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01:44:51

홍건적의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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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두건의 도적들, 고려로 밀려오다
홍건적의 1차 침입
홍건적의 2차 침입

1. 개요2. 배경3. 전개
3.1. 1차 침공3.2. 2차 침공
4. 결과와 영향5. 여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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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건적의 고려 침공은 원나라에 쫓겨 요동으로 물러선 홍건적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한 사건으로 1359년 12월에 1차 침공, 1361년 10월 2차 침공이 있었다. 또한, 1차 침공 이전에도 약 3천여 명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식량과 물자를 약탈하기도 했었다.

2. 배경

공격 이유로는 주로 두가지 정도가 추측된다. 홍건적의 북벌이 저지되어 원의 반격을 피하고, 재기가 필요한 상황에서 원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한반도의 고려가 좋은 타겟이었고, 그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므로 원•고려는 동맹관계였다. 훗날 고려가 명나라와 가까워지자 원나라는 "어찌 장인과 사위의 관계가 이러하단 말인가"하며 고려를 회유하고 원망하기도 했었다. 실제로 갈등이 심화되던 양국은 최영 고려군을 이끌고 중국으로 지원을 가는 등 홍건적의 준동 전후 공동 대응에 나서야 했다.

3. 전개

3.1. 1차 침공

1359년의 1차 침공은 홍건적의 일파 송나라 동로군의 모거경이 4만여 명의 병력으로 침공했다가 70여 일 만에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채 400명으로 압록강을 건너 패주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후 홍건적은 해로를 통하여 풍주, 봉주, 황주, 안주 등의 해안 지방들을 공격하였다.

3.2. 2차 침공

1361년 2차 침공은 동로군의 본대 사유(홍건적), 관선생, 주원수, 파두반[1]이 이끄는 20만명의 홍건적 대군세가 고려를 재차 침공하였고, 고려는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돌파당하고 결국 홍건적에게 수도인 개경이 함락당했으며 공민왕 안동(당시 복주)까지 몽진해야만 했다. 수도 개경에 남겨진 백성들은 늙고 어린 자는 넘어지고, 어미와 자식은 서로 버리고, 서로 짓밟는 자가 가득하여 우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고 한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를 침입한 홍건적들은 5천 명의 중무장 기병인 철기(鐵騎) 부대를 거느렸다고 한다. 또한 개경을 함락시키자 홍건적들은 사람을 구워 잡아먹거나 임산부 젖을 잘라 불에 구워서 먹는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 #

홍건적은 물자가 집중된 개경을 함락시키자 안주한 채로 더 이상의 진격을 하지 않았으며 전열을 추스른 고려군은 닥치는 대로 병력을 긁어모아 20만명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이 병력을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 최영, 이성계 등이 이끌고 3개월 만에 개경을 탈환한다. 개경 수복 과정에서 두목을 포함 10만명의 홍건적을 죽였고, 나머지 10만명은 파두반이 이끌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도주했다.

고려군이 초반 크게 밀린 이유는 대몽항쟁으로 나라가 초토화된 데다가 원 간섭기에 원의 강요로 군대가 약화되고 권문세족의 횡포로 대농장이 확산된 데 이어 14세기 중엽 유라시아를 휩쓴 흑사병으로 사회, 경제가 파탄나면서 충분한 군사력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고려 왕들도 원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군사력 재건을 시도하기는 했으나 최소한의 병력만 겨우 갖췄을 뿐[2] 그 이상 고려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사실상 지역 토호들의 사병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홍건적 2차 침공 때 20만을 모을 수 있었던 건 수도 개경까지 빼앗기자 대규모로 유생들에 노비들까지 닥치는 대로 긁어 모아 일단 머릿수를 어느 정도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홍건적도 중무장 기병 철기(鐵騎) 부대 5천기를 앞세운 20만 대군으로 절령 방어선을 파죽지세로 돌파하며 수도 개경을 함락시킬 정도의 대군세를 자랑했지만 아무래도 병력 구성의 대부분은 일반 유민들이었을테니 머릿수만 어느 정도 맞춘다면 고려군도 정예 사병들을 앞세워 맞붙을만 했다. 원래 동서고금을 통해 수십만 대군을 칭하는 경우도 대부분의 군사들은 징발된 일반 백성들로 정규군을 항상 그 정도 규모로 유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4. 결과와 영향

홍건적의 침입 와중에 고려는 많은 사회적 혼란과 변화를 경험하였는데 우선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면서 만월대라고도 불리는 고려 궁궐이 불타 사라졌고,[3] 개경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 지방의 호적이 망실되는 등 국가의 권위와 지배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권문세족들에 의한 토지와 인구의 탈점이 널리 행해지면서 신분제의 혼란과 농장의 발달 등이 더욱 촉진되었다. 또한 홍건적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과 함께 26세의 이성계를 비롯한 신흥 무인세력이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4] 그래서 공민왕은 난이 끝나자마자 최측근 김용을 이용해 무신들의 지도자인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 4원수를 살해해야 했으며, 그들을 제외하고도 공을 세운 무장들은 경성수복공신(京城收復功臣)으로 책봉되는데 이후 경성수복공신들이 고려 군부를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권력이 커지자 훗날 공민왕은 신돈을 내세워 경성수복공신에 대해 대거 숙청에 나선다.[5]

공민왕의 개혁 정책도 홍건적 침입 때문에 상당 부분 실패하게 된다. 홍건적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원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원나라도 이미 같이 무너지는 상황이어서 여력이 없었고 국가 방위를 위해 개혁이 필요하다는 공민왕의 주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이전처럼 간섭이 심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런 전반적인 관계는 이후 원( 북원)과 고려가 모두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공민왕 홍건적의 고려 침공을 피해 안동에 숨어들었을 때 현 봉화군에 있는 청량산에 갔는데 이때 오마대(五馬臺) 및 그 때 쌓았다는 청량산성, 군법을 어긴 군사를 처벌한 밀성대(密城臺) 등이 있다. 특히 이 산 부근에는 공민왕을 신격화하여 사당 등에 모시는 마을이 많다.

5. 여담

중국 대륙의 거대한 반란이 한반도까지 영향을 끼친 첫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보다 약 500년 이후 의화단 전쟁 때 의화단원들이 대한제국의 변경까지 와서 토벌대가 필요했고 거기서 약 70년 뒤 문화대혁명 홍위병들이 북한과 인접한 동북 3성에서 깽판을 쳐 조선족사회가 와해됐는데 북한의 신경까지 곤두서게 했다.[6] 다만 의화단이나 홍위병의 경우는 국경에서 깔짝거리기만 했을 뿐 홍건적처럼 한반도 국가 수도를 점령한 적은 없어서 임팩트가 홍건적보다는 떨어진다. 또한 고려왕조는 흥미롭게도 내부에서 일어난 종교 집단에게 피해를 본게 아니라 타국에서 일어난 종교 집단이 고려로 쳐들어와서 피해를 입은 특이한 사례이기도 하다. 후삼국시대에 있었던 적고적, 구한말의 동학의 사례도 있지만 적고적과 동학은 내부에서 일어난 종교 집단이다.

홍건적의 침입 당시 황해도 신광사(神光寺)에는 중국에서 귀국한 나옹선사가 주지로 있었다. 당시 개경이 함락되고 안동으로 몽진할 정도로 고려군이 크게 몰렸는데, 나옹은 남쪽으로의 피난을 거부하고, 신광사에 계속 머무르며 절을 불태우려는 홍건적 무리들을 막았다. 죽음을 각오하고 사찰을 지키려는 나옹의 태도에서 고승의 면이 보였는지, 홍건적들도 차마 신광사를 불태우거나 나옹을 해치지 못하고 물러났다.

이러한 공적 덕분인지 공민왕은 훗날 나옹을 고려의 왕사(王師)로 임명했고, 나옹은 공민왕으로부터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법호를 받았다.

6. 관련 문서



[1] 파두반(破頭潘)은 적의 목을 잘 베었다는 뜻의 별칭이다. 본명은 반성(潘誠). [2] 홍건적이 침략할 당시 고려 정규군은 3만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공민왕이 원나라의 혼란으로 자체 군사력의 육성 필요성을 주장하며 복구한 게 이 정도다. [3] 이후 공민왕은 별궁인 수창궁을 재건해 법궁으로 사용했다. [4] 실제로 왜구 침략 시기에 이르면 그나마 투입할 정규군도 더 부족해지면서 무신들이 알아서 병력을 모아 반격에 나서는 어이없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된다. [5] 단 김용이 왕명을 위조한 적이 여러 번임을 고려하면 정세운 암살사건의 진범은 공민왕이 아닌 김용일 확률이 높다. [6] 이때 상당수의 조선족들이 도강하여 월북해 살길을 찾았고 북한 주민들이 꽤 살갑게 대했다 한다. 이 경험이 있는 조선족 노인들은 그래서 탈북자들에게 우호적이라고. 아울러 대륙 반대쪽 광동에서도 홍위병들이 포르투갈을 건드려 봤다 격퇴당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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