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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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성종의 후궁
귀인 엄씨 | 貴人 嚴氏 |
|
출생 | 미상 |
사망 | 1504년 4월 14일( 음력 3월 20일) |
한성부 창경궁 뜰 | |
본관 | 영월 엄씨 |
휘 | 은조이(銀召史)[1] |
부모 |
부친 - 엄산수(嚴山壽) 모친 - 남양 홍씨(南陽 洪氏) |
배우자 | 성종 |
자녀 |
슬하 1녀 장녀 - 공신옹주(恭愼翁主) |
봉작 | 소용(昭容) → 숙의(淑儀) → 귀인(貴人) |
[clearfix]
1. 개요
조선 성종의 후궁. 아버지는 무관직인 정5품 오위 사직을 지낸 엄산수(嚴山壽)이며, 어머니는 남양 홍씨이다.3남 2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는데, 동복오빠로 선공감 부정을 지낸 엄훈(嚴訓)과 현감을 지낸 엄회(嚴誨), 공조 참의에 추증된 엄계(嚴誡)가 있다. 언니 엄금조이(嚴金召史)는 임영대군의 일곱째 아들인 단계부정 이인(李潾)의 처이다.[2]또한, 기록에 따르면 서누이 엄말금(嚴末今)이 있다.
본명은 은조이(銀召史 또는 銀召伊)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성종의 후궁
정확히 언제 성종의 후궁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3] 그러나 당대의 기록을 보면, 처음에 성종의 후궁으로 입궐하여 정3품 소용(昭容)으로 봉작되었다가 종2품 숙의(淑儀)를 거쳐 종1품 귀인(貴人)으로 승격된 것으로 보인다.1481년(성종 12) 3월 11일에 공신옹주를 낳았는데, 이 딸은 한명회의 손자인 한경침과 혼인하였다. 이때 성종이 후하게 베풀었는데, 옹주의 저택을 수리하는 일이 지나치다고 상소가 올라올 정도였다.[4]
2.2. 폐비 윤씨의 정적?
지난 정유년 3월 20일에 엄 숙의(嚴淑儀)가 정 숙용(鄭淑容)과 더불어 중궁 및 원자를 모해(謀害)한다는 글 두 통과 비상(砒礵) 약간과 압승책(壓勝冊) 한 권을 작은 상자에 담아 가지고 백저포(白苧布) 보자기로 싸서, 권 감찰(權監察)의 집 사람이라 일컫고 권 숙의(權淑儀)의 【권 숙의는 덕종(德宗)의 후궁으로, 여러 숙의를 총괄하여 다스렸다.】 집에 던졌는데, 권숙의의 집 사람이 그 상자를 가지고 대궐에 나아와서 숙의에게 바쳤다.
《 성종실록》 성종 10년 6월 5일
《 성종실록》 성종 10년 6월 5일
1477년(성종 8) 한 통의 투서가 덕종의 후궁인 권 숙의의 집안에 떨어졌다. 당시 권 숙의는 궁중에 있는 여러 후궁들을 총괄하여 다스리는 역할을 맡고 있었고, 인수대비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서의 내용은 "엄 숙의가 정 숙용과 더불어 중궁과 원자를 모해한다"는 엄청난 내용이었다.[5] 이 밖에 여러가지 일로 1479년(성종 10) 왕비 윤씨는 폐출된 뒤 사사되고 만다.[6] 성종의 많은 후궁 중 '엄 숙의'와 '정 숙용'이라고 이름이 언급되었지만, 직접적으로 왕비를 모함했다는 기록이나 증거는 없다.[7]
다만, 《 연산군일기》에 이러한 기록이 있다.
어느날 상이 미복(微服)으로 그의 집에 가서 사홍을 불러 술잔을 올리게 하였는데, 사홍은 임금을 뵙자 절하며 울기를 목이 메이도록 하였다. 임금이 깜짝 놀라 물으니, 사홍은 말하기를 ‘대궐 문이 겹겹이라 스스로 들어가 아뢸 수 없었는데, 오늘 저의 집에서 성주를 뵐 줄 어찌 뜻하였겠습니까.’ 하고, 이어 ‘엄 숙의(嚴淑儀)와 정 소용(鄭昭容)이 모후(母后)를 참소하여 폐비하였다.’고 무소(誣訴)하니, 임금도 또한 울었다. 밤이 들어 환궁하자, 곧 엄·정 두 원(媛)을 불러 손수 죽였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12년 4월 17일
《연산군일기》 연산군 12년 4월 17일
2.3. 비참한 최후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은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폐출되어 죽는 과정에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가 연루되어 있다고 하여 창경궁 뜰에 결박한 후 직접 고문하였다. 왕과 나 61화에서는 실제와 다르게 엄귀인의 침소에 드나들어 직접 철퇴로 때려죽였다.그리고 내수사를 시켜 두 사람을 젓갈로 만들어 산과 들에 흩뿌리게 하였다.[8]
2.4. 사후
귀인 엄씨의 사후, 연산군은 엄씨를 부왕의 후궁으로 보지 말고 그 자식들을 종친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고 명하였다. 이에 따라 외동딸 공신옹주는 옹주의 직첩을 빼앗기고 아산(牙山)으로 유배를 갔다. 또한, 엄씨의 아버지와 형제들도 모두 연좌되었는데 처음에는 엄회와 엄계를 장 1백 대에 처한 후 변방에 보냈지만, 결국에는 머리를 베었다.[9] 엄산수 역시 마찬가지로 참형에 처해졌다. 연산군은 엄산수의 뼈를 부수게 하여 뼛가루를 강에서 날리기까지 하면서 능욕하였다.[10]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왕위에 오른 중종이 직첩을 회복시켰고, 예를 갖추어 다시 장례를 치러주었다.3. 대중 매체
실제로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가 폐비 윤씨를 죽음에 관여했다는 기록이나 증거가 없다. 하지만 드라마상에서는 연산군의 폭군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사극 드라마에선 귀인 엄씨와 귀인 정씨는 반드시 등장시킨다.- MBC 《 설중매》(1984) - 이미지[11]
- KBS 《 한명회》(1994) - 최정원[12]
- KBS 《 장녹수》(1995) - 추영미
- KBS 《 왕과 비》(1998) - 윤유선
- 영화 《 왕의 남자》(2005) - 조련
- SBS 《 왕과 나》(2007) - 한소정
- JTBC 《 인수대비》(2011) - 박탐희
- KBS <7일의 왕비>
4. 가족 관계
- 증조부 : 엄유온(嚴有溫)
[1]
또는 銀召伊이다. 召史는 '소사'가 아니라 '조이'라 읽는다.
[2]
연산군의 부인 신씨가 임영대군의 장녀 중모현주의 딸임으로 귀인 엄씨에게는 폐비 신씨가 언니 엄금조이의 시조카이다.
[3]
정확한 나이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씨의 셋째 오빠 엄계가 1456년생이고 또 위로 맏언니 엄금조이가 있어서 1458년 이후로 태어난 것으로 추정한다.
[4]
성종실록 289권, 성종 25년 4월 4일 임술 2번째기사.
#
[5]
투서는 폐비 윤씨의
동복오빠 윤구의 아내, 여종 삼월, 사비를
창덕궁 구현전에서 문초한 결과 폐비 윤씨 측의 자작극으로 밝혀진다.
#
[6]
사실 폐비 윤씨는 죽음을 자초하듯 여러가지 잘못을 저질렀다. 익명서도 그 중의 하나였을 뿐이지만,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7]
추측하건대 당시에 가장 총애 받는 후궁이었기에 폐비 윤씨가 자신의 정적으로 여겨 미워했을 가능성이 높다.
[8]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 3월 20일 신사 5번째기사.
#
[9]
연산군일기 62권, 연산 12년 6월 14일 임술 4번째기사.
#
[10]
당시 엄산수는 나이 82세로 경국대전에 따르면 연좌하지 않는 것이 마땅한데도 연산군이 경국대전에 따를 수 없다고 하여 연좌되었다.
[11]
태조 왕건에서
아자개의 후처 남원부인 역을 했던 배우
[12]
여인천하에서
창빈 안씨 역을 했던 배우
[13]
정ㆍ종4품 종친의 아내에게 주던 봉작
[14]
임영대군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