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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학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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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소개3. 항공우주공학4. 기초과학
4.1. 물리학
4.1.1. 이론물리학4.1.2. 실험 & 응용물리학
4.2. 수학4.3. 화학 · 생물학
5. 공학
5.1. 전기공학5.2. 제철5.3. 건축
6. 과학 행정7. 정권별 특성

1. 개요

소련의 과학기술을 다룬 문서.

2. 소개

소련은 과학적 공산주의[1]를 표방하는 국가였던 만큼, 과학 기술을 중요시했고 초창기부터 기술자와 과학자들을 집중적으로 육성하여 기초과학 항공우주공학, 군사 과학에서 많은 성과를 내놓았다. 2차 대전 종전 후 미국과 함께 나치 독일 소속이었던 과학자를 대규모로 끌어들여[2] 순간적으로 엄청난 과학적 발전을 이루었다.

3. 항공우주공학

연방 정부는 항공우주공학 분야에 막대한 재원과 인력을 투자하여 미국과 경쟁하고 가장 큰 성과를 도출했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개( 라이카)[3]의 지구 궤도 비행, 세계 최초의 유인 우주선 발사( 유리 가가린), 세계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세계 최초의 우주선 달착륙( 루나 9호)[4], 세계 최초의 달 뒷면 사진 촬영, 세계 최초의 우주 유영( 알렉세이 레오노프), 세계 최초의 금성 우주선 착륙( 베네라 7호), 세계 최초의 무인 로봇 달 탐사, 세계 최초의 우주 정거장( 살류트 1호) 건설 등이 소련 항공우주공학계가 이뤄낸 업적들이다. 이중 켈디쉬 · 코롤료프 · 글루쉬코 · 얀겔 등 세계적인 수준의 항공우주공학자들이 서방 세계에 알려졌다.

이밖에도 소련은 마스, 베네라 프로젝트 등의 다양한 계획들을 진행해 화성과 금성, 수성에 지속적으로 탐사선을 보내고 우주왕복선 프로젝트와 이를 수송하기 위한 세계 최대 규모 수송기의 개발도 추진했다. 1964년에는 최초의 통신 위성인 몰니야를 발사하고 67년 11월에 소련의 전국토를 대상으로 하는 위성 통신망인 오르비타도 구축했다. 76년에는 미국의 GPS에 이어 위성 항법 체계인 ГЛОНА́СС(글로나스)의 개발을 추진하고 이를 위해 지속적으로 위성을 발사했다. 소련이 해체하는 그날까지 글로나스를 완성하진 못했지만, 소련 시기의 노력 덕분에 러시아 연방에서 글로나스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4. 기초과학

소련은 물리학, 수학, 화학 등 다양한 기초과학 분야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육성했다.

4.1. 물리학

소련의 물리학자들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물리학분야중 소련의 핵개발등으로 핵물리학 물리화학의 명성이 아주 높았다.

다음과 같은 소련의 물리학자 7명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5][6]

4.1.1. 이론물리학

소련의 이론물리학계는 서유럽의 이론물리학계 못지 않은 명성이 있었다. 이론물리학중 입자이론물리학은 크게 모델링과 형식론, 현상론 이 세가지[7]로 나눌수 있는데, 소련에는 형식론으로 명성을 떨친 이론물리학자들이 많았다.

다음과 같은 입자이론물리학자들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들 못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받는다.
  • 류드비그 파데예프
  • 빅토르 포포프
  • 이고르 튜틴
  • 니콜라이 보골류보프
  • 안드레이 슬라브노프
  • 일리야 리프쉬츠
  • 디미트리 이바넨코
  • 야키르 아로노프
  • 알렉산드르 폴랴코프
  • 알렉산드르 벨라빈
  • 알렉산드르 자몰롯치코프

4.1.2. 실험 & 응용물리학

실험 및 응용물리학은 미국, 서유럽과 함께 전세계를 선도했다. 미국과 유럽은 싱크로트론, 입자가속기 설계 & 제작에 명성이 높고 소련은 토카막 장치와 원자로와 같은 핵물리학 실험 기구 설계 & 제작에 명성이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싱크로 사이클로트론이 소련에서 최초로 제작되었을 정도로 입자실험물리에서도 초강세를 보였다. 또한, 실험 중심 연구소인 레베데프 연구소 소속 과학자들 6명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을정도이다.

다음과 같은 실험 & 응용물리학자들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못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받는다.
  • 입자실험
    • 드미트리 스코벨친
    • 블라디미르 베크슬레르
  • 핵물리실험
  • 광학
    • 레오니드 만델쉬탐

4.2. 수학

소련의 수학자들은 영국, 독일 못지 않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순수 수학 분야에서는 6명의 수학자들이 세계 3대 수학상중 필즈상과 울프상을 수상했다. 또한 소련 시절에 이룬 수학적 업적이 소련이 멸망하고나서 세간에 인정받은 수학자들도 있었는데, 그중 세계 3대 수학상을 받은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울프상
    • 미하일 그로모프
    • 야코브 시나이
    • 블라디미르 아르놀드

4.3. 화학 · 생물학

또한 화학•생물학계도 니콜라이 세묘노프가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그외의 화학계의 젤린스키 · 쿠르나코프 · 레베데프 · 바흐 · 파보르스키, 생물학계의 프랴니시니코프 · 빌리야므스 · 푸스토보이트도 소련의 화학•생물학 분야의 발전에 기여했다. 소련이 기초과학부문에서 수많은 인재들을 육성해낸것은 소련 시절에 세계구급으로 인정받고 업적을 이룬 학자들 선에서 끝난 것이 아니다.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가 들어선 21세기에서도 유산처럼 계속 남아있다. 21세기 들어서 인정을 받기 시작한 러시아 국적의 세계구급 석학들마저도 대부분 소련의 과학 기관에서 육성되었다.

5. 공학

소련의 과학 기술은 기초과학, 군사 과학, 항공우주공학이 유명하지만, 전력, 철강, 건축 기술도 그 수준이 높았다.

5.1. 전기공학

국토가 광범위하고 인구가 거점 도시에 집중된 특성상, 발전소에서 전력 수요지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송전 손실이 아주 높았던 소련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송전 기술의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곳곳에 장거리 송전선을 깔았다. 그래서 소련이 밑바닥까지 추락한 페레스트로이카 시대에도 송전 기술만큼은 세계적인 수준을 유지했다.

소련의 송전망은 세계 최대의 중앙 제어 체계로 동서 7,000km, 남북 3,000km에 걸쳐 있으며 중앙 전력 관리국이 관리했다. 연방 정부는 전력 제어 능력의 향상과 관리에 노력하고 컴퓨터를 도입해 활용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전력선 반송 통신, 무선 중계 장치, 디지털 전자 통신 기술을 보급하고 신기술을 도입했다.

5.2. 제철

소련은 철강 기술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60년대에 혁신적인 신기술들을 개발해 세계 철강업을 주도했으며 여러 철강 콤비나트에 대형 고로를 건설해 생산량을 늘렸다. 소련에서 개발한 조업 기술과 고압 송풍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었다. 콤비나트 시스템에 대한 투자도 계속되었다.

5.3. 건축

건축학도 발달해 있었다. 특히 소련이 독보적인 위상을 자랑하는 기술은 건물 자체를 통째로 들어올려 옮기는 기술이었는데, 무려 지상에서 2m를 띄웠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건물을 해체하고 다시 짓는 게 더 싸기 때문에 그 기술도 많이 쇠퇴했다.

6. 과학 행정

소련의 과학계는 연방 장관 회의의 산하 기관으로서 과학 기술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과학 기술 위원회, 연방 과학 아카데미, 교육성 산하의 고등 교육 기관, 산업 부처 산하의 연구 기관들로 구성되어 있고 1987년을 기준으로 하여 이러한 연구 기관의 숫자는 총 5,000여개소였다.

소련의 과학 행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기관은 과학 기술 위원회이다. 위원회는 과학 기술 발전 계획의 수립, 연구 개발 관련 규정과 기준의 제정, 과학 기술 발전 계획의 집행에 관한 관리 · 감독, 과학 기술 정보의 수집과 제공, 대외 과학기술 협력의 제공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다만 예산권이 없었기 때문에 그 영향력과 권한은 제한적이었다.

대학으로 대표되는 고등 교육 기관의 부설 연구 기관들은 전체 연구 개발비의 6%, 기초 연구의 15%를 차지했다. 이 기관들은 기초 연구를 위한 문제 해결 실험실, 정부 의뢰, 기업과 계약한 연구를 맡는 과학 연구 실험실로 나뉘며 대학 교수와 연구원, 대학원생들이 연구를 진행했다.

과학 아카데미들은 자연 과학 뿐만 아니라 사회 과학 분야도 포함되어 있으며 다양한 기초 연구와 산업과 관련된 장기 연구 과제를 수행했다. 이 과학 아카데미들은 연방 과학 아카데미를 정점으로 하는 계서적인 체제이며 연방 과학 아카데미는 각 공화국 산하 과학 아카데미, 기타 과학 연구 기관, 대학 연구 기관들이 수행하는 자연 과학 연구에 대한 지도 업무도 맡았다.

각 산업 부처 산하의 연구 기관들은 다양한 디자인 관련 연구소, 실험실, 신기술 연구 기관 등으로 이뤄져 있고 상급 기관의 지시에 따라 관련 산업 분야의 응용 연구와 신기술, 새로운 공정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소련의 설계국 제도는 주요 부처 산하의 중앙 설계국[8]을 중심으로 하는 체제로서 중앙 설계국 산하에 여러 종류의 설계국들이 중앙 설계국의 관리 · 감독을 받으며 설계 업무를 수행했다. 상급 기관에서 새로운 기계나 장비, 기체, 무기 등에 대한 제작을 요구하면, 중앙 설계국은 이에 대한 기초 연구를 진행하면서 어떤 기술을 활용하고 어떤 자원을 얼마나 사용할지, 어떤 기종으로 할 것인지를 결정했다. 기초 연구가 끝나면, 중앙 설계국은 상급 기관에 그 결과를 보고하고 주요 부처는 승인 여부를 결정지었다. 승인이 떨어지면 중앙 설계국은 실험 설계국이나 특별 설계국 같은 산하 기관에 설계를 지시했다.

실험 설계국은 최종 설계, 신규 제품의 설계, 시험체 제작 업무와 상급 기관과의 협력 개발 연구까지도 하는 커다란 조직이다. 중앙 집권적인 소련답게 실험 설계국은 중앙 설계국의 통제를 받고, 그곳에서 세부적인 면까지 규정해 놓은 지침에 의거해 새로운 장비를 제작하는 게 실험 설계국 본연의 임무이지만, 어느 정도의 자율성도 있어서 지침에 의존하지 않고 다양한 기술과 자신들이 축적한 경험을 토대로 기계를 설계했다. 기초 연구는 중앙 설계국에서 하기 때문에 실험 설계국의 장비 설계 과정은 단순하고 빠르게 추진되는 편이었다.

소련은 경쟁을 통해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중앙 설계국에서 통상 2개 이상의 실험 설계국을 선정해 각 설계국에서 자신들만의 시제품을 생산하게 하고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정하거나 대회를 개최해 다양한 시제품과 설계도들을 확보했으며 1개의 실험 설계국에서 부품은 동일하지만, 기본 설계가 다른 두 종류의 시제품을 제작하게 하는 방식도 활용했다. 설계국도 내부적으로 다양한 설계팀으로 나뉘어 경쟁적으로 기술을 개발하고 설계도를 제작했다.

소련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좋은 장비와 기계, 무기, 기체, 자동차들을 개발할 수 있었지만, 설계국 간의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각자가 축적한 경험과 기술을 서로 활용하지를 못한다는 점과 과도한 경쟁 때문에 시간과 자원을 낭비한다는 점을 문제점으로 지적받았다.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진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AK-47의 개발이라면,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진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우주 로켓 개발 과정에서 코롤료프와 글루쉬코가 빚은 심각한 충돌일 것이다. 경쟁 설계국이나 설계팀, 기술자의 기술과 경험을 빼돌리는 일도 있어 서로 얼굴을 붉히고 싸우기도 했다는 풍문도 있을 정도로 설계국 간의 경쟁은 치열했다.

7. 정권별 특성

혁명기에는 엄청난 사회, 경제적 혼란과 내전으로 인해 많은 수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고국을 떠났고 이념적인 문제로 소련 정권이 세계적인 학자들을 추방하거나, 쏴 죽이기도 했다. 화학자인 티히빈스키가 이 시기에 총살당한 대표적인 과학자이다.

스탈린 정권 시기에는 과학 기술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과학 기술의 발전에 엄청난 재원을 투자하여 수많은 연구 기관을 설립하고 과학 인력을 수급하는 한편, 해외로부터 기술과 기계를 구매하고 서방 과학계와의 교류를 통해 서방 과학계가 이뤄낸 성과와 새로운 지식들을 확보했다. 또한 비밀 유지와 집중적인 연구 발전을 위해 과학 도시인 나우코그라드(наукогра́д)를 건설해 과학자들을 이주시키고 도시민들에게는 좋은 인프라와 대우를 제공했다.[9] 심지어 그 잔혹했던 대숙청 때에도 과학자들만큼은 매우 관대한 대우를 받았을 정도였다.

전시에는 랜드리스도 과학 기술에 도움을 주었다. 신경제 정책 시기부터 5개년 계획 시기에 이르기까지 소련의 과학, 산업, 군사 분야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미국은 대조국 전쟁 시기에 막대한 물자와 장비, 설비, 기계들을 제공하고 소련 과학자와 기술자, 관료들의 미국 견학도 허용해 주었다. 소련은 미국이 제공해 준 설비와 기계들을 뜯어 연구하고 미국이 제공해 준 과학 기술들을 활용해 자국의 과학 발전에 써먹었다. 클라우스 푹스 같은 스파이들이 제공해 준 기밀, 소련에 우호적이던 미국 과학자들이 해준 조언들도 소련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무리 재원을 투입하고 교육에 힘써도, 우수한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부족한 형편이었기 때문에 소련 정부는 혁명기에 고향을 떠난 과학자와 기술자들에게 좋은 대우와 높은 보수를 조건으로 귀국을 요청해 해외 과학의 성과와 유능한 과학 · 기술 인력들을 확보하고 이를 토대로 소련 과학의 발전과 새로운 인재의 육성을 꾀했다. 예를 들어, 귀국한 카피차가 물리학 교육의 중요성과 독립적인 물리학 대학의 설립을 요청한 편지를 스탈린에게 보내 모스크바 물리학 연구소가 설립되기도 했으며 이 밖에도 많은 과학자들이 연방 정부에 과학 교육과 과학 분야에 대한 투자, 과학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강조하는 한편,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내놓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다만 이념과 스탈린의 편집증 문제로 인해 과학계는 인문학계가 당했던 것처럼 대숙청과 당의 간섭에 큰 수난을 치러야 했다. 국가의 중요한 재원을 쓸모 없는 곳에 써댄다고 의심하거나 서방의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니콜라이 바빌로프 같은 세계 최고의 유전학자가 죽음을 맞이하고 코롤료프 같은 천재가 굴라그로 끌려가 고생했으며 많은 과학자들이 굴라그에 있는 과학자 - 기술자 전용 수용소인 샤라쉬카에 갇혀 당의 지시에 따라 원치 않는 연구와 노동을 해야 했다.

굴라그에 끌려가진 않더라도 카피차처럼 고국에 귀향했다가 억류당해 수십 년 동안 출국을 못하고 소련에 갇혀 살아야 했던 이들도 있었고[10] 베냐민 세묘노프 같은 통계학자와 경제학자들 같은 경우에는 스탈린의 경제 정책을 반박한다는 이유로 연구 성과가 비공개 처리되거나 침묵을 요구받기도 했으며 심한 경우에는 람진처럼 공업당 사건 같은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숙청당하기도 했다.[11]

게다가 정권에 기생하며 그들의 입맛에 맞는 과학 이론을 내놓아 과학계에서 권력을 누린 트로핌 리센코 같은 사이비 과학자들이 소련 과학계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들을 만들고 뛰어난 과학자들을 박해했다. 위 문단의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말할 것도 없고, 세례브로프스키, 코리초프 등의 생물학자, 유전학자들이 탄압을 받았다. 리센코와 그 도당은 스탈린이 죽고 정치 · 사회적 통제가 완화되자, 울분이 터진 과학계가 '300인의 편지'로 대표되는 집단 행동을 통해 실각시켰으나, 리센코는 흐루쇼프에 아부하고 그의 호의를 사서 기어코 과학계에 복귀해 권력을 잡았다. 돌아온 리센코는 흐루쇼프 정권 동안 소련의 농업과 유전학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런 정치계의 탄압과 사이비 과학자들의 난행 외에도 전쟁이 과학계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1차적으로 러시아 혁명과 내전으로 많은 수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고국을 떠나거나 죽었고, 혁명과 내전의 상처가 회복된 뒤에는 대조국 전쟁이 일어났다. 러시아 역사상 가장 큰 파괴와 죽음이 발생했던 대조국 전쟁의 참화가 과학계를 덮친 것이다. 위 문단의 베냐민 세묘노프와 그 형 안드레이 세묘노프가 레닌그라드에서 죽음을 맞았고, 파블롭스크 실험국의 학자들 또한 종자를 지키다 아사했다. 이 밖에도 많은 숫자의 학자와 기술자, 이공계 학생들이 아사하고 동사했으며 독일군에게 피살당하거나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었다.

다만 모든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탄압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세묘노프 - 텐샨 가문이나 바빌로프 가문처럼 러시아가 자랑하는 과학자 가문 같은 경우에는 그 영향력과 업적이 대단했기 때문에 그 스탈린도 적당히 제재를 가하는 수준에서 끝내거나 아예 처벌을 면해 주었다. 파블로프 같은 경우에도 당사자는 소련 정권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었지만, 소련은 멸망하는 그 날까지 파블로프와 그가 이뤄낸 업적을 받들어 모셨다.

광물학자인 블라디미르 베르나드스키는 입헌민주당 당 중앙위 위원 출신에 임시 정부에서 교육부 차관을 역임하는 등 그야말로 '핵심 반동'이고 그 아들인 역사학자 게오르기 베르나드스키는 백군을 따라 크림 반도로 가서 브랑겔과 협력했다가 그와 함께 이스탄불로 떠난 자였다. 부자가 반동 중의 반동인데도 스탈린은 베르나드스키를 과학계의 원로로 대접했다. 스탈린이 베르나드스키에게 가한 제재는 그의 망명을 저지하고 죽을 때까지 러시아를 떠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12]

그밖에도 러시아의 많은 과학자들이 숙청을 피하거나 적당히 견책, 좌천만 받는 수준으로 처벌을 끝내기도 했다. 소련에서 늘 차별받고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던 유대인 같은 경우에도 과학자들은 상당수가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전시의 소련 정부는 어떻게든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안전한 후방으로 보내려고 했다. 그래서 베어마흐트가 도시를 포격하고, 루프트바페가 폭격을 하는 와중에도 중요한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가족들과 함께 비행기나 기차에 실어 후방으로 이송했고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 세묘노프 형제의 경우에도 정부의 후방 이송 요구를 거절하고 레닌그라드에 남아 있다 죽은 것이었다.

전후 소련의 과학계는 스탈린 정권이 양적인 확대를 이뤄낸 것에 비해 질적인 성장이 부족했다는 점과 과학계에 가한 간섭과 숙청, 리센코 같은 사이비 과학자들을 중용한 것을 비판했다. 경제적으로도 스탈린 정권은 소련을 거대한 산업 국가로 변화시키긴 했지만, 산업화 과정에서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개발한 기계와 기술을 활용하기 보다는 인력 동원에 치중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카피차가 소련을 '머리는 조그마한데 몸집은 거대한 공룡'에 비유할 정도였다.

흐루쇼프 정권은 과학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연구 기관 간의 협조 체제를 구축하고 인센티브 제도를 확대, 개선했으며 경제성 원칙에 입각하여 연구 과제와 사업을 선정하는 개혁을 실시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기업과 연구 기관 간의 계약 연구 제도를 도입하고 연구소의 독립 채산제를 유도하여 총 연구 기관의 25%를 독립 채산제로 의무 운영하게 했다.

흐루쇼프 정권은 군사와 우주 항공 과학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전략적인 기획을 수립하여 엄청난 업적을 세웠다. 또한 기초 과학과 자연 과학의 성장과 고급 과학 인력의 육성에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 소련 과학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내었고, 농업 발전을 위해 도시의 농업 연구소들을 농촌 지역으로 이전시켰다.

그러나 군사, 핵물리학, 우주 항공 과학 분야에서 이룬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흐루쇼프 정권의 개혁은 경제적 효과가 크지 않았다. 계약 연구 제도와 연구소의 재정적 자립을 꾀하는 독립 채산제는 연구 기관들이 단기적인 성과를 내는 소형 과제에 치중하게 만들어 기술 혁신을 주도할 대형 장기 연구 과제의 수행이 급감했다. 경제성을 중점에 둔 연구 과제 선정과 인센티브 제도는 미래에 연구가 만들어 낼 성과의 정량 분석이 어려워서 실효성이 없다는 비판이 나왔다. 농촌 지역으로 이전된 농업 연구소들도 계획한 것에 비해 성과가 낮았고, 연구 성과를 이뤄내는 속도도 예상보다 느렸다.

흐루쇼프 정권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냉전이 심화됨에 따라 서방 과학계와의 교류가 크게 줄어들어 소련 과학계에 악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오테펠(о́ттепель. 해빙)이란 말이 붙을 정도로 통제가 완화되고 자유화가 진전된 흐루쇼프 시기였지만, 정보 확산에 통제는 계속되었다. 이 통제는 글라스노스트(гла́сность. 공개)가 이뤄지기 전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1968년, 흐루쇼프의 뒤를 이은 브레즈네프는 리베르만 - 코시긴 개혁의 경제 개혁 원칙을 과학계에도 도입했다. 브레즈네프 정권은 흐루쇼프 정권이 받은 비판을 수용해 대형 장기 과제에 대한 연구를 각 연구 기관들에게 지시하고 미래 예측 기법을 도입해 연구 사업의 기획 기능을 강화했다. 그리고 HПO[13]를 세워 연구 - 개발 - 생산의 연계를 도모하려 했다.

1980년까지 250개가 설립된 HПO는 연구와 생산을 통합하고, 연구 기관과 설계국에서 기업이 보유한 생산 설비와 기술력을 고려하지 않은 설계를 내놓아서 기껏 개발한 설계와 기술이 현장에서 제대로 쓰이지 못하거나 생산이 지연되는 문제를 해결하고 설계국과 생산 기업 간의 기술 격차를 해소할 목적으로 설립된 단체였다.

브레즈네프 정권은 각 산업 부처 별로 연구 지원금 제도를 실시해 부처들이 자율적으로 연구 기관에 더 많은 지원을 해줄 수 있게 하고 흐루쇼프 정권이 제정한 경제성에 주안점을 둔 인센티브 지급 제도를 계속 유지했다. 그 덕분에 소련의 연구 기획 능력이 개선되었고, 연구 사업을 대형화시킨 것은 연구의 효율성을 제고했다. 그러나 기술 개발 과정에서는 연구 기관 간에, 기술 개발 단계 별로는 관련 부처, 연구 기관, 생산 기업 간의 협력 문제가 계속 제기되었다.

1983년, 과학 기술 위원회의 권한을 확대하여 연구 관계 부처들에 대한 조정권을 강화하고 HПO 제도도 개선했다. 대형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서방의 연구 사업단 개념을 도입하고 전용 연구 시설을 제공했으며 목적 지향적인 연구 기획 능력의 강화, 우선 순위에 따른 집중적인 예산 지원, 연구 성과와 품질에 따른 가격 제도의 도입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소련 과학 기술의 발전은 침체되었다. 소련은 1961 ~ 1965년까지 연평균 4,600개의 신기술 모형을 개발했지만, 1981 ~ 1985년 동안에는 3,500개로 줄어들었고 그 중에서 10% 정도만이 세계 수준을 상회했다.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과학계는 세계적인 수준에 있던 연구 & 개발 분야에서의 위상을 잃고 점차 쇠퇴해 갔던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상기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했다. 신기술 개발의 속도와 양은 줄어들었고 그 수준도 세계 평균을 넘는 것이 많지 않았다. ГОСТ 규격에 맞춰 생산한 소련산 공산품들 중에서 ISO 규격의 수준에 맞는 게 극히 드물어서 연방 정부에서 제품 규격 평가 기준을 완화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하던 철강 기술도 뒤쳐졌다. 80년대 소련의 발전소 열 효율은 일본보다 약간 낮은 수준이었고 고로 1기당 연평균 선철 생산량도 일본의 40% 정도 수준이었다. 그래도 고로의 이용 계수와 코크스비는 아주 좋은 편이었지만, 우수한 고로의 보급이 잘 안 되고 노후화된 설비가 많아 설비 보수 비용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고르바초프 정권은 기존 정권들의 개혁 노선을 따르면서 계획 관리 체제와 연구 과제의 예측 능력의 개선, 연구 기관 간의 경쟁 확대, 노후 설비의 교체와 최신 설비의 도입, 인재 육성, 중요 연구 과제에 대한 집중 투자를 추진하는 한편, 연구 기관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완화하고 연구 기관의 자율성을 확대했다. 젊고 유능한 연구원들을 대량으로 채용하고 고령의 연구원들은 과학 자문 기관으로 보내는 인사 정책의 쇄신도 추진했고 과학 생산 조합의 설립도 장려했다. 과학계와 산업계 간의 연계도 계속 강화되어서 대학의 연구 및 개발 사업은 80% 이상이 기업과의 계약에 따라 수행되었다.

소련은 인력, 투자면에서 방대한 연구 기반을 구축했으나, 과학 기술과 경제의 연계성 부족, 과학 기술 연구에 대한 인센티브 부족, 중앙 통제에 따른 정보 확산의 인위적 통제, 낮은 컴퓨터 보급률 때문에 발생한 정보 유통 체제의 미비, 서방 과학계와의 교류 부족 등 다양한 문제점들 때문에 막대한 재원과 수십 년에 걸친 노력을 통해 만들어낸 거대한 국가 연구 개발 체제가 가진 잠재력을 완전하게 이끌어내지 못했고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 후반부터 침체에 접어들었다. 또한 미국 유럽에서 매우 발전되어 있던 분야인 전자공학 정보통신공학 분야에서는 그다지 성과가 좋지 못했고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의 경제 침체와 투자 감소는 소련 과학의 쇠퇴를 야기했다.

소련이 붕괴한 후에는 그 쇠퇴가 정점에 달해서 3만 명에 달하는 소련의 과학자, 기술자들이 해외로 이주하고, CIS 국가에 남은 과학자와 기술자들도 고난을 겪었다. 그래서 러시아 연방의 과학은 매우 침체된 상태다.[14]


[1] 애초에 공산주의의 원래 이름이 '과학적 사회주의'였고 유물론 철학을 중시한 자연 변증법이라는 책까지 제작할 정도로 과학을 중요시했다. [2] 나치 독일의 과학력, 특히 항공 우주 관련 기술은 세계 최강이었다. 최초로 실전 배치된 제트 전투기 Me262나 V1, V2, V3등이 그 결과. 그런 고등 지식을 가진 인재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니 소련 입장에서는 절호의 기회였다. [3] 우주에 나간 최초의 생물은 아니다. 그 전에도 초파리를 인공 위성에 띄워 보냈었기 때문. 정확하게는 그때까지만 해도 라이카가 우주에 나간 최초의 생물로 알려져 있었지만, 나중에 우주 경계선을 정의하면서 바뀌었다. [4] 이보다 앞선 루나 2호는 착륙이라기보다는 충돌시킨 것이다. [5] 소련이 존속하였던 시기에는 미국, 독일, 영국다음으로 수상자가 많고, 소련의 최전성기인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는 미국 다음으로 수상 횟수가 많다. [6] 사하로프도 노벨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하로프는 '평화상' 수상자이지, 전공인 물리학 분야에서 거둔 성과로 상을 받지는 못했다. [7] 다만, 이론과 현상론을 나누어 구분하는 경우도 있다. [8] ЦKB. 체카베. 영문 : TSKB [9] 나우코그라드를 죄다 비밀 도시로 간주하기도 하는데, 이는 소련의 비밀 도시와 과학 도시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오류이다. 과학 도시들은 일부만이 비밀 도시였고 상당수 과학 도시가 다른 도시와 다를 게 없는 평범한 곳들이었다. [10] 스탈린은 카피차가 원하는 것이라면 거의 다 들어주었지만, 출국만큼은 끝까지 막았다. [11] 스탈린은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대중들이 주목하거나 불만이 터지면, 중간 관리직이나 기술자, 과학자, 학자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많았으며 대중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도 이들을 희생시켰다. [12] 다만 블라디미르 베르나드스키는 혁명 초기에 과거 이력 때문에 숙청당할 뻔했는데, 그를 사면해 달라는 탄원이 너무 많아서 혁명 정부에서 풀어주었다. [13] Научно-производственное объединение. 과학 생산 협회. 영문 : SPA. SCIENCE PRODUCTION ASSOCIATION [14] 소련 최고의 수학자가 연방 해체 후에 생계가 어려워져서 화장실을 숙소로 쓰면서 살다 변기에 앉은 채로 아사하는 일도 있었다. 이보다 여건이 나은 과학자들도 제대로 된 연구와 학술 활동을 하기는커녕,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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