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5 15:07:32

마르크스 경제학/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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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론 자체에 대한 비판
1.1. 가치 개념의 문제1.2. 수리적 정교함의 부족1.3. 역사 해석에 대한 비판
2. 마르크스주의자에 대한 비판
2.1. 훈고학적 경향2.2. 환경에 의한 비주류화?

1. 이론 자체에 대한 비판

1.1. 가치 개념의 문제

"한결같이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그렇게 큰 견해차가 있다면..(중략)..누구도 자신의 사회주의를 과학이라고 칭할 권리가 없다."
———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주류경제학자들은 가치 개념과 노동가치론[1]이 과학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대표적인 이유는 가치 개념의 반증 불가능성과 수학적 엄밀성의 부족으로 크게 정리해 볼 수 있다.

먼저 가치 개념의 반증 불가능성의 경우, 노동가치론에 초점을 맞춘 비판과 가치 개념 그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비판은 케임브리지 학파의 창시자 마셜에 의해 간명하게 제기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노동자가 생산한 잉여의 전부가 노동의 산물이라고 가정한 것은 그들이 입증해야 할 가정을 오히려 논증의 근거로 삼는 모순을 범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원료나 기계가 스스로 가치를 창출할 수 없듯이, 노동 역시 노동만으로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오히려 노동과 자본의 두 개 이상의 각종 요소가 결합하여 서로 만나야 가치를 창출하는 경우를 현실에서는 흔히 목격할 수 있다.

신고전학파의 콥-더글러스 생산함수 솔로우 모형 등을 통한 실증분석 결과가 노동가치설을 반박한다는 일각의 주장이 있다. 콥-더글라스 분석에 따르면 나라마다 산업규모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경제성장에 따른 자본의 소득분배율(=성장에 대한 기여율)은 특정 값에 수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2] 하지만 노동가치설은 소득분배율에 대해서 명시적인 주장을 하지 않기 때문에, 소득분배율이 일정하다는 것을 노동가치설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노동가치론은 금융이나 서비스 영역 등을 설명하지 못하며, 2차 산업 중심의 자본주의 시대에나 통용될 수 있었던 개념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노동가치론이 금융과 서비스 영역 등 3차 산업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 역시 마르크스경제학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반박한다. 금융 영역의 경우 마르크스 본인부터가 이미 '이자를 수취하는 자본'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이는 생산자본의 회전율 등을 향상시켜 이윤율을 증가시키는 대가로 생산자본이 만든 잉여가치의 일부를 가져가는 것으로 설명된다. 또한 서비스 영역에 대한 비판의 경우, 마르크스가 설정한 가치와 상품의 개념이 무형 상품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오해에서 나온 것으로, 2차 산업에 대한 설명이 그대로 적용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좀 더 근본적이고 타당한 비판은 가치 개념 자체에 대한 비판이다. 가격과 구분되는 가치란 현실에서 관측될 수 없는 것으로, 현실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관측을 통해 자신을 수정해 나간다는 과학의 가장 기초적인 원칙조차 지킬 수 없는 형이상학적 틀이라고 비판자들은 주장한다. 특히 마르크스경제학에서 큰 중요성을 갖는 이윤율 분석에서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 자신조차 가격으로부터 가치를 도출해낸 후 가치에 입각한 이윤율을 계산하지 못하고, 가격을 가치와 일치하는 것으로 가정하면서 분석을 전개하는 것에서 이러한 비판의 타당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현실에서 관측할 수 없는 것이 과학적 개념으로 사용될 수 없는 것과 직결되지는 않는다고 반박한다. 예를 들어 중력이라는 것은 그 자체를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중력의 작용에 의해 일어난다고 예측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관측할 수 있다면 중력의 존재는 과학적으로 입증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가치 역시 가치법칙의 틀을 통해서만 노동시장 현실과 공황 등을 설명할 수 있다면 가치의 존재가 간접적으로 증명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러한 반박 역시 일견 타당성이 있으나, 역시 이 경우에도 최종적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전형문제이다. 이론의 현실 설명력은 둘째 치더라도, 내적 정합성이 부족하다면 결국 과학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 유형적으로 존재한다 보기 어려운 가치 개념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그 말 대로라면 하다못해 수학적 설명이라도 일관성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들은 그러한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비판의 여지가 있다.

전형문제는 다음과 같은 문제다. 마르크스경제학에 따르면 시장의 가격체계와는 별개로 노동의 가치체계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리고 어떠한 메커니즘에 따라 그러한 가치체계가 시장의 가격체계로 '전형(transform)'한다고 한다. 만약 모든 생산 부문에 대해 자본의 유기적 구성(전체 자본 중에서 가변자본과 불변자본, 잉여가치의 비율을 말한다.)이 일정한 이상적인 상황이라면 시장의 가격체계를 통해 노동의 가치체계를 파악하는게 가능할 것이다.

문제는 현실적으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보기에도 이럴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것이다. 결국 현실에 이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상이할 수 있음을 상정해야 한다. 그런데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상이하다고 할 경우, 가격과 가치체계가 따로 논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는 가격체계를 통해 가치체계를 파악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불가능해졌다면 결국 현실에서 가치체계를 측정할 수 없음은 물론 가치의 무형적 특성상 그 존재부터가 불확실하다고 디스할 수 있다.

노동가치설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애덤 스미스나 리카도같은 경우 이러한 문제 때문에 이 이상 노동가치설에 대해 손을 대길 거부하게 되었고 후대에서는 이를 들어 비과학적이라고 디스하게 되었다.[3] 다만, 마르크스나 그 후학들은 노동가치설을 버리지 않고 계속 이 문제를 연구해왔는데 이들도 여태껏 이러한 가치체계의 증명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그것이 터진 것이 새뮤얼슨이나 네오리카디언같은 오늘날 비주류 포스트케인지언으로 분류되는 학파가 참여한 50년대 이래의 전형논쟁이고.

즉, 가치 개념을 현실적, 그리고 수학적 차원에서 입증해내는데 실패했고 과학의 구성 요소라 할 수 있는 내재적 일관성과 현실 설명력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으며 따라서 유사과학이라는 것이 비판론자들의 견해다. 이 문제가 불거진 이래 5~60년이 지나도록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점은 치명적이라 할 수 있고 이에 대해서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도 인지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주류 경제학계에서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대체의학과 비슷하게 간주한다.[4]

이에 시점간 단일 체계 해석(A Temporal Single-system Interpretation, TSSI)은 전형문제 자체가 마르크스경제학을 오독한 결과라고 한다. 그에 따르면 전형문제에 관한 논쟁은 무의미한 것이 된다고도 한다.

물론, 신해석이나 TSSI의 접근방식의 경우 애초부터 설명 대상이 되어야 할 가치를 전제했다는 측면에서 순환논쟁적 속성이 있다. 사실 이 전형논쟁에 대한 해답의 논의는 어떤 의미로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1.2. 수리적 정교함의 부족

많은 주류경제학자들이 마르크스경제학을 불신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마르크스경제학이 수학적으로 모델링되기 어렵다는 측면이다. 물론 모리시마 미치오, 오키시오 노부오 등 수리경제학자들의 수학적 성과[5]도 그렇고, 오니시 히로시같이 주류 경제학의 방법으로 마르크스 경제학의 주요 개념을 입증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마르크스경제학도 경제학의 일종이기 때문에 많은 수학적 도구를 사용하지만, 현실에서 수집될 수 있는 1차 자료를 수학적으로 가공하여 설명할 수 있는 알고리즘은 분명 많이 발전되어 있지 않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경제학은 주류경제학과 달리 모든 사회적 요소를 수치화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옹호하는 경우도 있지만,[6] 그렇다고 수학적 도구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우월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7] 그러나 사실 수학이 특히 경제학을 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가 있는데 이는 수학을 통해 표준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어, 영어와 같은 외국어의 번역 과정에서 개별학자들마다 사용하는 단어나 개념이 달라지는 문제도 그렇고 심지어는 같은 학자라도 사용하는 용어가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그에 따른 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수학이 요구되는 것이다.


애당초 마르크스경제학에서 말하는 이윤 등의 개념이 자본주의 사회의 측정방식으로는 정확히 측정할 수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 경우 개념의 현실설명력에 대한 반증가능성이 떨어진다는 문제가 있다. 현실을 예측하지 못하는 이론은 가설일 뿐이고, 끈 이론이 과학계에서 욕을 먹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게다가 마르크스주의는 자칭 과학적 이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부실함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러한 현실에는 어느 정도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 자신의 태만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마르크스를 비롯하여 20세기 초까지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당대의 고전파 경제학에 비교하여 결코 수학적 도구를 적게 활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류경제학이 한계효용 혁명 이후 고도로 수학화되면서, 마르크스경제학은 역으로 조절체계 이론이나 원전 해석 등으로 후퇴했고, 이것이 이론의 정체를 불러왔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봐도 이윤율 추계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는 드문 편인데,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이 마르크스경제학의 핵심 개념임을 감안하면 이는 이론적 태만이라 할 수 있다.

노동가치설의 수리적 정합성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전형문제 참조.

1.3. 역사 해석에 대한 비판

마르크스경제학은 기본적으로 경제학이면서도 통일적인 역사 발전론에 근거해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양식을 분석하기 때문에, 이전부터 역사학계에서도 큰 떡밥이 되어 왔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이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과거로부터의 근거에 많은 비판을 받았고, 현재로서는 '원시 공산주의 → 고대 노예제 → 중세 봉건제 → 근대 자본주의'로 연결되는 발전론 자체가 무너졌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아시아적 생산양식' 등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인 마르크스의 주장은 마르크스 경제학, 마르크스 역사학 등의 학계에서 극히 초기부터 반박이 있었고[8], 현재는 비주류 학설이다. 물론 역사적 해석에 있어 최초로 유물론적 접근을 했던 점은 학술사적 차원에서 의미를 가진다.

일단 마르크스경제학에 따른 역사 시대의 분석은 기껏해야 유럽 안에서나 통용될 수 있는 체제라는 비판이 이전부터 가해져 왔다[9]. 애초에 중국의 봉건제는 빠르면 진시황, 늦으면 한무제 때부터 군현제에 의해 대체되었고,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한국 또한 고려 시대쯤 들어서면 이미 군현제가 사회의 주류를 차지했다. 즉 이 두 국가에는 농노제 비스무리한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조선시대의 노비정도? 이 때문에 일본 사학계는 한국에 대해 정체성론을 제시하며 '중세'의 부재를 주장하였다. 심지어 최근 연구에 따르면 유럽 내에서도 그렇게 일관성 있게 적용되지는 않는데, 마르크스가 규정한 봉건제 영역이 교과서적으로 나타는 지역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으며,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 토지 분배나 수취 상태 정도 역시 차이가 있었다. 가령 네덜란드에서는 노동 지대보다 생산물이나 화폐지대가 지배적이었으며, 북중부 이탈리아에서는 자영농이 발달했다.

정치성이 아니더라도 생산 기반에 대한 인식도 문제였다. 마르크스경제학의 생산 관계 정의에 따라 '고대 노예제' 사회로 분류되는 로마 제국이나 한나라의 실제 노예 인구 수는 많아야 10 ~ 15% 수준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득세할 때 추정했던 통계(보통 30% 정도로 예상했다)와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수치이다. 한국에서도 신라 민정문서가 발견되면서 고대 노비 비율이 10%도 안 되는 것으로 밝혀지자 마르크스주의 사학계에서는 크게 당황한 바 있다. 반대의 사례도 있는데, 조선의 노비 비율은 적어도 30% 이상인 것임이 확인되었으므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에 따르면 한반도는 조선시대에 들어서야 고대 노예제 사회의 생산성에 진입한 것이 된다. 당연히 문명의 발전 수준을 고려했을 때 택도 없는 소리이다.

역사 사료가 부족한 고대 - 중세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근대에 대한 마르크스경제학의 가설도 현대 역사학에서는 많이 약화되었다. 마르크스주의의 단선론적 자본주의 발전론에 따르면, 유럽 외의 타 지역이 유럽을 따라가지 못했어야 하는데, 정작 늦어도 15세기까지 중국은 유럽의 생산력보다 앞서 있었으며 유럽이 중국을 능가했다고 확언할 수 있는 시대는 빨라도 18세기 후반이라는 실증 분석이 이뤄졌기 때문. 즉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이해하면 경제 발전의 단계상으로 후진적인 사회가 실제로는 오히려 경제 생산력 면에서 한동안 선진적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현대 경제사학계에서 도달하는 결론은 세계 역사에 일원론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역사 발전 가설의 존재 자체를 회의하고 각국 역사의 개별적인 변화와 발전 과정을 주목해야 한다는 쪽에 가깝다. '고대', '중세', '근대'라는 틀은 점차 역사학계에서 비전문 용어화되어 가고 있으며, 마르크스주의적인 생산력 - 생산 관계의 직선적인 발전론이 깨지면서 '결국 세계는 경제의 발전에 따라 공산주의에 이를 것이다'라는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적 결론도 역사학적으로 볼 때는 위태로운 상황. 경제의 발전 단계가 역사적으로 증명되어야 마르크스경제학의 근거가 뚜렷해질 것인데, 그 부분에서 연결고리를 잃어버렸다는 비판이 있다. 다만 주목할 점은 토대와 상부구조로 이루어진 세계관에서 토대의 변천이 상부구조에 영향을 주고 물질간 대립의 존재를 밝혔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역사론에 대한 위의 비판들은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론을 절대적인것이 아닌, 경향적인 것으로 보완함으로서 일부 반박할 수 있다.)

이 마르크스 경제학에 입각해서 한국사를 해석하는 부류가 뉴라이트인데, 이는 뉴라이트 계열의 인사들이 과거 70년대에 마르크스 경제학을 추종하던 극좌파였기 때문이다. 뉴라이트의 대부인 안병직은 마르크스 마오쩌둥 연구자였고 #, 안병직의 제자인 이영훈은 학생운동을 하다 군대에 끌려간 운동권 출신이었다 #.

이러한 뉴라이트 인사들이 조선을 폄하하고 일제 강점기를 긍정하는 이유도 일본 제국이 조선 왕조보다 더 발전된 시기였다고 믿는 마르크스 경제학에 의한 관점을 갖기 때문이다[10]. 그러나 조선 왕조와 일제 강점기 시기 한반도 인구의 절대 다수가 농민 특히 소작농이었는데 조선에선 관습적으로 소작인한테 한 번 소작지를 주면 계속 (농사를) 짓게 했던 반면 1910년 일제가 조선을 지배한 이후 지주가 소작하는 사람을 매년 바꿀 수 있다고 규정을 바꾸어서 농민의 경작권을 인정하지 않고 지주의 권한을 강대하게 해버고 소작료가 7할에서 9할까지 올라가는 바람에(조선 시대에는 지주와 농민이 소출을 반반씩 나눠먹는 병작반수竝作半收제였다.) 일제 강점기 소작농들의 삶이 조선 왕조 때보다 더욱 고통스러워졌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

2. 마르크스주의자에 대한 비판

2.1. 훈고학적 경향

내가 당신들보다 마르크스를 훨씬 더 잘 이해한다...이것은 당신들보다 텍스트를 더 잘 안다는 뜻이 아니다...내 뜻은 나는 내 뼈에 마르크스를 가지고 있고 당신들은 그를 당신들 입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11]...내가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보자. "이걸 좀 봐요 - 마르크스가 저량을 의미하는걸까요, 유량을 의미하는걸까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렇게 답한다. "C는 불변자본(constant capital)을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는 나에게 불변자본의 철학적 의미에 대한 작은 강의를 한다. 나는 다시 말한다. "불변자본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말아요. 그가 저량을 유량으로 잘못 말한 것 아닌가요?" 마르크스주의자는 말한다. "어떻게 그가 잘못을 할 수가 있죠? 그가 천재였다는 것을 모르나요?" 나는 이 사람은 마르크스주의자일지는 모르지만, 천재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한다는 생각을 한다.
조안 로빈슨, "케인즈주의자가 마르크스주의자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마르크스라는 특정 개인의 중요성이 주류경제학보다 압도적으로 크며, 마르크스경제학이 자본론 등 원전에 집착한다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주류 경제학에서 리카도, 스미스[12] 등이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는 마르크스의 저서인 자본론의 영향력이 과도하게 크다는 점이다. 실제로 고전적인 경제학자의 이름과 저서, 업적을 아는 것은 경제학 관련 교양에서나 필요하지 경제학 전공자나 현장 연구자들에게는 별 의미 없다.

이에 대해서 특정 학자의 영향력이 큰 것 자체가 비판이 될 수 없다는 반론도 있으나 마르크스 경제학 전체적으로 마르크스의 원전 자체의 영향력이 큰 점은 주류경제학과 대비되는 점이다. 주류경제학도 원전이 있으나 그 비중이 그리 크지는 않다. 예컨대 거시경제학을 잘하고 싶다면 케인즈의 저서를 읽을 게 아니라 대학원 책을 펴거나 수학, 통계학, 컴퓨터를 공부해야한다. 물리학을 전공하면서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읽을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 주류경제학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최근 경제학자들이 경제학을 배우려면 '고전 경제학'은 일단 다 버리고 시작하라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최근에 나오는 이론도 벅찬데 곰팡내 풀풀 나는 수백년 전 이론을 다루는 건 경제학사 전공자들뿐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는 정말 수백년의 역사를 지닌 수학이나 물리학과 달리, 경제학은 마셜, 케인스, 사무엘슨을 거치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 지가 불과 100년도 안 된 탓도 있다. 특히 거시경제학은 주류 교과서의 목차 자체가 학문발전의 역사를 그대로 따라가며(고전학파 모형 - 케인스 모형 - 통화주의와 합리적 기대 - 총수요관리정책의 여러 문제들 - 거시경제학의 미시적 재접근 - 실물경기변동이론과 새케인스학파), 미시경제학 역시 고전적인 소비자이론이 맨 앞에 오고 비교적 최신 이론인 정보경제학이 맨 나중에 위치하는 식으로 그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마르크스의 원전이 차지하는 비중보다는 낮지만, 주류경제학 역시 최소 학부 수준까지는 이론의 역사성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으며, 단지 원전이 아니라 수식으로 정리된 형태로 교과서에서 본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는 물리학이나 화학도 동일하다.

2.2. 환경에 의한 비주류화?

마르크스경제학은 분명 지금의 주류가 아니다. 이에 대해서 비판적인 쪽에서는 순수히 이론의 경쟁력 측면에서 주류 경제학이 마르크스 경제학을 능가함으로써 마르크스 경제학을 경제학계에서 퇴출시켰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경제학이 마르크스 이후 주목할 만한 이론적 업적을 달성한 학자를 내지 못했다는 비판도 같은 맥락에서 제기된다.

옹호론자들에 따르면 정치적 환경으로 인해 학문의 발전이 힘들었다고 한다. 슘페터가 아꼈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폴 스위지의 예와 같이, 당시 미국 내에 반공주의가 거셌던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제도권 학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는 경우는 일반적이었다. 사실 다른 비주류 경제학파들은 메커시즘 직접적인 정치적 공격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또한, 새뮤얼슨과 모리시마 간에 이루어진 '가치-생산가격 전형논쟁'은 결국 68혁명이 고조된 상황에서 전개되었다는 측면에서 단순히 이론 내적 문제 뿐만 아니라 이론 외적인 문제가 클 수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비주류 경제학이나 과거 비주류 경제학이었던 학파들(행태경제학, 신제도주의, 케인지안, 오스트리아 학파 등등)이 다들 겪어온 문제다. 그러나 이들은 이 와중에도 자신의 입지를 다져왔고, 결국 이들 중 오스트리아 학파 정도를 제하면 오늘날 주류경제학 내에 포섭되거나 주류경제학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이론적 자원을 쌓아왔다. 이와 관련해 이론 내적으로 마르크스경제학이 가지는 오류에 대한 비판에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점도 문제가 된다. 케인즈학파 역시 가격경직성이라는 가정이 상당한 비판을 받고 어느정도는 그 비판에 대응하지 못해 위축되었지만 맨큐의 메뉴비용이론 등이 주목을 받으면서 이론적으로 다시 부활한 것과 비교해보면 더더욱 문제가 될 만하다. 그리고 정치적 상황으로 보면 공산국가의 연구는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었지 않나는 식의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1] 한 때는 고전파 경제학에서 널리 쓰였지만 이들은 노동가치론을 말 그대로 가정으로 여긴 반면, 마르크스경제학자들은 가치가 실재한다고 여겼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2] 콥-더글라스는 노동의 경우 2/3, 자본의 경우 1/3이라 봤다. 실제 우리나라 역시 90년대 초까지 경제가 성장하면서 소득분배율이 이 값에 수렴한 모습을 보였다. [3] 다만 노동가치설 자체는 일종의 1요소 가정의 형태로 자본의 유기적 구성 같은 세부 내용에 대한 고려 없이 국제무역론 등에서 가정의 일부로서 언급이 된다. [4] 참고로 우리나라에서의 한의학은 말할 것도 없고, 대체의학 역시 미국의 약 80여개에 달하는 대학에서 관련 전공과목을 개설하는 등 연구 대상으로 들어가긴 한다... 지만 서구의 대체의학은 어디까지나 주류 의학을 베이스로 학습해야 한다. 대체의학은 어디까지나 대체의학일 뿐이며 마르크스 경제학의 입지가 바로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5] 오키시오 정리는 실질임금이 일정하다는 제한적인 가정에 기초하여, 자본사용적-노동절약적 기술진보 그 자체만으로는 균형이윤율이 하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논증한 것이다. 물론 가정을 바꾸면 이윤율이 하락하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오키시오의 분석틀은 각각의 가정을 어떻게 완화하느냐를 통해 이윤율에 영향을 미치는 서로 다른 요인들을 비교정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6] 의외로 그 유명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도 이런 주장을 한 적이 있다. [7] 특히 폴 새뮤얼슨의 말처럼 수학이란 결국 또 다른 언어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수학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더 이상 장점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약점이 된다. 영어로는 존재하는 경제학 개념이 한국어로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해보자. 과연 그 개념이 경제를 제대로 설명한다고 볼 수 있을까? 오스트리아 학파가 왜 비주류로 밀려났는지 생각해보자. [8] 국내만 해도 일제강점기부터 백남운의 반박이 있었다. [9] 애초에 마르크스 본인부터 유럽이 아닌 다른 지역, 특히 동아시아 같은 곳의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인정한 바 있었다. [10] 뉴라이트 계열에서 '일제가 조선의 노비들을 해방시켜 줬다.'라는 주장을 계속 하는 이유도 근대 자본주의 사회인 일제가 그렇지 못한 사회인 조선 왕조보다 발전된 사회였다는 마르크스 경제학적 관점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주장에는 일제가 조선을 지배하기 이전부터 조선 왕조에서 자체적으로 노비 같은 천민들을 해방시켰던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오류가 담겨져 있다. # [11]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맹신하는 대신, 마르크스의 사유습관을 익혀서 자기 나름의 결론을 만든다는 뜻 [12] 하이에크는 주류경제학으로 인정 안 받고 어지간한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언급도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