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레임비어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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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 19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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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51 | 1951-52 | 1952-53 | 1953-54 | 1954-55 |
돌프 셰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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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61 | 1961-62 | 1962-63 | 1963-64 | 1964-6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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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81 | 1981-82 | 1982-83 | 1983-84 | 1984-85 | |
모제스 말론 | 모제스 말론 | 모제스 말론 | 모제스 말론 | 모제스 말론 | |
1985-86 | 1986-87 | 1987-88 | 1988-89 | 1989-90 | |
빌 레임비어 | 찰스 바클리 | 마이클 케이지 | 하킴 올라주원 | 하킴 올라주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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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니스 로드맨 | 데니스 로드맨 | 데니스 로드맨 | 크리스 웨버 | 디켐베 무톰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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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d428a>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No. 40 | |
<colcolor=#fff> 윌리엄 J. 레임비어 주니어 William J. Laimbeer J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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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57년 5월 19일 ([age(1957-05-19)]세) |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학교 | 노터데임 대학교 |
신장 | 211cm (6' 11") |
체중 | 111kg (245 lbs) |
포지션 | 센터 |
드래프트 |
1979 NBA 드래프트 3라운드 65순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지명 |
소속팀 |
Basket Brescia (1979~1980)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1980~1982)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1982~1993) |
지도자 경력 |
디트로이트 쇼크 감독 (2002~2009) 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코치 (2009~2011) 뉴욕 리버티 감독 (2013~2017) 라스베이거스 에이시스 감독 (2018~2021) |
등번호 | 40번 - 디트로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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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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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RINCE OF DARKNESS |
전 NBA 선수. 1980년대 NBA를 풍미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악명 높은 배드 보이즈(Bad Boys)의 거친 선수들 중에서도 가장 압권이었던 선수. 백인 센터로 운동 능력은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위치 선정과 갖은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그리고 덤으로 상대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리는 온갖 더티플레이로 팀의 골밑을 사수했던 선수였다.
WNBA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감독생활을 하며 뛰어난 실적을 내기도 하였다.
2. 선수 생활
보스턴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빌 레임비어는 사실 대학생이 되기 전까진 농구는 어디까지나 취미일뿐 프로 농구선수가 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학 3학년 때 출전한 NCAA 토너먼트에서 팀이 8강까지 올라가는데 엄청난 활약을 한 이후, 농구에 대한 생각이 바뀌면서 NBA를 목표로 삼았고, 1979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 지명되어 이탈리아 리그에서 1년 뛴 후, 1980년부터 NBA 무대를 밟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1982년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로 트레이드 된 이후. 이 때부터 동료인 아이제아 토마스, 조 듀마스와 감독 척 데일리와 함께 끈적한 수비와 터프함을 무기로 NBA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는 배드 보이즈를 조직한다. 잭 맥클로스키는 그를 데려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 말하기를 "한 선수가 20점이나 뒤지고 있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뛰고 있었다." 라고 설명하면서 그의 근성과 끈기를 보고 데리고 왔다고 회상하였다.배드 보이즈 중에서도 가장 궂은 일을 했던 선수로, 골밑에서 상대 공격을 저지하고, 리바운드를 따내는, 어쩌면 농구에서 가장 기본인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했던 선수였다. 다만, 운동 신경이나 신체 능력은 동시대의 다른 선수들에 비해서 아주 탁월한 편은 아니었는데, 이를 순전히 교묘한 반칙 플레이로 극복해 냈다. 하도 당한 다른 팀 선수들이 치를 떨면서 이를 갈았지만, 터프한 그의 플레이에 대해 홈 팬들은 열광했다.[1] 동시대 배드 보이즈 선수들 중에서도 인기가 많은 편이었고, 그를 총 4번의 올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배드 보이즈들과 함께 NBA 무대를 누비면서 마침내 그들을 가로막던 거대한 장벽인 래리 버드의 보스턴 셀틱스를 격파하고 동부 컨퍼런스를 제패한 후, 매직 존슨이 이끌던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역시 무너뜨리며 1988-1989 시즌 NBA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이클 조던이 이끌던 시카고 불스의 가장 거대한 장벽으로 남으며 또 한 차례 1989-1990 시즌 NBA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1993년 은퇴할 때까지 그가 남긴 기록은 통산 13,790득점과 10,400 리바운드.(평균 12.9점 9.7 리바운드) 그리고 악명과 디트로이트 팬들의 환호였다. 그의 등번호 40번은 디트로이트의 영구결번이 되었다.
2.1. 악명 높은 그의 전설
그의 현역 시절 별명은 실로 화려했다.“The Prince of Darkness ”
“The most hated player in the league”
“떨어지는 운동능력을 더티플레이로 커버하는 비겁한 놈”
“ 버팔로 빌”
그가 사용했던 어둠의 기술들을 설명해 보자면,
- 팔꿈치: 리바운드를 잡고 나면 팔꿈치를 좌우로 휘둘러 상대 선수를 위협하고 잡기 전에 상대선수를 심판 몰래 교묘히 가격한다.
- 엉덩이: 외곽에서 오펜스 리바운드를 잡기 위해 들어오는 선수에게 엉덩이로 밀어대어 위협한다...
- 발밟기: 옆에 있는 선수가 점프를 하려고 하면 미리 발을 밟는다.
- Flop: 리바운드를 잡을 때 누가 옆에서 살짝만 건드려도 인상을 찡그리며 넘어지면서 파울을 얻어내는 '연기'. 우리가 보통 할리우드 액션이라고 지칭하는 행위다. 특히 이 레임비어의 이 기술은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모든 플레이어나 심판이 알면서도 당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실 농구에서 이러한 파울유도는 매우 흔한 일이지만,[2] 이 정도로 활용하는 선수는 드물다.[3][4]
- 부상 유도 플레이: 레임비어 최악의 무기이자 가장 큰 문제점. 사실 위의 네 가지만 했으면 더티플레이어로 욕을 먹었을 지언정 그렇게까지 증오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팔꿈치는 85년에 데뷔한 칼 말론이 더 심했고 엉덩이 위협이나 발 밟기는 애교에 불과하며, 플랍은 레지 밀러같은 선수가 더 심했다. 후술되는 버드의 코멘트처럼 그는 실제로 악의가 있다고밖에 여길 수 없는 부상을 유도하는 플레이를 상습적으로 했다. 여기서 상습적으로 했다라는게 포인트. 사실 농구는 신체접촉이 많고 워낙 페이스가 빠른 스포츠이기 때문에 종종 큰 부상으로 이어지는 플레이가 나온다. 특히 빅맨들은 당연히 신체접촉이 더 많기 때문에 더욱 심하다. 그러나 이런 플레이를 거의 하지 않는 선수라면 해도 실수인가보다하고 넘어가지만, 레임비어같은 선수는 실수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자주 했기에 욕을 먹은 것. 예를 들어 빈스 카터는 말년에 까마득한 후배 패트릭 맥카우에게 큰 부상을 입힌 적이 있지만, 상대 감독인 스티브 커나 워리어스 선수들이 (처음에는 화냈지만) 이를 용서해준 건 카터가 평상시 더티 플레이를 안 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실수였다고 인정한 것이다. 카터가 이후 눈물을 보일 정도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고. 반면 레임비어나 브루스 보웬은 돌진하는 상대 얼굴에 팔꿈치를 날리거나 날아차기를 해놓고 뻔뻔하게 양손을 벌리며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제스쳐) 억울한 표정을 짓는 짓을 상습적으로 했기에 욕을 바가지로 먹는 것. 점프하는 상대 발 밑에 자기 발을 집어넣으면 발목을 다칠 수 있는데 이걸 레임비어만큼 자주 하는 사람은 없었으며, 마이클 조던같이 돌파력이 뛰어난 선수나, 래리 버드처럼 타점이 높은 정확한 점퍼를 가진 선수가 돌파해오면 블럭능력이 낮은 레임비어는 아예 블럭을 뜨는 걸 포기하고 팔꿈치로 얼굴이나 몸통을 가격해 쓰러뜨리곤 했다. 점프한 상대를 강제로 고꾸라뜨리면 잘못 떨어져서 최악의 경우 선수생활이 위험한 부상을 입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플레이이다. [5] 사실 레임비어가 악당대장 취급받는데, 말론도 팔꿈치로 여럿 보내버렸으며 마혼은 깡패 수준에 로드맨은 레임비어 ver.2였다. 찰스 오클리도 여러명 고꾸라뜨렸고, 이들과 비교도 안되게 깔끔하게 수비하던 패트릭 유잉도[6] 절친 조던의 골밑돌파를 우격다짐으로 가격해 막은 적이 있다. 이 때문에 레임비어의 팀동료 아이제아 토마스는 "80년대엔 다들 그랬는데 피스톤즈만 이미지가 안 좋아 욕을 먹는다"고 물타기를 한 바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중에서도 레임비어가 단연 최악이었다는 것. 후술되는대로 은퇴한지 수십년 지난 이후 버드는 그 악명높은 마혼조차 용서했지만 레임비어만큼은 용서못한다고 했고, 그 이유가 바로 부상 유도플레이였다. 심지어 버드는 포지션상 센터인 레임비어와 주 매치업도 아니었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https://www.fmkorea.com/3156820742 영상을 확인해 보자
그가 은퇴를 선언했을 때 시카고 불스의 1차 3핏 핵심 멤버인 파워 포워드 호레이스 그랜트는 "우리 집에 아무나 오라. 파티를 열겠다."고 했으며,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시절 그를 상대했던 찰스 바클리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디트로이트와 매년 치열한 전쟁을 벌인 셀틱스의 경우에 주로 같은 센터인 로버트 패리시와 으르렁대는 경우가 많았지만 포워드진의 케빈 맥헤일, 래리 버드와도 종종 부딪혔다. 한번은 골밑 득점하려는 버드위에 데니스 로드맨이 떨어지고 그 위로 레임비어가 떨어지면서 몰래 가격을 했는데 분노한 버드가 엎드린 상태에서 레임비어의 머리를 강하기 때리면서 싸움이 일어나기도... 버드는 이 외에도 espn의 빌 시몬스와의 인터뷰에서 "레임비어가 하도 슛하면 그 밑으로 다리를 집어넣길래[7] 한번 똑같이 갚아준 적이 있어요. 다신 그딴 짓 못하더군요"라고 한 적이 있다.
또한 그는 터프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웠던 릭 마혼, 찰스 바클리와도 한 판 제대로 붙은 적이 있다. 208cm의 빅맨인 마혼은 터프함으로는 오히려 레임비어보다 한 술 더 떴고, 피스톤즈에서 4년간 뛰며 레임비어와는 절친한 사이였다.[8] 또한 1988-89 시즌 우승의 주역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승 직후 신생팀 확장 드래프트에서 마혼이 보호선수 명단에서 제외되는 바람에 트래이드를 거쳐 그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서 바클리와 한솥밥을 먹게 된다. 당연히 마혼은 전 팀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갖고 있었지만 전 동료들과는 서로 별 악감정이 없었는데, 승부욕이 엄청나고 성깔 있는 피스톤즈 선수들은 다른 유니폼을 입은 마혼을 코트 위에서 진짜 적처럼 대했다. 89~90시즌 초반에 식서스와 피스톤즈가 붙을 당시 이 갈등이 폭발했는데, 이때 유명한 영상 중에 아이제아 토마스가 마혼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마혼이 그냥 멀뚱히 무대응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경기 내내 부딪히던 식서스와 피스톤즈 선수들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결국 원맨속공에서 덩크하는 마혼을 데니스 로드먼이 심한 파울로 막으며 마혼이 로드먼에게 욕설을 퍼붓고, 레임비어가 대놓고 공을 마혼의 얼굴에 들이밀면서 사태가 폭발한다. 그런데 여기서 평상시 레임비어를 극히 싫어하던 바클리가 난데없이 난입하면서 경기 내내 으르렁거리던 마혼과 레임비어가 아니라 바클리와 레임비어가 제대로 붙게 된다.
이렇게 욕먹었던 빌 레임비어지만 사실 그는 그냥 무조건 악역이 되고 싶거나 못된 놈이 되고 싶어서 그런것은 아니었다. 한 스포츠 기자는 레임비어를 가리키며, 레임비어가 한 모든 행동은 "다 계획적이고 계산적이었다" 라고 기술한 바가 있다. 레임비어 스스로는 자신이 왜 그런 플레이를 했는지 이렇게 기술하였다.
"
누군가 한명은 팀에서 그런 역할을 맡아야 한다. 나는 팀에서 가장 운동신경이 좋은 선수도 가장 실력이 뛰어난 선수도 아니다. 하지만 난 욕을 충분히 받아낼 수 있고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어찌보면 그는 팀을 위해서 악역을 자처하였기 때문에 팀에서는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선수가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빌 레임비어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서 운동 능력은 형편없었는데, 211cm의 키임에도 불구하고 서전트 점프로 겨우 림을 잡을 수 있는 정도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이런 기술들을 연마했는지도. 덕분에 이런 특징적인 기술을 활용해서 디트로이트의 골밑을 잘 사수했다.[9] 물론 타팀 빅맨들에겐 개**나 다름없었고 주먹싸움도 잦았지만 유감스럽게도 얻어맞는 일이 더 많았다.
멘탈도 뛰어났던 레임비어는 심리전에서 상대하는 거의 모든 선수들을 도발하고 흥분시킬 수 있는 남다른 재능을 가졌다. 1990년 포틀랜드 블레이저스와의 파이널에서 당시 존 샐리의 회상에 의하면 레임비어 한 명이 포틀랜드 선수들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 할 정도로 심리전으로 포틀랜드 선수들을 제대로 교란한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악명이 오죽이나 심했으면, 1991년 "빌 레임비어의 전투 농구(Bill Laimbeer's Combat Basketball)라는 슈퍼 패미컴 게임까지 나왔을 정도니.
여담으로 레임비어의 모든 반칙기를 스펀지로 물 빨아들이듯 흡수한 사람이 레임비어의 파트너였던 파워 포워드 데니스 로드먼.[10]
사실 80년대 농구에 대해 잘 모르는 팬이라면 레임비어가 어떤 존재였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힘든게, 당시 농구는 현재 룰로는 구현이 불가능할 정도로 거칠었다. 80년대만 해도 공격수를 보호하는 룰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당시 선수들은 현재에는 징계받을 정도의 악랄한 파울들을 그냥 그대로 받으며 농구했어야 했는데, 레이업하는 선수에게 대놓고 레슬링 기술(크로스라인을 걸어서 거꾸러뜨리는 모습이 나온다. 현재라면 인터넷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건 당연하고 중징계도 받을 일인데 불구하고 징계도 벌금도 없었다. 해설자가 1분26초에 "저것도 경기의 일부죠(That's part of the game)"하고 담담하게 얘기하는 것을 보면 알겠지만, 저 당시엔 저런 강도의 파울조차도 경기의 일부로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11] 현재에는 조던시절 올스타와 르브론 시대 올스타가 붙으면 누가 이기나 논쟁이 끝나지 않지만 피펜이나 오닐이 "얘네들이 진짜 사나이들의 농구를 못해봤구나. 그때 팀이랑 지금애들이 붙으면 지금 애들 3분 안에 울걸?"이라고 일축해버리는 것도 일리가 있다.[12]
당시 농구가 얼마나 거칠었는지 보려면 그 어떤 선수보다도 거친 집중수비를 당했던 마이클 조던이 당했던 하드 파울들을 살펴보자. 트리플팀으로 샌드위치가 되어 점프한 상태의 조던을 데니스 로드맨이 뒤에서 오른팔로 강하게 가격해서 조던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는데도 파울이 불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아이제아 토마스는 "당시 다들 거칠었는데 피스톤즈만 욕먹는다"고 물타기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온 리그가 저렇게 거친 마당에 배드 보이즈와 레임비어는 독보적으로 더티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거칠어서 욕먹는게 아니라 더러운 짓을 했기 때문에 욕먹은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레임비어보다 힘도 세고 더 거칠었던 릭 마혼과 비교해도 그는 독보적으로 욕을 많이 먹었는데, 버드의 인터뷰에서 그 이유가 잘 드러난다.[13]
위에 레임비어에게 한 복수에 대해 밝혔던 같은 인터뷰에서 버드는 그가 왜 아직도 레임비어를 싫어하는지 밝혔는데 진행자 빌 시몬스가 지적하듯이 버드는 코트를 떠나면서 캐묵은 원한들을 모두 청산했는데 레임비어만큼은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버드는 이에 대해 "그도 자기가 해야하는 일을 해야했던 거죠. (He had to do what he had to do) 그건 이해합니다. 하지만...릭 마혼같은 예를 들면, 그도 때리고 다 했지만 (그를 상대하면) 맞을 거라는 건 예상을 하죠. 그 친구는 당신을 고의적으로 다치게 하려고 (maim) 하진 않았어요. 빌은 진짜로 다치게 하려고 했어요. 그런 사람 있잖아요, 슛을 하러 점프하면 그 밑에 발을 집어넣어서 발목 뒤틀리게 하는 사람이요. 우리 (셀틱스) 경기를 보면 (로버트) 패리쉬는 피스톤즈를 상대하면 항상 발목부상을 입곤 했어요."
즉, 레임비어는 그 거친 80년대에, 그 거친 마혼보다도 기피대상이었는데, 바로 그 악랄함 때문이었던 것이다. 비유하자면 00년대 브루스 보웬이나 2011년 플레이오프에서 앤드류 바이넘이 점프한 상태의 호세 바레아에게 대놓고 팔꿈치를 먹인, 단순히 거친게 문제가 아니라 위험천만하고 무엇보다 악의가 있는 플레이를 커리어 내내 한게 빌 레임비어였다. 조던이 수비당하는 영상을 한번 살펴보자. 상당수가 2010년대라면 절대 용납자체가 되지 않는 하드파울 들이다. 저런 것들이 용납되던 시절에서조차 레임비어의 행위는 용납이 안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고의적으로 다치게 하려고 했다"는게 버드의 피해의식이라고 볼 수 없는게, 레임비어가 버드에게 하드파울을 하고 둘이 크게 싸운 87년 플레이오프 당시 레임비어의 동료였던 시드니 그린이란 선수는 닉스로 이적 후 가진 인터뷰에서 레임비어가 실제로 사건 전에 버드를 부상으로 아웃시키겠다고 떠들고 다녔다고 증언했다.[14]
흥미로운 사실은 위 링크의 기사는 88년에 나온 기사인데, 여기서 전 세대 NBA선수 출신이자 당시 레이커스 감독이었던 팻 라일리는 "현재는 선수들 간에 서로 더 존중하는 편이다(There’s more respect for players now)"라고 한 것이다. 라일리는 "그들은 이것 (농구)가 매우 중요한 커리어고 우리 다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존중하는 것 같아요. 아주 오래전에 선수들은 그냥 신경을 안 썼던 것 같아요(they didn’t give a damn). 진심으로요. 팀들 수가 적었기 때문에 더 많은 증오가 있었고, 선수들이 서로 12~14번씩 상대하니까 라이벌 관계가 만들어졌죠."라고 말을 이었다. 즉 라일리의 선배들 (빌 러셀/윌트 체임벌린이나 그 이전) 세대에는 레임비어같은 선수들이 더 많았다는 것을 시사한 것.
2.2. 실력
그의 명성의 대부분이 배드 보이즈의 행동대원이자 더티 플레이에 의한 것은 사실이지만, 운동능력 떨어지고 허슬만 있는 백인 인사이더가 더티 플레이만 가지고 살아남을만큼 NBA가 만만한 리그는 아니다. 시간이 흘러 수비, 리바운드, 더티 플레이만 언급되는 감이 있지만 전성기의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대단히 좋은 슈터였던 것을 기억한다. 미드레인지와 롱2 지역에서 점프도 거의 하지 않고 올라가는데, 의외로 슛폼도 깔끔하고 대단히 정확하다. 그가 가진 사실상 유일한 공격옵션이었다고 해도 무방한데, 전술적으로도 요긴하게 쓰였다. 또 자유투 성공률도 통산 83.68%라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으며[15] 커리어의 중반기를 지나면서 3점슛까지 장착했다.1990 NBA파이널에서 그의 활약을 모은 영상. 슛만 모은 영상은 아니지만, 3점슛 5개를 성공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레임비어는 네번이나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당대 최고의 리바운더 중 하나인데다(86년 리그 리바운드왕) 수비력 또한 뛰어났다. 운동능력이 저질이었기 때문에 블러커로는 그리 뛰어나지 못했지만 (커리어 0.9개이자 커리어하이 1.4개) 골밑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릭 마혼과 함께 아주 아작을 냈기 때문에 골밑 존재감도 상당했다.
다만 레임비어는 슛거리가 길고 센스있는 빅맨이라는, 현대 트렌드에 맞는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농구에 별로 맞는 선수는 아니다. 그의 플레이는 현대 NBA에선 생존이 불가능할 정도로 거칠었고, 수비 범위가 그리 넓은 편이 아니라 피지컬한 플레이를 보다 엄격하게 제한하는 현대 NBA에선 수비수로서 그리 뛰어난 편도 아니기 때문. 기술보다는 피지컬로 수비하던 스타일이었다. 실제로 레임비어는 "난 다른 방식으로 농구할 도구(신체능력 등)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운동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선수들을 실력으로 막는게 불가능했고, 이에 교묘하게 더티하고 거친 플레이를 하며 골밑을 온몸으로 지킨 것이다. 그런데 2020년 현재 농구는 80년대보다 공격수를 보호하는 성향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현재 룰 하에서라면 레임비어처럼 플레이하면 5분도 안 돼서 퇴장당할 것이다.[16]
떨어지는 민첩성과 점프력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공격리바운더[17]였지만 그보다도 좋은 기본기를 기반으로 한 박스아웃으로 수비리바운드에 특히나 강한 선수였다. 또한 풋백 외엔 골밑보다는 점프슛 위주로 많이 득점하던 선수였지만 야투율도 괜찮은 편이어서 커리어하이가 53%, 커리어 통산 야투율이 49.8%였다.
3점슛의 경우 시대가 시대니만큼 성공갯수는 많지 않았지만 당시 센터 중에는 3점이 가능하다는 선수조차 거의 없었다. 래리 버드조차 한 게임당 한 개 이상 성공시킨 시즌이 5시즌, 그것도 초창기에는 슛을 잘 쏘면서도 경기당 한개도 시도 안한 적이 세 시즌이나 될 정도로 1980년대 당시엔 3점을 거의 쏘지 않았다. 레임비어 정도면 당대 빅맨 중에는 정상급의 슈팅력을 지닌 선수였고, 이 덕분에 수비를 끌어오는 역할은 톡톡히 해줬다.
레임비어는 한때 평균 17점까지 올려줬는데, 척 데일리 감독이 한 선수에게 공격권을 몰아주지 않으며 피스톤즈가 철저히 팀플레이를 지향하는 팀이란 걸 생각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이다. 실제로 그가 커리어하이 17.5점을 기록했을 당시 팀 득점 1위인 아이제아 토마스는 21.2점에 불과했다. 또한 본인의 장신을 이용한 플레이에도 능했는데, 이 때문에 보스턴 셀틱스와의 플레이오프 시리즈 당시 그보다 작은 래리 버드가 그를 막게 됐을때 평상시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했다. 물론 이 시점(87,88)의 버드는 운동능력이 한풀 꺾이긴 했지만, 그가 버드에게 강했다는 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부분.
레임비어는 역대 최악의 더티플레이어이지만, 동시에 매우 영리한 플레이어이기도 했다. 레임비어 본인은 굉장히 거칠게 플레이했지만, 동시에 그의 거친 행동은 심리적으로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역할을 했다. 그는 "나는 싸우지 않는다. 다만 도발할 뿐이다"라고 한 바 있는데, 실제로 레임비어는 싸움을 많이 하지 않았다.[18] 싸움 직전까지 험악하게 분위기를 조성해놓고 상대방을 흥분해 퇴장당하게 만드는 것이 그의 특기. 이 때문에 레임비어는 하드파울을 하는 장면은 정말 많지만, 대놓고 때리는 것보다는 맞는 장면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다.[19][20] 80년대 후반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보스턴 셀틱스와도 정말 많이 부딪혔는데, 버드의 경우 위에도 언급됐지만 그가 정말 더티한 하드파울을 하자 바닥에 엎어진 상태에서 분을 못 이겨 그의 머리를 가격했으며, 동료들이 뜯어말린 후에도 격분해 공을 그의 머리에 집어던진 적이 있다. 버드는 매우 터프하고 거친 플레이도 많이 했지만 보통 경기할 때는 냉정함을 유지하는 편인데, 그가 이렇게까지 이성을 잃고 분노하게 한 건 레임비어가 유일했다. 정작 레임비어는 이후에 "떨어지는 버드를 잡아주려고 한 것이었다"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했다.[21]
그가 얼마나 교묘하게 상대를 도발하고 스스로를 자제했는지는 그의 연속 출장경기수를 보면 알 수 있는데, NBA 역대 5위인 685경기 연속 출장기록을 갖고 있으며, 루키시즌인 80-81시즌부터 은퇴시즌 직전인 92-93시즌까지 13년동안 한 시즌에 3경기 이상 결장한 적이 없다. 특히 6시즌 연속 전경기 출장 기록을 갖고 있으며, 위에 언급된 13년동안 총 9경기만을 결장했다. 한 마디로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다 하고 다니면서 징계는 안 받을 정도로만 딱 수위를 지켰다는 소리. 어찌보면 이러니 상대방은 더 열받을 수밖에 없다.[22][23]
사실 위의 연속출장은 그가 얼마나 훌륭한 농구선수인가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한데, 교묘하게 징계를 피한 것도 있지만 실제로 부상을 당해도 참고 뛴 게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빌 레임비어는 안면 부상을 입고도 얼굴보호용 마스크를 쓰고 뛴 최초의 선수 중 하나이며[24] 웬만한 부상은 견디고 뛰는 선수였다. 게다가 NBA에서 가장 거친 선수라는 건 레임비어 본인도 수시로 다른 선수들과 충돌하며 부상위험과 통증에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위에서 언급됐다시피 그는 자기 팀의 골밑은 온 몸을 던져가며 보호하는 좋은 수비수였고, 피스톤즈 마당쇠이자 골밑의 수호신이었다. 그는 팀의 성공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헌신적이고 궁극적인 팀플레이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피스톤즈 입장에서만.
여담으로 멘탈도 굉장히 강한 편인데, 사실 피스톤즈의 경기를 보면 레임비어가 멘탈 나가는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본인의 멘탈이 워낙 강하니 엥간한 일에는 흔들리지도 않고 남을 흔들수가 있는 것. 실제 셀틱스의 경기에서 위에서 서술한대로 패리쉬에게 제대로 얻어맞은적이 있는데 그때 타격이 커서 한창을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한 소리가 "패리시 퇴장당했나요?" 였다고.....[25]
또 위에서 서술된것처럼 포틀랜드와의 파이널에서도 진짜로 레임비어의 뛰어난 멘탈이 한 몫했는데, 1990파이널까지 피스톤즈는 포틀랜드의 가든에서 원정경기까지 무려 16연패를 당하고 한번도 이기지 못한 징크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피스톤즈가 홈에서 지자 포트랜드 선수들은 "집으로 가서 제대로 혼내주자" 라며 한창 분위기가 상승되어 있었던 것. 많은 선수들도 그 징크스를 알고 있었기에 약간 움츠러들었는데 그걸 들은 레임비어는 "그게 뭐 어때서? 16연패가 뭐 대수야?" 라는 식으로 응했다고 한다. 그리고 3차전에서 그의 주특기인 상대방 신경긁기를 시전했고 여기에 포틀랜드 선수들은 제대로 말려들어 3연패를 당하며 우승반지를 내주게 된다.
3. 수상 내역
수상 내역 |
NBA 챔피언 2회 (1989-1990) NBA 리바운드왕 1회 (1986) NBA 올스타 4회 |
4. 감독으로서
은퇴 후, CEO 출신의 아버지와 함께 사업을 시도했지만, 대차게 말아먹었다.이후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의 객원 해설로 활동하다가 2002년 그가 활약한 디트로이트 시에 연고를 둔 WNBA 디트로이트 쇼크[26]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그리고 여기서 자신의 농구 실력이 단순히 더티 플레이에만 기반한 것은 아님을 실력으로 입증했는데, 2002년부터 2009년까지 감독으로 재직하며 매년 좋은 성적을 거두며 파이널 우승만 세차례 차지한 것. 심지어 레임비어가 감독을 맏기 직전의 디트로이트 쇼크는 최하위 팀이었는데, 02 시즌 0승 10패로 떡실신에 막장이던 팀을 레임비어가 임시 감독직을 맡으며 9승 13패를 기록하더니만 이듬해에 바로 1위로 뛰어오른 것. 즉 처음에는 꼴찌팀에 긴급 소방수로 투입되었는데 알고보니 뛰어난 감독 재목이었고 단기간에 꼴찌에서 1위로 팀을 끌어올린 그야말로 눈부신 실적을 거둔 것. 그 결과 당연하게도 2003년에 올해의 감독상까지 수상했다.
이후로 여덟 시즌 동안 팀을 최상위권으로 놀게 하다가 2009시즌이 시작한 뒤 단 4 게임을 치르고 갑자기 감독직에서 사임한다. 언론에는 가족 문제라고 했지만 사실은 NBA 감독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왜냐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몇달 뒤인 12월에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어시스턴스 코치가 되었기 때문. 게다가 디트로이트 쇼크 팀 자체가 다음 시즌부터 털사로 연고지를 이전하기 위해 물 밑 작업 중이었기에 팀의 미래마저 불투명한 상황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레임비어가 시즌 개막 이후 갑자기 사임하면서 전 시즌 1위에 파이널 디펜딩 챔피언이던 팀은 단숨에 3위로 추락하였고 이후로 다시는 레임비어 시절의 위용을 되찾지 못했다. 2022년까지도 디트로이트 쇼크의 후신인 털사 쇼크나 댈러스 윙스 모두 레임비어 시절 만큼의 성적을 기록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후로 레임비어는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세 시즌간 재임했으나 NBA 감독이 되는 것에는 실패했다. 그의 선수 시절 이미지 때문에 각 구단이 꺼렸을 수도 있고, 그저 마땅한 자리가 나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다. 사실 레임비어가 코치로 머물던 시절 소속팀 팀버울브스나 출신팀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모두 신나게 바닥을 찍고 있었기에 레임비어로서는 내심 이 두 팀의 감독직을 탐냈을 법한데, 팀버울스의 선택은 레임비어가 아닌 릭 아델만에게 감독을 맡긴다는 것이었고, 피스톤즈의 선택은 로렌스 프랭크였다. 사실 두 사람 모두 NBA에서 나름 짬밥 좀 먹은 사람들이라 레임비어가 경력에서 밀렸다고 해서 아주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다.
NBA 감독 자리가 흐지부지된 2012년 여름, 뉴욕 리버티의 감독직을 맡으며 WNBA로 복귀했다. 레임비어는 인터뷰를 통해 NBA 감독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이젠 포기했다고 밝혔다[27][28]. 이후 5년 간 뉴욕 리버티의 감독으로 재임했는데, 첫 두 시즌은 연속 컨퍼런스 5위를 찍으며 플옵도 못 올라갔으나, 2015년부터 사장으로 부임한 옛 팀 동료 아이제아 토마스(1961)와 함께 컨퍼런스 1위의 최강팀으로 끌어올렸고 이후 2017 시즌까지 세 시즌 연속 컨퍼런스 1위를 차지하며 다시 한번 자신이 명감독임을 입증하였다. 그 결과 2015년에 다시 한번 올해의 감독상까지 수상했다. 그러나 이 세 시즌 동안 2라운드나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무너지며 WNBA 파이널에는 단 한차례도 올라가지 못했다. 사실 올라갔어도 이때는 하필 미네소타 링스가 왕조이던 때라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이듬해인 2018년 라스베이거스 에이시스의 감독으로 취임하였고 레임비어 취임 이전 3 시즌 연속 2할대 승률(...)을 기록하던 팀을 단숨에 4할대 승률로 끌어롤려 탈꼴찌 팀으로 만들더니만, 이듬해인 2019시즌에는 컨퍼런스 4위의 컨텐더 팀으로 끌어올렸고, 그 다음해인 2020 시즌부터는 두 시즌 연속 컨퍼런스 1위의 최강팀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에이이스 시절에도 컨퍼런스 파이널과 WNBA 파이널에서 무너지며 파이널 우승에는 실패했다.
2021년 시즌에도 정규 시즌 1위를 차지했으나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접전 끝에 패배했다. 이후 22 시즌 전 라스베이거스 에이시스의 구단주가 바뀐데다가 본인도 어느덧 65 세로 나이가 들어 코치직에서 은퇴하기로 결심, 구단 부사장으로 영전하였다. 말이 부사장이지 사실상 명예직에 가깝고 본인 스스로 인터뷰를 통해 명확하게 은퇴 의사를 밝혔기에 더이상 지도자로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WNBA에서 레임비어의 화려한 경력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WNBA의 대표적인 명장이다. 그것도 25 시즌 동안 쇼크, 리버티, 에이시스 세 팀의 감독을 맡으며, 자신이 맡았던 세 팀 모두 만년 중하위에서 1위권으로 탈바꿈시킨 특급 명장이다. 정규 시즌 306승 215패로 2023년 현재까지 역대 WNBA 감독 중에서 두번째로 많은 정규 시즌 승수를 기록한데다가 통산 승률은 .577에 달할 정도로 숫자도 아름답게 쌓아올렸다. 심지어 플레이오프 승수도 2위를 기록할 정도로 플레이오프도 밥 먹듯이 올라갔다. 다만 컨퍼런스 1위만 여덟 번 하는 동안 파이널 우승은 단 세 번으로, 그것도 감독 초창기인 디트로이트 쇼크에서만 파이널 우승이 있었을 뿐, 뉴욕 리버티와 라스베이거스 에이시스 시절에서는 정규 시즌 1위까지 차지해놓고 2라딱에 그그컨을 보여주며 파이널 우승에 실패한 경우가 많다는 게 다소 아쉬운 점.
어쨌든 선수로서는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에 드는데 실패했으나, WNBA 감독으로서는 명전에 들 자격이 충분하다는게 미국 현지의 평가이다. 역대 WNBA 최고 감독 베스트 3위 안에는 무조건 드는 수준이기 때문. 물론 아직까지도 선수 시절의 레임비어를 기억하는 팬들이 난색을 표하기는 하겠지만.... 설령 감독으로서 자격이 안된다 쳐도 선수 경력과 감독 경력을 합치면 명전에 들어갈 자격이 차고 넘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WNBA에서 지도자로 나름 화려한 경력을 거뒀지만, 한국팬들에게는 박지수가 여름 시즌에 라스베이거스에서 뛰게 되면서야 그동안 빌 레임비어가 WNBA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음이 알려지기도 했다.
5. 기타
악동짓에 대한 등가교환으로 바클리에게 펀치를 선사받고 이래저래 싸운 사이지만 레임비어가 은퇴한 뒤에는 이런 훈훈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서로 미운정 고운정 다 든 것 아니면 시간이 흐른 뒤라 그 때 일은 웃으면서 얘기하는 안주거리가 된 듯하다.[29]
사실 위의 서술을 보면 레임비어가 천하의 쓰레기같고, 실제로 천하의 쓰레기가 맞기도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 다치게 하는 것만 빼고) 프로로서는 모범적인 선수였다. 레임비어도 울고 갈 NBA 천하의 악동이라 불렸던 메타 샌디포드아테스트는 경기에서의 더티 플레이 + 외적인 논란 + 수많은 이상한 기행으로 인한 출장 정지 징계 및 벌금 물기를 밥 먹듯이 했지만, 레임비어는 메타 샌디포드아테스트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일 정도로 경기 외적 부분에서 사생활도 깨끗하고 법적으로 문제가 생기거나 논란에 휩싸이는 일 자체가 전혀 없었다. 많은 NBA선수들이 이혼과 결혼을 밥먹듯이 하며 가정폭력으로 쇠고랑도 차고 사생아들을 줄줄이 낳으며 사랑과 전쟁을 찍다가 인생을 종치는 것에 비하면 그는 결혼한 이후 이혼도 안하고 아들딸 하나씩 낳아 잘 살고 있으며, 부유한 기업 간부인 아버지와[30] 가정 주부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 받고 좋은 대학 나와서 잘 았고, 은퇴 이후에도 존경받는 지도자로 성공하기까지 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코트 위에서 행동' 단 한가지만 빼놓고 보면 여러모로 본받을 점이 많은 선수이며, 성공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그 단 한가지 이유 '(선수시절) 코트 위에서 행동'이 너무나도 심하다...
[1]
사실 매우 더티한 플레이란 걸 제쳐두고 "팀의 이득"면에서만 보면 이런 선수는 진짜 보물이다. 농구에서 골밑은 거구들이 서로 밀고 당기고 (몰래) 때리고 하면서 몸싸움을 하는 말 그대로 전장인 곳이다. 그리고 돌파해오는 선수들을 몸으로 막아선다는 건 수비수 입장에서도 (큰 부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부상을 각오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렇기 때문에 빅맨들은 부상이 잦은 경우가 많으며, 레임비어의 경우 안면 부상을 입었음에도 보호 마스크를 쓰고 계속 출전한 최초의 선수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렇게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온몸으로 팀을 보호하고 도와주니 팬들 입장에선 이뻐보일 수밖에... 다만 그 과정에서 내 동료는 보호하는데 타팀 선수들은 부상입히고 때리고 온갖 더러운 짓을 다하니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인터넷 시대였으면 전세계적으로 미움을 받았을 것이다. 멀리 갈 거 없이 지금
브루스 보웬이 받는 취급을 보면 말이다.
[2]
파울유도가 흔한 만큼 이러한 파울유도를 피하는 것도 능력으로 간주된다. 파울관리능력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3]
파울유도와 헐리웃 액션(flop)의 차이는 실제로 신체접촉이 있었냐 여부다. 코비 브라이언트나 마이클 조던이 자주 하던 플레이로 제자리에서 펌프페이크를 해 상대 수비수가 공중에 뜨면 몸을 부딪히며 슛시도를 해 파울을 얻어내는건 영리한 파울유도 플레이다. 여기서 수비수는 실제 신체접촉을 했기 때문. 그러나 같은 장면에서 만약에 수비수가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부딪힌 척하며 "으악!"거리며 만세를 부르며 넘어진다면 헐리웃 액션이고 비매너 플레이다.
[4]
여담으로 비매너냐 영리항 플레이냐 의견이 엇갈리는 경우는 조던이나 코비처럼 실제로 슛을 시도하는게 아니라
제임스 하든처럼 슈팅파울이 아닌 파울에 가까운 것을 파울당하는 순간 어거지로 (들어갈리도 없는) 슛시도를 하며 자유투를 노리는 것. 옹호하는 측에서는 룰을 활용한 영리한 플레이라 하지만, 비판하는 측에서는 자연스러운 플레이가 아니기 때문에 어거지라고 한다.
[5]
이게 가능했던 당시 플래그런트 파울 규정(부상을 입힐 수 있는 악의적인 플레이에 대한 파울)이 약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반파울과 다른 점은 파울 당한 팀 감독이 자유투를 던질 선수를 지정할 수 있게 하는 정도로, 조던처럼 자유투도 잘 쏘는 선수들에게 플래그런트 파울을 하면 사실상 일반파울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조던을 지정할 테니까... 현재처럼 엄격한 규정이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90-91시즌부터로, 이때부터 몇 차례에 걸쳐 순차적으로 된 것. 이 때문에 피지컬한 농구는 80년대에 절정을 찍고 90년대 초반까지 유지되다가 (이때 위용을 발휘한게 피스톤즈에서 더티함을 조금 빼고 터프함을 대폭 추가한 뉴욕 닉스였다) 94년 1차 핸드체킹룰 개정, 이후 플래그런트 파울 규정 강화 및 2004년 2차 핸드체킹룰, 딕 바베타같은 심판들의 공격선수 보호 성향 트렌드 증가(현재 은퇴한 NBA최장수 심판 바베타는 존경받는 베테랑 심판이었지만, 이 것 때문에 너무 수비파울을 많이 분다고 욕을 먹기도 했다) 등으로 현재 리그는 과거처럼 위험천만한 플레이는 크게 줄게 됐다. 현재는 플래그런트 파울 두 개 하면 퇴장에 하나 해도 자유투 2개+공격권, 추가로 거친 파울은 징계에 벌금까지 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미친 파울은 못하거나, 후술되는 바이넘처럼 하면 대대적으로 욕을 먹는다.
[6]
유잉은 터프한 수비수였지만, 이들처럼 상습적으로 더티한 수비를 하는 선수는 결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우월한 높이를 이용해 끝까지 블럭을 시도하고, 몸싸움을 격렬하게 하는 터프함.
[7]
점프한후 다른 사람 다리나 발 위로 착지하면 큰 부상을 입을 수 있다. 슬램덩크에서 해남전에 채치수가 당한 부상을 생각해보면 이해될 것이다.
[8]
서로 콤비라고 하면서 상대편을 어떻게 팰까? 하는 암호까지 가지고 있었다.
[9]
운동능력이 떨어지는 대신 내구성은 역대급으로 좋았다. 그의 685경기 연속 출장(8시즌 이상을 한경기도 빠짐없이 나온 셈이다.)은 NBA에서 5번째로 긴 기록이다. 심지어 이 기록도 징계로 인해 멈춘것이지 부상으로 멈춘 것이 아니었다.
[10]
그런데 배드 보이즈 비디오에 보면 데니스 로드먼은 웬만한 어둠의 기술은 다 릭 마혼에게 전수받았다고 말한다
[11]
오해를 피하기 위해 첨언하면 저런 파울이 일상적이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시 기준으로도
케빈 맥헤일의 해당 파울은 논란이 될 정도로 매우 심한 파울이었다. 다만 현대라면 당연히 즉시 퇴장과 징계감이 당연한 파울조차도 "심하긴 하지만 그래도 있을 수 있는 일" 정도로 받아들여질 정도로 피지컬한게 당시 NBA였다.
[12]
진짜 사나이 운운하는 건 오버 섞인 폄훼일지라도 실제로 1998년 드래프티로서 2020년까지 뛴
빈스 카터(즉 핸드체킹이 있는 시대와 없는 시대를 모두 경험한 선수)의 경우 2017년 당시 ESPN에서 드래프트 동기
폴 피어스,
스카티 피펜과 가진 대담에서 96년 불스와 2016년 워리어스를 비교하는 자리에서, 90년대 당시가 훨씬 거칠었기 때문에 현재 득점하는 것이 더 쉽다(it's easier to score now)라고 한적이 있다. 오해할 수 있어 첨언하면 리그 수준에 대한 비교가 아니라 시대 차이에 대한 발언이었다. 카터 본인도 현재는 손을 안 대고 막아야하기 때문에 수비하는게 더 까다롭다고 했으며, 당연히 리그 전체적으로 득점이 더 쉬워졌다면 농구의 절반인 수비가 더 어려워지기 때문에 어느 시대가 더 어렵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포인트는 그 당시가 훨씬 거칠었고 득점이 어려웠다는 것을 두 시대를 모두 경험한 사람이 증언한 것이고, 또 다른 포인트는 카터가 지칭하는 시대는 90년대 후반, 즉, 94년에 1차 핸드체킹룰 개정이 일어난 이후였기에 카터가 얘기하는 시대보다 80년대는 더 거칠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0년대보다 훨씬 거친) 90년대만 해도 파울을 너무 쉽게 부는 것이 아니냔 목소리가 당시엔 있었다. 실제로 NBA는 꾸준히 선수들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룰을 개정해왔다.
[13]
레임비어가 더럽고 악의적이어서 악명이 높았다면 마혼은 지나치게 피지컬해서 악명이 높았다. 아래 링크에도 있는 88년 LA타임즈 기사에도 나오지만 마혼은 픽을 걸면서 상대팀 가드를 기절시키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고, 한번은 필라델피아 가드 세명을 눕혔는데도 "클린트 리처드슨이 게임에 복귀한 걸 보니 제대로 못 먹여줬다"고 불평했다. 다만 마이클 쿠퍼는 "더티하다기보단 지나치게 공격적"이라고 표현했고, 버드 역시 "릭은 다치게 하려고 하진 않았다"고 한 걸 보면 너무 거친게 문제지 레임비어와는 다른 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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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싸움 당시 동료들이 둘을 떼어놓은 이후 화가 난 버드가 레임비어에게 공을 던지면서 퇴장, 레임비어는 싸움을 시작한 것 때문에 퇴장당했다. 이때 퇴장하는 버드를 향해 디트로이트 관중들이 온갖 오물을 던져댔는데, 당시는 문화가 그랬던 것인지 해설자가 "멍청한 팬들(stupid fans)이 물건을 던지고 있네요"라고 돌직구를 던지기도 했다. 경기 후 레임비어는 너무나 그답게 "버드가 넘어질 때 잡아주려고 한 것이었다"라고 했는데(당연히 믿으라고 한 말은 아니고 약올리려고 한 소리다), 버드는 "그럼요, 그 자식이 날 잡아주려고 한 거겠죠. 나도 심판에게 공 건네주려고 한 거였는데 빌의 머리가 있었던 거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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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산 1200개 이상 자유투를 던진 선수들 중 역대 113위이며
코비 브라이언트보다 단 0.01% 낮다. 시즌 자유투 성공률 3위를 3번 기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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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퇴장이 문제가 아니라 저렇게 수비하면 징계 때문에 제대로 나오지도 못할 것이고, 그 이전에 팀에서 퇴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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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즌 연속 3개 이상, 커리어 하이가 평균 4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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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바클리와 89-90시즌 당시 싸움이 유명하지만, 당시 대부분의 사람이 바클리가 레임비어를 쥐어팰 것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일단 바클리가 싸움을 잘하고 힘도 세지만 그 전까지 레임비어가 대놓고 싸운 적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선수가 격투 게임의 주연을 한 게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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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리쉬한테도, 멕헤일한테도, 버드한테도, 시카고의 빌 카트라이트와
호레이스 그랜트, 심지어 제대로 싸움이 벌어지진 않았지만
마이클 조던과 BJ 암스트롱한테도 맞은 적이 있다. 당시 강팀에서 웬만큼 골밑에서 활동하던 주전급 이상 선수라면 거의 레임비어를 한대쯤은 때려봤다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그 직전까지 레임비어가 온갖 더러운 짓을 한 것 때문에 폭발한 것. 패리쉬의 경우 레임비어를 강하게 주먹으로 내리쳐서 KO시킨 적이 있는데, 그 직전 모습을 보면 레임비어가 대놓고 팔꿈치를 계속 패리쉬 얼굴 앞에 들이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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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정반대가 찰스 바클리로, 선빵을 때리면 때렸지 절대 맞고 가만있을 선수가 아니었다. 바클리가 도발을 할때는 정말 갈때까지 가려고 맘먹은 경우가 대부분으로, 맞고 억울한 표정 지으며 상대방의 퇴장을 유도하는 건 그의 성격상 불가능. 이 때문에 바클리는 싸움 장면이 많이 남아있으며, 대부분 자기보다 크거나 최소 비슷한 거구들과 싸웠다. 심판한테도 할말은 화끈하게 하고 테크니컬 받는 성격. 이때문에 90년대 압도적인 테크 1위는 바클리였다. 반대로 레임비어는 큰 선수들만큼이나 작은 선수들에게도 폭력을 휘둘렀다. 모든게 정반대인 선수인만큼 바클리가 특히나 더 싫어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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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레임비어는 버드 위에서 목과 어깨를 붙잡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친 것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헛소리다. 본인도 알고 일부러 도발하려고 한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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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제자격인 로드맨과 비교가 되는 부분인데 로드맨 역시 피스톤즈 시절엔 거의 결장이 없었고, 5시즌 연속으로 전경기 출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아버지처럼 여긴 척 데일리 감독 사임 이후 막 나가기 시작하더니, 스퍼스에서 두번째 시즌부터는 경기 내외적으로 온갖 사고를 치고 다니며 리그 징계, 자체 징계, 자체 휴가 등 결장경기수가 많아지게 된다. 쓸데없이 심판에게 대들다가 테크니컬 파울에서
찰스 바클리와 리그 1,2위를 다투거나, 퇴장당하는 경우도 잦았다. 심지어 심판을 머리로 들이받아서 6경기 징계, 카메라맨의 사타구니를 차서 11경기 징계 등 혼자 흥분해서 뻘짓하는 경우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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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임비어가 영리하면서 교활한 점은 심판에게 항의를 하면서도 항상 선을 지켰다는 것이다. NBA에서는 심판의 권위가 절대적이다. 터무니없는 오심에 대해 나중에 검토해 징계를 내리는 일이 있어도 웬만해서는 절대 번복하지 않는다. 조이 크로포드가
팀 던컨이 벤치에서 웃었단 이유로 퇴장시켰을때도 크로포드가 징계를 받았지만 판정 자체는 유지됐다. 즉, 심판에게 대들고 찍히는 만큼 미련한 짓이 없다. 한 시즌 테크니컬 파울 41회에 빛나는
라쉬드 월러스라고 하면 악동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성격도 좋고 유쾌하고, 싸움이나 사고를 많이 친 선수는 아니다. 그런데 쉬드는 심판들과 거의 원수 사이였다. (그가 느끼기에) 말도 안되는 판정이 나오면 계속 항의하다 테크를 먹고, 공개적으로 "심판들이 나를 노리고 있다"고 발언한 적도 있다. 이러니 더 찍힐 수밖에... 어쨌거나 레임비어는 상대방 도발도 딱 상대가 이성을 잃을 정도만, 그리고 심판에게 항의도 딱 징계 안 받을 정도만 하는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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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스크는 훗날 같은 피스톤즈의 후배인 리처드 해밀턴이 잦은 부상 때문에 오래 쓰다가 아예 평상시에도 쓰고 다니면서 그의 상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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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리쉬는 팀동료인 버드와 달리 점잖은 선수였다. 패리쉬는 은퇴 후 전 동료인 세드릭 맥스웰과 가진 인터뷰에서 '감정조절을 못한 건 그게 처음이었다'고 회상한 적이 있었다. 웃긴건 당시 패리쉬는 퇴장당하지 않았으며 파울도 안 불렸다. 당시 중계하던 덕 콜린스는 잘못된 판정이었다고 강하게 비판하면서 테크니컬 파울이 불렸어야 했다고 지적했고, 이유가 어쨌든 주먹질을 했으니 당연히 콜린스의 말대로 파울이 불렸어야 했다. 레임비어의 악명 때문에 잘못된 판정이 나온 케이스였고, NBA는 이후 패리쉬에게 7500달러 벌금과 한 경기 징계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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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댈러스로 연고이전해
댈러스 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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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티 감독 부임 직후 디트로이트 언론과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에 따르면, "(NBA 감독이 되기 위해 3년 동안) 입에 거품을 물고 노력해봤죠. I was foaming at the mouth to get an opportunity," "(그런데) 실패했어요. '좋아, 나도 이제 나이 먹었어, 쉰여덟이니까. (NBA 감독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지났나봐..' It didn't happen. 'OK, I'm getting old, just turned 58. My time's probably pas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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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임비어의 선택이 이해될 수 밖에 없는데, 몇년간 링크가 있었던 팀들은 다른 인물을 감독으로 택했기에 새 팀의 감독 자리를 제로 베이스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감독 자리가 언제 나올지도 모르는데 본인 나이는 이제 60을 바라보고 있고, 정작 감독 자리가 나온다해도 성적 부진으로 전임 감독이 해고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므로, 이 새 감독직은 독이 든 성배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첫번째 감독 도전에서 실패하면 그걸로 NBA 커리어가 끝장날 가능성이 높은 것. 따라서 이렇게 불확실한 NBA 감독 자리를 기다리며 세월을 보내느니 확실하게 오퍼가 들어온데다가 지도자로서도 이미 경험해 본 적이 있는 WNBA로 복귀하는게 낫겠다는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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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사람은
찰리 쉰이 주연한 패러디 영화 '못말리는 비행사'에 카메오로 출연한 적이 있다. 클럽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장면에서 서로 멱살잡고 싸우는 장면으로. 이때 바클리는 필라델피아 소속이었기 때문에 식서스 유니폼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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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레임비어 시니어는 오웬-일리노이 글라스라는 유리 패키징 전문 회사의 고위 간부였는데, 포츈 500 리스트에도 포함되는 규모 있는 회사이다. 레임비어 씨는 여기서 사장직까지 올랐는데, 이를 두고 레임비어는 젊었을 때 "아마 NBA 선수들 중 자기 아버지보다 돈 적게 버는 사람은 저밖에 없을 겁니다"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레임비어 부자가 사업을 했다가 홀라당 말아먹은 게 바로 패키징 사업인데, 전공분야를 살리려고 한 모양이지만 사업이란 게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