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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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태종의 후궁
명빈 김씨 | 明嬪 金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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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빈 김씨묘 위치 | |||
출생 | 미상 | ||
사망 | 1479년 6월 5일 | ||
묘소 |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산 14 | ||
재위기간 | 조선 명빈 | ||
1411년 11월 22일 ~ 1479년 6월 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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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 구 안동 김씨[1] | |
부모 |
부친 - 김구덕(金九德, ? ~ 1428) 모친 - 장숙택주 영산 신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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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형제 - 김오문(金五文)[2] | ||
배우자 | 태종 | ||
자녀 | 없음 | ||
봉작 | 명빈(明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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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태종의 간택 후궁. 아버지는 돈녕부 판사를 지낸 김구덕(金九德)이며, 어머니는 신경창(辛慶昌)의 딸로 장숙택주이다.[3] 동복동생은 김오문(金五文)으로, 그의 딸이 세종의 첫 번째 큰며느리이자 문종의 첫 정실 부인인 휘빈 김씨이다.태종의 다른 후궁들과 달리 자녀가 없었지만, 가장 장수하여 성종 10년까지 내명부를 지켰다.
2. 생애
1411년(태종 11) 태종은 '일빈이잉(一嬪二媵)'의 빈어 제도를 마련한 후, 김구덕의 딸을 빈(嬪)으로 삼고, 전 제학(提學) 노귀산의 딸과 전 지성주사 김점의 딸을 두 잉(媵)으로 삼았다.이때부터 후궁 제도가 완전히 정착하였다. 태종의 재위 연간에 유일하게 빈(嬪)의 지위에 있던 후궁이었고, 그녀의 거처를 가리켜 명빈전(明嬪殿)이라고 불렀다.[4]
한편, 태종은 명빈 김씨에 대한 처우 때문에 교서교감(校書校勘)으로 있던 방문중(房文仲)의 상언을 받았다.
"
정비(靜妃)와 명빈(明嬪)이 각각 양전(兩殿)을 설치하여, 빈(嬪)으로서 적비(嫡妃)와 나란하게 함은 신(臣)의 이해할 수 없는 첫째이요, 궁중에 창기(娼妓)를 많이 불러들이는 것이 신의 이해할 수 없는 둘째이요, 후궁을 총애하여 큰 집을 많이 지어서 '신전(新殿)'이라 칭함이 신의 이해할 수 없는 세째입니다."
《태종실록》 태종 18년 7월 6일
《태종실록》 태종 18년 7월 6일
조정에서는 "방문중이 망령되게 두 중궁(中宮)을 두었다 하였으니 죄가 있다"고 하여 처벌하기를 주장하였다. 이에 방문중을 전옥서에 가두고 형조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방문중의 말이 '망언'이라고 해도, 당시 태종이 원경왕후와 화합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며, 명빈 김씨의 존재가 중궁으로 비춰질만큼 이례적으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1479년(성종 10) 음력 6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5]
3. 여담
- 불심이 깊어 의빈 권씨 등과 함께 여러 사찰에 시주하고 불상 및 경전을 발원·조성하여 현재까지 남아있는 불교 문화재가 다수 있다.
-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은 보물 제1125호로 1432년(세종 14) 명빈 김씨의 발원으로 제작되었다.
- 경기도 남양주시 수종사에 있는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南陽州 水鐘寺 八角五層石塔)》는 보물 제1808호로 내부에 봉안된 31점의 불상이 해체 조사 결과 드러났다. 이 중 금동석가불좌상, 반가사유보살상, 지장보살좌상과 목조관음보살입상, 지장보살입상, 천왕상 6점의 불상이 명빈 김씨의 발원으로 제작되었다.
- 국보 제282호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의 주요 시주자로 기록되어있다.
- 무지막지하게 장수해서 생애 동안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아홉 임금을 거쳤다. 출생년도는 미상이지만, 이 당시에는 19세만 되도 노처녀 취급을 당했을 시기고 10대 중후반에 결혼하는 게 일반적이라, 80대 중반쯤에 사망한 게 확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