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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관백
도요토미 히데츠구 豊臣秀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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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68년 |
오와리국
치타군 오다카무라 (현 아이치현 치타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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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95년 8월 20일 (향년 27세) |
기이국
이토군 고야산 (현 와카야마현 이토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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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 관백 |
1592년 12월 28일 ~ 1595년 8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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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쇼쿠호 시대의 쿠게나리 다이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양자였으며 한때 후계자였던 인물.1590년대 초반 히데요시로부터 물려받은 관백(関白)직을 역임하며 사실상 도요토미 정권의 이중 권력자로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태어난 후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조선의 광해군과는 다른 운명을 겪은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초기
156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누나인[1] 닛슈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요시 요시후사(三好吉房), 친형제로 임진왜란 도중에 사망한 도요토미 히데카츠(豊臣秀勝), 하시바 히데야스(羽柴秀保)가 있었다. 초명은 지헤에(治兵衛).1570년 오다 노부나가와 아자이 나가마사의 동맹이 깨진 후, 1572년 외숙부 히데요시가 아자이 나가마사의 가신 미야베 케이준(宮部継潤)을 회유하면서 케이준에게 인질 겸 양자로 보내진다. 이후에는 미요시 야스나가(三好康長)의 양자로 가서 미요시 성(姓)을 사용했다. 야스나가의 양자였던 시절은 최소 2년 가량으로 여겨지고 그 가문을 상속하기도 하였기에, 당시의 이름인 미요시 노부요시(三好信吉)로도 알려져 있다.
1582년 혼노지의 변으로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이후에는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후계로 대두되었고, 1584년 무렵 하시바 성을 하사받아 하시바 노부요시가 되었다. 노부요시는 몇 없는 친족이었던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동년 일어난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간의 유일한 전투인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선 참패를 당한 전적이 있다. 전투에서 신중했던 히데요시와 이에야스가 서로 군을 움직이지 않았고 양군은 교착상태에 빠졌는데, 이케다 츠네오키[2]가 나카이리(中入り - 별동대를 이끌고 적 후방이나 본거지를 공격하는 일, 일종의 우회 기습)를 건의해 나카이리 부대의 총대장이 되어 출진했었다. 근데 이를 간파한 이에야스의 역공에 당했고 함께 출진한 이케다 츠네오키(히데츠구의 장인)와 모리 나가요시 ( 모리 란마루의 형)등은 전사, 히데츠구 본인은 겨우 목숨을 건진 채 도망쳤다. 그로 인해 히데요시에게 큰 질책을 들었다.
하지만 이 뒤로는 뚜렷한 실책을 범하지 않고, 오히려 군공을 착실히 쌓는 모습을 보여준다. 키이 정벌, 시코쿠 정벌에서 숙부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 휘하에서 공훈을 세웠고, 그 공적에 따라 오미 하치만을 영지로 받는다. 이 즈음 히데요시의 편휘를 받아 이름을 노부요시에서 히데츠구로 개명한다. 큐슈 정벌에서는 친정에 나선 히데요시를 대신하여 키나이를 수비하는 임무를 맡아 본거지를 수비하였고, 오다와라 정벌, 토호쿠 재분배에도 참여한다. 1591년 재분배에 불만을 품은 쿠노헤 마사자네(九戸政実)가 봉기하자, 히데츠구는 그 진압의 총사령관을 맡아 이에야스의 보좌를 받아 실전에 투입된 토호쿠의 제다이묘들을 후방에서 지휘, 무난하게 난을 진압한다. 그렇게 히데츠구는 착실히 공을 쌓아 오다 노부카츠의 영지였던 이세, 오와리를 하사받으며[3] 100만석의 다이묘로 성장했다.
2.2.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자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와 요도도노의 아들 도요토미 츠루마츠가 연달아 사망한다. 젊은 시절부터 좀처럼 아이가 생기지 않는 체질이었던 히데요시는 나이 50이 넘어 유일한 아들이 죽자 더 이상 아들은 불가능하다 판단하고 여러 양자들 중 가장 가까운 혈족인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임명한다. 12월 28일, 히데츠구는 칸파쿠(관백)이자 토요토미 씨장자에 취임하고, 히데요시는 전임 관백이라는 뜻의 태합이 된다. 원래 히데요시의 저택이었던 쥬라쿠테이에 기거하게 된 히데츠구는 히젠 나고야 성에 틀어박혀 대륙 정벌에 집중하던 히데요시를 대신하여 국내 통치 기구를 정비한다.오다와라 정벌 후 칸토의 아시카가 학교에서 입수한 서적들, 오슈 츄손지에 보관되었던 대장경 등을 모아 필사하고 조정에 책을 헌상하는 등 학문을 장려하였으며 본인도 『 겐지모노가타리』 등 고전의 연구에 힘써 고전 학문을 높게 평가한 공가 귀족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두 번째 양부였던 미요시 야스나가로부터 다도와 가학을 배웠고,[4] 이 중 다도는 센노 리큐(千利休)에게 더욱 배워, 교양인으로 유명했다.[5]
임진왜란과 그에 따라 부과된 역 등으로 인하여 재정난을 겪던 다이묘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통치 안정화를 꾀하기도 하였고 조정에도 많은 지원을 하였다. 애초에 히데츠구는 임진왜란에 긍정적이지 않았는데,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에 따르면, 히데츠구는 히데요시의 대륙 정벌 후 구상에 대한 서신을 받은 후 그 계획은 공중의 누각과 같이 불확실하고, 의심스러운 것이라 비판하였다. 이건 히데츠구만 그런 것이 아니었는데, 히데요시의 정실 코다이인은 고요제이 덴노에게 이를 말릴 어명을 내려달라 요청했고, 고요제이 덴노도 동의했지만 히데요시가 듣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히데츠구를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성질을 가진 자", " 금욕적이고 야심 없는 젊은 무사"라고 평했는데, 죄인을 잔혹하게 죽이는 걸 좋아한다고 까기도 했지만 이는 당대 선교사들이 일본의 형벌이 너무 잔혹하다고 평한 점에서 기인한다. 히데츠구의 죽음에 백성들도 가엾게 여긴 걸 고려하면 전국시대 기준으로는 그리 잔혹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여간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에 집중하는 동안 내정에 집중하던 히데츠구의 통치는 조정과 다이묘 모두에게 긍정적인 평을 들었고, 도요토미 정권은 히데요시 - 히데츠구의 이두 체제에 가깝게 변했다. 조정과 공가, 다이묘들은 히데츠구를 좋아했고, 백성들도 내정을 돌보는 히데츠구에게 긍정적이었으며 부하들의 충성심도 남달랐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히데츠구의 지위는 빠르게 안정되었고, 누구도 히데츠구의 지위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2.3. 히데요리의 탄생
1593년, 히데츠구가 관백이 된지 2년만에 요도도노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낳는다. 히데요시는 매우 기뻐한 반면 히데츠구는 요도도노에게 축하 선물을 보내기는 했지만 천식이 심해져 온천으로 요양을 가는 등 극심한 스트레스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히데요시는 다른 양자들을 타 집안에 보내는 등[6] 집안 정리에 들어갔지만, 이미 관백이자 씨장자였던 히데츠구의 경우는 이제 와서 다른 집안으로 보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히데츠구는 히데요리가 아직 너무 어리다는 점을 들어 자기 딸과 결혼시켜 장성할 때까지의 후견인을 자처하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1595년(분로쿠 4년) 2월에 가모 우지사토가 사망한 후 다이코인 히데요시가 아이즈 92만석의 우지사토의 번을 우지사토의 아들 히데유키에게 상속하지 않는다고 결정을 내렸는데 관백인 히데츠구가 상속해도 된다고 선언하는 일이 있었다. 히데요시는 공식적으로는 다이코라 불리며 은퇴를 한 상태인데 정치제도론면에서 다이코는 전 관백의 존칭에 불과하고 귀족정치의 정점은 어디까지나 관백이므로 관백인 히데츠구에게 결정권이 있다. 그러나 정치제도론에 따른 형식일뿐 당시 도요토미 정권은 다이코인 히데요시에게 있었고 히데요시의 말대로 시행된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자신의 결정에 반대하고 무시한 히데츠구를 용납하기 어려웠고 히데요리의 탄생과 겹쳐 이러한 행보를 보이는 히데츠구를 이미 이때부터 자신과 히데요리의 앞날에 그의 존재가 불안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히데츠구는 선정을 베풀고 인망 높은 걸출한 인물이었다. 육순에 달하는 히데요시였으므로 그의 사후에 어린 히데요리와 측근들로는 결코 제어불가능한 인물로 여겼던 것 같다.
이 와중에도 히데요시와 히데츠구의 표면적 관계는 양호한 것으로 보였는데, 히데츠구와 히데요시가 함께 연회를 열거나, 노가쿠를 즐기는 등의 모습이 나타난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쿠로다 칸베에(黒田官兵衛)에 의해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에 히데츠구가 나서기를 바라고 있다는 말이 전해지는 등 불온한 공기가 돌고 있었다. 히데츠구에게 돈을 빌린 다이묘들 중 눈치가 빠른 자들은 돈을 다 갚고 모조리 관계를 끊었다. 하지만 히데츠구 숙청 당시 상황을 보면 여전히 히데요리보다 히데츠구를 지지한 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2.4. 히데츠구 할복 사건
1595년, 히데츠구가 당시 천황이었던 고요제이 덴노에게 돈을 바치거나 유력 다이묘들에게 돈을 빌려준 것이 포착되자, 히데요시는 모반을 기도했다는 죄목으로 히데츠구를 추궁한다. 그런데 당시 히데츠구는 조정의 대신직인 관백이었고 당시 일본 황실이 돈이 없어서 다이묘들에게 돈을 지원받아 살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7] 천황에게 돈을 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며, 다이묘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은 상위 영주가 하위 영주에게 흔히들 하는 일이었다. 히데요시가 이걸 모를 리 없으므로 다분히 히데츠구를 내치기 위한 억지 명분을 내세웠다는 것이라 볼 수 있다.히데츠구는 해명을 위해 출두하지만 히데요시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결국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7월 8일 히데츠구는 결국 출가해 고야산(高野山)으로 들어간다. 이 시대에 출가한 자는 할복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그는 출가한 관백이라고 해서 젠코우(禅閤)라고 했으며, 도요토미의 성으로부터 호우젠코우(豊禅閤)라고 불렸다. 출가했지만 할복 전까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죽기 직전까지 조정의 정무를 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8]
결국 히데츠구는 1주일 뒤인 7월 15일 세이간사(青巌寺)・야나기(柳)의 사이[9]에서 할복한다. 향년 28세. 사세구는 " 물가 그림자의 소나무의 폭풍이나 친구 물떼새 살지 않게 된 구석의 포구"(= “磯かげの松のあらしや友ちどり いきてなくねのすみにしの浦”)[10] 그 후 그의 목은 산죠가하라에 효수되었고, 그의 처자 30여 명도 그 앞에서 처형되었다.
히데츠구의 아들 츠치마루(土丸)[11]는 갓난아기임에도 목이 잘렸고, 다른 아들들도 전부 10세 미만이었다. 오제 호안의 『타이코기(太閤記)』에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처형대 위에 올라, 어머니의 손을 잡고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을 보고 눈물짓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아내, 측실뿐만 아니라 시녀들, 단순히 히데츠구에 의탁하고 있었을 뿐인 여성들도 처형되었고 그 시신을 한 구덩이에 파묻은 뒤 히데츠구 악역총(秀次悪逆塚)[12]이라 이름 붙였다.[13] 당시에는 보통 할복해서 죽은 사람의 가족까지 처형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지나친 처분이라는 말이 많았다.
당연히 여기에는 계실 이치노다이와 그 딸 미야도 끼여있었다. 모가미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는 측실이라 하나 아직 나이가 어려 히데츠구의 처소에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였지만 그 안에 들어갔다. 모가미 요시아키는 딸을 살리기 위해 애걸했으나 히데요시는 모가미 요시아키의 면회조차 거부하며, 심지어 코마히메 처형 후에도 코마히메의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근신 처분을 내려, 모가미 요시아키를 몇 개월간 강제로 연금시켰다. 이 와중에 모가미 요시아키의 정실부인이자 코마히메의 어머니가 사망했다.[14]
다만 히데츠구의 정실은 이케다 츠네오키의 딸, 즉 이케다 테루마사의 누이였기 때문에 목숨을 건졌다. 모친이 누구인지는 불명이지만[15] 후에 사나다 노부시게의 측실이 되는 딸 한 명과 그녀의 동복 누이도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또한 오고노 츠보네의 딸인 오키쿠도 갓난 아이라는 이유로 외갓집에 맡겨져 살아남았다.
중신들은 처형되거나, 스스로 히데츠구를 따라갔다. 히데요시의 고참 가신으로, 냉정하고 무용이 뛰어났다 하여 후대 창작에서는 관우 포지션을 맡게 되는 마에노 나가야스(前野長康)는 히데츠구를 옹호하였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적남이 할복을 명령받은 직후 그와 히데츠구를 따라갔다. 나가야스의 딸은 히데츠구의 측실로서 처형된 자들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다른 중신이었던 키무라 시게코레(木村重茲) 역시 나가야스와 같은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센노 리큐의 칠철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세타 마사타다(瀬田正忠) 역시 히데츠구의 조언가이자 친우였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당대의 미소년이라 이름 높았으며 "히데츠구의 의제 히데토시의 동성 연인이었다."는 설이 있는 후와 반사쿠(不破万作)를 위시한 히데츠구의 코쇼(= 시동)들은 대부분 주군과 함께 죽기를 선택했다.
많은 다이묘들도 여기에 연루되어 키노시타 요시타카(木下吉隆),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는 유배,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기존의 영지를 몰수, 다테 마사무네와 모가미 요시아키는 저택에 틀어박혀 처분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구명 요청으로 처벌을 면했다.
이 사건으로 히데츠구를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 히데요시는 민심을 크게 잃었고, 히데요시 아들인 히데요리와 모친인 차차에게도 원망의 화살이 가는 등 도요토미 세력 약화에 결정타를 먹인다. 게다가 마에노 나가야스, 세타 마사타다, 키무라 시게코레 등 도요토미를 오랫동안 섬겨왔던 고참 신하들이 할복이나 사형, 유형에 처해지면서 도요토미 정권의 가신단이 크게 줄어들었으며 모가미 요시아키, 호소카와 타다오키, 토도 다카토라, 다테 마사무네 등의 유력 다이묘부터 아사노 나가마사, 미요시 나가후사 등 친족들마저 연루되어 처벌을 받음으로서 히데요시 사후 이들 유력 다이묘와 친족들이 히데요리의 방어막이 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붙는 계기가 되었다.
사건에 직접 연루되지 않았지만 히데츠구의 가신이었던 야마우치 카즈토요, 호리오 요시하루, 나카무라 카즈우지, 다나카 요시마사 등의 다이묘들도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에 붙었다. 이들은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신하였을 때부터 따랐던 중신들로 히데요시도 이들을 깊이 신임하여 이에야스를 견제하라고 미카와의 토지를 하사했으며[16], 원래대로라면 이에야스가 에도에서 오사카로 진격할 때 버텨주는 방패막이가 되었어야 했으나 히데요시가 죽자마자 바로 이에야스에 붙어버렸으며, 야마우치 카즈토요의 경우엔 아예 이에야스에게 영지를 바치기까지 하였다.
예전에는 간신 이시다 미츠나리의 참언 탓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도 많다. 옛 히데츠구 가신들 중 상당수가 이시다 가에 들어갔으며, 심지어 마이 효고 같이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미츠나리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다 전사한 이들도 있다는 것이 그 근거 중 하나. 아무래도 주군을 참소한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더 나아가 미츠나리가 오히려 히데츠구의 구명에 나섰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어찌되었든 간에, 히데츠구가 할복하자 그의 생모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누나인 닛슈니는 이로 인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1627년 저술된 오제 호안의 태합기[17]에 의하면 이 사건이 벌어지자마자 시중의 여론이 극히 차가워져서, 히데츠구의 가솔들을 집단으로 학살한 다음날 거리에는 "오늘의 횡포는 무도하기 짝이 없다. 장래 있는 정치라고 할 수 없는 일이로다. 아아, 이 업보를 부디 조심하시라."(= 今日の狼藉は、無法極まる。行く末めでたき政道にあらず。ああ、因果のほど御用心候え)라는 내용의 벽보가 나붙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로 오사카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숨겨진 히데요리의 아들 도요토미 쿠니마츠까지 찾아서 사형시키면서 이 말이 실현되었고, 백성들은 인과응보라며 쑥덕댔다.
3. 가계
- 정실: 와카고젠(若御前) - 이케다 츠네오키의 딸
- 계실: 이치노다이(一ノ台) - 우대신(右大臣) 기쿠테이 하루스에(菊亭晴季)의 딸, 처형
- 측실: 미야 - 처형
- 측실: 기타노 소바이인(北野松梅院) - 도요토미 주마루(豊臣十丸)의 할머니, 생존
- 측실: 고고노 쓰보네(小督局) - 단노와 뎃사이 다카시게의 딸
- 오키쿠 - 사건 당시 생후 1개월이라서 생존.
- 측실: 오쿠니(お国) - 오시마 신자에몬(大島新左衛門)의 딸
- 측실: 코마히메 - 모가미 요시아키의 딸, 처형
- ?(이치노다이로 추정)
- ? - 생존, 우메가코우(梅小路) 가문에 하가(下嫁)
- 류세이인(隆清院) - 생존, 사나다 노부시게의 측실로 하가(下嫁)
4. 평가
그를 보는 시각에 따라 악행을 일삼은 포악한 권력자와 음모에 휘말린 불우한 청년으로 견해가 갈린다. 과거에는 대체로 전자가 우세했는데, 이는 에도 막부의 도요토미 정권 비하 및 일본 제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미화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전자의 경우 히데츠구가 히데요시에게 숙청당한 불쌍한 피해자인 것과 별개로 도요토미 가문 인물을 좋게 평가하는 것 자체가 에도 막부의 정통성에 위협을 가하는 일이 되었고[18], 후자의 경우 일본 제국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조선 및 대륙 침공의 선구자로 추앙하며 그가 말년에 일으킨 임진왜란까지 미화했으므로 말년의 히데요시를 최대한 좋게 평가하려면 히데츠구 숙청 또한 히데츠구 본인의 자업자득으로 평가해야 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최근에는 그가 선정을 베풀었던 점,[19] 센 리큐를 사사(師事)하고 공가들과 교류한 교양인이었다는 점 등이 조명되면서 후자에 무게를 두는 경향이 있다. 행정 면에서 나름대로 재능이 있었고 많은 지식인들과 교류를 하는 등 배움에 힘썼고 임진왜란으로 많이 어려워진 일본 백성들 삶에도 노력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외에도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당대 일본의 천황이었던 고요제이 덴노가 그의 명복을 빌고자 히데츠구의 어머니에게 원호를 하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한국인들 중에서도 임진왜란을 일으켜 수많은 조선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고 일본 백성들의 피폐해진 삶도 신경쓰지 않은 잔혹한 양아버지에게 비참하게 숙청당한 점 때문에 히데츠구를 동정하는 이들이 많은 편이다.
만약 생존했더라면 히데요시 사후 어린 사촌 동생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숙청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히데요리를 보좌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쉽게 전횡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설령 히데요리를 쳐냈다고 한들 일단은 혈연이기 때문에 도요토미씨의 정권임에는 달라지지 않는다. 이래저래 권력투쟁과 히데요시의 과도한 잔혹함에 희생당한 안타까운 인물.[20]
만약에 히데요시가 히데요리를 버리고 히데츠구를 후계로 남겼으면 도요토미 정권은 역으로 더 오래갔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살아있었으면 이에야스랑 합의 따위는 필요없을만큼 도요토미 가문이 압도적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히데요시 생전의 세력으로 비교하면 도쿠가와 가문은 봉신까지 죄다 영끌해야 256만석이고 그나마 후호조씨 같은 주요 거대 동맹은 이에야스 자기 손으로 숙청내버려서 다른 다이묘들을 동맹으로 끌어오지도 못할 뿐더러, 전봉으로 기반이 불안정해졌기 때문에 자기 세력 내에서 이탈자가 나올 수도 있었다. 반면 히데요시는 직할령만 220만석 이상에, 충성도 강한 봉신만 200만석 이상, 직속 영주라고 할만한 이들이 따로 있었고 히데츠구 같은 친족도 있었다. 거기에 모리 가문 같이 꽉 얽혀있는 동맹에 시마즈 가문 같이 도요토미 가문이 멀쩡했다면 절대 이탈하지 않았을 동맹이 또 200만석이었다.
디테일로 들어가면 이에야스 입장에선 더 절망적인 것이 히데요시 직속 자신들은 상당수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도 히데요리를 옹호할 정도로 도요토미 가문과 강하게 얽히고 복속된 자들인데, 히데요시 직속 영주 중 상당수가 히데요시가 어릴적부터 키워온 무사들을 영주로 만들어준 것이라, 어지간하면 이탈하고 싶어도 이탈할 인맥이나 기반도 부족하기도 했기에 도요토미 가문에 대한 충성이 강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이 당시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들은 후일 후다이 다이묘로 임명되는, 대를 이어 충성하는 자들 아니면 힘 빠지면 이탈할 가능성이 컸다. 구도로 치면 히데요시는 본인 생전에 거의 전성기 에도막부 쇼군가에 크게 밀리지 않는 구도를 세팅해놓은 셈이었다. 괜히 이에야스가 히데요시 생전에 저항 포기하고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들어간 게 아니었던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이런 압도적인 구도를 히데요시는 히데츠구 숙청이란 자폭으로 자기 손으로 다 날려먹은 것이다.[21]
4.1. 왜 히데츠구는 숙청당해야 했는가
에도 시대에는 천도론에 입각하여 히데츠구가 악행을 저질렀고 그로 인하여 숙청당했다는 시선이 존재하였는데 에도 시대의 이야기들은 다음과 같다.- 오사카에서 벌어진 의문의 연쇄 살인의 범인이 그라고도 한다.[22]
- 천황이 죽어서 사냥이 금지되어 있는데도 사슴 사냥을 하겠다고 우기기도 했으며[23] 금녀의 성역이자 금렵구인 히에이(比叡) 산[24]에 여자들을 데리고 사슴 사냥을 갔다가 스님들로부터 제지를 받자 더 날뛰며 원숭이며 너구리까지 잡아 절 본당에 가져와 요리해 먹었다. 이를 전해들은 히데요시는 말문이 막혀있다가 겨우 '저건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고 한다.
- 그 외에도 의붓 딸과의 추문이 있었다. 히데츠구의 계실[25] 이치노다이는 원래 히데요시의 측실이었다가 히데츠구에게 내려졌는데, 히데요시 전의 남편과의 사이에 미야라는 딸이 있었다. 이 딸에게 히데츠구가 손을 댔다는 것. 이 소문을 듣고 히데요시는 모녀를 함께 사랑하다니 짐승이나 할 짓이라며 격노했다고 한다.
- 츠지기리 형식으로 시험 베기를 시행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화들은 대부분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사료에나 등장한다. 오타 규이치가 저술한 『타이코님 군기 중』에 사냥과 살인에 대한 부분은 언급이 되나 그 날짜가 오류이며[26] 사람에 대한 살해, 츠지기리 부분에 대해서도 타인의 죄를 입은 것이라는 서술이 있기에, 양쪽 모두 믿기 어렵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히데츠구가 시험 베기를 하였다는 기록을 남겼지만 그 내용은 죄인에 대하여 시행하였다는 것으로 에도 시대에 처형 과정에서 행해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27] 그렇기에 오와다 테츠오(小和田哲男)는 많은 일화가 창작된 것으로 에도 시대에 히데츠구의 죽음을 정당화하고 나아가 그런 히데츠구를 후계자로 삼았다가 잔혹하게 숙청한 히데요시를 비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악행에 대한 이야기는 부정되었기 때문에 숙청의 명분은 히데츠구의 정책에 대한 히데요시의 반발 혹은 히데요시에 대한 모반 혐의였다고 여겨진다. 모반이 실재한 것이었냐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료와 학자들이 부정하고 있으나 그와 별개로 모반이 히데츠구의 혐의였다는 시선은 존재한다.[28] 물론 히데요시의 히데츠구 숙청을 꼭 편협한 시야로 인한 근시안적 실책만이었던 것은 아니다. 뭐가 되었든 정통한 후계자인 히데요리가 태어난 시점에서 히데츠구는 히데요리의 정적이 될 가능성이 높았고 히데요리의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히데츠구를 배제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히데츠구를 동정하는 의견에서는 흔히 히데요리 탄생 이후 히데츠구가 그 후견인을 자처하며 자신에게 반란의 뜻이 없음을 필사적으로 호소했다는 점에 주목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히데요시의 권력이 건재한 상태에서 히데츠구가 저자세를 취했다는 것일 뿐이지, 히데요시 사후에도 같은 태도를 유지했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전대의 권력자가 살아있을 때에는 별다른 찬탈 의사를 보이지 않던 친족이 그 권력자가 죽고 어린 후계자가 승계받은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권력을 찬탈하려 들었던 사례는 역사적으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히데츠구가 히데요시에게 대항할만한 힘이 없는 상태에서 무력하게 숙청당했고 도요토미 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망했기에 굳이 히데츠구를 숙청할 필요가 없었는데 괜한 짓을 해서 가문의 멸망을 자초했다고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만 실제 당시 도요토미 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히데요시 사후 히데츠구가 히데요리를 위협할 가능성은 충분히 높았고 이를 막을 다른 안전 장치가 따로 없었기에 막연하고 낙천적인 기대만으로 히데츠구를 방치하기는 너무 위험했던 것이다.
이 문제를 숙청없이 깔끔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사실 딱 하나뿐인데 바로 히데요리가 충분히 성장하여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 때까지 히데요시가 권력을 장악한 채 살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하려면 히데요시가 최소한 70대 중후반까지 장수해야 하는데 당시 사람들의 기대 수명을 생각하면 이는 상당히 난망한 목표이다. 실제로 히데요시는 60대 초반에 죽었는데, 60대 초반도 당시로서는 환갑을 넘어선 장수였다. 70대까지 살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와키자카 야스하루, 80대까지 살았던 시마즈 요시히로가 특이한 경우고 당시로서는 80 가까이까지 살아남기를 바라는 건 로또급 확률이다.
정치적 상황 역시 좋지 않았던 것이 일단 히데츠구와 히데요리의 나이가 25세 차이로 히데요리가 20세의 성인이 되었을 때 히데츠구는 45세로 경력의 절정을 달리고 있게 된다. 히데요리가 히데츠구와 대등한 상대로 성장하기에는 나이차가 너무 크지만 그렇다고 히데요리가 전면에 등장했을 때 히데츠구가 자연스럽게 물러나기에는 적은 나이차인 것. 당시 기준으로 보면 히데츠구는 아무리 중립적으로 봐도 잘하면 일본판 문공이 될 수도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일본판 수양대군이 될 수도 있었던, 미래에 대해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던 셈이다.
히데츠구의 숙청 과정에서 유력 다이묘 가문의 딸들이 연루된 것이 히데요시가 인망을 크게 잃은 원인으로 지적되는데 이는 돌려 말하면 히데츠구가 여러 유력한 다이묘 가문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정도로 탄탄하게 자신의 권력 기반과 후계자로써의 입지를 이미 다지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관백으로서 황실 및 귀족들과의 유착도 강했고 그들에게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만약 후계구도를 두고 경쟁하게 된다면 히데요리로써는 불리한 점을 하나 더 갖게 되는 셈.
히데츠구의 숙청으로 히데요시가 죽은 후 도요토미 가문 내에서 히데요리를 보호할 성인 남성이 전혀 없게 되었다는 것이 도요토미가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손꼽히는데 역사적으로 권력자의 친족은 그 가문의 위세를 유지하는 주춧돌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권력자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의 역할도 한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차라리 성인 남성이 여럿이면 상호 견제라도 기대해 보겠지만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가문 내의 성인 남성이 히데츠구 1명(게다가 히데츠구는 나름 입지를 가진 한때의 후계자)인 상황이 되면 차라리 가문 외의 적보다도 더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히데츠구의 친동생은 임진왜란 도중에 병사했고, 외부에서 데려온 양자들은 친자보다 정통성이 떨어져 히데이에를 제외하고 다른 집안으로 입양보냈다.
물론 성인 남성이 여럿이라고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외부의 적이 호시탐탐 노리는 시점에서 내분이 일어나봐야 좋을 것이 없다. 차라리 1명 뿐이라면 이게 1번 일어나고 마는 정도라 풍파가 그래도 덜하다. 심하게 말해서 반쪽으로 갈려서 남은 반이라도 건지는 것과 콩가루가 되도록 갈려서 서로 다 자멸해 아무것도 못 건지는 것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전자다.
가문 내에 성인 남성이 적은 경우와 많은 경우의 사례를 비교해보고 싶다면 시대적으로도 거의 같은 시대에 속하는 조위와 서진을 비교해보면 적당하다. 조비가 자신(과 자기 후계자)의 권위를 위협할 수 있는 조씨 친족( 조조의 후손)들을 지독하게 찍어누르고 때려잡은 사례에 해당하는 것이 조위이고 성격이야 어찌됐든 정치력은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던 조비나 젊기는 해도 어린아이는 아닌 20세 전후에 즉위했고 나름 뛰어난 정치력도 가지고 있던 조예 시기까지는 이를 통해 집중된 권력을 안정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예 사후 양자로써 출신과 정통성이 불분명한데다 나이까지 어린 조방이 즉위하자 당장 권신인 사마사가 조씨 황제의 권위를 위협하기 시작했지만 이를 막아줄 가문 내의 성인 남성 권력자가 변변치 않았기에 결국 제위까지 손쉽게 찬탈당하고 말았다.
이를 통해 집권한 사마씨의 진나라는 조씨의 사례를 반면교사삼아 타성족이 사마씨의 제위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집안의 성인 남자들에게 각지의 영토를 분봉하고 인사권과 군사력까지 허용하여 튼튼한 세력을 구축하도록 하였으며 덕분에 서진이 멸망하는 혼란 상황에서도 일족의 제위를 빼앗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위에 도전할 혈통적 명분을 가진 친족들이 각기 자기 세력을 가지고 있으니 각자 제위를 탐내어 내전을 벌임으로써 혼란 상황이 당연히 도래하는 상황이 만들어져 버렸던 것.
요컨대 가문 내의 성인 남성이 많든 적든 망할 상황이 되면 망하는 것인데 달걀을 한 바구니에 몰아 담을 경우 그 바구니 하나만 지키면 모든 달걀이 안전하지만 만약 바구니를 떨어뜨릴 경우 모든 달걀을 다 잃게 되는데 비해 여러 바구니에 나눠 담을 경우 몇 개의 바구니는 떨어뜨릴 수 밖에 없지만 반대로 모든 바구니를 다 떨어뜨리는 일은 어지간하면 일어나지 않는 정도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히데요시에서 히데요리의 권력 계승 구도에서 히데츠구는 지나치게 강력한 잠재적 위협이었기에 어차피 숙청은 피하기 어려웠다는 것. 히데츠구가 살아있다는 것은 곧 히데요리가 지속적으로 치명적인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물론 히데츠구에 대한 히데요시의 숙청이 지나치게 잔인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 역시 다른 면에서 보면 그 정도로 강력하고 철저한 숙청이 필요할 정도로 히데츠구의 위협은 막대했다. 말하자면 히데요시의 입장에서 히데츠구 숙청 자체는 필연적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고 수단과 정도에서 지나침이 있기는 했으나 그 역시 어느 정도는 필연적이었던 셈이다.
이 부분에서 역으로 보면 만약 히데츠구가 히데요시의 권력을 계승한다면 그 때는 전임자의 아들이라는 강력한 정통성을 가진 히데요리가 히데츠구에 대한 위협으로 자리잡게 된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히데요시의 입장에서 조카를 무리하게라도 숙청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상 갓 태어난 아들이 아닌 조카를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것이고 이 경우 조카가 권력을 승계한 후 아들을 숙청할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위험성이 생기는 것이다.
결국 히데요리의 탄생은 히데요시에게 '도요토미 가문의 권력 유지'와 '아들의 안전과 권력 계승'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딜레마를 안겨주었던 것이며 여기에서 히데요시가 한 선택은 도요토미 가문의 권력 유지에 불안 요소를 만들더라도 히데츠구를 제거하여 아들을 보호하고 아들에게 직접 권력을 물려주는 쪽이었던 셈이다. 애초에 히데요리의 탄생 자체가 히데요시 개인에게는 엄청난 기쁨이었을지 몰라도 도요토미 정권 차원에서는 오히려 진퇴양난의 상황을 만든 함정 카드에 가까웠던 것이다. 게다가 오닌의 난이라는 전례도 있다.
결국 문제는 숙청 그 자체가 아니라 뒷처리인 셈이다. 당장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상으로 지독해서 자기 아내와 장남까지 숙청했지만 그 뒤로도 이에야스의 위상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물론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이었다고는 하지만 다른 기록에는 이에야스 본인이 했다는 설도 있으므로[29][30] 결국은 결과를 보고 판단할 수 밖에 없는데 이에야스의 신하들은 마츠다이라 노부야스의 죽음을 대부분 방조했다.[31] 반대로 히데츠구의 신하들은 히데요시 사후 죄다 이에야스 편에 붙었다. 그 외에 히데츠구가 살아남으려고 돈을 빌려준 다이묘들도 숙청 대상에 올랐는데 이들은 이에야스의 구명으로 목숨을 건졌다.[32] 가뜩이나 이에야스 자체가 이미 천하인을 노릴 세력을 가진 마당에 도요토미 가의 신하들이 많이 넘어갔으니 히데요시 사후 힘의 균형은 순식간에 무너졌다.[33]
코마히메 건만 봐도 히데요시가 히데츠구 일가를 숙청할 당시 얼마나 생각없이 막나갔는지 알 수 있는데, 죽인 일가족의 시신을 대충 묻고 짐승 무덤이라 멸시하는 건 그 처들의 출신 집안에 대한 모욕으로까지 이어지는 문제고,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예비 측실 정도는 모가미 요시아키의 요청대로 친정으로 돌려보내도 상관없는데 굳이 죽이고 근신 처분까지 내린 건 너무 오버였다. 그렇다고 히데츠구의 처자식이 모두 죽은 것도 아니고 살아남은 처자식도 있었으니 줏대도 없었다.
즉, 아무리 봐도 히데요시의 일 처리에 문제가 심각했다는 것인데 애시당초 히데츠구만 해도 굳이 죽이려고 해도 본인만 할복 명령을 내렸으면 되었을 일을 귀와 코도 자르고 숨겨진 밭까지 죄다 작살내며 친척까지 멸문하는 등 너무 일을 크게 벌려서 히데츠구와 관련된 이들을 전부 적으로 돌렸다. 반면 이에야스는 노부야스와 츠키야마도노만을 깔끔하게 쳐내서 가문에 앙금을 남기는 짓을 하지 않았다. 사실 원래 츠키야마도노는 이에야스와 그 가신들이 이를 갈았던 이마가와 가문 출신이라 숙청은 시간 문제였다. 이에야스는 마찬가지로 이마가와에 적대적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었으니 츠키야마도노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5. 대중매체에서
5.1. 일본 드라마
- NHK 드라마 독안룡 마사무네에서는 배우 진나이 타카노리[34]가 연기했다. 드라마와 그 원작이 집필되었을 당시에는 히데츠구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지 않은 시절이어서 무능설이 주류였기 때문에[35] 작가에 따라서는 억울한 측면이 있는 나름의 능력자나 희생자로 그려지기도 하는 다른 작품에 비해서 순수하게 열등감 투성이에 능력은 없는 광기 어린 인물에다가 페도 로리콘으로 전락해버렸다. 한심하게도 삼촌인 히데요시에게 두들겨 맞고 겁을 집어먹는 장면으로 첫등장. 오슈의 쿠노헤 마사자네를 정벌하는 도중 술자리에 모가미 요시아키의 가족을 불러서 시중들게 만들며 자기에게 연줄을 대라고 요구하는데, 그것만 해도 명문인 모가미 씨에게는 굴욕 중의 굴욕이건만 겨우 10살 남짓한 모가미 요시아키의 딸 코마히메를 앉혀놓고 술을 따르라며 희롱하다가 급기야 첩으로 달라고 조르기까지 한다. 아들인 요시야스는 억지로 술잔을 받고 콜록대는 여동생 대신 자신이 술주정을 대신 받으려고 하지만 코마히메에게 성욕을 느낀 히데츠구는 집요하게 코마히메를 노려 희롱을 하고, 옆에서 보던 아사노 나가마사는 어이없었는지 코마히메는 아직 너무 어린 나이이니 좀 큰 뒤에나 데려가라고 하자, "나가마사 자네는 아직 여자 맛을 모르는구만. 활짝 피어난 꽃도 아름답지만 조그마한 꽃봉오리의 맛 또한 각별한 것이야."라고 꾸짖는다. 이에 당황한 요시아키가 말을 더듬으며 코마히메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라서 폐를 끼쳐 가문의 망신이 될까 두렵다고 최대한 완곡하게 거절하자 "그건 내가 천천히 하나하나 가르치겠다!"라고 일갈하여 좌중과 시청자들을 식겁하게 만들었다. 이런 변태적인 모습을 보이는 히데츠구에게 식겁한 모가미 요시아키가 필사적으로 하다 못해 몇 년만이라도 기다려 달라고 하자 열등감이 폭발해서 "지금 날 무시하는 거냐! 날 소홀하게 대접하고도 앞으로 출세할 수 있을 것 같나?! 코마히메를 내놔!"라고 억지를 부려 결국 관철시키고 만다. 결국 코마히메를 데리고 가서 키득거리면서 새된 목소리로 만족해하고, 아이인 코마히메를 데려다 놓고서는 아버지인 요시아키 앞에서 대놓고 정사를 치를 것을 암시하며 자리를 비우라고 한다. 이런 처참한 굴욕을 당하면서도 중앙정계에 연줄을 대야 한다며 필사적으로 참는 요시아키였지만 후일 이렇게 힘들게 줄을 댄 히데츠구는 모반 누명을 쓰고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다.[36] 이 드라마의 히데츠구는 보여준 모습이 있는지라 많은 시청자들이 천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코마히메 같은 일족이 비극적으로 함께 죽임을 당하는 모습이 나온 탓에 몹시 안타까운 모습이 연출되었다. 요시아키는 자기가 권력 앞에 굴했기 때문에 딸이 죽었다며 비통해하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37]
- 공명의 갈림길에서는 인정받고 싶어했던 젊은이의 모습으로 나온다. 역사적으로 야마우치 카즈토요가 히데츠구의 휘하였다는 것을 반영하여 드라마 내에서의 평가가 후한 편이다. 히데요시를 위하여, 포로로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 모습이 나오고 전쟁보다는 행정에서 나름 공적을 발휘한 것도 나온다. 하지만 츠루마루가 생겨난 후 불안해 하는 모습이 점차 보이고,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좌절하여 술로 인생을 보내게 된다. 거기에 관백자리에서 내치려는 것을 안 부하들의 반발과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비참하게 자결하게 된다.
- 사나다마루에서는 능력은 조금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너그러운 모습으로 묘사된다. 여기선 히데요시가 역모 혐의를 씌워 할복시켰다는 사실 대신 히데츠구가 히데요시의 행동에 지레 겁을 먹어 도망간 다음 용서받지 못할 것이 두려워 할복했다는 설을 채택했다. 사형으로서의 할복이 아니기 때문에 카이샤쿠도 없고 그냥 실혈로 죽는다. 츠루마루가 죽고난 뒤 나름 정신을 차려서 제대로 관백의 역할을 수행하려고 했지만, 히로이마루가 태어나자 심각하게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태합으로 남아 계속 관백 업무에 간섭하며, 아직 갓난아기인 히로이마루에게 큐슈를 미리 떼달라고 하는 등[38]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히데요시의 행동에 두려움을 느낀 끝에 결국 관백 자리를 버리고 쿄에 있는 사나다 저택으로 은거한다. 이후 고야산의 세이간지(青巌寺)로 가지만 결국 이 사실은 히데요시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관백의 빤쓰런이라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히데요시는 '모반 혐의가 생겨 출가시켰다가 결백함이 드러나 관백으로 복귀했다'는 형식으로 히데츠구를 복귀시키자고 이야기를 맞춘 후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보내 히데츠구를 다시 쿄로 불러들인다.
- 세키가하라에서는 본인은 등장하지 않지만 정실을 제외한 측실과 가솔들이 참형에 처해지는 장면이 나온다.
- 센고쿠(만화)에서도 츠루마루 탄생으로 숙청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역사와 달리 히데요시를 만나 직접 해명하지만 결국 감정이 폭발해 히데요시의 멱살을 잡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를 말리기 위해 히데요시의 부하들이 몰려오자 간파쿠 직에서 사퇴하고 중이 되어 코야 산에 은거하겠다고 말하며 떠난다. 하지만 결국 할복으로 생을 마감한다. 눈물을 흘린 채로 그의 잘린 머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으로 출연 종료.
5.2.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혁신, 천도 |
창조 |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개발살 당한 것 이외에 군사적으로 큰 실책도 없고, 오히려 행정 면에서 히데요시를 보조한 전적이 무색하게 완벽한 폐급 능력치로 나온다.
능력치는 창조 기준으로 통솔 37, 무용 52, 지략 27, 정치 55.
5.3. 한국 드라마
- 1985년 MBC 드라마 < 조선왕조 오백년> - 임진왜란 편에서는 배우 박찬환[39]이 연기했다. 풍신수차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한자 이름이 豊臣秀 車로 나온다.[40] 풍신수길이 빡돌아서 강제로 할복시키는데 풍신수차는 등장하자마자 할복하면서 퇴장한다.
- 2015년 KBS 드라마 < 징비록>에서는 배우 유세형이 연기했다. 도요토미 츠루마츠가 죽은 틈을 타 네네가 추천해서 관백 자리에 앉았는데 비중은 거의 없다. 하지만 히로이마루가 태어나고 안그래도 불안했던 입지가 더 줄어들게 되고, 결국 히데요시가 전쟁을 반대하는 다이묘들을 숙청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그를 희생양으로 써 모반을 꾀했다는 누명을 씌워 할복 자살하게 만든다. 이때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히데츠구는 히데요시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고 있었는데 히데요시가 "그럼 누가 감히 관백 전하를 모함했다는거냐!"라고 주변에 역정을 내는 척을 한다. 이때 마에다가 한명 있긴 하다고 말해주고 히데요시는 누구냐고 묻는데 대답이 "태합 전하." 히데요시는 "...나?"라고 말하며 뚱하게 있다가 이내 진의를 깨닫고는 마에다를 칭찬하며 "그래 히데츠구. 그럼 내가 할복할까?"라고 묻는다. 히데츠구는 당연히 울며 겨자먹기로 혐의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고 히데요시는 네 영지로 돌아가서 잘못을 생각해보고 할복하라 명한다. 이때 히데츠구는 울면서 자신의 딸만큼은 살려달라고 말하는데 히데요시가 말로는 알았다고 했고 그 뒤의 일이 나오지는 않지만 위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히데츠구의 일가족은 물론 관련된 사람들까지 싸그리 다 죽여버렸다. 사실 작중에서도 알았다고 말하는 히데요시의 표정부터가 이미 그럴 생각 없다는 걸 피력하고 있다.
5.4.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 - 일륜의 데마르카시온 -
여기서는 자신이 관백에 어울리는 남자가 아니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부하들을 닥달하는 다소 찌질한 모습으로 나오고[41], 외모도 관백 시절 초상화를 보다 못생겨 보이게 고쳐 그려놓은 모양새이다. 츠루마츠 사후 숙부인 히데요시가 자신을 후계자로 선포하자 기뻐하나, 곧바로 명나라 정벌의 실행을 선언하자 기겁하며 우려를 표한다. 하지만 이후 히데요시가 명나라 정벌까지 끝내면 천황을 북경으로 옮기고 히데츠구를 명나라 관백으로 삼겠다는 약속을 편지로 보내자[42], "태합 전하께선 나에게 압도적인 기대를 걸고 계신다. 태합 전하의 기대에 부응하리"라며 득의양양하게 웃다가 지병인 천식이 도져서 넘어지고 만다.이후 작고한 할머니 오만도코로를 보러 히데요시가 히젠에서 오사카까지 급히 돌아온다. 그 동안 요도도노는 히데요시 몰래 여러 남자들과 불륜을 맺고 있었고, 어머니의 죽음에 망연자실하며 우는 히데요시 앞에서 "최근 통야참봉을 재시작했다. 머잖아 다시 아이를 안겨드릴 수 있을 것 같으니 태합 전하께서는 안심하시고 명 정벌에 힘쓰시라"고 말한다. 그 모습을 몰래 훔쳐본 히데츠구는 요도도노에게서 섬뜩함을 느끼고 불안감에 떤다.
히데요시가 병으로 누워 있는 사이 히데츠구는 이전의 찌질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고전 수집과 복원, 문화재 보존 등 문화 진흥에 앞장서고 다투고 빼앗는 것만으로는 사람이 퓽요로워질 수 없다고 말하며 뛰어난 교양인이자 위정자로서 걸맞은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43] 한편으로는 차차의 음행을 밝혀내려 뒷조사를 하고, 츠루마츠가 정말로 히데요시의 친자식이 맞는지도 의심한다. 처자식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차차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듣자 히데요시는 고령에 지금 나고야에 있고 차차는 오사카에 있는데 어떻게 임신이 가능한 것이냐 분노하며 히데요시의 적통은 나의 자식들이 이어야만 한다고 다짐한다.
[1]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같은 친누나다.
[2]
오다 노부나가의 젖형제(유모의 아들)이었다. 그런 이유로
혼노지의 변 이후 오다 집안의 후계자를 정하는
키요스 회의의 결정권자 5인중 한 명이 되었으며, 히데요시가 추대한 노부나가의 장손 산보시(
오다 히데노부)를 선택하여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는데 일조한다. 히데요시가 자신의 후계자까지 고려한 히데츠구와 이케다 츠네오키의 딸을 혼인시킨 것은 그만큼 히데요시가 각별하게 생각한 것 같다. 실제로 히데츠구와 그 측실들은 모두 참수했으면서도 이케다 츠네오키의 딸만은 살려준다.
[3]
노부카츠는 구 이에야스 영지로의 전봉을 거부한 탓에
가이에키당했다.
[4]
미요시 가문은 원래
다도와 가학으로 유명했다.
[5]
고요제이 덴노는 히데츠구가
숙청되자 히데츠구의 어머니에게 원호를 내려 위로하기도 했다.
[6]
유키 히데야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7]
오기마치 덴노는 초기에 생계를 꾸리기도 어려워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돈의 지원과 권위를 되찾는 것을 대가로 관직과 활동명분을 주었고, 이 기조는 당시 천황인
고요제이 덴노 때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8]
할복 당시 히데츠구는 현직 관백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출가해도 공무를 계속 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9]
이 자리는 훗날
고야산의 곤고부지 자리가 되었다.
[10]
돈을 빌려준 부하 다이묘들도 빌려간 돈을 갚는 것으로 히데츠구를
손절하려 했고,
고립무원이 된 상태에서 할복을 명령받았으니 외로움이 컸을 것이며, 그 쓸쓸함을 노래한 시이다.
[11]
타케나카 한베에의
오촌 조카이기도 했다.
[12]
다른 이름으로 살생총(殺生塚), 축생총(畜生塚)이 있었다.
[13]
이 곳은 이후 카모카와의 범람으로 황폐화되었다가 1611년 교토의 거상인 스미노쿠라 료이(角倉了以)가 발견하였고, 이에 막부의 허락을 얻어 그 곳에 히데츠구를 기리는 사찰인 즈이센지(瑞泉寺)을 만들었다. 이렇게 단장하는 과정에서 석궤에 적혀있던 秀次悪逆이란 글자를 없앴다고 전해진다.
[14]
병사라는 말도 있고 자살이라는 말도 있지만 원인이 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15]
이치노다이의 딸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확증은 없다.
[16]
미카와는 원래 도쿠가와의 구 영지였으나 이때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간토의 구
호죠 영지로 전봉되었던 상태였다.
[17]
에도 시대에 몇 번인가 금서로 지정되었고, 히데요시에 대한 주요 서적 중 하나이다.
[18]
실제로 상술한 것처럼 히데츠구 사후 히데츠구의 가신이었던 이들이 이시다 가문에 들어갔는데 이 이시다 가문의 당주인
이시다 미츠나리가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의 실질적 수장이었으며 그에 따라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수장으로 하는 동군과 서로 적이었다.
[19]
그의 영지 중 하나였던 오미하치만시에서는 아직도 그를 기리고 있다. 다만 자기 지역 영주였던 무장을 기리는 건 오늘날 일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로 소위 '악인'이나 '모반자' 이미지가 박힌 것으로 알려진
아케치 미츠히데나
마츠나가 히사히데도 그들이 영지였던 지역에서는 아직도 그들을 기리고 있다.
[20]
오다 가가 노부나가의 죽음으로 그렇게 쉽게 무너져 버렸던 것은 노부나가 뿐 아니라 장남
오다 노부타다까지 혼노지에서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정통성을 가진 장성한 장남이 살아있었다면 아무리 노부나가가 죽었어도 오다 가문이 그리 쉽게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노부타다는 상당히 유능한 편이었고 동생들인
오다 노부카츠와
오다 노부타카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고 하니 더더욱 그렇다.
[21]
다만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와 싸울 때는 전투에서 승산은 충분히 있었고 또 실제로 히데요시는 전투에서 이에야스에게 패했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이에야스가 결국 항복해야 했던 건 오다 노부나가의 바보 둘째가 히데요시에게 항복해서 명분이 없었던 탓이었다. 그래서 항복한 뒤에도 이에야스는 히데요시를 만나러 가기 싫다고 자기 영지에서 뻗대고 히데요시는 자신을 만나러 오라며(이에야스가 히데요시를 만나러 오기 전까지는 끝이 난 게 아니었으므로.) 결혼한 상태인 자기 여동생을 일부러 이혼시킨 뒤 이에야스의 정실로 보내고 자기 어머니를 인질로 보냈을 정도였다. 히데요시가 강력한 체제를 구축해서 전 일본을 다스리게 된 것은 이에야스를 굴복시킨 다음의 이야기이다.
[22]
덧붙여 이 사건은
오오타니 요시츠구도 범인으로 의심 받았다. 그가 앓고 있던
한센병 때문에
인육 등을 노린 살인으로 의심한 것 같다.
[23]
이때 '죽은 이에게 공양하기 위해 사슴 사냥을 하니, 살생 관백(셋쇼 간파쿠. 원문에서는 셋소우 간파쿠라 이른다)이라 부른다.'는 낙서가 돌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셋쇼는 일본어로 살생을 뜻하기도 하고 섭정을 뜻하기도 한다. 일종의 말장난.
[24]
고대로부터 히에이 산은 조정과 국가를 비호한다는 진호 국가 사상의 중심,
천태종의 총본산으로서 일본인들에게는 종교적인 성소였으며, 이 산을 통째로 불살랐던 오다 노부나가는 이후 '제육천마왕'이라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5]
측실이라고도 한다.
[26]
공가들의 일기와 대조해보면 사냥을 나갔다고 되어 있는 날에 히데츠구는 주라쿠테이에 있었다.
[27]
그 잔혹함 자체를 문제삼기는 하였으나 일본의 각종 처형법에 대하여 원래부터 잔혹하다고 본
선교사들의 입장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실 실제로 잔혹하기도 했고.
[28]
한편, 근래에 도요토미
정권의 구조에 대한
연구를 행한 야베 켄타로(矢部健太郎)의 경우 히데츠구의 모반은 존재하지 않았고 애초에 히데츠구의 죽음은 숙청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29]
이에야스는 내내 친 오다노선을 견지했지만, 츠키야마도노는 오다 노부나가가 멸망시킨 이마가와 가문 사람이었으니 이에야스가 츠키야마를 숙청하는 건 어쩌면 필연적이었을 지도 모른다.
[30]
거기에 더해 츠키야마도노는 이에야스보다 연상에 남편을 쥐고 흔드는 여걸 타입의 여성이었으므로 정치에도 관여하려 들었고 반면 그렇잖아도 이마가와에 이리저리 흔들렸던 이에야스 입장에서는 권력을 누군가와 나눈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실제로 츠키야마도노를 숙청한 뒤 히데요시가 자기 여동생 아사히히메를 이에야스의 계실로 보내기 전까지 계속 정실부인을 두지 않았고, 아사히히메의 사망 이후 정실을 끝내 두지 않았다.
[31]
이마가와에게는 이에야스의 신하들도 원한이 있더라도 이상하지 않았고 그게 아니더라도 뜨는 해인 오다 가에 붙는 편이 지는 해인 이마가와 가에 붙는 것보다 낫다는 것도 있었다. 거기다 이에야스의 가신들은 대부분 잇코잇키의 편을 들었다가 이에야스에게 용서를 받고(설령 가신들 본인은 잇코잇키가 아니었다고 해도 친척들이 잇코잇키의 편을 드는 경우도 있었다.) 자리를 보전했던 적이 있어서 함부로 이에야스에게 반기를 드러내기도 어려웠다.
[32]
거기에 이들 중 상당수가 이에야스가 서진을 시도할 경우 배후를 칠 수 있는 지역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이 이에야스 편이 되었으니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 측은 쾌진격으로 전장에 도착했다. 사실 이런 자들은 대부분 히데요시로부터 이에야스의 서진을 막아줄 것을 기대받고 그 자리에 앉힌 것인데 히데츠구의 일로 말짱 헛수고가 되었다.
[33]
그나마 마에다 토시이에가 강한 발언권으로 제어했지만 그마저 1599년에 사망하자 이에야스가 대놓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34]
명탐정 코난 실사판 기획에서
모리 코고로를 맡은 적이 있다. 대하 드라마에서는
모리 모토나리에서 라이벌 중 하나인
스에 하루카타역으로 과격한 명연기를 펼친 적이 있고,
군사 칸베에에서는
우키타 나오이에로 부하를 독살하며 폭소하는 무서운 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35]
요도도노에 대한 호칭도 최근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요도기미'로 등장한다. '기미'는 창부에 따라붙는 접미사로 에도 시대의 부당한 멸칭이라는 지적이 있어서, 현대에는 귀부인을 부르는 호칭으로 보다 흔한 '요도도노'로 불리고 있다.
[36]
딱히 요시아키가 바보라서 그런 것도 아닌 것이, 주인공인 마사무네도 히데츠구에게 줄을 댈까 하고 가신들을 불러 고민하며 상의하는 장면이 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런 명군들이 머저리에게 줄을 대려고 할 리가 없으니 히데츠구에 대한 작중의 완전한 바보 묘사와 정권 실세로서의 입지는 모순된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원작자인 야마오카 소하치나 각본가인 제임스 미키가 작품을 집필할 당시에는 히데츠구 무능설/폭군설이 대세였다.
[37]
필사적으로 딸의 구명을 애걸했지만 이성을 상실한 말년의 히데요시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고, 코마히메의 어머니는 딸이 죽은 데 절망해 자결까지 한다. 작중에선 히데요시의 호화 주택가인 쥬라쿠다이에 인질로 잡혀 있던 라이벌 마사무네의 처 메고히메에게까지 찾아가 초췌한 몰골로 "당신은 히데요시의 처 네네와 절친한 사이 아니냐. 구해주기만 한다면 내 평생 다테 가문을 섬기겠다."라며 눈물로 빌 정도. 결국 원한 때문인지 모가미 가문은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동군 편에 선다.
[38]
누가 봐도 명백한 내전 유발 요소다. 히데츠구는 목숨의 위협은 물론 자신의 존재가 도요토미가 통일한 일본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위기감까지 느낄 수 밖에 없다.
[39]
<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권준 역.
[40]
윈도우 한자 변환에서 '차'의 2번째인 次를 써야하는데 1번째로 변환한 것으로 보인다.
[41]
히데츠구는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 실책을 범한 이후 히데요시에게 호되게 꾸지람을 들어서 히데요시 눈 밖에 나는 것을 두려워했고, 이 탓에 성격도 비뚤어진 것이다.
[42]
히데요시는 이때 "나는
닝보에 거처를 둔 후
루손을 넘어
천축까지 나아가겠다."고 망상의 나래를 펼쳤는데, 히데츠구는 닝보가 어디인지 몰라 "거기가 어디야?"라고 어리둥절하는 개그씬이 나온다.
[43]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한때 히데츠구와 같이 일하면서, 히데츠구가 의외로 교양이 있고 선정을 펼치려 노력한다는 점을 높이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