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8:02:06

대니얼 아랍 모이

파일:케냐 국장.svg
케냐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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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대니얼 아랍 모이
Daniel arap Moi
CGH
파일:external/warsugannews.com/arap-moi.jpg
본명 대니얼 토로이티치 아랍 모이
Daniel Toroitich arap Moi
출생 1924년 9월 2일
영국령 케냐 바린고 사초
사망 2020년 2월 4일 (향년 95세)
케냐 나이로비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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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정치인
소속 케냐 아프리카 민족동맹
서명
파일:대니얼 아랍 모이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집권 전2.2. 집권 후
2.2.1. 1982년 쿠데타 미수 사건
2.3. 말년
3. 부정부패
3.1. 골든버그 스캔들(Goldenberg scandal)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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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케냐 독재자 1978년에서 2002년까지 24년 동안 케냐 대통령으로 재임했으며, 아프리카에서 가장 부패한 독재자 중 하나이자 아프리카에서 그나마 부유한 국가였던 케냐를 말아먹은 최악의 독재자로 꼽힌다.

2. 생애

2.1. 집권 전

1924년 9월 2일에 영국령 케냐의 바린고의 사초 구역에서 칼렌지족 계열의 투겐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4세에 아버지를 잃은 모이는 어머니와 형 밑에서 자라며 목동으로 일하다가 1934년에 기독교 선교 학교에 입학해 기독교로 개종하고 '대니얼'이라는 기독교식 이름을 얻게 된다. 1945년부터 1947년까지 교사 훈련을 받고는 교사 훈련 중이던 1946년부터 1955년까지 교사로 일했다. 1950년에는 기독교인 집안 출신의 레나 보멧(Lena Bomett, ?~2004)[1]과 결혼하여 5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낳는다.

모이는 1955년에 영국 식민통치기구인 입법위원회 위원으로 정치에 입문했고, 1957년에 재선된 후 1960년에는 케냐 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랭커스터 하우스 회의에서 케냐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기도 했고, 1961년에는 독립 전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1960년에는 조모 케냐타가 이끄며 중앙집권 정부를 지지하는 케냐 아프리카 민족 연합(KANU)의 정치적 대안으로 로날드 은갈라(Ronald Ngala)와 함께 연방제를 지지하는 케냐 아프리카 민주 연합 (KADU)을 설립했으나, 1963년 12월 12일에 케냐가 독립하자 모이는 케냐의 초대 대통령이 된 케냐타의 제안을 받아들여 1964년에 KADU를 해산하고 KANU에 합류했고, 1964년에는 내무부 장관으로 승진했으며, 1967년부터는 부통령직도 겸임하기에 이른다.

2.2. 집권 후

1978년 8월 22일에 조모 케냐타가 사망하자 부통령이던 모이는 곧바로 대통령직과 KANU 의장직을 승계했는데, 집권 초반에 모이는 '평화, 사랑, 통합'의 '냐요(Nyayo) 철학'을 내세우고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자신을 남들을 만나는 것을 꺼리던 케냐타와 대비시키며 국민들을 안심시켰으나, 곧 본색을 드러내 24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식민지 시대에 쓰였던 온갖 악법을 동원하여 철권통치를 했다. 대표적으로 악명높은 법은 9인 이상이 모일 때 반드시 허가를 받도록 한 공공질서법과 가정집에서 여는 정치집회도 해산을 명령할 수 있는 주요공무권한법 등이 있다. 1979년, 1983년, 1988년에 대통령 선거가 열렸는데 이 선거에서 단독 후보로 출마한 모이는 항상 98%대의 찬성으로 당선되었다.

또한 자신에게 모든 권한을 집중시켜서 자신만이 케냐의 그 어떠한 일도 자신의 허락 없이는 실행될 수 없도록 만들었으며, 물론 개헌을 통해 총리도 두지 않고 각료와 법관 군지휘관 등을 직접 임명하며 통치를 했다. 특히 정적들을 “쥐잡듯 없애겠다”는 자신의 공언대로 정적들을 철저하게 제거했는데, 케냐의 지식인들이 이런 모이의 독재에 반발하며 교육 기관들에서 민주적 개혁을 도입하려고 해도 비밀경찰들이 찾아와 잡아가 재판도 없이 구금당하고는 냐요 하우스(Nyayo House)라는 27층짜리 정부 건물의 지하 고문실에서 고문을 당했으며, 심지어 모이의 정적을 변호한 변호사가 재판 없이 구금되기도 했고, 2천 건의 '자동차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2] 이런 독재정권에 분노한 반정부 시위도 잦아졌는데 특히 1990년에는 반정부 시위가 약 100명이 사망한 유혈 사태로 번지기도 했으며, 1997년 7월에는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한 뒤 성당에 난입해 신부를 구타하는 등 무차별 진압작전을 벌여 케냐 국민들이 분노하는 일도 벌어졌다.

게다가 모이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도 실시하여 케냐 통화의 모든 단위는 물론이고 온갖 장소마다 자신의 초상화를 걸게 했으며,[3] 장관들에게 그의 사진이 새겨진 옷깃 핀을 착용하게 했고, 거리, 학교, 경기장, 대학, 공항, 기념비 등에 자신의 이름을 붙였고, 모이를 찬양하는 노래가 국가의 승인 하에 만들어졌으며, 소위 땡전뉴스와 마찬가지로 케냐의 라디오와 TV 뉴스의 절반은 모이의 동정으로만 채워졌다.

이러한 아랍 모이의 장기독재와 부정부패로 인해 아프리카에서 비교적 부국이던 케냐는 빈국으로 전락했다. 조모 케냐타 시절의 경제성장률은 연 6%를 기록해서 이때의 경제성장을 지속적으로 이어갔다면 케냐가 중진국은 될수있었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다. 사실 초기에 모이 정부는 반공주의를 내세웠기에 나라를 안정적으로 통치하면서 소련이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탄자니아 넘어로 영향력을 확산하는 것을 방지하는 정부로 여겨져 냉전 시기에 많은 서방의 지원을 받았고, 서방 동맹국들은 모이의 독재를 묵인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모이 정권은 냉전 종식과 함께 유가 상승과 농산물 가격 하락으로 국가 경제가 침체되었고, 서방권도 모이에 점차 적대적으로 바뀌었고, 경제 및 정치 개혁이 준수될 때까지 대외 원조가 보류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케냐 주재 미국 대사 스미스 헴스톤(Smith Hempstone, 1929~2006)이 그에게 다당제를 도입하도록 설득하자 모이는 이에 불만을 품으면서도[4] 1991년 12월에 다당제를 승인하고는 1992년 12월 29일에 열린 대통령 선거[5]에서 야권의 분열, 의도적인 민족 분열[6], 부정선거를 통해 36.35%의 득표율로 당선되었고, 1997년 12월 29일에 있던 대통령 선거에서도 비슷한 수법을 써서 40.4%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모이는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2선만 허용하는 헌법상 출마가 금지되었고, 그의 지지자들 중 일부는 그가 3선에 출마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려고 했지만 모이는 조모 케냐타의 아들인 우후루 케냐타를 후계자로 삼고자 하여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2002년 12월 29일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케냐타는 야당이 연합하여 내세우며 62.2%의 득표율로 당선된 음와이 키바키[7]에게 패배했고,[8] 모이는 2002년 12월 30일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한편 1992년 케냐에는 반군들에게 축출되고 고국에서 쫓겨난 소말리아 시아드 바레 전 대통령이 망명을 신청했으나 소말리아 난민들이 모이 대통령에게 강력하게 항의하자 모이는 바레의 망명 신청을 거절했고,[9] 결국 바레는 나이지리아 망명을 승인받고는 1995년에 나이지리아에서 사망한다.

2.2.1. 1982년 쿠데타 미수 사건

파일:히스기야 오추카.jpg
1982년 케냐 쿠데타의 주범, 히스기야 오추카(Hezekiah Rabala Ochuka, 1953~1987) 일등병[10]

1982년 8월 1일에 히스기야 오추카 일등병[11][12]이 이끄는 케냐 공군의 하급 장교들이 쿠데타를 시도했는데, 이 쿠데타는 인류 역사상 가장 황당한 쿠데타이자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13]의 확장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속된 말로 막장 그 자체였다.

오추카는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와 군대의 고위 지도부 대부분이 니에리[14]의 농업 박람회에 방문한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그는 나이로비에 있는 대통령 관저, 나이로비 주 하원, 일반 서비스 부대(GSU)[15] 본부를 폭격하도록 브람웰 인제니 은제레만(Bramwel Injeni Njereman, ?~1987) 상등병에게 명령했고, 은제레만은 이 명령에 따라 베테랑 조종사 3명( 대위 2명, 소령 1명)에게 총구를 겨누며 F-5[16]를 조종하도록 강요했는데, 이는 은제레만 상등병이 제트 전투기를 조종한 경험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 조종사들은 겉으로는 쿠데타군의 말을 듣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이 폭탄을 케냐의 산에 있는 숲 속에 투척하며 쿠데타군의 명령에 따르는 것을 거부했다.[17]

심지어 쿠데타에 참여한 대부분의 군인들은 정부군에 대항할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주제에 육군 본부를 점령하거나 대통령과 장관들을 체포하러 가는 대신 술에 취한 채로 나이로비를 약탈했고, 쿠데타 지도자였던 오추카도 나이로비의 라디오 방송국의 진행자들을 데리러 가는 데에 급급했으며, 쿠데타군들은 정부군에 반격할 준비도 전혀 되지 않았던 데다가 군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나마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하는 것은 성공했으나, 라디오에서 방송할 군악을 찾지 못해 밥 말리 지미 클리프의 곡을 '권력'이라는 짧은 구호를 반복하는 것과 함께 틀었다고 한다.

게다가 케냐군 수뇌부들은 쿠데타 1개월 전부터 쿠데타 날짜는 물론이고 쿠데타가 일어날 시간과 쿠데타 주도자의 이름까지도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모이 대통령조차 이 쿠데타가 일어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케냐 보안정보국(DSI) 수장 제임스 카뇨투(James Kanyotu, 1936~2008)가 군대에 잠입해 쿠데타 음모를 알아채고는 모이에게 쿠데타를 모의하는 장교들을 체포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요청했으나, 모이는 경찰이 군사적 체포에 연루되는 것은 불복종과 같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고, '8월 2일에 군 내부에서 이 문제를 처리해도 된다'며 쿠데타 예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18]

오추카는 이 어설픈 쿠데타로 6시간 동안 '인민 구속 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케냐 전역을 장악했으나 마하무드 모하메드(Mahamoud Mohamed) 육군 사령관에게 진압당했고,[19] 이로 인해 쿠데타에 참여한 300명을 포함한 2,000명의 공군들이 체포되었으며, 이들 중 900명 이상이 투옥되었으나, 오추카를 위시한 쿠데타 주도 세력들은 우간다를 거쳐 탄자니아로 도피했다.

파일:수갑찬오추카.webp
수갑을 찬 오추카.

그러나 오추카는 케냐로 송환되었고, 1987년 7월에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987년 7월 9일에 다른 쿠데타 주도자 3명과 함께[20] 처형당했다. 이들은 케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한 마지막 사람들이었다.[21]

일각에서는 그의 쿠데타가 독재자 모이를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였다며 오추카를 재평가하고자 하나, 애초에 오추카가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는 고국의 민주화가 아닌 권력욕 때문이었고,[22][23] 쿠데타와 이로 인해 야기된 군인과 민간인들의 약탈, 정부군의 쿠데타 진압 과정에서 100명 이상의 군인과 200명 이상의 민간인[24]이 사망했으며,[25] 경제적 피해도 5천만 달러(2023년 환율로 약 1억 5,700만 달러)[26]에 달했으니 모이가 전혀 독재자가 아니었더라도 오추카가 내란수괴로서 사형을 당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일 수밖에 없었다.

여하튼 이 희대의(?) 쿠데타를 극복한 모이는 이를 역으로 이용, 정적들을 사법적으로 조사하여 케냐타의 다른 측근들을 반역자로 규정하고는 의회에서 '비상 권한'을 부여하는 법률을 통과시키게 한 후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리고 쿠데타 피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군대와 경찰은 지휘 구조가 개편되고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이들은 모이의 충성파들이 이끌게 되었고, 지방 행정과 공무원도 대통령에 직속시켰으며, 입법부는 행정부 견제가 불가능해지며 ' 도장만 찍을 수 있게 되었고', 사법부 역시 대통령에게 종속되었다. 물론 1978년에 중단되었던 재판 없는 구금도 1982년에 헌법을 개정하면서 다시 시작되었고, 언론, 표현, 결사 및 운동의 자유 역시 제약되었으며, 모이의 우상화도 이 쿠데타 이후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전술한 것처럼 모이는 1982년에 개헌을 통해 KANU를 나라의 유일한 합법 정당으로 만들며 야당 세력들을 지하로 들어가게 만들었다.[27] 때문에 일각에서는 독재 권력과 반대파 탄압을 강화하기 위해 쿠데타 시도를 알면서도 일부러 냅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했을 정도.

한편 쿠데타에 반정부 대학생들이 연루되었다는 의혹 때문에 나이로비 대학도 1년간 폐쇄되었고, 케냐 공군도 일시적으로 해산되었다. 이후 케냐 공군은 부활하긴 했으나 상부의 매우 엄격한 통제를 거쳐야 했고, 쿠데타 시도 12년 후인 1994년에 독립적인 지위를 되찾게 된다.

1982년 케냐 쿠데타에 대한 분석글. 기사 제목도 '케냐를 바꾼 허세의 순간'이다.

그러나 42년 후인 2024년 6월 26일, 볼리비아에서 이 쿠데타와 비견될 만한 엽기적인 쿠데타가 터졌다.[28][29]

2.3. 말년

퇴임 후에 모이는 2007년에 수단의 특별 평화 특사로 임명되거나 케냐의 정치적 일들에 목소리를 내기도 했으나, 2017년부터 치매를 앓고 시작한 후 2019년 10월에는 입원하여 흉수 진단을 받았고, 이후 호흡기 합병증과 위장 출혈로 인한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2020년 2월 4일 이른 아침에 향년 95세를 일기로 나이로비의 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그의 죽음 후 케냐 정부는 국가 애도를 선포했으며, 모이의 시신은 5만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장으로 성대하게 치러진 후 나쿠루[30] 지역의 카바라크에 있는 부인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한편 모이의 막내아들 기드온 모이(Gideon Moi, 1963~)는 아들을 대통령으로 앉히려는 아버지의 후원으로 정치계에 입문하여 2012년부터 KANU의 대표를 역임하고 있으며, 2013년부터 2022년까지 케냐의 상원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3. 부정부패

케냐는 모이가 물러난지 20년도 더 지나고 경제가 어느 정도 성장했다는 2023년 기준으로도 1인당 GDP가 195개국 중 148위인 2,269$에 불과한 최빈국에 준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외국에서 빌려오는 돈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아랍 모이 대통령은 국민들로부터 걷어들이는 세금은 물론이고, 외국에서 빌려온 돈까지 그의 개인재산으로 빼돌려 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국가를 발전시키는데 써야 할 돈이 케냐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 배를 불리는데 사용된 것이다.

그래서 아랍 모이가 자신이 돈을 어디에 썼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는데,대표적인 게 케냐의 고속도로다. 케냐는 도로 포장 상태가 꽤 안 좋은 편인데 사파리 관광을 위해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갑자기 도로가 굉장히 좋아지게 되는 부분이 있다. 이에 케냐 운전수에게 '이게 어떻게 된거냐' 라 물으니 운전사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이 길이 대통령 고향으로 가는 길이라 그렇다'고 말한다고. 한마디로 자신이 다니는 길만 골라서 공사를 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케냐에선 길의 질에 따라서 이게 대통령이 다니는 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아랍 모이가 대통령으로서 긁어모은 재산은, 그가 물러날 2002년 기준으로 그를 비공식적인 세계 10대 부자로 만들 정도였다. 그래서 아랍 모이가 대통령직을 그만둘 때 케냐 정부는 스위스 은행에 아랍 모이의 돈 반환을 요청했을 정도였다.

2007년 8월 31일에는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국제 리스크 컨설턴트인 크롤 사의 110페이지 분량 보고서에 의해 대니엘 아랍 모이와 그 측근들이 얽힌 수많은 부정부패가 밝혀지기도 했는데, 이것이 폭로되자 해외에서는 그의 이러한 도둑정치가 ' 모부투 세세 세코와 동등한 수준'이라며 맹비난했다. 모이와 그의 측근들은 페이퍼 컴퍼니 등의 불법을 통해 정확히 28개국에 10억 파운드 가량을 횡령했다고 하며, 이 재산들은 모이와 두 아들이 세계 각지의 부동산에 투자하는 데 사용되었다.[31] 그리고 모이 일가는 케냐, 제네바, 프랑크푸르트 등지에서 4억 달러를 세탁하기도 했는데, 모이의 아들인 필립과 기드온은 각각 3.84억 파운드/5.5억 파운드를 보유했다고 한다. 그리고 모이의 측근 중 한 명은 벨기에에 은행을 소유하고는 이 돈을 케냐로부터 온 돈을 세탁하는 데에 썼으며, 심지어 다른 측근들은 한술 더 떠 아예 이탈리아의 마약왕과 결탁하여 위조지폐를 인쇄하기도 했다. #

3.1. 골든버그 스캔들(Goldenberg scandal)

모이 정부가 IMF의 지시에 따라 경제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한 1991년부터 데이비드 무냐케이(David Munyakei, 1968~2006)[32]의 내부고발이 일어난 1993년까지는 모이 시기 케냐의 부정부패 사건 중 가장 악명 높은 '골든버그 스캔들'이 일어났다. 손실 금액을 GDP를 기준으로 놓고 봐야 할 정도로 막대한 금액이 빠져나갔다는 것과 정권 실세들이 대거 연루된 부정부패 사건이란 것을 감안하면 케냐판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라 봐도 손색이 없다.

골든버그 스캔들은 케냐 정부가 자국의 회사인 골든버그 인터내셔널(Goldenberg International)[33]에 국가 GDP의 약 10%에 달하는 6억 달러를 금과 다이아몬드 수출 보조금으로 준 사건이다. 대부분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케냐 정부는 주요 국제 기업들에게 특정 수출품에 대해 세금 면제를 허용하고 때때로 보조금을 지급했으며, 통상적으로는 세계 시장에서 상품을 판매한 후 경화(미국 달러)를 가져와 케냐 실링(KES)으로 케냐 중앙 은행에 예치한 수출업자는 은행으로부터 교환 금액의 20%에 달하는 금액을 보조금으로서 받아왔으나, 골든버그 인터내셔널사는 케냐 정부로부터 수수료로 금 수출로 인한 외화 수입의 35%를 받아냈다고 한다.

이 스캔들에는 케냐의 저명한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매우 많이 연루되었다. 일단 확실한 연루 증거가 나와 사임한 고위 판사만 23명에 달했으며, 그 검은 돈들이 입막음용으로 언론인들에게 흘러갔다는 의혹도 있고, 회사의 주주였던 모이 전 대통령은 물론이고[34] 키바키 정부의 상당수의 정치인과 모이 정부의 거의 모든 정치인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한다.[35] 더 가관인 것은 실제 케냐의 금과 다이아몬드의 매장량이 미미했기에 수출했다는 금과 다이아몬드들은 자이르에서 밀수한 후 케냐산으로 위조한 것들이었으며, 심지어 자이르는 금을 판 돈으로 내전 자금을 조달했다고 한다. 물론 이 사업에 참여한 많은 케냐 고위층들은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4. 기타

1982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이 케냐를 방문했을 때 회담을 가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qRT_9hn2_II


[1] 1974년부터 사실상 별거 상태에 있다가 1979년에 이혼했고, 2004년 7월에 사망했다. # 참고로 당시 영부인직은 조모 케냐타의 부인이 가져갔다고 한다. [2] 정황상 모이의 반대파들이 암살된 후 교통사고로 가장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3] 시청이나 국제공항, 기차역, 경찰서, 군부대, 회사사무실, 버스 터미널등 공공기관은 물론 모든 가정에서도 그의 초상화를 걸어야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모이의 퇴임 후에는 '그럼 모든 지폐에 찍혀있는 모이 대통령 각하의 얼굴은 어쩌냐?', '집집마다 걸려있는 대통령 사진은 내려야 하나?' 등의 말이 나왔다고 한다 [4] 참고로 모이는 반정부 인사들을 후원하며 친하게 지낸 헴스톤에 대해 '케냐의 부족 집단들이 나라를 분열시키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통일된 정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조롱했으며, 2번이나 그에 대한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는 말도 있다. [5] 이 선거는 케냐의 독립 이후 최초의 다당제 선거였다. [6] 모이는 민족적 긴장을 이용해 여러 부족들의 표를 끌어모으면서 몇몇 부족들에 대한 폭력행위를 유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다. [7] 1978년부터 1988년까지 케냐의 부통령을 역임했고, 그 전후로 재무장관, 보건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다당제 도입 전에는 다당제 도입과 KANU의 퇴진은 "면도날로 무화과나무를 자르려는 것"이라고 할 정도로 모이의 최측근이었으나, 1991년 12월 25일에 정부와 KANU에서 나가고는 민주당(DP)를 창당해 1992년,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각각 3위/2위를 차지했다. 2002년부터 2013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할 적에는 '케냐 역사상 최고의 재무장관'이라는 평을 받았던 경험을 발휘해 재무부를 면밀히 감시해 꾸준하고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이끌었으며, 본인은 부패와는 완전히 무관했으나 모이 시기에 고착화된 부정부패 문화를 근절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8] 참고로 선거 전인 2002년 12월 23일에는 선거 캠페인 회의를 마치고 나이로비로 돌아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몇달간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고, 이후 죽을 때까지 발을 절어야 했다고 한다. [9] 사실 모이가 독재자이긴 했어도 특정 민족(이사크족)을 완전히 말살하고자 5만~20만 명을 학살한 악마 같은 도살자를 망명자로 받아주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10] 후술할 쿠데타의 실태를 보면 저것도 그냥 근처에 있는 장군 군복을 아무거나 꺼내 입은 것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11]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절대 오타가 아니다!!! [12] 1976년 공군으로 징집되었다고 한다. 쿠데타 전 오추카의 이력 [13] 후술하듯 주범들이 공군 장교들을 휘하에 두려고 했으나 오히려 공군 장교들에게 한 방 당했다는 것까지 판박이다. [14] 케냐 중부 주의 주도로, 나이로비로부터 북쪽으로 약 150km 떨어져 있다. [15] 케냐 경찰청 소속 준군사 조직으로, 국가의 중요한 시설과 전략직 지점들을 보호하고, 테러 활동과 반군에 대응하는 임무를 맡는다. [16] 당시 케냐 공군에서 가장 강력한 전투기였다고 한다. [17] 그러나 이들은 쿠데타 참여자로 몰려 7개월 반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고, 감옥에서의 대접도 처참했던 데다가 가족들도 이들의 행방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 [18] 그러나 그로부터 하루 전인 8월 1일에 쿠데타가 일어났다. [19] 참고로 2016년 튀르키예 쿠데타 미수가 6시간, 23-F가 7시간 만에 진압당했다. 그런에 저 둘은 당시 국가원수가 직접적으로 진압에 나섰음에도 이 정도나(?) 걸렸는데, 케냐 쿠데타는 국가원수를 위시한 고위층 대부분이 수도로부터 차로 2시간 거리에 있었다는 디버프가 있었음에도 이 정도로 허무하게 진압당했다. [20] 이들 중에는 은제레만도 있었는데, 은제레만은 사형 선고에 대해 항소를 했다고 한다. [21] 오추카의 사형 이후 케냐에서 사형은 1997년 이후의 한국처럼 형으로만 선고되지 실제로는 전혀 집행되지 않고 있다. 사족으로 2022년 기준으로 케냐인의 93%가 사형제 폐지를 지지한다고 한다. # [22] 실제로 오추카는 책상에 '케냐의 차기 대통령'이라는 글자를 새길 정도로 대통령이 되는 것에 집착했다. [23] 다만 이 쿠데타의 요인에는 군대의 열악한 상황, 특히 하사관에 대한 인정 부족으로 인한 군대 내 불만도 있었다. [24] 심지어 이들 중에는 애꿎은 외국인들도 있었다. 서독인 2명, 영국인 여성 1명, 일본인 남성 관광객과 그의 자녀가 약탈 중에 목숨을 잃었고, 2명의 아시아 여성은 아예 강간을 당한 후 자살했다. 사실 이디 아민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듯 나라 경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 아시아인들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약탈에 참여한 사람들은 아시아인의 가정과 상점을 약탈하고 여성들을 강간하기도 했다. [25] 다만 모이는 이 쿠데타에서 129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하면서도 사망자들은 대부분 쿠데타에 참여한 반군들이라고 주장했고, 민간인 사망자는 거의 없다고 주장했다. # [26] 참고로 당시 케냐의 GDP가 64.32억 달러 정도였다. [27] 정작 이미 케냐타 시절인 1969년부터 주요 야당이 불법화되었기에 이 조치에 실질적인 의미는 없었다고 한다. [28] 이쪽은 '정상적으로' 육군 사령관(대장 직급)이 쿠데타를 이끌었지만, 케냐 쿠데타의 절반 수준인 3시간 만에 진압당했으며,(이 때문인지 자작극 의혹도 돌았다) 진압 계기도 자신들이 뭣모르게 쿠데타에 가담했다는 것을 깨달은 휘하 군인들의 하극상 때문이었다.(...) [29] 물론 계획으로만 남은 쿠데타 계획 중에는 진리국, 1997년 스페인 쿠데타 모의, 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이쪽은 친위 쿠데타 계획이다), 2022년 독일 쿠데타 모의 등 케냐 쿠데타 못지않은 황당한 내용들이 많았다. 저들은 민주주의 국가 + 주류 선진국에서 계획되었다는 것에서 케냐 쿠데타와 동급 취급받아도 싸다. [30] 조모 케냐타와 모이가 준공식 거주지를 가졌던 곳이었으며, 오랫동안 케냐 정치의 온상으로 꼽혔다. [31] 대략적으로만 봐도 뉴욕 및 런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수백만 파운드 가치의 호텔과 주택들, 1만 헥타르에 달하는 호주 목장, 런던의 호텔 3곳, 서레이 지역의 400만 파운드 가격의 주택, 나이트스브리지 지역의 200만 파운드 가격의 펜트하우스 아파트 등에 이른다. [32] 사건 폭로 후에 체포되어 며칠간 구금된 후 직장에서 쫓겨났으며, 이후 거의 실직 상태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2006년 7월 31일에 향년 3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3] 설립자는 캄레시 패트니(Kamlesh Pattni, 1965~)였다. [34] 실제로 조셉 마가리(Joseph Magari) 전 재무부 사무총장은 따르면 모이가 명령한 후 골든버그에 사례금을 지불했다고 증언했다. # 그리고 모이를 골든버그 회사의 주주로 임명한 사람은 캄레시 패트니였다. [35] 실제로 패트니와 공통으로 골든버그 인터내셔널사의 대표이사를 맡았던 사람이 상술한 제임스 카뇨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