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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숙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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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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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서원(德陽書院)이 소장한 기황후 영정[1]
시호 보현숙성황후(普顯淑聖皇后)
존호 창숙광성황후(昌淑光聖皇后)
본관 행주 기씨(幸州 奇氏)
이름 고려 기순녀(奇順女)
기 설렁거 올제이 후투그
(Gi Solongo Öljei Khutugh / Өлзий хутуг / 奇 肅良合 完者 忽都)
생몰 1315 ~ 1369
1. 개요2. 생애
2.1. 공녀에서 후궁이 되다2.2. 제2황후가 되다2.3. 권력을 휘두르다2.4. 제1황후가 되다2.5. 황태후가 되다2.6. 유언을 남기다
3. 평가
3.1. 원나라의 입장3.2. 고려의 입장
4. 대중매체에서5. 여담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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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나라 혜종 우카가투 칸 토곤테무르의 3번째 황후로 정확히 말하면 혜종의 제2계후이자 3번째 정실황후이다. 북원 소종 빌레그트 칸 아유시리다라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시호는 '보현숙성황후'(普顯淑聖皇后), 따라서 정확한 공식 명칭은 '보현숙성황후 기씨'(普顯淑聖皇后 奇氏)지만 성이 기씨인 황후라고 해서 한국에서는 보통 "기황후"로 불린다.

2. 생애

2.1. 공녀에서 후궁이 되다

고려 출신으로 본관은 행주였으며 아버지는 기자오, 외할아버지는 이행검(李行儉)[2]이었다. 오라비가 5명, 누이가 2명이었는데 그 중 기철도 있었다. 기씨의 고려식 본명은 알려진 바 없으나[3] 기 설렁거 올제이 후투그(Gi Solongo Öljei Khutugh, 奇 肅良合 完者 忽都)[4]라는 몽골식 이름만 전한다.[5] 1333년 기씨는 공녀로 뽑혀 원나라에 갔는데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가 추천하여 궁녀가 되었다. 고용보는 기씨를 앞세워서 권력을 얻고자 했는지 혜종의 차와 다과를 담당하는 시녀로 삼았는데 혜종은 용모가 아름답고 학식이 뛰어난 기씨에게 반해 후궁으로 삼았다. 혜종의 총애를 받자 권신 킵차크 엘테무르의 딸이자 혜종의 제1황후였던 다나시리가 질투하여 괴롭혔는데 심지어 채찍으로 맞아 온몸에 검고 푸른 멍이 들었으며 인두로 지지는 짓까지 당했다. 그러나 다나시리의 남매인 텡기스 다르카이 일파가 모반을 꾸민 혐의로 멸문당하자(1335. 6) 다나시리도 황후에서 폐위되었으며 중서우승상 메르키트 바얀이 주도하여 다나시리는 유배길에 만 15세의 나이로 독살당했다.

2.2. 제2황후가 되다

혜종은 고려인 공녀 출신 기씨를 새로운 제1황후로 삼으려고 애썼지만 당시 실권자였던 바얀이 "몽골족이 아닌 여성을 제1황후로 삼을 수 없다."고 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바얀 후투그를 새로운 제1황후로 삼을 수 밖에 없었는데(1337. 3) 사실 바얀이 반대한데는 기씨가 황자를 낳지 못했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338년 기씨는 혜종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출산했고 바얀이 실각하자(1340) 혜종의 국사 사라판이 기씨를 제2황후로 책봉하기를 청함으로써 제2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기씨는 흥성궁(興聖宮)에 거처했으며, 비록 아들을 낳고 혜종이 총애하기는 했지만 정치적 뒷받침이 없었다.

그래서 고민하던 중 마침 혜종이 태황태후 부다시리를 폐위하고 추방했는데(1340), 당시 부다시리는 휘정원(徽政院)을 관리하고 있었다. 부다시리를 추방한 후 혜종은 휘정원의 관리를 기황후에게 맡겼다. 기황후는 이를 기회로 삼고 측근인 박부카(朴不花)와 고용보를 이용해서 원나라의 실권을 장악해 막강한 권세를 휘둘렀다. 이후 휘정원을 자정원(資正院)으로 이름을 바꾸고 환관 고용보를 자정원사로 임명해 황실의 재정을 장악했으며, 엄청난 부를 쌓아 정치 자금도 마련했다. 자기가 낳은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책봉받게 했고, 고려 출신 여성인 권씨( 권겸의 딸)와 김씨(김윤장의 딸)를 황태자비로 삼았다. 같은 고향 출신이자 고용보가 추천한 환관 박부카를 동지추밀원사로 임명해 군사권도 장악했으며, 나중에는 재상에 버금가는 정2품 영록대부에도 임명했다.

2.3. 권력을 휘두르다

기황후가 득세함으로써 고려가 받은 악영향은 매우 심각했는데 기황후의 세력이 성장하자 고려가 원나라로 보내는 공물의 양은 오히려 늘었다. 기황후는 자신과 친정인 행주 기씨 가문의 잇속을 챙기려고 고려에 많은 간섭을 행사했으며, 기황후의 오라비 기철을 필두로 한 권문세족도 온갖 패악을 부린 것이다. 결국 제31대 공민왕 왕전은 1356년 병신정변을 일으켜 부원배 기철은 물론 가족과 측근들까지 모조리 숙청했다. 이에 격노한 기황후는 1363년 12월, 덕흥군 왕혜(王譓)를 고려의 국왕, 조카 기삼보노(奇三寶奴)를 고려의 왕세자로 삼고자 원나라 군대 10,000명을 보내 고려를 침공했으나 최영 이성계가 이끄는 군대에게 패배했다. 한편 원나라로 끌려온 고려 공녀들이 원나라 정계에서 인기가 많았는데[6] 기황후는 공녀들을 유력자들에게 선물로 보내 권력을 강화하는데 이용하기도 했다.

혜종 시대에는 킵차크 텡기스 일파의 반란 제압에 큰 공을 세운 메르키트 바얀이 최고의 권세를 누렸지만 바얀은 혜종에게 윤허도 받지 않고, 담왕 살살독을 마음대로 처형했으며 텡기스 형제와 다름없이 마구 권세를 휘둘렀다. 이 때문에 혜종은 메르키트 바얀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고 결국 토크토아, 지아와태, 사라판 등이 메르키트 바얀을 실각시켜 좌승상으로 강등하고 변방으로 쫓아냈다(1340). 후에 혜종은 메르키트 토크토아를 승상에 임명하여 수년 동안은 원나라에 평화가 도래했으나 이번에는 혜종이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방탕해졌다. 1360년 태종 우구데이 칸의 후손 아르카이테무르가 반란을 일으켰고 급기야 1364년에는 베이르테무르[7] 대도를 함락시켰다. 이때 황태자 아유시리다라는 탈출에 성공했지만 기황후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포로로 잡혔다. 아유시리다라가 코케테무르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베이르테무르는 화가 나서 교지를 위조해 기황후를 궁 밖으로 쫓아내고 100일 동안 감금시켰다. 하지만 1365년 한족 군벌 코케테무르가 황태자 아유시리다라의 편을 들며 대도를 수복해 결국 황태자파와 반황태자파 간의 내분이 끝났다. 기황후는 코케테무르의 힘을 등에 업고, 혜종에게 양위하라고 압박했지만 혜종은 이를 거절했으며 이후 코케테무르마저 회군하여 대도를 떠났다.

2.4. 제1황후가 되다

1365년 9월 바얀 후투그 황후가 죽자 많은 신하들이 기황후를 제1황후로 책봉하라고 주청했지만 기황후가 혜종을 압박하여 자꾸 양위시키려 한 것 때문에 정나미가 떨어졌는지 혜종은 비답을 내리지 않고 다물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황후는 제1황후 자리를 포기하지 못했는데 자정원을 숭정원(崇政院)이라 개명하고 바얀 후투그가 생전에 관리했던 중정원(中政院)을 숭정원에 편입시키는 등 더욱 세력을 키워 혜종을 압박했다. 결국 혜종은 기황후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1365년 12월 그녀를 마침내 제1황후로 책봉했다.
너 설렁거(肅良合)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이 나라에 와서 짐을 받들어 섬겼다. 너는 항상 조심하고 삼가면서, 낮밤으로 언제나 신망이 두텁고 성실했다. 너는 긴 세월을 생활은 검소하고 사람들에게는 공손하게 아랫사람들을 이끌어 왔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중궁(中宮)의 지위가 마땅히 현명한 처(妻)인 너에게 주어져야 할 것이다. 황실의 종친들과 대신들이 모두 너를 황후에 봉하라고 간청하고 있다. 액정(掖庭)의 궁녀들도 모두 너를 존경하여 따르고 있다. 그런데 너 기씨는 여러 차례 겸손하게 이를 사양하니, 너 뜻이 더욱 가상하다. 아! 너는 궁정의 일들을 신중하게 다스려, 충심으로 짐을 더욱 더 잘 보좌할 수 있도록 힘써라. 너의 아름다운 말과 행실을 더욱 환하게 밝히고 계속 이어나가서, 함께 우리 조정의 홍복(洪福)을 보존하도록 하라.
-《 원사》원나라 혜종이 기씨를 대황후(제1황후)에 임명하면서 내린 교지 -
그때는 주원장이 중국 남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세력을 형성한 시점이었다. 기황후가 제1황후에 책봉된지 2년 8개월만인 1368년 8월 주원장은 서달에게 대군을 이끌고 원나라의 수도 대도로 북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명나라군의 공격으로 대도는 함락당했고 어수선한 상황에서 혜종은 기황후, 황태자 아유시리다라와 함께 대도를 버리고 북쪽 응창부[8]로 도망쳤는데 이 과정에서 태자비 권씨와 김씨, 그 자식들까지 전부 명군에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이 때 어처구니없게도 기황후는 고려가 지원하지 않는다고 매우 분노했다.[9]

2.5. 황태후가 되다

응창부조차 명군의 위협을 받고 위험해지자 원나라의 첫 번째 수도였던 카라코룸으로 천도했는데 이 와중에 혜종이 1370년 5월 23일 이질로 붕어했다. 혜종과 기황후의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북원의 황제 원 소종으로 즉위했지만 이때부터 기황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에 없어 알 수 없다. 아마도 기황후는 카라코룸에서 아들이 황제가 되는 모습을 보고 황태후가 되어 살다가 죽었을 것이다.

2.6. 유언을 남기다

기황후는 유언으로 고려 영토에서 장사지내달라고 했는데 기황후릉이라 전해지는 무덤이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상리 산145에 소재해있다. 기황후릉의 주변에는 측근 또는 친척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무덤인 마정승 묘, 이정승 묘 등이 같이 있다고 한다. 《동국여지지》에는 경기도 연천군에 기황후의 무덤이 있다고 전하는데 인근에서 고려시대 기와가 출토되었고 석물 2기도 발견되었다. 이로 미루어보면 기황후가 카라코룸으로 가지 않고 고려로 돌아와 연천에서 여생을 마친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 고려사》 등 관련 사서에 기황후가 귀국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기황후가 고려로 돌아왔으면 당시 그녀가 고려에 끼친 엄청난 해악으로 미루어보아 《고려사》에 기록이 한 줄이라도 남았을 것인데, 공민왕이 자신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왕으로 삼겠다며 고려를 공격했던 기황후가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한다고 순순히 그녀를 받아줬을지도 의문이다. 거기에 조선 태조 이성계 본인이 기황후가 보낸 몽골 병사를 물리친 인물이니 고려든 조선이든 기황후를 받아줄리 만무했다.

3. 평가

3.1. 원나라의 입장

원나라 입장에선 황후로서 그나마 막장까지는 아니었다. 이전 황후였던 킵차크 다나시리가 좋지 못한 인성에 권력욕까지 갖춘 여러 의미에서의 막나가는 인간이었던지라 그녀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다. 다나시리는 어린 나이에 사람을 인두로 지질 정도로 막장 인성을 가진 문제적 인물이었고, 결국 킵차크 집안이 멸문한 뒤에는 15세에 사약을 받아 목숨을 잃고 말았다. 반란자의 집안이라는 이유가 가장 크긴 했지만.

기씨를 다룬 자세한 기록은 《원사》 <후비 열전>뿐이나, <열전> 등 사료에선 '자정원'이라는 기구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나 심하게 사치와 향락에 빠지진 않았고, 틈틈히 《효경》과 사서를 읽었으며, 귀한 음식을 먹기 전에는 항상 원나라의 태묘(종묘)에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혜종 등등이 최악이라 상대적으로 덜 까일 뿐, 기황후도 과도한 권력욕에 매관매직을 일삼고 정쟁을 이끌어 원나라의 상층부를 썩어 문드러지게 했다는 것은 정사에도 기재된 분명한 사실이다.

때문에 기황후를 까다보면 원나라 패망의 주역으로 손꼽기도 하는데, 다만 이때의 원나라는 기황후 이전부터 어차피 망조가 깃든 나라였다. 애초 원나라 멸망의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민족 차별로 인한 한족들의 불만과 원나라 말기 화폐( 교초) 남발로 인한 인플레이션[10] 그리고 이로 인해 경제가 파탄난 점, 지방 군벌들의 봉기, 농민 반란을 들며 기황후가 원나라 패망의 주역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반면 기씨를 둘러싼 권력투쟁이나 고려 침공을 무리하게 시도하는 등의 낭비 때문에 원나라 패망의 주역이 맞다는 주장도 거센 편이다.

다만 고려 침공은 고려 입장에선 최악이었지만 '원나라의 권력자'인 그녀 입장에선 핵심 번국 중 하나인 고려의 이탈을 막아보려 시도한 것 자체는 실책이라기보단 당연히 해야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문제는 고려의 전력을 과소평가해서 결국 대차게 깨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기황후 또한 정치적 악수가 없지는 않았다. 메르키트 토크토아가 승상이 된 이후 유례없는 평화를 맞이했던 원나라였으나 희대의 간신 카마(哈麻)가 기황후와 토크토아의 사이를 이간질하여 결국에는 토크토아를 죽게 만들었다. 1345년 토크토아가 《송사》, 《요사》, 《금사》 등의 '3사'를 편찬할 때 그 말에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에 비록 본심은 아니었을지언정 승상 토크토아를 죽인 것은 기황후에게 분명히 악수였다. 기황후가 권력 싸움에 정신이 팔리지 않고 토크토아가 오래도록 원나라에 남았다면 원나라의 멸망이 조금이라도 늦춰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또 다른 결정적인 악수는 심복 고용보가 죽은 후[11] 박부카에게 너무 많은 권력을 준 것이었다. 이는 1364년에 황태자파와 반황태자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기황후도 반황태자파인 베이르테무르에게 궁에서 쫓겨나 민가에 100일간 유폐되는 굴욕을 겪었다. 기황후가 이처럼 권력을 두고 다툼으로써 원나라의 국방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가뜩이나 불안하고 어지러운 원나라는 더욱 흔들렸다. 결국 원나라는 주원장 명나라에게 만리장성 이남 지역을 빼앗기고 다시 초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무튼 신분이 낮은 고려의 공녀에서 출발하여 제2황후, 제1황후에 책봉되었고 아들을 북원의 대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몇 안 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12], 고국 고려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기씨가 일으킨 온갖 악영향이 많아 특히 고려를 계승한 후대 한국 문화권의 역사가들로부터는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능력은 있는데 행실이 개차반인 전형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3.2. 고려의 입장

고려의 입장에서는 민폐를 넘어 온갖 해를 끼쳤을 뿐 이득을 준 것은 전혀 없었다. 원나라에서 기황후가 권력을 잡자 기씨의 오라비였던 기철과 기원이 그 빽만 믿고 갖은 횡포를 부리는데도 부마(쿠르겐)국이었던 고려에서는 행주 기씨 집안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행주 기씨 집안은 기황후를 든든한 뒷배로 삼아 사리사욕을 채우기에만 열중했다. 기황후의 원 황실내 권력과 위상이 커져가면서 기씨 일족의 횡포와 전횡 역시 날로 심각해졌고, 결국 공민왕이 즉위하자마자 원나라와 충돌할 엄청난 각오까지 해가며 고려 내에 있었던 기씨 집안을 싸그리 쓸어버렸다. 그 후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펼치자 원나라에 있었던 기황후는 공민왕을 쫓아내고, 덕흥군을 고려의 새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공민왕이 보낸 군대에 의해 패배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최유의 난)[13]

한편 기황후가 공녀 폐지를 했느니 입성론을 막았느니 하는 이야기도 일부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오라비가 제4차 입성책동 당시 입성론을 일으키며 고려를 통째로 갖다 바치려고까지 했던 것. 또한 자기가 불리하거나 필요할 때는 권력자에게 또 다른 공녀를 뇌물로 갖다바쳤고, 결국 참다 못한 이곡이 혜종에게 상소를 넣어 공녀 차출을 중지시켰으나 기황후는 오히려 박부카를 시켜서 공녀를 계속 보내라고 독촉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기황후가 공녀들을 계속 원한 이유는 바로 자정원의 재정을 바탕으로 고려 출신의 처녀들을 데려다 길러 원나라 고위층에 뇌물로 선사해 자신과 황태자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기 때문인데 그러한 사실은 원나라 말기를 기록한 《경신외사》 등에도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 사실로 볼때 기황후는 고려 공녀를 막기는커녕 성상납을 시키는 사창가 포주 같은 짓을 저지른 셈이다.
기황후는 고려 미인을 길러 권세가에게 바쳤다. 원나라 수도에서 현달한 고위 관인과 귀족은 반드시 고려의 미인을 얻어야 명가(名家)라 했다. 고려 여인들은 예쁘고 귀여워 사람을 잘 섬겼고, 그 집안에 들면 곧 사랑을 독차지했다. 지정(至正: 1341)년 이후로 궁중의 일을 맡은 사람의 태반은 고려 여인이었다. 이 까닭에 사방의 옷차림, 신발, 모자가 모두 고려 제품을 사용했다.
《경신외사》(庚申外史)
기황후가 권력을 잡는 원나라 말기쯤 되면 고려에 요구하던 무리한 공물 요구가 조금 완화되기는 하지만 이는 원나라 자체가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을 제대로 상대하지 못할 정도로 국력이 약화되어 더 이상 피지배 민족들을 강하게 억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여러 가지 어려운 요구를 하기 어렵고, 본국 관리조차 힘들어졌기 때문에 저절로 여러 요구가 사라진 것이었다.[14] 단지 기씨가 황후로 있었던 시절과 시기가 겹쳐 위와 같은 사실을 왜곡하는 주장이 나온 것일 뿐이다.

4. 대중매체에서

고려 말기를 다룬 한국 작품에서는 대체로 고려 내부를 집중적으로 다루기에 줄곧 국외에 있던 기황후는 직접 나오지 않고 언급만 되거나 나오더라도 낮은 비중으로 등장한다.
  • 게임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4에서 남편 토곤 테무르와 아들 아유르시리다라가 등장하지만 왜인지 토곤테무르의 왕비는 그녀가 아니라 가공의 인물인 '미르자'라는 몽골 출신 여인이 나온다. 실제로 기황후는 북원으로 쫓겨갈 때 쯤부터는 더이상 기록에 나오지 않으므로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이 게임이 그리 고증을 열심히 지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경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기는 하다.
파일:기황후7.jpg
  • 2005년 MBC 드라마 < 신돈>에서는 배우 김혜리[15]가 연기했다. 악녀의 이미지를 매우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고 초반에는 공민왕 노국대장공주를 정략적으로 이어주며, 이후 공민왕을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려는 계략을 세우는 등 치밀한 모습이었지만 공민왕이 고려로 돌아간 뒤로는 비중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파일:2013-10-29-00-11-01.jpg
  • 2013년 MBC 드라마 < 기황후>에서는 배우 하지원[16]이 연기했다. 이 드라마 속 배역에 대한 정보는 주인공 기승냥에 있다. 그러나 시작전부터 드라마에 대한 정보가 드러날수록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드라마가 전개될수록 본래 역사와는 완전 다른 픽션에 불과한 내용이라서 아쉬움을 남겼다. 사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기황후는 이름만 기황후지 실존 인물과는 다른 삶을 산 드라마 속 창작 인물로만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이 드라마를 일반적인 역사 기반 드라마로 보면 큰일난다. 애초부터 해당 드라마는 원작이 실존 인물인 기황후를 소재로 지은 소설이다. 다른 대하사극과 비교하기에는 약간 애매한 기준임을 고려해야 한다.

5. 여담

  • 드라마 < 기황후>가 한참 유행했을 때 기황후의 얼굴이라고 인터넷에 퍼졌던 초상화가 있었는데 초상화의 진짜 정체는 기황후가 아니라 원나라 제3대 무종 카이산 칸의 모후이자 황태후였던 옹기라트 다기(答己)였다. 기황후는 명나라 주원장에 의해 북쪽으로 쫓겨났기 때문에 초상화는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 링크

6. 둘러보기

원사(元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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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태조기(太祖紀)」 2권 「태종·정종기(太宗定宗紀)」 3권 「헌종기(憲宗紀)」
패아지근 철목진 패아지근 와활태 · 패아지근 귀유 패아지근 몽가
4·5·6·7·8·9·10·11·12·13·14·15·16·17권 「세조기(世祖紀)」 18·19·20·21권 「성종기(成宗紀)」 22·23권 「무종기(武宗紀)」
패아지근 홀필렬 패아지근 철목이 패아지근 해산
24·25·26권 「인종기(仁宗紀)」 27·28권 「영종기(英宗紀)」 29·30권 「태정제기(泰定帝紀)」
패아지근 애육려발육팔달 패아지근 석덕팔랄 패아지근 야손철목아
31권 「명종기(明宗紀)」 32·33·34·35·36권 「문종기(文宗紀)」
패아지근 화세랄 패아지근 도첩목이
37권 「영종기(寧宗紀)」 38·39·40·41·42·43·44·45·46·47권 「순제기(順帝紀)」
패아지근 의린질반 패아지근 타환첩목이
※ 48권 ~ 105권은 志에 해당. 106권 ~ 113권은 表에 해당. 원사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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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4><tablewidth=100%><tablebgcolor=#004db1> 114·116권 「후비전(后妃傳)」 ||
광헌익성황후 · 소자황후 · 흠숙황후 · 정절황후 · 소예순성황후 · 남부이 · 정자정의황후 · 불루칸 · 선자혜성황후 · 수케시리 · 장의자성황후 · 장정의성황후 · 바부칸 · 정유휘성황후 · 바부샤 · 부다시리 · 다리예테미쉬 · 다나시리 · 백안홀도 · 보현숙성황후 · 현의장성황후 · 휘인유성황후 · 선의숙성황후 · 소헌원성황후
115권 「예종등전(睿宗等傳)」 117권 「별리고태등전(別里古台等傳)」
타뢰 · 진금 · 감마랄 · 답랄마팔랄 별리고태 · 출적 · 독랄 · 아홀도 · 관철보화 · 첩목아불화
118권 「특설선등전(特薛禪等傳)」 119권 「목화려등전(木華黎等傳)」
특설선 · 패독 · 아랄올사척길홀리 목화려 · 박로출 · 박이홀
120권 「찰한등전(察罕等傳)」 121권 「속불태등전(速不台等傳)」
찰한 · 찰팔아화자 · 출적태 · 진해 · 초내태 · 오야이 · 갈사맥리 속불태(1) · 안축이 · 외답아 · 박라환 · 초사
122권 「파이출아이특적근등전(巴而朮阿而忒的斤等傳)」
파이출아이특적근 · 철매적 · 안찰아 · 암목해 · 풍숙안 · 석리검부 · 삭직돌로화 · 석아길사 · 합산납
123권 「포지아등전(布智兒等傳)」
포지아 · 소열태초올아 · 활활불화 · 배연팔도로 · 아술로 · 소고아 · 아랄와이사 · 초아 · 야포감복 · 조아가반 · 순지해 · 점철발도아 · 겁겁리 · 탑불이아 · 직탈아 · 월리마사 · 날고랄 · 아아사란 · 합팔아독 · 애모
124권 「탑본등전(塔本等傳)」
탑본 · 합랄역합적북로 · 탑탑통아 · 악린첩목이 · 이정(李楨) · 겁렬속가 · 망가산아 · 맹사속
125권 「새전적섬사정등전(賽典赤贍思丁等傳)」 126권 「안동등전(安童等傳)」
새전적섬사정 · 포로해아 · 고지요 · 철가 안동 · 염희헌
127권 「백안전(伯顏等傳)」 128권 「아추등전(阿朮等傳)」
팔린백안 아출 · 아리해아 · 상위 · 토토흡
129권 「내아팔적등전(來阿八赤等傳)」 130권 「철리등전(徹里等傳)」
내아팔적 · 뉴린 · 아랄한 · 아탑해 · 사도 · 이항 연지길태철리 · 불홀목 · 토별연완택 · 아로휘살리
131권 「속가등전(速哥等傳)」
속가 · 낭가알 · 망올태 · 오로적 · 완자도(2) · 백첩목아 · 회도 · 역흑미실 · 배항
132권 「항홀사등전(杭忽思等傳)」
아속항홀사 · 보로합답 · 옥와실 · 맥리 · 탐마적 · 발도아 · 앙길아 · 합랄태 · 사전 · 첩목아불화
133권 「탑출등전(塔出等傳)」
탑출 · 배연 · 야한적근 · 엽선내 · 탈력세관 · 홀날출 · 중희 · 단지아 · 찰랄아태탈환 · 실리백 · 패란해 · 겁렬 · 암백 · 야속태아 · 석도아
134권 「철길사등전(撒吉思等傳)」
철길사 · 월합내 · 석반 · 철련 · 애설 · 활활 · 독홀로 · 당인조 · 타아적 · 화상 · 유용 · 가로납답사 · 활리길사 · 소운석탈홀련 · 알라사 · 타라태 · 야선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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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권 「강리탈탈등전(康里脫脫等傳)」 139권 「내만태등전(乃蠻台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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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아겁불화 · 하유일 · 철목아탑식 · 달식첩목이 태불화(太不花) · 찰한첩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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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초재 · 점합중산 · 양회중 장유 · 사천예 · 사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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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권 「설탑랄해등전(薛塔剌海等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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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권 「장진형등전(張晉亨等傳)」
장진형 · 왕진 · 양걸지가 · 유통 · 악존 · 장자량 · 당경 · 제영현 · 석천록 · 유빈 · 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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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권 「홍복원등전(洪福源等傳)」 155권 「왕세현등전(汪世顯等傳)」 156권 「동문병등전(董文炳等傳)」
홍복원 · 정정 · 이진 · 석말안지 · 알지리 · 정온 왕세현 · 사천택 동문병 · 장홍범
157권 「유병충등전(劉秉忠等傳)」 158권 「요추등전(姚樞等傳)」 159권 「송자정전(宋子貞等傳)」
유병충 · 장문겸 · 학경 요추 · 허형 · 두묵 송자정 · 상정 · 조자량 · 조벽
160권 「왕반등전(王磐等傳)」
왕반 · 왕악 · 고명 · 이치 · 이창 · 유숙 · 왕사렴 · 이겸 · 서세륭 · 맹기 · 염복
161권 「양대연등전(楊大淵等傳)」 162권 「이홀란길등전(李忽蘭吉等傳)」
양대연 · 유정(劉整) 이홀란길 · 이정(李庭) · 사필 · 고흥 · 유국걸
163권 「이덕휘등전(李德輝等傳)」
이덕휘 · 장웅비 · 장덕휘 · 마형 · 정사렴 · 오고손택 · 조병
164권 「양공의등전(楊恭懿等傳)」
양공의 · 왕순(王恂) · 곽수경 · 양환 · 양과 · 왕구 · 위초 · 초양직 · 맹반린 · 상야 · 이지소
165권 「장희등전(張禧等傳)」
장희 · 가문비 · 해성 · 관여덕 · 조갑랄 · 주전 · 공원 · 주국보 · 장립 · 제병절 · 장만가노 · 곽앙 · 기공직 · 양새인불화 · 선비중길 · 완안석주
166권 「왕준등전(王綧等傳)」
왕준 · 수세창 · 나벽 · 유은 · 석고산 · 공언휘 · 채진 · 장태형 · 하지 · 제병절 · 맹덕 · 장영실 · 석말구구 · 초정 · 번즙 · 장균 · 단신저일 · 왕석랄 · 조굉일
167권 「장입도등전(張立道等傳)」
장입도 · 장정진 · 장혜 · 유호례 · 왕국창 · 강욱 · 장초 · 여질 · 담자영 · 왕운
168권 「진우등전(陳祐等傳)」
진우 · 유선 · 하영조 · 진사제 · 진장경 · 조여표 · 요천복 · 허국정
169권 「하인걸등전(賀仁傑等傳)」
하인걸 · 가석랄 · 유합라팔도로 · 석말명리 · 사중온 · 고휴 · 장구사 · 왕백승
170권 「상문등전(尙文等傳)」
상문 · 신도치원 · 뇌응 · 호지휼 · 왕이용 · 창사문 · 장소 · 원유 · 장방 · 학빈 · 고원 · 양식 · 오정 · 양덕규
171권 「유인등전(劉因等傳)」 172권 「정거부등전(程鉅夫等傳)」
유인 · 오징 정거부 · 조맹부 · 등문원 · 조원용 · 제이겸
173권 「최빈등전(崔斌等傳)」 174권 「요수등전(姚燧等傳)」
최빈 · 최욱 · 엽이 · 연공남 · 마소 요수 · 곽관 · 협곡지기 · 유갱 · 야율유상 · 학천정 · 장공손
175권 「장규등전(張珪等傳)」
장규 · 이맹 · 장양호 · 경엄
176권 「조백계등전(曹伯啟等傳)」
조백계 · 이원례 · 왕수 · 왕의(王倚) · 유정(劉正) · 사양 · 하약우 · 조사로 · 유덕온 · 울지덕성 · 진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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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명 · 양원규 · 장승 · 장몽해 · 진호 양증 · 유민중 · 왕약 · 왕결 · 송도 · 장백순 하승 · 양타아지 · 소배주
180권 「야율희량등전(耶律希亮等傳)」 181권 「원명선등전(元明善等傳)」 182권 「장기암등전(張起巖等傳)」
야율희량 · 조세연 · 공사회 원명선 · 우집 · 게혜사 · 황진 장기암 · 구양현 · 허유임 · 송본 · 사단
183권 「왕수성등전(王守誠等傳)」 184권 「왕도중등전(王都中等傳)」
왕수성 · 왕사성 · 이호문 · 패출로충 · 이형 · 소천작 왕도중 · 왕극경 · 임속가 · 진사겸 · 한원선 · 최경
185권 「여사성등전(呂思誠等傳)」 186권 「장정등전(張楨等傳)」
여사성 · 왕택민 · 간문전 · 한용 · 이직 · 개묘 장정 · 귀양 · 진조인 · 성준 · 조감 · 장저
187권 「오고손양정등전(烏古孫良楨等傳)」 188권 「동단소등전(董摶霄等傳)」
오고손양정 · 가로 · 녹로증 · 공사태 · 주백기 · 오당 동단소 · 유합랄불화 · 왕영 · 석말의손
189·190권 「유학전(儒學傳)」
조복 · 장수 · 김이상 · 허겸 · 진력 · 호일계 · 황택 · 한택 · 동서 · 안희 · 호장유 · 웅붕래 · 대표원 · 모응룡 · 정저손 · 진부 · 동박 · 양재 · 유선 · 한성 · 오사도 · 주문규 · 주인영 · 진려 · 이효광 · 우문공량 · 합랄로백안 · 섬사
191·192권 「양리전(良吏傳)」
담징 · 허유정 · 허즙 · 전자 · 복천장 · 야율백견 · 단직 · 암도랄 · 양경행 · 임흥조 · 관음노 · 주자강 · 백경량 · 왕간 · 노기 · 추백안 · 유병직 · 허의부
193·194·195·196권 「충의전(忠義傳)」
이백온 · 석규 · 유합랄발도 · 임지 · 야율특말 · 보바르 · 합랄보화 · 유천부 · 소경무 · 장환 · 이보 · 이제 · 곽가 · 저불화 · 주희동 · 변침 · 교이 · 안유 · 왕사원 · 양박 · 조련 · 손총 · 석보 · 성소 · 양승 · 납속랄정 · 백안불화적근 · 번집경 · 전보암철리 · 주당 · 섭병 · 유경손 · 유술조 · 계완택 · 추려 · 패라첩목아 · 팽정견 · 왕백안 · 유준 · 타리불화 · 조야준대 · 진군용 · 복리아돈 · 조해 · 위중립 · 보안불화 · 민본 · 배주 · 조홍의 · 정옥 · 황후 · 백첩목이 · 질리미실 · 박새인불화 · 정호례
197·198권 「효우전(孝友傳)」
왕윤 · 곽도경 · 소도수 · 곽구구 · 장윤 · 전개주 · 영저구 · 필야속답립 · 번연 · 유덕천 · 곽회 · 공전 · 장자기 · 진걸아 · 양일 · 장본 · 장경 · 원선 · 조육 · 호광원 · 진소손 · 조일덕 · 왕사총 · 철철 · 왕응초 · 정문사 · 왕천 · 곽전 · 양호 · 정문충 · 소경조 · 호탁 · 손수실 · 이자경 · 종기 · 조영 · 오호직 · 여병 · 서옥 · 윤신 · 유정양 · 유통 · 장왕구 · 장사효 · 두우 · 장수 · 손근 · 장공 · 자여도 · 왕용 · 황윤 · 석명삼 · 유기 · 유원 · 축공영 · 진사효 · 강겸 · 호반려 · 왕사홍 · 하종의 · 합도적 · 고필달 · 증덕 · 근병 · 황도현 · 사언빈 · 장소조 · 이명덕 · 장집 · 위경익 · 탕림 · 손억 · 석영 · 왕극기 · 유사경 · 여우 · 주락
199권 「은일전(隱逸傳)」
두영 · 장특립 · 두본 · 손철 · 하중 · 무각
200·201권 「열녀전(列女傳)」
왕추추 · 진로화진 · 마영 · 조옥아 · 풍숙안 · 조왜아 · 주숙신 · 갈묘진 · 장의귀 · 이동아 · 탈탈니 · 주면가 · 귀가 · 이지정 · 채삼옥 · 범묘원 · 서채란 · 우숙정 · 진숙진 · 야산홀도 · 여언능 · 반묘원 · 유취가 · 나묘안 · 이새아 · 도종원 · 안정동
202권 「석로전(釋老傳)」 203권 「방기전(方伎傳)」
팔사파 · 구처기 · 전절 전충량 · 근덕진 · 장강 · 이호 · 손위 · 아로와정 · 역사마인 · 아니가
204권 「환자전(宦者傳)」 205권 「간신전(奸臣傳)」
이방녕 · 박불화 아합마 · 노세영 · 상가 · 철목질아 · 합마 · 삭사감
206권 「반신전(叛臣傳)」 207권 「역신전(逆臣傳)」
이단 · 왕문통 · 아로휘첩목아 철실 · 패라첩목아
208·209·210권 「외이전(外夷傳)」
고려 · 탐라 · 일본 · 안남( 진조) · 면국 · 점성 · 섬국 · 유구 · 삼서
(1) 121권의 속불태(速不台)와 122권의 설불태(雪不台)는 동일인물이므로 122권에서는 생략한다.
(2) 131권의 완자도(完者都)와 133권의 완자도발도(完者都拔都)는 동일인물이므로 133권에서는 생략한다.
(3) 150권의 석말야선(石抹也先)과 152권의 석말아신(石抹阿辛)은 동일인물이므로 152권에서는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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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숭겸을 독향하는 전라남도 곡성군의 덕양서원이 아니라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행주 기씨 문중의 도선산(都先山)에 위치한 서원으로, 2002년 7월 12일에 개원하였다. [2] 제25대 충렬왕의 비 정화궁주 왕씨와 얽힌 악연이 있다. [3] 《진천군지명지》(1997년)의 <이월면 노원리> 편에는 옥녀로 되어 있다. [4] '완췌후두'라는 표기도 자주 보이는데 중세 몽골어와 상관없이 현대 중국어 발음에서 비롯된 완전히 잘못된 표기이다.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으면 기 숙량합 완자 홀도. [5] 이름 중 '설렁거'(숙량합)는 고려 출신이라 붙은 별칭이다. 몽골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을 ' 무지개'라는 뜻의 '설렁거스'라고 부른다. 끝에 붙은 '후투그'(홀도)는 현대 몽골어로 황후, 왕비, 여사의 의미를 가진 'хатан'(하탄)과 같은 말로 존칭에 해당한다. 따라서 순수하게 이름에 해당하는 부분은 '올제이'(완자)이다. 별칭은 떼고 성과 이름에 해당하는 부분만 읽는다면 '기올제이', 한국식 한자음으로는 '기완자'가 된다. [6] 원나라의 높은 관리들이 기황후의 사례처럼 고려 여자들을 아내나 으로 삼는 것이 크게 인기를 끌어서 고려 여자를 아내나 첩으로 거느리지 못한 원나라 관리들은 다른 관리들 앞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7] <벌거벗은 한국사> -기황후- 편에서는 볼로르테무르라고 했다. [8] 내몽골자치구 시린골맹(錫林郭勒盟) 정람기(正蓝旗)에 위치. [9] 기황후가 고려에 저지른 만행들을 생각하면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라 할 수 있다. 애초에 당시 국왕인 공민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획책하기까지 했는데 공민왕이 과연 도와주려 했을까? 원래 고려는 그 전에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가 멸망할 적에도 지원 요청을 무시하고 도와주지 않았다. 겉으로만 사대를 맺었을 뿐 철저히 실리를 따라 외교를 한 고려의 특징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명 성립 이후 즉시 명에 사대하기 시작해 조선까지도 이어진다. [10] 당시 동서양을 모두 강타한 흑사병으로 실크로드가 붕괴하면서 원나라의 버팀목이었던 국제무역이 타격을 받았고, 당연히 국가재정도 극도로 위축되었다. 이러자 경제 관념이 없었던 원나라 조정은 교초를 말 그대로 남발했는데, 그 결과 인플레이션이 대폭발하면서 경제가 사실상 파탄났다. 원이 주도하는 국제무역체제에 속해있던 고려의 경제도 같이 파탄났으며, 이런 경험이 새롭게 들어선 조선왕조가 국제무역을 봉쇄하는 쇄국정책을 채택하는 계기가 된다. 국내에서도 상업과 화폐유통을 최대한 억제하는 노선으로 간것도 마찬가지. [11] 사실 조일신의 난 때 조일신에게 찍혀 부리나케 도망쳐 해인사의 중으로 숨은 것이었는데, 제28대 충혜왕의 일(기철, 고용보 등의 주도로 충혜왕이 폐위된 후 곧바로 귀양길에서 급서했던 사건이다. 이 때 고용보는 충혜왕을 함부로 겁박하면서 무례를 저질렀다고. 충혜왕의 급서 역시 워낙 갑작스럽게 발생했던 지라 사서에 기재될 정도로 의문스러웠지만 어쨌든 원나라측에서 충혜왕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비록 충혜왕이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라 불릴 정도로 악명높았지만 어쨌든 한 나라의 임금에게 신하가 무례를 범한 것으로도 모자라 죽게 내버려 둔 것이다. 당연히 충혜왕의 동생인 공민왕의 입장에서는 고용보가 자신의 친형을 죽게 만든 것이나 다름없으니 원한을 갖고 있었을 수밖에.)로 원한을 가지고 있었던 공민왕이 1362년 그를 찾아내고는 어사중승 정지상을 보내 그를 처형시켰다. [12] 중국의 역대 황제에게 사랑받은 이민족 국가의 여인들은 있었지만 황후까지 된 경우는 드물었고, 자기 자손을 황제로 만든 사람은 더욱더 드물었다. 금나라 해릉양왕, 세종 같은 경우가 모계로 발해계의 혈통이 있었는데 (심지어 해릉양왕 같은 경우는 구 발해 왕가 혈통) 이들의 어머니들은 아들이 황제가 되어서 황후로 추존된 추존황후들이다. [13] 이 전투에서 최영 이성계가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맹활약했다. [14]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더 이상 조선에 내정 간섭을 하지 못하게 된 청나라와도 비슷하다. 근데 사실 청나라는 원나라와 달리 국력이 빠지고 나서도 빠진 것치고는 많이 설친 편에 속한다. 청일전쟁 전에도 안 좋은 일이 많았는데 청일전쟁까지 해서 지고 나서도 어느정도 외부국가들에게 설쳐보다가 신해혁명이나 나고 끝났다. 이유는 군벌세력인 위안스카이가 실권을 잡으면서 내부기강을 잡아보려고 여기저기 쑤셔댔기 때문. [15] 1996년 KBS 드라마 < 용의 눈물>에서는 효빈 김씨 역, 1998년 KBS 드라마 < 왕과 비>에서는 혜빈 양씨 역, 2000년 KBS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는 강비 역이었다. [16] 2003년 MBC 드라마 < 다모>에서는 채옥 역, 2006년 KBS 드라마 < 황진이>에서는 황진이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