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8:14:31

오닌의 난

오닌의 난
[ruby(應仁,ruby=おうにん)]の[ruby(亂,ruby=らん)]
원인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자 다툼
기간
1467년 ~ 1477년
교전 세력
서군 동군
야마나 모치토요
히노 도미코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아카마츠 마사노리
호소카와 가츠모토
아시카가 요시미[1]
하타케야마 요시히로
시바 요시카도
결과
동군의 명목상 승리
동서 양군 화의
영향
센고쿠 시대 개막

1. 개요2. 발단 및 전개 양상
2.1. 쇼군직을 놓고 일어난 갈등2.2. 다이묘 가문들의 후계자 다툼
3. 경과
3.1. 분쇼 정변3.2. 고료 전투3.3. 폭풍 전야
4. 본격화된 전쟁5. 전란의 끝6.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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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大體今日の日本を知る爲に日本の歷史を硏究するには、古代の歷史を硏究する必要は殆どありませぬ。應仁の亂以後の歷史を知つて居つたら それで澤山です。それ以前の事は外國の歷史と 同じ位にしか感ぜられませぬが、應仁の亂以後は我々の眞の身體骨肉に直接觸れた歷史であつて、これを本當に知つて居れば、それで日本歷史は十分だと言つていゝのであります。
대체로 오늘날의 일본을 파악하기 위해 일본의 역사를 연구할 때에는 고대 역사를 연구할 필요는 거의 없습니다. 오닌의 난 이후의 역사를 알고 있으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오닌의 난 이전에 일어난 일은 외국 역사와 비슷하다고밖에 느껴지지 않는 반면, 그 이후의 일은 진정히 우리들의 신체 곳곳에 맞닿아있는 역사라서 그것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걸로 일본 역사는 충분히 아는 것이라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나이토 코난 - <오닌의 난에 대하여(應仁の 亂に 就て)> 1920년 8월
토크멘터리 전쟁사 98부 - 일본 전국시대 통일전쟁1
1467 ~ 1477년까지 일본에서 일어난 내란. 일본 전국시대의 시작을 알린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키워드는 하극상.

1467년이 일본의 연호로 오닌(應仁) 원년이었으므로 여기서 이름을 따서 오닌의 난이라고 한다. 1469년 '분메이(文明)'로 개원(改元)하고도 내전은 1477년까지 계속돼 학술적으로는 오닌 · 분메이의 난(應仁 · 文明の亂)이라고도 부른다.

미나모토 방계인 호소카와 가문의 17대 당주 호소카와 모리사다는 "호소카와 가에는 옛날에 더 좋은 보물들이 있었지만 전쟁으로 거의 불탔습니다. 아, 태평양 전쟁이 아니라 오닌의 난 때 말입니다."라는 후덜덜한 농담을 하기도 했다.[2] 그는 전 일본 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부친이다.

동시기 조선 세조, 예종, 성종 때로, 이 난이 발발한 1467년은 이시애의 난이 일어난 해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70년과 1473년에 개략적인 내용이 1476년에 사건의 상세 내용이 조선에도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3]

2. 발단 및 전개 양상

무로마치 막부 제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자 분쟁이 직접적 발단이 되지만, 이미 무로마치 막부는 1459 ~ 60년 수도 교토를 휩쓴 조로쿠와 간쇼의 대기근[4] 같은 자연재해나 20년 전부터 진행된 정치 불안으로 흔들리면서 망할 날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 전제 정치를 하려다 가신 아카마츠 미츠스케 손에 암살당하면서 어린 장남 아시카가 요시카츠가 쇼군 좌에 올랐다. 요시카츠 역시 어린 나이에 죽으면서, 동복동생인 8대 요시마사 역시 어린 나이에 등극한다. 조선에도 미나모토노 요시마사([ruby(源,ruby=みなもとノ)][ruby(義,ruby=よし)][ruby(政,ruby=まさ)])로 알려진 인물이다.[5][6]

그러나 요시마사가 사치와 연회만 즐기면서 막부의 실권이 외척 가신단에게 넘어간다. 그런데 가신단이 서로 갈라지고, 구(舊) 세력과 신흥 세력 간의 갈등으로 옮겨 붙으면서 전 일본을 전쟁을 몰아넣었다. 무로마치 시대는 구(舊) 세력인 명문 귀족 무사, 공경(= 문신)들이 새로 등장한 코쿠진(국인, 國人), 상인, 대토지를 소유한 지방 호족들에게 권력을 빼앗기는 과정이다.

단, 신흥 계급 세력도 하극상 형태로 지방에 세력을 잡은 후엔 스스로 자신을 영주(= 다이묘)라고 자칭했기에, 이러한 신흥 세력 출신 다이묘들을 무로마치 막부가 임명한 슈고 다이묘와 구분하여 센코쿠 다이묘라고 이름한다. 구(舊) 세력 내부에서도 슈고다이(守護代)[7]와 유력 가신들이 상전을 쳐내고 스스로 영주 자리에 올랐다가 다시 다른 부하에게 배신당하는, 일본은 말그대로 거듭되는 내전으로 빈사 상태에 빠지고 있었다.

무로마치 막부는 권위를 잃었다. 가마쿠라 막부 때도 그랬지만 무로마치 막부 역시 겐지 출신과 그 인척들인 주요 슈고들의 합의 체제였기 때문에 쇼군의 권위가 태생적으로 약했던 데다가, 슈고들 역시 자기 영지의 토착 가문들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나마 견제로 작용하는 긍정적 측면마저 오닌의 난으로 폭주하며 모든 것이 무너진다.

2.1. 쇼군직을 놓고 일어난 갈등

그런 가운데 무로마치 막부의 7대 쇼군이던 아시카가 요시카츠가 1년 만에 급사하자 그 뒤를 이어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불과 8살의 나이로 쇼군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불과 8살 나이에 쇼군직을 수행할 수는 없었고, 유력 다이묘와 측신, 유모들이 정치를 대신했다. 정치에는 전혀 개입하지 못한 상태에서 스무 살 때에 정식으로 쇼군으로 임명되고 히노 도미코(16세)와 결혼을 한다. 하지만 쇼군 임명 이후에도 그는 정무에는 큰 관심이 없고 다도 예술을 좋아하여[8] 누군가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싶어했다.

그런데 정실 부인인 도미코와의 사이에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자, 요시마사는 29살 때 출가했던 동생인 기진(義尋)[9]에게 쇼군직을 양위하겠다고 약속한다. 기진은 형에게 만약 아들이 생기면 쇼군직을 둘러싸고 싸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이를 고사했지만 요시마사는 내가 아들이 생기더라도 너에게 쇼군직을 다시 내놓으라고 요구할 일은 없다라고 재차 설득했기에 기진은 환속하여 아시카가 요시미(足利義視)로 이름을 바꾸고 형의 양자로 입적하고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그 후견인으로 유력 다이묘 관령(= 간레이)[10] 호소카와 가츠모토(細川勝元)가 뒤를 봐주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다음해인 1465년, 히노 도미코가 아들을 출산, 어떻게 해서라도 아들을 쇼군으로 만들려는 도미코는 호소카와가와 어깨를 겨루는 실력자 시시키[11] 야마나 소젠(山名宗全)에게 백업을 의뢰했다. 그러나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후계자 결정을 못 하고 망설이자, 히노 도미코와 아시카가 요시미가 갈등하고 이 갈등은 원래부터 라이벌이었던 두 다이묘의 대립으로 이어졌으며, 급기야는 전국 다이묘가 동군과 서군으로 갈라져 무려 27만 명의 군사가 교토에 몰려와 대전투가 벌어지는 내란으로 커져가게 된다.

2.2. 다이묘 가문들의 후계자 다툼

한편, 오닌의 난을 부른 또다른 원인은 유력 다이묘 가문들의 후계자 다툼이었다. 쇼군의 후계자 문제도 있었지만, 다이묘의 집안에서도 상속 문제가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하타케야마(畠山) 가문의 상속 다툼. 그런데, 다이묘 집안의 상속이 결정되면 쇼군이 그것을 승인하는 것이 무로마치 시대의 원칙이었는데, 그 승인권을 가진 요시마사가 이쪽으로 기울고 저쪽으로 기울고 했다. 이 때문에 쇼군에 대한 신뢰감이 무너졌다.

하타케야마 가문에서도 쇼군과 비슷한 문제가 생겨났다. 하타케야마 모치쿠니(畠山持國)는 아들이 없자 동생 모치토요(持富)를 양자로 들였지만, 몇 년 뒤에 친아들이 태어나자 양자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을 취소하고 친아들인 하타케야마 요시나리(畠山義就)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쇼군 요시마사도 이를 인정했다. 그러나 하타케야마 가문의 유력 가신인 진보(神保) 씨 등이 이를 납득하지 않고 모치토요의 아들인[12] 하타케야마 미사부로(畠山彌三郞)를 후계자로 지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454년, 하타케야마 모치쿠니는 미사부로파 가신 진보 쿠니무네(神保國宗)를 주살했다. 이리되자 미사부로는 동생과 함께 호소카와 카츠모토(細川勝元)와 야마나 소젠(山名宗全; 山名持豐)에게 도망쳤다. 카츠모토와 소젠은 미사부로를 지지했기 때문에 되려 상황이 역전되어 미사부로파가 모치쿠니를 습격했고 모치쿠니는 도망쳐서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요시나리도 도망쳤고 쇼군 요시마사는 미사부로를 하타케야마 가문의 후계자로 인정했는데…

요시마사의 변덕이 일을 더 키웠다. 요시마사는 미사부로를 지지한 하타케야마 가문의 가신들을 처형하라는[13] 명령을 내렸고 호소카와 카츠모토가 이를 받아들이자 야마나 소젠은 여기에 강력하게 반발했다. 쇼군에게 반기를 든 탓에 빡친 요시마사가 소젠을 체포하라고 명령했지만, 카츠모토가 열심히 말린 덕에 사면되어 소젠이 타지마로 내려가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이로 인해 미사부로는 다시금 후계자 자리에서 쫓겨났고, 요시나리가 하타케야마 가문을 접수했다.

이 난리통에 하타케야마 모치쿠니가 1455년 사망하고, 요시나리가 정식으로 하타케야마 가문을 계승하게 되었다. 요시나리는 눈엣가시같은 미사부로 세력을 제거하려고 들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는데, 요시나리는 쇼군인 요시마사에게 보고도 안 한 채로 미사부로를 공격하는 게 쇼군의 지시라고 구라를 쳐버렸고(!), 그런 지시를 내린 적이 없던 요시마사가 빡치는 건 당연한 일. 이로 인해 요시나리는 쇼군의 신임을 잃어버렸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요시나리는 호소카와 카츠모토의 영지인 기즈를 공격했다. 이로 인해 카츠모토는 빡쳐서 미사부로의 편을 들어 요시나리를 추방해버리려고 계획했다. 반면 야마나 소젠은 요시나리와 친밀해졌다.

1459년, 미사부로가 사면되고 교토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그만 병으로 죽고 말았다. 카츠모토와 미사부로의 가신들은 미사부로의 동생 하타케야마 마사나가(政長)를 옹립하게 되었다. 1460년 쇼군 요시마사는 다시 이번에는 마사나가를 하타케야마 가문의 후계자라고 인정하는 바람에 요시나리는 추방되었고, 하타케야마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2년 여간 내전이 벌어졌다.

이외에도 토가시(富樫), 오가사와라(小笠原), 롯카쿠(六角) 등의 가문에서 가문 내 분쟁이 일어났는데 막부라도 나서서 이걸 잘 조정했다면 몰라도 오락가락하고 일관성없는 행보를 보인 것이 결국 오닌의 난의 발발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후계 계승 문제와 관련해 분쟁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것에는 당시 일본에서 상속 제도의 변화가 일어난 것과 관련이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까지만 해도 기본적으로 상속은 균분 상속으로 딱히 한 명에게 가문을 몰빵시켜주는 형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체계에서는 대가 내려갈수록 각각의 가문은 점차 세분화되어 약화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이 시대 사람들도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점차 한 명에게 상속을 집중시켜서 가문을 유지하려는 형태로 상속 제도가 바뀌어갔다. 이 경우 딱히 장자에게만 상속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 사람이 상속받게 되면 나머지 형제들은 상속자의 가신이 되는 구조였다. 그런데 이렇게 되다 보니 적자로 상속을 받지 못하면 실로 쩌리나 다름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문제가 있었다. 더구나 이러한 문제를 보다 심각하게 한 것은 상속을 경쟁하는 형제들이 각각 자신들만의 가신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상속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고 본인이 쿨하게 양보하고 싶어도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계승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3. 경과

3.1. 분쇼 정변

이런 가운데 1466년 7월 23일, 쇼군 요시마사는 돌연 가신인 이세 사다치카(伊勢貞親)와 키케이 신즈이(季瓊眞蘂) 등의 간언에 따라 시바(斯波)가의 후계자 자리를 시바 요시카도(斯波義廉)에서 시바 요시토시(斯波義敏)로 바꿔버렸다. 8월에는 시바 요시토시를 에치젠, 오와리, 도토미의 슈고로 임명했다. 이는 야마나 소젠을 자극했다. 이세 사다치카는 야마나 소젠이 모반하려 한다고 소문을 퍼트렸고, 소젠은 아시카가 요시미의 후견인이었던 호소카와 카츠모토와 손을 잡고 정변을 일으켰다. 9월 6일에 일어난 이 정변의 결과로 이세 사다치카는 오우미로 추방되었고, 쇼군 요시마사의 다수 측근들이 권력에서 밀려나면서 어쩔 수 없이 요시마사는 독자적으로 정치를 펴는 게 불가능해졌다. 권력은 이제 소젠과 카츠모토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3.2. 고료 전투

1466년 12월, 야마나 소젠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하타케야마 요시나리가 느닷없이 대군을 이끌고 교토로 올라와서 교토 북쪽의 지장원에 진을 쳤다. 이듬해인 분쇼 2년 1월 2일(1467년 2월 6일), 소젠에게 설득당한 쇼군 요시마사는 관령 하타케야마 마사나가와 호소카와 카츠모토의 양해도 없이 요시나리를 고쇼로 불렀다. 이어서 요시마사는 마사나가가 관령 관아에서 매년 정월에 행하는 의식인 '오나리'를 강제로 중단시켰다. 이는 요시마사가 마사나가를 하타케야마 가문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라는 의미의 암시였고, 결국 3일 뒤 요시마사는 소젠의 저택에서 열린 연회에서 요시나리를 하타케야마 가문의 후계자로 인정하면서 마사나가에게 교토의 저택을 양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빡친 마사나가는 관령직을 사퇴했고, 야마나 소젠은 낼름 자신의 파벌에 속한 시바 요시카도를 관령으로 임명했다. 이렇게 되자 소젠에게 권력이 급속도로 기울 것을 우려한 호소카와 카츠모토가 고쇼를 점거하고, 쇼군 요시마사에게 소젠 토벌령을 내리게 하려 했으나 요시마사의 부인인 히노 도미코가 먼저 이런 의도를 간파하고, 소젠에게 정보를 흘리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린 소젠은 그의 저택 근처의 동맹 슈고 다이묘들의 병력을 규합해 고쇼를 포위하고, 카츠모토가 하려고 했던 일을 똑같이 실행했다. 소젠은 쇼군 요시마사에게 호소카와 카츠모토와 하타케야마 마사나가를 추방해달라는 청원을 했다. 요시마사는 카츠모토의 추방에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다른 다이묘들이 중립을 지킨다는 전제하에서 마사나가를 공격하는 것에는 동의했다.

상황이 악화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마사나가는 수비하기가 어려운 자신의 저택을 불싸지른 후, 고료 신사로 병력을 이동해 전투에 대비했다. 한편 소젠은 천황과 상황, 황태자를 고쇼에 밀어넣은 뒤 마사나가를 쥐어패기 위해 일어났다. 요시마사는
"이 싸움은 하타케야마 가문 싸움이니까 절대 다른 다이묘들은 끼어들면 안된다"
라고 명령을 내렸으나 소젠편에 선 다이묘중에 이 명령을 지킨 다이묘는 없었다. 반면 호소카와 카츠모토는 마사나가를 버렸다. 이때문에 카츠모토는 전투를 피했다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결국 카츠모토의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마사나가는 혼자서 요시나리와 소젠 등을 상대하다가 역부족이 되자 한밤중에 불을 지르고 자살한 것으로 위장해 도망쳤다. 결국 권력은 완전히 소젠에게로 넘어갔지만 희한하게도 카츠모토는 교토에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 뿐만 아니라 비상시국이라는 명분으로 관령이 하는 직무인 병력 소환이나 훈장 수여 등의 임무를 자기 편 다이묘들에게 시행했다.

3.3. 폭풍 전야

고료 전투 이후, 카츠모토는 시코쿠 등 자신의 편에 선 9개 지역(쿠니)의 병력을 교토로 소환해 긴장감을 드높였다.

한편 고료의 전투로 교토가 난리통이 되어서 좋지 않다는 이유로 3월 5일에 연호가 '분쇼'에서 ' 오닌'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카츠모토파 병사들이 야마나파의 병사들을 공격해 연공미를 약탈하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자, 아시카가 요시미가 조정을 시도했다. 교토에서는 호소카와 쪽 병사들이 각지의 다리를 불태우고 4개 문을 닫았다. 5월에는 카츠모토 파인 전 하리마 슈고 아카마츠 마사노리가 하리마로 침입해 이를 탈환했다. 또한 타케다 노부카타, 호소카와 시게유키가 와카사에 있던 잇시키 가문의 영지로 쳐들어가고, 시바 요시토시는 에치젠을 침공했다. 미노의 토키 가문 일족인 토키 마사야스도 잇시키 가문의 영지였던 이세를 침공했다.

5월 26일에는 무로마치의 서쪽에 있었던 잇시키 요시나오 저택의 정실방(正實坊)을 쇼신인 코센이, 실상원(實相院)을 타케다 노부카타가 점령하고, 노부유키와 호소카와 시게유키의 군사들이 저택을 습격하여 잇시키 요시나오는 습격 직전에 탈출하고, 저택이 불타는 것으로 교토에서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카츠모토는 숨어있었던 하타케야마 마사나가를 포함해 전국의 동맹자들을 호출하는 한편, 무로마치를 전화에서 지킨다는 명목으로 쇼군 일행을 확보하고, 자신의 저택에 본진을 차렸다. 무로마치를 탈환한 카츠모토파는 서군쪽에 섰던 막부 봉행중의 책임을 추궁했고, 6월 11일에 온쇼를 관할하던 이노오 스루카즈(飯尾爲數)를 살해했으며 8월에는 만도코로 (政所)의 집사 대리였던 이세 사다후지를 추방했다.

소젠은 5월 20일에 평정을 열고, 이츠츠지 거리 대동궁(大東宮)에 진을 쳤다. 서군은 관령 시바 요시카도의 <관령명령장>에 의한 지령을 수행했다. 양군의 위치 관계에 따라 호소카와 측이 동군, 야마나 쪽을 서군으로 칭하게 되었다. 《오닌기》에 따르면 동군이 16만, 서군이 11만의 병력을 동원했다고 하나, 과장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교토에 집합한 장수들은 호쿠리쿠, 신에츠, 토카이와 큐슈의 치쿠젠, 분고, 부젠 지역이 대다수였다. 지리적으로는 호소카와 일족이 키나이와 시코쿠의 슈고를 맡고 있었던 데다가 그 근처 지역에도 자신들의 세력인 슈고를 배치했었던지라 동군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서군은 야마나를 시작으로 호소카와와 그 동맹 세력의 대두를 경계하던 지방 세력들이 가세했다. 그래서 서군은 쇼군 요시마사의 측근이면서도 타케다 노부카타와의 갈등 때문에 가담한 잇시키 요시나오라든지, 롯카쿠 타카요리나 토키 시게요리 같이 상황에 따라 가담한 자들도 많아 통솔에 불안이 남아있었다.

한편, 간토 도호쿠, 규슈 남부 등의 지역은 이미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지역내 유력 무사 가문들이 대규모 분쟁을 일으켜, 중앙에서의 분쟁과는 관계없이 별도의 전란 상태에 돌입했다. 가령 간토 지역은 1455년부터 시작된 교토쿠의 난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무로마치 막부는 막부가 있는 교토에서 거리가 먼 간토 지방의 10개 쿠니는 가마쿠라구보(鎌倉公方)라는 관직을 만들어 쇼군을 대행해서 통치하도록 맡겨두는 시스템이었는데, 이 가마쿠라구보였던 아시카가 시게우지와 무로마치 막부 측 인사였던 야마우치 오기가야츠의 주도권 다툼이 벌어졌고 1483년까지 계속되었다.

4. 본격화된 전쟁

5월 26일, 소젠 저택의 남쪽에 있었던 이치조 오미야(一條大宮)의 호소카와 가쓰히사(細川勝久)의 저택을 시바 요시카도의 부하인 아사쿠라 다카카게, 가이씨 등의 서군이 쳐들어갔다. 이들은 응전한 호소카와의 동군과 격전을 벌였고, 동쪽에서 원군으로 온 교고쿠 모치키요(京極持淸)를 거꾸로 물리치기도 했다. 거듭 아카마쓰 마사노리가 남하해 오오기마치(正親町)를 지나 이노쿠마(猪熊)를 치고, 시바씨의 군대를 끌어들이자 호소카와 가쓰히사는 그 틈을 타서 동쪽의 호소카와 시게유키의 저택으로 달아났다. 가쓰히사의 저택을 불살라버린 서군은 거듭 시게유키의 저택으로 쳐들어가 스모노데라(雲の寺), 햐쿠만벤(百萬遍)의 불전, 혁당(革堂)에도 불을 질러가며 시게유키의 저택을 공격했지만, 동군의 저항으로 결착이 나지 않았고 다음 27일에 양군은 물러났다. 이 전투로 북쪽은 후나오카 산(船岡山), 남쪽은 니조 대로까지 타버렸다.

쇼군 요시마사는 28일에 양군에 화목을 명령하고, 호소카와 가쓰모토의 군사 행동을 비난하면서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에게는 가와치로 내려갈 것을 명령하는 한편, 이세 사다치카에게 군을 인솔해 교토로 올라오도록 하는 등의 독자적인 움직임을 취했다. 하지만 6월 3일에 가쓰모토의 요청으로 쇼군의 아기(牙旗)가 동군에 내려지고, 쇼군 요시마사는 동생 요시미에게 야마나의 서군을 칠 것을 명령했다. 6월 8일에는 아카마쓰 마사노리가 이치조 오미야에서 야마나 노리유키(山名敎之)를 쳐부수고, 나아가 쇼군 요시마사의 항복 권고에 동요한 시바 요시카도가 자신의 집에 칩거하자 동군은 요시카네의 저택까지 공격해 들어갔다. 남북으로 니조에서 고료노 가쓰지(御靈の辻)까지, 동서는 오오토네리마치(大舎人町)에서 무로마치까지 불탔다. 이때까지는 교토에 군세를 모으고 있었던 호소카와의 동군이 우세했지만, 6월 14일에 야마토(大和)의 후루이치 다네나가(古市胤榮), 19일에 기이의 하타케야마 마사쿠니(畠山政國) 등 서군의 원군이 차례대로 도착하기 시작하고, 8월 23일에는 스오(周防)에서 오우치 마사히로(大內政弘)가 이요(伊予)의 고노 미치하루(河野通春) 등 사이고쿠(西國, 서국) 7개 쿠니의 병력 10,000명 및 2,000여 척의 수군을 이끌고 입경하면서 야마나의 서군이 세력을 회복했다. 이날 천황과 상황이 무로마치정으로 파천하고, 아시카가 요시미가 교토를 빠져나와 기타바타케 노리토모(北畠敎具)를 의지해 이세로 달아났다. 이 시기 즈음, 서군은 <간레이 하지장>을 통해 여러 군의 렌쇼(連署, 연서)에 의한 지휘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오우치 마사히로는 8월 중에 후나오카 산에 진을 치고 9월 1일에는 하타케야마 요시나리 · 아사쿠라 다카카게가 쳤던 다케다 세력을 축출, 다케다가 버리고 간 산보인(三寶院)에 불을 질렀다. 6일에 쇼군 요시마사가 거듭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의 가와치 하향을 명령했지만 요시나리는 따르지 않았다. 18일에 교토 교외의 난젠지 산(南禪寺山)에서 전투가 발발하고(히가시이와쿠라 싸움), 10월 3일에 발발한 쇼코쿠지의 전투는 양군에 많은 사상자를 낸 격렬한 싸움이었지만 좀처럼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소실된 쇼코쿠지 터에 시바 요시카도군이 진을 치고 하타케야마 요시나리가 야마나 소젠 저택의 서쪽으로 옮기면서 동군은 열세에 몰렸다.

조정에 대해서는 10월 3일에 고하나조노 법황이 고후쿠지(興福寺)에 야마나 소젠의 추토를 명하는 <치벌 인센>(治罰院宣)을 내린 것 말고도 12월 5일(양력 12월 31일)에 오오기마치 산조 긴하루(正親町三條公躬), 하무로 노리타다(葉室敎忠)·미츠타다(光忠) 부자, 아노 스에토오(阿野季遠)·시미즈타니 사네히사(淸水谷實久) 등 서군파로 몰린 구교(공경)의 관직과 작위 박탈이 결정되었다. 그들은 히노 도미코의 친가인 히노 집안과는 대립 관계에 있었던 산조 집안의 일족이나, 친척이 대부분 아시카가 요시미를 지지하고 있었던 구교들이었다. 오닌 2년(1468년) 3월 17일에 기타오지 가라스마루(北大路烏丸)에서 오우치 마사히로와 모리 도요모토(毛利豐元) ・ 고바야카와 히로히라(小早川廣平)가 교전하고, 5월 2일에 호소카와 시게유키가 시바 요시카도의 저택을 공격하거나 5월 8일에 가쓰모토가 소젠의 진을 치고, 8월 1일에 가쓰모토의 군사가 쇼코쿠지 터의 요시나리의 진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전투 장소는 점차 도성 밖으로 옮겨갔고, 야마시나(山科), 도바(鳥羽), 사가(嵯峨)에서 양군이 교전했다. 이해에 시바 요시카도는 무로마치 막부와 적대하고 있었던 간토의 아시카가 나리우지에게 화목을 제안하고, 야마나 소젠과 하타케야마 요시나리가 연명으로 서명한 서신을 보냈다.[14] 그러나 쇼군 요시마사는 독단으로 화목을 도모한 시바 요시카도를 7월 10일에 해임하고, 호소카와 가쓰모토를 간레이로 임명했으며, 요시카도의 가독 지위와 3개 쿠니의 슈고직도 마루오마루에게 넘겨버렸다.[15]

오닌 2년 9월 22일, 이세에 체재하고 있었던 아시카가 요시미는 호소카와 가쓰모토나 쇼군 요시마사의 설득으로 동군에 가담했다. 교토로 돌아온 요시미는 요시히사파(義尙派)의 히노 가쓰미쓰(日野勝光)의 배척을 쇼군 요시마사에게 호소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나아가 윤 10월 16일에는 '분쇼의 정변'에서 요시미와 대립했던 이세 사다치카가 쇼군 요시마사에 의해 정무에 복귀했고, 11월 10일에는 요시미와 친한 아리마 모토이에(有馬元家)를 살해하는 등 쇼군 요시마사는 확실하게 요시히사 옹립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호소카와 가쓰모토도 요시미를 옹립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출가를 진행시켜, 요시미는 재차 히에이 산으로 출가해야 했다. 11월 23일(양력 12월 19일), 야마나의 서군은 히에이 산에 사자를 보내 요시미를 맞아들여 새로운 쇼군으로 추대하고, 오오기마치 산조 긴하루, 하무로 노리타다 등도 이에 편입하여 바햐으로 서군은 '서막부'의 체재를 갖추게 되었고, 요시미가 발급하는 문서에 의해 명령을 내리며 독자적으로 관위를 수여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호소카와 동군의 '동막부'에서는 히노 가쓰미쓰, 이세 사다치카 등 쇼군 요시마사의 측근 세력이 커져서 분쇼의 정변 이전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호소카와 가쓰모토로서는 요시미를 굳이 서군에 보냄으로써 야마나 소젠에 우호적이었던 히노 도미코를 막부 내에서 고립시키려 했었다고도 추측되고 있는데, 이후 동군의 가쓰모토는 야마나의 서군과의 싸움을 거의 실시하지 않고, 대신 오우치씨와의 전투에 힘을 쏟았다. 이때 오우치 마사히로의 압도적인 군세 앞에 이미 교토가 있는 야마시로는 서군에 의해 제압되었고, 교토내에서는 산발적인 전투만 일어나는 대신 전장은 셋쓰(攝津) ・ 단바(丹波) ・ 야마시로로 옮겨가 있었다. 때문에 동군은 반오우치 활동을 부추겼는데, 분메이 원년(1469년) 오우치씨 집안의 중신으로 문 • 무양도의 명장으로 알려져 있었던 마스다 가네타카(益田兼堯)가 이와미(石見)에서 오우치씨를 배반하고 규슈의 오토모 지카시게(大友親繁) · 쇼니 요리타다(少弐賴忠)와 함께 오우치 마사히로의 숙부 노리유키(敎幸)를 끼며 서군 측의 오우치령에 쳐들어갔다. 분메이 2년(1470년) 2월에는 오우치 노리유키 본인이 오우치 마사히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반란은 모두 오우치 집안의 스에 히로모리(陶弘護)에 의해 격퇴되었고 오우치 마사히로는 자신의 전력을 따로 끌어올 필요없이, 7월 무렵까지 야마시로 전역을 서군이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16] 이후 동 • 서 양군의 싸움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길어진 전란과 도적의 발호는 몇 번이나 전화로 불타버린 수도 교토를 더욱 황폐화시켰다. 교토에 상경해 있었던 슈고 다이묘의 영토에까지 전란이 확대되어 다이묘들은 교토에서의 싸움에만 전념할 수가 없었다. 슈고 다이묘들이 그토록 얻고자 했던 무로마치 막부의 권력 자체가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판에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차츰 동 • 서 양군 사이에 전쟁을 혐오하는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5. 전란의 끝

분메이 3년(1471년) 5월 21일, 시바 요시카도의 중신으로 서군의 주력이었던 아사쿠라 다카카게가 쇼군 요시마사로부터 에치고 슈고직에 보임되어 동군으로 돌아서면서 동군은 결정적으로 유리해졌고, 고가 구보(古河公方) 아시카가 나리우지에 대한 추토를 재개할 여유도 생겼다. 한편 서군은 옹립을 주저하고 있었던 후남조(後南朝) 세력의 오쿠라노미야 황자(小倉宮皇子)라 칭하는 인물을 옹립해 '서진남제'(西陣南帝)로 삼았으나 곧 내쫓았다. 이해에 간토의 막부군이 단독으로 나리우지를 물리치고 나리우지의 본거지였던 고가 성(古河城)을 함락시키면서 전세는 서군에 불리하게 돌아가게 되었다.[17] 분메이 4년(1472년)에 이르러 가쓰모토와 소젠 사이에 오가기 시작한 화해 교섭도[18] 야마나 가문과 대립하던 아카마쓰 마사노리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3월에 가쓰모토는 조카 가쓰유키를 폐적시키고, 친자식으로 소젠의 외손자에 해당되는 소메이마루(聰明丸, 호소카와 마사모토)을 옹립한 뒤 삭발시켰다. 5월에는 소젠이 자살을 기도하다 실패하고 은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19]

분메이 5년(1473년) 3월 18일(양력 4월 15일)과 5월 11일(양력 6월 6일), 소젠과 가쓰모토가 차례대로 사망하고, 12월 19일(1474년 1월 7일)에는 요시마사가 요시히사에게 쇼군직을 넘기고 은거했다. 막부에서는 요시히사의 생모인 히노 도미코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고 요시마사의 실권은 차츰 사라져, 이듬해(1474년) 3월에 요시마사가 오가와(小河)에 새로 지은 저택으로 옮겨가고 무로마치 저택에는 도미코와 쇼군 요시히사 모자만 남게 되었다. 고후쿠지의 벳토(別當)였던 진손(尋尊)은 "천하의 공사가 좋아져 여인에게서 계책이 나오게 되었으며, 구보(요시마사)는 큰 술, 여러 다이묘는 이누가사가게(犬笠懸)와 같이, 천하가 태평한 때와 같이 되었다(天下公事修り, 女中御計, 公方は 大御酒, 諸大名は 犬笠懸, 天下泰平の 時の 如くなり)"고 평가하였다. 분메이 6년 4월 3일(4월 19일), 소젠의 손자 야마나 마사토요와 호소카와 마사모토 사이에 화목이 성립되었다. 나아가 이 무렵 서군의 잇시키 요시나오의 아들 요시하루(義春)가 요시마사 앞으로 출두하고, 단고 잇시키씨 집안도 동군에 귀순했다. 그 후로도 동군은 하타케야마 마사나가 · 아카마쓰 마사노리, 서군은 하타케야마 요시나리 · 오우치 마사히로를 중심으로 타성적인 소규모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서군의 도키 나리요리(土岐成賴)의 가신으로 미노의 슈고 대리였던 사이토 묘슌(齋藤妙椿)은 활발한 군사활동으로 미노 · 오오미 · 이세에 출병해, 에치젠에서는 시바 요시카도의 중신 가이 도시미츠(甲斐敏光)와 아사쿠라 다카카게를 서로 화목시켰다. 가이 도시미츠는 이듬해인 7년(1475년) 2월에 도토우미 슈고 대리에 임명되면서 동군으로 돌아섰고, 고립한 요시카도는 11월에 오와리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요시토시파의 슈고 대리 오다 도시사다(織田敏定)와 충돌, 이후 행방불명된다.

분메이 7년에는 화목의 움직임이 더욱 가속화되어 9월에 요시마사가 오우치 마사히로에게 '세상무위(世上無爲)'의 문서를 보내고 12월에는 요시미가 요시마사에게 공순할 것을 맹세했으며 요시마사도 요시미의 죄를 묻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분메이 9년(1477년) 9월 22일에는 주전파의 한 사람이었던 하타케야마 요시나리가 마사나가를 추토한다는 명분으로 가와치로 내려가고, 오우치 마사히로 등의 여러 다이묘도 11월 11일(양력 12월 16일)에 각기 철수하면서 서군은 사실상 해체되어[20], 교토에서의 전투는 수습되었다. 요시미도 도키 나리요리와 함께 미노로 갔다. 9일 뒤 막부에 의해 천하태평의 자축연이 열림으로써 11년에 이르는 오닌의 난은 막을 내렸다.

히노 도미코는 사실상 권력 투쟁에 성공했으나 아들인 9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사가 1489년에 병으로 25세로 후손 없이 요절하면서 결국 그녀의 경쟁자인 요시미의 아들인 요시키(= 10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가 다음 쇼군에 오른다.

6. 영향

이 난으로 인해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또한 이 난의 영향을 받아 각지에서 격화된 무사들의 분쟁은 결국 전국시대의 개막으로 이어졌다. 다만 오닌의 난 직후부터 막부의 권위가 없어졌다고 본 과거와 달리 요즘에는 1493년 메이오 정변 시기까지는 막부의 권위가 어느정도 유지되었다고 본다. 또한 무로마치 막부는 완전히 멸망하지 않았지만 일본 전국을 호령하는 패권 세력으로는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국사 전국시대 주나라나 한국사 후삼국시대 통일신라처럼 행정력이 수도 교토 근처에만 미칠 정도로 초라한 세력이 되었다. 그래도 주나라나 통일신라는 망하기 직전을 제외하면 지방 세력에 심하게 휘둘리진 않았는데, 오닌의 난 이후의 무로마치 막부는 찬찬히 살펴보면 교토 주인이 다이묘에 휘둘리며 계속 바뀌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간략화하면 10대 아시카가 요시타네가 쫓겨나고 11대 아시카가 요시즈미[21]가 올랐다가 요시타네가 주고쿠 오우미씨를 업고 교토를 수복하고 요시즈미가 쫓겨났다가, 나중에 요시타네가 또 쫓겨나고 요시즈미의 아들 12대 아시카가 요시하루가 오르고, 요시하루도 교토에서 여러 번 쫓겨났다 복귀했다를 반복한다. 교토와 막부는 호소카와, 오우치, 미요시 등의 가문이 쥐락펴락했고, 당연히 이렇게 막부가 혼란스러운 동안 그 외 일본 전국은 다이묘들이 알아서 지배하는 세상이 된다. 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나 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나름대로 쇼군의 위세 복원을 위해 노력은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요시테루는 에이로쿠의 변으로 살해당한다. 에이로쿠의 변에 이어 무로마치 막부를 끝장낸 결정타는 오다 노부나가였다. 일본 대부분을 힘으로 통일해나가던 오다를 견제하기 위해 요시테루의 동생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 노부나가 포위망이란 최후의 저항을 했지만 이게 실패하면서 무로마치 막부는 멸망했다.[22]

가문들에게 끼친 영향만 보면 오닌의 난을 계기로 두 세력의 수장급이었던 야마나 호소카와 가문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고,[23] 오우치 가문은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토벌로 인해 약해져 있는 상태에서 오우치 마사히로의 활약으로 부흥하게 되고 그의 아들인 오우치 요시오키 대에 전성기를 열게 된다.


[1] 난 도중 서군으로 전향하였다. [2] 아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호소카와 가문은 오닌의 난을 주도한 가문 중 하나다. 호소카와가 만이 아니라 교토인이 지난 번 전쟁(こないだの戰爭)이라고 하면 오닌의 난을 뜻하는 거라고 한다. [3] 실록 본문에 오닌의 난 주동자가 두 명 나오는데 "야마나도노([ruby(山名殿,ruby=やまなどの)]) 히다리노유게이노카미([ruby(佐衛督,ruby=ひだりノゆぎおひノかみ)]) 미나모토노 모치토요([ruby(源,ruby=みなもとノ)][ruby(持,ruby=もち)][ruby(豐,ruby=とよ)]) = 야마나뉴도([ruby(山名入道,ruby=やまなにゅうどう)])"는 야마나 소젠, "호소카와도노([ruby(細川殿,ruby=ほそかはどの)]) 미기노미사토노카미([ruby(右京大夫,ruby=みぎノみさとノかみ)]) 미나모토노 카츠모토([ruby(源,ruby=みなもとノ)][ruby(勝,ruby=かつ)][ruby(元,ruby=もと)])= 호소카와 우쿄노다이부(細川右京大夫)"는 호소카와 카츠모토다. 둘 다 미나모토의 후손을 칭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둘을 각각 미나모토노 모치토요(源持豐)(야마나 소젠의 이전 이름), 미나모토노 카츠모토(源勝元)로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야마나 소젠은 히다리노유게이노스케([ruby(左衛門佐,ruby=ひだりノゆぎおひノすけ)])를 맡다가 미기노유게이노카미([ruby(右衛門督,ruby=みぎノゆぎおひノかみ)])로 승진했다고 나오므로 실록의 좌위독 운운은 실제 야마나 소젠의 환로(宦路)와 어긋난다. [4] 가뭄, 홍수가 반복되어 벼농사를 망쳤고 교토에서만 수만 명이 아사했다. [5] 아시카가가 아니라 미나모토로 알려진 이유는 아시카가씨의 본성이 미나모토이기 때문에 서류상으론 미나모토를 사용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6] 일본에서는 성과 씨를 분리해서 사용했다. 예를 들어 도쿠가와 이에야스만 해도 성은 도쿠가와지만 씨는 미나모토의 분가인 닛타 씨였다. [7] 슈고 다이묘의 대리. [8] 참고로 비슷하게 불교에 관심이 많던 동시대 조선의 세조와도 교류가 있어 팔만대장경 인쇄본 같은 많은 불교 문화재를 받았다고 한다. [9]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10남으로, 요시마사에게는 이복동생. [10] 쇼군에 이어 넘버 2의 자리. [11] 군사와 경찰을 담당하는 자리. [12] 모치토요는 이미 사망 [13] 사실 주군에게 반기를 든 셈이긴 하지만. [14] 앞서 막부의 간토 정책의 일환으로서 시바씨의 당주가 된 요시카도였기에 아시카카 나리우지와 무로마치 막부의 화목이라는 성과를 올림으로써 가독에 더해 간레이직의 확보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15] 서신을 보낸 달은 2월부터 3월로 추정되어 쇼코쿠지 전투 뒤에 서군이 유리해진 상황에서 시바 요시카도가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16] 오우치 노리유키는 분메이 3년 12월 26일에 부젠에서 자결했다. [17] 특히 간토에 대한 정책으로 지위를 보전하려던 시바 요시카도의 입장이 위험해졌다. [18] 평소 야마나 소젠의 아들들이 하타케야마 요시나리에 대한 지원에 부정적이었던 것이나 야마나 가문 내에서도 전쟁을 혐오하는 감정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19] 사쿠라이 에이지는 이것을 수타의 의사를 전하는 행위로 보았다. [20] 서군의 해체는 불과 하루만에 끝났다고 한다. [21] 아시카가 요시노리의 4남이자 요시마사의 이복형인 아시카가 마사토모(足利政知)의 차남. [22] 다만 선빵을 친 건 아시카가 요시아키 쪽이었다. 물론 가만히 있었어도 오다 노부나가의 꼭두각시가 되었을 게 뻔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쇼군 단독으로 뭔가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형을 죽이고 자신을 쥐락펴락했던 호소카와, 오우치, 미요시 등을 물리쳐준 것도 오다 노부나가였고. 사실 노부나가 포위망이 완성되어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했다고 한들 어차피 얼마 안 가 또다른 야심가의 손에 들어가거나 패망할 일밖에 남지 않았다. [23] 그래도 호소카와는 기나이를 장악하고 한동안 일본 최강의 세력으로 군림했으나 내분으로 약해진 틈에 가신이었던 미요시 가문의 역습으로 몰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