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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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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594D3><colcolor=#ffffff> 1959년 제14호 태풍 사라
진로도 파일:5914track.png
참고사진 파일:Typhoon_Sarah_surface_analysis_September_15,_1959.png
활동 기간 1959년 9월 11일 9시 ~ 1959년 9월 23일 21시
영향 지역 파일:미크로네시아 연방 국기.svg 미크로네시아 연방
파일:괌 기.svg
파일:대만 국기.svg 대만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저장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전역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강원도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연해주, 사할린주, 캄차카 반도
태풍 등급 5등급[JTWC]
최저 기압 905 hPa
최대 풍속 1분 평균 85 m/s (165 kn)
피해상황 사망자 최소 948명[2]
실종자 206명
부상자 2,533명
이재민 373,459명[3]
피해총액 1억 200만 달러[4][5]
1. 개요2. 상세3. 한국(남한) 태풍계의 전투력 측정기4. 기록5. 여담6. 사라호를 소재로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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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9년에 발생한 제14호 태풍.

2. 상세

위는 주한미공보원(USIS-Korea)가 제작한 리버티뉴스의 당시 사라호 관련 보도영상을 업스케일링한 것으로, 당시 사라호로 인한 피해가 600억 환[6]이라고 말했다.

통칭 '사라호'.[7] 한반도 기상관측사상 최악의 태풍이다.

1959년 제14호 태풍으로, 1959년 9월 12일에 발생하여 9월 17일 3등급 세력으로 한반도를 관통하였다.[8] 아직도 70대 이상 노인들, 특히 경상도 제주도 지역 70대 이상 노인들에게는 역대 최악의 태풍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특히 9월 17일 1959년 추석이어서 일기예보 같은 것도 없던 시절에 아무 것도 모르고 차례 지내다가 휩쓸려 버린 집도 많다고 한다. 차례상이고 뭐고 내버려 두고 허겁지겁 도망쳐서[9] 집이 휩쓸리고 마을이 무너져 버린 후에야 태풍인 줄 알았다고. 경상도 지방의 노인들에게는 큰 트라우마로 남아서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사라호'라고 하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10]

당시 1분 평균 최대 풍속 85 m/s, 최저 기압 905 hPa로 오키나와 일대에서 전성기를 맞이한 태풍 사라는 북상하면서 서서히 약해졌는데, 한반도 남해상에 진입하자마자 재발달 경향[11]을 보이면서 1분 평균 최대풍속 59m/s의 SSHS 기준 4등급 태풍으로 발달하였고 이후 미군은 통영 일대에 상륙하기 바로 직전 군용 비행기로 942 hPa를 실측하였다. 결국 SSHS 기준 3등급 태풍이라는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한반도 남부[12]를 휩쓸고 지나갔다.

당시 부산에서의 최저 해면 기압으로 951.5 hPa가 실측되었다. 이는 사라 이후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았다.[13] 또한 이렇게 강력한 태풍이 잘 등장하지도 않고, 등장한다 할지라도 한반도 쪽으로 잘 오지 않는다. 온다 해도 상당히 약화된 상태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한반도 정도의 중위도에서 전성기 세력도 강하고, 남해상에서 재발달을 거친 사라나 매미 만큼의 태풍이 다시 오기는 쉽지 않다고 평가 받는다. 그만큼 이례적이고 압도적인 피해를 준 태풍이었다는 것이다.

그 위력답게 어마어마한 피해를 남기고 갔다. 전국에 사망 849명, 부상 2533명, 실종 206명으로 이재민 총 37만 3459명이 발생했다. 또 선박 1만 1704척과 피해 주택 1만여 동, 침수 농경지 20만여 ha 등 피해를 입었고 도로 1만 226개소, 제방 1618개소, 축대 152개소, 교량 2개소가 유실되거나 파손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생긴 재산 피해는 당시 화폐 가치로 700억 환(70억 원)이며 2023년 가치로 환산하면 약 6275억 원이다.

이외에 외나로도에서 출항해 거문도 부근으로 조업을 하러 갔던 46척의 어선이 태풍을 만났으나 귀항에 실패, 1200여명의 어부가 전원 실종되었다는 지역 신문의 보도가 있었다.[14]

대한민국에 상륙한 태풍이나 옆 동네 일본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일본 기록에서도 최저 기압으로 2위[15]를 기록하였다고 하며 당시 99명이 사망하고 509명이 부상을 입었다. 특히 오키나와 미야코섬의 피해가 막심하여 일본에서는 미야코섬 태풍(宮古島台風)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당시 미야코 섬의 최저 해면 기압은 908.1 hPa였다 한다.

사라는 1950년대 말 이미 미국의 원조가 줄어들면서 어려움을 겪던 한국 경제에 결정타를 날린 태풍이기도 하다. 직접 태풍을 맞아 심각한 피해를 입었던 대구 마산 등지가 다음해 일어난 4.19 혁명에 앞서서 가담한 점, 4.19 혁명 직후 1960년 장면 국무총리가 처음으로 시정 연설을 할 때 발표한 게 태풍으로 인한 경제 침체에 대한 대안으로 특별 추가경정예산안을 제출하기로 언급한 것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한국 현대사에도 영향을 미친 태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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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력 경과 #===
<rowcolor=#fff> 발표 시각 1분풍속 SSHS 등급 JMA
(풍속값 없음)
9월 11일 9시 20kn LPA TD
9월 11일 15시
9월 11일 21시
9월 12일 3시 30kn TD
9월 12일 9시 50kn TS 태풍
9월 12일 15시 60kn
9월 12일 21시 70kn 1등급
9월 13일 3시
9월 13일 9시 100kn 3등급
9월 13일 15시 110kn
9월 13일 21시 115kn 4등급
9월 14일 3시 120kn
9월 14일 9시
9월 14일 15시 125kn
9월 14일 21시 140kn 5등급
9월 15일 3시 150kn
9월 15일 9시 160kn
9월 15일 15시 165kn
9월 15일 21시 140kn
9월 16일 3시 115kn 4등급
9월 16일 9시 110kn 3등급
9월 16일 15시 100kn
9월 16일 21시 110kn
9월 17일 3시[17] 115kn 4등급
9월 17일 9시 100kn 3등급
9월 17일 15시 95kn 2등급
9월 17일 21시 85kn
9월 18일 3시 80kn 1등급
9월 18일 9시 70kn
9월 18일 15시
9월 18일 21시 75kn
9월 19일 3시 65kn
9월 19일 9시 55kn TS 온대저기압
9월 19일 15시 45kn
9월 19일 21시 35kn
9월 20일 3시 30kn TD
9월 20일 9시 - 소멸
9월 20일 15시
9월 20일 21시
9월 21일 3시
9월 21일 9시
9월 21일 15시
9월 21일 21시
9월 22일 3시
9월 22일 9시
9월 22일 15시
9월 22일 21시
9월 23일 3시
9월 23일 9시
9월 23일 15시
9월 23일 21시
9월 24일 3시 소멸 및 감시 종료

3. 한국(남한) 태풍계의 전투력 측정기

대한민국에 최악의 피해를 입힌 태풍은 2002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대한민국에 5조 원대 재산피해를 안긴 루사(강수량 1위)로 친다. 그러나 21세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지 않았던 경제 사정이나 열악했던 복구·지원대책 등 여러 환경 차이를 감안하면 재산피해는 적었을지언정 그곳을 살아간 사람들에게 사라는 최악의 태풍으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사실 루사보다 재산 피해가 적은 이유는 날아갈 재산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18]이고 루사의 4배에 달한 공식 사망자만 봐도 그 끔찍함을 알 수 있다. 재해대책능력이 상승한 현대에는 저보다 더 큰 인명 피해가 날 일은 없을 것이고 있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그 때문에 신생태풍의 위협을 알리기 가장 적절한 이름이 되었다 보니 태풍철에 '사라호' 키워드로 검색하면 신생 태풍과 사라를 비교하는 기사가 나온다.

2012년 8월 말 접근하던 볼라벤이 한반도 접근시 예상 세력이 사라보다 더할지도 모른다고 예측되어 한반도 전체를 긴장 상태로 몰고 오기도 했다. 하지만 한반도로 접근하면서 기세가 한풀 꺾인 데다 태풍이 한반도에서 좀 멀었던 거도 있었고[19] 어느 정도는 과잉대비한 것도 겹쳐 수도권이나 영동, 영남 쪽은 큰 피해는 없었다. 다만 기세가 꺾이기 전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간 전라, 제주권은 그야말로 초토화된 탓에 사라보다 약한 태풍이었다고 하기가 뭐하다.[20]

2022년 힌남노가 사라, 매미 등과 비견될 만했지만 예상 경로보다 약간 동쪽으로 치우쳤고[21] 너무 세력이 강해진 나머지 한반도를 빠르게 지나가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 그럼에도 결국 포항을 휩쓸어 버리면서 대한민국 역대 태풍 재산피해가 루사, 매미, 에위니아 다음으로 많았고 제명되었다.[22] 이를 감안했을 때 만약 태풍의 세력이 약해져 한반도 인근에 오래 있었거나 예상경로대로 왔다면 현재 사라호가 가지고 있는 태풍계의 전투력 측정기 타이틀을 힌남노가 이어받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4. 기록

순간풍속(m/s) 제주 46.9[23] 울릉 46.6 여수 46.1 부산 42.7 목포 38.8 울산 35.0 포항 34.6 추풍령 25.0 서울 22.1 전주 13.2
최대풍속(m/s) 여수 35.5 부산 34.7 제주 33.5 목포, 울산 31.7 울릉 30.0 포항 28.0 대구 25.3 추풍령 20.0 인천 17.7 강릉 13.3 광주 11.3 서울 10.4
최저해면기압(hPa) 부산 951.5[24] 울산 956.6 포항 964.8 제주 965.1 여수 966.0 울릉 967.0 대구 970.9
목포 981.5 광주 982.3 추풍령 984.6 전주 986.7 강릉 990.3 서울 993.1 인천 994.0
시간당최다강수량(mm) 여수 67.6 울산 48.0 제주 41.2 부산 40.0 추풍령 36.2 목포 32.0 대구 17.8 강릉 17.3 울릉 17.0 포항 8.7
일최다강수량(mm) 제주 168.1 강릉 165.5 울산 157.4 여수 115.4 대구 101.2 추풍령 94.7 부산 90.7 울릉 71.4 포항 68.1 목포 64.7
총누적강수량(mm) 제주 269.1 추풍령 174.0 울산 173.9 여수 165.9 강릉 165.7 대구 148.4 전주 120.5
광주 115.9 부산 100.6 목포 91.4 포항 88.1 울릉 79.6 서울 61.3 인천 54.4

위력에 비해 측정된 값이 낮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당시에는 관측소가 현재에 비해 매우 부족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극값 자체는 낮더라도 순간최대풍속 46 m/s 이상을 기록한 관측소가 3곳이나 있고 부산의 42.7 m/s는 태풍 매미 때와 같은 값이다. 강수량도 상대적으로 적어 보일 수 있으나 150 mm 이상 내린 관측소의 수를 생각하면 적다고 할 정도도 아니다. 또 최저해면기압 역대 1위가 기록된 것을 보면 해일 피해가 상당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여담

태풍 사라로 피해를 입었을 때 북한에서 원조를 제의한 적이 있다. 하지만 어차피 남한에서 받아들일 리 없다고 판단한 통일전선전술의 일환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100%고 당시 외무부[25]는 이를 선전책으로 간주하고 논평할 가치도 없다며 즉각 거절했다. # 당시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보다 우월했다는 얘기가 많지만 북한이 발표한 경제통계와 사회주의권 원조를 뭉뚱그려서 막연하게 생각한 것에 불과하다. 실상은 북한도 1954-1955년에 식량수매계획이 잘못 돌아가는 바람에 대기근을 겪어 소련 중국으로부터 식량원조를 받아서 겨우 기사회생한 상태였고 1959년에는 무리한 집산화와 공업화 계획으로 식량 부족 문제가 심각했지만 강제적인 집산화로 겨우 기근만 면한 상태였다.

거제 해금강의 촛대 바위가 2개가 있었는데 하나가 이때의 강풍으로 인해 부서졌다고. 낙동강 삼각주의 모래톱은 침몰되지 않은 섬이 없었다고 한다.

한 가지 기막힌 점은 미야코 섬 태풍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피해를 주었던 이 태풍이 일본 입장에는 예고편에 불과했다는 것. 사라가 사라진 지 이틀 뒤 발생한 15호 태풍 ' 베라'는[26] 공교롭게도 일본에서 기상 관측 사상 최악의 태풍으로 꼽히는 태풍이다. 파괴력이나 피해 정도로나 여러모로 사라보다 압도적으로 강력했다. 최저 기압 895hPa[27](일본 상륙 당시 최저 기압 929.2 hPa), 최대 순간 풍속 71.5 m/s에 4,580명이 사망하였다. 게다가 내습 경로가 하필이면 나고야 - 노토 반도 - 도호쿠( 후쿠시마 - 센다이).[28] 게다가 이 지역을 자기 힘의 거의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정확하게 직격했다. 이것 때문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발간한 'The Great Disasters"에도 떡하니 올라가 있을 정도. 이 태풍 이후 일본은 적극적으로 태풍에 대한 대응 체계를 마련하기 시작해 1960년대 무렵부터는 어지간한 태풍에도 인명 피해를 크게 줄이는 데 성공했다.[29]

1959년은 SSHS 5등급 슈퍼태풍이 사라와 베라를 포함해 무려 6개나 발생했던 해다. 특히 이들 중 9호 태풍 조앤은 이 해에 발생했던 태풍들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인 885hPa를 기록했는데[30] 이는 현재까지도 대만 기상 관측 사상 최악의 태풍으로 꼽히고 있으며 대만을 넘어 태평양에서 발생했던 태풍들 중 가장 강력한 태풍 10위권 내에 당당히 들어가 있다.[31] 그리고 12월에는 23호 가일다(925hPa)가 필리핀을 덮쳤다.

한편 한국은 2002년 루사와 2003년 매미로 연타를 맞은 후 대응 체계를 확립한 끝에 이후 발생한 여러 대규모 태풍에도 큰 피해 없이 대응할 수 있었으나 2022년 힌남노때 다시 큰 피해를 입었다.[32]

당시 큰 피해를 입은 강원도 울진군[33]의 피해 주민에게 강원도지사가 넉넉한 지원 약속과 함께 민북지역인 김화군 근남면 마현리[34] 이주를 제안했다. 이들은 많은 시련을 딛고 지뢰밭 분지를 옥토로 만들었다. 현재 이 마을은 근남면 마현1리 재건촌으로 남아 있다.[35] 뉴스

대한민국에 손꼽힐 정도로 큰 피해를 끼친 태풍 중 하나고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피해를 끼쳤기 때문에 제명되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공식적으로 제명되지는 않았다. 태풍 이름 제명이 2001년부터 시행되었기 때문에 1959년의 사라호 태풍은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 그렇지만 21세기 기준으로 놓고 보면 충분히 제명 대상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 이후 태풍에 사라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으려고 하는 만큼 사실상 제명된 태풍이나 다름없다.

6. 사라호를 소재로 한 작품

1959년 사라호 태풍이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특히 경기만 북서부와 연평도에도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당시 연평도는 조기가 굉장히 많이 잡혀서 어선 수천 척이 몰려 들었는데 이는 태풍이 북상한 이후 전라도와 연평도 지역의 어부들이 조기잡이를 하러 연평도까지 나갔다가 그만 태풍에 휩쓸려 변을 당한 것이다. 지금이야 풍랑주의보, 풍랑경보 같은 경보 시스템이 잘 되었지만 당시에는 그런 기술이 없었던 터라 기상을 불안하게 여기면서도 생업을 위해 바다로 나갔다가 예고 없이 불어 닥친 풍랑에 사망한 어부들도 많았다고 한다.

연평도 조기잡이 도중 사라호 태풍으로 순직한 어부들을 기리기 위해 5년 뒤 1964년 <눈물의 연평도>라는 노래가 나왔다. 노래가 나올 당시 연평도에서 가족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듣고 울었고 아직도 연평도의 할머니 또는 중년층들 중 당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기쁠 때나 슬플 때 이 노래를 애창한다고 한다.

사라호 태풍 30주기를 맞이한 1989년 9월 가요무대에서 회자된 영상을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최숙자가 2012년에 세상을 떠나자 추모영상으로 가요무대에서 자료 화면으로 내보낸 적이 있다.


[JTWC] [2] 대한민국 849명, 일본 99명 [3] 1959년 한국 인구가 2430만 명도 되지 않았다. 인구의 1.5% 이상이 이재민이 된 격. [4] 2024년 가치로 환산하면 10억 6794만 달러다. [5] 한국 한정으로 따지자면 1959년 9월 23일 치안국에서 밝힌 한국의 피해액은 700억 환(70억 원)이었는데, 1959년의 1원(=10환)은 2023년 소비자물가지수로 89.64원이므로, 2023년 가치로는 6274억 8000만 원 상당의 피해인 셈이다. # 덤으로 이는 달러로 환산해도 5580만 달러 남짓으로, 한국 한 곳에서 사라 태풍으로 인한 절반 이상의 재산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1959년 한국의 총 GDP가 당시 가치로 2208억 원, 2023년 가치로도 19조 8000억 원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한국 GDP의 3.1%, 예산의 18%에 달하는 피해를 입혔던 셈이다. 참고로 당시 대한민국 정부 1년 예산이 3900억 환(390억 원)이었으며, GDP의 3.1%라는 재산피해가 얼마나 큰 거냐면, 고베 대지진의 피해액이 당시 일본 GDP의 3.6%였다. [6] 화폐개혁 후 가치로 60억 원, 2022년 8월 기준 2496억원 이상 [7]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태풍명 뒤에 호(號) 자를 붙이는 게 자연스러웠다. [8] 일본 기상청에서는 대한 해협 통과로 기록, JTWC에서는 통영 상륙으로 기록. [9] 차례 지낸다고 절하는데 초가집 지붕이 날아가 버린 집도 있다고 한다. [10] 영남 지방 70대 이상 노인들에게 생애 가장 기억에 남는 추석을 꼽으라고 하면 대부분 1959년 추석이나 매미가 강타한 2003년 추석을 꼽을 정도다. [11] 중형급(직경 860~890km)으로 추정됨 [12] 경상도 일대 [13] 사라 이후 44년 만에 온 매미가 954hPa로 근접했다. [14] The Daily Herald. Provo, Utah. United Press. September 27, 1959. Retrieved March 22, 2015. [15] 일본 1위는 1977년 9호 베이브, 일본명 오키노에라부 태풍, 907.3 hPa다. [16] 비슷한 사례로 10년 뒤 인도의 서벵골과 동파키스탄, 지금의 방글라데시를 강타한 사이클론 볼라가 있다. 20세기 최악의 인명피해를 낸 열대성 저기압으로 이때 무려 50만명의 사상자가 나왔으며 복구 과정의 불평등 배분이 폭발해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을 촉발시켰다. [17] 제주도 최근접 시점 [18] 한반도에 일제강점기를 넘기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재산마저 남김없이 증발시킨 6.25 전쟁이 끝난 지 6년밖에 되지 않아서 전쟁 피해 복구도 제대로 못한 열악한 시절이었다. 애초에 무려 1000명 가까운 인명이 죽거나 실종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자연재해였는데도 2023년 가치로 환산해도 재산피해가 겨우(?) 6000억대였을 정도였으니 태풍으로 날아갈 것도 없던 셈이었다. [19] 경로를 보면 역대 강력했던 태풍들과는 달리 한반도 지면에 상륙은 커녕 서해안 근처만 돌다갔다. [20] 제주도는 사라의 가항반원이었지만 볼라벤은 위험반원 내였다. 볼라벤과 덴빈의 피해 규모는 역대 4위로, 둘로 나누어도 역대 7위급에 육박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막대한 피해를 주고 간 볼라벤이었지만 사라의 기록은 깨지 못했다. [21] 대신 이로 인해 사라와 비슷한 경로를 그리며 지나갔다. [22] 그러나 에위니아는 재산피해가 많았음에도 제명되지 않고 현재까지도 잘 쓰이고 있다. [23] 당시 풍속 역대 1위였다. 지금은 순위가 많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매우 강한 바람이다. [24] 최저해면기압 역대 1위이다. [25] 당시에는 통일부가 없었다. 통일부의 전신인 국토통일원은 사라호 강타로부터 10년 뒤인 1969년에 설립되었다. [26] 이세만 태풍은 일본에서 붙인 이름이다. [27] 허리케인 카트리나나 태풍 매미도 관광 보낼 수준의 위력이었다. 만약 이 태풍이 사라의 경로 그대로 북상했다면 대한민국은 국가 막장 테크를 탔을지도 모른다. [28] 일본 최대 인구 밀집 지역인 간토 지구를 비롯한 도카이도 벨트가 통째로 포함된다. [29] 참고로 이것도 어느 날 뚝딱 이루어진 게 아니다. 1960년대 내내 일본은 이상기후에 시달렸고 토네가와(강)의 철둑이 홍수로 막혀 버려서 간토 일대가 물바다가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일본은 베라호 태풍으로부터 10여 년을 더 시달리고 나서야 겨우 치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30] 대만 상륙 당시에도 900hPa였다. 물론 인명피해는 사망 11명, 부상 74명으로 그쳤지만 3,308채의 가옥이 파괴되었다. [31] 1위는 1979년 태풍 이다. [32] 이 큰 피해들로 인해 루사, 매미, 힌남노는 이때 제명되었다. [33] 당시엔 강원도였고 1963년에 경상북도로 편입되었다. [34] 현재의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로, 김화군은 철원군과 1963년 임시로 통합되었다. 지금의 와수리와 산양리 사이에 있는 큰 분지 안 마을이며 재건촌이라고 불린다. 이때 이주한 마을은 마현1리 [35] 이후 마현리에는 마현2리에 1966년 전역군인 가족이 입주했고 마현1리에 1980년 군인 가족이 입주하면서 꽤 큰 민북마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