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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몬드 도스

데스몬드 도스
Desmond Doss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40px-DossDesmondT_USArmy.jpg
<colbgcolor=#003458><colcolor=#fff> 본명 Desmond Thomas Doss(데스먼드 T. 도스)
출생 1919년 2월 7일
미국 버지니아 주 린치버그
사망 2006년 3월 23일 (향년 87세)
미국 앨라배마 주 피에몬트
신체 173cm, 65kg [1][2]
복무 미합중국 육군
복무 기간 1942 ~ 1951

1. 개요2. 생애
2.1. 입대 이전2.2. 태평양 전쟁
2.2.1. 마에다 고지 전투2.2.2. 그 후
2.3. 전역 이후
3. 매체에서4. 관련 문서5.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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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lease, Lord help me get one more.
(주님, 제발 한 명만 더 구하게 해 주시옵소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신자이자 양심적 병역거부[3] 미군 역사상 처음으로 양심적 병역거부자로서 명예 훈장을 수여받은 사람이다. 그를 기념하는 동상도 있고, 여러모로 미국 내에선 의무병과의 전설처럼 여겨지는 인물이다. 단순히 부상당한 전우들뿐 아니라 숨을 거둔 전우들의 시신도 적진에서 적을 피해 수습해 집으로 돌려보냈다. 의무병으로서 하나의 중대를 모두 전장에서 구해낸 사나이로도 불린다.

2. 생애

2.1. 입대 이전

1919년 미국 버지니아 주 린치버그에서 가난한 목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유년기 시절은 세계 대공황기였고, 그로 인한 어려운 생활 환경 탓에 9학년(우리나라의 고등학교 수준) 이후의 학업을 포기하고 버지니아 주 뉴포트 뉴스에 위치한 조선소에서 선박 페인트를 칠하는 도장공으로 일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먼저 미합중국 해군에 입대한 동생 해럴드 도스에 이어, 조선소에서 대체복무가 가능한 연장근무 요청도 거절하고 1942년 4월 미 육군에 입대하게 된다. 동생 해럴드 도스는 구축함 USS 린지(USS Lindsey) 함에서 근무했으며, 이 구축함은 카미카제 공격으로 파손되었으나 구축함과 해럴드 본인은 무사히 귀환했다.

2.2. 태평양 전쟁

1942년 4월 1일 미 육군에 입대한 데스몬드 도스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신자로서 살인을 금지한 계명과 안식일[4]에는 일상적인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을 철저하게 지키기를 원했고, 그리하여 집총을 거부[5]하고 의무 병과에 자원한다. 당시 미 육 해군의 야전 의무병은 개인 호신을 위해 M1 카빈 소총으로 무장했다. 비록 군의관, 의무부사관, 의무병 등은 "비무장" 의무가 있지만, 상대가 먼저 오인 혹은 고의로 공격할 경우 방어 수단인 권총, 총검 정도는 소지하여 반격할 수 있으며, 교전 상대가 먼저 의무 인원을 무장시켜 전투에 투입하거나 자신들의 의무 인원들을 공격할 경우 무장 사용 제한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카빈 소총은 분류상 비보병 병과 인원의 개인 방어용 병기로 분류됐기 때문에 의무 인원들에게도 지급됐다.

또한 태평양 전쟁에서는 일본군 제네바 조약에 비준한 적 없다는 이유로 의무병들을 마구잡이로 살상했기에 미군 의무병들은 병기를 갖추고 일본군을 살상하고 다녔다. 영화 핵소 고지 속 도스의 동료 의무병인 어브 셱터가 카빈 소총으로 일본군을 죽이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의무병이 전투 전면에 나서 총을 쏠 일이 많이 없으니 비무장 상태의 의무병으로 복무하길 원한 것이다. 그는 첫 훈련소에서 토요일(안식일)에 있던 지휘검열을 교회에 나가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했고, 순식간에 부대 내 최고의 문제덩어리로 떠올랐다. 지휘관들이 요구한 전투병과로의 전환도 끝까지 거부했고,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훈련도, 지휘검열도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응급환자를 돌보는 일은 안식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안식일에도 수행했다. 안식일에 응급 환자를 돌본 도스의 행동은 본인의 종교적 신념의 측면에서 볼 때 전혀 문제될 것이 없고, 오히려 교리 차원에서도 권장할 만한 일이다. 성경에서 예수가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온다. 이에 대해 당시 예수가 병을 고치는 '일'을 하여 안식일 계율을 어긴 것이 아니냐며 유대교 지도자들의 반발을 낳자 예수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라며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건 옳다고 대답했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문제였을 정도. 그러니 기독교적 교리의 측면에서 볼 때 안식일에 환자를 돌보는 일은 예수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육군은 설득을 포기하고 도스를 의무병으로 유지시킨다. 또한 연방대법원[6]에서 집총하지 않고도 참전할 수 있는 권리를 허락받아 부대 내 유일한 완전비무장 의무병이 된 도스는 육군 제77보병사단에 배속되었다. 1944년 도스는 제2차 괌 전투, 필리핀 탈환전, 레이테 만 해전을 비롯한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그리고 1945년, 미국은 일본 본토 침공에 앞서 일본 남부의 섬 오키나와에 상륙작전을 펼친다.

2.2.1. 마에다 고지 전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Doss_Maeda.jpg
1945년 5월 4일
마에다 고지 절벽 위의 도스.
1945년 5월 5일[7] 미 육군 제77 보병사단 제307 보병 연대는 오키나와의 마에다 절벽 반대편에 숨어있는 일본 육군 지휘소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하달받았고, 도스가 소속된 제1 대대 [8] 200여 명은 벼랑을 향해 진격한다. 하지만 1대대가 비탈면에 도착하자마자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치열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대포 기관총의 집중 포화에 맞은 100여 명은 순식간에 쓰러지고 살아남은 55명만이 긴급히 후퇴하게 된다.
1대대의 유일한 의무병이던 도스는 아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으며 후퇴하는 상황이 오자, 위험천만한 적진 한복판에서 의무병으로서 자신의 임무를 시작한다. 비처럼 쏟아지는 적 기관총의 포화와 후퇴하면서 낙오된 미국 패잔병들을 확인사살하는 일본군이 순찰하는 적진 한복판에서도 도스는 자신의 목숨을 아끼려는 것보다 오히려 대담하다고 할 정도로 적진 속에서 적에게 발각당하지 않으며 굴하지 않고 쓰러진 동료들의 상태를 일일이 확인하였고, 만약 살아있는 동료가 있으면 들쳐업거나 둘러메는 식으로 치료가 가능한 안전한 곳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 명씩 차례대로 들것에 싣거나, 밧줄에 묶어 안전한 지역으로 옮기기 시작한지도 한참 뒤, 심지어 일본군이 숨어서 수류탄을 던지고 있는 참호의, 거의 10미터 앞까지 달려가 쓰러져 있는 동료 7명을 구해낸다.

이렇게 적진 한복판을 구르고 부상병들의 피가 묻은 것 때문에 그가 입고 있던 국방색의 군복은 이미 부상자들의 피로 흠뻑 젖어 검붉은 색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더군다나 도스는 채식주의자라 전투 내내 먹은 것은 지급된 크래커와 주운 코코넛뿐이었다. 본인의 생사도 오락가락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이렇게 필사의 구조작업을 벌인 것이다.

2.2.2. 그 후

고지 전투로부터 2주 뒤, 슈리에서 도스는 수류탄을 발로 차내려다 다리에 파편 17개가 박히는 부상을 입는다. 이로 인해 들것에 실려가는 와중에도 자신보다 부상이 더 심한 동료를 위해 양보하기까지 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 저격수가 쏜 총에 왼팔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지만 부목으로 고정시킨뒤 무사히 귀환한다.

그렇게 수많은 장병들의 생명을 구한 도스는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본진으로 귀환한다. 심지어는 아군 뿐만 아니라 일본군들도 구했다고 한다. 그를 지켜본 동료 전우들은 그가 구한 인원이 100명 이상이라고 증언하였는데, 이에 반해 도스 본인은 50명도 안 될 것이라며 겸손을 보이자 트루먼 대통령이 "그렇다면 50명과 100명 사이인 75명으로 합시다!"라고 말해서 75명으로 정했다고 한다. 사실 도스의 말이 맞다고 해도 적진 한복판에서 부상병 50명 구출만 해도 영웅 대접은 충분히 받을 정도의 큰 공로이며, 일단 몇 명이든 간에 포화가 빗발치는 격전지에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내던진 것 자체가 그의 용맹함과 의무병으로서의 자질을 증명한다.
파일:데스몬드 도스.png
1945년 10월 12일
명예 훈장을 수여 중인 해리 S. 트루먼 미합중국 대통령.[9]

당연히 이런 엄청난 용기와 의무병으로서의 군공을 보여준 데스몬드에게 미국 군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훈장 중 하나인 명예 훈장을 수여하며 그의 영웅적인 공적을 기린다. 문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수여자의 대부분이 사망 후에 가족 대리 수령일만큼 살아서 수령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 수준으로 어렵고, 수여자에게 주어지는 혜택과 각종 법적 대우가 국가의 규모가 규모인 만큼 엄청나다. 수여자들은 자녀가 성적이 좋든 나쁘든 사관학교 진학을 원한다면 무조건 사관학교로 진학이 가능할 정도의 혜택을 주고 있다.

그는 당시를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주실 것을 믿었다"라고 회고한다. 이때 그의 계급은 상등병이었다.

2.3. 전역 이후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인 1946년, 도스는 필리핀 레이테 섬[10]에 주둔하던 중 결핵 진단을 받는다.

이로 인해 1951년 8월 명예전역을 하기 전 5년 반 동안 치료를 받았다.[11] 전역 이후에도 계속된 치료를 받았지만, 과도한 항생제 복용으로 인해 1976년 청력을 잃었다가[12] 1988년 인공 달팽이관 이식 수술 이후에야 청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42년 도로시 슈트(Dorothy Schutte)와 결혼했지만 1991년에 교통사고로 사별하게 되고, 몇 년 후 프란시스 듀만(Frances Duman)과 재혼한다. 전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데스몬드 토미 도스(Desmond "Tommy" Doss) 1명을 두었다.

2006년 3월 23일 향년 87세의 일기로 사망한다. 그의 장례식은 명예훈장 수여자답게 최고의 예우를 받으며 진행되었고, 시신은 채터누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3. 매체에서

  • 그의 영웅적 일대기를 그린 영화 핵소 고지가 2016년 개봉했다. 국내 개봉일은 2017년 2월. 데스몬드 도스 역은 앤드류 가필드가 맡았다. 영화가 끝나면 도스를 비롯한 영화 속 실존 모델들의 인터뷰를 비롯해 이후 도스의 인생을 간단히 요약해 주는 실제 사진들이 나온다. 도스의 활약은 소설로 써도 작위적이라고 할 정도로 믿기 힘든 일이었고, 영화로 만들어도 마찬가지로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이야기이기에 영화에서는 도스의 활약이 일부 축소되어있다.
  • 프랜시스 M. 도스가 집필한 <핵소 고지의 기적>(2017년 번역 발간)은 데스몬드 도스의 생애 전체를 잘 다루고 있다. 그러나 간증집 느낌이 강하게 나는데, 핵소 고지 전투 보다는 신앙생활을 하며 느낀 놀라운 기적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기도하면 어떻게든 해결이 된다는 것인데, 야간 초병근무 중 일본어 소리가 나자 고민 끝에 수류탄 공격을 안 하고 기도만 드렸다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영화 핵소 고지의 마지막 부분에 데스몬드 도스 본인이 직접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는 여기서도 당시 상황에서 계속 기도했다고 말한다. 한 명만 더 구하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한 명을 구하면 또 한 명만 더 구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애초에 그가 총을 들지 않겠다는,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문제가 되었던 원인도 신앙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전지 한복판에서 75명이나 되는 아군을 구출한 행동을 한 것도 신앙 때문이었을 정도니 그의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은 기독교 신앙과 뗄래야 뗄 수가 없고, 책이 간증집처럼 나온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

4. 관련 문서

5. 외부 링크



[1] https://adventistreview.org/news/would-desmond-doss-be-happy-with-hacksaw-ridge/ [2] https://www.bibleinfo.com/en/questions/who-was-desmond-doss-hacksaw-ridge [3] 일각에서는 데스몬드 도스가 집총만 거부했지, 군복무는 했으므로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국제적으로 집총거부 역시 엄연히 양심적 병역거부의 한 종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미국의 사법부도 데스몬드 도스를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다루었다. 병역이란 군인이 되는 것인데, 모든 군인은 역할을 불문하고 유사시 전투병으로 소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 [4]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서는 토요일이다. 정확히는 금요일 해 지고 나서 토요일 해가 질 때까지이다. [5]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집총 거부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바가 없다. 다만 안식일만큼은 교단 이름에 반영되어 있듯 매우 중요시한다. 다만 십계명에 나온 부분이므로 어떤 기독교 종파던 집총거부가 이상한 것은 아니다. [6] 이 사건은 소송이 걸려서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갔다. [7] 공교롭게도 이날은 안식일이었다. [8] 도스는 1대대 B중대 소속이었다. [9] 비전투 병과인 의무병임에도 도스 상병은 V기장(영웅적인 행동을 한 병사의 훈장에 붙는 부착물)이 달린 동성무공훈장을 2회나 복수 수훈하고 상이기장도 2회나 복수 수훈했다. 권총 한 자루 안 들었음에도 도스 상병이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지 알 수 있는 부분. [10] 미국이 일본에게 빼앗긴 필리핀을 탈환하기 위해 벌인 필리핀 탈환전 레이테 만 해전과 연관된 곳이다. [11] 그 당시 출연한 TV 프로그램 영상 This Is Your Life - Desmond Doss 참조. [12] 당시에는 결핵약의 수준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결핵균은 느린 분열로 인하여 분열과정에 작용하는 다수의 항생제들은 크게 효과를 미치지 못한다. 덕분에 당시에 주로 쓰였던 결핵약은 직접 침투해서 결핵균을 죽이는 약인 아미노글리코사이드 계열 중 스트렙토마이신. 문제는 이 계열의 항생제는 청각 신경에 무조건 손상을 준다. 항생제는 대부분 콩팥이나 에서 해독되지만 어쩔 수 없이 일부가 달팽이관 내의 림프액에 축적되고, 청각 신경을 서서히 갉아먹는다. 지금도 결핵은 걸리면 죽는 병은 아니지만 최소 6개월 그중에서 2개월은 항생제를 네 개나 복용해야하는 중한 병이다. 다른 감염증들은 항생제를 네 개나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당시 열악한 의료환경에선 결핵으로 5년 정도 치료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정 안 되면 폐 자체를 절제해버리는 수술까지 했을 정도로 결핵이라는 병은 당대에는 불치에 가까운 질병이었다. 목숨과 청력을 등가교환할 수 있다면 당연히 청력을 포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청각을 상실할 위험성을 알면서도 쓸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현재는 대체 할 수 있는 신약들이 있어 정해진 치료법대로 치료하면 90%이상은 완치되는 질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