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3-14 21:44:26

덕수궁 함유재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5
영성문
상림원(배후림) 흥복전 의효전
흥덕전 장옹대 양희당
운교 생물방 소주방 어재실 양이재 함희당
사성당 우중배설청
내재실 선원전
좌중배설청
제기고
숙경재
돈덕전 생양문
환벽정 구성헌 덕경당 가정당 정관헌 수인당 양심당 포덕문
수풍당 흠문각 만희당 석조전 준명당 즉조당
명례궁터
석어당 함유재 구여당
중명전 평성문 석조전
서관
정원 중화전 덕홍전 함녕전 영복당 공시청 비서원 태의원 시강원
강태실 장방처소 광명문 내반원 궁내부 원수부
용강문 승녕부 전무과 중화문
인화문
소방계 조원문 금천교 대한문
운교 건극문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 ||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colbgcolor=#e3ba62> 덕수궁 함유재
德壽宮 咸有齋
위치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 정동 5-1)
건축시기 1896년 (창건) / 1904년 (중건)
1921년 ~ 1926년 사이 (철훼)
파일:함유재 터.png
<colbgcolor=#e3ba62> 하늘색 원 안이 함유재 터이다.

1. 개요2. 역사3. 구조

[clearfix]

1. 개요

덕수궁에 있었던 건물이다. 정관헌의 남쪽, 덕홍전의 북쪽, 함녕전의 서북쪽에 있었다.

이름 '함유(咸有)'는 《서경 - 상서》 편에 나온 '함유일덕(咸有一德)'에서 유래했다. '임금과 신하가 다(咸) 한 가지 덕(一德)이 있다(有)'는 뜻이다.

2. 역사

1896년( 건양 원년) 2월에 고종 왕실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갔다. 언제까지 러시아공사관에만 머물 수 없었던 고종은 환궁처[1]를 근처에 있는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정했다.

그러나 경운궁은 본래 임진왜란 당시 월산대군[2]의 사저와 근처 민가를 합쳐 만든 임시 행궁이었고, 그나마도 인조 때에 즉조당과 그 주변 별채를 제외하고는 전부 본 주인에게 돌려준 상태였다. 그래서 번듯한 건물이 없었기에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1896년부터 경운궁을 궁궐답게 만드는 대공사를 진행했다. 그 때 지은 건물 중 하나가 바로 함유재이다. 함유재 공사는 몇 달 만에 끝났다. 그래서 1897년( 건양 2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돌아간 뒤 바로 사용할 수 있었다.

고종은 함유재를 신하들과 만나 정사를 펼치는 곳으로 활용했다. # 경운궁에서는 편전을 한 건물로 고정하지 않고 여러 건물들을 사용했는데 함유재도 그 중 하나였던 듯하다. 《 승정원일기》에는 1898년( 광무 2년)과 1899년(광무 3년)에 함유재에서 주요 대신 및 각 부처의 신하들을 소견한 기록이 있다. # # # 그 중 두 번은 고종의 생일(만수성절)을 맞아 신하들이 경하하러 온 내용이다.

1904년( 광무 8년) 함녕전에서 일어난 대화재로 불탔다가 곧 재건했다. 일제강점기 초반에도 고종은 이곳을 활용했다. 1912년에는 잠시 옮겨가 머물렀고 #, 1915년에는 도쿄가는 것을 고하러 온 데라우치 마사다케 조선 총독을 만나기도 했다. #

1919년 고종 승하한 후 덕수궁[3]은 빈 궁이 되었고, 일제는 덕수궁 건물 대부분을 철거 및 매각하면서 함유재도 헐었다. 철거 시기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1922년에 의민태자(영친왕)의 아들 이진이 덕수궁에서 사망한 후 빈소로 썼다는 《 매일신보》의 기사와 1926년 경에 작성한 《덕수궁각건물배치도》에 보이지 않는 것을 종합해보면 저 사이에 헌 듯 하다. #

3. 구조


파일:함유재 의궤.png }}} ||
<colbgcolor=#e3ba62> 《경운궁영건도감의궤》의 함유재[4]
1904년(광무 8년)에 불탄 후 재건했을 때의 공사보고서인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 함유재의 형태가 그려져 있다. 맞배지붕이고 정면은 6칸으로, 양측면 벽을 벽돌로 쌓은 형태이다.

[1] 환궁은 임금이 궁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2] 성종의 형. [3] 1907년 고종이 퇴위당한 후, 경운궁 이름은 ' 상황의 궁'이란 뜻의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4] 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