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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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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면세점 앞[1] 서울특별시의회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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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빌딩 앞 덕수궁 대한문 광장

1. 개요2. 역사
2.1. 조선2.2. 대한제국2.3. 일제강점기2.4. 광복 이후2.5. 21세기

1. 개요

숭례문로터리에서 세종로사거리( 광화문광장사거리)에 이르는 연장 1.1㎞, 폭 50m, 왕복 10차선의 도로. 이름은 조선 시대 임진왜란 이전까지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곳인 태평관(太平館)에서 따왔다. 태평관은 현재의 숭례문 옆 대한상공회의소 부지에 있었다고 한다.

기점인 숭례문로터리에서 남대문로, 소월로, 칠패로와 교차했으며, 종점인 세종로사거리에서 세종로로 직결되었었고 새문안로, 종로와 교차했었다.

현재는 세종로와 통합되어 세종대로로 개편되었다.

2. 역사

2.1. 조선

경운궁(慶運宮), 혹은 서궁(西宮)이라 불리던 지금의 덕수궁과 군기시, 명나라 사신을 대접하던 태평관이 있었다. 현 서울시청 부지엔 군기시가 자리했고, 이후 그 부지에 지금의 서울특별시청이 된 경성부청이 들어섰다.

본래 조선시대 내내 도성의 남북을 잇는 중심가로는 남대문로였고, 실제로도 남쪽(숭례문에서 북측 방향) 시점에서 육조거리에 가려면, 남대문로를 통해서 보신각(현 종로1가)까지 간 뒤에 좌회전을 한 후 걸어간 다음에 비로소 육조거리의 끝인 현 세종대로 사거리와 그 앞에 경복궁 광화문이 보이는 구조였다.

지금은 사대문 안의 중심이 세종대로 사거리가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흥인지문, 숭례문, 돈의문을 잇는 도로의 중점이 종로1가였기 때문에 파루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보신각이 그 위치에 지어졌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보신각은 조금 중심에서 떨어진 위치에 있게 된 것도 이 이유이다.

2.2. 대한제국

조선시대부터 있던 도로는 아니지만 일제가 만든 도로는 아니다. 대한제국 시절 방사형 도시계획의 일환이었고 고종이 다닐만큼 번듯한 길이었음이 문헌에 남아있다. 정확히 말하면 현존하는 몇 안되는 광무개혁의 성과인 것이다.

위처럼 도로가 바뀌게 된 이유는 구한말의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기를 느낀 고종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이른바 아관파천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관파천 이후에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고종은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미국, 영국의 공사관이 인근에 있는 덕수궁을 정궁으로 삼았고, 새로 정궁이 된 덕수궁을 중심으로 한성의 도시계획을 다시 짜게 된다. 또한 여기서 대한제국의 황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덕수궁 대한문을 중심으로 방사형의 도시계획이 완성되고, 덕수궁의 동쪽 궁장을 끼고 세종대로사거리에서 숭례문까지 이어지는 이 태평로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당시에는 덕수궁의 영역이 지금의 서울광장 쪽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지금처럼 곧게 뻗은 형태는 아니었고, 덕수궁 인근에서 지금의 소공로 방향으로 꺾여있었다. 정확히는 숭례문에서 올라와서 직진하면 지금의 을지로로 들어가는 형태였고, 숭례문 쪽에서 광화문 방면으로 가려면 대한문을 끼고 좌회전을 하는 구조였다.

2.3. 일제강점기

파일:태평로.jpg
경술국치 이후 경성부로 편입됐고, 청계천(현 청계광장)부터 덕수궁 대한문에 이르는 구간과 그 일대를 태평로1정목(太平路一丁目), 덕수궁 대한문부터 숭례문에 이르는 구간과 그 일대를 태평로2정목(太平路二丁目)으로 하는 행정구역이 신설되었다. 이는 광복 이후 태평로1가, 태평로2가가 된다.

조선총독부가 1912년에 태평로를 확장했으며, 확장 도로의 1/3 가량이 덕수궁 권역이었다. 그러나 직선화한다는 구실로 일제는 덕수궁의 동쪽 궐내각사의 절반을 날려 버렸다. 지금처럼 숭례문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직진하여 바로 통할 수 있는 구조가 된 것도 1912년 도로 확장 때부터였다.

1919년 고종이 의문사하면서 장례 절차 당시 이곳에 군중들이 모였으며, 이후 3.1 운동 때도 군중들은 여기에 모였다.

1927년 명동에 있었던 경성부청[2]이 현재의 서울시청 자리에 있던 경성일보[3]가 이전한 자리에 크고 아름답게 지어지면서, 경운궁/덕수궁 앞 광장은 일제가 지은 건물에게 이름을 빼앗기게 된다. 서울특별시청의 구 본관(현 서울도서관)도 이때 들어섰다.[4]

2.4. 광복 이후

1954년부터 1975년까지 이곳의 부민관(현 서울시의회)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했었다. 현재는 등록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현 서울특별시의회 본관 건물도 태평로1가에 있다. 서울특별시청, 서울특별시의회 건물은 마주 보고 있다.
파일:external/blogimg.hani.co.kr/48421_34519.jpg_M502.jpg

한국 전쟁 직후에는 장훈( 서울특별시청 도시계획 과장)에 의해서 세종로 너비 2배만큼( 53미터 100미터) 넓혔다. 1968년에 이르러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덕수궁 권역을 잘라먹었다. 대한문은 경복궁 동십자각처럼 도로 한가운데에 남는 형태가 되었는데, 덕수궁 대한문 오른편의 원수부 건물과, 궐내각사 영역이 훼손되고 만다.
1967년의 모습 (영화 '4월이 가면' 中)
영화( 문희, 성훈 주연의 '4월이 가면')에서는 확장 직전인 1967년 당시 주변 모습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도로공사로 1970년 원래의 위치로부터 20m 가량 서쪽으로 대한문이 밀려 났다. 문화재 보호에 엄격한 지금 관점으로는 기겁할 일이지만 당시에는 일단 먹고 사는 산업화가 우선 순위였기에 가능한 일.[5] 결국 현재 덕수궁 권역은 원래 크기의 3분의 1 정도로 줄어들었다.
파일:external/www.museum.seoul.kr/img_07_96.gif
1977년-78년으로 추정되는 모습

태평로의 대한문 일대는 이후 시청 앞 광장으로 거듭나면서 온갖 민주화 운동과 시위의 장으로 거듭났다. 남대문로부터 태평로 일대에서는 4.19 혁명, 6.10 민주 항쟁, 6.3 항쟁, 서울의 봄 등의 중심이 되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서울 지하철 2호선 시청역이 이 도로 밑에 건설됐다.

2.5. 21세기

2004년, 서울시청 앞에 서울광장이 조성됐다. 이곳에서 특히 집회가 많이 열렸다. 이 내용부터는 해당 문서 참고.

2010년에 세종로와 통합되어 도로명이 세종대로(世宗大路)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연선 건물들도 해당 문서로 이동 및 통폐합됐다.) 단, 도로명과는 별개로 태평로는 그 자체가 법정동 명칭이기도 하다. (태평로1가, 태평로2가)

현재는 옛날만큼의 활기를 띄고 있진 않지만 조용한 문화적 지리로 변화하고 있다. 주요 간선도로인 만큼 간혹 세종로와 태평로는 엄청난 수의 차량이 뒤엉키는 장면도 종종 볼 수 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태평로2가(시청역~숭례문) 일대에서는 거의 매주 토요일마다 민주당계 지지 세력의 집회/시위가 꾸준히 벌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


[1] 전방의 사거리 기준으로 이북(이순신 장군 동상이 보이는 쪽)부터는 세종로이며, 그 이남부터를 태평로로 구분한다. 2010년부터는 이 둘을 묶어 세종대로로 칭한다. [2] 당시 부지가 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본관(당시 미쓰코시 경성점)과 한국SC은행 제일지점(당시 조선저축은행 본점)을 합친 정도였다. 참고로 명동 등 남촌지역(현재의 서울 중구)은 원래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지역이었으며, 그 중심가였던 조선은행 앞은 현재에도 서울의 주요 광장 중 하나이다. [3] 통감부/ 조선총독부 기관지로서 친일 신문이었다. 또한 한일 합방 직후 총독부는 반일 민족 신문이었던 대한매일신보를 인수하여 매일신보로 이름을 바꾸고, 경성일보의 자매지, 총독부의 기관지로 삼아, 친일 신문으로 만들어버린다. 광복 이후 경성일보는 폐간되고, 매일신보는 이름을 바꾸어 살아남았는데, 바로 현재의 서울신문이다. [4] 현 지번 주소는 태평로1가 31이다. [5] 독립문 역시 고가도로 바로 밑에 걸치게 되어 위치를 옮겨야 했다. 특히 독립문의 경우 본래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지은 것이라 위치 자체가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도 얄짤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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