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19:10:16

고상문 납북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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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납북되기 전 고상문씨 상황3. 사건 발생 및 전개4. 그 후5. 관련 문서

1. 개요

1979년 노르웨이에서 해외연수 중이던 수도여자고등학교 지리교사 고상문( 1948년 12월 13일생) 씨가 납북된 사건.

2. 납북되기 전 고상문씨 상황

서울대학교 지리학과를 졸업한 고씨는 1978년부터 수도여자고등학교 지리교사로 근무했으며, 1979년 우수 논문작성으로 서울시 교육감상을 수상하고 정부가 주관하는 연수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국비유학 1년 과정으로 1979년 네덜란드 국제훈련센터(ITC) 지질연구소로 유학을 떠났다.

연수 중 1주일간의 부활절 휴가를 이용, 동료들과 노르웨이를 방문했다. 4월 16일 오슬로를 여행 중이던 고씨는 이날 오후 9시 50분쯤 관광을 하던 중 소지품이 든 가방을 시내버스에 놓고 내렸다. 노르웨이 주재 한국 대사관에 여권 분실 신고를 하기 위해 급히 택시를 탔으나, 남북한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택시 운전사가 고씨를 북한 대사관에 내려준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화근이 됐다.

당시 고씨는 신혼 15개월로,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연수 중에 아내에게 꾸준히 엽서로 연수 생활과 소감을 전하고 있었다.

파일:gilugilgilgyl.jpg

3. 사건 발생 및 전개

1979년 4월 16일, 노르웨이 오슬로의 한 시내버스에서 고상문 씨의 여행가방이 발견된다. 그리고 2개월 후 6월 30일, 북한은 고상문 씨가 자진입북했다면서 본인의 기자회견 내용을 방송을 통해 공개했다.

그러나 외무부는 고씨가 여행 중 여권이 든 가방을 잃어버린 뒤 택시를 타고 대사관을 찾았지만, 공교롭게도 북측 대사관에 잘못 들어가게 되면서 현장에서 억류돼 제3국을 거쳐 강제 북송된 것이라는 상황을 파악하고 노르웨이 경찰에 수사를 요청하며 고씨 송환을 추진했다.

8월 22일, 노르웨이 경찰이 오슬로 한 호텔에서 고씨가 작성한 숙박계를 찾아냈다. 문제는 숙박계에 적힌 출생지와 국적이 평양 북한으로 기재되어 있었다는 것. 링크. 노르웨이 측은 이 것을 보아 '고씨가 강제 납치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수사를 종결했다.

하지만 임신 중인 아내가 있는 등 월북할 동기를 전혀 찾을 수 없고, 애초에 노르웨이에 연수를 가게 된 것도 대한민국 정부가 선발했던 것이라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1] 실종 직전까지 동료 유학생들과 함께 여행 중이다가 분실물이 생긴 후 실종된 점과 숙박계 작성 당시 자유로운 상태에 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으므로, 납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4. 그 후

신상옥 감독의 증언에 의하면, 본인이 납치당하여 북한에 있던 당시 조선중앙텔레비죤 방송에 출연하여 남한을 비판하는 고상문의 침울한 표정을 보고 북한이 써준 대로 대본을 읽고 있는 것임을 직감하고 자신과 같은 입장이었던 고상문을 불쌍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후 신상옥은 탈북 시도를 하다가 붙잡혀 끌려간 정치범수용소에서 다른 '북파간첩' 죄수로부터 고상문이 '간첩 혐의'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북한은 고상문을 강제로 납치해온 주제에 고상문이 미국 간첩으로 위장 '의거 입북'했다는 황당한 죄를 만들어 그를 승호 수용소에 가둬놓은 것이다. 이후 1994년 7월 국제사면위원회는 그가 현재 정치범수용소에 갇혀있다고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그의 수감 사실이 알려져 대한민국에서 송환요구 시위를 벌이고 국제적으로 인권논란이 일며 시끄러워지자 북한은 그를 석방했다. 이후 북한 정부는 고상문이 북한에서 재혼을 했으며 새로운 아들과 딸이 태어났다고 주장했다.

한국에서 고상문의 아내는 재혼하지 않고 남편을 기다리며 국가와 북한을 상대로 남편은 자진월북자가 아니라고 해명하며 남편의 송환을 호소했다. 그러나 월북자의 가족이라는 오해로 수사기관에 불려다니는 고초를 겪고 주변인들의 따가운 시선에 어려움을 겪고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1996년 사망했다. 고상문의 부모는 납북 이후 고상문이 다시 찾아올까봐 수십년 동안 이사도 가지 않고 아들을 기다리며 옛날 주소 그대로 같은 집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고 하였다. 뉴스(MBC), 뉴스(KBS), 기사. 다만 국방일보는 이 자살을 보도하면서 우울증 및 한국에서 겪은 아내 조복희 씨의 사정은 생략했고 조중동같은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2005년, 납북자가족모임 대표가 입수한 평양 시민자료에 의하여 고상문은 1995년 북한에서 재혼했으며 평양에서 농업과학연구소 사무원으로 살고 있다고 밝혔다. 납북된 고상문과 평양시민자료에 있는 고상문이라는 인물은 생년월일, 출생지, 혈액형이 모두 일치했다.

2011년, 북한 당국이 작성한 만 17세 이상 평양시민 신상 자료에 따르면 고상문씨는 평양에 거주 중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기사.

2015년, 한인 입양아 출신으로 노르웨이 3대 일간지 다그블라데트(Dagbladet)의 부편집장을 맡고 있는 하이디 쇠비 씨가 고상문 씨 사건을 다룬 책 'KIMS LEK'( 김일성의 게임)을 출간해 이 사건이 재조명되기도 했다. 그녀는 베이징 특파원으로 일하며 탈북민 실태를 조사하던중 고상문씨의 딸 현미씨를 만나 인터뷰 하게 되면서 그녀의 안타까운 사연에 가슴이 아파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

2015년, 고상문(67세) 씨는 북한 농업과학원 소속으로 보위부의 감시 속에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사.

고상문의 딸 현미 씨가 아버지의 송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가 납북될 당시 생후 8개월이었던 그녀는 2022년 기준으로 44세의 중년이 되었다.

5. 관련 문서



[1] 당시 해외 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이라 해외에 나가려면 절차가 까다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