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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홀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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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빅토리아홀 참사
Victoria Hall disaster
파일:빅토리아홀 참사.jpg
<colbgcolor=#000> 발생일 1883년 6월 16일 3시경[1]
발생 위치
영국 타인 위어 선덜랜드
유형 다중밀집사고
원인 무질서
인명
피해
사망
183명
부상
불명
1. 개요2. 사고 당시3. 사고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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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83년 6월 16일 영국 잉글랜드 선덜랜드의 빅토리아 홀에서 발생한 대형 압사 사고. 현대 안전사고 예방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참사다.

2. 사고 당시

빅토리아 타운은 크리스탈 팰리스와 앨버트 홀처럼 관객들이 모일 공간이 필요하단 이유로, 1872년 모브레이 공원 인근 라우라가에 3,000명의 관객을 수용 가능한 빅토리아 홀을 지었다. 건물은 당대 유행했던 고딕 스타일로 지어졌다. 관객석 3층과 갤러리, 무대로 나뉘어진 이 건물은 각종 콘서트와 종교행사, 연극 등이 펼쳐지면서 다용도로 사용됐다.

1883년 6월 16일엔 "지금까지 없었던, 아이들을 위한 최고의 선물(Greatest treat for children ever given)"이란 이름으로 마술사 페이 남매(Mr & Ms.Fay)[2] 마리오네트와 마술공연이 펼쳐졌다. 관객들은 순식간에 2,000명 넘게 모여들었다. 관객 중 상당수는 7살에서 11살 사이의 아이들이었는데, 공연이 끝나고 장난감을 나눠주는 행사가 있어서 아이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마술 공연 자체는 베테랑이 했던 만큼, 아이 2명이 공연 때 쓰인 연기 때문에 살짝 아파했던 걸 빼면 별 탈 없이 끝났다.

문제는 공연이 끝나고 약속했던 장난감 증정 행사였다. 공연 티켓에 숫자가 적혀 있었는데, 특정 숫자가 있는 티켓을 가진 아이들에게 추첨을 통해 장난감을 증정하겠다 말하고, 아이들에게 장난감[3]과 사탕을 던졌다. 팔 힘에 한계가 있다보니 당연히 윗층까진 안 닿았고 1층에 사탕과 장난감들이 떨어졌다. 그러자 아이들은 장난감을 놓칠세라 순식간에 출구로 모여들었다. 아예 3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1층으로 뛰어내린 아이들도 있었다. 문제는 수많은 아이들이 몰려들기에는 계단이 너무 좁았다.

계단 닫는 문을 약 50cm만 열어둔 채 아예 못으로 고정해놨었는데, 원래는 이렇게 고정해서 아이들을 천천히 들여 보내고, 그와 동시에 티켓 검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갈 땐 오히려 이런 문이 방해가 됐다. 관리하는 어른도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이 계단과 문 틈새에 끼이거나 넘어지기 시작했다. 넘어진 아이들에 걸린 다른 아이들이 또 넘어지고, 그 아이들 위로 다른 아이들이 또 넘어지는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며 계단엔 순식간에 수백 명의 아이들이 낑기고 깔려버렸다. 아래쪽에 깔린 아이들은 위의 아이들의 무게를 못 이기고 압사했다. 하필이면 이런 일이 계단 코너에서 벌어져서 위에선 아래에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내려오다가 같이 넘어져 아래 아이들을 깔아뭉개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났고, 최대 20명의 아이가 블록마냥 쌓여 천장 가까이 닿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사태를 파악한 빅토리아 홀 직원들은 밑에서 아이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계속해서 몰려들어 구조가 힘들어지자, 다른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간 뒤 위에서 아이들을 구조, 다른 출구로 내보냈다. 직원 프레더릭 그레이엄은 이렇게 약 600명의 아이를 구조했다. 다른 어른들도 달려와 50cm의 좁은 문 틈 사이로 아이들을 한 명씩 구조했다. 한 어른이 공구를 가져와 문을 부숴서 열어 공간이 생겼고, 약 30분 뒤 살아남은 아이들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83명의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의 무게를 못 이기고 그만 압사하고 말았다. 어느 성경학교의 교실은 이 사고로 인해 학생 30명 전원을 잃기도 했다.

3. 사고 이후

사고 소식을 접한 빅토리아 여왕은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위로의 인사를 전하고, 위로금을 전달했다. 나라 각지에서도 위로금이 전달되어 약 5,000 파운드가 모였다. 위로금은 전부 장례식에 쓰였다. 장례식은 일주일간 진행됐고, 진행되는 애도기간 동안 그 지역의 모든 회사가 일을 중단했다.

희생자를 안고 구슬피 우는 형상의 추모비 또한 제작됐다. 추모비는 이후 비숍위어마우스(Bishopwearmouth) 공동묘지로 옮겨졌지만, 반달리즘을 당한 이후 다시 모브레이 공원으로 옮겨졌다. 현재는 반달리즘을 막도록 유리로 보호되어있다. 매년 6월 16일 오전 11시마다 Sunderland Old Township Heritage Society의 멤버들이 모여 이 추모비 앞에서 추모행사를 연다.

사고의 원인이었던 마술사 페이 남매는 처벌을 받진 않았지만 선덜랜드에선 더 이상 공연을 할 수 없었고 어린이 공연에서도 초대받지 못했다.

현대 안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기도 한데, 아이들이 너무 좁은 곳으로 몰려 참사가 일어났기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비상구를 설치하는 내용의 법률이 제출되어 통과됐다. 또한 비상구를 쉽게 여는 패닉바가 발명된 계기가 됐다. 사건이 터지고 8년 뒤 발명되어 널리 퍼졌지만, 영국이 아닌 타 국가에선 이로쿼이 극장 화재 사고를 겪고서야 퍼졌다.

사고가 일어났던 빅토리아 홀은 그후 50년간 더 남아서 흉물 소리를 듣다가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군의 폭격을 맞고 무너졌다.

몇몇 국내 기사에는 "빅토리아 홀 화재" 라고 말하지만 화재가 아닌 압사사고다.


[1] 현지시각 [2] 알렉산더 페이와 동생 애니 페이가 같이 다녔던 마술단. [3] 말 장난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