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07:31:48

호레이쇼 게이츠



United States Congressional Gold Medal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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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1777년 1779년 1781년
조지 워싱턴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 앤서니 웨인 사령관 헨리 리 3세 준장 대니얼 모건
1781년 1787년 1800년 1805년 1813년
소장 너새니얼 그린 존 폴 존스 대령 토머스 트럭스턴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1813년 1814년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스 2세
대위 에드워드 매콜
대령 제임스 로렌스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1814년 1814년, 1848년 1814년
대령 루이스 워링턴 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 소장 제이콥 브라운 소장 윈필드 스콧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1814년 1815년 1816년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스 소장 알렉산더 마콤 소장 앤드루 잭슨 대령 찰스 스튜어트 대령 제임스 비들
1818년 1835년 1846년, 1847년, 1848년 1847년 1854년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대령 조지 크로간 소장 재커리 테일러 소머스 호
장교 및 승무원 구출
중령 덩컨 잉그함
1858년 1863년 1864년 1866년 1867년
프레더릭 로즈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로버트 크레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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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C. 스투퍼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1867년 1871년 1873년 1874년, 1904년 1883년
조지 피바디 조지 F. 로빈슨 대령 재러드 크랜달 그 외 존 혼 주니어 존 폭스 슬레이터
1888년 1890년 1900년 1902년 1909년
조셉 프랜시스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중위 프랭크 H. 뉴컴 중위 데이비드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새뮤얼 J. 콜 박사
라이트 형제
1912년 1914년 1915년 1928년
선장 아서 로스트론 폴 H. 크라이봄 그 외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스 무히카
찰스 린드버그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1928년 1929년 1930년 1936년
토머스 에디슨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 소령 월터 리드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링컨 엘즈워스
1936년 1938년 1939년 1940년
조지 M. 코핸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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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945년 1946년
롤런드 바우처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준장 빌리 미첼
1949년 1954년 1955년 1956년 1958년
앨번 W. 바클리 어빙 벌린 조너스 소크 박사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 준장 하이먼 리코버
1959년 1960년 1961년 1962년
로버트 고다드 로버트 프로스트 토머스 앤서니 둘리 3세 밥 호프 샘 레이번
1962년 1968년 1969년 1973년 1977년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월트 디즈니 윈스턴 처칠 로베르토 클레멘테 매리언 앤더슨
1978년 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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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휴버트 험프리
1979년 1980년 1982년
미국 적십자 케네스 테일러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팀 베아트릭스 여왕 대장 하이먼 리코버
1982년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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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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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 거슈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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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선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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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990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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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996년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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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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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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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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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 레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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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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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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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아 웨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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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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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
시몬 페레스 모뉴먼츠 맨
2014년 2015년 2016년
제65 보병연대 잭 니클라우스 셀마 몽고메리 행진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 OSS
2017년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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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계 미국인 참전 용사
USS 인디애나폴리스 승무원 안와르 사다트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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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020년 2021년
무명의 수여자들 그렉 르몬드 미국 국회의사당 경찰
컬럼비아구 경찰청 소속 경찰관
제369 보병연대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전사한 13명의 장병
2022년 2023년
미 육군 제23부대 본부 특수부대
제3133 신호 복무 중대
제6888 중앙우편대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상선 선원
에밋 틸
메이미 틸모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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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호레이쇼 게이츠
Horatio Lloyd G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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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27년 7월 26일[1]
대영제국 에식스주 몰던
사망 1806년 4월 10일 (향년 78세)
미합중국 뉴욕주 뉴욕시
복무 영국군 (1745~1769)
대륙군 (1775~1783)
최종 계급 소령 (영국군)
소장 (대륙군)

1. 개요2. 생애
2.1. 새러토가의 (의문스런) 영웅2.2. 턱없는 야망2.3. 몰락2.4. 말년
3.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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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장군. 미국 독립 전쟁에서 한때 영웅에서 원수로 전락한 미국 역사상 최악의 장군 중 1명이다.

2. 생애

본래 영국 본토 출신으로 영국군 장교로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 참전한 이후 직위와 부 없이는 진급의 한계가 있던 영국군에 회의를 느끼고 영국군 소령 직위를 포기하고 1772년 웨스트버지니아로 이주했다.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나자 군경험이 있는 모든 장교들이 식민지군의 장군으로 임명된 가운데 게이츠도 식민지군의 장군으로 독립전쟁에 참전했다.

2.1. 새러토가의 (의문스런) 영웅

게이츠가 명성을 드날리게 된 계기는 새러토가 전투로 이때 게이츠는 뉴욕주 올버니 근처의 새러토가에서 버고인이 지휘하던 영국군을 격파해 항복을 받아냈다. 이 당시에 대륙군 총사령관이던 조지 워싱턴은 패전을 거듭해 대륙회의 내에서 워싱턴에 대한 불신이 높아진 상황이었던지라 대륙의회에서는 자연스럽게 워싱턴의 대안으로 게이츠를 밀게 되었다. 대륙회의에서는 게이츠를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해 워싱턴 흔들기에 나섰다.

그러나 게이츠가 새러토가에서 거둔 대승의 이면에는 남의 공적을 가로챘다는 소문이 뒤따랐다. 그리고 이 소문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새러토가 전투 당시 게이츠는 군대의 출정을 결사반대했으나 베네딕트 아놀드가 게이츠의 반대를 거부하고 베미스 하이츠로 출전해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이 전투에 아놀드는 게이츠의 지원도 없는 상황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을 정도로 전투를 치러 승리했지만 게이츠가 아놀드의 공적을 가로채버렸던 것. 아놀드로선 억울할 일이었으나 딱히 방법이 없었다.

2.2. 턱없는 야망

어쨌든 남의 공적을 가로채서 영웅이 된 게이츠는 턱없는 야심에 부풀기 시작했다. 게이츠는 워싱턴을 밀어내고 자신이 식민지군 총사령관이 되기를 원했고 독립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신생국가 미국의 국가 지도자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당연히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주역이 국가 지도자가 되는건 정해진 수순이었다지만 게이츠에겐 야심만 있고 그걸 실천할 능력이 없다는게 문제였다.

워싱턴의 패배로 필라델피아가 영국의 수중에 넘어가고 독립전쟁이 좌초위기에 몰리자 대륙회의내에서는 뜬금없이 캐나다를 공격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게이츠가 앞장서서 이런 주장을 펼쳤는데 사실 이런 주장을 한 이면에는 워싱턴을 끌어내리려는 뒷공작이 숨어있었다. 이에 게이츠는 토마스 콘웨이를 포섭해 그를 총사령관으로 앞세워 캐나다 침공을 추진하려 했다. 토마스 콘웨이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프랑스군에 복무한 바 있으며, 워싱턴 휘하로 저먼타운 전투 등에서 상당히 활약했지만, 이후 장군 승진 과정에서 미국인이 장군이 되길 바랬던 워싱턴이 그의 승진을 반대하자 워싱턴과 사이가 나빠졌고, 결국 장군 진급에는 성공했으나 게이츠에 포섭되었다. 이 배경에는 워싱턴을 시기했던 존 애덤스와 그의 사촌형 새뮤얼 애덤스가 핵심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존 애덤스가 친구인 게이츠를 밀어서 워싱턴을 실각시키려고 했고, 이걸 위해서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인물이 토머스 콘웨이라는 것.

어쨌든 워싱턴은 이런 게이츠의 음모를 간파하고 자신의 편에 서있던 라파예트 후작을 캐나다 침공군의 총사령관으로 밀었다. 하지만 애당초 캐나다 침공군의 수준도 오합지졸이나 다름이 없어서 라파예트는 원정계획 파기를 주장했고 대륙회의는 라파예트를 워싱턴이 있던 포지 계곡으로 되돌려보냈다. 한편 이 과정에서 콘웨이는 게이츠와 워싱턴에 대한 험담이 담긴 편지를 주고받다가 들켜버렸는데, 그 내용이 공개되자 사직서를 제출할 수밖에 없었고 의회는 이를 수리했다. 험담 좀 했다고 사직까지 해야 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엄연히 자신의 상관이자 군대의 총사령관인 워싱턴에 대해 "(이번에 제가 승진임명 된다면) 이는 졸장(워싱턴)이 나라를 말아먹게 두면 안된다는 하늘의 뜻인 겁니다." 따위의 소리를 했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후 그는 워싱턴의 친구이자 군인이던 캐드왈라더와 결투를 벌이다 부상을 당해 프랑스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담으로 콘웨이가 부상을 입은 부위는 바로 입이었는데, 캐드왈라더는 부상을 입은 콘웨이 앞에서 "고놈의 거짓말 하는 입, 드디어 멈추게 했구만."이라고 했다고. 한편 게이츠는 "어떤놈이 편지를 위조했다"며 뻗댔지만 바로 자신의 부관이 출처임이 드러나자, 그 역시 군사위원회 위원장직을 사임하고 북부군 사령관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게이츠 역시 바로 그 '어떤놈', 즉 부관[2]에게 결투신청을 받았는데, 게이츠는 울면서 사과했고, 결투는 취소되었다.

2.3. 몰락

1780년, 독립전쟁이 지지부진해지자 영국은 눈을 남쪽으로 돌려 남부공략에 나섰다. 결국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부유한 경제 중심지인 찰스턴이 함락당하고 식민지군의 남부군은 궤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부유한 남부를 잃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던지라 새로운 사령관을 파견해 남부군을 복구하고 영국군을 막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워싱턴은 자신의 유능한 부관인 너새니얼 그린을 대륙회의에 추천했으나 대륙회의는 게이츠를 남부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워싱턴은 게이츠의 임명에 결사반대했지만 대륙회의는 임명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게이츠는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인 야심만 많고 능력은 없는 모습을 이 남부 전선에서 제대로 과시했다. 당시 남부군의 정규병력은 영국군에 패한 것으로 모자라 열악한 환경으로 폭동 직전까지 내몰린 상황이었다. 그러나 게이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영국군 사령관 헨리 클린턴의 뻘짓[3]으로 남부는 독립파와 영국 지지파의 민병대들이 진흙탕 싸움을 벌이던 중이었다. 정규군의 사기가 땅바닥을 뚫을 기세라 게이츠는 민병대를 너무 믿어버렸다.

게이츠의 남부군에 합류한 독립파 민병대들은 영국 지지파 민병대와 개싸움을 벌이다가 왔으니 당연히 사기는 높았다. 그러나 이들은 정규군과 싸워본 경험은 전혀 없었다.

1780년 8월 16일, 게이츠가 지휘하는 남부군과 독립파 민병대 3700여명은 영국군 남부방면 사령관으로 부임해 연승중이던 콘월리스의 2100여명의 병사와 캠던이라는 곳에서 맞부딫쳤다( 캠던 전투). 이때 게이츠는 경험없는 민병대를 선두에 세우는 치명적인 전략적 실수를 저지른다.

게이츠는 단순하게 사기가 충천한 독립파 민병대들을 앞세워서 영국군의 전열을 흐트러트린 후에 정규병사들이 영국군을 격파한다는 전략을 세웠지만 독립파 민병대들은 영국 지지파 민병대들을 고문하고 보복할줄만 알았지 영국군 같은 정규군을 맞닥뜨리자 싸우기는 커녕 모두 도망쳤다. 당시 전투에 참전한 영국병사들은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 '우리가 소리만 질렀더니 저놈들이 냅다 튀었다.'고 회고할 정도.

민병대들이 전열이 무너지고 도망치자 사기가 바닥을 뚫을 기세였던 정규군 병사들도 제대로 싸우기는 커녕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리고 게이츠는 말을 타고 열심히 북으로 도망쳤다.

얼마나 빨리 말을 몰았던지 단 며칠만에 300km가 넘는 거리를 주파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아마도 게이츠가 공황상태에 빠져서 그렇게 걸음아 나살려라라고 도망쳤다고 보는데 결국 게이츠는 새러토가의 영웅에서 겁쟁이로 한순간에 추락했다. 게이츠의 소식을 들은 어떤 사람은 '그 영감이 그 나이에 그렇게 말을 빨리 몰다니 대단하다'고 비꼬았을 정도.

결국 게이츠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었고 패전 책임을 추궁당했으나 적반하장으로 자신의 책임을 끝까지 부인했다. 결국 그는 이후 야전사령관으로는 다시는 복귀하지 못하게 되었다. 다만 뉴잉글랜드에 그의 지지자들이 좀 있던 터라 그들의 노력으로 1782년 뉴버그로 가서 워싱턴의 참모로 일할 수는 있게 되었다. 이듬해인 1783년에 일어난 소위 뉴버그 음모에 게이츠가 관여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게이츠의 부관이었던 존 암스트롱 소령은 게이츠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연락하고 있었고, 역시 게이츠의 부하였던 월터 스튜어트 대령은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과격선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게이츠가 이때도 음모에 관여했을거라고 보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2.4. 말년

독립전쟁이 끝난후 게이츠는 퇴역하여 웨스트버지니아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에 전쟁 당시의 전쟁위원회 멤버들을 규합해 버지니아 신시내티 협회를 조직해 정치적 재기를 모색했지만 하도 저지른 짓이 커서...

한편으로 존 애덤스와 절친한 사이었는데 애덤스의 권유에 따라 게이츠도 자신의 소유지를 팔고 흑인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이후 맨하탄 섬의 작은 농원으로 옮겨가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친구였던 존 애덤스가 대선에 출마했을 때는 어찌된 영문인지 애덤스의 라이벌인 토마스 제퍼슨을 지지해서 애덤스와의 오랜 우정은 끝장나버렸다.[4] 뉴욕의 사교계에 출입하면서 한때 뉴욕주 의회 1기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가 1806년 4월 10일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윌가의 트리니티교회 묘지에 매장되었지만 오늘날에 그의 묘의 정확한 위치는 불명인 상황이다.

3. 창작물


멜 깁슨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패트리어트에서 중반부에 캠던 전투를 조금 묘사한다. 전투를 지켜 보던 벤저민 마틴(멜 깁슨)은 "게이츠 놈은 병신이야. 영국군에 너무 오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평지에서 레드 코트와 정면으로 맞붙다니. 이 전투는 싸우기도 전에 이미 졌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영화에서처럼 캠던 전투에서 미군이 패배한 이유는 근본적으론 대륙군을 구성한 민병대의 미숙한 전투력이 가장 큰 원인인 것은 사실이고 게이츠의 지휘도 별로였던 것은 사실이나, 세부적인 진행은 영화와는 조금 다르다.
[1] 출생연도는 자료마다 1727~1729년 사이로 조금씩 편차가 있다. [2] 제임스 윌킨슨이라는 인물인데 오늘날에는 평이 매우 나쁘다. 사실 이 인물의 이후 행적을 보면, 공익을 위한 폭로였다기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배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 사건으로 워싱턴의 눈에 들어, 30대 나이에 미군 총사령관에 오르고 루이지애나(현재는 미주리)의 1대 주지사가 되기도 하지만, 부통령 에런 버의 반란 음모에 참여했다가 다시 이를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에게, 자신이 참여한 내용만 싹 빼고, 밀고했으며, 이전부터 스페인과 몰래 내통해왔음이 사후에 밝혀졌다.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평가하기로는 '미국 역사상 가장 비열한 놈'이라고. [3] 남부로 내려간 후 포고문을 발표해서 국왕에게 충성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죽인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독립전쟁을 강건너 불구경하던 남부 사람들은 독립파와 영국 지지파로 갈려서 서로의 농장과 집으로 쳐들어가 약탈하고 보복하는 난장판이 벌어졌다. [4] 질투심과 배신, 뒷공작 등에 능한 존 애덤스의 성격상 충분히 가능한 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