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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67년 10월 20일 |
조슈번 스오국
쿠마게군
소네촌 스미다 마을 (現 야마구치현 히라오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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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2년 3월 28일 (향년 94세) |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370번지 영락(永樂) 보린원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조선 영주권 취득) |
묘소 | 서울특별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
직업 | 선교사, 교사, 보육원장 |
배우자 | 우에노 다키[1] |
종교 | 개신교 ( 감리회) |
상훈 | 문화훈장 (1962) |
약력 |
황성기독교청년회 학관
일본어 교사 가마쿠라 보육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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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보육원생들과 촬영한 단체사진 두번째 줄 가운데 긴 수염이 있는 인물이 소다 가이치 |
1. 개요
대한제국 및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일본인 개신교 선교사, 교사, 사회복지활동가.1905년 조선에 정착하여 전도사로 활동했고 아내 우에노 다키(上野タキ)와 1921년부터 가마쿠라 보육원[2]을 운영하면서 평생 동안 고아들을 돌보았다. 후세 다쓰지와 함께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도운 대표적인 일본인 중 한 명이다.
2. 생애
2.1. 방랑기
조슈 번(現 야마구치현) 쿠마게군 소네촌 스미다 마을에서 태어났다. 오카야마에 위치한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21세에 고향을 떠나 긴 방랑 생활을 하였다. 학자금 마련을 위해 나가사키에서 광부로 일하다가 25세에 홍콩에서 노르웨이 상선의 선원으로 일하면서 영어를 배웠다. 1896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된 대만으로 가 독일계 공장에서 사무원 겸 통역관으로 취직하여 독일어를 배우다가 중국 본토로 넘어가 해군에 복무하면서 신해혁명에 가담했다. 하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대만으로 돌아오면서 산악지대를 방랑하는 등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2.2.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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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성기독교청년회[3] 활동가들과 촬영한 사진 앞줄 오른쪽 세번째 인물이 소다 가이치 |
그러던 중 개신교 신자이자 이화여학교와 숙명여학교의 영어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우에노 다키를 만나 30세에 결혼하고 금주회 회장까지 지내면서 음주벽을 청산했다. 이후 일본인 경성 감리회교회의 전도사가 되어 백만명 구령운동[6]에 동참했다.
1911년 105인 사건이 일어나면서 윤치호, 이상재 등이 체포되자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에게 석방을 요구했고 경성기독교회(현 덕수교회) 장로였던 와타나베 토오루 일본 대심원장(현 최고재판소장. 한국의 대법원장.)을 찾아가 "죄 없는 사람에게 왜 벌을 주려 하느냐"고 항의했으며 법정에서 이상재 선생의 재판을 맡은 판사를 꾸짖기도 했다.
이후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인 지도자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고 석방운동을 전개했다.
2년 뒤 보육인 사다케 오토지로[7]를 통해 보육의 길을 걸으면서 1896년 경성부 용산구 후암동에 사다케가 설립한 가마쿠라 보육원의 경성지부장으로 부임하여 1921년부터 1000명 이상의 조선인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아내 우에노 다키도 1926년에 교사를 그만두고 보육 활동에 합류하였다.[8]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고아들에게 항일 교육을 시켰다며 육군 헌병대에 끌려가기도 했다.
1943년에는 77세에 함경남도 원산에 위치한 원산감리교회에 초빙되어 아내 우에노 다키에게 보육원을 맡기고 교역자로 부임하였고 이곳에서 생활하던 중 조선이 해방되었다.
2.3. 해방 이후
해방 이후에는 소련군이 한반도로 남하하면서 원산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의 집을 약탈하고 히키아게샤들을 강간하면서 일본인들이 교회로 대피하자 소다가 교회 입구에 나서서 이들을 보호했다. 1947년 10월 일본인들과 서울로 내려온 소다 부부는 일본으로 귀환하지 않고 미군정으로부터 조선 영주권을 취득했는데 얼마 안 있어 소다는 아내 우에노 다키에게 보육원을 맡기고 일본으로 건너가 폐허가 된 히로시마와 규슈, 홋카이도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한 손에는 성경, 다른 한 손에는 세계 평화 어깨띠를 두르고 일본의 전쟁범죄를 회개하고 사과할 것을 촉구하며 가는 곳곳마다 일본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던 와중에도 도둑을 만나고 폐렴에 걸려 고생했으며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뻔하는 등 생사를 오갔다. 그러던 중 다키 여사는 1950년에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나 당시는 한일간의 국교가 맺어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장례식에 참여하지 못했다. 1961년에는 사회인사가 된 고아원 동문들의 도움과 한경직 목사의 초청으로 특별기편을 타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윤태일 서울특별시장으로부터 서울특별시 시민증[9]을 받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로부터 일본인 최초로 문화훈장[10]을 받았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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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한국으로 돌아와 환영을 받는 모습 |
소다 부부는 양화진에 안장된 단 둘뿐인 일본인이기도 하다.
3. 기타
- 영락 보린원의 홈페이지에 나온 연혁에는 소다 가이치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아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다. 이는 영락보린원이 1939년에 이미 설립되었고 1947년 '가마쿠라 보육원을 인수'하였다고 기술하였기 때문에 굳이 소다의 이름을 쓸 필요가 없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 이승만을 만난 적이 있다.
-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기 충분한 공적이 있지만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일본인은 현재까지
후세 다쓰지와
가네코 후미코밖에 없다.
- 동시기 활동한 윤학자도 있다.
[1]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18세에 나가사키 기독교 학교를 졸업하고 영어 교사로
조선에 왔다가 소다를 만나서 결혼했고 소다와 함께 한국에서 고아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2]
현 영락보린원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소다 가이치는 영락보린원으로 바뀐 후에도 이곳에서 아이들을 돌보았으니 아쉽게도 보린원 웹사이트 연혁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3]
현재의
YMCA.
[4]
현재의
YMCA.
[5]
당시에는
이상재를 포함하여
이승만,
김정식,
홍재기,
유성준,
윤치호(훗날 변절),
김규식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황성기독교청년회로 집결하고 있었다.
[6]
백만명을 전도하자는 목적의 복음운동.
[7]
1896년
가마쿠라, 1913년
중국
뤼순에 보육원을 설립한 보육인이다.
[8]
소다 부부가 돌보던 고아들 중에는
독립운동가의 자녀들과 이후 성장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끌려가는 인물들도 많았다. 소다는 보육원 출신의 청년들이 체포될 때마다
일본 제국 경찰들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석방을 간청했다.
[9]
1968년
주민등록증이 발급되기 전에는 각 지자체 도민증과 시민증이
신분증 역할을 했다. 서울시 시민이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인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10]
현재
국민훈장 동백장으로 승계됨. 상훈기록상 성명은 소다 가이귀.
[11]
비슷한 사회활동을 했던
다우치 치즈코는
1963년 수여되었다..
[12]
한경직 목사가 원장을 물려받으면서 영락보린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3]
현
서울특별시의회 본관.
[14]
해방 뒤 불과 5년 후인데 일본인의 장례가 이렇게 치러진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고 그만큼 다키 여사의 공덕을 인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