옵션 역할을 하면서 포인트 가드로서 어려운 슛을 성공시키는 골 결정력과 에이스 기질이 탁월했던 선수로 수비지향적인 팀에 느린 페이스의 팀이다보니 1차 스탯상으로는 평득 20점대를 꾸준히 기록하지 못한 선수일지 몰라도 NBA 2회 우승에 빛나는 피스톤즈의 에이스는 누가 뭐래도 토마스인 셈. 하이라이트에서 보여주는 집요한 드리블 끝에 보여주는 풀업 점퍼나 마무리는 그만의 전매특허이다.
굳이 약점을 찾자면, 포인트 가드 1옵션으로서 현시대의 덕목인 3점 슛이나 캐치앤슛같은 장거리 슛 능력은 떨어지는 편이고 체격이 탄탄한 편은 아닌지라 골밑까지 파고들어 결정을 보는데는 약간 약한 점이 있었고 본인의 대인수비력 자체는 평균보다 좀 나은 정도였다는 것. 특히 장거리 슛의 부재로 인해 TS등의 2차 스탯은 이름값에 비해 약한 편이다. 필드골 자체는 통산 45.2%로 낮진 않지만 3점슛이 29.0%에 불구하며 자유투 역시 75.4%로 좋은편이 아니었다.[7] 또한 턴오버도 통산 평균 3.8개로 턴오버가 많은 선수였다.
만약 토마스를 현시대 선수와 비교한다면 크리스 폴과 공통분모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포인트가드로서의 기본기와 패싱능력이 완벽하고 정석적인 게임 조립에 능하면서[8][9], 필요하다면 본인의 득점으로 게임을 풀어나가기도 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것. 물론 내구성은 잔부상이 많은 폴보다 월등하게 위다.
위에서 말했듯이 현역시절이나 지금이나 조폭 보스뺨치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졌던 선수이다. 다만 보스 기질이 강하다고 해서 불합리 한 명령을 내리거나 독단적으로 찍어 누르는 타입은 아니었다. 토마스가 가장 중요하게 추구하는 것은 팀(조직)의 성공과 승리. 이를 위해서는 모두가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고 팀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믿는 타입이었으며, 본인부터 솔선수범해 팀을 위해 희생하는 자세를 몸소 보여줬다. 자신의 철학을 스스로 적극 실천하는 행동파 보스였던 셈이다.
3. 초기 생애 및 대학 경력
토마스는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대가족의 막내로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고 한다 아이제아가 어릴때 아버지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가버리는등 굉장히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는데 형들은 마약을 하기도 하고 나쁜 생활을 하였으며 실제 한 형은 어렸을때 폭력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실제로 한 대학팀의 코치가 토마스를 스카우트하기 위해서 토마스가 살던 동네로 간 적이 있었는데 거리가 더럽고 무시무시하여 깜짝 놀랐다고 한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도 본인들은 나쁜 길을 가고 있음에도 막내는 잘 나가게 하기위해 막내인 아이제아가 나쁜 짓을 하면 호되게 혼냈다고 한다.백인 학생이 많은 세인트 조셉 고등학교라는 가톨릭 계열의 학교에 다니던 토마스는 처음에는 예상대로 백인학생들의 텃세를 받았지만, 결국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게 되면서 농구팀은 토마스를 중심으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며 토마스는 졸업하게 되자 수많은 대학의 리쿠르트 대상이 되었다. 자동차, 현금 등을 제시하던 수많은 대학을 제쳐둔 후에[10] 인디애나 대학교의 열혈 감독인 밥 나이트(1940~2023)[11]가 찾아왔다. 밥 나이트는 어머니에게 3가지 제안을 했는데, 1. 나는 그에게 좋은 교육을 제공하도록 하겠다. 2. 나는 그에게 농구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을 가르치겠다. 3. 그러면 그는 신사로 거듭날 것이다. 다른 대학교에 비하면 부족하고 추상적이어 보이는 제안이었고 거기다가 인디애나 대학교는 KKK의 본거지로 악명높은 인디애나주에 있었기때문에 토마스의 식구들은 불안감을 가졌고 어머니는 나이트코치에게 만약 당신의 학교학생들이 토마스를 해코지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나이트에게 하는데 나이트의 대답은 "우리 팀이 이긴다면 그들이 보호해줄 것입니다."였다. 형들은 그의 대답에 처음에는 농담으로 생각했지만 그게 진심이란것을 알게된 후 불같은 화를 내면서 밥 나이트와 싸우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밥 나이트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언론에 우리 아들은 인디애나 대학교로 진학하기로 결정했다고 선포하게 되었고 토마스와 그의 형들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면서 어머니의 결정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밥 나이트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조직적인 농구로 유명했고 코트 위에서나 밖에서나 다혈질이었다. 그런 나이트도 토마스를 보자마자 한 말이 딱 이랬단다. "토마스, 넌 네가 하고 싶은 플레이를 해라." 물론 토마스도 처음에는 밥 나이트의 무서운 갈굼을 피하지는 못했고 연습도중에 체육관에서 쫓겨나는 수모도 겪였지만 언제나 그랬던것처럼 자신의 실력을 빠르게 증명해주고 밥 나이트도 자신의 높은 기준을 충족시키는 토마스를 전적으로 믿어주면서 끈끈한 유대관계를 만들어 나갔다. 한 번은 퍼듀와의 대전에서 상대선수가 아이제아를 때리자, 나이트는 기자회견을 열어 "왜 우리 아이제아의 기를 죽이고 그래"를 일갈했으며,19일후에 아이오와대와의 경기에서 반대로 아이제아가 상대선수를 때려 퇴장을 당하자 많은 언론에서는 사과를 기대했지만 밥 나이트는 그런 것 없이 어쩌라고를 시전해주기도....
감독의 지원 아래 토마스는 2학년 때 제임스 워디와 샘 퍼킨스가 버티고 있는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를 결승전에서 이겨서 학교를 NCAA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았고, 자기 자신도 MOP에 선정되었다. 그러나 NCAA우승을 해도 그의 가정은 여전히 가난을 벗어날수 없었으며 그것은 토마스에게 얼리 드래프트를 결정하는 동기가 되었고 그렇게 토마스는 1981년에 바로 NBA 드래프트를 신청했다.
4. 선수 경력: 배드 보이즈의 보스
1981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2순위로[12] 지명된다.여담으로 그는 처음에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 오는 것을 탐탁치 않았다. 그래서 피스톤즈와 인터뷰에서 일부러 건성건성 대답하였다고 한다. 시카고 출신이었던 그는 시카고로 가고 싶어했으나 오히려 그런 모습을 본 맥클로스키 단장은 "니가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없어. 만약 우리 차례때 니가 아직 드래프트 되지 않았으면 너 뽑을꺼야" 라고 단정지었다고 한다. 결국 배드 보이즈의 리더가 되어 자기가 가고 싶어했던 시카고 불스를 그리 여러번 좌절시켰던거 보면 참...
어쨋든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 지명된 토마스는 전시즌에 21승에 그쳤던 팀을 39승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토마스가 루키였던 시즌과 2년차 시즌에 팀의 전력은 아직 배드 보이즈 시절만큼의 위력이 아니었다. 토마스가 드래프트 된 다음해에 훗날 악명을 떨치게 되는 빌 레임비어가 팀에 합류하면서 기본 토대는 만들었지만, 여전히 팀은 중하위권 전력이었고 플레이오프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다가 3년차 시즌에 NBA를 대표하는 명장이자 토마스의 은사 척 데일리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팀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토마스도 평균 21.2점 11.1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커리어를 통틀어 첫번째 더블 더블 시즌을 보냈고 팀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1라운드에서 뉴욕 닉스에게 패배해 탈락했지만 5차전까지 가는 접전이었다.
이후 피스톤즈는 맥클로스키 단장의 주도 하에 차근차근 팀의 전력을 꾸려가기 시작하는데, 1985년 드래프트에서 토마스와 함께 백코트 전력의 핵을 이루게 되는 조 듀마스를 18순위로 뽑았다. 득점과 볼 핸들링이 준수한 듀마스의 합류로 팀의 득점과 볼 배급, 경기 리딩까지 막대한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던 토마스의 부담을 크게 덜 수 있었고, 가드 포지션 최고의 수비수 듀마스 덕분에 인사이드의 거칠고 강력한 수비와 백코트의 일선 수비가 조화를 이루면서, 비로소 배드 보이즈의 골격이 갖춰졌다. 또한 폭발적인 슈터 '마이크로웨이브' 비니 존스, 레임비어와 함께 악명을 떨친 인사이드의 터프가이 릭 마혼 등이 핵심 전력으로 자리잡으면서 익히 알려진 배드 보이즈의 팀 컬러가 완성되었다.[13][14] 1987-1988 시즌, 마침내 디트로이트는 동부의 강호들을 아작내고 파이널에서 레이커스와 맞붙었다. 당시 레이커스는 매직 존슨, 카림 압둘자바, 제임스 워디 등이 포진한 최고의 팀이었다. 3승 2패로 앞선 채 맞은 6차전에서 토마스는 도중에 발목이 나가버리지만 출전을 강행, 3쿼터에만 25점을 넣으며 파이널 한 쿼터 득점 최고기록을 경신하는 대활약을 보였지만[15] 결국 디트로이트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두 경기를 연속으로 내주며 아쉽게 패배했다.[16] 이 때 토마스는 매우 큰 굴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시즌인 1988-1989 시즌에 두 팀이 다시 맞붙었는데, 이때는 매직 존슨을 비롯한 레이커스의 주축들이 모두 부상을 달고 있었고 복수의 칼을 갈던 토마스와 배드 보이즈에게 자비란 없었다. 파이널에 진출하며 토마스가 한 말이 '레이커스 외에 다른 팀이 올라오는 건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건 복수다'였다. 결국 디트로이트가 4전 전승으로 레이커스를 처참히 발라버리고 우승. 이 시즌은 플레이오프에서 시카고 불스에게 2패한 거 빼면 전승이었다.
그 다음 시즌인 1989-1990시즌에는 같은 동부지구 시카고 불스의 강력한 도전이 있었으나 이겨내고 파이널에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맞이하여 4승 1패로 다시 우승. 2년 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토마스는 파이널 MVP에 올랐다.
하지만 1990-1991 시즌 이후로 토마스와 배드 보이즈의 번영은 끝이 났다. 시카고 불스에 의해 4전 전패로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무너지고 난 뒤 팀의 성적은 내리막을 걸었다. 1991-1992 시즌을 끝으로 척 데일리도 사임하면서 배드 보이즈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토마스는 1993-1994시즌까지 뛴 후 현역에서 은퇴한다. 참고로 이당시 조던이 이끌던 전성기 불스, 버드가 이끌던 전성기 셀틱스, 매직 존슨이 이끌던 레이커즈를 상대로 포스트시즌 승률 50%를 넘겼던 팀은 배드 보이즈가 유일하다.[17]
5. 수상 내역
수상 내역 |
NBA 챔피언 2회(1989, 1990) NBA 파이널 MVP (1990) 올스타 12회 (1982–1993) NBA 올스타전 MVP 2회 (1984, 1986) 올-NBA 퍼스트 팀 3회 (1984–1986) 올-NBA 세컨드 팀 2회 (1983, 1987) NBA 올-루키 퍼스트 팀 (1982) NBA 올해의 어시스트왕 (1985)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00) |
6. 흑역사 및 논란
6.1. 마이클 조던 Freeze Out 논란
이 문서는 마이클 조던/생애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역사의 배드 보이즈 항목을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이제아가 다른 팀원들과 짜고 조던을 따돌렸다는 근거는 없다.
이 논란이 처음 주장된 건 프리 프레스의 스포츠 기자인 찰리 빈센트의 기사로 그는 아이제아 토마스와 매직 존슨의 조언자였던 찰스 터커 박사가 토마스와 거빈이 조던에게 NBA가 어떤 곳인지 가르쳐주기 위해 공을 주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면서 시작이 되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올스타 게임이 끝난 후에 토마스와 거빈이 서로 대화를 주고 받으며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였다" 는 모습을 함으로써 토마스와 거빈이 조던이 큰 활약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즐거워했다는 듯한 분위기를 서술한 것이다. 또한 조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선배들 중 매직과 거빈이 조던에게 달라붙어 제대로 된 수비를 하고[18] 토마스는 공을 분배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며 조던이 따돌림 당했다라는 주장을 한 것이다.
그럼 진짜 선배들이 작정을 하고 조던을 따돌렸다는 어떤 증거는 있을까?
일단 그것을 설명하기에 앞서서 그 당시 동부에서 아이제아 토마스가 선수들을 전두지휘하여 조던을 왕따시킬 만한 짬밥이 되는지 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던이 1990년대 막바지까지 선수 생활을 하고 토마스는 1990년대 초에 은퇴를 한터라 토마스가 조던보다 한참 더 선배인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조던과 토마스 사이의 경력사이에 큰 갭은 없다.[19] 1985년도 올스타전에 조던은 신인이었고, 토마스는 꽤나 재능있는 3년차 선수의 입장이었다.
이런 토마스와 조던의 동료 선발은 1981년 MVP 줄리어스 어빙, 1982-83년 MVP 모제스 말론 그리고 1984년 MVP인 래리 버드였다. 이런 쟁쟁한 선배들 사이에서 토마스가 저들을 규합해서 짜고 조던을 따돌린다?[20] 애초에 버드라는 인물은 이렇게 째째하게 노는 것에 질색하는 인물이고, 어빙과 말론은 인격자로 소문난 사람들이다. 그리고 동부의 감독이었던 KC존스 역시 이런 것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을 인물이 아니다. 토마스가 얼마나 조던을 싫어하던간에 토마스의 작전에 놀아날 인물들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만약 여기에 다들 동참했다면 이들 역시 동참자가 되는 치졸한 광경이 연출되는 것이다. 저 세 사람이 조던 하나를 골려주기 위해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는 그런 바보같은 짓을 할 이유는 단 1도 없다.
그러면 정말 조던이 터치를 적게 받았는가에 대해서 유의해볼 필요가 있다. 조던은 총 9개의 터치를 받았으며 이중 2개를 성공시켰다. 게다가 그 9개의 터치 중에는 분명 토마스의 패스도 있었다. 9개 밖에 슛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조던 따돌리기가 아니냐는 말이 나올 수가 있지만 그 당시 조던은 신인에 불과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비교를 해보자면 조던보다 이미 훨씬 더 슈퍼스타였던 모제스 말론은 10개의 슛을 쐈고, 그 당시 거의 GOAT으로 인정받고 있던 압둘자바 역시 10개밖에 슛을 쏘지 않았다. 반면에 조던과 드래프트 동기였던 하킴 올라주원은 고작 2개의 슛밖에 쏘지 못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오히려 조던은 그 당시에 신인치고는 괜찮은 터치를 받았음을 시사한다.
단 조던이 선배들에게 고깝게 보였을 이유는 있다. 물론 조던 본인은 자신이 신인이라는 걸 알고 굉장히 조심스럽게 행동했다고 주장한 것처럼 어떤 큰 행동을 하거나 크게 떠들지는 않았다.[21] 하지만 조던이 한가지 실수를 한 게 있다면 그 당시 관례는 덩크 콘테스트 참가자들이 팬서비스 차원에서 공개연습에 참가하게 되며 이 때는 각자 소속팀의 연습장비를 착용하는 게 불문율이었는데, 신인이라 물정을 몰랐던 조던은 스폰서 나이키의 요청대로 순진하게 나이키 물품을 차고 나섰다는것. 실제 조던은 혼자만 나이키 운동복을 입고 1라운드를 치렀다가 아차 싶었는지 2라운드 때부터는 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나머지 대회를 치른다. 여기까지 보면 조던의 잘못이라고는 모르고 실수를 한 것 그리고 그 당시 신인치고는 굉장한 인기를 얻었다는 것 정도다. 물론 위의 얘기는 조던이 선배들에게 고깝게 보였을 수 있는 근거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지 이것이 무슨 조던을 왕따시켰다는 것의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 조던 역시 그 당시 그와 관련해 질문을 받았을때는 "그랬던것 같지만 그냥 그 당시는 즐겁게 즐겼다" 정도로 별다른 코멘트를 하지 않았고 본인의 명전 헌액 영상 당시에도 그 게임이 자신에게 동기를 부여했다라고 언급했지 그랬을것이라고 믿지 않는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이것이 재점화된 건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로 조던이 다시 한번 이 사건에 대해서 언급하면서이다. 조던에 의하면 아이제아 토마스를 그 당시 엘레베이터에서 처음만났는데 그때 인사 딱한마디를 하고 어색함에 조용히 있었는데 그게 아이제아에게 거만함으로 보여진것 같다면서 아마 그것때문에 토마스가 "Freeze Out" 을 시작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아이제아 토마스는 직접 트위터에 "거짓말 좀 작작하고 사실만을 말해라" 라고 변호하며 늘 그래왔듯이 자신을 변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사실 토마스는 이번만 부정한 것은 아니며 매번 그런 의혹이 있을때 자신은 그에 대해 변호했고, 하다못해 자신의 15살먹은 아들까지 그에게 질문을 던지자 이제는 좀 밝혀졌으면 한다라는 마음으로 공개적으로 조던을 비판했다.
물론 이렇게 계속 조던과 아이제아가 얽히는 건 "조던 룰" 을 사실상 선두지휘하며 조던을 괴롭혔던 토마스의 업보 때문인 것은 확실하다. 위에 기자에 의하면 매직 존슨, 조지 거빈까지 같이 참여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느 누구도 토마스를 비난하지 매직이나 거빈을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특히 거빈 같은 경우는 두 사람에 비해 인기도 안티도 적을 뿐더러 구설수에 오를만한 일을 한 점이 없다는 것 역시 도움이 된다.
아무튼 이 논란과 관련해서는 확실한 사실은 아니며 토마스와 조던의 악연때문에 현재 진행중인 논란이라고 보는 게 맞다.
6.2. 래리 버드와 관련된 인종차별 논란
1987년 동부 결승에서 피스톤즈가 셀틱스에 패한 당시 무명의 백업이던 루키 데니스 로드맨의 발언으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로드맨은 벤치에서 출격해 버드의 맨투맨 마크 임무를 맡았지만, 나올때마다 버드에게 그야말로 영혼까지 탈탈 털릴 정도로 처절하게 농락당했는데, [22] 경기후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버드는 매우 과대 평가되었다. 그가 백인이기 때문에 3연속 MVP를 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발언을 토마스에게 언급했고 그의 의견을 물었는데 여기서 보여준 토마스의 발언이 바로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던 것.토마스는 기자들과의 자리에서 이에 동의한다면서 "버드는 매우 뛰어난 농구선수지만, 만약 그가 흑인이었으면 리그 최고의 선수가 아니라 그냥 잘하는 선수 정도로 비춰졌을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사실 로드맨이 한 말이었으면, 듣보잡 루키가 한 철없는 소리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는데[23] 슈퍼스타 토마스가 이에 한 술 더 뜨면서 "인종차별" 논란이 일어난 것이다.
실제로 이후 언론의 포격 대상이 된 건 로드맨이 아니라 토마스였다. 토마스는 이후 이에 "농담이었다"며 수습을 시도했으며, 로드맨 역시 "패배 직후 감정적이 되어서 한 말"이라며 버드에게 사과했다. 워낙 심하게 논란이 된 사건이라 파이널이 진행되는 도중 토마스가 로스앤젤레스로 날아와 버드와 공동 기자회견을 할 정도였다. http://www.nytimes.com/1987/06/05/sports/thomas-explains-comments-on-bird.html 이때 토마스는 자신의 의도가 "흑인 선수들의 노력에 대해서는 '타고난 재능'이라고만 표현하면서 백인 선수들의 노력에만 주목하는 편견을 꼬집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고 "내가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이해 못한 사람에게 농담을 한 게 실수"라고 했지만, 저 멘트는 누가 봐도 저런 식으로 해석될 수 없었기에 더욱 욕을 먹었다.
정작 버드는 사건 직후, "신경쓰지 않는다"면서 그렇게 극적으로 패한 경기 이후엔 그럴 수도 있다고 쿨하게 넘겼다. 버드는 저 기자회견에서 오히려 토마스를 쉴드쳐주면서 "중요한 건 내가 그 발언을 신경쓰지 않는데, 그렇다면 누구도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라면서 "아이제아가 저한테 농담이었다고 하면, 그건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만이에요. NBA에서 뛰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경기 다음에, 라커룸에서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상황은, 우리(선수들)과 대화하기 최적의 순간은 아닐 거에요. 그것(발언)에 대해 질문도 많이 받아봤고 저희 가족에게 얘기도 했지만, 저희 가족은 여전히 아이제아 토마스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
토마스를 인종차별자로 몰아가기에는 당장 친한 동료가 빌 레임비어 역시 백인이었고 그 당시 코치였던 척 데일리, 단장 잭 맥클로스키 등은 모두 백인이었다. 그 당시 말투도 인종차별 말투보다는 그저 기분도 상했고 (다 이긴 게임을 버드의 스틸로 졌다.) 로드맨도 지원사격하는 마음으로 한 것에 가깝다 볼 수 있다. 여담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 피스톤즈는 팀워크가 더 강해졌다고 한다.
로드맨은 이 사건으로 "아이제아가 무슨일이 생겨도 날 도와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고 표현했다. 사실 로드맨의 멘트는 정말 바보같은 멘트였다. 디트로이트의 기자는 이를 두고 "섬세하지 못한(unsophisticated) 로드맨이 처음으로 백인에게 압도당하고 나서 한 멘트"라고 표현했는데, 당시 루키이던 로드맨은 세련되게 말을 표현하는 재주가 없었다. (로드맨은 이후에도 계속 말재주는 없었다) 무엇보다 실력으로 압도하고 나서 "저 녀석 백인이라서 주목받을 뿐이다"라고 하면 일침을 가하는 게 되지만, 당시 버드는 최종전에서 37점 9리바운드 9어시스트로 양팀 통틀어 최고의 활약을 했으며, 시리즈 통틀어 27점 10.4리바운드 7.6어시스트 야투율 48.6%로 마찬가지로 맹활약을 했다. 경기당 16분 뛴 로드맨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제아 토마스도 23.1점 3.7리바운드 9.1어시스트 야투율 42.3%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버드에게 밀렸다. 게다가 5차전에서 시리즈 최고의 플레이를 한 버드와 최악의 턴오버를 한 토마스였는데, 실력으로 압도당하고 나서 저런 소리를 하니 "네깟게 뭔데 그러냐"면서 언론의 포화를 맞은 것. 보스턴도 아닌 시카고 언론인 시카고 선타임즈의 헤드라인은 "인정해라! 버드는 놀라운 선수야(Admit it! Bird is an incredible player)"였으니, 전국적으로 등을 돌린 것. 뒤집어 말하면 저 정도로 멍청한 멘트조차 쉴드를 쳐줄 정도의 리더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줄 것이란 신뢰를 준 것이다.
이 사건이 있은지 26여년이 지난후에 인디애나에서 열린 2024년 올스타 게임 직전에 토크쇼에서 토마스는 이때를 회상하며 버드에게 "그때 네 손에 내 선수 인생이 달려 있었어. 네가 원했다면 내 커리어를 완전히 망가뜨릴 수도 있었지. 그런데 너는 그러지 않았어." 고마움과 함께 경외감을 표시했다. 이에 버드는 실제로 본인 역시 경쟁심에 사로잡히게 될때 최악의 실수를 하는 법이기도 하다면서 그게 본심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에게는 당장 벌어지고 있는 매직과의 파이널이 더 중요했던데다가 본인 역시 자신이 어떻게 발언하느냐에 따라 토마스의 커리어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더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기도 했다라고 마무리 지었다.
6.3. 애드리안 댄틀리 트레이드 논란
위의 버드 논란이나 조던 논란보다는 크지 않는 논란이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논란이며 애드리안 댄틀리와 계속 엮이는 입장인지라 서술한다. 일단 결과만 놓고보자면 아이제아 토마스가 댄틀리를 트레이드 시키는데 주동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정도이다.댄틀리가 계속해서 하고 있는 주장으로 자신이 디트로이트에서 댈러스로 트레이드 된것에 아이제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다 라고 주장하는 것. 댄틀리는 1970년대말부터 유타에서 대활약하고 1986~87 시즌부터 피스톤즈에 합류하여 두 시즌을 함께 했다. 하지만 1988~89 시즌을 치르면서 댄틀리가 팀의 보스인 토마스에게 자신의 공격 롤을 더 늘려달라고 요구하자, 토마스가 화를 내며 구단에 댄틀리의 트레이드를 요청해 결국 자신이 댈러스로 떠나게 되었다며 하소연 했다. 그러나 토마스가 댄틀리의 트레이드를 요구했다는 이야기는 댄틀리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었으며, 그 당시 단장인 잭 맥클로스키는 "절대 그런적이 없다. 댄틀리 트레이드 때 아이제아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라며 전면 부정하고 토마스를 변호했다. 한편으로 댄틀리가 감히 척 데일리의 지시에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했고,[24] 이 때문에 데일리와 댄틀리의 사이가 벌어지자 토마스가 나서서 그의 트레이드를 요구했다는 설도 있다.
다만 당시 댄틀리는 다른 선수들과 관계는 좋은 편이었으며, 그의 놀라운 포스트업과 탁월한 자유투 유도능력 등 수준 높은 공격 기술 덕분에 동료들에게 선생님으로 불리면서 존중받는 분위기였다.[25] 또한 구단 역시 크게 줄어든 공격기회 속에서도 20점 이상을 계속 보장할 수 있는 댄틀리를 굳이 트레이드할 이유가 없었다. 일부에서 레이커스에게 패하고 분위기 쇄신을 위해 마크 어과이어와 트레이드를 단행한 이유도 있다고 했지만, 상식적으로 구단에서는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과이어 역시 뛰어난 득점력으로 20점 이상 기대할 수 있는 탁월한 득점원이었으나, 아무래도 기량이나 경력, 명성에서 댄틀리의 한 수 아래였다. [26]
사실 댄틀리는 1970년대 말부터 전형적인 약팀의 에이스로 자리하면서, 196cm의 크지 않은 신장으로도 엄청난 포스트업 기술로 상대 골밑을 박살내고, 탁월한 파울 유도 스킬과 돌파능력, 준수한 미들슛까지 겸비하여, 무려 4년 연속 평균 30점 이상을 올리고 두번의 득정왕을 차지한 리그 최고 수준의 득점기계이자 스타였다. 특히 득점왕을 차지했던 두 시즌을 포함, 4년연속 30득점을 올릴 당시, 무려 연평균 57%의 야투율을 기록했으며, 통산 야투율이 54%에 달하는 효율성 높은 기술을 가진 엘리트 스코어러였다. 디트로이트 합류 이후 공격 점유율이 3분의 2 수준으로 감소했음에도, 2시즌 모두 20점 이상을 올려줬을 정도로 댄틀리의 기량 자체는 거의 하락하지 않았다. 1988~89 시점의 댄틀리는 여전히 공격 기회만 충분히 보장되면 25점 이상 뽑아줄 수 있는 특급 스코어러였다. 그러나 타이트한 수비 성공 이후, 속공을 전개하며 토마스를 축으로 최적의 득점 위치에 볼을 배급하거나, 철저한 협업 플레이 속에 오픈 찬스를 끌어내는 것이 장기인 디트로이트의 시스템에서, 뛰어난 개인기로 공격적인 포스트 업 구사와 돌파가 장기인 댄틀리의 공격 옵션을 그보다 더 늘릴 경우, 토마스가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가며 구축한 팀의 공격시스템이 망가질 우려가 있던 것이다.
여기에 상대팀들에겐 악명을 떨친 배드 보이즈였으나, 팀을 상징하는 정신은 '희생' 이었다. 보스 기질이 강한 토마스는 경기장에 들어서면 팀과 동료에게 가장 좋은 찬스를 만들기 위해, 팀원들이 유기적으로 만들어 준 찬스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몸은 전혀 돌보지 않고 덤벼드는 투지의 화신이었다. 듀마스는 마음 먹으면 30점 이상 올려줄 수 있는 득점력이 있었으나, 공격 기회에 전혀 욕심을 내지 않은 채 철저한 백코트 수비의 핵이자 상대팀 에이스 전담 마크맨 역할을 기꺼이 수행했으며, 동료들과 연계한 헬핑 디펜스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제일 먼저 뛰어드는 등 팀을 위해 아낌없이 희생했다. 레임비어 / 마혼 등의 터줏대감들도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팀 컬러 속에서 댄틀리의 요구대로 공격 옵션을 더 늘려준다면 필연적으로 모두가 희생하는 팀 분위기가 깨질 우려가 있었다. 또한 댄틀리의 탁월한 개인 기에 의존하는 것이 늘어날수록, 수비와 공격의 타이트하던 흐름이 느슨해 질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댄틀리는 계속해서 하던대로 공을 요구했고 토마스와 데일리는 그의 그런 요구를 거절했던 것. 이렇게 점점 사이가 벌어지던 중 댄틀리가 트레이드 될 수 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는데 바로 댄틀리가 데일리의 교체 요구를 거부했던 것이다. 데일리와 댄틀리는 코트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욕설을 섞어가며 말다툼을 했고 결과적으로 댄틀리는 코트에서 나오지 않았고 교체 대상이었던 로드맨은 둘의 눈치만 보다가 다시 벤치에 앉았다.
그 이후에 락커룸에서 데일리와 댄틀리가 서로 심한 소리를 질러가며 언쟁을 벌였으며 그 이후로 데일리는 댄틀리의 트레이드를 결정하게 된다. 결국 아쉬운 준우승 다음 1988~89시즌 중, 댄틀리는 마크 어과이어와 맞 트레이드 되어 댈러스 매버릭스로 떠나게 된다. 그런데 맞트레이드 대상이 또 논란이 되는 게 바로 그가 토마스의 절친이었던 마크 어과이어였던 것. 그렇기에 대중들의 눈에는 토마스와 알력다툼에서 진 댄틀리가 토마스의 요구에 의해 트레이드 된 것으로 보였으며 그렇기에 그 당시에 꽤나 논란이 되었고 댄틀리는 그 주체를 당연히 토마스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물론 어과이어 역시 실력이 있는 포워드였던 건 사실이지만, 기량 자체만 놓고보면 댄틀리가 조금 더 나았다고 볼 수 있었다. 사실 1988-89년 우승은 굳이 어과이어가 없었고 댄틀리가 있었어도 상대인 레이커스가 매직과 주전들의 부상이 심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우승을 거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어과이어와 댄틀리의 차이가 우승을 가져오지는 않았을 것이라는것. 단 댄틀리와 어과이어의 큰 차이점이 있었다면 그건 마음 가짐이다. 피스톤즈는 팀의 성향상 댄틀리처럼 고투 스코어러가 딱히 필요한건 아니었고 오히려 팀원들과 케미가 잘 맞는 선수가 필요했다. 게다가 어과이어는 1989-90년도에 팀이 슬럼프에 빠지자 로드맨에게 주전을 양보할 정도로 융통성 있는 선수였다.[27] 그렇기의 팀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실력이 더 좋았을 댄틀리보다는 어과이어가 더 맞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토마스 뿐만 아니라 여러 증언들은 단순히 토마스의 입김때문에 댄틀리가 트레이드 되지 않았다는 증언에 힘을 실어준다. 당장 단장인 잭 맥클로우스키는 이 루머가 나왔을때 "절대 그렇지 않다. 토마스는 전혀 관련한 것이 없다" 고 못을 박았으며 결정적으로 트레이된 사건이 데일리와의 불화였던 걸 생각해보면 토마스만이 아니라 데일리도 그를 문제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초반 합류와는 달리 댄틀리는 팀의 입지가 계속 좁아지는데 한 기자에 따르면 트레이드 시점에 "댄틀리를 지원해주는 사람은 비슷하게 조용한 성격인 듀마스 밖에 없었고 대부분은 토마스를 지지했다" 라는 발언을 함으로 락커룸에서도 댄틀리의 인망이 딱히 높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토마스의 강한 성격, 토마스의 악명 그리고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토마스 위주의 체제가 가져온 결과로 토마스의 영향이 아예 없었다고 보기는 무리지만 토마스가 주동해서 댄틀리를 몰아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6.4. 1991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퇴장 사건
토마스의 승부욕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건이자 그의 인생의 가장 큰 흑역사로 꼽힐 정도로 비매너 행위로 꼽히는 사건. http://www.youtube.com/watch?v=h_z_68NdbqM (7분 44초부터)1991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4차전에서 승부가 기울자 데일리 감독은 주전 멤버들을 모두 뺐고 이들은 홈 관중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으며 코치진과 포옹을 하는 등 훈훈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토마스와 레임비어를 필두로 한 주전 멤버들은 모여서 무슨 결정을 내렸고 이 결정이 바로 코트를 퇴장해버리는것. 결국 게임 종료 7.9초를 남겨두고 토마스와 레임비어를 필두로 한 주전 멤버 대부분은 퇴장해버렸다. 이때 심지어 불스 벤치 앞을 지나갔는데, 위의 영상을 보면 조던을 포함한 불스 주전 멤버들의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걸 감상할 수 있다.
사실 퇴장 자체는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이들이 경기 직후 관례로 되어있는 상대팀과의 악수[28]를 거부한것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29] 아이러니한 점은 사실 2년전 래리 버드의 셀틱스도 똑같이 퇴장을 했다는 점이다. 이때 제대로 악수를 한 사람은 맥헤일정도... 단 버드의 셀틱스와 달랐던점은 대부분의 셀틱스 멤버들은 조용히 나갔던 반면에 토마스와 피스톤즈는 하필 코트를 가로질러 나가는 바람에 셀틱스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욕을 먹은 것. 셀틱스와 피스톤즈는 실제 형태가 굉장히 다르다 자세한 상황은 후술.
왜 토마스가 퇴장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가설이 나온다. 단순히 게임을 져서 그렇다기에는 조금 복잡한 면이 있는데 토마스는 나중에 NBA Open Court란 프로에 출연해 이 때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직접 "조던과 필 잭슨 등 불스 전원이 우리에게 챔피언에 합당한 대우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자회견에서 레임비어가 깡패(thug)다, 우리가 (피스톤즈)가 농구 전체에 나쁜 영향을 준다느니 무례하게 굴었다"고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이유를 밝히면서, 이런 태도에 화가 나 당시 벤치에 앉아있던 주전선수들이 "그냥 나가자"고 결정을 내렸다고 한 바 있다. http://www.youtube.com/watch?v=lFK82GvfYyc
나중에 촬영된 다큐멘터리 "배드 보이즈" 에서도 토마스는 "나는 그 어떤 팀이 자신들이 우승후보에서 끌어내리려는 팀을 그런식으로 말한 적을 본적이 없다" 라고 말하며 그 이유를 밝혔다. 그 발언은 바로 불스가 3-0으로 동부 지구 우승전에서 앞서며 1승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한 발언으로 조던과 불스는 "피스톤즈는 지저분한 농구로 리그를 망치고 있다" / "피스톤즈가 사라진다면 디트로이트를 제외한 모든 리그는 기뻐할 것이다" 라고 공개적으로 피스톤즈를 디스한 것을 가리킨다. 바로 전 해에 피스톤즈가 불스를 7차전에서 이겼을때 아이제아 토마스와 마이클 조던은 포옹을 주고 받았던 점을 생각해보면 아이제아의 반응은 동부 결승전에서 진 분노보다는 압도적으로 앞서있는 상태의 불스 측이 상대적으로 약자에 있었던 자신들을 매장시키려 했다는데 더욱 더 분노했던 것. 이 사건의 주동자가 토마스였을 것이라고 기정사실화 했지만 정작 본인들은 정작 레임비어와 토마스 등 당사자들은 그것을 부인하며 주동자가 누구인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평소 토마스의 성향을 보면 충분히 토마스였다고 추측해볼 수는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토마스는 나중에는 후회하는 입장을 보이며 "Should we have been bigger? Yes." 라고 이야기로 하였다. ("더 마음 넓게 굴었어야 했나? 아마도..." 정도로 해석) 그러면서 "다시 동일한 상황이 온다면 악수를 하겠다." 라면서 "비록 불스가 자신들에게 무례하게 굴었더라도 똑같이 대해주면 안되었으며 상대의 행동에 관계 없이 우리가 올바른 행동을 했어야 했다.(take the high road.)"고 한 바 있다.
사실 토마스는 이날 방송에서 옛 팀에 대해 좀 지나칠 정도로 쉴드를 쳤는데 피스톤즈가 폭력에 가까운 수비와 부상을 유발하는 비매너 플레이로 악명을 떨친건 엄연한 사실임에도 토마스는 "모든 팀이 거칠게 플레이했음에도 피스톤즈의 경우 이미지가 그렇게 박혀서 욕을 더 먹었다."는 요지로 말하기도 했다. http://www.youtube.com/watch?v=ozCXf2zH-94
까놓고 말해 저 정도 디스를 갖고 "무례하다" 운운하는 건 어이없는 발언이다. 배드 보이즈를 욕한 건 조던과 피펜뿐만 아니라 당시 모든 NBA의 선수가 그랬다. 호레이스 그랜트는 레임비어의 은퇴소식에 아무나 초대할 테니 집에서 파티를 열겠다고 했으며, 찰스 바클리는 아예 빌 레임비어에게 "Dear Laimbeer. Fuck you(친애하는 빌에게, 씨발 좆까)"란 공개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고, 보스턴의 레전드 센터 로버트 패리쉬 역시 레임비어와 맨날 싸우는 게 일이었다. 래리 버드 역시 레임비어를 포함해 피스톤즈 선수들과 허구헌날 맞붙었으며, 심지어 배드 보이즈 출신인 릭 마혼조차 필라델피아로 팀을 옮긴 첫 시즌, 친정팀을 상대로 한 첫 경기에서 레임비어가 공을 마혼의 얼굴에 들이미는 등 시비가 붙었다.[30] 이 경기에서 배드 보이즈는 불과 몇달전까지 한솥밥을 먹던 마혼을 마치 죽일듯 시비 걸었는데, 심지어 애써 멀뚱히 반응 안하는 마혼에게 토마스가 주먹을 휘두른 적도 있다. 지금에야 추억 보정이 들어가니 "사나이답다"고 하는거지 배드 보이즈는 터프한 팀이 아니었다. 진짜 나쁜 놈들이었다. 게다가 팬덤또한 특유의 팬문화가 있는 닉스와는 다르게 미시건, 디트로이트, 악명높은 플린트를 연고를 둔 만큼 팬들 자체가 공장 노동자등 3D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원정팀들은 험악하게 노려보며 쌍욕을 하는 디트로이트 다섯명과 그것을 독려하며 미친듯이 응원하는 팬들을 동시에 감내하고 버텨내야 했다.
조던 얘기가 나오니 그가 어떤 피스톤즈에게 어떤 짓을 당했는지 살펴보자. 30초 부근에 피스톤즈가 트리플팀을 하는 과정에서 마크 어과이어가 팔꿈치로 슬쩍 때리고 뒤에서 로드맨은 아예 조던을 내동댕이치면서 조던이 엉덩이뼈로 떨어져 크게 고통스러워했다. 놀랍게도 당시에 이 플레이는 파울이 안 불렸다. 1980년대 당시엔 현재와 비교도 못하게 터프했기 때문에 이런 플레이를 해도 그냥 파울이 불리는 수준이었다. 물론 이 때문에 토마스는 " 다들 피지컬했는데 우리만 욕한다"고 물타기를 시도하지만, 배드 보이즈는 피지컬해서 욕을 먹는 게 아니다. 더티해서 욕을 먹는 것이다. 버드는 그가 레임비어를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가 진짜로 상대방을 다치게 하려고(hurt) 해서 그렇다." 설명했다. 여기서 그는 레임비어보다 훨씬 피지컬했던 릭 마혼은 욕하지 않았는데, "마혼이 당신을 때릴 거라는 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부상을 입히려고(maim)하진 않았죠."라고 설명했다. 마혼, 바클리, 찰스 오클리는 터프하고 거칠기로는 레임비어, 데니스 로드먼, 토마스 같은 선수들보다 훨씬 더 했던 선수들이나 이들은 배드 보이즈처럼 욕을 먹지 않았다. 슛하는 선수 밑에 발을 집어넣어 부상을 유도하고 점프하면 내동댕이쳐서 다치게 하는 더티 플레이를 일상적으로 하는 이들은 배드 보이즈 뿐이기 때문이었다.[31]
현재 이런 식으로 불필요하게 거칠거나 부상을 입히는 더러운 플레이는 플래그런트 파울l을 받으며 플래그런트1 두개를 받으면 퇴장, 더 심한 행위는 플래그런트2로 즉시 퇴장이다. 문제는 플래그런트 파울이 도입된게 1990-91시즌이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냥 파울이었다. 실제로 조던룰은 기본적으로 조던이 돌파하면 페인트 존에서 둘러싸는건데 그렇게 둘러싸면서 툭 치는 건 양반이고 아예 목을 잡아 거꾸러뜨리거나 밀어 내동댕이치거나, 주먹으로 때리는 게 보통이었다. 유명한 한 사진에서는 피스톤즈 세명이 조던을 둘러싼 가운데 아이제아 토마스가 조던의 고간을 주먹으로 가격하는 것도 있다. 그렇게 해봤자 그냥 파울이니까. 2011년 플레이오프에서 앤드류 바이넘이 공중에서 JJ 바레아를 잡아채거나 자자 파출리아가 카와이 레너드를 아웃시키던 더러운 짓들을 일상적으로 하던게 바로 피스톤즈다. 이들이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자 NBA가 다음 시즌 플래그런트 파울 규정을 도입하고, 도입 직후 59승에서 50승으로 승수가 떨어지고 불스에게 스윕당하며 탈락한 게 우연일까?[32][33] 실제로 배드 보이즈 선수들이 사라지자 리그의 선수들은 기뻐했고, 이들은 지저분한 플레이로 선수들에게 해를 끼쳤다. 당시 배드 보이즈는 리그 전체에서 욕을 먹고 있었는데, 불스가 그런 식으로 얘기했다고 악수조차 안 하고 경기도 안 끝났는데 획 나가버리는 건 정말 치졸한 짓거리이다.
게다가 "챔피언에게 그런 얘기를 한다"며 분개하고 있는 토마스 본인도 상술했듯이 래리 버드에게 인종 차별성 멘트를 했다. 조던과 불스의 멘트는 사실인 피스톤즈의 더티플레이어를 비난하는 수준이지만, 토마스의 발언은 미국 내에서 민감한 인종요소를 건드린 점에서 훨씬 문제가 되는 발언이며, 디펜딩 챔피언의 실력 자체를 평가절하했다는 점에서 더 치졸한 발언이다. 본인은 불과 4년 전에 이런 속좁은 발언을 해놓고 이제와서 불스가 저 정도 말을 했다고 선수단 거의 전원을 이끌고 경기 끝나기도 전에 악수도 안하고 나가는 비매너짓을 한다? 이는 변명할 길이 없는 토마스의 병크이다. 실제로 이 행위 이후 토마스와 피스톤즈는 엄청나게 욕을 먹었고, 2012년 드림팀 다큐멘터리에서도 나오지만 토마스의 드림팀 탈락에는 해당 사건 이후 여론이 매우 안 좋아진 점이 결정적이었다는 로드 손의 발언이 나온다. (드림팀 선발은 1991년 여름에 이뤄졌다)
2020년에 방영된 다큐멘터리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도 해당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데, 토마스의 자기 변호에 대해 마이클 조던은 굉장히 불쾌한 표정으로 "나는 2년 연속으로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그들에게 졌지만 그들 모두와 악수했었고 그게 내가 아는 스포츠맨십이다." 라며 토마스의 발언을 일축했다. 해당 다큐멘터리 다른 회차에서 조던에게 2년 연속으로 가로막혀 준우승에 머무른 칼 말론이 불스 버스에 올라타면서까지 축하해주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많이 비교된다는 반응이 대부분.[34][35]
라스트댄스에서 해당 사건에 대한 토마스의 발언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파급효과가 얼마나 클지 알았더라면 우리 모두 멈추고 "축하해, 사랑한다"라고 했겠죠. 지금 (선수들이) 하는 것처럼요. 당연히 했을 겁니다. 하지만 당시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지면 그냥 코트를 떠났죠.
(Knowing what we know now, and the aftermath of what took place, I think all of us would've stopped and said, "Hey, congratulations. Love you man" Like they do now. Of course we would have done it. But during that period of time, that's just not how it was passed. When you lost, you left the floor.)
그리고 조던이 지적했지만 이 발언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멀리 갈것 없이 90년에 불스가 지고 난 뒤 피스톤즈 선수들과 악수하고 포옹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으며, 불스는 매배 질 때마다 피스톤즈 선수들을 축하해줬다. 또한 90년 패배 후 인터뷰에서 조던은 "그들이 우리보다 더 뛰어난 팀이고, 오늘 더 훌륭히 경기를 치렀다"고 칭찬했다. 거의 병적으로 승부욕이 강한 조던이 친하지도 않을 뿐더러 매번 자신을 때리고 상처입히는 피스톤즈가 상대였음에도 저렇게 했는데, 이건 당시에도 관례였기 때문이다. 아래 셀틱스처럼 불상사가 없다면 당연히 축하하는 게 당시에도 매너였다.
6.4.1. 셀틱스의 퇴장과 피스톤즈의 퇴장
셀틱스의 퇴장은 1988년, 피스톤즈의 퇴장은 1991년이다보니 워낙 옛날 일이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토마스가 자신들의 퇴장이 언급될 때마다 "셀틱스도 똑같이 했는데 우리는 신경 안 썼다"라고 한 것 때문에 "둘 다 똑같은 비매너지만 이미지 때문에 피스톤즈만 욕 먹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둘은 엄연히 다른 케이스이며, 실제로 셀틱스가 퇴장할 당시에는 해설진도, 디트로이트 관중들도, 선수들도 아무도 문제삼지 않았다.일단 결론부터 얘기하면 명확히 다른 사건이며, 경기를 고의적으로 지연시키고 승자인 불스를 폄훼했던 피스톤즈와 달리 셀틱스의 퇴장에는 문제될 만한 요소가 없다. .
일단 영상으로 확인하자.
셀틱스의 퇴장 영상(16분 25초부터): https://www.youtube.com/watch?v=atIYb45ZzIk
피스톤즈의 퇴장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4K9jm1pFjSE
셀틱스의 경우, 종료 직전까지 경기가 정상적으로 흘러갔다. 그러다 보스턴이 6초를 남겨두고 득점을 했고, 인바운드 패스를 받은 에이드리안 댄틀리를 보스턴 선수가 수비하다가 파울을 해서 3초 전에 시간이 멈췄다.
문제는 당시 관중들이 경기가 끝났다고 착각했는지 일제히 코트 위로 몰려들었다는 것. 당시만 해도 홈에서 중요한 승리가 나오면 관중들이 일제히 플로어로 몰려들어 같이 축하하는 것이 어느 정도 허용되었다. 관중들과 더불어 카메라까지 코트 위로 몰려들어 도저히 경기를 진행할 수가 없었고, 경기 진행요원들이 관중들에게 아직 안 끝나고 안내를 하는 동안 1분 넘게 경기가 지연된 후에야 댄틀리가 마지막 자유투 2개를 던지며 마지막 플레이가 이뤄졌다.
실제로 당시 해설진도 상황을 모른채 해설할 때 "셀틱스 선수들이 퇴장하는군요. 안전문제 같습니다.(possibly for safety reasons). 누가 다칠 수 있으니까요(Someone could get hurt)"라고 코멘트를 했다. 당연히 셀틱스 편을 들 이유가 없는 전국방송 해설진도 그렇게 멘트를 했다는 건 누가봐도 그렇게 보일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맥헤일은 퇴장 도중 토마스와 친근하게 악수를 하는데, 둘은 오랜 친구 사이였으며 이때 맥헤일은 파이널에서 잘하라고 덕담을 해줬다. 경기 장면을 보면 셀틱스가 나가는 것에 대해 토마스 정도를 제외하면 피스톤즈에서 그 누구도 신경조차 쓰지 않고, 실제로 당시엔 이슈도 안됐다.
그리고 맥헤일만 악수를 했다는 것도 낭설이다. 위 영상의 16분 47초 지점을 보면 주전 PG 데니스 존슨이 누구보다 먼저와서 피스톤즈 선수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게 명확히 보인다. (이후 중계진이 전체 화면을 잡아 또 누가 하이파이브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면 피스톤즈의 퇴장은 어땠을까? 시계가 멈추고 경기가 지연된 상태에서 퇴장한 셀틱스와 달리 피스톤즈 vs 불스전 당시는 인플레이 상황이었다. 종료를 앞두고 공격권을 가진 불스가 17초 정도를 보내는 사이 시계가 돌아가고 있는데 피스톤즈 선수들은 코트를 밟으며 경기장을 가로질러서 갔고, 이들을 따라 코칭스태프와 팀관계자들, 카메라도 따라오기 시작해 경기가 진행이 불가능해진 걸 본 심판이 일시적으로 경기를 중지시켰다. 이후 어리둥절한 불스 선수들이 일어서있는 것을 레임비어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지나가면서, 토마스는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개무시하며 지나갔다. 그 와중에 팬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거나 GM 잭 맥클로우스키와 격하게 포옹하는 건 잊지 않았다.
영상 뒤쪽에 보면 존 샐리만이 불스 벤치 쪽으로 와서 축하를 해주고 있는데, 실제로 샐리와 조 듀마스만이 피스톤즈에서 불스 선수들과 악수를 했으며, 이 둘은 성격이 좋기로 유명하다.
당연하지만 이들은 홈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퇴장했기 때문에 셀틱스와 달리 몰려든 사람들로 인한 안전 문제도 없었다.
정리하자면 셀틱스는 1.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 팬들의 실수로 경기가 지연된 상황에서 경기에 지장을 주지 않고, 2. 안전 문제가 불거지자 퇴장하라는 안내를 받아 안전요원의 경호를 받으며 퇴장했으며, 3. 도발이 아닌 안전문제로 어쩔 수 없이 신속하게 퇴장했다.
반대로 피스톤즈는 1. 멀쩡히 진행되는 경기 중 굳이 코트 위로 올라와서 경기를 지연되게 만들었으며 2. 홈코트고 코트 위에 사람도 없어서 안전문제도 없는 상황에서 독단적으로 알아서 나갔으며 3. 신속히 퇴장하는 것도 아니고 통로 앞에서 서로 포옹하는 등 홈팬들의 환호를 듣다가 나갔다.
실제로 셀틱스는 갑자기 팬들이 코트 위로 몰려들기 전인 경기 3초전까지 퇴장하려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이 정신없이 돌아가니까 어쩔 수 없이 퇴장한 것이다. 반면 피스톤즈는 룰을 어기고 경기 진행을 방해하면서까지 퇴장하는 걸 보면 도발 의도가 없다고 볼 수 없으며, 실제 토마스의 인터뷰로도 불스를 괘씸히 여겨 도발하는 의도가 있다는 게 명확하다.
즉, 결과적으로 종료 직전에 퇴장하는 형태가 된 것은 같지만, 셀틱스는 자신들의 책임이 아닌 문제 때문에 진행요원의 안내에 따라 퇴장한 것이고, 피스톤즈는 아무 문제도 없는데 불스를 엿먹이려는 의도만으로 퇴장한 것으로 전혀 의도가 다르다. 의도를 떠나 셀틱스는 관중들이 경기를 지연시킨 가운데 인플레이 상황이 아닐때 리그 측의 통제에 따라 움직였고[37], 피스톤즈는 본인들이 인플레이 상황에서 경기를 지연시켰는데 이걸 동일시하는 건 물타기일 뿐이다.
6.5. 국가대표 및 드림팀 탈락
토마스는 1980년에 올림픽 국가대표에 뽑혔었는데 하필 그때가 냉전 시대였고 올림픽 개최지가 구 소련의 모스크바였다. 결국 미국이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 불참하면서 토마스는 결국 국가대표로 뛰지 못했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는 토마스는 간절히 선발되길 원했지만 석연치 않은 이유로 드림팀 탈락. 1994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드림팀2에 뽑히긴 했지만 결국 부상으로 뛰지 못하는 등 유독 대표팀과는 별로 인연이 없는 편이었다.물론 가장 큰 논란이 되는 건 드림팀이라 불리는 1992년 농구 대표팀 탈락. 이 당시 토마스는 리그 최고의 수퍼스타 중 하나로 기량이 여전했으며, 감독 역시 그의 보스인 척 데일리였지만 영 석연치 않은 이유로 제외되었다. 대부분의 전문가와 팬들은 마이클 조던의 강력한 반대가 그 이유라고 기정 사실화하고 있다. 조던 룰을 통해 조던을 폭행 수준으로 괴롭혔던 배드 보이즈의 리더였고 위에 언급한 퇴장사건만 봐도 조던과 토마스는 융화가 될 수 없었다. 당시 조던이 원하지 않는 선수는 드림팀에 뽑힐 수 없었다는 소리도 돌았는데 어째 그냥 루머 같지는 않다. 실제로 조던은 여러 인터뷰 등에서 아이제아 토마스와 드림팀에 관한 질문을 받았는데 다소 신경질적인 정도로 거부 반응을 보였다. 한 인터뷰에서는 "아이제아 토마스에 대한 질문은 하지 마세요." 라고 이야기하고 인터뷰 하는 측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인터뷰를 하였다.[38]
위와 같은 상황에서 실력과 네임 밸류, 상징성 모두 당시 토마스에게 감히 비할 정도가 아니었던 피펜이 대신 선발된 건 상당한 이슈가 되었다.[39] 드림팀에서 피펜보다 격이 낮은 선수는 NBA에 데뷔하기도 전이었던 크리스찬 레이트너 정도였는데, 레이트너는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이 하던대로 대학 선수들로 로스터를 구성했다면 그 중심이 되었을 NCAA 최고의 수퍼스타였고, 따라서 프로 선수들의 출전을 강행한 1기 드림팀의 유일한 대학 선수 신분으로 로스터 한 자리를 차지할만한 당위성이 충분했다.[40] 사실 레이트너보다는 당시 치명적인 허리 부상으로 은퇴를 결심하는 상황에서 드림팀에 합류한 래리 버드가 더 특수한 케이스인데, 버드는 시대를 풍미한 레전드라는 네임 밸류와 상징성을 고려해 '드림' 팀의 일원으로 사실상 명예 선발 된 것이다.[41] 우승하는 건 사실상 당연한 수순이었던 당시 드림팀에게 있어, 버드 한 명이 부상으로 거의 못 뛴다는 사실은 버드와 매직, 그리고 조던이 한 팀이라는 상징성에 비하면 그리 중한 요소가 아니었다.
사실 조던뿐 아니라 불스 구단도 상승세를 타고 있던 피펜이 뽑히길 바라고 있었기에 선발 결과에 크게 환영했다. 불스와 조던은 아직 여러면에서 미숙한 피펜이 드림팀의 수퍼스타들과 함께 플레이 하면서, 그들의 노하우와 농구에 대한 시야를 배워 한단계 더 발전할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드림팀 합류가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때를 기점으로 피펜의 전반적인 실력과 함께 농구를 보는 시야가 일취월장한 건 사실이고, 올림픽을 마치고 리그에 복귀한 후 비로소 조던의 조력자, 불스의 2인자로 알고있는 그 피펜이 된 것이다.[42]
드림팀 선발 논란과는 별개로, 조던 룰 못지 않게 피펜 괴롭히기로 크게 당했던 피펜도 평소 토마스라면 이를 갈 정도로 싫어했다. 조던과는 다르게 피펜은 당시 드림팀 내에서의 낮은 위상이 무색하게[43] 노골적으로 "나는 토마스가 합류하는걸 원치 않는다" 라고 말했고, 조던과 관련해서는 "아마 조던도 원치 않을 것이다" 라면서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자서전에서 조던 등 몇몇이 강경하게 토마스의 드림팀 합류를 반대하고 있을 때 다들 이를 묵인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사실 피스톤즈를 싫어한 건 조던과 피펜만은 아니었다. 칼 말론은 파트너인 존 스탁턴이 토마스에게 심한 파울을 당하자 팔꿈치를 사용해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들며 복수할만큼 사이가 안 좋았고, 패트릭 유잉도 배드 보이즈 비디오에서 토마스와 배드 보이즈라면 치를 떠는 모습을 보여줬다. 래리 버드 역시 배드 보이즈 선수들과 크게 싸운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고, 나중에 NBA Open Court에서 농담도 주고 받으며 친해진 찰스 바클리도 그 당시에는 배드 보이즈라면 학을 뗄 정도로 싫어했으며 난투극도 여러차례 마다하지 않았다.[44] 그 외에도 드림팀에는 배드 보이즈에게 피해를 입은 선수들이 꽤 많았기 때문에, 오죽하면 훗날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서는 드림팀의 절반이 배드 보이즈와 토마스를 싫어한다는 인터뷰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나마 아이제아와 사적으로 친했던 매직 존슨만 토마스를 옹호하는 인터뷰를 했지만, 몇년 후 그의 자서전에서 "어느 누구도 아이제아와 플레이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제아가 올림픽에 참가하게 되더라도 그는 기회를 받지 못할 것."이라며 당시 토마스를 옹호한 것은 단지 립서비스였다고 고백했다.
또한 대표팀을 구성하기 시작한 게 1991년 플레이오프 종료직후였는데 이 때 토마스를 필두로 한 피스톤즈 선수 상당수가 게임 종료되기 몇초전에 라커룸으로 퇴장, 여론으로부터 격렬하게 까이던 중이었다. 위에 언급된 다큐멘터리에서는 이런 여론도 토마스의 탈락에 크게 적용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런데 그 배드 보이즈의 감독이 사령탑을 맡은 것은 아이러니.[45]
1992년 드림팀 탈락은 NBA의 뒷이야기를 털어놓는 토크쇼 Open Court에서 늘 아이제아 토마스를 놀리는 소재이기도 하다.[46] 스코티 피펜이 "조던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아마 그도 아이제아의 합류를 반대했을 것"이라고 인터뷰했을 당시, 다른 패널들의 놀림에 아이제아 토마스는 "나는 마이클 조던이 아이제아 토마스가 드림팀에 합류하는 게 싫다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고, 매직 존슨이 아이제아 토마스가 드림팀에 합류하는 게 싫다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다. 근데 스코티 피펜이? Maaaaaaaaaaan, Come on!"이라고 받아친 적이 있다. [47]
수십년 뒤에 아이제아와 한솥밥을 먹었던 존 샐리는 아이제아가 드림팀에 선발되지 못한건 조던 때문이 아니라 매직 때문이라고 주장을 했다. 샐리의 주장에 따르면 원래 조던은 자신의 의견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아닌데다가 매직이 1차로 은퇴했을때 그가 절친이라고 믿었던 아이제아가 매직의 HIV와 관련해 그의 성 정체성을 의심했기 때문에[48] 그에 큰 상처를 받은 매직이 그를 막았다는 주장이다. 마침 위의 자서전에서도 매직이 아이제아에 대해서 좋은 발언을 하고 있지는 않기는 하다. 물론 샐리는 조던과도 한솥밥을 먹은적이 있으므로 아예 관계가 없는 매직보다는 조던을 옹호하는 게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걸 단순히 "조던 옹호"라고 보기엔 샐리가 조던과 함께 뛴 세월이 너무나 짧다. [49] 반면 토마스와는 데뷔 이후 6년동안 같이 뛰었다. 위 발언은 단순히 매직을 탓하는 것이 아니고 "토마스가 매직의 성 정체성을 의심했다"는 민감한 내용이 들어가 있는데, 고작 4달도 같이 안 뛴 동료를 위해 6년 같이 뛴 동료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했다고 보긴 무리다. 즉, 샐리가 조던을 옹호하기 위해 이런 발언을 했다고 보긴 여러모로 무리가 있다.
또 드림팀의 구성을 보면 대학생인 레이트너와 등 부상으로 정상적으로 뛰기 힘든 버드를 제외하면 한 포지션 당 2명으로 구성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따라서 토마스가 뽑힌다면 포인트가드 중 한명이 대신 빠지거나 다른 포지션에서 한명 빠져야 하는데 후자의 경우 팀 자체 연습에서 균형이 맞지 않게 되고 해당 포지션에서 부상 등 문제가 생겼을 시 대처가 힘들다. 따라서 빠진다면 포인트가드인데 드림팀 결성에 큰 영향을 끼치고 최고 스타였던 매직은 빠질 수 없다.[50] 남은 것은 스탁턴인데 1986년부터 연속으로 어시스트 1위 1992년까지 스틸 1위 두번 하고 전술적으로도 말론과 픽앤롤, 토마스보다 뛰어난 외곽 옵션인 그를 제외하는 것이 팀에 도움이 될까? 1988 서울 올림픽 설욕과 NBA의 세계화 두가지를 노렸던 드림팀 입장에서는 스타 파워에서는 이미 조던, 매직, 버드가 있기에 필요 없었고 전술적으로는 스탁턴이 다 활용도가 높았기에 다른 선수들과 갈등이 없었더라도 안뽑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선수들과 사이까지 안좋았으니 어쩌면 뽑히지 않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51]
- 다만 드림팀은 구성 자체가 로스터 밸런스가 아닌, 당대 탑급 선수들을 뽑는 상징적인 팀이었다. 실제로 당시 미국과 다른 세계의 격차를 생각하면 올스타급 이상이면 그냥 아무나 뽑아도 금메달은 따놓은 당상이었고, 전력을 생각하면 건강 문제가 심각해 잘 뛰지도 못하는 래리 버드를 굳이 뽑을 필요도 없었다.(실제로 버드는 이미 프로무대에서 은퇴를 선언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포지션 밸런스를 걱정할 필요도 없는 게, 저 중 가장 합류이유가 빈약한 피펜이 빠져도 가드인 매직, 조던, 드렉슬러 모두 풀타임 스몰포워드가 가능한 선수들이다. 팀 자체 연습에서 균형도 신경쓸 이유가 없는 게, 팀 연습이란게 꼭 PG1명, SG1명...이런식으로 5포지션을 상세히 나눠서 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드림팀이 결성 초기에 몬티 칼로에서 실전처럼 한 전설적인 연습경기에서 조던 팀의 구성은 조던. 스카티 피펜, 크리스 멀린, 래리 버드, 패트릭 유잉으로 슈팅가드 한명, 스몰포워드 세명에 센터 한명이었다. 결정적으로 당시 드림팀은 대회 내내 타임아웃조차 한번도 안 부른 팀이다. 즉, 전술이고 뭐고 따질 필요도 없이 그냥 세계 무대의 팀들과 상대조차 안되는 미스매치였던 것. 실제로 로스터 중 유일하게 198cm 미만 선수라 전략적으로 활용도가 높은 스탁턴은 경미한 부상으로 네 경기, 그것도 평균 7분씩만 뛰었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리고 이건 당시 농구계가 모두 알고 있었다. 괜히 "꿈의 팀"이란 별명이 붙은 게 아니다. 즉, 토마스가 빠진 것은 로스터 밸런스나 전력 때문이라고 보기 힘들다. 오히려 토마스는 매직, 버드와 더불어 1980년대의 거물 중 하나로서 상징적인 의미로 합류하는 게 더 적합했을 인물이다. 괜히 농구계가 토마스 탈락 이후 일제히 수근거린게 아니다. 누가봐도 탈락될 선수가 아니었으니까 온갖 소문이 돈 것이다.
7. 행정가 및 감독 경력
7.1. 토론토 랩터스
토마스는 딱 1년 후인 1995년 당시 신생팀인 토론토 랩터스의 부사장으로 취임해서 많은 팬들을 놀라게 했다. 누구도 토마스가 이렇게 현장에 빨리 복귀할 줄 몰랐거니와 감독이 아닌 구단행정가로 돌아올 줄은 더욱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놀라움이 컸다.같은 캐나다를 연고로 창단된 밴쿠버 그리즐리스가 주로 한물간 노땅들을 확장 드래프트로 선발한 데 반해 토마스의 토론토는 젊고 재능있는 선수 위주로 로스터를 꾸렸다. 물론 로스터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1985-1986 시즌에 수비수상과 기량발전상을 동시 수상했던 33세 노장 가드 앨빈 로버트슨을 데려오기도 했다.
1995년 드래프트에서는 당시 토론토 팬들이 간절히 뽑기를 바랐던, UCLA의 에이스였고 1995년 NCAA 파이널 MOP 수상자였던 에드 오배넌[52]을 버리고 애리조나 대학교의 단신 가드 데이먼 스타더마이어를 지명하는 파격적인 선택을 했다. 이 때 팬들은 야유를 퍼부었지만 스타더마이어가 신인상을 수상하는 등 대활약하면서 야유가 쏙 들어갔다. 이 해 팀은 21승 61패라는 하위권 성적을 거뒀지만 시카고 불스, 올랜도 매직, 시애틀 슈퍼소닉스, 휴스턴 로키츠 등 강팀들을 한 번씩 제압하는 등 소소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NBA 구단 중 관중동원 3위를 기록하면서 나름대로 흥행에 성공했다.
1997년에는 고등학생 선수인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를 지명하면서 다시 한 번 팬들을 놀라게 했다. 스타더마이어 때처럼 야유는 없었지만 궁금증을 자아내긴 했다. 토마스는 '맥그레이디는 지금 여러 모로 부족하지만 몇 년 뒤에 엄청난 선수로 성장할 것' 이라고 자신의 소견을 밝혔다. 그러나 토마스는 맥그레이디의 성장을 지켜보지 못하고 1998년에 구단 부사장직을 사임하고, 잠시 NBC 농구해설위원으로 일했다.
어쨌건 훗날의 뉴욕 시절과 달리 토론토 시절의 토마스는 비교가 불가한 수준. 위에서 언급된 에드 오배넌 - 데이먼 스타더마이어 건의 경우, 오배넌은 NBA에서 단 2년간 별볼일 없는 성적만을 기록하고 사라진 반면, 스타더마이어는 어쨌거나 그럭저럭 주전 포인트가드에 걸맞은 성적을 기록하면서 NBA에서 13년을 뛰었다. 또한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의 경우는...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
다만 도박사가 첫번째 노름에서 확률이 낮은 곳에 배팅했다가 성공을 맛보고, 이걸 자신의 실력이라고 착각한 나머지 똑같은 배팅을 반복하다가 결국 판돈은 모두 잃게 되는 것처럼, 토마스 역시 토론토에서 했던 것과 유사한 남다른 선택지를 택하는 행위를 뉴욕에서 되풀이하다가 결국 망하게 된다.
7.2. CBA
그 뒤 토마스는 1998년에 미국의 독립 리그인 CBA(Continental Basketball Association)의 커미셔너로 취임해서 세간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비록 독립 리그라고 해도 리그를 경영하는 것과 구단을 경영하는 것은 달랐는지 토론토 랩터스에서처럼 성공적인 모습은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2000년에 CBA를 떠났다.7.3. 인디애나 페이서스
CBA의 실패 이후 토마스는 래리 버드가 건강상의 이유로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 공석이 된 인디애나 페이서스의 감독으로 취임한다. 전임 래리 버드가 3시즌 연속 인디애나를 컨퍼런스 결승, 파이널 1회로 이끌었기 때문에 감독직이 처음이며 전력 약화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감독으로 선임된 토마스에게 많은 이들이 기대반 걱정반의 시선을 보냈다. 토마스는 감독으로 있는 동안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서 썩고 있던 저메인 오닐을, 시카고 불스에서 론 아테스트를 트레이드해왔으며 알 해링턴, 자말 틴슬리 등의 젊은 선수들을 발굴하면서 팀 리빌딩을 진행했다. 토마스 재임 3년동안 인디애나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용 팀이 되었고 매년 1라운드 탈락.인디애나는 그렇게 토마스의 팀이 되고 있었으나 2003년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현장에 돌아오길 원했던 래리 버드가 구단 사장이 되었고, 래리 버드는 자신이 만들었던 레지 밀러 중심의 강력한 조직력과 수비를 내세운 농구와 달리 자유분방하고 공격적인 농구 스타일을 정립한 토마스를 경질하고 릭 칼라일(現 댈러스 매버릭스 감독)을 선택했다. 토마스의 경력은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은 편이다. 문제는 그 후였으니...
2024년 인디애나에서 열린 올스타 게임에서 인디애나의 레전드 세명인 래리 버드[53], 아이제아 토마스[54], 레지 밀러[55] 이때를 회상하는데 래리 버드가 토마스를 경질한 이유는 딱히 별다른 감정이 아닌 개인적인 교류를 더 오래한 칼라일을 더 선호해서였다고 한다.[56]
토마스는 만약 이때를 회상하며 만약 버드와 자기가 함께했다면 우승까지 바라봤을 것이라고 아쉬워했고 특히 자신이 있었다면 더 팰리스 오브 말리스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며 섭섭함을 토로했다.[57] 물론 파이널 상대가 전성기의 산왕이니 만큼 우승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만약 토마스가 감독이었다면 그의 성격[58] 그리고 피스톤즈에서 차지하는 토마스의 위상을 조합해본다면 실제로 그 사건을 일어나지 않았 가능성도 꽤나 높고, 그렇게 된다면 전력이 막강했던 페이서스가 레지의 마지막 시즌을 불태우며 전력 투혼을 발휘해 우승했을 가능성도 있기에 아예 일리가 없는 논리는 아니다.[59]
7.4. 뉴욕 닉스
토마스는 2003년 12월 22일 뉴욕 닉스의 사장으로 취임한다. 당시 뉴욕 팬들은 스콧 레이든의 돌아이짓에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가있었다. 팬들은 '레이든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했다. 레이든보다 더 못할 수는 없을 테니.의견이 갈리기도 하지만 여러 일이 있지만 레이든의 뻘짓은 대개 3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닉스의 상징 패트릭 유잉을 트레이드시켜 버린 것, 둘째가 2002년 드래프트에서 네네를 지명하고 마크잭슨과 마커스 캠비를 얹어서 덴버에 안겨주고 안토니오 맥다이스 하나 달랑 받아온 일[60], 셋째가 사상 최고라는 2003년 드래프트 9번으로 마이크 스위트니를 지명한 것[61] .2번의 경우 부상 이전의 맥다이스는 훌륭한 포워드였으므로 결과론적으로 문제일 수 있다. 문제는 3번인데 당시 뉴욕은 포워드진이 거의 포화상태였고 206cm의 포워드 커트 토마스가 센터 알바를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 스위트니라는 203cm의 단신 파워포워드를 뽑았으니 팬들이 대체 목적이 뭐냐고 비난하는 것이 무리가 아니었다.
토마스는 달라보였다. 토론토 랩터스 시절에 데이먼 스타더마이어와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를 지명했던 선견지명, 인디애나 페이서스 감독 시절 성적은 그저 그랬지만 저메인 오닐, 알 해링턴과 같이 재능있고 젊은 선수들을 중용한 점 때문에 뉴욕 팬들의 기대는 매우 컸다. 토마스 또한 취임 일성으로 팀을 빠르게 재정비해 성적을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했고, 발빠른 무브를 보였다.
토마스는 사장으로 취임하자마자 곧장 스테판 마버리를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그러면서 당시 팀의 골칫거리 중 하나였던 안토니오 맥다이스를 처분했다. 비록 마버리를 받아오면서 연봉 먹는 잉여나 다름없었던 앤퍼니 하더웨이까지 덤으로 데려오긴 했지만, 마버리는 리그 최고의 포인트 가드 중 하나였고 뉴욕 브루클린 출신이라는 플러스 요소까지 있었기 때문에 당시 언론은 호평 일색이었고 마버리 또한 고향팀에서 뛴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하며 열정적으로 뛰었다. 또한 돈 체니 감독을 경질하고 명장 레니 윌킨스를 데려왔다. 팀은 비록 1라운드에서 탈락하긴 했지만 오랜만에 플레이오프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2004-2005 시즌의 전망을 밝게 했다. 그러나... 이것들이 토마스가 뉴욕에 있는 동안 그나마 잘한 일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도 그나마다.
2004-2005시즌부터 뉴욕은 다시 처절하게 몰락해갔다. 시즌 전 불스로부터 마버리와 포지션이 겹치는 자말 크로포드를 영입한 것부터가 좋지 않은 조짐의 시작이었다. 우려대로 마버리와 크로포드는 눈에 띄는 시너지를 보여주지 못했고 팀은 시즌 초반부터 하위권을 맴돈다. 이 와중에 레니 윌킨스는 중도 경질. 게다가 선수들 사이에도 잡음이 많아 구단 분위기가 엉망이었다. 여러 모로 곤란한 상황 속에서 토마스는 2005년에 불스로부터 향후 1라운드 드래프트릭을 2개나 내주는 강수를 두며 에디 커리를 영입했고 명장 래리 브라운을 5년간 5천만 달러라는 최고 대우로 데려오는 무브를 보여줬지만 이미 막장 중의 막장이었던 뉴욕 닉스를 되살리기는 무리였다. 여기에 원래부터 사이가 나빴던 마버리와 브라운 감독 간의 갈등이 나중에는 선수단 전체와의 갈등으로 심화되면서, 결국 래리 브라운은 23승 59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찍고 한 시즌만에 해고당했다.
덤으로 2005년 오프시즌에 전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잠깐 활약상을 펼쳤던 센터 제롬 제임스를 연 600만 달러에 5년 계약으로 모셔와 팬들이 어이를 잃게 했다. 제임스의 2004-2005시즌 성적은 4.9점 3.0 리바운드 수준이고 선수경력 내내 고만고만한 기록만 낸 평범한 선수였다. 단지 2005년 플레이오프에서 대활약했다는 이유만으로 거액을 안긴 것. 제임스는 결국 평범한 성적만 남기고 NBA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62]그리고 제몫을 하지 못하는 앤퍼니 하더웨이를 처분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영입한 선수가 스티브 프랜시스. 팬들은 더욱 어이없어했다. 이 둘은 플레이 스타일이 너무 비슷했고 당연히 별다른 교체 효과를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뉴욕 닉스의 페이롤 1위 자리만 공고히 했다.[63] [64] 프랜시스에 이어 선수생활의 황혼기에 접어든 제일런 로즈까지 데려오면서 팀 페이롤은 무려 130M을 초과했다. 팀 구성은 고려하지 않고 그냥 좀 한다싶은 베테랑이면 무조건 수집하고 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브를 보여줬다.
2006년에는 아예 토마스 본인이 감독까지 겸했지만 성적은 더 떨어져갔다. 이 기간중에 역시 평범한 경력을 가진 제러드 제프리스를 또 연 500만 달러에 영입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2007년에는 잭 랜돌프까지 데려오면서 에디 커리와 함께 리그 최고의 골밑 자동문 콤비를 결성케 하면서 다시 한번 팬들이 뒷목을 잡게 했다.
토마스에게 무한신뢰를 보내던 뉴욕 닉스 구단도 잇단 삽질을 참을 수 없었는지 2008년에 토마스를 해고하였다.
7.5. 대학 농구
그 후 토마스는 플로리다 국제 대학교(FIU) 농구팀의 감독 제의를 수락했고, 2012년까지 그곳의 감독으로 있었지만 별반 성적은 올리지 못했다. 중간에 뉴욕 닉스의 사장으로 복귀하려고 한다는 얘기가 나돌면서 닉스 팬들을 식겁하게 했으나 이내 다시 FIU로 돌아갔다.7.6. 뉴욕 리버티
이미지가 영 안 좋아진 탓에 닉스로 복귀하는 것은 실패했으나 그 대신 2015년에 WNBA의 뉴욕 리버티의 사장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리버티는 닉스와 연고지, 구단주, 구장이 같은 남매팀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닉스 측에서 아이제아에게 살짝 재도전의 기회를 준 셈. 팬들의 생각과 달리 아이재아의 닉스 구단 내부의 평가가 나쁘지 않았던 듯하다. 이후 2018년까지 옛 팀 동료 빌 레임비어[65]와 함께 팀을 꾸려나갔고 이 기간 동안 팀은 세 시즌 연속 컨퍼런스 1위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결국 파이널 우승에는 실패하였고, WNBA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에 아이제아 토마스가 닉스 시절의 불명예를 어느 정도 벗어던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이후 브루클린 네츠 구단주인 조 차이가 뉴욕 리버티를 인수하면서 리버티와 닉스의 인연이 끝나고 리버티가 네츠의 남매구단이 됨으로써 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8. TNT 해설가 시절
행정가로서 활동하기 전후인 2012년과 2017년 무렵에 TNT에서 해설가 역할을 하였다. 한때 샤킬 오닐, 크리스 웨버, 레지 밀러 등과 함께 Inside the NBA 패널로 함께 했으며, 포인트 가드와 감독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날카로울때는 날카로움을 제대로 보여주기도 했고 전반적으로 괜찮은 입담을 보여주었다.여기 나오는 사람들이 늘 그렇듯 그와 관련돼서 자주 언급되는 인물은 스카티 피펜과 칼 말론.[66] 드림팀 다큐멘터리에서 아이제아가 팀에 들어오는걸 원하지 않았다는 게 회자가 되면서 피펜 이야기만 나오면 토마스는 흥분하고 패널들은 "워워워" 하는 사이.[67] 칼 말론은 팔꿈치에 맞아서 눈 주위가 크게 찢어진 적이있다. 아직도 앙금은 남아있겠지만 주로 다른 패널들이 놀리는 개그포인트로 쓰인다.
9. 여담
- 선수시절에 승부근성 하나만큼은 누구에게 뒤지지 않았다. 동시대에 활약한 선수가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마이클 조던 등등이었지만 전혀 밀리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마이클 조던을 세번이나 좌절시킨 배드 보이즈의 리더라는 버프도 있어서 올드팬들에게 사랑도 많이 받았다.
- 매직 존슨과 매우 각별한 사이다. 존슨이 초창기 버드가 이끄는 셀틱스에게 우승을 헌납하면서 크게 좌절하고 있을 때 옆에서 많이 위로해주곤 했다. 존슨이 에이즈 감염으로 은퇴한 후, 1992년 올스타전에서 팬들의 성원으로 올스타에 뽑혀서 경기에 나서게 되었을때, 몇몇 선수들은 그의 출전을 내켜하지 않았다. 하지만 토마스는 마이클 조던과 함께 에이즈에 대한 여러가지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아주는 등 많이 노력했고, 실제로 코트위에서 매직과 포옹도 하는 등 이런 우려를 불식시켜주었다. 매직이 이 올스타전에서 터트린 마지막 3점슛을 던질때, 그를 막고 있던 선수는 바로 토마스였다. 한 번 매직 존슨이 토마스의 뒷통수를 후리는 인터뷰를 해서 (요약하자면 토마스 성격이 드러워서 올림픽에서 아무도 토마스가 오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사이가 틀어지긴 했었지만 요새는 좀 나아진 편. 가장 최근에 진행한 쇼에서 서로를 바라보면서 화해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서로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는 가슴 뭉클한 장면을 볼 수 있다.
- 2016년 ESPN에서 실시한 포인트 가드 순위에서 토마스가 올라왔는데, 토마스가 스탁턴과 커리 보다 낮게 측정되었다 (스탁턴 3위 커리 4위 토마스 5위). 이에 매직은 트위터로 "스탁턴과 커리가 아이제아 보다 낫다고? 뭘 말도 안되는 소리를. 내가 한마디만 하지. 내가 결승전에서 토마스랑 붙은 적이있는데 다치고 다리 저는 토마스였어. 그런데 걔가 한 쿼터에 25점을 넣었지." 라고 말하며 토마스를 저 둘보다 치켜세우기도 했다.[68] 실제 토마스를 까는 사람들 조차 인성이나 그의 경영 / 감독으로서의 실패에 대해서 까지 실력으로는 까지는 않는다.
다만 포인트 가드 순위에서 아이제아가 밀린 이유는 바로 기록. 여러 지표에서 그가 팀 오펜스에 차지한 비중이 아주 크진 않았다는 점이고 효율성 역시 높지 않다는 점이다. 또한 1차 기록을 비롯해 2차 기록도 별로 높지 않다는 점도 포함이다. 그가 뛰어난 포인트 가드인건 사실이지만 팀의 에이스로서 공격에서 캐리를 다 했다는 건 의문이라는 것. 디트로이트의 우승이 아이제아의 에이스 기질보다 팀플레이나 디펜스의 힘이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다.[69][70] 비교적 낮은 USG%에도 불구하고 TS%가 높지 않다는 점을 꼽았다.[71] 선수의 평가라는 게 한 순간의 임팩트만으로 평가를 하는 게 아닌 커리어 전체를 놓고 평가를 하기 때문에 밀린점도 없지않아 있다. 반대로 스탯은 낮아도 순위가 높은
제이슨 키드가 있긴 하지만 아이제아의 순위가 키드보다 높게 측정되고 있으며, 키드도 그 스탯 때문에 컨퍼런스 파이널 한 번 못가서 조롱을 받는
크리스 폴과 비슷한 레벨로 취급을 받는다.
즉 같이 농구를 했던 내부자들 입장에서는 높게 취급을 받지만 동시대를 보지 못하고 숫자와 통계로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는 평가가 상대적으로 박한 선수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피스톤즈의 운영방식이 지금의 스퍼스의 운영방식과 비슷했다고 보면 된다. 지금 포포비치의 방식처럼 배드 보이즈의 데일리는 선수층을 폭넓게 사용했고, 주전 선수였던 토마스, 듀마스 등도 에이스치고는 아주 많은 출장 시간을 받지는 않았다. 또한 팀의 공격성향도 공격위주보다는 수비위주에 가까웠다. 그러니 개인 스탯 축적에 불리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토마스는 팀과 승리를 위해 개인기록이나 자신의 욕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선수였다. 그가 속한 팀의 동료들 모두가 그런 리더의 철학에 따라, 철저한 희생으로 자신의 욕심을 배제했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통계에서 숫자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숫자만으로는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토마스는 피스톤즈의 스타일 때문에 개인기록 뿐 아니라 수상실적에서도 손해를 많이 본 편이다. 토마스는 올NBA팀 선정이 87년 이후 끊겼고, 우승 당시에 새로 신설된 써드팀 가드 자리엔 오히려 조 듀마스가 선정되었다. 스탯상 그의 전성기는 20득점 10어시스트 이상을 4년 연속으로 기록하던 84~87시즌까지였는데, 2연패 시절엔 18-9 정도의 스탯을 기록했다. 사정을 모르고 기록만 보면 "토마스가 약간 하락세여서 듀마스가 새로운 에이스로 떠올랐나보다"고 착각하기 쉬우나, 실제로도 우승 당시 독보적인 에이스는 토마스였다. 물론 득점력이 좋은 듀마스를 1옵션으로 민 것은 맞으나, 이때 피스톤즈는 개인기록을 신경쓰는 팀이 아니었다. 개인기량을 따지면 토마스는 저때 20-10을 넘기고 올NBA세컨팀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선수였다. 실제로 당시 조던, 매직, 버드 등과 라이벌 구도였던 것은 토마스였으며, 피스톤즈와 붙을 때 불스는 조던의 부담이 커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키 차이가 많이 나는 조던에게 (평소 매치업이 듀마스가 아닌) 토마스에 대한 맨투맨 수비를 시킨 적도 여러번이었다. 그만큼 위력적인 선수였고, 리그 내 최고 선수 중 하나였다.
앞으로 토마스에 대한 '국내평가'는 계속 낮아질 것 이다. 이미 30년전 선수이고 오직 스탯과 개인수상으로 평가하며 무엇보다 토마스의 플레이를 직접 체감하지 못했다. 또한 대부분 10~20대 연령층이 활발히 활동하고 현역선수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기에 토마스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각박해질 것 이다. 팀의 에이스로 우승 2회를 차지 했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일이며 역사적으로도 이런 선수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72] 10년차 이상의 동포지션에서
존 스탁턴,
제이슨 키드,
스티브 내시,
게리 페이튼,
토니 파커,
크리스 폴 등 토마스와 같이 에이스로 우승을 이끌지 못했다.[73] 파커의 경우
팀 던컨이라는 역대급 선수가 있었으며 실제로 던컨이 팀의 핵심이였다.[74] 게다가 정규시즌 에이스 + 파이널mvp까지 차지한 포가 로 기준을 더 강하게 두면 이는 정규시즌 백투백 mvp와 4번 우승을 차지한 2022시즌 이후의 스테픈 커리만 달성했을만큼 80년대 후반 토마스의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를 체감할수 있을 정도다. 토마스는 선수경력이 상대적으로 짧아서 누적 기록 등에서 손해를 보았지만 선수경력 중 리그 MVP를 제외한 다른 부분에서 성과를 보였기에 무의미한 말년시절을 보내기 않고 깔끔하게 은퇴했다.
- 웃음이 굉장히 매력적인 남자이다. 그가 한번 미소 지으면 아무리 화난 사람이라도 그 미소를 보고 화를 풀 수 있을 정도. 미소를 지을 때 들어가는 보조개도 포인트. 여기에 잘생긴 외모와 동안도 한몫 한다. 실제로 토마스의 선수 시절과 은퇴 후의 사진을 보면 별 차이가 없다. 거기다가 현재 50세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주름살이 거의 없다.
- 젊은 아이제아 토마스와도 친분이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문자를 통해 격려의 말을 전한 적이 있다는 듯. 실제로 한 TV쇼를 통해 직접 만남을 가진 적도 있었는데 젊은 아이제아 토마스가 이름 때문에 팬들에게 부자관계 아니냐는 오해를 받는다고 말하자 자신이 직접 친아버지라는 루머를 퍼트린다고 답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녹화는 계속되었는데 영상을 찾아보면 둘이 훈훈한 선후배 사이인 것을 알 수 있다.
- 선수 시절 NBA에서도 손꼽히는 싸움꾼인 릭 마혼(208cm)에게 겁도 없이 대놓고 안면 죽빵을 날린 걸로도 회자되고 있다. 웬일로 마혼이 그때 대응을 안하고 참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토마스의 사지가 뜯겨 나갔을지도...어쨌든 당시 업계에서 알아주는 주먹꾼 릭 마혼에게 겁도 없이 주먹을 날린 토마스도 대단하긴 했다. 사실 이 표현은 마혼과 토마스의 관계를 잘 몰라서 한 소리다. 그 직전까지 토마스와 마혼은 팀 동료로 끈끈한 동료애를 과시했었다. 마혼은 토마스의 승리를 위한 열정과 팀을 위한 희생에 크게 공감하여, 그를 팀의 보스로 인정하고 토마스의 리드를 충실하게 이행했으며, 스스로 행동대장 및 악당 역할을 자청했던 사이이다. 게다가 위에서 표현한 장면은 마혼이 트레이드 된 후, 배드 보이즈를 상대로 처음 만나게 된 경기였다. 위에 보충 설명에 자세하게 부연했는데, 여전히 디트로이트 선수들을 존중했던 마혼과 달리, 배드 보이즈는 토마스와 레임비어, 마혼의 전 꼬붕 로드맨까지 원수처럼 덤벼드는 바람에 마침내 대 난투극이 일어나게 되었다.[75]
- 훗날 매직존슨과의 인터뷰에서 존슨이 91년에 디트가 시카고에게 맥없이 스윕을 당한점에 대해 무척 의아해하자 토마스는 "백투백우승을 차지하고 난 뒤 3peat의 큰 욕심이 있었다. 3peat은 매직도 버드도 못해본 거라 기합이 단단히 들었고 무리하게 슛연습을 시도하다 손목이 이상하다 싶어 병원가보니 의사가 절대 공 던지지 말라고 할만큼 본인 커리어의 처음으로 심각한 부상을 입었던게 크다"고 답변했다. 사실 88년 파이널에서는 오심논란이 나온 6차전에 1점차 분패로 결국 7차전끝에 준우승(총 득실차는 디트가 우세)을 한 점도 있어 여러모로 토마스는 3peat할 팔자는 아니었던 모양. 본인이 매직의 3peat을 저지하고 3년 연속으로 물먹였던 조던에게 3peat이 저지당하고 그 조던이 3peat을 달성한 것도 재밌는 사실.[76]
- 르브론 제임스를 높게 평가하기로도 유명하다. 특히 마이클 조던과의 비교에서 르브론을 세간의 인식보다 높여주기에 혹자는 토마스와 조던의 관계때문에 토마스가 어그로를 끄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 토마스는 그런거 없고 나와 조던의 사이가 좋지 않은건 사실이지만 그는 내 아들에게만큼은 상냥하게 대해주었고 나는 거기에 대해 감사한다. 그에게 악감정은 없다고 하며, 르브론과 조던 둘이 같이 드래프트에 나온다면 누구를 선택하겠냐는 질문에 르브론을 선택하며 말하길 그가 명전급 감독[77]을 만나거나 대학을 나왔다면 지금의 커리어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찍었을 거라고 말한바 있다.
10. 관련 문서
[1]
조폭 보스. 실제로 성장 과정이나 인물이 조폭 보스에 가깝다.
[2]
동안의 암살자로 번역할 수 있다. Charlotte Observe에서 취재한 상대팀 감독이 "I call him the baby-faced assassin because he smiles at you, then cuts you down."이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이 별명은
크리스 폴을 거쳐 2014년 이후에는
어떤 슛 잘던지는 동안 농구선수가 가져갔다.
[3]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에서 그를 실력으로는 리스펙한다고 말했다.
[4]
흥미롭게 아이제아도 조던의 실력만큼은 절대 까지 않는다.
[5]
사실 스피드와 점프력 모두 강한 각력을 필요로 하기에 대체적으로 빠른 선수들은 점프력도 높다. 스피드로 유명한 앨런 아이버슨은 단신임에도 풋백 덩크도 쉽게 할 정도로 미친 점프력이었고, 마찬가지로 단신에 재빠른 T.J. 포드의 경우도 점프력이 44인치에 달했다. 크리스 폴처럼 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점프력이 덜 부각되는 선수도 최대점프력이 38인치나 되었다. 인간탄환인 우사인 볼트의 경우에도 농구실력은 비교적 평이하지만 셀레브리티 게임에서 손쉽게 덩크를 성공시키곤 했다.
[6]
아이재아 토마스의 현역 시절엔 지금처럼 선수의 발목을 보호해주는 고기능 농구화가 없었다. 철인으로 유명한
마이클 조던이 그의 시카고 커리어에서 유일한 큰 부상을 당한 이유가, 착지할 때 발에 무게분산을 안하고 그냥 착지해서이다. 조던보다 13cm 작은 토마스가 덩크하기 위해서는 거의 풀점프를 해야하는데, 쿠션도 없는 농구화를 신던 토마스가 그렇게 하는 건 상당히 위험하다. 이 때문에 당시 단신선수들은 덩크빈도수가 현대 단신선수들에 비해 훨씬 적었는데, 이건 토마스의 경우에서처럼 점프력이 뛰어난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7]
물론 이 시대가 3점슛을 그리 많이 쏘지 않았던 시대임을 감안해야 한다. 3점슛을 잘 쏜다는 버드도 100개 이상을 던지지 않았다.
레지 밀러등의 선수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80년대 농구의 기초적인 원칙은 가능한한 가까운 곳에서 슛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걸 감안해도 적게 쐈는데 성공률이 떨어졌기 때문에 확실하게 3점슛 능력은 현대 가드들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팩트이다.
[8]
특히 전술한 '공은 낮게, 허리는 높게'라는 포인트 가드의 기본 드리블 자세를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선수는 현역중 폴 뿐이다. 동시대 뛰어난 포인트 가드인 커리나, 스티브 내시는 공이 높은 편이고,
카이리 어빙같은 선수는 자세가 지나치게 낮아서 돌파 뒤 골밑 트래픽을 찢는 킥아웃 패스 정확도 및 시야확보에 약점을 보인다.
[9]
참고로 폴은 어렸을 때부터 아이제아 토마스의 플레이 영상을 보면서 연습해왔다. 어찌보면 폴의 플레이 원천은 아이제아라고 봐도 무방하다.
[10]
이름을 말할수 없는 어떤 대학교에서는 10만달러가 들어있는 돈가방을 들고 찾아와 실제로 10만달러를 어머니에게 보여줬고 이를 본 자기와 그의 형제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어머니는 보는척도 안하고 거절을 했고 이에 자기와 형제들은 어머니에게 서운해했지만 지금은 자기 어머니가 왜 그랬는지 이해한다고 예기했다.
[11]
오하이오 주 오어빌 출신. 오어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하이오 주립대학교로 진학하여 프레드 테일러(1920~2002) 감독의 지도 하에 선배 제리 루카스, 동기
존 하블리첵과 함께 1960년 NCAA 전국대회 우승에 공헌했고 학업에선 역사 및 행정학을 전공했다. 1962년 졸업 후 쿠야호가 고등학교 농구부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여 1963년 군 입대 후 미국육군사관학교 코치로 선임되었고, 1965년 감독으로 승격하여 임기 6년 동안 마이크 슈셉스키 등을 기르는 한편 NIT에 4번 진출시켜 1970년 대회에서 3위를 땄다. 1971년 인디애나 대학교로 옮겨 임기 29년 동안 NCAA 전국대회 우승 3회(1976, 1981, 1987), NCIT 우승 1회(1974) 등의 무수한 업적을 남기며 토마스 외에 켄트 벤슨, 짐 크루즈(전 에반스빌 대학교 감독), 마이크 우드슨(현 인디애나 대학교 감독), 우베 블랍, 랜디 휘트먼(전 워싱턴 위저즈 감독), 스티브 알포드, 제이 에드워즈, 그렉 그레이엄, 칼버트 체이니, 앨런 헨더슨 등 유수한 제자들을 남겼다. 그러나 다혈질적 성격 탓에 1985년 퍼듀전 때 의자 내던지기 등이 구설수에 올랐고, 2000년 3월에 CNN을 통해 제자 닐 리드의 목을 조르는 모습이 담긴 3년 전 훈련 영상이 공개되면서 한달 후 마일스 브랜드 총장으로부터 '불관용 조치'를 받았으며 9월에는 존칭 없이 인사한 한 신입생의 팔을 세게 잡은 것이 화근이 되어 감독직에서
해고당했다. 2001년 텍사스 공과대학교 감독으로 현장에 복귀하여 임기 7년 동안 NCAA 전국대회 진출 4회, NIT 진출 1회를 각각 기록했고, 특히 2005년 전국대회 때 16강까지 갔다. 2008년 2월 4일 은퇴 시까지 통산 전적 902승 371패를 기록했으며,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마이클 조던, 스티브 알포드 등을 포진시켜 금메달을 따게 했으며 1992년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2006년 미국 대학농구 명예의 전당에 각각 헌액되었고, 지도자 은퇴 후 2015년까지 ESPN 대학농구 해설위원으로 재직한 바 있다. 아들 팻 나이트도 아버지처럼 지도자의 길을 걸어 텍사스 공대와 라마대에서 감독까지 맡았다가 2014년부터 인디애나 페이서스 스카우터로 재직 중이다. 또한 밥 나이트의 코칭 트리에 속한 인물로는 전술한 코치 K와 짐 크루즈 외에 돈 디보(전 테네시 대학교 녹스빌 캠퍼스 감독), 밥 웰티치(전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캠퍼스 감독), 데이브 블리스(전 뉴멕시코 대학교 감독), 밥 도네왈드(전 웨스턴 미시건 대학교 감독), 로이스 월트먼(전 인디애나 주립대학교 감독), 머레이 바토우(전 이스트 테네시 주립대학교 감독), 크리스 비어드(전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캠퍼스 감독), 마이크 데이비스(전 디트로이트 머시 대학교 감독) 등이 있다.
[12]
참고로, 토마스를 제치고 전체 1순위가 된 선수는, 후일
아드리안 댄틀리와 트레이드되어 피스톤즈 유니폼을 입고 토마스와 함께 2회 우승을 차지한 댈러스 매버릭스 출신의 스몰 포워드 마크 어과이어(Mark Aguirre, 드폴대). 둘은 같은 도시에서 자란 절친이었으며 밥 나이트가 자기 집에 오기 전까지는 어과이어가 있는 드폴대에 자신도 가기를 내심 기대했으며 어과이어가 피스톤즈로 트레이드 되었을 때 썩 내키지 않았던 팀 동료들에게 어과이어를 소개해주고 관계를 좋게해준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3]
데니스 로드맨은 배드 보이즈가 동부의 강자로 명성을 떨치던 1987~89년 시점에는 백업 수비수로 막 성장하던 무명의 블루컬러 워커였을 뿐이다. 수비를 지휘하는 것은 주전이자 배드 보이즈의 행동대장 릭 마혼이었는데, 로드맨은 마혼이 이적하기 전까지 그저 마혼의 꼬붕들 중 하나로 여겨질 뿐이었다. 따라서 배드 보이즈를 대표하는 주축이라 하기엔 맡고있는 롤이나 네임밸류가 한참 떨어졌으며, 그가 팀의 핵심으로 완전히 자리한 때는 이미 배드 보이즈의 끝물인 1991~1992 시즌부터였다.
[14]
게다가 이 당시 로드맨은 헤어스타일이나 기행은커녕, 리그에 흔하디 흔한 거친 수비수들 중 하나일 뿐, 외모도 수수했고 플레이 역시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스타일이라 전혀 주목을 받지도 않았다. 게다가 파워포워드로는 체격이 상당히 작은 편이라(찰스 바클리보다 키는 조금 더 크지만 체격은 호리호리했다), 주전으로 중용하기 시작한 것은 1991~92 시즌부터였다.
[15]
훗날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매직은 이 경기를 언급하면서 아이제아 토마스가 스테픈 커리보다 역대 포인트 가드 순위가 낮은 게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고 회상할 정도였다. 실제로 해당 경기를 보면 아이제아 토마스를 싫어하는 사람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말도 안되는 사기슛들이 들어가고는 했다. 그것도 한발을 절으면서.
[16]
실제로 이 6차전 경기는 그 당시 상당히 말이 많았던 경기였는데, 빌 레임비어가 카림 압둘자바를 밀었다고 받은 파울이 영 시원치 않은 파울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디트로이트 선수들은 그 파울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고 여러 농구 관계자들도 이해할 수 없다고 했으며 파울을 받은 레이커스의 제임스 워디도 "심판이 인정했으니 파울이다" 라고 하면서 딱히 강하게 부정하지 않는 모습도 보여줬다. 이에 "조던 룰" 이라는 책을 기록한 농구 저술가는 빌 레임비어가 파울을 받은것은 카림 압둘자바를 밀어서가 아니고 그 전이 수없이 많은 선수들을 밀치고 반칙해서 받은 파울이었을 것이라고 저술하였다.
[17]
조던에게 3승 1패, 버드에게 2승 2패, 매직에게 1승 1패.
[18]
항상 그렇듯이 올스타 전은 친선 경기와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경기기 때문에 수비가 헐렁하고 제대로 된 수비를 하지 않는다.
[19]
토마스 1961년생, 1981년 데뷔 / 조던 1963년생, 1984년 데뷔
[20]
지금으로 말하자면 신인 한명을 골려주기 위해
자 모란트가
스테판 커리,
르브론 제임스,
케빈 듀란트 등을 규합해서 신인을 골탕먹이자고 하는 꼴과 딱히 차이가 없다.
[21]
이에 비교될만한 것은 샤킬 오닐의 첫 올스타 전으로 시작부터 오닐답게 자신의 앞길을 막는 사람들을 깔아 뭉개겠다느니 등의 발언으로 선배들이 자연스레 뭉쳐 그를 다굴하게 만들었다.
[22]
사실 1990년대 초반까지 로드맨은 나중에 알려진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식스맨 수비수로 다소 거친 수비와 허슬 플레이에 최선을 다하는, 드러나기 어려운 유형의 선수였을 뿐이다. 인터뷰 자체도 로드맨의 생각이 궁금하다기 보다는, 듣보잡 신인이 하도 버드에게 농락당하는 걸 본 기자들이 짓궂게 말을 건넨 것이다.
[23]
사실 후에 인터뷰에서 로드맨은 자신이 무슨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몰랐으며, 자신이 한말이 이렇게 큰 파장을 가져올거라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라고 할 정도로 그냥 감정에 겨워 한 발언에 가깝다.
[24]
데일리는 피스톤즈 선수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었고, 그 한 성깔하는 배드 보이즈 멤버들도 데일리에게만은 절대 복종하며 따랐다. 여기에는 마혼, 토마스, 레임비어같은 악동들도 포함이 된다. 심지어 로드맨은 데일리 앞에서는 순한 양이었다. 이것은 드림팀에서도 드러나는데 데일리와 피스톤즈라면 치를 떨만한 조던, 피펜도 데일리의 명령에 따르고 조던은 아예 베프가 되어버린 상황이다. 이런 데일리에게 댄틀리가 그의 지시를 거부하고 고래고래 소리까지 지르면서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든것.
[25]
단 트레이드 될때의 시점에서 한 기자는 댄틀리는 사실상 외톨이나 다름 없었고 온화한 성격의 듀마스 정도가 그를 존중하는 분위기였고 대체적으로 팀원들은 모두 아이제아 편이라고 주장했다.
[26]
다만 1989년 시점에 한정한다면, 둘의 기량은 비슷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훨씬 더 확률 높은 공격으로 50% 중반대의 야투율을 기록하는 댄틀리가 효율성 면에서 우수했지만.
[27]
댄틀리에게는 풋내기 로드맨이 자신을 밀어내고 선발로 뛴다는건 상상도 할 수 없는것이었다.
[28]
친한 선수들의 경우 포옹
[29]
피스톤즈에서 매너 좋은 극소수에 꼽혔던 조 듀마스와 존 샐리만 악수를 했다. 이 중 샐리는 훗날 불스에서 뛰기도...
[30]
그리고 이때 레임비어가 공을 마혼의 얼굴에 들이밀자마자
찰스 바클리가 갑자기 난입하여 레임비어에게 주먹을 날리면서 싸움이 시작됐다.
[31]
조던 룰 그리고 피스톤즈가 확실히 더티한건 맞았지만 1980년대의 대부분이 1990년도 그리고 2000년도 팀과 비교했을때 거칠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이를테면 버드가 보스턴이 레이커스에 뒤지고 있자 동료들을 "기집애들 같이 뛴다" 하고 디스했는데, 바로 다음날 맥해일이 램비스에게
클로스라인을 선보이는 파울을 했다. 근데 그게 테크니컬 파울도 아니고 그냥 개인 파울 하나로 그쳤다.
[32]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피스톤즈가 실력도 없는데 지저분한 반칙만을 통해서 이겼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실력이 없었더라면 예전부터 비슷한 전략을 써왔던 피스톤즈는 우승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이제아는 물론이고 듀마스도 재능이 뛰어난 선수였고, 피스톤즈는 더티함과는 별개로 실력도 있는 팀이었다. 플래그런트 파울 규정 도입이 영향을 준건 사실이지만 단순히 그 점 하나가 우승을 했느냐 못했느냐를 결정할 수는 없다는 점. 게다가 피스톤즈는 3년 연속 파이널 진출이라는 꽤나 체력적으로도 힘들어 질 나이이기도 했다.
[33]
르브론이 파이널에 7-8년 연속으로 진출했는데 이게 뭔 소리인가 하겠지만, 1980년대는 2000년대에 비해 매우 거칠게 경기를 운영하던 시절이고, 지금처럼 정규시즌을 내다버리면서 로드 매니저먼트(Load Management)와 같은 체력관리를 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그 당시는 데뷔 후에 12, 13년을 정말 빡세게 뛴채 은퇴하는 일이 꽤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34]
그런데 정작 칼 말론은 더 라스트 댄스에 출연하지는 않았다. 사실 칼 말론도 NBA에서 손꼽히는 더티 플레이어로
마이클 조던에게 팔꿈치 공격을 가한 적이 있다. 자기가 조던에게 한 짓 때문에 출연하지 않았다는 의견이 지배적.
[35]
칼 말론은 토마스에게 팔꿈치 공격을 가해 이마를 찢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다만 당시 토마스가 존 스탁턴을 위축시키기 위해 고의적으로 굉장히 하드한 반칙을 저지르자 한 성격하는 말론이 대신 응징을 가한 것이다. 사실 말론은 역대 최악의 더티플레이어 중 하나였기 때문에 말론이 불스를 칭찬해준 것은 그가 매너가 좋다기보단, 매너가 딱히 좋은 편은 아닌 말론 같은 선수들도 패배 후 승자를 칭친해줄 정도로 이게 당연한 관례였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이다.
[36]
래리 버드와
빌 레임비어는 오랜 앙숙이었고, 불과 1년전에 레임비어가 공중에 뜬 버드를 고꾸라 뜨려서 둘이 싸우다 쌍방 퇴장이 일어나기도 했다. 실제로 이때 퇴장하는 버드를 향해 관중들이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있을 정도로 감정이 안 좋았다. 흥분한 관중들이 대거 코트 위에 있고, 이들과 적대적인 선수가 지척에 있는 것이 위험하다는 건 누구라도 알 수 있다.
[37]
이 점이 중요하다. 셀틱스의 퇴장은 본인들이 원해서 한 것도 아니고, 흥분한 디트로이트 관중들과 불필요한 접촉을 막기 위한 리그 측의 조치였다.
[38]
사실 이건 그 전까지 언론이 집요할 정도로 토마스 관련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토마스의 실력이나 위상으로 보면 드림팀 탈락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됐기 때문에 루키시절부터 서로 숙적이었고, 대표팀 구성위원회가 가장 눈치를 봤던 (실제로 드림팀을 결성하면서 가장 먼저 연락한 게 조던이었다.) 조던에게 화살이 간 것. 어딜 가도 토마스 관련 질문만 해대니 짜증이 안 날 수가 없다.
[39]
참고로 토마스를 배제했을 때 피펜의 자리에 원래 들어갔을 선수는
도미니크 윌킨스인데, 그는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인해 국대 차출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40]
레이트너는 대학 4년 동안 Final Four에 못간 적이 없으며, 2년 연속 우승과 한번의 준우승을 이뤄낸
듀크 대학교의 에이스였다. 현재까지도 3월의 광란(March Madness)이라고 불리는
NCAA Division I 남자농구 챔피언십의 최고 득점 및 최다 경기수 및 최다승리 기록 보유자일 정도. 여기에 드림팀 선발 전 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 50인에 뽑힐 정도의 빼어난 외모까지 갖추어 연예인 뺨치는 유명인이었기에 전국적 인지도나 네임밸류는 피펜은 물론, 드림팀의 어떤 스타들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드림팀 참가에 대한 여론도 무척 호의적이었다.
[41]
1991-92 시즌에 그 아픈 몸을 이끌고 45경기에 출전하여 평득 20.2득점 9.6리바운드를 기록했을 정도로 기량은 어느 정도 남아있었지만, 달리 말하면 20-10 정도의 엘리트 스탯을 기록할 정도의 기량이 남아있는데도 그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정도로 버드의 허리는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 당연히 오프시즌 국대 스케줄까지 감당할만한 몸 상태가 아니었고, 전력이라면 차고 넘치는 드림팀 입장에서도 부상 리스크가 극도로 높은 버드를 무리하게 기용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즉, 당시 미 국대는 버드의 위상을 드림팀에 더하길 바랬던거지 버드에게 많은 활약을 기대하고서 차출한 게 아니고, 버드 역시 본인이 딱히 많이 뛸 필요가 없다는 걸 알기에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국대에 합류한 것.
[42]
피펜의 성장은 1993 파이널에서 피닉스 선즈가 조던 수비에 집중하다 피펜에게 빈번하게 허를 찔리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전과 달리 트라이앵글 오펜스에서 피펜의 영향력이 호레이스 그랜트보다 더 확대된 것을 알 수 있다.
[43]
지금이야 피펜이 명예의 전당에 갔고 그만한 위상을 쌓았지만, 그 당시 피펜은 토마스와 비교해서는 실력이나 인지도에 비해 한참 뒤떨어진 수준이었다. 위에 윌킨스가 언급되었는데 만약 윌킨스가 부상을 당하지만 않았어도 동포지션의 피펜은 합류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당시 위치에서 누군가를 떨어뜨려야 했으면 경력과 실력으로 볼때 피펜이 가장 떨어지기 쉽다. 드림팀은 1992년도에 올림픽에 나갔지만 열명은 1991년도 9월에 이미 선발되었고 이듬해 5월에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레이트너가 막차를 탄 것이다. 피펜은 1991년에 드림팀에 선발됐을 당시 올NBA팀 0회, 올스타 1회, 심지어 1991년도에는 올스타에도 선발되지 못한 선수로, '1991년 파이널에서 의외의 뛰어난 활약을 한 조던의 조력자'였지 리그를 주름잡는 슈퍼스타와는 거리가 멀었다.
[44]
특히 이 둘은 베드 보이즈에서도 과격함에 있어선 정점에 있었던
빌 레임비어와 주먹다짐까지 할 정도로 대표적인 원수사이었다.
[45]
사실 오히려 배드 보이즈의 감독이었기에 드림팀의 감독을 맡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더 많다. 그 성깔있는 배드 보이즈를 맡을 수 있다면 개성이 제각각인 드림팀을 코치하는 것도 가능하게 보였던 것. 실제로 바클리는 "배드 보이즈 그 새X들을 코치할 수 있다면 우리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까지 하였다.
[46]
나머지 하나는 칼 말론, 현역 시절 말론이 육중한 팔꿈치로 토마스의 얼굴을 찍어버려서 수십 바늘을 꼬맨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방송에서 칼 말론 이야기만 나오면 패널들이 아이제아의 오래된 상처가 쑤시고 있다면서 놀리는 게 일상이다.
[47]
위에서 상세하게 부연한 것처럼 토마스는 당시 조던, 매직, 버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NBA 최고의 스타였다. 피펜은 드림팀에 뽑힐만한 자격이 있던게 아니고, 드림팀에 다녀오고부터 그에 어울리는 선수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중에야 피펜이 커리어가 쌓여 토마스 못지않은 레전드가 되었지만, 드림팀 당시 4년차에 불과한 피펜의 리그 내 위상은 생애 처음으로 올NBA팀에 선정이 되었고, 조금씩 스타로 인정받아가는 시기의 떠오르는 젊은 선수였다. 당시 자타공인 슈퍼스타들만 합류하던 드림팀의 다른 멤버들과는 위상 차이가 꽤나 컸다. 따라서 저렇게 반응하며 가소롭다는 듯이 이야기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피펜이 아무리 날고기어봐야 불스에서는 조던을 넘을 수 없는 2인자다. 하지만 토마스는 피스톤즈의 1인자이자 에이스로써 팀을 우승으로 이끈, 특히 버드와 매직을 넘어서 우승으로 이끌었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즉, 호불호를 떠나 당시 토마스의 위상은 피펜이 도저히 견줄 수 없는 수준이었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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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HIV나 에이즈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아 걸렸다고 하면 흔히 동성애로 인해 걸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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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리는 96년 3월에 불스에 합류해 잔여 시즌을 뛰었을 뿐이다. 즉, 우승이 확정되던 6월까지 고작 3개월 반 같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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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은 참가에 회의적이었으나 같이 뛰어보는 게 버킷리스트였다는 매직의 적극적인 권유로 드림팀에 합류한 것이었다. 버드에게 우리가 은퇴 전 미래 세대들을 위해 남길 유산이라고 설득한 것도 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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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네임 밸류가 아닌 당시 기량으로만 봐도 스탁턴에게 밀린 것이 그리 억울할 것도 없다. 토마스는 1986-87 시즌 2nd에 뽑힌 것을 마지막으로 은퇴 시즌인 1993-94까지 단 한 번도 All NBA에 들지 못한 반면 스탁턴은 1987-88 시즌 All NBA 2nd에 뽑힌 것을 시작으로 90-91 3rd에 뽑힌 것을 제외하면 올림픽이 열리는 92년까지 언제나 2nd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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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찰스 오배넌도 농구 선수다. 하지만 둘 다 NBA에서 오래 뛰지 못하고 빨리 사라졌다. 그 후 형제는 외국 리그에서 뛰었다. 형 에드는 2004년에 은퇴했고 동생 찰스는 형보다는 선수생활을 오래 하면서 13년까지 일본 리그에서 뛰었다. 이 두 사람은 전
고려대학교 선수이자 이번에
청주 KB국민은행 스타즈에 코치로 부임한 박재헌과는 고교시절 농구팀 동료이자 친구였다고 한다. 두 형제는 박재헌을 Jay라는 애칭으로 자주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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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애나 토박이 출신에 올해의 감독상, 올해의 경영인 상을 페이서스로 받고 페이서스의 유일한 파이널 진출을 이루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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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인디애나 대학을 우승으로 이끌고, 인디애나 코치로 2000-2003년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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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애나 페이어스 그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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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피스톤즈와의 악연도 어느정도 작용했을 수도 있지만 버드는 조던처럼 개인적 감정으로 가지는 않은 듯한 모습을 여러번 보여주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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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오랜 시간이 지난 시점이라 거의 투정식으로 발언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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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작은 키였지만 배드 보이즈를 휘어잡는 리더십과 통솔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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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는 피스톤즈의 백투백 우승의 리더이자 사실상 역대 최고의 피스톤즈 선수이다. 아무리 피스톤즈 선수들이 빡쳤고 관중들이 막나가도 토마스 앞에서 이런 행위를 벌인다는건 사실상 가능성이 상당히 희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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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뻘짓이 욕을 먹은 이유는 맥다이스는 무지막지한 운동능력에 20-10은 거뜬히 할수있었던 리그의 손꼽히는 파워포워드였지만 뉴욕으로 왔을때의 그는 무릎부상으로 전성기의 폭발력과 운동능력을 모두 잃은 상태였다. 물론 맥다이스는 그 후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서 백업 빅맨으로 전환해 제 2 의 전성기를 보내기는 했지만 이때는 충분히 스캇 레이든의 뻘짓이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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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스위트니보다 앞에 지명된 선수들은
르브론 제임스,
카멜로 앤서니,
크리스 보시,
드웨인 웨이드등으로 더 설명이 필요없다. 참고로 이 스위트니는 뉴욕에서 2년, 시카고 불스에서 2년뛰고 NBA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고 D-리그에서 잠시 뛴후 현재는 해외리그를 돌며 아직도 선수생활중이며, 현재는 우루과의 리그에서 뛰고 있다. 참고로 스위트니 바로 밑에 순위에 지명된 선수중에는 현재까지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선수들이 많은데 그중에는
데이비드 웨스트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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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제임스는 훌륭한 체격과 괜찮은 운동능력으로 인해 "포텐이 터진 것 아니냐"고 하는 전문가들도 많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천하의 뻘짓이지만 영입 자체만 보면 당시 기준으로는 그렇게까지 미친짓은 아닌셈. 그러나 계약규모와 기간을 보면 미친짓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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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문제는 공격형 포인트 가드인 마버리와 프랜시스의 롤이 겹쳤다는 것이다. 하더웨이의 경우 그나마 키가 커서 sf까지 볼수 있지만 마버리와 프랜시스는 둘다 가드만 볼수 있는데다가 수비가 좋은 편도 아니다. 당시 기준으로 프랜시스가 하더웨이보다 훨씬 좋은 선수긴 했지만 팀 입장에서 보면 별 쓸모가 없던 선수인데다가 계약기간도 하더웨이보다 훨씬 오래 남아있었다. 차라리 하더웨이를 계속 데리고 갔으면 시즌이 끝나고 샐러리캡 비우기라도 할수 있었으니 결국 최악의 병크인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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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때 하더웨이는 프랜시스와 스타일이 비슷하지도 않았다. 전성기 시절 공격형 pg로 이름을 날렸으나 계속된 부상으로 기동력과 무릎을 잃은 상태였고 이로 인해 더 이상 pg를 보기 힘든 상태였다. 하더웨이는 커리어 말미에 주로 슈팅가드나 스몰포워드로 출전했다. 게다가 뉴욕에서 그는 전력에 큰 도움이 되지못한채 돈만 잡아먹고 있었으며, 닉스는 이에 "너를 원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그의 라커를 빼버리기까지 했다. 하더웨이가 이에 크게 분노하고 트래이드를 요구한건 당연한 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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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은퇴 후 WNBA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는데, WNBA의 대표적인 명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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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패널들이 자주 언급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있다. 오닐은 내시 이야기만 나오면 항상 부정하고 앤퍼니는 찬양하는 편. 케니는 항상 하킴 이야기를 하고, 커는 항상 조던을 찬양한다. 사실 조던은 워낙 대단했기에 케니 스미스 (대학 시절 동료)처럼 같이 뛴 적이 있는 선수들은 일단 찬양하고 보고 (유일한 예외는 조던 조력자로 자신이 폄훼당한다고 생각하는 피펜) 그에게 발린 2인자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라도 그를 높이 평가한다. 아이제아 토마스의 경우 그를 가로막은 자부심 때문인지 조던의 실력을 어느정도 인정하되, 그를 역대 최고로 인정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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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퍼스트 팀이나 올스타 선정, 우승횟수 등을 따져보면 피펜이 토마스보다 확실히 아래라도 보기도 애매하지만, 여기 패널들을 포함해 전직 선수들은 그런 세세한 수상실적보다 (적어도 우승을 노리는 팀의) 에이스였냐 여부를 꽤 중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토마스는 피펜이 자기에 대해 얘기하면 급이 다른 놈이 까분다며 자존심 상해하는 편. 커리어 실적으로 보면 바클리, 오닐 등 MVP급과 올 NBA 써드팀 이력이 최고인 레지 밀러는 꽤 차이나는 편이지만, 이걸 갖고 차별하진 않는다. 밀러는 90년대 우승후보급 팀이었던 인디애나의 확고부동한 에이스였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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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2016년이니까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있었던 것으로, 이 일이 몇년 뒤에 일어났다면 오히려 커리의 순위가 너무 낮아서 문제였으면 문제였지 아이제아보다 높은 순위라는 점에 대해선 반론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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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그 당시 같이 뛰었던 선수들이나 팀 메이트들은 대체적으로 아이제아의 리더십에 의문을 제기한 적이 없다. 팀원들도 배드 보이즈는 아이제아의 팀이라는 걸 증언했고, 외부에서도 모든 걸 지휘하는 사람은 아이제아로 봤다. 이런 분위기를 볼 때 아이제아의 에이스 기질이 낮다는 건 맞지 않는 소리다. 무엇보다 아이제아는 클러치 상황에서도 꽤나 강한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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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배드 보이즈의 구성원들만 보더라도 하나같이 컨트롤하기 힘든 악동들이다. 그런 악동들을 다 조율하고 적어도 배드 보이즈 시절 한정으로는 팀내에서 누구도 아이제아에게 반기를 들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에이스 기질이 없다는 건 어불 성설이다. 팀 플레이, 디펜스에서도 아이제아가 지휘하는 부분은 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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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은 아이제아가 공격에서 아주 큰 기여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효율성이 낮았다는 걸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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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이해가 안된다면 아이제아가 상대고 이긴 선수들을 생각해보자. 무려 버드, 매직 그리고 조던이다. 이 셋은 다 알다시피 NBA 역사상 Top 10안에 든다는 선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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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우승을 경험해본건 키드와 페이튼인데 키드는 11파이널에서 솔솔히 활약했으나 당연히 그 파이널의 주역은 노비츠키였고 페이튼의 경우는 06파이널에서 웨이드의 하드캐리로 사실상 링을 얻은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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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2007년에는 본인 스스로가 FMVP를 따내며 그 존재감을 입증하기는 했다는 점이 다른 멤버들과는 다르다. 그러나 이때도 던컨 / 마누가 전성기이긴 했다. 유일한 슈퍼스타였던 토마스와는 확실히 차이가 나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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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과정을 설명하면 마혼은 신생팀 미네소타의 확장팀 드래프트로 원치 않게 피스톤즈를 떠났고, 이후 필리에 합류했다. 그리고 이 경기는 트래이드 이후 첫 경기였다. 마혼과 피스톤즈 선수들은 사이가 원만했으나 초반부터 디트로이트는 마혼을 거칠게 대했고, 이 과정에서 리더인 토마스가 마혼에게 주먹을 휘둘렀다가 퇴장당했다. 마혼은 이것까진 참았으나, 이후 속공에서 레이업하는 마혼을 로드맨이 거칠게 파울하고, 분노해 로드맨에게 소리를 지르는 마혼의 얼굴에다 레임비어가 모욕적으로 공을 들이밀자 마침내 폭발해 레임비어에게 달려든다. 그런데 갑자기 갑툭튀한 바클리가 레임비어에게 주먹을 휘두르면서 레임비어vs바클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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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NBA는 연속 우승을 저지한 팀이 연속 우승을 하는 경향을 보였다. 레이커스 백투백, 피스톤즈 백투백, 불스 백투백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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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리 브라운이나 라일리, 포포비치같은 감독들..조던 역시 딘 스미스, 필 잭슨같은 레전드 감독들과 함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