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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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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 시절2. Apple의 시작3. Apple에서 쫓겨나다4. NeXT5. 픽사6. Apple로 복귀7. iPod8. iPhone 출시와 스마트폰 혁명9. iPad 출시10. 암 투병과 사망

1. 유년 시절

파일:스티브 잡스의 어린시절 집.jpg
스티브 잡스의 어린 시절 가족의 집이자 애플 컴퓨터의 원래 위치이다.

1955년 2월 24일,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인 어머니와 시리아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생부 압둘파타 존 잔달리는 시리아 정치학부 출신의 아랍계 미국인 이민자로 후에 정치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현재는 네바다 주에서 카지노의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 그러나 그들은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고, 당시 잡스의 생모인 조앤 시블은 아버지의 반대로 잔달리와 헤어진 상태였으므로 태어나자마자 아이를 입양 보내려 했다. 그렇게 잡스는 친부모와 헤어져 폴 잡스와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되었고[1], 이 불우한 과거는 잡스의 성격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2][3]

폴 잡스 부부는 스티브 잡스를 친아들처럼 생각하고 열심히 키웠으나[4], 어렸을 때 잡스는 부모 속을 많이 태우는 아이[5]였다고 한다. 아버지 폴 잡스의 말에 따르면 스티브는 그렇게까지 천재성을 안 보였다고 한다. 친구이자 라이벌과는 달리 학업적으로 천재는 아니었던 듯. 애초에 학교 공부 자체를 많이 하지 않았다.

고아라고 아이들이 놀리는 바람에 아이들과 노는 대신 차고에서 안 쓰는 부품을 모아 뭔가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사실 아버지가 뛰어난 기술자라 아버지가 무엇이든 잘 만드는 것을 보고 감탄하여 아버지에게 기술을 배웠다. 나중에 그의 생부모는 정식으로 결혼해서 소설가이기도 한 잡스의 여동생 모나 심슨을 낳았는데,[6] 둘은 성인이 될 때까지 서로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으나, 만난 후에는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그 생부모라는 작자들은 결혼한 후 몇 년 만에 또 이혼했다. 잡스는 양부모라는 단어를 증오하는데,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만을 진짜 부모로 여겼으며, 생모와는 만난 적이 있지만 생부와는 끝내 만나지 않았고[7] 죽을 때까지 부모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 외에 폴 잡스 부부의 또다른 입양 자녀인 퍼트리샤 잡스라는 여동생도 있다. 스티브 잡스 전기에서 말하길 친동생 모나 심슨을 만나게 되면서 퍼트리샤와는 멀어져 버렸다.

잡스의 사업가 인생은 고등학교 때 전자공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시작되었다. 꿈 없이 살던 잡스는 갑자기 전자공학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고, 휴렛팩커드에서 방과후 수업을 들었다.[8] 1972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9] 휴렛팩커드에 여름 인턴으로 채용된다. 그곳에서 Apple을 같이 세운 동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을 만난다. 잡스는 인턴이 끝나고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리드 칼리지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한 학기 만에 중퇴했다. 본래는 전공이 맘에 들지 않고 대학생활에 흥미가 없다는 이유로 중퇴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2005년 스탠퍼드 대학에서의 연설에 의하면 부모님의 저축을 몽땅 투자할 만큼 자신의 대학 생활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였다. 하지만, 대학 중퇴 후 많은 교양 수업을 청강한 것은 훗날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데, 특히 나중에 UI용 글씨체를 디자인할 때 서예 강의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동양 철학에 특히 관심을 보였는데 그 영향으로 그의 종교는 불교였다. 1970년대에 불교의 선(禪/Zen)사상에 심취하여 '오토가와 고분(乙川弘文)'이라는 일본인 승려 밑에서 수행을 한 적도 있다.[10][11] 한때는 자신도 스님이 될까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을 정도로 심취했었으나 스승의 만류로 다행히도 IT 쪽의 길을 관철했다는 일화도 있다. 1974년엔 지인인 대니얼 코트키와 인도를 방문했다.

2. Apple의 시작

파일:스티브 잡스 젊은 시절.jpg
젊었을 적 스티브 잡스
그 뒤 1년 정도 문학 철학에 심취해 있다가, 잡스는 우연한 기회로 게임 회사인 아타리에 게임 디자이너로 취직하게 된다. 그곳에서 과 같은 초기 비디오 게임에 빠져버린 잡스는 컴퓨터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아타리에서 또 1년도 못 채우고 사표를 낸다. 그 때 스티브 워즈니악은 아직 HP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가 운영하고 있던 '손수 컴퓨터 만들기 클럽'에 가입한 잡스는 컴퓨터에 완전히 빠져들었고, 그 후 워즈니악과 잡스는 의기투합하여 직접 컴퓨터 제작에 착수, 1976년 Apple I이라는 PC 역사상에 길이 남을 기종의 첫 번째 프로토타입을 롤아웃한다.[12] 비록 나무 케이스에 모니터조차 없는 투박한 플라스틱 기판과 실리콘칩 덩어리였지만, 꽤 큰 반향을 일으키며 그들에게 꽤 많은 돈을 안겨주었다. 워즈니악의 아버지는 "왜 그 놀고먹는 백수(잡스)와 45:45로 나누느냐?!"라고 했다고 한다.[13]

처음 Apple I을 개발했을 때 당연히 이것을 받아주려는 가게는 없었는데 이때 컴퓨터라는 것은 큰 회사나 대학, 정부기관에서만 쓰는 게 일반적 이었고 PC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의도 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다. 그런데 잡스가 이것을 한 가게에 자신의 유창한 말로 팔기로 구두계약을 하고 생산을 했는데... Apple I의 사진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모니터고 뭐도 없이 요즘으로 치면 컴퓨터 본체만있는 기기다. 당연히 모니터와 기타 입력장치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주인은 당황하지만 대인배적인 마인드로 그걸 그대로 판다.

Apple I의 가격은 666.66달러였다. 혹자는 잡스와 워즈니악이 악마의 숫자 666을 좋아했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그냥 숫자가 반복되는 게 멋져서 그랬다고 했다.

사실 Apple I은 거의 '기판만 있는' 수준의 물건이라 케이스 등은 자작해야 하므로 거의 요즘으로 보면 '기판 키트' 수준의 물건이었다. 대량 생산되지도 않았고 동네 상점에다가 영업망을 뚫어서 판매했다. 구조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서 워즈니악만이 A/S 업무를 할 수 있었다. 제대로 상업적으로 출시된 제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후 Apple II, Apple II Plus 등 후속 모델들이 차례로 성공하면서 스티브 잡스는 명성과 부를 얻게 되었다.

3. Apple에서 쫓겨나다

하지만 Apple II, Apple II Plus 이후로 애플은 위기에 봉착하기 시작한다. 일단 Apple II는 코모도어 64에 도전을 받기 시작하며, 워즈니악이 만들지 않고 스티브 잡스의 개입이 심했던 Apple III망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Apple III가 망하자 잡스는 GUI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며 Lisa 프로젝트와 Macintosh 프로젝트를 동시에 시작한다. 원래 잡스는 자기 딸의 이름까지 붙인 Lisa 프로젝트를 맡고 있었다가 1982년, 너무 화를 잘 내고 감정적이라는 이유로 Lisa 팀에서 쫓겨나서 Macintosh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된다.

이후 잡스는 자신을 쫓아낸 Lisa 프로젝트에 대한 경쟁심이 불타오른 나머지 개발자들에게 주 90시간 근무를 시키는 등 Macintosh에 지대한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Apple II 팀, Lisa 팀, Macintosh 팀은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Macintosh 팀이 Apple 본사에 걸어놓은 해적기를 Lisa 팀이 뺏어가기도 하고, Macintosh 팀이 "주 90시간 근무 야 신난다!" 라고 하자 Lisa 팀은 "주 70시간 근무했는데 Macintosh 보다 빨리 출시할 예정이다!" 라고 하고, Apple II 팀은 "주 50시간 근무로 회사를 먹여살린다!"라며 서로를 디스하기도 했다.

또한 잡스가 회사에 "Lisa 팀은 정말 형편없는 팀이다. 그들은 회사에 도움이 안되는 팀이니 Lisa 팀을 해체시키고 Macintosh에 올인하자." 라고 주장한 사실이 Lisa 팀에게 전해지자 Lisa 완성에 오기가 생긴 Lisa 팀의 개발자들은 "Lisa가 출시되지 못하면 집단 사표를 쓰고 회사를 나가겠다." 고 선포하였다. 당시 막 들어온 존 스컬리는 Apple 내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잡스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서 Lisa 팀을 Macintosh 팀에 병합시키려고 하였고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다.

Lisa 팀과 Macintosh 팀의 병합이 거론되자 연봉 문제가 터지는데, 당시 잡스의 의해 반강제로 1~2만 달러를 받으면서 주 90시간 노동을 하던 Macintosh 팀은 자신들보다 일도 덜하는 Lisa팀이 연봉은 5만 달러나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분노했다. 잡스는 Macintosh 팀에게 보너스 제공을 약속하면서 잠재우는데 성공했더니 이번에는 그들보다 적은 연봉으로 일하고 있었던 Apple II 팀이 들고 일어났다.

잡스가 몰고 온 이 대형 폭풍은 애플 내에서 잡스의 위치를 위험하게 만들었다. 이사진은 물론 갓 들어온 존 스컬리와 계속해서 의견 충돌을 일으켰고, 이에 스컬리를 쫓아내기로 결심한 잡스는 과감하게 이사회에서 투표를 걸었는데, 이미 위의 사건 사고들로 인망을 잃을 대로 잃었고 실적도 부진했기 때문에 그냥 졌다. 이리하여 1985년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서 쫓겨나게 된다.

나중에 이 조치를 회사가 악의적으로 선량한 잡스를 내쫓은 것처럼 설명하는 곳이 많은데, 잡스 자신이 자초한 일이었다. 잡스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해고하기 위해선 이사회의 결정이 필요한데, 이익을 보고 움직이는 이사회가 왜 잡스를 잘랐겠는가? 이익은커녕 손해만 내는 짓을 하고 있어서다. 물론 잡스의 독선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성격도 한몫했다.

4. NeXT

스티브 잡스는 Apple애서 쫓겨날 때 엔지니어 몇 명을 같이 데리고 나왔고 이들과 함께 NeXT라는 회사를 차리고 워크스테이션 개발에 매진했다. 이 때도 여러가지 기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원래 알고 지냈던 일본 조동종 승려 오토가와 고분으로부터 집중적으로 참선 지도를 받은 것도 이때였다. 이 당시의 경험은 잡스의 인성과 경영철학 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14] 이 때 투자처를 찾던 잡스는 모교인 홈스테드 고교의 선생을 찾아 자신의 회사에 투자해 주지 않겠냐는 질문을 했고, 당시 잡스의 성공 가능성을 그리 좋게 보지 않은 선생은 그러겠노라고 해놓고 정작 입금은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선생은 후에 잡스가 성공한 사실에 땅을 치며 후회하며 아직도 선생 노릇을 하고있다. 하지만 잡스는 그런 학교에도 애정이 남아있는지 Apple의 CEO로 복귀한 뒤 학교에 Apple사의 컴퓨터를 종종 선물로 보냈다고 한다.

스티브 잡스의 NeXT는 대학 연구소 등을 타켓으로 하는 저가형 워크스테이션을 판매했지만 시장에서 참패했고 결국 잡스는 결단을 내려 1993년, NeXT의 워크스테이션 생산을 완전 중단했다. 당시에 그 시장은 휴렛팩커드 실리콘 그래픽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UNIX 워크스테이션들이 독식하고 있었고, 벤처기업이나 다름없었던 NeXT가 도전하기엔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NeXT는 기술적으로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고 특히, NeXT의 운영체제 NeXTSTEP이 좋은 평가를 받아 훗날 Apple이 내놓고 있는 모든 스마트 장치와 컴퓨터 운영체제들의 기반이 되었다. 지금의 macOS Mac OS보다는 NeXTSTEP의 후계에 더 가깝다.[15] 이후 Apple의 정통 데스크톱 라인인 Power Mac과 인텔로 넘어와서의 Mac Pro가 이 저가형 워크스테이션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5. 픽사

1986년, 잡스는 루카스필름에서 CG를 담당하고 있던 픽사를 인수했는데, 이때는 NeXT 프로젝트의 일환으로써 인수한 것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결정은 잡스의 뜻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았다.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픽사는 최초에 잡스가 자신의 프로젝트를 위해 구입한 회사였다. 픽사는 당시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 개발팀과 그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판매하기 위한 기술 데모 영상 및 3D 애니메이션 외주를 맡던 창작팀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애초 잡스가 픽사를 인수한 이유는 오로지 자사 컴퓨터에 킬러 소프트로 탑재할 소프트웨어가 필요해서였다. 그런데 존 라세터의 회상에 의하면 처음 잡스는 회사에 대한 보고를 받으며 창작팀이 만든 단편 애니메이션을 본 뒤, "누구 작품이냐?"고 묻고 대답을 듣자, 그 이후로 창작팀에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픽사는 500만 달러의 적자를 냈는데, 당시 잡스의 다른 회사였던 NeXT도 적자 행진 중이었고 잡스가 회사 내부 정보를 이용했다며 Apple이 잡스에게 소송을 건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잡스는 픽사에 대해 전혀 간섭하지 않아서 아직도 이때 근무했던 픽사 창작팀 직원들은 당시의 스티브 잡스를 "보기 드물게 관대한 투자자"로 묘사한다.

이후 픽사는 틴 토이라는 단편 3D 애니메이션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이 아카데미상을 받게 되자 잡스는 3D 애니메이션 산업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겨 자비를 들어가며 3D 애니메이션 제작을 지원했다. 잡스는 디즈니와 애니메이션 제작 계약을 맺었는데, 이 때 디즈니에서는 작품, 캐릭터와 제작 통제권과 수입의 87.5%를 디즈니가 갖고 가겠다는 불공평한 조건을 내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스는 욕심을 버리고 디즈니와 계약을 맺었고, 1995년 개봉한 토이 스토리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는 토이 스토리 개봉 이전부터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주변에서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개봉 일주일 후 픽사의 나스닥 상장을 계획했다. 그 계획은 맞아 떨어져 당시 잡스가 보유하고 있던 픽사 지분 80%의 가치는 순식간에 1조 원이 넘게 되었다. 토이 스토리의 성공과 픽사 덕분에 잡스는 실패한 CEO의 대명사에서 차세대 테크 산업의 리더로 다시 복귀하는 데 성공한다.

잡스가 픽사의 상업적인 성공에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자기가 직접 경영 방향을 정하고 컨트롤하려 한 때는 픽사의 흑역사에 가까웠고 잡스에게도 큰 이익이 없었다.[16] 도리어 프로젝트에서 한발 빠지고 자금줄과 스폰서를 잡아준 뒤, 존 라세터 등의 제작진들로 하여금 알아서 일하게 시켜놓자 대박을 거둔 것이다.[17] 이것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겠지만, 이 시기를 전후해서 잡스가 꽤 많이 바뀐 것도 사실이다. 관련 글

2006년 월트 디즈니 컴퍼니는 주식 맞교환 방식으로 74억 달러에 픽사를 인수하였고, 그 덕에 스티브 잡스는 월트 디즈니 컴퍼니 지분의 7%[18]를 보유하게 되면서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이사로서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2012년 픽사는 본사 빌딩을 새로 단장하면서 건물 이름을 "스티브 잡스 빌딩"으로 명명했다.

6. Apple로 복귀

파일:스티브 잡스와 iMac G3.jpg
1999년 imac G3을 들고 앉아 있는 잡스
파일:스티브 잡스와 iMac G4.jpg
2002년 imac G4 발표식
파일:스티브 잡스와 U2.jpg
2004년 U2와 함께 ipod 프로모션을 하는 잡스

한편, 잡스도 없고 워즈도 없던 Apple은 계속된 부진으로 인해 겨우겨우 연명만 하는 "썩은 사과"가 된 회사로 전락한 상태였다. 이에 길 아멜리오는 결국 1996년 NeXT사를 인수하고 스티브 잡스를 다시 경영 고문으로 불러들이는 결정을 했다.

잡스가 Apple에 돌아왔을 당시였던 1997년에 Apple은 무려 10억 달러가 넘는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아멜리오가 잡스를 복귀시키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빌 게이츠는 당장 아멜리오에게 연락해 "잡스를 불러들이는 것은 실수며 후회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게이츠가 질투에 눈이 어두워 그랬다기보단, 이미 잡스가 Apple에서 쫓겨난 인물인지라 실패한 전 경영자를 다시 불러들이는 모양새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잡스는 어렵지 않게 경영권을 장악하고 아멜리오를 쫒아낼 수 있었다.

잡스는 Apple로 복귀하고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논의해 Apple과 마이크로소프트의 특허 소송을 합의로 마무리했다. 또, Apple은 잡스가 경영권을 잡은 지 1년 만에 3억 달러 흑자로 돌아서는 기적을 연출해낸다. 이는 이전의 Apple CEO들이 최대한 많은 제품을 개발하고 많은 사업에 손을 대는 방식의 경영을 하고 있었던 데 반해, 잡스는 제품의 종류를 줄이고 꼭 필요한 사업을 제외한 기타 사업에서 손을 떼며 동시에 직원 3,000명을 해고한 덕분이었다. 물론 이전의 CEO들도 구조조정을 시도했었던 바 있었지만 내부 저항으로 인해 제대로 추진하지 못 했다. 그러나 잡스는 Apple이 위기 상황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창업자라는 후광을 철저히 이용해 상대적으로 Apple의 구조조정을 쉽게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조조정은 Apple의 수익성을 회복시키며 파산 직전에 몰려있던 Apple을 다시 살려놓는 데 기여한다. 이 시기 Apple의 재기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제품은 1998년부터 발매되기 시작한 반투명케이스의 일체형 컴퓨터인 iMac G3이었고, 그 디자인을 책임졌던 조너선 아이브는 이후 Apple의 디자인 부문을 이끌면서 후에 부사장의 지위까지 승진한다.

이후 Apple의 호전된 경영 성과에 더해 픽사의 두 번째 작품 벅스 라이프까지 대박을 터뜨리면서 스티브 잡스는 완전히 정상에 올라선다.

그리고 2000년 마침내 스티브 잡스는 Apple의 CEO로 완전히 복귀했다. 2000년 Macworld에서의 CEO 취임 선언은 가히 충공깽. #[19] 사실 잡스는 설립자임에도 불구하고 이전까지 Apple의 CEO 직함을 공식적으로 가진 적이 없었다. 젊은 잡스가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이사회에서 그에게 CEO 자리를 맡기지 않았던 것인데, 잡스는 이때서야 처음으로 Apple의 진짜 CEO가 되었다.

2002년, Apple은 첫 LCD 작품인 iMac G4와 교육용 eMac을 출시했고, eMac이 일반 시장에서 히트를 기록했다. iMac G4의 경우 초창기에는 비싼 가격과 당시 CRT 모니터를 선호하던 고객층들에 의해 인기를 얻지 못했으나, 2003년 iMac G3가 단종되고 LCD가 주류가 되면서 2000년대 중반부터 잘 나가기 시작했다. 참고로 eMac은 2006년 최종 단종되었다.

7. iPod

파일:스티브 잡스와 iPod nano 1세대.jpg
iPod nano 1세대를 소개하는 잡스
그렇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2001년 스티브 잡스는 iPod을 세계 시장에 선보였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이미 쟁쟁한 기성 MP3 플레이어들이 있었던 관계로 즉각적인 호응이 있지 않았는데, 이는 iPod이 처음에는 맥에서만 사용 가능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 4월 28일 iTunes Store iTunes for Windows의 등장으로 일반 컴퓨터에서도 사용 가능해진 iPod 4세대부터 제품이 잘 팔리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2005년 iPod nano가 등장하면서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플래시 메모리나 음장 노하우 등 기술력으로는 아이리버가 뛰어났으나, 클릭휠 인터페이스와 디자인 그리고 iTunes Store 서비스로 iPod는 성공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인터넷 복돌 문제로 신음하던 음악계에서 iTunes Store는 음악계와 일반인들 모두에게 큰 호응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서비스되었던 것이 크다. 당시 미국의 복돌이들은 돈 문제보다는 편의성을 이유로 복돌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꿰뚫었다는 듯.

그 결과, iPod은 전세계에서 무려 1억 대나 넘는 물량을 팔아치웠다. iTunes Store는 지금도 Apple의 스마트 장치들에 넣을 수 있는 MP3 음원을 판매하고 있으며, 1억 5,000만 곡 이상의 노래를 매년 팔아 치우고 있다.

이런 전성가도를 달리던 도중 스티브 잡스는 2004년 8월 췌장암 시한부 선고라는 청천벽력을 맞게 된다. 온갖 역경을 넘어 다시 우뚝 섰다 싶었던 잡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특히 췌장암은 암 중에서도 가장 나쁜 암으로 발생 자체가 희귀할 뿐만 아니라 증상 없는 상태가 길어 발견 시기도 보통 늦기 마련이어서 치료가 매우 까다로운 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잡스의 췌장암은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췌장암 중에서도 희귀한(약 1%) 섬세포암이었다. 잡스의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한동안 잘 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진단을 받은 바로 그 날) "나는 목으로 내시경을 넣어 위와 창자를 거쳐 췌장의 종양에서 조직을 떼어내는 검사를 받았습니다. 나는 약으로 잠든 상태였는데, 같이 있던 아내가 의사들이 현미경으로 세포를 보고 소리치기[20]시작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암은 수술로 치료할 수 있는 매우 희귀한 췌장암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수술을 받았고, 이제 괜찮습니다."
스탠퍼드 대학 졸업축사 중
한편, Apple은 iMac 등을 출시하여 데스크탑 시장에서도 착실하게 시장을 점유하였다. 이때 잡스는 전임자들과는 달리 매킨토시에 인텔의 CPU를 쓰고, Boot Camp 같은 소프트웨어를 통해 Windows와의 호환성을 확보하는 등 여러가지 시도를 하였다.

8. iPhone 출시와 스마트폰 혁명

파일:스티브 잡스와 iPhone 1세대-2.jpg
<keepall> 2007년 1월 9일, 아이폰 출시를 발표하는 잡스. 이 날 애플의 제작발표회는 세상을 바꾼 프리젠테이션으로 회자되고 있다.

2007년 6월 29일, Apple iPhone을 출시한다. 스티브 잡스 iPhone 키노트 영상
Today, today, Apple reinvents the phone.
(오늘, 바로 오늘, Apple은 휴대폰을 재발명합니다.)
잡스는 이렇게 말하며 iPhone의 소개를 시작한다. 이때 쓰인 프레젠테이션 기법이 유명한데, 잡스가 iPhone의 세 가지 핵심 콘셉트(Revolutionary mobile phone, iPod with touch control, Breakthrough internet communicator)를 Apple 특유의 앱 모양의 아이콘들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하는 말이 "These are not three seperate devices. These are one device!(이것들은 분리된 세 가지 기기가 아닙니다. 이것들은 하나의 기기에요!)"이었다. iPhone이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휴대폰, mp3플레이어, 인터넷을 하나로 합친 편리하고 혁신적인 제품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테크닉이었다.

잡스가 프레젠테이션을 이어가면서 비난한 것은 기존의 " 스마트폰"들의 세 가지 문제점이었다. 첫 번째는 기존의 플라스틱 버튼 입력 체계는 화면이 너무 작아 한눈에 표현할 수 있는 정보량이 적다는 점과 응용 프로그램마다 유저 인터페이스 최적화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는 쓰는 방법을 익히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이고, 세 번째는 그것들이 그닥 "스마트"하지 않다, 즉 기능이 미약하다는 점이었다. 각각에 대해 잡스는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했고 이는 결국 iPhone을 혁신적인 스마트폰으로 만들어 버렸다.

첫 번째는 Multi-touch 유저 인터페이스였다. 전면에 플라스틱 버튼은 홈 버튼 하나만 두고 모두 없앤 뒤, 커다란 3.5인치짜리 터치 디스플레이 장치를 배치하여 소프트웨어로 키보드를 디스플레이 장치에 띄움으로서, 기존의 플라스틱 버튼 가능을 완전히 대체해 터치 인터페이스 개념을 정립했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겠지만 잡스는 이를 컴퓨터의 GUI를 휴대폰으로 가져오되 입력 장치를 마우스 대신 터치 패널과 손가락으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핀치 투 줌 등 다양한 멀티 터치 제스처 개념을 도입해 작은 화면 환경의 한계를 극복했다.

두 번째는 앱 중심의 직관적인 유저 인터페이스이다. "메뉴 → 목록 → 항목" 방식에 익숙했던 기존의 휴대폰 유저 인터페이스들과는 다르게 iPhone은 바탕 화면에 계산기면 계산기 앱을, 시계면 시계 앱을 하나 하나 표시하는 방식으로 굉장히 직관적인 인터페이스를 구축했다. 이는 Apple에서 1983년부터 Mac에서 쓰던 방식을 응용해 도입한 것이다.

세 번째는 OS X을 iPhone에 도입한 것이다. 물론 모든 기능과 성능을 가져온 것은 아니고 휴대폰이라는 보다 제한된 사양에서 충분히 돌릴 수 있을 정도로 개량했다(잡스는 데스크톱 클래스라고 강조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만 해도 iPhone이 기존의 스마트폰들에 비해 크게 차별화 가능했다.

잡스의 iPhone 프레젠테이션에서 신나게 까인 경쟁 회사들은 한결같이 iPhone을 무시했다. 가장 빈번한 공격 포인트는 역시나 가격. 당시 업계 관계자들도 기성 업체들이 내놓은 탄탄한 제품군들이 많은 관계로 고전할 것이라 예측했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들의 반응과 다르게 iPhone은 610만 대나 팔려나갔다. 그러나 이는 잡스의 목표치보다 낮은 판매량이었다. 그 근거로 2달 만에 200 달러나 인하했다가 2달간 산 사람들에게 항의를 받아 100 달러짜리 바우처를 나눠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iPhone이 지원하는 이통통신이 3세대가 아닌 2세대 GSM이었기 때문이었다.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App Store가 등장한 이후 iPhone 3GS가 나오면서 부터였다.

iPhone은 이후 스마트폰이라는 개념 자체를 새로 정립했고, iPhone의 방식을 표방한 Android의 등장으로 그 개념은 더욱 확산되었다. 지금도 대부분 스마트폰의 전반적인 콘셉트는 iPhone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9. iPad 출시

파일:스티브 잡스와 iPad 1세대.jpg
2010년 1월 27일, iPad 출시를 발표하는 잡스

스티브 잡스가 흔히 멀티터치 기기로 처음 고안한 것이 iPhone이라고들 알고있지만, 사실은 태블릿(iPad)을 멀티터치 기기로 만들 계획이었다. 결국, 2010년 잡스는 9.7인치의 태블릿인 iPad를 출시한다. 당초 언론의 기대에 못미치는 시장의 첫 반응이었지만, (그냥 화면 크고 전화 안되는 iPhone이라는 둥) 본격적으로 iPad용 앱이 활성화되면서 iPhone과는 다른 시장을 공략하면서 iPhone 못지않은 대성공을 거둔다.

10. 암 투병과 사망

파일:스티브 잡스가 마지막으로 참석한 WWDC11.jpg
2011년 6월 6일, 스티브 잡스가 마지막으로 참석한 WWDC11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저는 17살에 이런 인용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만약 매일을 당신의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게 될 것이다.")
스티브 잡스, 2005년 6월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

2000년대 들어서 스티브 잡스의 건강은 악화되었으며 2004년에 췌장암 수술도 받았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의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고 세간에는 잡스의 병세가 계속 악화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에 Apple 측은 주가하락 등을 이유로 잡스의 건강 이상설을 부인해왔다. 그러나 2011년 1월 17일에 잡스가 스위스 병가를 갔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다시 그의 건강을 우려하는 추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스티브 잡스 또 병가, 이번에도…

췌장암 혹은 이의 후유증으로 추정되었으며, 그의 병가가 알려지자마자 Apple 주가가 6.6% 급락, 시가총액 220억달러가 증발하는 현상이 일어나, Apple이 얼마나 잡스에게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주기도 했다. 이 당시 인콰이어러지에서는 6주 시한부를 판정받게 되었다는 보도를 하기도 하였으나, 얼마 후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실리콘밸리 오찬에 참석하기로 하여 루머를 불식시켰다. 오바마 대통령과 미팅 예정 - ABC발 뉴스[21]

그러던 중 잡스는 2011년 3월 3일 iPad 2 발표회장에 강림, 루머보다 건강한 모습을 보여 경영에 문제가 없음을 과시했고, 잡스 시한부설로 위태위태하던 Apple의 주가는 폭등해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다시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었고 iOS 발표때 다시 등장했을 땐 한층 수척해진 모습으로 나왔으며, WWDC 2011 첫날, 오전 10시의 발표회에 재등장했을 때도 매우 수척한 모습으로 등장하여 점점 시한부설이 루머가 아니었음을 짐작케 하였다.

2011년 8월 25일, 결국 스티브 잡스는 CEO직을 사임한다고 밝히고,[22] 대신 Apple 이사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 스티브 잡스의 Apple CEO 사임사 전문 그리고 사임한 지 한 달 반도 안된 2011년 10월 5일, 5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 # 유언은 "오 와우, 오 와우, 오 와우."[23] #

사후에 그가 대체의학에 의존하다가 치료 시기를 놓쳐서 죽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잡스는 2003년 10월 췌장암으로 진단받았으나, 6개월간이나 치료를 거부하고 식이요법, 침술, 수행으로 치료하기를 고집했다. 잡스는 몸에 칼을 대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으며, 부인인 로린 파월 잡스가 설득하고 난 뒤에야 겨우 수술을 받아들였다. 수술을 받아들인 뒤에도 자신이 병을 공부하고, 치료법까지 지시하는 등 전문가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게다가 잡스는 지독한 채식주의자였고 유기농 채소와 과일을 즐겨 먹었는데[24] 췌장암 수술 뒤 이것도 문제가 됐다. 췌장 절제 후 단백질 섭취가 더 중요하단 건 정설이기 때문이다. 결국, 처음 발견 당시에 췌장의 5%만 퍼져 있었던 암은 9개월 뒤에는 췌장 전체로 퍼졌고 수술을 한 뒤에도 전이가 계속되어 스티브 잡스는 목숨을 잃게 되었다. #

흔히 췌장암은 5년 생존률이 10% 미만으로 가장 악질적인 암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으나, 이는 췌장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췌관선암'의 경우이고, 잡스가 걸린 췌장암은 전체 췌장암의 1%를 차지하는 희귀암인 '아일렛 세포 신경내분비암'으로 5년 생존률 50%로 어느 정도 가망이 있는 암이다. #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어떻게 그 독한 췌장암에 걸렸는데도 8년을 버텼을까 신기해 하는 사람도 많고, 잘못된 기사도 많았다. '아일렛 세포 신경내분비암'이었던 만큼, 치료만 제대로 받았더라면 더 오래 살아있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잡스의 장례식은 가족과 지인들만 참석하여 비교적 간소하게 치러졌다. 2011년 잡스 사망 후, 2015년에 출간된 포츈 기자이자 지인인 브렌트 슐렌더가 쓴 비커밍 스티브 잡스에 수록된 바에 의하면, U2가 장례절차 도중 간단한 송연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노래가 끝난 후 인사를 했는데 그 내용은 “스티브는 여러분이 계속 슬퍼하고 있길 바라지 않을 겁니다. 이제 다시 제 할일을 하기를 바랄 겁니다.” 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 대학원생이었던 잡스의 친모는 잡스 부부가 대학을 나오지 않아 입양을 거부하려 했으나 잡스 부부가 무슨 일이 있어도 대학에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고 입양에 동의했다. [2]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는 동갑이다. 하지만 2월생인 잡스가 10월생인 게이츠보다 한 학년 위였다. 게다가 둘 다 고교를 원래 커리큘럼보다 1년 일찍 졸업하여 잡스는 1972년 9월, 게이츠는 1973년 9월에 대학에 입학했다. 잡스와 게이츠가 태어난 시기는 정확히 IT 시대의 새로운 변화를 20대에 맞이할 수 있는 그런 황금 같은 몇 안 되는 시기였다. [3] 비록 빌 게이츠처럼 부유한 집안은 아니었으나, 잡스의 양부인 폴 잡스는 실리콘밸리로 유명한 샌프란시스코의 엔지니어였고, 동료나 친구들 역시 대부분이 대부분이 엔지니어였으며, 당시로선 부유한 이들이나 접할 수 있었던 컴퓨터를 쉽게 접할 수 있었던 환경에 있었다. [4] 스티브가 어렸을 때 양어머니는 잡스를 수영 교실에 보내기 위해 가정부 일을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정말 열심히 키웠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잡스가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는 식으로 지극정성으로 키웠기 때문에 조금 버릇이 엉망이 되어 훗날 드러낸 이기적인 성격에 영향을 준 듯하다. [5] 집 안의 전자제품들을 많이 망가뜨릴 뿐만 아니라 벽에 시공된 콘센트에 머리핀을 꽂아 감전되어 화상을 입은 적도 있었다. 잡스가 감전 사고를 당했을 당시 거실에 있었던 잡스의 양부모는 천장의 등이 갑자기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자 이상하다 생각한 찰나에 잡스의 울음 소리가 나서 방으로 달려가 보니 잡스가 콘센트에 머리핀을 꽂았던 것이었다. [6] 참고로 모나 심슨의 전 남편이 심슨 가족의 작가 중 한 명인 리처드 어펠인데, 호머 심슨의 어머니 이름을 아내 이름에서 가져다가 쓴 것으로 유명하다. [7] 우연히 그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마주친 적은 있다. [8] 이는 아직 어린 스티브 잡스가 자신이 제작하던 것의 부품을 찾기 위해, HP사장의 전화번호를 찾기 위해, 마을의 모든 전화번호를 모아놓는 전화부에서 이 잡듯이 동명인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전화해서 찾아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호기롭게 이야기하는 잡스를 보고 이곳에서 일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이 들어온 것. [9] 다만 FBI의 보고서에 따르면 잡스의 고등학교 시절 최종 GPA학점은 2.65/4.0 (대략 2.83/4.3 또는 2.94/4.5 또는 79.4/100) 로 그닥 좋은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GPA 학점이 역량으로 직결되는건 아니라는 가장 유명한 사례. [10] iPhone이 원버튼 & 손가락터치의 직관적인 조작성을 고집한 이유도 잡스가 수행했던 선사상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11] 오토가와 고분은 스티브 잡스에게 있어서 인생의 스승 중 한 명이라 할 만한 인물로 잡스의 NeXT에 종교 지도자로 영입해 일하기도 했고 잡스의 결혼식의 축사도 맡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고분은 2002년에 스위스에서 여행 도중 연못에 빠진 여자아이를 구출하려다가 익사했는데, 향년 64세였다. [12] 근데 워즈니악은 자서전에 Apple I, Apple II 할 것 없이 스티브(잡스)가 한 건 아무것도 없고 내가 혼자 만들었다라고 적어뒀고 이는 사실이다. 잡스는 진성 공돌이였던 워즈니악보다는 기계 분야의 지식이 많지 않아서 주로 영업 일을 담당했기 때문. [13] 그런데 이것은 잡스가 영업을 맡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업직을 조금이라도 겪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쪽 일이 원래 사람 만나서 밥 먹고 커피 먹고 하는 것이 일이다. 농담 같지만 사실이다. 물론 그게 다는 아니지만, 그만큼 인간관계가 영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이다. [14] 다만 잡스와 고분의 관계는 그렇게 오래 가지는 못했다. 잡스는 스승이 가르쳐 준 일본 선불교의 여러 수행 전통과 집중(사마타, 念) 수행으로부터 영감을 얻기는 했어도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스승과 의견이 갈렸던 듯하다. 혁신가로서의 풍모는 두 사람 모두 공통점이 있었지만, 사업가로서 완벽을 추구했던 잡스와는 달리, 선승이었던 고분은 완벽에 집착하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결국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잡스가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던 시기, 잡스와 고분의 사이는 이야기를 나눌 때 서로의 눈을 마주보지 않을 정도로 데면데면해졌다고 한다. [15] Mac OS와 OS X(현 macOS) 사이의 유사성은 이름과 유저 인터페이스 빼고는 찾기가 힘들 정도로, 아예 별개의 운영 체제이다. [16] 실제로 그가 열렬히 원한 대중을 위한 픽사 컴퓨터 및 3D 렌더링 프로그램이라는 아이디어는 실패했다. [17] 전기작가 월터 아이작슨은, 잡스 답지 않은 이런 위임은 그가 탁월한 창작자인 라세터의 예술적 능력을 존중했기 때문이었다고 평가한다. [18] 잡스가 그 때까지 보유했던 픽사의 지분 50%를 맞교환한 결과이며 당시 기준으로 약 39억 달러 상당의 가치였다. [19] 잡스가 복귀할 당시 이전 CEO인 길 아멜리오를 밀어 내면서 복귀한 데다, 이미 한번 실패했다는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임시CEO(interim CEO)라는 명목으로 복귀했었다. 링크된 영상은 그 임시 타이틀을 떼고 Apple의 정식 CEO직을 맡게 되었다는 발표. 이렇게 민간기업에서 누군가가 총수에 올랐다는 걸 본인 스스로가 발표하는데 이렇게 일반인과 기자들로부터 박수와 환호 갈채를 받는 일은 정말로 흔치 않다. [20] cry는 '울다'라는 뜻으로 주로 쓰긴 하지만, '포효하다' 라는 뜻도 있다. [21] 사망 후 나온 기사들에 따르면 인콰이어러의 6주 시한부는 루머였지만, 실제로 2월에 자신이 오래 살 수 없음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지인들을 만나며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22] 후임으로는 팀 쿡이 선출되었다. [23] 감탄사다. 영어로는 "Oh, wow. Oh, wow. Oh, wow." [24] 10대 시절, 이사한 뒤 한 농부를 만나 그 농부로부터 유기농법에 관해서 설명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