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14 14:48:24

헤이젤 참사

헤이젤 폭동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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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헤이젤 참사.jpg

1. 개요2. 사고 배경3. 사고 전개4. 경기 결과5. 사건 조사 및 결론6. 사건의 여파
6.1. 잉글랜드 클럽 유럽 대항전 출전 정지6.2. 경기장 관련 법 개정
7. 추모8. 여담9. 관련 문서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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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Heysel Stadium Disaster

1985년 5월 29일 벨기에 브뤼셀 에이젤(영어로 헤이젤)에 위치한 스타드 루아 보두앵[1]에서 일어난 훌리건 난동으로 인한 혼란에 구조물이 무너져 39명이 숨지고 6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은 사건.

리버풀 구단과 팬들의 가장 큰 흑역사로 기억되는 사건이다.

2. 사고 배경

당시 유럽 프로축구는 독일 분데스리가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잉글랜드의 풋볼 리그 디비전 1[2] 이탈리아 세리에 A가 세계 최고의 리그 자리를 놓고 다투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1984-85 시즌 유러피언컵[3] 결승에서 두 리그를 대표하는 양대 거두인 리버풀 FC 유벤투스 FC가 만났다. 리버풀은 직전 시즌 결승전에서 AS 로마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 디펜딩 챔피언이었고, 유벤투스는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탈리아 대표팀 선수들이 주축이 된 스쿼드를 보유하고 있었다. 두 팀은 당대 UEFA 클럽 랭킹에서 1위를 다투고 있었으며, 언론들에 의해 대륙 축구의 TOP 2로 평가받고 있었다. 두 팀은 4개월 전 유러피언 슈퍼컵에서 이미 격돌했었고, 유벤투스가 2-0으로 승리하며 기세를 잡은 상태였다.

그리고 경기에 모아진 기대만큼이나 팬들의 행동도 과격함의 절정에 달해있었다. 리버풀의 팬들은 당시 훌리건[4]으로 유럽 대륙에 악명을 떨치고 있었고, 유벤투스의 울트라스도 그에 못지않았다. 거기다 결승전이 벌어지는 헤이젤 스타디움[5]은 벨기에의 국립 경기장이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상태가 매우 좋지 못했다. 1930년에 지은 낡은 구장인데다가 시설의 정비 상태가 불량했고, 개찰구가 매우 적어서 경기장 입장에서부터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심지어 콘크리트 외벽이 매우 낡아서 티켓이 없는 팬들은 벽을 뚫고 들어오는 일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특히 과열된 양 서포터들의 구역을 가로막는 벽도 없던 상태였다.

양 팀은 경기 전부터 경기장 상태에 우려를 표했다. 당시 시설이 좋았던 캄프 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경기를 충분히 대체해서 치를 수 있었지만 유럽 축구 연맹은 헤이젤 스타디움을 선정했고, 이에 당시 유벤투스의 회장 지암피에로 보니페르타와 리버풀의 CEO 피터 로빈슨은 UEFA에 다른 개최지를 선택해달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거대한 서포터즈 규모를 가진 두 팀이 결승전을 개최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UEFA는 이를 고려하지 않았고, 후에 UEFA의 경기장 안전 전검이 단 30분 만에 졸속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eysel_plan.png

또한 경기 전부터 이미 서포터 배치에 문제가 있었다. 경기 당일 경기장은 58,000명에서 60,000명에 이르는 서포터들로 가득 찼고, 양 팀의 서포터들만 각각 25,000명 이상이 입장했다. 후에 사건을 판단한 벨기에 법원에 따르면 당시 O, N, M 구역이 유벤투스 서포터들에게 할당된 구역이었고, 리버풀 서포터들에게는 X, Y, Z 구역이 할당되었다. 그러나 정작 Z 구역의 티켓이 중립 팬들을 위해서 풀린 것이 문제였다. 벨기에 축구 협회는 Z 구역의 티켓을 리버풀 팬들에게 정상적으로 독점 제공하지 않고, 중립 팬들이 해당 구역의 티켓을 구매하는 것을 허용했다. 당시 벨기에에는 대규모 이탈리아 커뮤니티가 존재하고 있었고 브뤼셀, 리에주, 샤를루아에서 온 많은 해외 유벤투스 팬들이 Z 구역 티켓을 구입했다. 또한, 당시 벨기에 여행사들이 유벤투스 팬들을 중심으로 많은 티켓을 판매하기도 했다. 이는 즉, 유벤투스 팬들이 명목상 중립 구역으로 지정된 Z 구역에 리버풀 팬들보다 더 많이 입장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심지어 당시 리버풀 팬들은 직전 시즌인 1984년 유러피언컵 결승전이 끝난 후 거리에서 AS 로마 울트라스의 공격을 받았던 경험이 있던 상태였고, 경기 전 긴장이 고조된 유벤투스의 울트라스가 바로 옆 구역에 배치되자 전운이 감도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X 구역과 Z 구역 사이 경계에는 격리를 위한 벽이 없었고, 쇠로 된 작은 경계 울타리와 경찰들이 경계선을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3. 사고 전개

결국 킥오프 한 시간 전인 현지 시간 오후 7시경에 사건이 시작되었다. X 구역과 Z 구역의 양 팀 서포터들은 불과 몇 미터 사이에 있었고, 끝내 충돌하기 시작했다. 훌리건과 울트라스들은 경계를 넘어 서로에게 돌팔매질을 시작했다. 킥오프가 다가오자 병과 돌을 던지는 행위는 점차 과격해졌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흥분한 리버풀 훌리건들이 울타리와 경찰을 넘어 상대편을 향해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Z 구역은 명목상 중립 구역이었던 만큼 그들이 공격한 대상 중에는 일반 관람객들도 있었다.[6] 이에 대응해 유벤투스 울트라스들도 맞섰지만 결국 피해를 본 것은 유벤투스 서포터들과 중립 팬들이었다. X 구역이 리버풀 서포터들의 구역이었던 만큼, 리버풀 훌리건 공세는 수적으로 우위에 있었고, 결국 유벤투스 서포터들이 출구 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급속도로 인원들이 Z 구역의 외곽 콘크리트 벽으로 쏠리자 결국 사람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낡은 벽이 무너졌고, 그 벽에 기대던 사람들이 떨어지며 서로 깔리는 참사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39명이 사망하고[7] 6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사고가 일어나자 유벤투스 울트라스들은 보복을 위해 경기장 러닝 트랙을 따라 리버풀 서포터즈들에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건의 심각성을 인지한 벨기에 경찰이 개입했고, 양 팀 서포터들의 추가적인 충돌은 제지되었다. 그러나 흥분한 유벤투스 울트라스는 두 시간 가량을 돌과 병을 들고 경찰과 충돌했고, 유벤투스 팬 한 명이 벨기에 경찰을 향해 폭음탄이 든 권총을 발사하는 덕에 혼란이 잠재워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다.

4. 경기 결과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로고 화이트.svg
1985 유러피언컵 결승
1985년 5월 29일 수요일 20:15 (CEST)
헤이젤 스타디움 (브뤼셀)
주심: 안드레 다이나 (스위스)
관중: 58,000명
파일:유벤투스 FC 로고(1982~1989).svg
파일:trophy_front_full.png
파일:리버풀 FC 로고(1968~1987).svg
유벤투스 리버풀
1 0
<rowcolor=#000,#fff> 58' 미셸 플라티니 (PK)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엠블럼.svg
파일:득점 아이콘.svg
-
경기 하이라이트 | 매치 리포트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1985 유러피언컵 결승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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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전에 참사가 일어났지만, 경기를 포기하는 것은 더 큰 소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는 판단하에 원칙상 경기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는 UEFA 관계자 및 이탈리아, 영국, 벨기에 축구 협회와 벨기에 정부, 브뤼셀 시, 브뤼셀 시 경찰의 판단이었다. 이에 혼란을 수습한 다음 경기가 진행되었다. 양 팀의 주장이었던 가에타노 시레아 필 닐은 경기 전 각 서포터 구역으로 다가가 팬들을 진정시키고 소동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선수들이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8]

이어진 경기는 미셸 플라티니의 페널티 킥 결승골로 유벤투스가 1-0으로 승리했다. 유벤투스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 우승이자 리버풀 역사상 첫 유러피언컵 결승전 패배였다[9]. 사실 결승골이 된 패널티 킥은 오심 논란이 있었고, 패널티 킥을 줄만한 상황인가에 대해 평소라면 말이 나올 만 했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경기 내용은 크게 논란이 되지 않았다. 항간에 플라티니가 우승을 전혀 축하하지 못했다고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플라티니는 그 참사에도 불구하고 격하게 우승을 축하하여 비판을 받았다. 본인의 해명에 따르면 경기를 할 당시엔 사건이 그렇게나 심각했는지 몰랐다고 한다. 경기에 앞서 사건이 벌어졌지만 경기가 강행됐으니 심각성을 잘 몰랐을 만도 했다.[10]

경기가 끝난 후, UEFA 회장 자크 조르주는 유벤투스에게 시상까지 마쳤으나 우승에 흥분한 유벤투스 팬들이 경기장으로 난입하여 경기는 끝까지 소란스러웠다. 유벤투스 선수단은 M 구역 앞에서 서포터들과 우승을 축하했고, 리버풀 선수들은 X 구역과 Z 구역 사에에서 팬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리버풀 선수들은 공항으로 가기 위해 브뤼셀 호텔에서 버스를 탑승했을 때, 참사의 진상을 접했다. 유벤투스 울트라스들은 버스를 둘러싸고 리버풀 선수들을 위협했고, 경찰이 나서 버스를 호송해야했다. 경찰은 터미널에서 발생할 수 있는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리버풀 버스가 브뤼셀 공항 활주로로 직접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5. 사건 조사 및 결론

이후 사건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18개월에 걸쳐 UEFA, 대회 주최측, 헤이젤 스타디움 소유주, 벨기에 경찰이 과실 여부를 조사받았다. 그러나 결국 리버풀 훌리건의 행동에 조사의 초점이 맞춰졌다. 1985년 5월 30일, UEFA는 공식적으로 "리버풀 훌리건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발표했고, 벨기에의 법원 또한 조사 끝에 리버풀 훌리건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UEFA측의 강행과 티켓 배분, 경기장의 보안 시설 미흡이 결과의 이유 중 하나로 지적받기도 했으나 기본적으로 너무나도 끔찍한 서포터즈간 충돌이 이뤄졌기에 여론은 훌리건의 난동으로 결론지어졌다.

이에 영국 경찰이 가해자들을 사법 처리하기 위해 조사를 진행 했다. 당시 현장 영상과 사진들이 검토된 끝에, 총 34명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으며, 26명의 리버풀 훌리건들이 1987년 9월에 피해자 39명에 대한 과실치사 및 추가적인 폭행 혐의로 기소되었다. 기소된 훌리건들은 벨기에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인도된 후, 벨기에 교정 시설에 수감되었으며 1988년 10월에 재판을 받았다.[11] 결국 1989년 4월, 14명의 훌리건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3년 형을 선고 받았으며, 그 중 7명은 5년의 집행 유예를 선고받아 영국으로 돌아왔다. 나머지 10명의 팬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 로니 젭슨이라는 인물은 잉글랜드 풋볼 리그에서 13년 동안 414경기에 출전한 축구 선수이기도 했다.

리버풀 훌리건들 외에 벨기에 측 사건 당사자들도 재판을 받았다. 유벤투스 팬들에게 Z 구역 티켓 판매를 허용한 벨기에 축구 협회장 알버트 루센스와 해당 경기 경찰을 지휘한 미셸 켄시어, 요한 마히외는 6개월의 집행 유예를 선고 받았다. 당시 UEFA 회장이었던 자크 조르주와 사무총장 한스 방게르터의 처벌 또한 거론되었으나 그들은 조건부 석방 처분을 받았다.

6. 사건의 여파

6.1. 잉글랜드 클럽 유럽 대항전 출전 정지

참사 이후 잉글랜드 클럽들의 유럽 대회 출전을 금지하라는 압력이 거세졌다. 이에 1985년 5월 31일, 영국 총리 마가렛 대처 FA에 잉글랜드 클럽들이 처분을 받기 전 자진해서 유럽 대항전에서 철수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틀 후 유럽 축구 연맹에서 '무기한으로' 먼저 잉글랜드 클럽팀들의 유럽 대항전 출전을 정지한다는 처분을 발표했다. 이어 6월 6일, FIFA에서는 이 금지 조치를 전 세계 모든 경기로 확대 했으나, 일주일 후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는 친선 경기를 할 수 있도록 조치가 변경되었다. 1985년 12월에는 유럽 내에서 잉글랜드 클럽들이 친선 경기는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추가 완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벨기에 정부는 자국에서 잉글랜드 클럽들의 친선 경기를 끝까지 금지했다.

이후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국제 대회 출전은 금지 조치를 받지 않았지만, 잉글랜드 클럽 팀들은 유럽 대항전에서 무기한 출전 금지 징계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89년 4월, 잉글랜드 축구 당국이 수년간에 걸쳐 훌리건들을 진압하는 노력 끝에, UEFA는 1990-91 시즌부터 리버풀을 제외한 잉글랜드 클럽들을 다시 유럽 대항전에 출전시키는 것을 허용했다. 그리고 1991년 4월, 리버풀 또한 1991-92 시즌부터 유럽 대항전에 복귀하는 것이 확정되면서 모든 조치가 해제되었다. 결국 잉글랜드 클럽들은 5년간 유럽 대항전 출전 금지, 리버풀은 6년간 유럽 대항전 출전 금지라는 중징계를 결과적으로 받게 되었던 것.

파일:알렉스퍼거슨 프리미어리그 캐리.jpg

이로 인해 사건 직전까지 유럽 대항전에서 쾌조의 성적을 올리며 UEFA 계수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던 잉글랜드 풋볼 리그[12]는 출전 정지 기간 동안 포인트를 쌓지 못했고 2008년이 되어서야 UEFA 계수 1위로 복귀할 수 있었다. 잉글랜드 클럽들이 비운 자리에는 소련,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네덜란드, 유고슬라비아, 동독,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스웨덴 리그의 클럽들이 출전해 기회를 가져갔다. 그러나 잉글랜드 리그 시스템 내에 포함되어 있는 웨일스 클럽들은 별도의 웨일스 컵을 통해 유러피언 컵과 컵 위너스 컵 출전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 기간 뱅고어 시티 FC, 렉섬 AFC, 카디프 시티 FC, 스완지 시티 FC 등의 웨일스 클럽들이 유럽 대항전에 우회 출전했다. 잉글랜드 풋볼 리그가 UEFA 계수를 유지했다고 가정했을 때, 징계 기간 동안 유럽 대항전 참가를 거부당한 잉글랜드 클럽들은 다음과 같다.

리버풀과 지역 라이벌이었던 에버튼 FC이 당시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기에 리그 상위권을 지켰으나 징계 때문에 유럽 대항전 출전이 막혔고, 이후 가뜩이나 좋지 않던 리버풀과의 관계가 더 악화되었다. 이후 구디슨 파크로 원정을 나온 리버풀 팬들에게 에버튼 팬들이 "살인자들에게 2-0(2-0 to the Murderers)"라는 식의 조롱을 던지면서 도발하는 사건들이 종종 벌어졌다.

또한 징계를 받은 5년 동안 UEFA 계수 순위가 많이 떨어져, 잉글랜드 리그에 할당되는 유럽 대항전 출전권 자체가 매우 줄어들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잉글랜드 클럽들의 유럽 대항전 복귀는 더디게 이루어졌다. 이에 결국 잉글랜드 리그의 경쟁력을 크게 떨어트리게 된 헤이젤 참사는 프리미어 리그 시대의 개막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6.2. 경기장 관련 법 개정

참사 이후, 잉글랜드 클럽들은 훌리건들이 경기에서 사고를 일으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더 엄격한 규칙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1986년에는 사고를 친 훌리건들을 3개월 동안 경기장에 출입 금지시키는 법적 조항이 도입되었고, 1991년에는 영국 의회에서 1989년부터 도입된 축구 관중법을 개정하여 축구 관련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에게 축구 금지 명령(FBO)을 강화하는 '축구법'이 통과되었다.

이러한 경기장 관련 법들은 이후로 계속해서 개정되어 발전하게 되었다. 1995년 2월 15일 아일랜드와의 경기에서 잉글랜드 훌리건들이 벌인 폭력 사태를 시작으로 1998년 FIFA 월드컵에서 벌어진 비슷한 폭력 사태, UEFA 유로 2000에서 발생한 훌리건 폭동을 거쳐 잉글랜드의 축구 법안들은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이에 2004년까지 잉글랜드 내에서만 2,000건의 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영국 경기장의 안전 시설 개혁은 헤이젤 참사를 겪은 후에도 지지부진하여 또 다른 참사를 낳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참사의 원인이 훌리건의 난동에 의해서만 일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실하고 안전하지 못한 경기장 시설 또한 헤이젤 참사의 원인 중 하나였다. 결국 제대로 된 경기장 안전 시설 관리 관련 법 개정은 1989년 4월 힐스버러 참사에 대한 테일러 보고서 이후 이루어졌으며, 이는 결국 97명의 리버풀 팬들의 사망으로 이어졌다. 이후 잉글랜드의 모든 좌석 경기장은 입석 관람이 금지되었으며, 경기장 전역에 CCTV가 널리 보급되었다. 이에 영국은 현재까지도 타 유럽 국가와 비교했을 때 경기장 주변에 압도적인 CCTV를 깔아 놓고 있으며 경찰들이 훌리건을 엄격히 관리하는 국가다.[14]

한편, 헤이젤 스타디움은 1985년 이후 축구 경기를 치르지 않으면서 10년 동안 육상 경기장으로만 활용되었고, 1990년 UEFA가 벨기에의 유럽 대항전 개최를 최소 10년간 금지하면서 2000년까지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일부 경기에서만 쓰였다. 그리고 1994년에는 스타드 루아 보두앵이라는 이름으로 증축되었고, 이후 1995년 8월 28일에 벨기에와 독일 간의 친선 국가대표팀 경기가 열리면서 처음으로 다시 축구 경기를 열었다. 그러나 2006년 5월부터 11월까지는 안전 문제로 또 다시 사용이 중단된 적도 있었다.

7. 추모

파일:external/i1.liverpoolecho.co.uk/WA904018.jpg
1985년 헤이젤 참사 추모식에 참석한 리버풀 FC의 관계자들의 모습

사건 직후인 1985년에 공식 추모식이 열렸다. 이후 토리노에 위치한 유벤투스 클럽 본부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추모비가 설치되었다. 기념비에는 토리노 지역 기자 지오반니 아르피노가 쓴 비문이 들어가 있다.

1985년 8월 18일, 리버풀은 아스날과의 경기 전에 안필드에서 별도의 추모식을 열었다. 해당 경기가 참사 이후 첫 공식 경기였다.

1991년에는 희생자 중 하나인 클라우디오 자바로니의 고향, 레지오 에밀리아에서 39명의 희생자를 위한 또 다른 추모비가 개관되었다. 매년 "Per non dimenticaer Heyel"(헤이젤을 잊지 않기 위해)라는 이름의 위원회는 희생자들의 가족들과 함께 5월 29일에 추모식을 개최하고 있다. 유벤투스를 비롯하여, 인터 밀란, AC 밀란, 토리노 FC 등 다수의 이탈리아 서포터즈 클럽들이 이 추모식에 참석한 바 있다. 유로 2000 기간 동안에는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현장에 꽃을 헌화하기도 했다.

2005년 5월 29일에는 스타드 루아 보두앵으로 새롭게 개장한 헤이젤 스타디움에 추모의 뜻을 담은 추모비가 공개되었다. 이 기념비는 프랑스 예술가 패트릭 리무가 디자인한 해시계로, 이탈리아와 벨기에의 돌을 사용해 제작되었고, 영국인 W. H. 오덴의 시 "장례식 블루스"가 조각되어 있어 세 나라의 슬픔을 상징한다. 당시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밤에는 점등이 되어 희생자들의 이름을 39개의 빛이 비추는 구조다.
파일:헤이젤메모리얼.jpg
안필드에 설치된 헤이젤 참사 메모리얼

2010년 5월 26일, 25년 전 사망한 유벤투스 팬들을 기리기 위해 안필드의 센터네리 스탠드[15]에 설치된 추모 명판이 공개되었다. 이후 리버풀은 매년 헤이젤 추모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2010년 벨기에 헤이젤 스타디움에서 참사 25주년 추모행사가 열렸을 때 당시 선수로 뛰었던 플라티니 UEFA 회장은 다음과 같은 추모사를 남겼다.
||<tablealign=left><tablebordercolor=#c5a77c><tablebgcolor=#fff,#191919><bgcolor=#1D439B> ||
그 경기는 90분으로 끝난 게 아니다. 아직도 당시 경기는 계속되고 있다. 그날 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당시 사건은 우리 인생에 남아있으며, 지금도 또한 앞으로도 항상 우리 인생에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시 경기에 참가했던 선수들이든, 단순히 텔레비전으로 경기를 지켜봤던 사람들이든 그 참사를 목격한 사람들이라면 어느 누구도 기억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39명의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우리 머리와 가슴은 희생자들과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할 것이다.

2010년 헤이젤 참사 추모사에서
||


2012년 5월, 토리노의 J-뮤지엄에서 헤이젤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이후 유벤투스 스타디움 앞 클럽의 명예의 거리에는 참사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헌사가 포함되었다.

2014년 2월, 토리노에서 헤이젤 참사와 수페르가 항공기 참사를 주제로 한 전시회가 열렸다.

2015년 11월 12일, 이탈리아 축구 연맹(FIGC), 유벤투스 대표단, 그리고 희생자 유족들이 스타드 루아 보두앵의 헤이젤 기념비 앞에서 참사 30주기 추모식을 가졌다. 다음 날, 이탈리아와 벨기에의 국가대표 친선 경기를 앞두고 FIGC 회장 카를로 타베키오는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의 등번호 39번을 영구 결번으로 발표했다.

2022년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앞서서는 리버풀의 케니 달글리시가 헤이젤 참사 37주기를 맞아 경기 시작 전 희생자들을 위해 결승 무대 경기장에서 헌화를 했다.

2023년 1월에는 토리노 시장 스테파노 로 루소는가 2023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의 공식 인수인계를 위해 리버풀을 방문하였다가 안필드를 찾아 추모비 앞에 헌화를 했고, 이안 러시가 참석해 함께 추모를 했다.

8. 여담

파일:800px-Amicizia.jpg
2004-05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8강 1차전의 안필드 스피언 콥 스탠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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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벤투스의 미셸 플라티니와 리버풀의 이안 러시
  • 헤이젤 참사 이후 리버풀과 유벤투스는 2004-05 시즌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 처음으로 다시 만났다. 리버풀 팬들은 사과와 추모의 뜻을 전하고자 안필드에서 열린 첫 번째 경기 전에 "amicizia"(이탈리아어로 "우정")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형성하기 위해 플래카드를 펼쳤다. 실제로 이러한 행사는 경기 전 리버풀과 유벤투스 구단 간에 합의된 사항이었으며, 두 구단이 공식적으로 배포한 경기 전 프로그램 시트와 이미지들이 모두 화해와 우정을 주제로 하고 있다. 또한 경기 전 양 팀의 당대 레전드 미셸 플라티니 이안 러시가 화해와 추모의 뜻을 담은 명판을 들고 나오는 식전 행사가 이뤄졌다. 하지만 이런 행사는 유벤투스 서포터들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고, 우정을 운운한다며 격분한 팬들이 다수 있었다.[16] 실제로 유벤투스 팬들은 이 플래카드에 가운뎃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거칠게 화답했다. 이어 2차전 때 유벤투스 팬들은 "말은 쉽지만, 살인을 용서하긴 어렵다."(Easy to speak, difficult to pardon: Murders)라는 현수막과 힐스버러 참사 발생 날짜와 함께 "신은 존재한다."(15-4-89, Sheffield. God exists.)[17]"라는 과격한 현수막을 홈에서 꺼내 들었다. 이어 다수의 리버풀 팬들이 유벤투스 울트라스에 의해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참고로 1차전 결과는 리버풀의 2-1 승리로 끝났고 2차전 유벤투스 홈에서는 0-0 무승부로 마무리되면서 리버풀이 대회 4강에 진출, 결국 이스탄불의 기적을 만들며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 한편 당시 리버풀의 핵심 선수였던 케니 달글리시는 아래와 같은 발언을 해 다소 비판을 받았다. 사건의 이해에 따라 다소 논란이 있을 수 있는 내용이다. 헤이젤 참사 1년 전 AS 로마와의 유러피언 컵 결승전이 끝난 후 이탈리아 울트라스들로부터 리버풀 팬들이 공격을 받은 사건이 있었지만 그게 헤이젤에서 벌어진 리버풀 훌리건들의 행동에 어떠한 이유도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해당 참사에서 유벤투스 서포터들이 먼저 돌을 던지고 도발을 했다는 내용 또한 일각의 주장 중 하나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누가 먼저 충돌을 야기했는지 정확하지 않다. 다만, 경기장을 제공한 벨기에 측과 UEFA의 경우 안전 사고 예방에 매우 불성실했기에 충분히 비판이 가능하다. 실제로 벨기에 측 인사들은 재판을 통해 처벌도 받았고 UEFA측도 과실에 대한 조사와 구금을 받았다.
I can't condone the action of some Liverpool fans but it is difficult not to react when the opposing supporters are throwing missiles at you.
(리버풀 팬들의 행동을 용납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상대편이 계속 자신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을때 이에 대해 반응하지 않고 참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If they had foreseen the dreadful consequences, or thought what terrible things might unfold, I'm sure the stones would never have been thrown by the Italians and that the English retaliation would never have occurred. Every single one of them, both Italian and English, must have regretted it.
(만약 그들이 어떤 끔찍한 결과가 일어날 지 알았다면, 이탈리아 사람들은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을 것이고, 잉글랜드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보복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곳에 있었던 이탈리아 사람들과 잉글랜드 사람들 모두 반드시 후회해야 합니다.)
회고록 전문
  • 당시 참사 희생자였던 로베르토 로렌티니의 아들 안드레아 로렌티니가 참사에 관해 이렇게 언급하기도 했다. 과거 참사 당시에는 비교적 덜 조명받았던 안전과 치안 조치 문제를 언급 했다.
The Heysel stadium was inadequate to host a European Cup final. Structurally, it was totally inadequate. UEFA were really irresponsible in deciding to hold the contest there.
(헤이젤 경기장은 유러피언 컵 결승전을 개최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구조적으로 완전히 부적절했습니다. UEFA는 대회를 그곳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해 정말 무책임했습니다.)
They were at fault as if a different venue had been chosen, this tragedy would have been averted. And those handling ticket distribution must shoulder some of the blame.
(다른 장소를 선택했다면 이 비극을 피할 수 있었기에, 그들에게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티켓 배분를 담당하는 사람들은 일부 책임을 져야 합니다.)
It was stupid of them to put the Liverpool fans next to the Juventus fans. Even the police were at fault that night. They weren’t good enough.
(리버풀 팬들을 유벤투스 팬들 옆에 두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날 밤 경찰에게도 잘못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Inside the stadium, there weren’t enough officers who would have been able to avert this tragedy. The Juventus fans were definitely the victims.
(경기장 안에는 이 비극을 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경찰관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유벤투스 팬들은 확실히 피해자였습니다.)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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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이탈리아의 대형 사고 및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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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2024년 9월 5일
21 2024년 9월 람페두사 난민선 침몰 사고
2023년 10월 3일
22 베네치아 버스 추락사고
2023년 7월 12일
46 2023 람페두사 난민선 침몰 사고
2023년 2월 26일
94 칼라브리아 난민선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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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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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사망 사건명
2019년 10월 6일
250 2019 람페두사 섬 난민선 침몰 사고
2018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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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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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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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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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3일
359+ 2013년 10월 람페두사 섬 난민선 침몰 사고
2013년 7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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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6일
150 2011년 지중해 난민선 침몰 사고
[ 200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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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6월 29일
32 비아레조 열차 탈선 사고
2001년 10월 8일
118 밀라노 리나테 공항 지상 충돌 사고

[ 199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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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99년 11월 11일
67 포자 아파트 붕괴 사고
1999년 3월 24일
39 몽블랑 터널 화재
1998년 12월 16일
27 비아 디 비그나 빌딩 붕괴 사고
1998년 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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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3월 28일
83 오트란토 알바니아 난민선 침몰 사고
1996년 12월 16일
283 F174 침몰 사고
1995년 12월 13일
49 바나트 에어 166편 추락 사고
1994년 7월 14일
27 로마 요양원 붕괴 사고
1991년 4월 10일
140 모비 프린스 참사
1990년 11월 14일
46 알리탈리아 404편 추락 사고
1990년 4월 10일
30 제노바 알레산드리아 버스 추락 사고
[ 198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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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89년 9월 3일
150 113 쿠바나 항공 9046편 추락 사고
1989년 2월 8일
144 137 인디팬던트 에어 1851편 추락 사고
1988년 10월 17일
33 우간다 항공 775편 추락 사고
1987년 10월 15일
37 아에로 트랜스포티 이탈리아니 항공 460편 추락 사고
1985년 7월 19일
268 스타바 댐 붕괴사고
1985년 5월 29일
39 32 헤이젤 참사
1985년 2월 7일
21 1985년 아파트 붕괴 사고
1983년 12월 15일
35 네르비 고속도로 버스 추락 사고
1983년 2월 13일
64 스타튜토 극장 화재
1982년 4월 25일
35 팔라조 델 비그놀라 화재
1980년 8월 2일
85 볼로냐 폭탄 테러
1980년 11월 21일
28 쿠링가 열차 충돌 사고
1980년 6월 27일
81 이타비아 항공 870편 추락 사건
[ 197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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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979년 9월 14일
31 아에로 트랜스포티 이탈리아니 12편 추락 사고
1978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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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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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3월 3일
44 세라산 이탈리아 공군기 추락 사고
1976년 5월 2일
44 카발레세 케이블카 추락사고
1974년 1월 1일
38 이타비아 항공 897편 추락사고
1973년 12월 17일
34 1973년 로마 공항 습격·납치 사건
1972년 10월 30일
27 아에로 트랜스포티 이탈리아니 항공 327편 추락 사고
1972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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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1월 9일
52 영국 공군 허큘리스 추락사고
1971년 8월 28일
25 헬레아나호 화재
1970년 4월 9일
20 발러호 침몰 사고

[ 196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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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1월 23일
50 트랜스 월드 항공 800편 이륙 사고
1964년 3월 28일
45 알리탈리아 항공 045편 추락 사고
1963년 10월 9일
1900 + 바이온트댐 붕괴 사고
1962년 5월 31일
61 보게라 열차 충돌 사고
1961년 12월 23일
71 피우마렐라 열차 탈선 사고
[ 195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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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9월 16일
58 비아 카노사7 빌딩 붕괴사고
1959년 6월 26일
68 트랜스 월드 항공 891편 추락 사고
1958년 10월 22일
31 브리티시 유러피언 에어웨이즈 항공 142편 지상충돌 사고
1956년 12월 22일
21 기너 산 C-47-DL 추락 사고
1956년 11월 24일
34 LAI 항공 451편 추락 사고
1956년 8월 8일
262 136 마르시넬 광산 사고
1956년 7월 25일
51 안드레아 도리아호 침몰사고
1955년 3월 22일
24 모르가노 광산 참사
1955년 2월 13일
29 사베나 항공 503편 추락 사고
1954년 4월 8일
21 남아프리카 항공 201편 공중분해 사고
1954년 1월 10일
35 영국해외항공 781편 공중분해 사고
1952년 2월 17일
31 헌팅 에어 트랜스포트 빅커스 614 추락 사고
[ 194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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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23일
33 KLM 록히드 L-749 추락 사고
1949년 5월 4일
31 수페르가의 비극
1947년 11월 28일
20 알프스 미 공군 C-47B 추락 사고
1947년 11월 18일
21 산타마리아 딜 몬테 브리스톨 170 추락 사고
1947년 7월 16일
48 알벵가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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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벨기에의 대형 사고 및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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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 <colcolor=#000> 사망 사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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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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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22일
32 2016년 브뤼셀 테러 사건
2012년 3월 13일
28 21 시에레 터널 버스 충돌 사고
[ 200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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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30일
24 기슬렝기엔 참사

[ 199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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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3월 31일
60 32 타롬항공 371편 추락 사고
[ 198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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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해럴드 오브 프리 엔터프라이즈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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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헤이젤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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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월 23일
23 회스덴 졸더 기숙학교 화재
1973년 7월 18일
43 1973년 라쁘리 램프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10월 2일
63 브리티시 유러피언 에어웨이즈 706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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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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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7월 15일
21 디낭 버스 사고
1967년 8월 21일
22 마르텔린시 가스 폭발 사고
1967년 5월 22일
325 이노베이션 백화점 화재
1967년 2월 13일
21 발 베르 화재
1966년 7월 25일
33 베르샤우 버스 사고
1963년 6월 26일
38 데트몰트 벨기에 공군 C-119 추락 사고
1963년 6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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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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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5월 18일
61 사베나 항공 DC-7 추락 사고
1956년 8월 8일
262 마르시넬 광산 사고
1955년 4월 3일
39 리오 극장 화재
1955년 2월 13일
29 사베나 항공 503편 추락 사고
1954년 12월 3일
20 윌셀레 열차 충돌 사고
1953년 10월 24일
26 Ougrée-Marihaye광산 폭발 사고
1953년 10월 14일
44 사베나 콘베어 CV-240 추락 사고
1951년 2월 22일
23 Duc de Normandie호 침몰 사고
1950년 5월 11일
39 트라제니에스 광산 폭발 사고
[ 194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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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12일
31 사베나 더글러스 DC-4 추락 사고
1948년 3월 2일
20 사베나 DC-3 추락 사고
1946년 9월 18일
27 사베나 DC-4 추락 사고
1943년 12월 3일
24 리스프 열차 사고
1942년 4월 29일
189 테센데로 참사
1940년 11월 14일
21 디에젬 열차 충돌 사고

[ 193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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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5월 17일
57 Fief of Lambrechies 광산 폭발 사고
[ 192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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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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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1월 18일
1007 하몽 참사

[ 1900년대 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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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사망 사건명
1899년 2월 19일
23 포레스트역 열차 충돌 사고
1889년 2월 3일
22 그로넨달 열차 탈선 사고
1888년 11월 13일
32 프레데릭 광산 사고
1879년 4월 17일
121 L'Agappe 광산 폭발 사고
1865년 2월
57 생 캐서린 광산 폭발 사고
1858년 5월 31일
26 라루비에르역 열차 충돌 사고
1850년 3월 22일
76 메리 조셉 광산 폭발 사고
1845년 5월 5일
63 부수부아 광산 폭발 사고
1838년 6월 22일
59 에스페란스 탄광 폭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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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명칭은 에이젤 경기장 [2] 현재의 EFL 챔피언십으로, 당시엔 EFL 챔피언십이 1부리그였다. 현재의 체계가 잡힌 건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후. [3]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 [4] 리버풀 뿐 아니라 잉글랜드의 훌리건 문화 자체가 과격하게 팽창하며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5] 현재는 스타드 루아 보두앵이다. [6] 닉 혼비의 '피버 피치'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까지 잉글랜드 훌리건들에게는 상대편 서포터석으로 넘어가 관중석에서 단체로 달리는 관습이 있었는데 특별한 것은 아니고 상대를 놀래키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7] 이탈리아인 32명, 벨기에인 4명, 프랑스인 2명, 북아일랜드인 1명 [8] 몇 년 후 리버풀의 주장이었던 닐은 그 때 경기를 취소하는 것이 '더 나은 결정'이었을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9] 리버풀은 이 경기 이전까지 유러피언컵 결승전 4전 4승을 기록 중이었다. [10] 참고로 플라티니가 헤이젤 참사에 대한 악몽을 극복하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언하고 말았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전술했듯 우승을 격하게 축하하다가 비판받고 이에 대해 심각성을 뒤늦게 알았다고 해명한 것에서 현장에서 참사를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거나 한 것은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다. 진짜 이유는 당연히 우승할 것이라고 여겨졌던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실패한 후 큰 상실감을 겪은 것이다. UEFA 유로 1984에서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은 플라티니의 5경기 9골이라는 대활약 속에 전승 우승을 차지했으며 멕시코 월드컵에서도 최강 전력을 자랑했지만 준결승에서 서독에게 패배하며 두 대회 연속으로 준결승에서 서독에게 패배해 결승 진출이 좌절되는 기록을 쓰게 되었다. 이에 좌절한 플라티니는 해당 월드컵 이후 유벤투스에서 1시즌을 소화한 후 은퇴했다. [11] 26명 중 2명은 영국에 구금되어 있다가 후에 재판을 받았다. [12] 1977년부터 헤이젤 참사가 있던 1985년까지 9시즌 동안 잉글랜드 클럽이 8번이나 결승전에 올랐고 무려 7번 우승했다. 심지어 1977년부터는 6번 연속으로 잉글랜드 클럽이 우승했다. 리버풀이 1977년, 1978년, 1981년, 1984년에 우승했고, 노팅엄 포레스트가 1979년과 1980년에, 아스톤 빌라가 1982년에 우승했다. [13] 리버풀만 잔여 징계 1시즌을 더 받았는데, 하필 해당 시즌 리그 우승 팀이 리버풀이어서 유러피언 컵은 1991년까지 잉글랜드 팀 없이 진행되었다. [14] 사실 CCTV는 경기장 주변이고 자시고 어딜 가나 영국의 도시라면 안 깔린 데가 없을 정도다. 영국이 괜히 '1984의 나라'라고 불리며 대한민국과 함께 CCTV 대국으로 거론되는 게 아니다. [15] 현재의 케니 달글리시 경 스탠드다. [16] 물론 경기 전 리버풀 팬들과 악수하는 이미지가 그려진 공식 머플러를 들고 사이좋게 사진을 찍은 유벤투스 팬들도 있긴 했다. [17] 힐스버러 참사가 1989년 4월 15일 셰필드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