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5 02:44:21

후지야마 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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ふじやま いちろう
藤山 一郎
후지야마 이치로 | Ichirō Fujiyama
파일:후지야마 이치로.png

노년기 때의 사진 ▼
파일:후지야마 이치로 노년기.jpg
본명 마스나가 다케오 (増永 丈夫)
출생 1911년 4월 8일
도쿄부 도쿄시 니혼바시구 니혼바시 가키가라초
사망 1993년 8월 21일 (향년 82세)
도쿄도 메구로구
학력 게이오기주쿠 보통부 (졸업)
도쿄음악학교 (성악 / 학사)
직업 가수, 성악가, 작곡가, 지휘자
활동기간 1921년 ~ 1993년

1. 개요2. 생애3. 주요곡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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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음악가로서, 가수 성악가, 작곡가, 지휘자 등으로 활동하였다.

2. 생애

모슬린 도매상을 하던 부모님 슬하에서 태어나 비교적 부유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어머니가 주식 투자 수익으로 도쿄 일대 주택을 구입해 세를 놓아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또한 아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려는 어머니의 교육 방침 덕분에 어릴 때부터 악기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유치원이 끝나면 친척이 운영했던 일본여자음악학교로 가서 피아노를 배웠다.

1918년 게이오기주쿠 재단이 운영하는 요치샤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음악 선생님의 추천으로 동요가수로 데뷔하여 작곡가 에자와 세이타로의 동요를 통해 음반까지 녹음했지만 "동요가수로는 성공하기 힘들 것 같다"라는 에자와의 소신으로 결국 학교로 돌아와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에 몰두했다.

이 시기 학교 동창으로 '근현대 미술의 거장', '동양의 피카소'라고 불리는 오카모토 타로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초등학교 졸업 성적도 우수해 음악 성적은 항상 최상위권을 유지했고, 그 외의 교과목도 상위권을 유지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같은 재단이 운영하는 보통부에 진학하여 음악을 배우는 한 편, 럭비부와 축구부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여 전국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 보통부 4학년 때는 합창부의 가창 지도 담당으로 선후배들을 가르쳤는데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이면 선후배 상관없이 호되게 질책해서 자존심이 상했던 5학년 선배들에게 불려가 위협과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이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페라 가수가 되기 위해 당시 일본에서 유일했던 음악학교인 도쿄음악학교 성악부에 입학하였는데, 당시에는 "성악은 부녀자의 것"이라는 차별적인 풍조가 상당히 강해 성악부의 남학생은 후지야마가 유일했다고 한다.[1]

예과 성적이 총원 30명 중 15등 안에 들어 본과에 진학했지만 재학 중인 1927년, 세계 대공황 금 해금이 겹치면서 불어닥친 '쇼와 공황'에 의해 일본 경제가 주저앉아 버리는 사태가 벌어지자 부모님이 가업을 이어 운영하던 모슬란 도매상이 급격히 기울어졌고 결국 당시 돈 약 4만 엔의 빚을 지고 폐업하는 일이 벌어졌다.

급격히 기울어진 가계를 돕고자 악보를 옮겨서 다시 적거나 베껴 쓰는 사보 아르바이트를 뛰었지만 수입이 변변찮아 레코드를 취입하는 가수 아르바이트에 뛰어들었는데 허가없이 교외연주를 금지하는 학칙 위반에 걸리는 사항이라 걸리지 않기 위해 가명을 사용하였다.

친한 친구의 이름인 에이토 히데오 (永藤秀雄)의 이름을 빌려 '藤永 (후지나가)'와 자신이 지은 '一郎 (이치로)'를 합쳐 藤永一郎 (후지나가 이치로)라는 이름을 완성하였지만 자신의 이름인 마스나가 다케오 (増永丈夫)의 자가 들어가서 혹시나 걸리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을 빼버리고 발음과 비슷한 후지산이 연상되어 대신 야마 ()를 붙여 세계 제일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藤山一郎 (후지야마 이치로)라는 가명을 만들어 취입하고 훗날 정식 가수 데뷔 시에도 계속 예명으로 사용하였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 1년 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안 40개의 곡을 취입 했는데, 코가 마사오가 작곡한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 (酒は涙か溜息か)'와 '언덕을 넘어 (丘を越えて)'가 예상 밖의 큰 히트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레코드를 취입하는 알바만 하려던 후지야마에게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하자 어 이게 아닌데 후지야마는 혹시나 학교 관계자가 듣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레코드가 팔리지 않길 바랬다고 한다.

이 때문에 코가 마사오가 이끌고 있었던 메이지 대학 만돌린 클럽의 정기연주회에 출연을 했지만 무대 뒤에서 노래를 부르며 정체를 숨기고 다녀 관객들이 항의하는 소동까지 빚어졌다.

결국 이런 저런 일로 학교 당국에 발각되어 불려가 추궁을 당했는데 후지야마는 "선생님들도 교직 이외에도 작곡을 하는 등 학교 밖에서도 돈을 버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학생이 학비로 인해 돈을 버는 걸 책망하는 건 불공평하다"라고 항의하여 결국 징계위원회에서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후지야마를 높게 평가하던 독일의 작곡가 클라우스 프링스하임 시니어가 이 조치에 항의하였고 3명의 친구들이 후지야마가 학업성적이 우수하며, 아르바이트로 번 수입을 모두 부모님의 가계에 보태고 있다고 변호하여 결국 징계위원회는 기존 처분을 취소하고 '음반 취입 금지 및 정학 1개월'로 재처분하였다.

그러나 정학 한 달은 방학 기간이라 사실상 의미없는 징계였고 이미 취입 직전인 곡들에 대해서는 리스트를 제출해 해당 곡들은 징계 사항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빅터 레코드사의 학비보조 제의로 매월 100엔의 학비를 보조받으며 학교로 다시 돌아온 후지야마는 다시 학업에 매진하여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에도 같은 학교 연구생으로 재직하다가 1943년 태평양 전쟁 도중 일본군 해군의 요청으로 요미우리 신문이 위문단을 모집하자 유럽의 문화를 접하고 싶은 마음에 5개월 간 위문공연을 다녔고,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 해 11월 일본군 해군의 명예소령 대우를 받으며 다시 위문공연을 다녔다.

그러던 1945년 8월 15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위문공연을 하러 이동하던 중 일본의 항복을 맞았고 결국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포로가 되었다. 인도네시아 내부의 여러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어 다니다가 당시 벌어지고 있던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서 영국군 소속으로 변경되어 영국군 위문공연을 다녔고, 1946년 7월 15일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한 지 며칠 되지 않아 가요계에 복귀하였고, 1951년부터 1993년까지 가수 또는 지휘자로 NHK 홍백가합전에 출전하기도 했었고, 1972년 제2대 일본가수협회 회장에 취임하여 비영리단체였던 협회를 문화청의 허가로 사단법인으로 전환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1992년 5월 28일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내각총리대신에 의해 “오랫동안 가요곡을 통해 국민에게 희망과 격려를 주고 아름다운 일본어 보급에 공헌했다”는 공로로 국민영예상 수상이 결정되었고,(9호) 불편한 몸을 이끌고 총리관저를 방문해 비스포츠선수 중 최초로 생존 중에 수상되는 기록을 세웠다.

결국 이듬해인 1993년 8월 21일 오전 4시 25분[2], 급성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3. 주요곡

青い山脈 (푸른 산맥)[3]
東京ラプソディ (도쿄 랩소디)[4]
丘を越えて (언덕을 넘어)[5]

4. 여담

여담 대부분의 출처는 일본 위키백과 후지야마 이치로 문서이다.
  • 유년기부터 화를 많이 내 주먹이 먼저 나왔다. 이 성격이 원인이 되어 유치원을 전학가게 되고, 게이오기주쿠보통부 때에는 3주간 기숙사 생활을 받은 적도 있다(...). 이 때, 후지야마는 외로워 몸에 익힌 뜨개질은 후지야마의 특기가 됐다. 그리고 말년에서도 후지야마는 이 성격이 없어지지 않았고, 택시운전사와 싸우다가 얼굴을 맞아서(..)[6] 피투성이로 스타디오에 들어간 적도 있다.
  • 차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어린 시절부터 자동차에 친숙하게 자랐다. 초등학교 4-5학년때는 생가 모슬린 도매상에 있던 배달용 화물차 차고지를 하였고, 오토바이 운전도 마스터했다. 도쿄 음악 학교 재학 중에 자동차 운전 면허를 취득하고, 유행가수가 된 후에도 무대 이동 시 스스로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또 전전(戰前)때에, 독일 대사 앞에서 노래 부를 때에는 초라한 프랑스 차를 탔던 것을 대사 부인이 책망해, 나중에 독일차를 특별가격에 제공받기도 했다. 소유차는 전쟁 직후에 탄 닷선을 빼면 전부가 수입차였다. 운전매너도 양호하여, 우수운전자로 1972년에 녹십자교통영예상 동상, 1982년에는 녹십자교통영예상 은상을 수상받았다. 한편 타인의 운전매너에도 엄격해 길에서 끼어들은 차에게 호통치기도 하였다. 후지야마는 1949년에 간농양을 앓아 입원한 적이 있는데, 그때에 장래가 불안해진 후지야마는 아내를 사장으로 삼아 "미키 모터스"라는 세차, 정비, 급유점을 부업으로 오픈했다.
  • 후지야마가 음대생이였던 시대는 악보가 귀중하여, 학생은 도서관에서 빌려 사보하는 일이 일반적이였다. 그 때문에 후지야마는 악보를 난폭하게 쓰는 사람을 엄중하게 대했다.
  • 전쟁 중, 동남아위문에서 귀국한 후지야마가 야마다 고사쿠댁에 인사하러 갔을 때, 야마다가 후지야마가 신고 있는 동남아에서 입수한 신발이 마음에 들어 "나한테 줘"라고 해서 후지야마와 입씨름이 났다. 결국 후지야마는 거절하지 못하고 야먀다의 신발하고 교환했다. 그 이야기를 후지야마한테 들었던 음악평론가 모리 카즈야가 "그 신발은 어디선가 본 신발" 이라고 노래 부르면 후지야마도 "응, 맞아"라고 되받아 불렀다.


[1] 지금봐도 그렇고 이 당시에 후지야마의 선택은 굉장히 도박적이었다. 후지야마가 초등학교시절부터 중학교시절까지 재학하던 학교는 대학까지 무시험으로 들어가는게 보장된 중고일관제였던데다가 그 대학도 무려 일본 최고의 사립대학인 게이오기주쿠대학이었기 때문. [2] 홈페이지 맨 아래로 가면, '8月21日 午前4時25分 没82歳(중략)'으로 써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3] 1949년 작, 동명의 영화가 있다. [4] 1936년 작, 전전(戦前)시대를 가장 대표하는 후지야마 이치로의 가장 유명한 히트곡. 사실 일제강점기 김해송이 ‘꽃서울’이라는 제목으로 번안해서 부르기도 했다. #, 동명의 영화가 있는데, 그 영화에서 후지야마 이치로가 나왔다. [5] 1931년 작, 1991년 방영된 영상으로, 후지야마 이치로가 지휘와 노래를 동시에 하는 영상이다, 동명의 영화가 있는데, 그 영화에서도 후지야마 이치로가 나왔다. [6] 출처는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