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02:38:33

덕수궁 선원전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5
영성문
상림원(배후림) 흥복전 의효전
흥덕전 장옹대 양희당
운교 생물방 소주방 어재실 양이재 함희당
사성당 우중배설청
내재실 선원전
좌중배설청
제기고
숙경재
돈덕전 생양문
환벽정 구성헌 덕경당 가정당 정관헌 수인당 양심당 포덕문
수풍당 흠문각 만희당 석조전 준명당 즉조당
명례궁터
석어당 함유재 구여당
중명전 평성문 석조전
서관
정원 중화전 덕홍전 함녕전 영복당 공시청 비서원 태의원 시강원
강태실 장방처소 광명문 내반원 궁내부 원수부
용강문 승녕부 전무과 중화문
인화문
소방계 조원문 금천교 대한문
운교 건극문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 ||
덕수궁 선원전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경복궁 선원전
景福宮 璿源殿
창덕궁 선원전
昌德宮 璿源殿
덕수궁 선원전
德壽宮 璿源殿
창경궁 경희궁엔 선원전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창덕궁 신선원전조선 멸망 이후 세운 것이다.
정문 · 중문 · 금천교 · 정전 정문 · 정전 · 편전 정문 · 편전 · 내정전 · 동궁 · 선원전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덕수궁 선원전
德壽宮 璿源殿
창덕궁 선원전
昌德宮 璿源殿
창덕궁 신선원전대한제국 멸망 이후 세운 것이다.
정문 · 중문 · 금천교 · 정전 정문 · 정전 · 내정전 · 태후전 · 선원전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colbgcolor=#e3ba62> 덕수궁 선원전
德壽宮 璿源殿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길 ( 정동)
건축시기 1896년 (창건) / 1901년 (이전 중건)
1921년 (철훼)
파일:경운궁 선원전 터.png
<colbgcolor=#e3ba62> 선원전 터
파일:선원전 복원조감도.png
선원전 복원 조감도
1. 개요2. 이름3. 역사4. 부속건물
4.1. 진설청4.2. 내재실4.3. 사성당4.4. 제기고4.5. 어재실4.6. 숙경재4.7. 진전 소주방,진전 생물방

[clearfix]

1. 개요

덕수궁의 선원전이다. 선원전은 역대 들의 어진[1]을 모시고 제사 지내던 진전(眞殿)이다. 쉽게 말해 종묘 궁궐 밖에 있는,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사당이라면, 선원전은 궁궐 안에 있는 왕실의 사당이었다.

덕수궁 서북쪽, 지금의 구세군회관과 덕수초등학교 맞은 편에 있었다.

2. 이름

'선원(璿源)' 뜻은 ' 왕실의 유구한 뿌리'로, 《 구당서》의 〈열전 - 공의태자 소〉에서 유래했다. 글자 뜻을 그대로 풀면 '아름다운 옥(璿)의 뿌리(源)'로, 왕실에 비유하여 '구슬의 근원', 또는 '구슬같은 뿌리'란 의미로 사용한 듯 하다. #[2][3]

3. 역사

1896년( 건양 원년) 2월, 아관파천으로 고종 경복궁을 떠났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할 곳을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4]으로 정했다. 그런데 경운궁은 애초 임진왜란 선조가 머물 곳이 없어 월산대군[5]과 그 주변 민가 몇 채를 아우른 임시 이었기에 인조 때 거의 대부분의 건물을 원 주인에게 돌려준 상태였다. 따라서 그런 경운궁에 머물려면 대공사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1896년부터 경운궁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1년 뒤 1897년(건양 2년) 2월 고종이 환궁할 당시에도 공사는 계속 진행 중이었고, 특히 중요한 건물 중 하나인, 진전 선원전 역시 완공을 못했다. 어진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 당시 이미 경복궁 선원전에서 경운궁 즉조당으로 옮겨와 모셨는데, 즉조당은 너무 좁은데다 다른 용도로 써야 해서 고종이 빨리 지으라고 닦달 조령을 내려 그 해 4월 경에 공사를 끝냈다. 그리고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어진을 봉안했다. 이 때 위치는 포덕문 안쪽, 그러니까 지금의 태평로 큰 길의 일부와 덕수궁 연못 언저리에 있었다. #
파일:경운궁 영성문.jpg
<colbgcolor=#e3ba62> 선원전 영역의 정문이 된 영성문. 순명효황후(당시 황태자비)의 국장 때 촬영한 사진이다.
그러나 1900년( 광무 4년) 화재로 선원전 건물과 안에 모신 어진이 전부 불탔다. # 1년 뒤 복구했는데 원래 자리에 다시 짓지 않고 경운궁 서북쪽에 있는 영성문(永成門) 안쪽의 수어청 자리에 새로 건립했으며 어진은 각 지방에 흩어진 그림을 모사[6]하여 봉안했다. 그래서 선원전 영역을 속칭 '영성문 대궐(永成門 大闕)'로 불렀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이곳에서 꾸준히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1919년 고종 승하한 이후 일제가 1921년에 덕수궁(경운궁)의 선원전을 옮겨다 창덕궁 서북쪽 옛 대보단 자리에 짓고 새로운 선원전으로 사용하게 하면서 덕수궁의 선원전 영역은 비었다.
파일:AKR20180801153000005_02_i_P4.jpg
<colbgcolor=#e3ba62> 선원전 터에 들어선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
부지는 조선저축은행, 경성일보사 소유로 넘어갔다. 해방 이후에는 경기여자고등학교가 들어섰다가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소유했다. 2003년 6월 미국대사관 기숙사 건립을 위해 문화재 지표 조사를 하던 도중 덕수궁 선원전 터를 확인했다. 선원전 터를 용산구 미군기지 내 부지와 맞교환하기로 합의하여 2011년 다시 한국이 소유했다.
파일:고종의 길.jpg
<colbgcolor=#e3ba62> 고종의 길
이후 미국 대사관저와 선원전 부지 사이에 경계벽을 설치했다. 2017년에는 선원전 터 내에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걸었던 것으로 보이는 '고종의 길'을 완공하여 일반에 개방했다.[7]
파일:덕수궁 선원전 복원계획.jpg
<colbgcolor=#e3ba62> 덕수궁 선원전 복원계획을 담은 그림
문화재청은 2038년까지 3단계에 걸쳐 선원전(璿源殿)과 빈전인 흥덕전, 혼전인 흥복전 등 주요 전각과 부속 건물(54동), 궁장(宮牆) 등을 복원할 계획을 수립했다. #

2022년 11월, 선원전 터의 기초 발굴조사가 마무리 되었다고 한다. #

2024년 7월, 흥덕전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흔적들이 발굴되었다. 왕실의 주요 장례 때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빈전으로 주로 사용했던 흥덕전의 대문에 해당하는 흠사문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돌 옆으로 나무 기둥이나 벽이 들어섰던 자리가 선명하게 발견했다. 대문 주변의 좁은 도랑의 물이 빠져나가도록 만든 배수로도 확인되었다.

4. 부속건물

4.1. 진설청

진설청은 선원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음식, 다과 등을 준비하고 차려놓는 작은 건물이다. 덕수궁 선원전의 진설청은 선원전 본채를 기준으로 전면 옆에 각각 1채 씩 총 2채가 있었고 경운궁 배치도 등에는 배설청으로 표기되어있다. 남서쪽의 좌중배설청은 4칸,북동쪽의 우중배설청은 3칸으로 구성되었다.

4.2. 내재실

덕수궁 선원전 후면 우측에 연결되어 있으며 제관(祭官)이 머무는 곳이었다.

4.3. 사성당

덕수궁 선원전 우측에 있는 어진을 모사하거나 선원전의 보수를 하는등의 사정이 있을때 어진을 임시로 보관하는 건물인 이안청(移安廳)이었다.

4.4. 제기고

덕수궁 선원전 우측에 있는 제기를 보관하는 곳이었다.

4.5. 어재실

덕수궁 선원전 남동쪽에 있는 왕의 재실이었다.

4.6. 숙경재

덕수궁 선원전 남동쪽에 있는 왕실 여성들의 재실이었다.

4.7. 진전 소주방,진전 생물방

덕수궁 선원전 북동쪽에 있는 제사 음식을 만드는 곳이었다.
[1] 御眞. 임금 초상화. [2] 그래서 조선 시대 왕실 족보 이름도 《선원록(璿源錄)》, 《선원계보(璿源系譜)》이다. [3] 또한 전주 이씨 가문에서 계통을 분류할 때 선원선계(왕실 역사 시작 이전[8]), 선원세계(왕통), 선원파계(왕자, 왕자군에서 갈라진 계통)로 나눈다. [4] 지금의 덕수궁. [5] 성종의 형. [6] 摹寫. 베껴 그리다. [7] 다만 해당 길에 대한 논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