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2:32:53

흥친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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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친왕비 흥친왕비
<colbgcolor=#29176e> 대원비
여흥순목대원비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는 영친왕호를 폐작한 후에 혼인했으므로 영친왕비가 아니다.
대한제국 황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17px-The_Imperial_Seal_of_Korea_03.png
일제강점기 왕공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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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홍씨3. 이씨

1. 개요

대한제국의 황족이며 흥선대원군의 적장자로 고종황제의 친형 흥친왕 이희 친왕비이다.

흥친왕이 혼인을 두 번 하여 흥친왕비가 2명이다.

2. 홍씨

<colcolor=#ffd800> 흥친왕비 홍씨
興親王妃 洪氏
작호 <colbgcolor=#fff,#1F2023> 정경부인(貞敬夫人) → 증(贈) 흥친왕비(興親王妃)
본관 풍산(豊山)
남편 흥친왕 이희(興親王 李熹, 1845 ~ 1912)
생부 홍병주(洪秉周)
출생 1844년 4월 8일
한성부 북부 가회방 재동
사망 1887년 12월 19일 (향년 43세)
한성부 중부 정선방 이동 운현궁
자녀 2남 2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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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 영선군 이준용(永宣君 李埈鎔, 1870 ~ 1917)
차남 - 이문용(李𪣢鎔, 1882 ~ 1901)
장녀 - 김인규(金仁圭)의 처
차녀 - 김두한(金斗漢)의 처(? ~ 1924)

흥친왕의 첫 부인이다. 선조의 적녀 정명공주 홍주원 부부의 8대손으로, 혜경궁 홍씨의 숙부이자 홍봉한의 이복동생인 홍용한의 현손녀이다. #

1844년( 헌종 10년)에 통덕랑을 지낸 홍병주의 딸로 태어났다. 흥선군의 장남 이재면과 혼인한 후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1887년(고종 24년) 12월 19일에 운현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1910년( 융희 4년) 8월에 시조카 순종이 남편 이재면을 흥친왕으로 책봉했고 그도 '흥친왕비(興親王妃)'로 추증했다. #

3. 이씨

<colcolor=#ffd800> 흥친왕비 이씨
興親王妃 李氏
파일:흥친왕비 이씨.png
작호 <colbgcolor=#fff,#1F2023> 군부인(郡夫人) → 흥친왕비(興親王妃)
본관 여주(驪州)
남편 흥친왕 이희(興親王 李熹, 1845 ~ 1912)
생부 이인구(李麟九)
출생 1883년 6월 7일
경기도 부평군 석천면 구지리
사망 1978년 1월 8일 (향년 94세)[1]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 운현궁
자녀 딸 - 이씨(1911 ~ 1911) 요절

1883년(고종 20년)에 참봉을 지냈던 이인구의 딸로 태어났다. 1902년( 광무 6년)에 무려 38살 연상인 완흥군 이재면 혼인했다. 완흥군에게는 재혼이었다.

1910년( 융희 4년) 8월에 남편 완흥군이 '이희(李熹)'로 개명하고 '흥친왕(興親王)'으로 책봉받으면서 '흥친왕비(興親王妃)'가 되었다. 그리고 불과 2주 뒤에 경술국치로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당해 흥친왕이 '이희공(李熹公)'이 되면서 그 역시 '이희공비(李熹公妃)'로 불렸다. 1911년 2월에 딸 하나를 낳았으나 이듬해 8월 29일[2] 뇌수종으로 잃었다. 그리고 11일 뒤인 9월 9일에 남편 흥친왕과도 사별했다.
파일:이우 결혼 사진.png
<colbgcolor=#29176e> 양손자 이우와 박찬주의 결혼 당시 찍은 사진. 맨 앞 줄 오른쪽이 흥친왕비, 왼쪽이 영선군 부인 광산 김씨, 뒷줄 세번째가 이우, 오른쪽이 박찬주, 제일 오른쪽이 의붓손녀(영선군의 딸) 이진완이다.
이후, 종친들과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 1924년 1월에 일본 정부에게서 훈이등 수보관장을 수여받았고 # 1925년 7월에는 전주 이씨 종친 청년회에서 의료구호활동을 할 때 의복 100건을 기부했다. #

1934년 11월에 울산 통도사를 구경한 뒤 를 타고 부산으로 가다가 화물차와 부딪히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행히 다치진 않았다. #

6.25 전쟁 초반에는 미처 서울을 벗어나지 못한 채 창덕궁 낙선재를 빠져나와 운현궁으로 피신한 순정효황후[3]에게 자신이 쓰던 방을 내어주었으며 1.4 후퇴 때에는 부산 구포로 같이 피난가기도 했다. #
파일:부산 피난 시절 순정효황후와 흥친왕비.png
<colbgcolor=#29176e> 부산 피난 시절 순정효황후(왼쪽)와 흥친왕비(오른쪽)[4]
1978년 1월 8일에 운현궁에서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묘는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마석우리에 있었다. 그러다 2000년대에 양증손자 이청 화장하여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에 위치한 흥선대원군묘 건너편에 있는 이우[5]의 묘 자리에 납골 형식으로 모셨다. 낙천군, 은신군, 영선군, 이문용, 이우 부부와 이종[6]의 납골묘도 함께 있다.


[1] 조선시대에 태어나 11세 때 갑오개혁, 14세 때 대한제국 선포, 27세에 일제시대를 겪고 박정희가 사망하기 1년 9개월 전까지 살아 있었다. [2] 얄궂게도 경술국치일이다. [3] 순종황제의 부인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후. 흥친왕비에게는 조카며느리이다. [4] 윗전인 황후와 함께 앉은 자리에서 ‘곡좌‘ 자세로 앉아 있음을 알 수 있다. [5] 고종의 아들 의친왕 이강의 2남이자 영선군 이준용 양자. [6] 이우의 아들이자 이청의 동생. 1966년 12월에 미국에서 교통사고 요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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