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23:47:49

레프 란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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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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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레프 다비도비치 란다우
Лев Дави́дович Ланда́у
Lev Davidovich Landau
파일:external/www.fmclass.ru/pic.jpg
출생 1908년 1월 22일
러시아 제국 바쿠현 바쿠구 바쿠
(現 아제르바이잔 바쿠)
사망 1968년 4월 1일 (향년 60세)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직업 이론물리학자
부모 아버지 다비드 르보비치 란다우
어머니 류보피 베니아미노브나 가르카비란다우
형제자매 누나 소피야[1]
학력 바쿠 대학교 (물리학·수학 / 중퇴)[2]
레닌그라드 대학교 (물리학·수학 / 준석사)
레닌그라드 물리공학 연구원 ( 물리학 / 박사)
소속 하리코프 공과대학교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분야 이론입자물리학
응집물질물리학
주요 업적 란다우 게이지
링크 파일:스코푸스.png
종교 유대교 무종교( 무신론)

1. 개요2. 생애
2.1. 어린시절2.2. 해외 유학2.3. 소련 귀국2.4. 스탈린 독재정치에 대한 항의 및 숙청2.5. 석방 및 소련의 핵개발 참가2.6. 말년
3. 저술 교과서 목록4. 연구방면5. 란다우 목록6.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people.bu.edu/Dau_38-58.jpg
KGB에 남아있던 머그샷.

Лев Давидович Ландау
Lev Davidovich Landau

소련판 폰 노이만이라고 할 수 있는 물리학자이다. 노이만과 마찬가지로 란다우는 천재적인 수학적 재능으로 물리, 화학, 공학의 여러 분야에 손을 뻗어 각 분야에서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소련에서 그가 쓴 교과서가 6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미국에서는 대학/대학원 교재로 사용될 정도. 노이만과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천재성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20대 후반에 이미 대가의 반열에 들었다. 노이만과 비슷하게 비교적 일찍 사망하기는 했는데, 노이만보다는 운좋게도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둘 다 유대인. 사실 노이만은 수학을 주로 연구했고, 란다우는 물리학을 주로 연구하여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이 조금 안맞기는 하지만[3], "소련판 폰 노이만 (soviet von Neumann)"이라는 별명은 란다우가 소련의 원폭과 수폭의 개발의 이론적 계산을 완수하여, 맨하탄 계획에 참여한 노이만과 비슷한 역할을 했음에 착안한 한 과학사학자의 평가이다. 당시는 컴퓨터가 없었기 때문에 두 명 모두 손으로 이런 복잡한 계산을 해야만 했다.

2. 생애

2.1. 어린시절

1908년 1월 22일 카스피해에 있는 바쿠에서 유대-독일계 러시아인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바쿠의 유전에서 일하는 공학자였고, 어머니는 내과의사였다. 나중에 회상하기를 그가 과학자로 그리고 교육자로 성장하는데 그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1961년 봄 모스코바 물리 공학 연구소에서의 학생들과의 대화에서 그는 자신이 영재가 아니었다고 했지만, 어릴 때부터 수학에 천재성을 보였고, 13세에 미적분을 마스터했다. 12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김나지움에 들어간 1년만에 3년과정을 건너뛰어 학교를 졸업하는 비범함을 보인다. 외국어도 능해서 독일어와 프랑스어[4]는 어릴때부터 매우 능했다고 하며 영어는 훗날 유럽에 체재하며 배웠다고 한다.

그의 부모는 그가 대학에 입학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어리다고 판단하여, 란다우는 1년 간 Baku Economic Technikum[5]에 다니다가, 14세인 1922년 바쿠 대학에 입학하게 되며, 이곳에서 물리뿐 아니라 화학과 수학에 대해서도 공부한다.[6]

1924년 16살에 란다우의 재능을 파악한 교육당국의 방침에 따라 소련 최명문대학의 하나인 레닌그라드 대학(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으로 전학하였다. 1910년대 빈에 있는 볼프강 파울리가 그랬던 것과 같이 란다우도 일반상대론에 깊이 매료되었고,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에르빈 슈뢰딩거에 의한 양자역학의 글을 읽고 대단한 감명을 받게 된다.

그중 특히 그에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일반 상대론에서 공간-시간의 곡률과 양자역학에서의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1927년 19살의 나이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 과정을 위해서 레닌그라드 물리공학 연구소에서 공부하게 된다. 이곳은 1년 전(1926년)에 그가 시간제 학생으로 공부했던 곳이고, 이때 이원자분자에서의 스펙트럼의 강도에 관한 이론을 발표하고, 이어 1927년 밀도 행렬을 이용한 시스템의 양자 상태를 처음으로 기술했다고 한다. 이때가 아직 20세가 안되었을 때이다.

2.2. 해외 유학

21세가 되는 1929년 소련 교육부의 국비를 받아 해외유학을 할 수 있었고 6개월 예정으로 서유럽의 여러 연구소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당시 현대물리학의 대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란다우는 1년 반동안 외국에서 공부하게 되는데, 괴팅겐에서는 아인슈타인과, 코펜하겐에서 닐스 보어와, 케임브리지에서 폴 디랙과, 그리고 취리히에서 볼프강 에른스트 파울리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특히, 코펜하겐의 보어의 이론 물리 연구소의 학문적 분위기는 그에게 큰 감명을 주게 되어, 란다우는 끝까지 보어를 스승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후, 그는 1933년과 1934년 두 번 더 코펜하겐을 방문하게 되고, 후에 그가 외국에 나갈 수 없게 되었을 때 보어가 1934년 1937년, 1961년에 소련을 방문하는 등 보어와는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보어는 란다우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록펠러 재단의 장학금을 받을 수 있게 해주었고, 원래 6개월간 계획된 이 연수를 연장해 1년간 연수를 더 할 수 있었다.

코펜하겐에서 란다우는 Peierls와 양자전기역학과 상대론적 양자이론에서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대한 논문을 편찬하고 캐임브리지에서는 금속이론에 대한 중요한 논문을 발표하는데, 여기에서 금속에서 축퇴된 이상적인 전자가스는 란다우 반자성(Landau diamagnetism)의 양자 현상 때문에 양자역학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2.3. 소련 귀국

1931년 서유럽에서 레닌그라드로 돌아와서 1931년 레닌그라드 물리 기술 연구소에서 일했고, 1932년 하르코프로 옮겨서 그곳의 새로 조직된 우크라이나 이공학 연구소의 이론 부의 책임자가 된다.

동시에 그는 하르코프의 물리학 기술연구소와 Mechnic Building 연구소의 책임자였다. 1934년 그는 그의 학위논문에 대한 Defend 없이 수학과 물리분야의 박사학위를 받게 되고, 1935년 교수가 된다. 하르코프에서의 기간은 란다우가 가장 심도있고, 다양한 연구활동을 한 시기로 그 당시 란다우의 과학적인 활동의 범위는 그가 한 공부의 목록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1936년 한 해동안에 공부한 것이 일종 위상 변환 이론, 초 전도체의 중간 상태 이론, Coulomb interaction에서의 운동 방정식, 단원자 분자의 상호 작용 이론, 저온에서의 금속의 특성, 소리의 확산과 흡수 이론, 초전도체에서의 광전효과 이론 등이 있다.

또한, 그가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도 역시 하르코프이고, 그곳에서 소위 '이론기초(theoretical minimum)'의 프로그램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론 물리학자가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하는 기본적인 것을 테스트하는 것으로 모두 9가지의 시험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 두 개는 입학시험과 같이 작용하는 것으로 미적분, 텐서해석, 군론 등과 같은 것에 대한 시험이고, 나머지 일곱 개는 란다우 강좌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물리분야에 관한 것을 테스트하는데, 란다우가 이 프로그램을 하는 기간동안 단지 43명의 사람만이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란다우의 관점에서 제대로 물리학을 할 자격을 갖춘 사람이 적었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7] 또한, 하르코프에서 그는 '이론 물리학 강좌'와 '일반물리학 강좌'의 전반을 만드는 것을 시작하여 Lifshitz와 함께 공동작업하여 1950년경에 '이론물리학 강좌'라는 4000페이지에 달하는 8권의 방대한 책을 완성하게 된다.[8]

1937년 봄, 란다우는 모스크바로 옮겨 표트르 레오니도비치 카피차(197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의 건의로 설립된 물리문제 연구소 이론 부분의 책임자가 되어 그의 인생이 끝날때까지 그곳에서 지내게 된다. 이곳에서는 그의 다양한 활동이 그 성과를 거두는 시기로, 실험 물리와의 깊은 상호협력으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대표적인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quantum fluid 의 이론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 란다우의 초유동 이론은 관찰된 현상을 정확하게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후에 실험에서 밝혀지게 된 새로운 현상을 예견하기도 했다.

2.4. 스탈린 독재정치에 대한 항의 및 숙청

란다우는 20대 중반에 이미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고 하르키우 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지만, 부모가 부르주아인 반동집안 출신이었고, 해외에 지인들도 많은데다가, 장기간 해외체류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서방 간첩의 사보타지에 편집증적인 의심을 보인 소련 공안당국의 감시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었다.

란다우는 표르트 카피차의 요청을 받고 1937년 2월 우크라이나 하르코프에서 모스크바의 이론 물리 연구소(로 자리를 옮기는데 그가 이직한 직후에 하르키우 대학교는 대숙청의 올가미가 덮쳤다.[9] 란다우는 그가 이직한 후 발생한 우크라이나 물리 기술원 사건[10]에서 자신의 이전 동료들이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 것에 충격을 받았다. 이에 분노한 란다우는 1938년 4월 우크라이나 과학자들이 작성한 스탈린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는 전단을 자신이 편집하여 동료 물리학자들에게 돌렸다. 란다우는 그 문건에서 저 인간백정(스탈린)이 히틀러랑 뭐가 다르냐고 서기장 동무를 깠다.

대숙청 와중에 이런 행동은 자살적인 것이었고, 즉각 이론 물리 연구소에서 해고 후 1938년 5월 27일에 구속되어 내무인민위원회(NKVD)의 감방에 갇혔다. 하지만 1939년 5월 29일, 그를 모스크바로 불러온 표트르 카피차[11]가 서기장 동무와 라브렌티 베리야 NKVD 국장에게 란다우의 결백과 신분을 보증하며. 란다우 죽으면 나도 때려친다는 편지를 보냈고 란다우의 재능을 아꼈던 닐스 보어도 코펜하겐에서 스탈린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아무 죄가 없어도 공안기관의 의심을 받으면 처형될 수 있는 대숙청기간에 출신성분이 부르주아인 학자가 "인민의 태양"인 스탈린을 파시스트 악당인 히틀러와 비교하는 대역죄를 저질렀으니, 빼도박도 못하고 사형을 받을 뻔 했으나 카피차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로 알려져 있었던 보어까지도 구명운동에 나서자 스탈린도 란다우를 살려주었다. 세르게이 코롤료프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꼭 필요한 인재라 판단되면 살려주는 경우도 있었던 서기장 동무였기에 란다우는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12]

사실 란다우는 운이 매우 좋은 편이었는데, 보어의 탄원도 효과가 있었겠지만[13] 스탈린이 란다우의 구명운동에 나선 카피차를 매우 총애했기 때문에 이런 대역죄를 저지르고도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카피차는 소련 성립 후 교육 받은 1세대 과학자로, 영국으로 유학가서 현대물리학의 대가였던 어니스트 러더퍼드 아래서 사사했고, 러더퍼드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도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영국에서도 자국에 주저앉히려고 했다. 하지만 카피차는 공산주의가 싫어 서방에 주저 앉은 많은 러시아 과학자들과는 달리 영국의 유혹을 뿌리치고 소련으로 귀국했고, 소련에 현대물리학을 이식하는데 큰 공헌을 했기 때문에, 스탈린은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했다. 스탈린은 카피차의 연구활동을 돕기 위해 당시 농업실패로 수백만명이 굶어 죽는 와중에서도 3만파운드라는 거액의 외화를 들여 그가 일했던 영국 캐번디시 연구소에 맞먹는 과학실험 장비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1945년 소련의 핵개발을 둘러싸고 스탈린 앞에서 카피차와 NKVD 부장인 라브렌티 베리야는 말다툼을 하는데, 스탈린은 카피차의 손을 들어줄 정도였다.

2.5. 석방 및 소련의 핵개발 참가

1939년 4월, 란다우는 보석으로 석방되었고, 이 혐의는 그의 사후인 1990년에야 공식적으로 증거부족으로 종결되었다. 훗날 두 달만 늦었어도 자신은 옥사했을 것이라고 혹독한 감방경험을 이야기했다. 이어 연구소에서도 복직하고, 1946년에는 소련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었다.

1940년대부터 소련은 맨하탄 계획의 정보를 입수하고, 이고르 쿠르차토프를 총책임자로 앉혀 핵개발을 시작했다. 란다우도 소련의 핵개발에서 30대 소장과학자로서 참가, 이론적 계산에서 여러 돌파구를 뚫었고, 소련은 성공적으로 원폭 수폭을 개발하게 된다. 이 공로로 대조국전쟁 이후 스탈린 훈장도 받았고, 스탈린 사후에는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받기도 했다.

1946년 여친 콩코르디아가 임신하자 결혼했다.

1955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의 물리학과 교수가 되었다. 1950년대 수많은 연구업적을 내는 한편,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 일련의 과학자들과 함께 소련 지도부에 보내는 편지를 보내 사이비 진화이론으로 소련의 농업을 말아먹은 트로핌 리셴코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하지만 소련 공산당의 권위를 업은 리셴코의 영향력은 1960년 중반까지도 계속된다)

1950년대, 40대 중반에 그는 이미 소련 물리학계의 최고 권위자가 되어 있었다. 소련에는 그보다 나이 많은 선배 대가들이 많았지만, 소련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다만 소련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은 그의 동년배 과학자들인 이고르 탐, 일리야 프랑크,파벨 체렌코프가 체렌코프 현상으로 1958년 최초로 수상하였다. 당시는 핵물리학이 물리학계의 대세였기 때문에, 핵물리학자들인 이들이 먼저 수상하게 된 것이다.

2.6. 말년

1962년 1월 7일, 란다우의 차가 마주오는 트럭에 충돌한다. 그는 다발성 골절로 심하게 부상을 입고 석 달간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다.[14]

많은 의료진과 주위 동료의 노력으로 57일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목숨은 구했지만 학자로서의 생명은 끝나버렸다고 한다. 그가 사망하기까지의 6년간 그는 병석에 있었고, 처음에는 인지능력이 갓난아이처럼 퇴화했으나 끊임없는 재활로 주위사람들과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회복하기는 했으나, 연구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지성은 되돌아오지 않았다.[15]

그는 명목상으로만 물리 문제 연구소의 이론물리학부 책임자였을 뿐, 아무런 창의적인 학문 활동을 하지 못했다. 란다우는 이 부상 때문에 1962년 노벨물리학상[16] 시상식에 직접 참석하지는 못했다.

60세가 되는 1968년 4월 1일에 장폐색증으로 수술을 받았는데, 출혈이 심해서 사망했다. 사후 노보데비치(Novodevichy) 묘지에 매장되었다.

3. 저술 교과서 목록

많은 물리학의 대가들이 자기 연구만에 몰두하고, 교육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란다우는 교육에도 특별히 신경을 써서 학부생 레벨에서부터 대학원생 레벨까지의 다양한 종류의 교과서를 남겼다. 이들 교과서는 러시아 및 러시아 영향권의 국가에서는 현재에도 물리전공 대학생의 교재로 쓰이고 있으며, 미국에서도 번역판이 참고자료로 널리 이용되고 있다. 또한 일반인을 위한 대중 과학 서적도 몇 권 공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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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au and Lifshitz Course of Theoretical Physics
vol. 1: "Mechanics". L. D. Landau, E. M. Lifshitz, (3rd ed. ISBN 0-7506-2896-0)
vol. 2: "The Classical Theory of Fields". L. D. Landau, E. M. Lifshitz, (4th ed. ISBN 0-7506-2768-9)
vol. 3: "Quantum Mechanics: Non-Relativistic Theory". L. D. Landau, E. M. Lifshitz, (3rd ed. ISBN 0-7506-3539-8)
vol. 4: "Quantum Electrodynamics". V. B. Berestetsky, E. M. Lifshitz and L. P. Pitaevskii, (2nd ed. ISBN 0-7506-3371-9)
vol. 5: "Statistical Physics Pt. 1". L. D. Landau, E. M. Lifshitz, (3rd ed. ISBN 0-7506-3372-7)
vol. 6: "Fluid Mechanics". L. D. Landau, E. M. Lifshitz, (2nd ed. ISBN 0-7506-2767-0)
vol. 7: "Theory of Elasticity". L. D. Landau, E. M. Lifshitz, (3rd ed. ISBN 0-7506-2633-X)
vol. 8: "Electrodynamics of Continuous Media". L. D. Landau, E. M. Lifshitz and L. P. Pitaevskii, (2nd 0750626348)
vol. 9: "Statistical Physics Pt. 2". E. M. Lifshitz, L. P. Pitaevskii, (1st ed. ISBN 0-7506-2636-4)
vol. 10: "Physical Kinetics". E. M. Lifshitz, L. P. Pitaevskii, (1st ed. ISBN 0-08-020641-7)

다른 책들
"General Physics, Mechanics and Molecular Physics". A. I. Akhiezer, E. M. Lifshitz (ISBN 0-08-009106-7)

국내에서는 1권을 시작으로 번역이 진행 중이나... 더디다. 더욱이 영어 중역판이라는 한계도 있다. 하기사 러시아 유학 경력의 이론물리학 박사가 국내에 있어야 많이 없겠지만 말이다.[17]

4. 연구방면

란다우는 현대물리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다.
  • 양자역학 - 20세기초 독일과 영국에서 태동한 양자역학을 발전시켜 물리-화학의 여러 방면에 응용하는 연구를 했다.
  • 통계물리학
  • 고에너지물리학(입자물리학)
  • 천체물리학 - 중성자별의 존재를 예측했다.
  • 유체역학
  • 플라즈마물리학
  • 응집물질물리학(고체물리학) - 반도체 및 초전도이론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 핵물리학 - 수소폭탄의 이론연구에 참여했고, 양성자에 대한 연구를 했으며 핵물리에 대해 강의노트를 남겼을 정도로 핵물리에 정통하기는 했으나, 그의 주된 관심분야는 아니었다.

5. 란다우 목록

란다우는 마이너스 로그 스케일(0에서 5까지)로된 물리학자 목록을 만들어 유지했다. 수치가 낮을 수록 위대한 학자이다. 뉴턴에 최고값 0, 아인슈타인에 0.5 를 매겼다. 보어, 하이젠베르크, 디랙, 슈뢰딩거, 루이 드 브로이, 막스 플랑크, 보스, 위그너등에 1점을 줬다.란다우 자신에게는 2.5를 매겼다가 노벨상 수상 이후 1.5까지 올렸다. 사실 1점을 준 물리학자들은 대부분 란다우가 유럽시절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다. 동료들을 높인걸로 봐서는 란다우는 의외로 상당히 겸손한 스타일인듯. 천재급을 제외한 물리학자들은 목록에 들어 갈 것도 없이 그냥 5점.

6. 기타

  • 스스로는 영재임을 부정했으나, 어떤 기준으로 봐도 천재는 맞다. 남들보다 교육과정을 10여년 먼저 앞서가는 조숙성뿐만 아니라 여러방면에 남긴 업적중 하나만 들고 나와도 그 분야의 대가소리를 들을 정도의 업적을 남겼다. 이런 재능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공부도 상당히 열심히 했다고 하며, 공부에 방해되는 술, 담배, 결혼을 평생 안하기로 맹세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친이 임신하자 그도 결혼은 하게 된다.
  • 소련에서 조금만 명망이 있으면 모두 가입했던 공산당에도 가입하지 않을 정도로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자유주의자였다. 스탈린을 비판했다가 대숙청에 휘말려 처형될뻔 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 훗날 공개된 KGB 개인파일에 따르면 란다우는 소련에서 신격화되던 블라디미르 레닌조차도 "좌익 파시스트"라고 말했고, 1956년의 소련의 헝가리 혁명 진압에도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20대에 잠시 해외에 유학했다 귀국한 이후로는, 해외로 망명할까봐 해외여행이 허가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반체제인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련의 애국자였다. 란다우가 유럽유학을 할 당시 안면이 있던 헝가리 유대인 물리학자인 에드워드 텔러[18] 는 란다우를 가리켜 "열혈 공산주의자"라고 평할정도로 란다우는 조국 소련에 대해서는 충성을 아끼지 않았다. 소련의 핵개발에 주도적으로 참가했고, 1960년대 미국에서 소련의 유대인 인권 개선운동이 벌어지자, 뉴욕타임즈에 유대계 소련인으로서 "미국인들은 소련의 인권문제에 간섭하지 말라"는 기고를 하기도 했다.
  • 유대인이지만 무신론자였다. 제자들에게는 상당히 엄격했고, 제자들에게 물리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에 전반적인 물리학적 이해를 갖출 것을 요구해서 위에서 언급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제자로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농담과 유머를 좋아하고 교통사고 이후 병석에서도 러시아식 유머로 동료들을 웃기곤 했다.
  • 상당한 미남인데, 아내에게 "나 맘대로 바람피울테니까 너도 맘에 드는 놈 있으면 피워"라는 개방결혼을 주장했지만, 부부간의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아내 콘코르디아는 화학을 전공하던 여대생이었고, 남편이 사망한 후 남편의 전기를 집필했다. 남겨진 혈육으로는 아들 이고르 란다우(1946-2011)이 있다. 아들도 수학과 물리학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였고 소련 붕괴후 스위스로 자리를 옮겨 일했다.
  • 란다우가 재직하던 모스크바의 이론물리학 연구소는 란다우 사후, 그의 이름을 붙여 란다우 이론물리학 연구소(Landau Institute for Theoretical Physics)로 칭한다. 그가 재직했던 우크라이나 하르키우(하르코프)의 한 거리도 그의 이름을 따서 란다우 거리 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또한 러시아 물리학회는 매년 두각을 나타낸 물리학자에게 란다우 메달을 수여한다.
  • 그가 말년을 보낸 러시아 # 뿐만 아니라 그가 청년기에 재직했던 우크라이나 #, 그의 출생지인 바쿠가 소속된 아제르바이잔 # 모두 자국 출신 위인으로 간주해 우표를 발행할 정도로 칭송하고 있다.
  • 란다우 하면 물리학자들에게는 이 소련 과학자가 생각나겠지만, 수학자들에게는 에드문트 란다우도 굉장히 유명하다. 수학에서 란다우 이름 들어간 각종 정리나 떡밥이 보인다면 100% 에드문트 란다우. 가끔 수학과 물리학을 모두 전공하는 괴수들은 게슈탈트 붕괴 누가 누군지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란다우라고 검색해서 여기까지 온 수학 전공자들은 지못미 여담으로 둘 다 유대인이다. 란다우라는 이름 자체가 유대계 이름이기도 하고... 소련 란다우가 서기장 동무에게 숙청당했듯이 이 수학자 란다우도 말년에 나치의 유대인 박해로 고생하다 죽었다. 지못미.
  • 2006년부터 4라는 데뷔작으로 알려진 젊은 러시아 영화 감독 일리야 흐르자노프스키가 전기 영화를 만들고 있는데, 문제는 제작 과정이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광기로 가득찼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 세트로 축구 경기장 두 개 사이즈로 도시 세트를 짓고 배우와 스태프들 보고 이 곳에서 살라고 강제하면서 촬영했고. 심지어 스탈린 시절 고증에 미친듯이 매달리면서 아예 스탈린 시절 소련 도시를 그대로 옮겨놓은 수준이라고... 촬영기간도 3년 정도고 흐르자노프스키가 저지른 기행도 장난 아니라는 얘기가 많다. 링크 원래는 소박한 사이즈의 영화였다고 하나, 지원이 꽤 들어오면서 폭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때문에 촬영한 분량도 장난 아니라서 8-10시간 영화가 될 거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몇 편으로 쪼개 공개하기 시작했는데, 다우 나타샤는 제70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았다.

[1] 1906년생. [2] 레닌그라드 대학교로 편입학. [3] 오히려 리차드 파인만이랑 란다우를 비교하는게 더 적절한 듯. 두명 모두 현대 물리학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고, 물리 교육에 큰 관심을 가졌다는 것도 비슷하다. 둘다 노벨상 수상자이며, 유대인이라는 것도 비슷하다. [4] 어릴 때 유대인 학교에 다녔는데, 이 러시아의 유대인 학교는 주로 독일어나 이디시어로 가르쳤기 때문에 당연히 독일어에 능했을 것이다 프랑스어는 혁명전 러시아 상류층들의 상용어였다. 부모가 상류층이었으므로 당연히 란다우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5] 김나지움 정도 되는 듯. [6] 물리-수학 학부와 화학 학부를 복수전공했다. 나중에 화학 학부는 전공을 포기하지만, 생애 전반에 걸쳐서 화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기도 한다.(ex: 열역학의 란다우 퍼텐셜 등) [7] 이 시험을 통과한 사람중 일부는 시험을 통과하는데 모든 기력을 쏟은 관계로 바로 물리학계에서 사라진 사람이 많았지만, Pomeranchuk, Lifshitz, Khalatnikov, Abrikosov와 같이 빠르게 성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8] 아래 저술 목록 참고. [9] 당시 스탈린의 무리한 농업 집단화때문에 수백만명이 굶어죽은 우크라이나 대기근이 발생했고, 우크라이나에서는 반스탈린-반소련 감정이 팽배해 있었다. [10] 우크라이나 물리 기술원(УФТИ)의 과학자들이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전단을 발포한 사건. [11] 저온물리학 연구에 대한 공로로 1978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12] 그래도 과학기술 분야는 이런 숙청의 물결에서 그나마 피해가 덜했던 편이다. 서기장 동지의 최대 치적으로 꼽히는 것은 소련의 공업화와 대조국전쟁 승리를 통한 초강대국으로의 발돋움인데, 이 과정에서 공업화의 선봉에 설 이런 과학기술 분야 인재들은 없어서는 안될 이들이라 이런저런 경로로 목숨을 부지하고 복권되는 경우가 다른 업계에 비해 꽤 많았다. 또한 굴라그 내에서도 따로 연구할 수 있는 방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숙청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라서 파블롭스크 실험국의 창립자인 유전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가 반동으로 몰려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과학자들의 탄원으로 20년형으로 감형되었음에도 끝내 옥사하는 등 눈물겨운 사연도 적지 않다. [13] 부하린 같은 경우는 스탈린 본인의 친구였고, 서방의 여러 유명 지식인들이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구명운동을 벌였음에도 처형되었다. [14] Dorozynski, Alexander (1965). The Man They Wouldn't Let Die(죽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사나이)를 참고하라. 1962년 란다우의 자동차 사고 이후, 물리학자 사회에서 그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노력한 과정을 다룸. 시도 자체는 성공해, 1968년까지 란다우는 살아있었다. [15] 죽을 때까지 치매상태로 있었다는 설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재활을 계속하여 병석에서 동료들과 농담을 주고받고, 자신의 노벨상 수상을 알게 된 후 란다우 목록에서 자신을 2.5에서 1.5까지 높일 정도로 인지능력이 돌아오기는 했다. [16] 노벨상은 사고가 있던 그해 11월 응집에 관한 이론, 특히 액체 헬륨에 관한 개척자로써 노벨상을 받게 되었는데, 노벨상은 죽은 사람에게 줄 수 없으므로 서둘러서 주었다는 소문이 있다. [17] 러시아 물리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의 물리학부와 모스크바 물리 기술 연구소 합쳐서 1년에 한국인이 1-2명 입학할까 말까다. 그것도 이건 학부 기준이고, 박사 과정을 여기로 진학하는 한국인은 3-4년에 한 명 나오는 수준. [18] 후에 미국에 망명하여 미국의 수소폭탄을 개발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이름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