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9-15 16:13:59

J-12

파일:아시아 위치.svg 아시아의 제트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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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제원3. 개발자 루샤오펑4. 설계와 시험 비행5. 짧은 항속거리6. 생산 취소

1. 개요

南昌飞机制造厂 歼-12 / 殲-12
Nanchang J-12


제3차 중동전쟁 베트남 전쟁에서 작고 아음속에 불과한 경전투기인 MiG-17은 초음속 전폭기들을 상대로 뜻밖의 선전을 펼쳤다. 중국 공군 1967년 4월 24일에 아음속 전투기인 J-5로 항법 실수로 중국 영공에 들어온 미 공군의 F-4B 팬텀을 1대 격추시켰는데, 이 사건으로 중국군 수뇌부는 경전투기의 잠재력에 주목하게 된다.

작고 빠르고 민첩한 전투기가 품고 있는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중국 공군은 전선 비행장에서 출격하는 국지 요격기를 갖추기로 계획을 세우고 1969년 7월부터 “소젠(小歼)”[1]이란 계획 명칭 아래 기본 설계를 시작했다. 당시 중국 공군 수뇌부는 중량 4톤급의 아주 작고 가벼운 전투기를 대량으로 생산하여 거점 부근을 순환하는 트럭에 싣고 이동시키면서 방공 임무를 수행하는 운용 형태를 고안하고 있었다. 지도자 마오쩌둥이 설파한 게릴라 전술을 전투기에 대입시킨 순환 - 이동 - 배치 전술을 쓰면, 적 항공 세력으로부터 전면적인 공습을 받더라도 목표를 분산시킬 수 있고, 일부 요격기가 희생되더라도 곧바로 다른 요격 부대가 임무를 이어받아 곧바로 발진해서 반격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2. 제원

형식 : 시제 초음속 전투기
초도비행 : 1970년 12월 26일
승무원 : 1명
전장 / 전폭 / 전고 : 10.30 m / 7.20 m / 3.73 m
익면적 : 16.0 m2
중량 : 3,172 kg ~ 4,530 kg
동력 : WP-6Z (涡喷-6乙) 터보제트 엔진 (추력 2,500 kg) 1기
최대속도 : 1,300 km/h
항속거리 : 688 km
상승한도 : 16,970 m
상승률 : 10,800 m/min
무장 : 23mm NR-23 기관포 1문 / 30mm NR-30 중기관포 1문 / 단거리 미사일 2발

3. 개발자 루샤오펑

이 전투기의 개발자인 루샤오펑(陆孝彭 : 1920~2000)은 중국 항공공학자 1세대로, 중국 항공공학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자 난창항공(후에 훙두항공으로 이름을 바꿈)의 경영자까지 올랐다.

중화민국시절 난징시 중앙대학에서 당시 초창기였던 항공공학을 전공하다가, 중일전쟁 발발 후인 1937년 장제스 정부를 따라 충칭시로 피난간 그는 중국 공군에 기술자로 입대하였다. 이후 장제스가 이탈리아 기술진의 도움을 받아 설립한 제2항공기 제조창(이후 난창항공으로 이름을 바꿈)에 배속되었다. 1944년 12월 그는 미국 맥도넬 더글러스사에 연수를 받으러 파견되었고, 이어 영국의 글로스터사에서 파견되어 1949년까지 연수를 받았다.

그동안 국공내전 끝에 국민당은 대만으로 쫓겨났고, 그는 국민당에 실망했는지 그는 자신을 유학을 보내준 국민당 정부로 돌아가지 않고[2], 1949년 홍콩을 거쳐 대륙으로 돌아왔다. 중국 공군의 여러 기술직을 맡아 1956년 중국 최초의 고유 제트연습기인 JJ-1기를 설계에 주도적 참여한다. JJ-1은 3대가 제작되었고, 여러 문제점 때문에 양산은 중지되지만, 중국 최고의 고유제트기라는 족적을 남겼다.

이후 그가 재직하던 난창항공은 MiG-19를 지상공격기로 개량하는 Q-5개발에 착수하여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이 때문에 그는 중국군내에서 주목을 받았다. 이런 커리어로 난창항공은 J-12의 개발을 착수하게 되었다. 외국에서 장시간 체류했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시절 홍위병의 타도대상이 되기 딱 알맞았으나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마오쩌둥의 게릴라 전술을 항공전에 응용한다"는 터무니 없는 교리를 현실에 실현하기 위해 J-12의 개발에 착수했기 때문인 듯도 하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 난창항공에 남아 있으면서 1983년에는 최고경영자의 자리까지 올랐다. 이어 계속 항공업계에 남아 있었다. 1995년 박사보다도 한단계 높은 원사칭호를 받았다.

4. 설계와 시험 비행

소위 항공 게릴라 전술을 꿈꾸던 중국이 소젠 개발에 서두른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당시 국경 분쟁으로 인하여 중소 관계가 험악해져 소련 기술진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개발하고 있던 초음속 전투기 J-7( 歼-7)의 마지막 마무리 공정이 지연되면서 배치도 늦춰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앙 군사위원회로부터 개발을 위임받은 난창 비기공사(南昌飛機製造公司)의 주임 엔지니어 루샤오펑은 중국의 새로운 국산 전투기로 크게 기대를 받으면서 소젠 계획이 발동된 후로부터 불과 1년 5개월 만에 원형기 설계를 완성시키는 빠른 진도를 보였다. 젠-12의 원형기는 1970년 12월 26일에 첫 비행에 성공했다.

자체 테스트를 어느 정도 소화한 원형기는 1973년 9월 10일 베이징 비행장에서 마오쩌둥과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인 예젠잉(叶剑英 : 1897~1986) 원수, 그리고 공산당 상무위원 리셴녠(李先念)과 국방위원 쉬샹첸(徐向前) 앞에서 시범비행을 선보였다. 활주로를 불과 500 m만 달린 후 가뿐하게 떠오른 J-12는 초당 180 m[3]의 상승률로 창공을 향해 가파르게 치솟았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마오쩌둥에게서 회심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 초음속 경전투기는 1,140 m 반경으로 선회할 수 있었고 가속 성능도 좋아서 순항속도인 마하 0.9까지는 65초, 음속을 돌파하여 마하 1.2까지 가속하는데 필요한 시간은 85초 수준이었으며 전반적으로 기동성 측면에서 미국제 전투기들을 앞지르는 수준이었다. 흐뭇하게 시범 비행을 지켜본 예젠잉 원수는 J-12를 가리키며 "하늘의 리샹양(李向阳)"[4]이라며 크게 치하했다.

5. 짧은 항속거리

그러나 공개된 원형 1호기는 계속된 테스트와 평가를 받는 동안 여러가지 면에서 불만족스러운 성능을 보였는데, 특히 기내 연료만으로는 체공 시간이 40~45분이 한계일 정도로 너무나 짧아 실제 요격 임무가 가능한지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다. 이것은 극단적으로 작고 가벼운 컨셉도 문제였지만, 그 무렵 중국을 휩쓸던 문화대혁명의 혼란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당시 J-12 개발을 이끌어나간 루샤오펑의 증언에 따르면, 원래 이 경전투기에는 미국이 새로 규명해내어 초음속 비행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는 면적법칙을 본격적으로 적용시키려고 했으나, 연구소에 파견된 공산당 간부가 자본주의 맹주인 미국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비난하여 포기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12는 여러가지 면에서 중국에서는 처음 시도된 신기술과 첨단 재료를 아낌없이 서서 만들어진 특별한 전투기였다. 주날개는 랜딩기어 수납실과 작동부를 제외하면 거의 연료를 채울 수 있도록 허니콤 구조로 만들었으며, 중량을 줄이기 위해서 일부는 당시로서는 낯선 최첨단 재료인 카본 파이버를 사용했고, 동체 프레임 일부는 티타늄 패널을 깎아 제작되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J-12는 초음속 전투기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작고 가벼운 기체로 태어나게 된다.

6. 생산 취소

난창 기술진들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데올로기적 간섭에서 해방된 것은 문화 혁명의 광풍이 잦아들기 시작한 1975년부터였다. 사상 논쟁으로부터 풀려난 개발진들은 대폭적인 설계 변경에 착수했다. 일단 외측 날개의 에어포일을 바꾸고 기수에는 MiG-21과 흡사한 쇼크 콘을 추가해 비행 속도에 따라 공기 유입량을 바꿔 엔진의 추진 효율을 높이고 연비를 절감하게끔 노력했다. 400갤런 용량의 보조 연료탱크를 추가하도록 개수를 더한 시제기는 시험비행에서 688 km에 불과하던 항속거리가 1,385 km로 개선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기체 크기의 한계 탓에 체공 시간 문제는 충분히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시기, 난창 공사는 J-7의 대량 생산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J-12은 그 의미를 잃고 계획은 추진력을 잃으면서 중지되었다. J-12는 각 개수형까지 합하면 5호기까지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지금은 중국 항공박물관(中国航空博物馆)의 게이트 가드로 1대가 서 있고 실내 전시물로 1대가 더 보존되어 있으며, 난징 항공우주대학(南京航空航天大学)에도 1대의 J-12가 남겨져 있다.


[1] 소형 섬격기의 줄임말로 여겨진다. [2] 당시 미국-영국에서 일하거나 공부하고 있던 대부분의 중국인 유학생-과학자들은 장제스 정부보다는 중공 정부를 택해 대륙으로 돌아왔다. 장제스 정부가 얼마나 인심을 잃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대목. 하지만 이들중 상당수가 문화대혁명 때 반동혐의로 박해를 받았고, 일부는 자살하거나 맞아죽기도 했다. 이중에는 JJ-1에 개발에 루샤오펑과 같이 참여한 쉬순서우도 있다. [3] F-5E의 상승률이 초당 160 m이다. [4] 중국의 항일연속극 <평원유격대>의 주인공으로 팔로군 지휘관이었으며, 쌍권총에 능한 역할을 맡아 큰 인기를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