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28 12:52:30

베쟈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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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생활상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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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쟈족은 이집트 남부와 수단 북부, 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에 걸쳐 거주하는 반유목, 반농반목 민족이다. 주로 홍해 연안의 구릉 지대의 계곡을 중심으로 거주한다. 오늘날 이들의 인구는 130만여 명에 달한다. 이들은 무슬림이기는 하지만 아랍인도 아니고 아랍어도 쓰지 않는다. 이들은 대부분 아프리카아시아어족 쿠시어파 계열에 속하는 베쟈어를 사용한다.

위 사진에 보듯이 흑백혼혈이고 소말리인처럼 골격이 백인종에 가까운 특징을 지니고 있다.

2. 역사

베쟈족의 역사는 최소한 4천년 이상을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가 오래된 민족이기 때문에 역사 기록 상에서 이들을 지칭하는 이름도 많은 편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을 이들을 메자(Medja), 부카스(Bukas)라고 불렀으며 악숨인들 이들을 부가스로 칭했다. 이들은 장장 500여 년에 걸쳐 로마군과 잦은 충돌을 벌였는데 서기 3세기가 되면 이들의 침략 때문에 로마의 곡창 지대 이집트가 위협을 받자 로마에서 군단을 보내 토벌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로마인들을 이들을 블레미스(Blemmyes)라고 불렀다. 16세기 초 이 지역을 탐사한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이들을 부기하(Bugiha)라고 칭했다. 외부인들은 까치집 비슷한 이들 특유의 헤어스타일을 보고 이들을 아프리카의 다른 민족들과 손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베쟈족 고유의 헤어스타일은 이집트 고왕국 시대 시대 벽화에 묘사될 정도로 유구했다.
파일:C722BEDC-03C8-41F5-BD3F-723E6991239F.png 파일:0A9C45BB-B4B5-4F94-A2F2-9E4521C039AB.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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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쟈족은 자신들이 노아의 아들 함의 직계 후손이라고 믿었으며 자신들이 노아의 대홍수가 끝나고 방주가 안착한 이후부터 홍해 연안 구릉 지대에 살기 시작했다고 믿고 있다. 베쟈족은 수단에서 가장 전투력이 뛰어난 전사 집단으로 유명했다. 수천여 년에 걸쳐 자신들을 침략해오는 여러 제국 및 북방에서 쳐들어오는 유목민과의 전쟁 와중에도 살아남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포로로 잡은 베쟈족 전사들을 군사경찰로 애용했다 한다. 다른 유목민들이 외향적이고 개방적이며 담소를 좋아하는 것과 다르게, 베쟈족은 호전적이고 과묵하며 외국인에 대해 매우 불친절한 편이었다. 이 지역을 탐사한 외부인들은 베쟈족에 대해 공통적으로 매우 불친절하며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숨기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고 지적하였다. 이들은 외부인에게만 과묵한 것이 아니라 가문 내 다른 가족과도 말을 적게 하는 편이었다 한다.

베쟈족들은 소말리인과 마찬가지로 팔다리가 가늘고 길었다. 이들은 기동력이 뛰어난 근접 보병으로 유명했는데 1883년 영국군 장교들이 지휘하는 소총으로 무장한 이집트군 4천여 명을 1천여 명 정도의 마흐디군 베쟈족 보병들이 일방적으로 몰살시킨 적도 있었다.[1] 이들은 무조건 닥돌하는 전술 대신에 먼저 심리전으로 상대방의 사기를 꺾은 후에 기동력을 이용(당시 베쟈족의 별명이 “명예 기병”이라 불릴 정도였다.)해 적을 압도하는 전술을 선호하였다, 마흐디 운동 당시 영국군의 인명 피해 대부분은 마흐디 군의 명목상의 주력이었던 바까라족 광신도들이 아닌 베쟈족과의 전투에서 나왔다.

3. 생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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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쟈족은 작은 무리를 지어 홍해 연안 구릉을 떠돌아다니며 양을 치고 살았다. 이들이 사는 지역은 무덥고 척박한 지역이었다. 사막이라 바람이 지나치게 강한데다가 낮에는 지나치게 덥고 밤에는 지나치게 추웠다. 일부러 계곡을 찾아다니지 않으면 그늘을 찾기도 힘들었다. 이들은 이웃 민족들의 영향으로 명목상 무슬림이기는 했으나 신앙심이 강한 사람은 드물었다. 베쟈족들은 개인주의적이었으며 이슬람, 기독교, 이집트 전통 신앙이나 토속신앙을 포함한 종교 전반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이들은 19세기 마흐디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주력으로 활약하긴 했으나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세속적인 이유가 더 컸다. 이들은 영국군이 베쟈족 낙타몰이꾼의 봉급을 후려친 일과 영국의 노예 무역을 금지 조치로 상아 교역이 타격을 받은 것을 이유로 마흐디 군에 합류하였다.[2] 이들은 종교 교리보다는 용맹을 숭배하며 살았다. 베쟈족은 맨발에 칼과 방패만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사자를 사냥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베쟈족은 바까라족과 마찬가지로 반농반목을 하던 반유목민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축 뿐만 아니라 농토로 물려주는데, 이 농토는 야생곡물을 심는 땅이지 일반적인 농토와는 달랐다. 베쟈족은 여름에 날씨가 더워지면 원래 살던 지역 근처 농토에 수수 종자를 뿌린 후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고 날씨가 풀리면 다시 돌아와서 저절로 자라난 수수를 수확해 식사에 곁들여 먹었다. 이들의 농업 기술은 신석기~청동기 시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낙타 사육 기술은 주변 부족들이 와서 배울 정도로 훌륭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낙타의 품종 개량에 노력을 기울여 우수한 품종의 낙타를 많이 생산했다. 보통 낙타들이 올라탄 사람에게 진동이 많이 가해지는 것과 반대로 베쟈족이 키운 낙타는 낙타를 타고 사격하기 좋도록 진동이 적고 안정적이었다.


[1] 사실 베쟈족이 영국+이집트 군을 상대로 한 여러 전적은 줄루족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당시 베쟈족을 지휘했던 오스만 디그나(Uthman Digna)의 경우 영국 육군 박물관에서 대영제국이 상대한 20명의 명장 목록 안에 드는 지장이었다. 다만 줄루족의 경우는 아파르트헤이트 당시 남아공에서 차별받는 민족이었기 때문에 띄워준 점이 없지 않아 있다. 또한 마흐디 운동은 엄연히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으로 가담자 상당수가 노예 무역에 엮여있기 때문에 “제국주의에 맞선 제3세계의 투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기에는 논란이 있다. [2] 수단에서는 전통적으로 노예에게 상아를 세트로 함께 노획한 후 같이 묶어 파는 관습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