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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align=center><tablewidth=81> 하얀색 칸 |
}}} 및 🎎 표시: 생전 서위 }}}
|
|||
(서기·양력 서위일 불명)
|
720년 11월 27일
|
7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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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7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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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력 서위일 불명)
|
요로 4년 10월 23일
|
진키 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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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표 9년 7월 25일
|
|||
( 고세노 도코타) | 후지와라노 후히토 | 🎎 후지와라노 미야코 | 🎎 후지와라노 무치마로 | |||
737년 11월 3일
|
749년 5월 4일
|
760년 9월 20일
|
762년 2월 28일
|
|||
덴표 9년 10월 7일
|
덴표칸포 원년 4월 14일
|
덴표호지 4년 8월 7일
|
덴표호지 6년 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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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지와라노 후사사키 | 🎎 타치바나노 모로에 |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미치요 | 🎎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 |||
770년 10월 23일
|
785년 6월 14일
|
785년 10월 31일
|
788년 6월 21일
|
|||
호키 원년 10월 1일
|
엔랴쿠 4년 5월 3일
|
엔랴쿠 4년 9월 24일
|
엔랴쿠 7년 5월 13일
|
|||
🎎 후지와라노 나가테 | 기노 모로히토 | 후지와라노 다네츠구 | 후지와라노 다비코 | |||
791년 1월
|
791년 1월
|
806년 6월
|
806년 6월
|
|||
엔랴쿠 9년 12월
|
엔랴쿠 9년 12월
|
다이도 원년 6월
|
다이도 원년 6월
|
|||
야마토노 오토츠구 | 하지노 마이모 | 후지와라노 요시츠구 | 아베노 고미나 | |||
819년 1월 18일
|
823년 6월 17일
|
823년 6월 17일
|
826년 9월 1일
|
|||
고닌 9년 12월 19일
|
고닌 14년 5월 6일
|
고닌 14년 5월 6일
|
덴초 3년 7월 26일
|
|||
후지와라노 소노히토 | 후지와라노 모모카와 | 후지와라노 모로아네 | 후지와라노 후유츠구 | |||
833년
|
833년
|
847년 11월 16일
|
848년 1월 28일
|
|||
덴초 10년
|
덴초 10년
|
조와 14년 10월 5일
|
조와 14년 12월 19일
|
|||
다치바나노 기요토모 | 다구치노 미치히메 | 다치바나노 나라마로 | 다치바나노 우지키미 | |||
850년 9월
|
854년 10월 28일
|
858년
|
867년 11월 9일
|
|||
가쇼(嘉祥) 3년 8월
|
닌주 4년 10월 4일
|
덴난 2년
|
조간 9년 10월 10일
|
|||
후지와라노 미츠코 | 미나모토노 도키와 | 미나모토노 기요히메 | 후지와라노 요시미 | |||
869년 4월
|
872년 10월 9일
|
877년 1월
|
877년 1월
|
|||
조간 11년 3월
|
조간 14년 9월 4일
|
조간 19년 1월
|
조간 19년 1월
|
|||
미나모토노 마코토 | 후지와라노 요시후사 | 후지와라노 나가라 | 후지와라노 오토하루 | |||
884년 3월 23일
|
884년 3월 23일
|
891년 2월 24일
|
895년 9월 20일
|
|||
간교 8년 2월 23일
|
간교 8년 2월 23일
|
간표 3년 1월 13일
|
간표 7년 8월 28일
|
|||
후지와라노 후사츠구 | 후지와라노 가즈코 | 후지와라노 모토츠네 | 미나모토노 토오루 | |||
897년 7월 19일
|
898년 1월 3일
|
900년 4월 15일
|
906년 6월 24일
|
|||
간표 9년 6월 16일
|
간표 9년 12월 7일
|
쇼타이 3년 3월 14일
|
엔기 6년 5월 30일
|
|||
미나모토노 요시아리 | 소시 여왕 | 후지와라노 다카후지 | 후지와라노 슈쿠시 | |||
907년
|
909년 4월 27일
|
913년 4월 27일
|
937년 11월
|
|||
엔기 7년
|
엔기 9년 4월 5일
|
엔기 13년 3월 18일
|
조헤이 7년 10월
|
|||
미야지노 렛시 | 후지와라노 도키히라 | 미나모토노 히카루 | 후지와라노 미츠코 | |||
949년 9월 13일
|
949년 9월 13일
|
962년 11월 17일
|
967년
|
|||
덴랴쿠 3년 8월 18일
|
덴랴쿠 3년 8월 18일
|
오와 2년 10월 18일
|
고호 4년
|
|||
후지와라노 다다히라 | 미나모토노 쇼시 | 후지와라노 기시 | 후지와라노 세이시 | |||
969년 12월 2일
|
970년 6월 26일
|
972년 12월 13일
|
978년 1월 1일
|
|||
안나 2년 10월 20일
|
덴로쿠 원년 5월 20일
|
덴로쿠 3년 11월 5일
|
조겐(貞元) 2년 11월 20일
|
|||
후지와라노 모로타다 | 후지와라노 사네요리 | 후지와라노 고레타다 | 후지와라노 가네미치 | |||
987년 3월
|
989년 8월 23일
|
992년 7월 18일
|
993년 6월 12일
|
|||
간나 3년 2월
|
에이엔 3년 7월 20일
|
쇼랴쿠 3년 6월 16일
|
쇼랴쿠 4년 5월 20일
|
|||
후지와라노 도키히메 | 후지와라노 요리타다 | 후지와라노 다메미츠 |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 |||
993년 8월 19일
|
995년 6월 25일
|
995년 6월 25일
|
1025년 9월 23일
|
|||
쇼랴쿠 4년 7월 29일
|
조토쿠 원년 5월 25일
|
조토쿠 원년 5월 25일
|
만주 2년 8월 29일
|
|||
미나모토노 마사자네 | 후지와라노 미치카네 | 미나모토노 시게노부 | 후지와라노 기시 | |||
1029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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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3년 6월
|
1073년 6월
|
1075년 11월 16일
|
|||
조겐(長元) 2년 10월 17일
|
엔큐 5년 5월
|
엔큐 5년 5월
|
조호 2년 10월 6일
|
|||
후지와라노 긴스에 | 후지와라노 요시노부 | 후지와라노 시시 | 후지와라노 노리미치 | |||
(서기·양력 서위일 불명)
|
1094년
|
1107년
|
1146년 11월 9일
|
|||
(화력 서위일 불명)
|
가호 원년
|
가쇼(嘉承) 2년
|
규안 2년 10월 4일
|
|||
후지와라노 요시나가 | 후지와라노 아키후사 | 후지와라노 사네스에 | 후지와라노 나가자네 | |||
1146년 11월 9일
|
1166년 9월 8일
|
1168년 7월
|
1168년 7월
|
|||
규안 2년 10월 4일
|
에이만 2년 8월 12일
|
닌난 3년 6월
|
닌난 3년 6월
|
|||
🎎 미나모토노 마사코 | 고노에 모토자네 | 다이라노 도키노부 | 후지와라노 유시 | |||
1177년 8월 28일
|
1190년 5월
|
1220년
|
1242년
|
|||
지쇼 원년 8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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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큐 원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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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큐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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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지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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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 후지와라노 규시 | 다이라노 지카노리 | 미나모토노 미치무네 | |||
1617년 4월 14일
|
1628년 7월
|
1632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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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1년 7월 4일
|
|||
겐나 3년 3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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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에이 5년 7월
|
간에이 9년 2월 10일
|
게이안 4년 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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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쿠가와 이에야스 | 사이고노츠보네 | 도쿠가와 히데타다 | 도쿠가와 이에미츠 | |||
1680년 6월 17일
|
1709년 3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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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년 10월 9일
|
1712년 12월 1일
|
|||
엔호 8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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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에이 6년 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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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에이 6년 9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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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토쿠 2년 11월 3일
|
|||
도쿠가와 이에츠나 | 도쿠가와 츠나요시 | 도쿠가와 츠나시게 | 도쿠가와 이에노부 | |||
1716년 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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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2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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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1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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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년 10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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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토쿠 6년 5월 12일
|
호레키 2년 6월 10일
|
호레키 11년 7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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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메이 6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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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쿠가와 이에츠구 | 도쿠가와 요시무네 | 도쿠가와 이에시게 | 도쿠가와 이에하루 | |||
1841년 4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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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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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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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8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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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포 12년 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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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이 원년 7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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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이 6년 8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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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이 5년 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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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나리 | 도쿠가와 이에모토 | 도쿠가와 이에요시 | 도쿠가와 이에사다 | |||
1866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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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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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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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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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오 2년 7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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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13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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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15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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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18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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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모치 | 구스노키 마사시게 | 닛타 요시사다 | 이와쿠라 도모미 | |||
1891년 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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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3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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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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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1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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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24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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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1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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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2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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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3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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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조 사네토미 | 와케노 키요마로 | 산조 사네츠무 | 도쿠가와 미츠쿠니 | |||
1901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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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5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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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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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3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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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4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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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4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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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6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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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37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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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나리아키라 | 모리 다카치카 | 도쿠가와 나리아키 | 고노에 다다히로 | |||
1908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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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9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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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8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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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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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41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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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41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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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4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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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6년 동월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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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모토나리 |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 도요토미 히데요시 | 오다 노부나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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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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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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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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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임)
도쿠다이지 긴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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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임)
고노에 츠네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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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임)
고노에 츠네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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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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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임)
니조 미츠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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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와라 미치자네
菅原 道真 |
|
|
|
이름 | <colbgcolor=#ffffff,#191919>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 道真/菅原 道眞)[1] |
이명 |
관공(菅公, 간코) 천만천신(天満天神, 덴만텐진) |
출생 | 845년(조와 12년) 음력 6월 25일 |
사망 | 903년(엔기 3년) 음력 2월 25일 |
[clearfix]
1. 개요
[ruby(東風,ruby=こち)][ruby(吹,ruby=ふ)]かば [ruby(匂,ruby=におい)]おこせよ [ruby(梅,ruby=うめ)]の[ruby(花,ruby=はな)] [ruby(主,ruby=あるじ)]なしとて [ruby(春,ruby=はる)]を[ruby(忘,ruby=わす)]るな[2]
(코치후카바 니오이오코세요 우메노하나 아루지나시토테 하루오와스루나)
동풍 불거든 꽃향기 보내다오 매화꽃이여 주인이 없다 해서 봄을 잊지 말지니[3]
(코치후카바 니오이오코세요 우메노하나 아루지나시토테 하루오와스루나)
동풍 불거든 꽃향기 보내다오 매화꽃이여 주인이 없다 해서 봄을 잊지 말지니[3]
일본 헤이안 시대의 문인, 관료. 일본 조정이 중국 당나라에 파견하던 견당사를 폐지시켜 일본 특유의 고쿠후 문화(国風文化, 국풍 문화)를 개창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죽은 이후에는 신격화되어 학문을 관장하는 덴진(天神, 천신)으로 오늘날까지 숭배받고 있다. 그를 모시는 신사를 덴만구(天満宮, 천만궁)라 부른다.
2. 생애
헤이안 시대 제일가는 천재라고 칭송받은 인물이다. 격은 낮지만 학자 가문인 스가와라 가에서 태어나[4]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 재상급인 우대신(右大臣)까지[5] 올랐다. 스가하라가 실각한 뒤 거의 700년이 지나서야 겨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겐페이토키츠 4성 씨족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대신 자리에 올랐다.[6]그러나 당시 헤이안 시대는 후지와라 일족이 대대로 천황의 외척 지위를 차지하고 권세를 휘두르던 때였기 때문에 격이 낮은 귀족으로 우대신이 된 그는 후지와라 일족의 음해를 많이 받았다. 게다가 그는 당시 일본의 정치체제의 근간이었던 율령제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가지 개혁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기득권의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쇼타이의 변(昌泰の変)[7]으로 불리는 사건으로 좌천되었다.
게다가 천황과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사실 처음에 그를 발탁한 인물은 우다 덴노(宇多天皇)[8]였는데 그가 자신의 아들에게 양위하여 태상황이 되고 나서도 미치자네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우다의 아들 다이고 덴노(醍醐天皇)는 미치자네를 시기하던 후지와라노 토키히라(藤原時平)를 신임하여 미치자네를 멀리 했다. 이 상황에서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토키히라가 참소하여 다자이노곤노소치(大宰権帥)[9] 직으로 내쳐져 중앙정치에서 추방당했다.[10] 거의 유배당하다시피 한 그는 수도에서 먼 오늘날의 규슈로 좌천된 후 한을 품고 죽었다. 그런 와중에도 사서를 짓고 금욕하며 시를 지으면서 자신을 위로한 점도 대단하다.
견당사(遣唐使)를 폐지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 조정은 관례로 894년에 견당사를 보내려고 했고, 미치자네를 견당사로 선정했다. 그러나 당시 당의 국세가 쇠락하는 것을 보고[11] 미치자네가 나서서 "이번에는 가지 맙시다."라며 계획을 취소시켰고, 이때 사실상 폐지되었다. 그리고 얼마 못 가서(907년) 당이 멸망하였다. 이 계기로 그때까지 일본에서 만연하던 당풍(唐風: 중국풍) 문화가 국풍(國風: 일본풍) 문화로 교체되어 일본 고유의 독자적인 문화를 꽃 피우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 육국사 중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을 편찬하는 데 관여했다. 또한 미치자네가 지은 류취국사(類聚國史)는 일본사뿐 아니라[12] 한국사 연구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발해를 언급하면서 "그 주민은 말갈이 많고 토인(土人)[13]이 적다."라고 한 기록이 대표적. 이는 소수의 고구려 유민이 다수의 말갈인을 지배하는 왕조국가 발해의 모습을 그리게 하는 주요 사료가 되었다. 다만 주현과 관역이 없다는 말도 같이 기록해 신빙성이 다소 떨어진다. 발해는 명백히 5경 15부 62주가 있었다는 명확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3. 사후
여기서 끝났다면 그저 무고한 정치의 희생양 정도로 역사에 남았겠으나[14] 직후 일본에서 기이한 일들이 일어났다.지방에서는 대규모 역병과 각종 자연재해가 연달아 발생했다. 중앙 정계에서도 909년 후지와라노 토키히라가 요절, 4년 뒤인 913년에는 토키히라와 결탁하여 미치자네의 자리를 꿰어찬 우대신 미나모토노 히카루가 사냥을 나갔다가 늪에 빠져 익사했다. 923년에는 토키히라의 생질이자 사위인 황태자 야스아키라 친왕이 만 20세로 요절, 925년 야스아키라 친왕의 아들이자 토키히라의 외손자인 황태자 요시요리 왕이 만 3세로 요절했다.
게다가 930년에는 헤이안 궁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천황의 거처인 청량전(세이료덴)에 번개가 쳐 많은 신료들이 죽거나 중상을 입는 세이료덴 낙뢰 사건이 발생했다. 더욱 흉흉하게도 미치자네가 좌천된 후 그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던 후지와라노 키요츠라가 벼락을 맞고 즉사했다. 공포감이 극에 달한 조정은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규슈로 추방하라고 명령한 칙서를 불태우고 그에게 우대신 관직을 추서하는 조치까지 취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흉흉한 일이 이어졌고 다이고 덴노는 두려움에 시달리다 쇠약해져 세상을 떠났다.[15]
계속해서 일어난 흉사 때문에 이것이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원령이 일으킨 복수라는 공포가 귀족 사회에 밀려들었다. 헤이안 시대 일본의 상류층에서는 유독 바케모노(요괴와 모노노케)를 두려워해서 음양사들의 점괘에 맞춰 방위가 안 좋으면 집을 옮겨다니기도 할 정도로 미신과 점복학이 유행했다. 그런데 스가와라 미치자네가 죽고 온갖 괴이쩍은 일들이 벌어지자 그가 천황의 궁에 벼락을 떨어트릴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바케모노, 더 나아가 뇌신(雷神)이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민간 설화에 따르면 어떤 귀족이 죽었다가 되살아났는데, 그 귀족이 말하기를 자기가 저승에 갔을 때 다이고 덴노는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고 있었고, 스가와라 미치자네는 자신의 피눈물로 일본을 잠기게 하겠다면서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고 한다.
본인과 연이 있는 황족들이 전멸하는 바람에[16] 후지와라노 토키히라의 후손은 동생 후지와라노 다다히라의 후손 집안에 밀려 다다히라가 후지와라 일족의 주도권을 잡았으며, 후지와라노 토키히라의 살아남은 자손들도 언제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원혼에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고 한다.[17]
미치자네의 분노를 풀어주기 위한 수단으로 미치자네의 손자 스가와라 후미토키(菅原文時)를 문장박사로 임명했다. 음양사로 유명한 아베노 세이메이의 스승이자 본인도 고명한 음양사였던 카모노 타다유키의 아들 요시시게 야스타네[18]도 후미토키의 수제자가 되었다. 다행히도 사후 100년쯤 지나서는 스가와라 미치자네가 원한을 풀어서 더 이상 재앙을 내리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무렵부터는 원령이 아니라 학문의 신이자 뇌신으로 숭배되어 현재의 천신(天神) 신앙이 되었다.
4. 백인일수
百人一首 백인일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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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번 스기와라 미치자네(菅家)
このたびは ぬさもとりあへず [ruby(手向山,ruby=たむけやま)] もみぢのにしき [ruby(神,ruby=かみ)]のまにまに
이번 여정은 누사[19]를 준비 못해 타무케야마[20] 비단결의 단풍잎 마음껏 받으소서
このたびは ぬさもとりあへず [ruby(手向山,ruby=たむけやま)] もみぢのにしき [ruby(神,ruby=かみ)]のまにまに
이번 여정은 누사[19]를 준비 못해 타무케야마[20] 비단결의 단풍잎 마음껏 받으소서
- 5-8-5-7-7의 형태로 중간에 1글자 더 끼었다.
- 여행을 떠나기 위해 안전을 보장받고자 타무케야마노카미에게 먼저 기도하고 가려 했으나 깜빡하고 누사를 준비하지 못해서 주변의 괜찮은 단풍이라도 주워다 바치니 넓은 도량으로 좀 봐주십쇼 하는 내용이다. 스가와라 미치자네가 우다(宇多) 전(前) 천황의 명을 받아 요시노 미야타키(吉野の宮滝, 나라현)에 다녀오다 아름다운 단풍을 보고는 이 정도면 신에게 바칠거리로도 무방하겠다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5. 여담
- 스가와라 미치자네는 스토쿠 덴노, 타이라노 마사카도와 함께 일본삼대원령으로 꼽히지만 지금도 온갖 괴담이 넘쳐나는 둘과 달리 정화되어 학문의 신이 되었기 때문에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를 대신 넣기도 한다.
- 일본에서는 그를 학문의 신으로 모시기 때문에 입시철이 되면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모신 신사는 복잡하다. 이해가 잘 안 간다면 한국의 갓바위를 떠올리면 된다. 미치자네를 모신 신사의 주 수입원은 입시철에 팔리는 오마모리[21]와 에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2]
- 미치자네를 모시는 신사 중 특히 후쿠오카에 있는 다자이후텐만구(太宰府天滿宮)와 교토에 있는 기타노텐만구(北野天満宮)가 유명하다. 야마구치현에 호후시에 있는 호후텐만구(防府天満宮)까지 합쳐서 3대 덴만구로 꼽는데, 이 세 곳은 일본 전국에 위치한 덴만구 가운데서도 톱으로 꼽힌다.[23]
- 다자이후덴만구에는 매화나무가 매우 많은데 교토에서 다자이후로 좌천될 때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덕과 학문을 흠모한 매화들이 날아와서 그렇다고 한다. 이것을 토비우메(飛梅)라 부른다. 일설에는 스가와라 미치자네가 죽었을 때 그 원한과 억울함이 깊어서 운구하던 소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고 한다. 덕분에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모신 다자이후 텐만구를 비롯해 그 외에 신사에 가보면 소 동상이 많다. 아픈 사람은 자신의 아픈 곳과 같은 소의 부위를 만지면 병이 낫고 머리나 뿔을 만지면 지혜롭게 된다고 한다
-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난에도 스가와라 미치자네가 개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타이라노 마사카도가 간토 땅에서 신황(新皇)을 자처하게 된 계기가 하치만 대보살의 사자를 자처하는 한 무녀가 나타나 "타이라노 마사카도에게 일본의 천황의 지위를 내리신다는 하치만 대보살의 뜻을 받들어 스가와라 미치자네가 그 내력을 전한다." 하고 신탁을 전한 것이었다.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아들 스가와라 카네모치(兼茂)는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영지에 가까운 히타치의 지방관을 지내기도 했다.
- 또한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아버지 요시마사가 살던 도요타군 인근 마카베군에는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또 다른 아들인 스가와라 가게유키(景行)가 살았는데, 그는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동생인 타이라노 마사히라에게 학문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스가와라 가게유키는 이후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숙부인 타이라노 요시카네와 함께 자신이 사는 곳에 아버지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모시는 신사를 짓기도 하는 등, 스가와라 집안은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집안과 여러모로 연줄이 있었던 모양. 메이지 시대에는 아예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환생이 타이라노 마사카도였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19세기 말에 말이다.
6. 대중문화 속의 미치자네
유메마쿠라 바쿠의 소설 음양사를 원작으로 한 오카노 레이코[24]의 동명의 만화에서 꽤 출연빈도가 높은 원령 멤버로 등장한다. 걸핏하면 나타나서 여기저기 벼락을 때리는 데 이것은 그가 뇌신이기도 하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다.[25][26] 1권에 보면 처음 등장한 미치자네의 원령 옆에 고통받는 조정대신의 영혼이 나오는데 바로 그를 음해한 토키히라다.[27] 초기 해적판 번역에서는 이름이 이상하게 나와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다만 읽어보면 은근히 개그스런 면모도 없지 않다.[28]마찬가지로 음양사를 소재로 하는 《음양의 도시》에서 손자인 스가와라 후미토키가 등장한다. 뭐, 주인공이 수제자인 요시시게 야스타네다보니 당연한 일이다.
만화 《 고스트 스위퍼》헤이안 편에서는 천신으로 추앙되면서 선의 미치자네와 악의 미치자네로 나뉘어졌다고 한다. 전자는 아군, 후자는 적군으로 나온다.
세가와 타카쓰구의 《암야귀문》에서, 주인공 나쓰키의 조상으로 모함을 받아 좌천되어 억울하게 죽은 후 벼락신이 된 기타노 대감은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모티브로 한 인물로 여겨진다. 어차피 《암야귀문》이라는 작품 전체가 유메마쿠라 바쿠의 《음양사》의 번안(?)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공인 나쓰키에 해당하는 실존인물 미나모토노 히로마사와 스가와라 미치자네는 혈연상 아무 관계가 없다. 오히려 히로마사는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좌천시킨 후지와라노 토키히라의 외손자이므로 미치자네의 입장에서는 원수의 자손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듯.[29]
동방도명수의 최종보스 마가하라 미타마의 모티브이다.
징기스칸 4에서는 일본문화권 출신이 아닌 국왕이 다자이후를 점령하고 주둔하면, 이 유적과 스가와라 미치자네에 대해 이야기하고 국왕의 정치력을 올려주는 이벤트가 나온다. 국왕이 일본문화권만 아니면 된다.
진 여신전생 4에서는 영적국방병기라는 타이틀의 강력한 악마로 등장. 아수라회의 우두머리 타야마의 권속으로 주인공을 막아선다. 나중에 신물들을 얻었다면 미치자네를 쓰러트린 장소에서 이벤트가 발생해 미치자네를 동료마로 만들 수 있게 된다.[30] 모습은 활을 든 궁병을 연상시키는 복장을 하고 있지만, 학문의 신이면서 뇌신이라는 점을 반영해 갑주의 빈 부분에 푸른 전기가 일렁이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노라가미에 등장하는 신인 텐진이 바로 이 사람이다.
하이바라 야쿠의 만화 응천의 문은 스가와라 미치자네와 귀족 아리와라노 나리히라가 후지와라씨가 다른 성씨를 제치고 권세를 키워가던[31] 교토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사건을 풀어나간다는 역사 미스테리 만화로, 여기서는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기 전, 문장생으로 대학료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모습이 그려진다. 일본 현지에서는 2020년 2월 기준으로 12권까지 나왔는데 한국에서는 아쉽게도 정발이 되지 않았다.
만화 주술회전의 등장인물 고죠 사토루와 옷코츠 유타가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후손으로서 먼 친척관계라고 한다. 특기할만한 사항으로는 여기서도 일본 3대 원령으로서 취급을 받는데, 초거물 주술사였다는 점과 주술사는 주력이 담긴 공격으로 죽거나 자연사, 병사를 하는 경우에도 모종의 조치를 취하여 사후 저주가 되지 않는다는 설정까지 더한다면 주술사였던 스가와라 미치자네는 모종의 이유로 제대로 된 처리 없이 죽는 바람에 주령이 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귀여워에서 팔려갈 위기에서 유자키 츠카사에게 도움을 받는다
[1]
이름을 미치자네 대신 '미치마사'라고도 부르며,
음독으로는 도신(どうしん)이라고 한다.
[2]
[ruby(春,ruby=はる)]な[ruby(忘,ruby=わす)]れず라고 된 판본도 있다.
[3]
우대신에서 다자이노곤노소치로 정리해고 좌천되어 떠나던 날에 지었다는,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와카이다. 현재
다자이후덴만구 앞에 있는 매화나무와도 관련이 있는데, 교토에서 좌천된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찾아 하루만에 다자이후까지 허공을 날아와서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경내의 다른 매화들보다도 먼저 꽃이 핀다고. 이 와카는 식기에 매화와 함께 새겨질 정도로 유명한 편이라, 한국에서도 음식점에서 간간히 이 와카를 볼 수 있다.
예시
[4]
스가와라 가는
노미노스쿠네를 시조로 하는 하제 씨에서 비롯된 가문이다.
[5]
조선으로 치면
우의정 정도이다. 게다가 헤이안시대 일본은 마치
골품제처럼 오를 수 있는 관직과 관위가 타고난 신분에 따라서 거의 결정되기 때문에, 낮은 신분은 아무리 애를 써도 고위직에 오를 수 없었다. 한 마디로 시대의 한계를 넘어선 인물. 그러나 그 대가를 자기 목숨으로 치렀다.
[6]
오다 노부나가 등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가 조정의 관위를 수여받은 사례가 있기는 하나, 당시 다이묘들은 대부분
미나모토나
타이라의 후손을 자칭하였다.
[7]
쇼타이(昌泰)는 다이고 덴노의 년호로 쇼타이 4년(901년) 우다천황의 아들 도키오 친왕(齋世親王)을 옹립할 역모가 있었다는 참소이다. 미치자네의 3녀가 도키오 친왕의 비(妃)로 인척관계였다.
[8]
드물게 어머니가 후지와라 가문 사람이 아닌 천황이였다.
[9]
지금의
규슈(九州)일대의 행정·사법·방위와 중국, 한반도와의 외교를 관장하는
다자이후(大宰府)의 장. 원래의 장인 다자이노소치가 점차 황족만이 임명되는 허직이 되면서 실질적인 수장으로 올라섰지만, 교토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탓에 정쟁에서 밀려난 참의급 이상의 고관들이 좌천되는 자리로도 쓰였다.(특히 좌천인 경우에는 다자이노인가이노소츠(大宰員外帥, 대재원외수)라는 이름으로 본래의 직위와는 구별하기도 했는데 미치자네가 딱 이 케이스다) 관위는 정3위로 종2위였던 미치자네의 본래 관등에 비해서 엄청나게 떨어진 건 아니지만, 당연히 원래 곤노소치로서 가지는 권한 따위 다 뺏기고 감시가 붙어 유폐된, 우리나라로 치면 위리안치에 가까운 처벌을 받았다.
[10]
아버지 우다 상황이 이를 반대하며 아들 천황에게 면담을 청했는데 만나지도 않았다.
[11]
이보다 10년 전,
황소의 난이 끝났다.
[12]
일본육국사 중
일본후기에 빠진 부분은 류취국사를 통해 메꾸곤 한다.
[13]
문맥상 대개
고구려 유민을 가리킨다고 본다. 다만
한규철은 말갈을 익히 알려진
여진족(및
만주족)이 아니라 고구려 지방민에 대한 비하적 호칭이라고 보는 견해에서, 토인을 사인(士人)의 오기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14]
그를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없지는 않다. 후지와라노 토키히라를 좌대신으로 중용한 것은 그를 내세워 후지와라 일족의 전횡을 막아보려는 뜻이었는데, 스가와라 미치자네는 그런 천황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으니 그야말로 헛똑똑이일 뿐이라고 보는 평도 있다.
[15]
청량전에 벼락이 내려치고 약 석 달 뒤 사망했다.
[16]
다이고 덴노의 후임이자 야스아키라 친왕의 동생들인
스자쿠 덴노,
무라카미 덴노는 둘 다 토키히라가 죽고 다다히라가 대신직에 올라 정권을 잡은 후 태어난 왕자들로 더 이상 토키히라의 집안과 연을 맺을 이유가 사라진 상황이었다.
[17]
사실 토키히라 사후 정권을 잡은 타다히라와 그 후손 입장에선 두려워만 할 것도 아닌 것이 타다히라의 첫 번째 처인 미나모토노 쥰시는 우다 천황과 미치자네의 딸, 혹은
고코 덴노와 미치자네의 여동생의 소생으로 추정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미치자네를 복권한 것 자체가 학자의 대표 격인 처가를 띄워서 정권의 안정성을 높이는 행위이기도 한 셈.
[18]
분가하면서 성씨를 바꾸었다. 와타세 소이치로의 소설 음양의 도시 주인공이 바로 이사람.
[19]
신토에서 신에게 빌기 위해 사용하는 기다란 종이나 천. 대략 탄자쿠와 비슷하다.
[20]
타무케야마노카미. 여행의 안전을 비는 신.
[21]
신토의 부적. 특히 그런 부적 중에서도 비단 주머니에 담긴 부적. 한국에서 부적 하면 떠오르는 종이로 된 부적은 일반적으로 오후다(お札)라고 하며, 오마모리(お守り)는 종이, 혹은 나무 등으로 만들어진 부적을 비단으로 된 주머니에 담은 것을 의미한다. 일본의 신사에서 파는 부적은 기본적으로 오마모리 계통.
[22]
만화
고스트 스위퍼에서 보면 스가와라 미치자네가
레이코를 만나러 왔다가 위치를 들켜서 엄청난 수의 수험생들이 그에게 달려드는 모습이 나온다.
[23]
다자이후와 기타노의 두 덴만구가 덴만구 가운데서 투 톱이기는 하지만, 호후덴만구는 스가와라 미치자네가 사망한 바로 이듬해(
904년)에 지어져 3대 덴만구 가운데 가장 역사가 깊다.
[24]
만화의 신으로 알려진
데즈카 오사무의 며느리다.
[25]
머리가
아프로마냥 뻗쳐 있는데 이것도 뇌신임을 반영한 설정인듯.
[26]
그래도 학문의 신이라는 설정은 어디 안 가서 2권에서 '넌 저기 찌그러져서 훌쩍거리면서 시나 읊고 있으라.'는 원령의 말에 발끈해 '학문을 깔보니까 같은 편끼리 싸우는 게 허망한 짓인줄 죽어서도 모르는 거지.'라고 까기도 한다.
[27]
청룡이 한쪽 귀로 들어가 다른 쪽 귀로 뚫고 나와 있다.
[28]
작중 궁중 와카 시합에 미나모토노 히로마사가 우방측 멤버로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딱 봐도 우방이 지겠다는 마쿠즈에게 "그치만 우방이 이긴다면 어떨까? 내가 붙으면 그 쪽은 다 이기게 돼 있거든"라고 했다가 "좌수가 양이고 우수가 음인데 음인 당신이 어떻게 음에 붙냐. 그리고 당신 원래 토키히라 핏줄 싫어하는 거 아니었냐."라는 마쿠즈의 도발에 넘어가서 "아 내가 붙으면 그쪽이 무조건 다 이긴다니까!"라며 마쿠즈의 (와카 시합의 승패가 걸린) 바둑 두기 내기 제안에 응한다.
[29]
앞에서 말한 만화 음양사에서도 아쓰히토(다이고 덴노)와 토키히라의 피를 이은 자손이라며 격노하는 미치자네를 보고 아베노 세이메이가 급히 손을 쓰는 부분이 있다.
[30]
마찬가지로 다른 영적국방병기들도 같은 이벤트로 동료마로 할 수 있다.
[31]
제목인 응천의 문은 헤이안 시대 교토 황궁의 정문이었던 오텐몬(응천문応天門)을 가리키는데, 이 응천문이 방화로 전소된 사건인 오텐몬의 변(応天門の変)을 계기로 후지와라 북가는 오텐몬 화재의 주범으로 지목된 도모 씨 가문을 비롯한 다른 정적 가문들을 정권에서 배제시키고 후지와라 북가 중심의 정권을 확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