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08:28:29

에릭 홉스봄

홉스봄에서 넘어옴
컴패니언 오브 아너 수훈자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 – (CH)
{{{#!wiki style="margin:0 -10px -5px"
{{{#black,#white {{{#!folding [ 펼치기 · 접기 ]
CH 파일:CHCompanionofHonour.jpg
윌리엄 서머싯 몸
(1954)
아놀드 토인비
(1956)
패트릭 블래킷
(1965)
막스 페루츠
(1975)
존 길구드
(1977)
프레더릭 생어
(1981)
칼 포퍼
(1982)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1984)
스티븐 호킹
(1989)
조지프 니덤
(1992)
알렉 기네스
(1994)
데이비드 애튼버러
(1995)
리처드 돌
(1996)
데이비드 호크니
(1997)
크리스 패튼
(1997)
에릭 홉스봄
(1998)
존 메이저
(1999)
도리스 레싱
(2000)
외국인
아마르티야 센
(2000)
해럴드 핀터
(2002)
주디 덴치
(2005)
이안 맥켈런
(2008)
마이클 하워드
(2011)
피터 힉스
(2012)
매기 스미스
(2014)
외국인
데즈먼드 투투
(2015)
조지 오스번
(2016)
폴 매카트니
(2017)
J. K. 롤링
(2017)
델리아 스미스
(2017)
마거릿 애트우드
(2018)
엘튼 존
(2019)
폴 스미스
(2020)
데이비드 치퍼필드
(2020)
폴 너스
(2022)
메리 퀀트
(2023)
이언 매큐언
(2023)
안나 윈투어
(2023)
웨일스 공비 캐서린
(2024)
셜리 배시
(2024)
고든 브라운
(2024)
※ 참고: 전체 영어 명칭은 Order of the Companions of Honour이지만
영연방의 정부(내각), 관보(런던 가제트), 왕실 등 공공기관 웹사이트에서 약칭 Companion of Honour로 표기, 안내하고 있다.
{{{#black,#white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1013a; font-size: .8em"
}}}}}}}}} ||
<colbgcolor=#dddddd,#000><colcolor=#000000,#dddddd> 에릭 홉스봄
Eric Hobsbawm
CH FRSL FBA[1]
파일:에릭 홉스봄의 모습.webp
본명 에릭 존 어니스트 홉스봄
Eric John Ernest Hobsbawm
출생 1917년 6월 9일
이집트 술탄국 알렉산드리아
사망 2012년 10월 1일 (향년 95세)
잉글랜드 런던
국적
[[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가족 배우자 뮤리엘 시먼 (1943년 결혼, 1951년 이혼)
배우자 말린 슈워츠 (1962년 결혼)
자녀 조슈아 베나선, 줄리아, 앤디
학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컬리지
직업 역사학자, 사회 이론가, 작가
종교 무종교[2]
정당

1. 개요2. 특징3. '장단기'의 주창4. 기타5. 모습6. 저서7.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영국 역사학자.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이다.

E. P. 톰슨으로 대표되는 영국 신좌파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영국사 연구들에 치중한 반면 홉스봄은 세계 전체의 역사를 전체사적인 관점에서 잘 서술했다는 평을 듣는다.[3]

2. 특징

홉스봄은 인생이 곧 20세기 역사라고 할만큼 현실정치, 사회문제에도 많이 참여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생으로, 소년기에는 외가가 있는 오스트리아의 빈과 독일의 베를린에서 살았다. 외가가 오스트리아 쪽에서 대규모 보석상을 운영했다고 한다. 다만 이건 홉스봄이 태어나기 전의 일로 1차대전 패전과 인플레이션으로 집안이 그대로 몰락했다고 한다. 홉스봄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홉스봄의 유년시절에는 난방할 돈도 없어 집이 얼음장이었고, 신발을 새로 살 돈도 없어서 겨울에 길을 가다가 헤진 신발 탓에 너무 발이 시려서 펑펑 울었다는 얘기도 나온다.

독일에 있을때 히틀러의 수상 취임을 알리는 신문 호외(1933년 1월 30일)를 직접 보았다고 한다.[4]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삼촌을 따라 영국으로 이주,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케임브리지 대학 학부생 시절부터 박학다식한 걸로 유명했다고 한다. 다만 그와 동시에 무례하다는 평가도 유명했다고 한다.[5]
영국 공산당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56년 소련 헝가리 혁명에 개입한 것을 비판했고, 탈 스탈린 운동을 지지했다. 그러나 영국 공산당을 탈당한 동료들(대표적으로 E.P 톰슨)과 달리 홉스봄은 공산당에 잔류하여 해산 시까지 당원으로 남았다. 이는 두고두고 홉스봄의 인생에서 낙인처럼 남았는데, 홉스봄 본인은 이와 관련하여
영국에서 책만 보고 공산주의자가 된 자들과 달리 나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바로 그 현장에서 파시즘이 집권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리고 그 좌절감은 나에게 평생 마르크스주의에 매달릴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굉장히 유연한 면모도 있어서, 1970~80년대 영국 노동당의 좌경화를 비판했고, 토니 블레어 제3의 길 노선(정확히는 노동당 현대화)을 초기에는 호의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블레어가 신자유주의 노선을 강화하자 강력히 비판했다.

그야말로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인데, 역설적이게도 그의 삶은 전형적인 중산층. 그가 동구권 정치 지도자들과 담소를 나눈 곳은 런던의 고급 호텔이었으며, 제3세계에 관한 그의 연구 활동을 지원한 게 록펠러 재단이었다. 애초에 엥겔스도 공장주 아들이었는데 뭘... 이 때문에 몇몇 보수적인 마르크스주의자나, (특히 동구권의) 개혁적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부정적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동구권의 한 지식인은 "그래서 우리가 권위주의 공산 독재 정권이랑 목숨 걸고 싸울 동안 당신이 희생한게 뭔데? 기껏해야 케임브리지 정교수 못 먹은 거 아닌가?"라고 대차게 까기도 했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으로 수백만명이 목숨을 잃은 것을 당대에 알았더라도 공산정권이 정당하다고 믿겠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기도 했다.

공산당 당적 때문에 냉전 시기 내내 MI5에게 사찰당했으며, 교수 임용도 늦춰져 1947년부터 1970년까지 버크벡 대학(칼리지)에서 강사 조교수를 거쳤다. 다만 영국의 경우 전임 교수의 개념이 확실히 구분되어있고, 소위 테뉴어가 그만큼 빡세다. 또 홉스봄 본인이 2차 대전 동안 6년간 군복무를 하는 바람에,박사 학위 취득이 많이 늦어져서 학위를 1950년에야 따기도 했다. 유창한 독일어때문에 처음엔 에니그마 해독팀에 추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외가가 오스트리아계이며 정치적으로 공산주의 성향이라는 탓에 짤렸다고 전해진다.

외국인+유대인이란 배경상의 불이익도 있었고, EP톰슨이나 크리스토퍼 힐 같은 세대 비슷한 영국 공산당 역사학자 그룹 (Communist Party Historians' Group) 소속 동료들에 비하면 막상 2차대전 전에는 망명객으로서 재정착 과정에 정치 활동에 더 집중하느라 학계에 들어가는 타이밍도 한 템포 늦었다.

의외로 공산주의 성향은 크지 않았고 심각하게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전반적으로 봐도 당시 영국은 이베리아 반도 독재정을 제외한 다른 서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론 확실한 반공 서방 진영에 속해도 내부 민간 사회, 특히 문화계, 학계에선 좌익의 영향력이 용인될 뿐만 아니라 영향력도 강했다. 동시대 미국 매카시즘에 비교한 홉스봄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공산주의자 교수들은) 한 10년동안 승진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학교에서 쫒아내진 않았다."

게다가 홉스봄이 처음 자리 잡은 직장인 런던대학교 버크벡 칼리지도 영국 학계 기득권의 끝판왕격인 옥스브릿지의 보수적 학풍에 반대하던 곳이라 진보, 좌파적 학자들에게도 상당히 너그러운 편이였다. 정치적 사정 그 자체보단 저런 개인적 배경 문제와 아웃사이더 성향으로 인해 홉스봄은 다른 영국 공산당 역사학자들이 전후 학계에서 승승장구할동안 정식으로 테뉴어 받는거나 명성을 얻는거나 상당히 늦었다가 70년대 중후반에 돼서야 학계와 대중 양쪽에서 학자로서 성과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학자였던 셈이고, 본인 회고록 등에서도 50-60년대는 아웃사이더이자 비주류로서 받은 은근한 모멸감 등에 꽤 한을 품고 살다 뒤늦게 온 명성과 성공에 만족했다는 어조이다.

3. '장단기'의 주창

그가 주창한 장단기라는 세기 개념은 역사학계의 세기 구분론의 대변혁을 불러왔다. 01년에 시작해서 00년에 끝나는 세기 개념이 아니라, 같은 공감대와 같은 인식을 공유하는 인식의 유사성에서 세기를 분류한 것이 이 장단기 세기 개념이다.

이를테면 홉스봄의 '장기 19세기'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에서 시작하여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막을 내린다. 부르주아적 지배 구조의 형성과 확산, 붕괴를 '장기 19세기'로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삼분한 것이 것이 그의 장기 19세기(The long 19th century; 1789-1914) 3연작인

1. <(유럽의) 혁명의 시대>(The Age of Revolution : Europe; 1789- 1848 , 1962년 출간)-
2. < 자본의 시대>(The Age of Capital; 1848-1875, 1975년 출간)-
3. < 제국의 시대>(The Age of Empire; 1875-1914, 1987년 출간)이다.

20세기의 경우, 홉스봄은 '단기 20세기'(The short twentieth century)를 설정했다. 단기 20세기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인 1914년에서 소련의 붕괴인 1991년까지를 뜻한다. 이러한 구분은 제법 널리 통용되어 문화사적 맥락에서 세기말이라는 개념도 통상 19세기 후반부터 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를 포함하는 시기까지로 이해되곤 한다. 이를 다룬 책으로는 극단의 시대가 있다. 홉스봄은 단기 20세기를 제2차 세계 대전까지의 '파국의 시대'(The Age of Catastrophe, 1914-1945)와 그 이후부터 전후 대호황과 석유 위기로 호황이 끝나는 '황금의 시대'(The Golden Age, 1945-1973)', 소련의 해체까지 지속되는 '산사태 시대(The Landslide, 1973-1991)'라는 세 시기로 나누었다. 해당 저서는 1994년 출간되었다. 반면 조반니 아리기는 미국의 금융적 패권을 중심으로 한 장기 20세기를 주장했다.

다루는 지역의 크기로 보나 분야로 보나 그를 따라올 수 있는 사학자는 찾아보기 힘들 듯하다. 다만 주관적인 관점이 다소 세다는 의견도 있고 하나도 빠짐없이 설명하려다 보니 전문학자들도 쉽게 읽기 어려울 정도로 만연체가 심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만연체가 꼭 단점이라고 할 수 없는게 잘 쓰인 만연체 영문장은 그 유려함과 특유의 문체를 한국어로 온전히 옮겨서 살려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점도 고려해야한다. 실제로 홉스봄의 시대 3부작은 질질 늘어지기만 하는 나쁜 만연체의 문장이 아니라 매우 세세하고 잘 쓰인 문장에 속한다. 번역이 별로라서 그렇지 영남대학교 사학과 모 교수의 말에 따르면 홉스봄의 책을 1시간 읽는다면 처음 50분 동안은 '빌어먹을 영감탱이. 자기 아는 거 자랑하려고 책 쓰나?'라는 생각이 들만큼 지루하다가 나머지 10분 동안은 무릎을 절로 치게 될 만큼 홉스봄의 놀라운 통찰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4. 기타

  • 원래 가문의 성은 옵스트바움(Obstbaum. 독일어로는 과일나무)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영국으로 이민오면서 이민국 직원이 잘못 알아듣고 홉스바움(Hobsbaum)으로 써서 성이 갈렸고 에릭 홉스봄 본인이 태어날 때 다시 한 번 알렉산드리아 주재 영국 대사관 직원이 잘못 알아듣고 홉스봄이라고 호적에 기입해서 지금과 같은 성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 국내에 홉스봄의 저작들은 상당히 많이 번역되어있다. 한길사에서 1997년~ 1998년 대부분을 번역. <혁명의 시대>와 <자본의 시대>는 '오늘의 사상신서'로 처음 간행되었다가 뒤에 '한길 그레이트북스' 시리즈로 다시 나왔으며 <제국의 시대>도 이 때 번역되었다. 단기 20세기 3부작의 후속이라 할 수 있는 <극단의 시대>는 까치에서 번역본이 나왔다. 역사학, 특히 서양사를 전공한다면 홉스봄의 저작은 필수적으로 거치게 된다.

    한길 그레이트 북스에서 나온 <혁명의 시대>는 번역이 양호한 편이지만 역자가 바뀐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는 오역이 상당하다. <제국의 시대>의 오역 중 심각한 사례 몇 가지를 들어보면,
    • Australia (호주)→ 오스트리아
    • American Indian (아메리카 원주민)→ 인도인
    • Morality (도덕) → 사망률[6]
    • Breadwinner → 빵의 승리자
    • Futurist → 미래학자[7]
    • Plastic arts → 플라스틱 예술
    • Oligopoly → 과두제
    • Gladstone → 골드스턴
    • With relief → 걱정하면서

    등이 있다. 이쯤 되면 역자가 학부생이나 대학원생에게 번역 하청을 맡긴 게 아닐지 의심될 정도...

    그래도 세계사적 지식이 충분하다면 그냥저냥 읽을 수 있겠으나... 까치에서 나온 <극단의 시대>의 경우 가독성 측면에서 번역이 엉망진창이다. 이쪽의 경우는 오역이 많다기보다는 문체에 번역투 인상이 넘쳐나 읽어내는 난이도가 매우 높다. 원서를 읽든가 아니면 각오하고 읽어야 한다.
  • 1983년에 함께 펴낸 <만들어진 전통>이란 책도 유명하다. 정확히는 주편집자로 참여했다. 그가 든 사례로는 킬트가 대표적. 재즈에 대한 조예가 굉장히 깊어[8] 문화사적인 재즈의 역사를 다룬 책을 여럿 펴냈다. 엄청난 재즈 덕후였다고 한다.
  • 2002년 자서전 격인 <미완의 시대(Interesting Times: a twentieth-Century life / 원제 : '흥미로운 시대[9]')>를 펴냈다. 이 책은 민음사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번역계의 장인 이희재가 번역하여 아주 고품질의 번역이 빠졌다.
  • 90대의 고령에도 왕성하게 활동해 저작물 출간 및 강연과 인터뷰 등을 쉬지 않았다. 대단한 노익장. 가장 최근의 저작인 'How to Change the World : Tales of Marx and Marxism'가 2011년 출간. 제목에서 보듯이 카를 마르크스에 대한 저작으로, 그의 저작의 상당수는 마르크스 주의에 대해 다루고 있다.
  • 2012년 10월 1일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사인은 폐렴. 건강관리만 조금 더 되었어도 100세를 넘은 홉스봄의 저작을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계 언론은 20세기 최후의 대가가 떠났다며 애도했다. 외국 학계에 별로 관심이 없는 한국 언론에도 홉스봄의 사망 소식은 크게 조명되었다.

5. 모습

파일:external/cdn1.spiegel.de/image-407804-panoV9free-aukl.jpg
파일:external/www.historytoday.com/hobsbawm_0.jpg
파일:external/static.guim.co.uk/Eric-Hobsbawm-010.jpg
1976년 전성기. 전성기가 60살 2000년대. 사망 몇달 전.

6. 저서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Uncommon People: resistance, rebellion and jazz) (영어판: 1998년 / 한국어판: 2003년 영림카디널). 이 가운데 재즈 부분만 다시 번역되어 한국어판이 출간되었다. 《재즈,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음악》(황덕호 역, 포노, 2014)

7. 외부 링크


[1] Fellow of the British Academy [2] 유대계로 자랐지만 본인도 부모님도 독실하지는 않았다. [3] 19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이 등장하면서부터 이런 전체사적인 관점 자체가 비판받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홉스봄 본인의 자서전인 <미완의 시대>를 보면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에 대해서 역사라는 담론 자체를 좀먹는 스탠스라는 비판을 하고 있다. [4] 홉스봄은 유대인 혈통(친가는 폴란드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출신이었고, 외가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계였다.)이었다. 다만 홉스봄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독일에서 보내던 학창시절 동안 독일인들이 자기를 바라보던 인식은 영국인이었지 유대인으로 바라보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뒤에 나오다시피 히틀러 집권 후 그는 곧 영국으로 이주한다.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15살에 자생적 공산주의자가 되다니 흠좀무 [5] 이 시기에 동문수학한 사람 중에 하나가 앨런 튜링. 홉스봄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왠 이상하게 생긴 애 하나가 맨날 조깅을 했는데 알고보니까 천재더라' [6] 비슷해보이는 영단어 mortality와 혼동한 듯. [7] futurist에는 분명 미래학자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지만, 해당 부분은 예술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미래파 예술가'로 번역해야 맞다. [8] 자서전을 보면 어릴때 가진 용돈을 다 털어서 재즈 공연을 간 얘기가 나온다. '외모에 너무 자신이 없어서 성욕을 재즈로 돌렸다'라는 식의 언급도 있을 정도. [9]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지극히 반어적인 느낌으로 붙인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