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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술가 백남준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백남준은 초기에는 음악가로 활동하다가 1956년 독일으로 이주하여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1960년대 후반에 비디오 아트의 개척자로 떠올랐으며, 텔레비전을 예술의 매체로 활용한 작업들을 선보였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는 "TV Buddha"라고, 부처상이 텔레비전 화면을 보고 있는 형상으로, 기존의 전통과 현대 기술을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2. 유소년기
백남준은 600년 전통 종로 육의전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당대 조선 직물업계의 큰 손이자 대한민국 최초의 재벌 태창그룹 총수였던 친일파 백낙승[1][2]의 아들로 99칸 집에 피아노, 전축은 물론 당시 서울에 딱 2대 밖에 없었던 캐딜락도 있었고, 광복 전에 유치원(애국유치원)에 다녔으며 한국 전쟁의 그 아비규환 속에서도 파인애플을 먹을 정도의 부잣집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돈은 물 쓰듯 쓰는 거다'라고 했다고 한다.[3] 그의 조부 백윤수는 청나라 비단을 독점 판매했던 거부로, 종로5가와 동대문시장 일대의 포목상 절반이 그의 것이었고, 국상 때 만조백관의 상복과 제복을 일체 도맡았을 정도로 섬유업계의 막강한 실력자였다. 후에 그는 직물, 대부업, 제약회사 등을 세웠고, 재산은 한성은행 자본금의 3배에 달했다.백남준은 당시 상류층만 다니던 수송국민학교와 경기공립중학교[4]를 다녔는데, 광복 전 그 시절에 학교에는 수영장과 영사기가 있어서, 당시 학부모였던 대한극장 사장이 학교에서 직접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경기중학교 음악교사로, 후에 이대 음대학장을 지냈던 신재덕에게 피아노를, 작곡가 이건우에게 작곡을 배웠다.
그가 음악을 배우고자 한 계기는 어린 시절 접한 아놀드 쇤베르크다. 부유했던 덕분에 당시로서는 최신 전위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때부터 그는 일반적인 클래식 음악보다는 음악 자체의 틀을 깨는 새로운 음악에 관심이 있었다. 훗날 음악을 전공하면서도 행위음악을 작곡하고, 퍼포먼스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5]
1949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부탁으로 무기 구입을 위해 홍콩으로 갔다는 설이 있는 부친 백낙승[6]의 통역으로 따라가 홍콩의 로이덴 스쿨로 전학한다. 백남준은 이때 영어와 중국어를 배우게 된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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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행위 예술가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여권[8]과 일본 비자가 있었던 백남준은 도쿄로 넘어가서 도쿄대학 미학/미술사학과를 졸업하였다.[9] 그리고 대학원을 당시 현대음악의 메카 독일 뮌헨 대학교로 진학하여 철학 석사와 음악학 석사를 취득했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현대음악 쪽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10] 이 때 같이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윤이상과 친분을 쌓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이 둘은 훗날 김민기 이전의 독일 괴테메달을 수여한 유이한 인물이 된다. [11] 그런데 독일에 있을 때쯤 존 케이지나 조지 마치우나스 등의 영향을 받아 행위예술을 접한 뒤, 행위예술가로 변신하게 된다. 머리카락에 먹을 묻혀 선을 그리는 것도 사실 백남준이 했던 퍼포먼스다. 이후 플럭서스의 일원이 되고, 미국 뉴욕과 독일을 오가면서 활동하기 시작한다.사실 백남준이 1964년 미국 뉴욕에 도착했지만, 아무도 알아 주지 않았다. 무대에서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같은 악기를 때려 부수거나 넥타이를 자르는 행위예술을 하기도 했다. 1967년에 백남준이 누드인 첼리스트 샬롯 무어먼과 공연하다가 샬롯이 경찰에 체포당하면서 논란을 일으킨 사건은 유명하다.[12] 그 결과 백남준은 미국 예술계에서 제대로 된 예술도 못하고 기행을 일삼는 사람, B급 예술가 정도로 치부되었다.[13]
다만 B급 예술가라는 것은, 당시의 미술계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언급일 수도 있다. 당시 60년대에서 70년대에는 서서히 퍼포먼스 예술이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였고, 물론, 현대에는 현대미술하면 알 수 없는 무용과 행위들을 떠올리곤 하지만, 이전 예술은 단순히 회화아니면 조각 정도로, 이루어지는 오브제 중심적인 예술이었다. 때문에, 당연히 그림이나 조각 같은 오브제 없이 예술가의 행위 자체와 관람객이 느껴야하는 '경험' 위주의 예술은 매우 비주류라고 할 수 있으나, 개척기이자 태동기였다. 예술의 범위가 확장되는 시기였다고 생각하면 쉽다.[14]
후에 퍼포먼스예술은 80년대 이후 대중예술에서도 독특한 무대연출(패션쇼, 콘서트, 오케스트라 등)로 발전하여 많은 대중들에게 사랑받는다. 제대로 된 무대연출을 할 줄 아는 아티스트가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면, 퍼포먼스예술이 현대예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도 이것은 종합예술의 영역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는 행위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음악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80년대부터 과학기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TV로 작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러운 이끌림인데 급기야는 로봇을 만든다. 이 로봇의 이름은 K-456으로 똥도 싸고, 말도 한다.[15] 그는 이 로봇의 최후를 연출했는데 뉴욕 한복판에서 같이 산책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난다. 21세기 최초의 참사라고 명명하였다. 최초의 로봇 교통사고다.
4. 결혼
오노 요코 때문에 잠깐 존 레논과 약간의 교분이 있었다고 한다. 백남준은 그 당시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으나 요코는 존을 선택해 그와 결혼했고, 백남준은 꽤 충격 받았던 듯. 존 케이지 등과도 교분이 있었으며 비디오 아트 예술가 이전에는 피아노 행위예술가로도 알려진 바 있다. 무엇보다 연주하다가 도끼로 피아노를 부숴버리던 짓도 곧잘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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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 웨스트베스 작업실에서의 백남준과 구보타 시게코 |
구보타 시게코는 괜히 그 공연을 보러 간 것은 아니다. 그녀도 역시 전위예술, 음악을 하고 있었는데 피아노를 연주하며 전위성을 찾는 정도였다. 그러던 차에 피아노를 도끼로 깨부수는 사람을 알게 되었으니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결국 결혼.[16] 이혼녀[17]인 구보타 시게코가 자궁암으로 불임 진단을 받고 엄청난 수술비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돌아가려는데, 백남준이 본인 명의의 의료보험 혜택을 활용하자며 먼저 청혼을 하고[18] 결혼 후에도 구보타 시게코의 불임 진단과 의료보험과 관련해서는 주변 친구들에게 전혀 입밖으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등의 모습을 보면, 백남준의 구보타 시게코에 대한 배려도 상당했음을 알 수 있으며, 구보타 시게코 역시 이런 백남준의 배려와 사랑에 사후에도 그를 아끼는 마음에서 백남준과의 삶을 회고하는 책 "나의 사랑, 백남준"을 출간하기도 했다. # 다만 양자격인 백남준의 조카와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갈등을 빚어서 이미지 하락을 겪기도 했다. 이후 암 투병중이던 구보타 시게코는 2015년 7월 23일 만 77세로 작고했다.
“나의 사랑, 백남준”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나온다. 그 중 하나가 뉴욕에 살며 돈이 없었는데 한국의 백남준 형님이 1만 달러를 보내줬다고 한다. 아버지의 유산으로, 마지막으로 보내주는 돈이었다. 그런데 백남준은 그 돈으로 생계를 꾸릴 생각이 없었고, 컬러 텔레비전과 골동품이나 사다가 대뜸 불상을 하나 구입했다. 구보타 시게코는 이를 보며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돈을 다 탕진했는데 전시는 하고 싶어했다. 당시 ‘하늘을 나는 물고기’ 전시를 하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 못하고, 사뒀던 불상과 TV로 ‘TV부처’를 만들어 전시한다. 그리고 이 작품이 뉴욕 미술계에서 초대박을 친다. 동양의 오래되고 고고한 상징과 서양의 최첨단 기술이 마주보며 정면으로 충돌하는 이미지가 큰 감흥을 준 것이다. 결과는 좋았지만 백남준은 기본적으로 경제관념이 아주 부족했다고 한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만큼[19] 돈을 어떻게 써야 잘 쓰는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그는 사업가 아버지의 길을 전혀 따르지 않고 음악과 미학에 관심이 깊었다. 다른 일화가 하나 있는데 어쩌다 구보타 시게코가 돈이 생겨서 백남준에게 용돈으로 아껴쓰라며 줬는데 저녁이 되자 돈이 하나도 없다 했다고 한다. 어디에 썼냐고 물으니 받은 즉시 나가서 비싼 치즈케이크를 먹느라 거기에 다 썼다고 답했다.
5. 비디오 아트
B급 예술가로 치부당하는 와중에도 백남준의 인지도는 꾸준히 쌓여가고 있었고, 기괴한 퍼포먼스를 하며 조금씩 시도했었던 비디오 아트는 점점 백남준의 예술 세계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백남준을 자세히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만 알고 있는데,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20][21] 1974년부터 비디오 아트 설치 작업을 선보였으며, 영상이 지상파 TV에 방영되는 등 점점 유명해지고 예전과 다르게 높은 평가를 받는다. 결국 1982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백남준 회고전이 전시되었고, 뉴욕 뿐만이 아닌 미국 예술계에 큰 인지도를 얻게 된다. 이때부터 백남준은 바쁘게 활동하였다. 1979년부터 1996년까지 17년 간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대학 조각과 교수로 있었는데, 뉴욕에서 작품활동하느라 바빠서 학생들을 자주 보지 못해 미안해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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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 June Paik - Global Groove, 1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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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llen Ginsberg Project - Good Morning, Mr Orwell! (Complete Video)[23] |
현대음악가의 전설로 남은 존 케이지가 나오는가 하면[25],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 배우 이브 몽땅이 신나게 탭댄스 추며 노래도 부르고, 현대무용의 거두이자 '뉴 댄스'의 창시자인 머스 커닝햄, 살바도르 달리까지 이곳에 등장한다. 후반부에 진지하게 첼로를 키는 장면은 압권. 전반적인 스토리는"오웰, 당신이 예측한 억압과 광기의 시대는 오지 않았고 우리는 여전히 현재를 잘 살고 있다."로 전개된다.
실제로 소설 1984에는 발달한 과학이 텔레스크린같은 것처럼 오히려 인류를 옥죄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데, 백남준은 발달한 과학을 이용해 예술의 새 지평을 연 셈. 예술의 신기원을 열면서 동시의 영미문화의 대작가를 비판(혹은 비평)하고, 아울러 현대 과학의 발전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갖춘 셈인데, 이렇게 보고 위 동영상을 보면 소름이 쫙 돋는다. 오직 1984년에만 할 수 있는 예술인 셈이다.
1986년에는 <바이 바이 키플링>이라는 작품으로, 러디어드 키플링( 1936년 졸로 당시 사망 50주년)의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다. 동양과 서양은 절대로 서로 어울릴수 없다'(East is East, and West is West, and never the twain shall meet)는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주제로 도쿄, 뉴욕, 서울의 '서구'와 '비(非)서구'의 모습을 순서 없이 뒤죽박죽 방영하면서 동양과 서양 모두 동일한 시간축에 살고 있음을 역설하는, 동양과 서양이 서로 상대를 봤을때 신기하고 자기들 끼리는 비슷비슷해보이는 것 처럼, 제3의 생명체가 봤을떈 동양과 서양 둘은 쌍둥이처럼 같아보인다는 논리이다. 오리엔탈리즘을 철저하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딕 카벳과 류이치 사카모토가 출연하기도 했다. KBS1, TV아사히, WNET 의 세 방송사에서 방송되었다. PBS, NHK에서 방송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다만 <바이 바이 키플링>은 당시 한국에서 상당히 부정적인 평가를 얻었는데, '1등을 달리고 있는 일본인 마라토너의 모습'등 아시아의 문화적 선두주자는 일본이라는 암시가 포함된 장면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노래, 영화등 주류 일본 문화가 금지되어 있던 한국의 입장에서 이런 메세지를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고, 언론에서는 백남준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잠시 일었다. 그렇지만 올림픽을 앞두고서 결국 다시 백남준에게 손을 벌릴 수 밖에 없게 된다.
1988 서울 올림픽 1주일전, < 손에 손잡고>라는 작품으로 2년전의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더 많은 참가국가로 극대화 시키며, 냉전의 시대가 끝났음과, 전세계의 조화와 공존을 담아내면서 백남준의 위성 연작 3부작의 대단원의 막이 내렸다.
한국 대중들에게 '백남준'이라는 예술가는 1984년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하여 비로소 한국에 알려지게 된다. 사실상 한국은 백남준에 대해서 역수입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백남준이 일본에서 뉴욕에 가기까지는 한국에서도 무명이었고, 그가 현지에서 악평을 들을 때도, 유명해지고 세계적인 수준에 오를 때 까지도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백남준보고 세계적인 예술가라고 해도 한국에서는 실감이 안나기 마련이었던 것이다.[26]
그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랴부랴 일본으로 출국하여 독일과 미국 등 세계 여러나라를 떠돌다 34년만인 1984년에 다시 고국을 찾았을 때 한 기자가 '왜 한국 무대를 놔두고 외국 무대에서만 활동하는가?'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문화도 경제처럼 수입보다는 수출이 필요해요. 나는 한국의 문화를 수출하기 위해 세상을 떠도는 문화 상인입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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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다익선, 1988년작,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흔히 비디오아트라 하면 정신사납거나 아름다운 영상물을 생각하기 마련이나 다다익선처럼 TV를 쌓아두는 비디오 설치 작업도 많이 했다. TV를 쌓아 역사 속 유명한 인물들의 이름을 가져와 그 사람들의 조각상을 만들기도 했다. 마르코 폴로, 징기스칸, 알렉산더 대왕 등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동서양을 가로지른 대표적인 인물이다. Television이란 말 자체가 원거리를 가로지른다는 의미가 있으니, TV에서 이들의 모습을 연상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TV부처라는 작업도 유명하다. 불상을 두고, 그 앞에 CCTV를 설치하였다. 명상하는 부처가 TV를 통해 자기 모습을 들여다 보는 굉장히 묘한 분위기의 작품이다. 다양한 배리에이션이 존재한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보여지는 모습, 영상물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비디오 신디사이저라는 작업도 했는데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그에 맞춰 TV에 입력된 영상이 송출되고, 동시에 실시간으로 합성되는 장치다. 일본의 공학자 아베 슈아와 함께 만들었다. 이러한 비디오 신디사이저는 방송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그의 비디오 아트는 바이바이 키플링, 굿모닝 미스터 오웰처럼 영상의 내용적인 면으로도 분석할 수 있지만 영상 작업의 구조와 형태 자체로도 분석할 수 있다. [28]
브라운관 TV의 특성을 이용하기도 했다. 브라운관은 전자총을 쏘아 유리판에 발린 형광물질을 자극하여 영상을 보여준다. 백남준은 이를 직접 조작하여 이미지를 만들어냈는데 TV를 위한 선과 같은 작업이 있다. 또한 자석을 갖다대어 이미지를 조작하거나 심지어는 관객이 직접 자석을 가지고 움직이며 영상을 만들 수 있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29]
비디오 아트 작업을 하는 데 많은 TV가 필요했는데, 활동 초기엔 소니에서 출시한 제품을 쓰다가[30] 어느 시점[31] 이후로는 삼성전자의 협력을 받아 삼성 TV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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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는 백남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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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사이다 CF 1편 - "기억하는 과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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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사이다 CF 2편 "창조하는 현재" |
1995년 8.15 광복 50주년 기념의 일환으로 제작된 칠성사이다 CF에 출연하여 과거 칠성사이다의 CF 영상들과 시대별 영상자료들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었다. 특히 웅장함으로 뇌리에 깊숙히 남는 1편의 BGM은 가수 김수철이 작곡을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0년 1월 1일로 넘어가던 새벽(미국 동부시간), 굿모닝 미스터 오웰 때와 마찬가지로 밀레니엄을 기념한 백남준의 작품 "호랑이는 살아있다(Tiger is Alive)"가 전 세계에 다시 한 번 위성 생방송으로 동시 송출되었다. 한국에서는 CBS와 뉴스 제휴 관계에 있는 MBC에서 중계했는데, 방송을 진행하던 손석희[32] 앵커가 "시청자 여러분, 텔레비전이 고장난 것이 아님을 재차 말씀드립니다."라는 멘트를 여러 번 하기도 했다(...). 사실 비디오아트의 특성상 아무런 코멘트 없이 영상만 보고 있으면 "이거 TV가 고장난 것 아냐?"라고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긴 했다.
2002 한일월드컵 개막식에도 "동방으로부터"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2006년 1월 29일[33]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의 아파트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망 직전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유언은 "맛있어, 맛있어"로 아내가 해준 장어 덮밥을 맛있게 먹곤 얼마 안가 눈을 감았다고 한다. 장례식은 평소 그의 기행(?)에 걸맞게, 슬픈 기운 없이 폭소 속에 이뤄졌는데, 사회자가 젊은 시절 관객들의 넥타이를 마구잡이로 잘라댔던 그의 이야기를 하자 조문객들 모두 폭소했고 그걸 그대로 재현하자는 제안에 참가자들 모두 메고 온 넥타이를 잘라 그의 관에 넣어 주고 웃으며 그와 작별했다.
# # 그의 유해는 그가 주로 활동했던 한국, 독일, 미국에 분산되어 안치되었으며, 한국에 있는 유해는 봉은사에 안치되어 있다. # #
심지어는 사망 후에도 광고 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 사망 2년 후인 2008년 TV 전파를 탄 KT의 'show' 브랜드 광고 중 Mr.Innovative 편은 백남준 선생의 생전 퍼포먼스를 재편집한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지막에는 3D 모델링으로 재구성한 선생의 얼굴과 "쇼를 해라"라는 생전의 목소리가 나온다.
[1]
일제강점기 말 국방헌금을 내고 애국기(愛國機)라고 이름 붙인 전투기를 기부할 정도로 엄청난 거부였다. 이러한 적극적 친일행위 전력으로 친일인명사전 경제 부문에 등재되었다.
[2]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백남준은 방송을 통해 자신의 집안이 친일파였음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면서 '해방이 되었던 날,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며 거리에서 환호를 지를 때 우리 집은 문을 걸어 잠그고 애국기(愛國機)의 기념 엽서를 불태웠다.'고 고백했다.
[3]
사실 부자들이
소비를 많이 하면 금전의 회전율이 높아져서 경제에 도움이 되니 부자들에게는 맞는 말이다.
[4]
이전까지는 경성 제1고등보통학교였다가 1938년에 경기공립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됐다. 지금의 중학교가 아닌 중고등 과정이 통합된
구제중학교 과정이다.
[5]
바이올린을 깨부수는 퍼포먼스는 백남준에게 동양에서 온 황색 재앙이라는 칭호를 달아준다. 클래식 음악이 가지고 있는 권위를 부수는 의미가 있다. 클래식은 예로부터 귀족, 부호들이 향유하는 고고한 이미지가 있는데 백남준은 예술이 가진 권위성으로 일반 대중과 전문가, 권위 있는 사람이 나뉘는 것을 거부했다. 예술이 모두를 향해야 하며, 모든 일상이 예술이라는 플럭서스 운동과도 상통한다. 영상은 그의 행위예술을 존경하는 다른 퍼포머.
[6]
1956년 사망 후 백남준의 큰형이 태창방직을 경영하였으나 5.16 군사 정변 이후, 부정축재 대상자가 되어 태창방직이 국고로 몰수되었다. 이후 온가족이 일본으로 망명 후 귀화했다.
[7]
떠돌이 인생의 영향으로 백남준은 6개 국어를 할 수 있었다.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다. 그는 이 6개의 언어를 혼용하여 말하기도 했으며, 자기만 아는 직접 만든 말을 쓰기도 했다. 인터뷰 영상을 보면 여러 언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특이한 점은 어린 시절 한국(식민지 조선)을 떠나 평생을 지냈기에 1990년, 2000년대가 되어서도 한국어를 쓸 때는 예스러운 어휘와 억양을 썼다는 점. 말투는 굉장히 어눌한 편이다.
[8]
여권 번호가 '7번'이었다.
# 그 당시에 여권 번호는 발행 순서대로 부여되었다.
[9]
수험 준비 기간이 3개월밖에 안 걸렸다는 전설이 있다. 백남준의 가족은 백남준이 법학부나 경제학부에 지망할 거라고 생각하고 입학 절차를 전적으로 백남준 본인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입학 전 도쿄대학에서 학부모 모임을 초대하는 편지에서 백남준이 문학부를 지원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백남준은 훗날 이 시절을 회상하며 그렇게 스파르타식으로 공부를 다시는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시험 결과가 좋아 입학처에서도 이 성적으로 법학을 공부하지, 왜 미학을 하려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도쿄대학의 체제상 지원당시는 문학부로의 지원이었을 것이다. 구체적인 전공은 교양과정을 이수하고 정하는 것. 사실 어릴 때 부터 백남준은 기업인이나 정치가보다는 예술가 기질이 강했다. 어린 시절에 사회주의에 관심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과달카날 레퀴엠 같은 이후의 작업 경향을 봐도 권위주의나 군국주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약간 온건한 윤이상 내지 오늘날의
강남 좌파 같은 느낌이 있었던 듯. 이 때문에 독일 유학 때는 유학비를 제한받을 정도로 부친과 사이가 안좋았다고 한다. 하지만 비디오 아트 작업을 할때 사용할 비싼 텔레비전을 구하는데에는 백남준 집안의 도움이 컸다.
[10]
사실 그는 음악이나 미술을 따로 보지 않은 경향이 있다. 통틀어 예술이라 했으며, 평생 음악, 미술, 행위예술 등 모든 예술 분야를 넘나들고, 이어 붙이는 작업을 했다. 그의 첫 전시는 현대음악과 관련된 작업이었다.
13대의 텔레비전을 전시하여 관객이 직접 작동할 수 있고, 이에 따라 다른 영상과 소리가 재생되는 작품이다. 음악을 전시하겠다는 개념과 함께 근래 유행하는 인터랙티브의 성질도 있는 작업이다. 여담으로 그는 첫 전시장 입구 위쪽에 죽은 소의 머리를 아무 처리도 없이 걸어 둬 주민들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11]
동경대에서 전공한 미학이 음악미학이다. 학부 때의 부전공도 음악사학. 이미 이전부터 존 케이지의 영향을 받았다. 뮌헨대학에서의 공부도 그에게는 성에 차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보다 진취적인 분위기의 프라이부르크 고등음악원으로 옯겨서 현대음악 공부를 더했다고... 뮌헨대학의 석사학위를 완전히 마쳤는지는 자료에 따라 불분명한 부분이 있다.
[12]
샬롯은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당시
뉴욕 예술계는 유죄 판결에 대해 반대하는 여론이 있었다. 결국 당시 주지사였던
넬슨 록펠러(
록펠러 가문 출신, 후에
미국 부통령)는 예술적인 퍼포먼스라면 누드라도 처벌할 수 없다고 법을 개정하게 만든다. 이로써 뉴욕은
행위예술같은 퍼포먼스에 관해서 보다 자유롭게 변했다.
[13]
백남준이 샬롯 무어먼과 나체의 퍼포먼스를 한 이유는 음악에는 섹스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미술, 문학, 공연 등의 다른 모든 예술에는 섹스가 존재하나 음악에서는 찾을 수 없었으며, 백남준은 그 이유가 음악이 가진 위선적인 권위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반골 기질이 강했으며, 권력과 권위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예술 또한 모두가 즐길 수 있고, 또 평범한 모든 일상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따라서 음악에서도 사람의 급을 나누는 권위를 싫어했고, 이에 따라 바이올린이나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 샬롯 무어먼과 나체로 공연을 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샬롯 무어먼과 함께한 작업으로는 TV브라 등이 있다. TV로 만든 첼로를 가지고 연주를 하는 것이다. 물론 첼로는 현도 엉성하고 소리도 제대로 나지 않는다.
이런 퍼포먼스도 했다.
[14]
물론 행위 예술이 남발하고 있는 현대에도 그림이나 조각이라는 '물질'의 존재 없이 퍼포먼스를 예술로 삼는 예술가들은 비교적 높은 수준의 예술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시각에서도, 당시 예술계에 이단아들이자, 맨땅에 퍼포먼스 예술을 시도한 '플럭서스'의 일원이며 그중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했던 백남준의 수준은 결코 낮다고 할 수 없다.
[15]
작동 모습
작동 모습
[16]
두 사람 다 재혼이었다. 백남준에겐 첫번째 부인이 있었는데 사별했다. 진안 이씨로만 알려져있다.
[17]
게다가 전 남편은 다름아닌 백남준의 친구인 작곡가 데이비드 베어맨이었다. 백남준을 기다리다 지친 상황에서 베어맨이 청혼을 해서 결혼하게 된 것. 하지만 전쟁을 겪고 일본인과 독일인을 싫어했던 시아버지 때문에 갈등을 빚고 결국 이혼한다.
[18]
백남준은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불임은 문제가 아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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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유년기 집안에는 한반도에 딱 3대밖에 없던 승용차가 하나 있어 그것을 타고 등하교를 했다고 한다. 그만큼 부유했다. 결정적으로
아버지가
친일파였다.
[20]
볼프 포스텔(Wolf Vostell)이 먼저 TV를 사용하긴 했는데, 포스텔은 TV를 끈채로 부수기만 했다.
[21]
그의 아내 구보타 시게코 역시 비디오아트를 했는데 어느 유명 예술잡지에서 비디오아트를 소개하며 구보타 시게코의 작품을 맨 처음 소개한 적이 있다. 백남준은 이를 보며 굉장히 투덜거리고 자존심 상해했다고 한다.
[22]
신서사이저 하면 떠올리는 현대 음악에 널리 쓰이는 아날로그 신서사이저와는 초기 전기장비란 점에서 뿌리는 같지만 생김새도 사용법도 전혀 다른 물건이다.
[23]
초반부에 등장하는 노래는
로리 앤더슨의 Excellent Birds. 같이 부르는 남자는
피터 가브리엘로 2년 후 가브리엘의 앨범
So에 This Is the Picture (Excellent Birds)라는 이름으로 수록된다.
[24]
이름이 왜 이런지는 영미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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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술한 대로 백남준의 스승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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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 줄거리,
허영만 그림인 만화
비트를 보면 여주인공 로미의 부모가 부자인데 80년대 백남준 관련 작품을 티브이로 보고 세계적으로 알아주는데 도무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모르면 수준이 낮다고 할테고 이런 생각으로 작품을 보면 당황해하더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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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으로 이 점이 백남준이 한국에서 이름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앞서 서술했다시피 백남준은 권위주의나 군국주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어떻게 보면 냉전을 직격으로 맞은 한국 사회에서는 불온시되는 사상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윤이상이
동백림 사건 이후로 한국 대중들에게 빨갱이라는 낙인이 박히며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금기시된 반면 백남준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프로그램이 TV로 방송되기 이전까지는 전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았고, 덕분에 한국 대중들에게 백남준이라는 이름이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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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미스터 오웰도 영상 내용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으나 인공위성을 이용한 최초의 전세계 생중계라는 것에서도 의미가 크다. 특히 1984의 빅브라더를 TV에 대입하면 인공위성을 이용한 방송 송출은 빅브라더의 역량을 훨씬 강화해주는 장치다. 이를 이용하여 조지 오웰에게 안부를 묻는 것 자체가 굉장히 유쾌한 반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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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향 매체의 대표격인 TV 앞에서 시청자가 직접 영상을 조작한다는 의미가 있다. 단순히 시청을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직접 TV에 참여하는 것이다. 백남준은 비디오 캠코더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의 글을 보면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영상을 만들고, 이를 송출하고, 즐기는 것을 꿈꿨는데 오늘날의 유튜브와 같다. 그는 TV를 이용해 작업을 했지만 TV를 두고 TV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원거리의 소통과 영상물/비디오 자체를 생각했다. 일례로 백남준은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작업도 했다. 멀리 떨어진 연인이 달을 보며 서로를 떠올리고, 서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이해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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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출시된 최초의 가정용 TV-비디오 결합기기인 소니 TCV-2010 사용자이며 여기에는 CV-2000 테이프 레코더 시스템이 포함되어 있다. 백남준의 초기 작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지라 일본에서 나온 자료에는 빠지지 않고 이 말이 들어가 있으며 심지어 영문 위키피디아에도 일본 유저들이 주석을 달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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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올림픽 전후 즈음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삼성전자가 금성사의 아성을 뒤엎고 전면으로 치고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으로, 1970년대는 "이코노"텔레비전 등 기술력보다는 경제적 이점에 치중하여 마케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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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MBC 아나운서국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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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2006년
설날 당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