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02 12:44:26

테르모필레 전투(기원전 191년)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전투에 대한 내용은 테르모필레 전투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테르모필레 전투
Battle of Thermopylae
시기 기원전 191년 4월 24일
장소 그리스 남부 테르모필레
교전국 파일:attachment/mon_256.png 로마 공화국 파일:attachment/mon_256_12.png 셀레우코스 제국
파일:aitolian_league_mon_256.png 아이톨리아 동맹
지휘관 파일:attachment/mon_256.png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파일:attachment/mon_256.png 대 카토
파일:attachment/mon_256_12.png 안티오코스 3세
병력 30,000명 셀레우코스군: 보병 10,000명, 기병 500명, 전투 코끼리 6마리
아이톨리아군: 4,000명
결과 로마 공화국의 승리
영향 안티오코스 3세의 소아시아 철수

1. 개요2. 배경3. 경과4. 이후

[clearfix]

1. 개요

기원전 191년 4월 24일, 로마군과 셀레우코스 제국-아이톨리아 동맹 연합군이 그리스 남부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맞붙은 전투.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의 첫번째 대규모 전투이다.

2. 배경

기원전 210년 ~ 205년 파르티아, 박트리아 및 인도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온 셀레우코스 제국의 군주 안티오코스 3세는 기원전 203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주 필리포스 5세와 동맹을 맺고 지난해에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급사한 뒤 6살밖에 안 된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즉위하면서 입지가 위태로워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역을 나눠가지기로 합의했다. 그 후 안티오코스 3세는 제5차 시리아 전쟁을 단행했다. 그의 군대는 기원전 202년 셀레우코스 제국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분쟁 지역이었던 코엘레 시리아의 중심지인 다마스쿠스를 공략했고, 기원전 201년 팔레스타인을 침공하여 가자를 점령했다. 한편 필리포스 5세는 사모스 섬을 점령하고 카리아를 침공했으며, 기원전 200년 여름 트라키아와 헬레스폰토스의 프톨레마이오스 영토와 독립 도시들을 정복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로마 공화국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여파에 시달려서 이집트를 도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기원전 200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장군 스코파스가 팔레스타인을 일시적으로 탈환했으나 안티오코스 3세의 반격으로 파니움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스코파스는 시돈에서 포위되어 장기간 농성하다가 기원전 199년 초여름에 항복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여세를 몰아 기원전 198년 코엘레-시리아와 유대를 정복하였고, 기원전 197년 소아시아의 킬리키아, 리키아, 이오니아, 크산토스, 텔메소스, 에페수스를 정복했다. 그러던 중 필리포스 5세가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로마군에 연이어 패배하면서 구원을 요청했지만, 안티오코스 3세는 굳이 마케도니아를 위해 로마와 대적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 마케도니아에 지원군을 보내지 말아달라는 로마 사절단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 대신 지난날 셀레우코스 제국에 속했다가 독립한 소아시아 서부와 트라키아를 공략하는 데 힘을 기울이기로 했다.

기원전 196년, 안티오코스 3세는 소아시아 서부의 도시국가들을 별다른 전투 없이 복속시킨 뒤 발칸 반도로 건너가 트라키아 일부를 점령하고 리시마케아를 트라키아의 새로운 수도로 삼고 둘째 아들 셀레우코스 4세에게 이 지역의 관리를 맡겼다. 또한 로도스, 비잔티움, 갈라티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는 새로 정복한 영지 및 도시들이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는 한 자치를 누릴 수 있게 해줬다. 특히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에 대한 무력 행사를 회피하고 자신은 정복자가 아니라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왔다고 선전했다. 다만 외교 정책은 전적으로 자신의 의사에 따르게 했으며, 위기 상황시 군대를 제공하고 기여금을 지불하게 했다.

한편,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한 뒤 필리포스 5세와 평화 협상을 한 끝에 필리포스 5세가 그동안 정복했던 그리스, 일리리아, 카리아 등지에서 철수하고, 150여년간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지였던 테살리아에서 완전 철수하며, 필리포스의 차남 데메트리오스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1천 탈란트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내용의 템페 협약을 성사시켰다. 이후 플라미니누스는 그리스인들에게 자유를 주고 로마군은 완전 철수한다고 선언해 전 그리스인의 환호를 받았다. 로마군은 약속대로 대거 철수했지만, 아크로코린토스, 할키스, 에레트리아 등 3개 요충지에 일부 병력이 남았다. 그러다가 안티오코스 3세가 트라키아에 진출하자, 로마 원로원은 철수를 연기하고 플라미니누스를 그리스 총독에 계속 앉히기로 했다.

플라미니누스가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게 해주겠다고 선언했다는 소식을 접한 소아시아 서부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로마에 의지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특히 스미르나, 람사쿠스, 알렉산드리아 트로아스는 로마에 사절을 보내 셀레우코스 제국을 물리쳐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로마 원로원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가 이끄는 사절단을 에페소스에 머물고 있던 안티오코스 3세에게 보내 트라키아에서 철수하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부터 빼앗은 모든 영토를 돌려주며, 소아시아 서부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자유를 누리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안티오코스 3세는 트라키아는 본래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역이었으니 그곳을 회복하는 건 정당하다고 주장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는 이미 평화 협상을 하는 중이니 로마가 상관할 바 아니라고 밝혔다. 또한 소아시아 서부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자신이 이미 해방시켰으며, 그들을 관리하는 건 자신의 권한이라고 답하고 사절단을 돌려보냈다. 그 후 안티오코스 3세는 자신의 딸 클레오파트라 1세를 프톨레마이오스 5세와 결혼시켜 이집트와의 전쟁을 종식시켰다. 이때 그는 자신이 일전에 패배한 장소인 라피아에서 결혼식을 올리도록 했는데, 이는 자기가 코엘레-시리아를 정복했음을 전 세계에 과시하려는 의도였다.

기원전 195년, 로마에서는 한니발 바르카가 안티오코스 3세와 힘을 합쳐 로마를 도모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로마 원로원은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퀸투스 테렌티우스 쿠리오를 카르타고로 파견해 한니발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카르타고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한니발은 사전에 눈치채고 시돈으로 망명한 뒤 안티오코스 3세를 찾아갔다. 안티오코스 3세는 한니발을 극진히 대접하고 자신의 고문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로마와 셀레우코스 제국간의 관계는 한층 더 냉각되었다.

기원전 194년, 플라미니누스는 안티오코스 3세가 트라키아에서 물러나고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국경으로 받아들인다면, 로마는 그가 소아시아를 지배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제국의 고토인 트라키아에서 철수할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소아시아의 일부 도시에서 철수할 의사가 있음을 내비쳤다. 기원전 193년,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파이투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등으로 구성된 로마 사절단이 안티오코스 3세를 찾아가서 한니발 바르카를 로마에 인도하고 그리스에 일절 간섭하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무시당했다.

이렇듯 양국간의 협상이 매년 이뤄졌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사이, 아이톨리아 동맹이 로마에 반기를 들고 셀레우코스 제국과 손을 잡는 방안을 진지하게 모색했다. 그들은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때 로마와 힘을 합쳐 마케도니아에 대적했지만, 테살리아로 영역을 확대하려던 계획이 로마의 반대로 무산되자 격분했다. 여기에 로마가 데메트리아스, 칼키스에 군대를 여전히 주둔시킨 것은 장차 그리스를 정복하려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라고 의심했다. 아이톨리아 동맹의 스트라테고스인 토아스는 안티오코스 3세와 동맹을 맺고 로마의 간섭을 배제한 뒤 세력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해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이에 플라미니누스는 아이톨리아 동맹의 대표자 회의에 참석해 모든 모순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자고 제안했지만, 아이톨리아 동맹은 그리스 해방을 위해 안티오코스 3세를 초대하기로 결의했다.

기원전 192년 봄, 아이톨리아인들은 테살리아의 데메트리아스 공략에 착수했다. 그들은 로마군이 계속 주둔한 것에 반감을 품은 데메트리아스 민중들의 호응에 힘입어 데메트리아스를 성공적으로 장악하고 로마군을 내쫓았다. 뒤이어 에우보이아의 칼키스 공략을 위해 파견된 아이톨리아 군인들은 칼키스 망명자들의 지원을 받아 도시에 진입하려 했지만, 칼키스의 이웃 도시들인 에레트리아, 카리스토스가 군대를 급파해 이를 저지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그 해 여름, 아이톨리아인들은 로마에 맞서 스파르타를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스파르타 참주 나비스는 아카이아 동맹에서 탈퇴하고 기테이온 항구를 장악했지만, 로마의 중재 제안을 받아들여 아카이아인들과 화해하려 했다. 이에 아이톨리아 파견대는 나비스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구실로 스파르타로 진군한 뒤 합동 작전 중에 나비스를 살해하고 스파르타를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스파르타인들이 지도자를 살해한 것에 분노해 봉기를 일으켜 아이톨리아군을 모조리 죽이거나 사로잡아 노예로 팔아버리는 바람에 무산되었고, 이후 스파르타는 아카이아 동맹에 합류했다.

한편, 로마 원로원은 데메트리아스가 아이톨리아군에 넘어갔다는 소식에 격분해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를 데메트리아스에 파견해 당장 철수하지 않으면 데메트리아스를 무력으로 탈환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아이톨리아인들은 로마가 데메트리아스 뿐만 아니라 자신들까지 무력으로 정복하려 들 거라 여기고 안티오코스 3세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현재 그리스에서 유일한 친 셀레우코스 세력인 아이톨리아 동맹마저 로마에 넘어가게 내버려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지금 당장 소집할 수 있는 정예병만 이끌고 그리스로 건너가기로 마음먹었다.

기원전 192년 말, 안티오코스 3세는 보병 10,000명, 기병 500명, 전투 코끼리 6마리를 이끌고 데메트리아스에 상륙해 로마에 적대적인 의원들의 영접을 받았고 아이톨리아 동맹의 스트라테고스로 선출되었다. 그 후 안티오코스 3세는 칼키스를 동맹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3,000 병력을 칼키스로 먼저 보내고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뒤를 따라갔다. 500명의 로마군 및 아카이아군이 칼키스를 구원하고자 이동했는데, 아카이아인들은 제 시간에 도시에 도착했지만 로마군은 한발 늦었고, 셀레우코스군은 에우리포스 운하 반대편에 있는 칼키스 소유의 요새를 점령했다. 뒤늦게 도착한 로마군은 에우보이아 섬의 다른 지역으로 건너갔지만, 셀레우코스군이 압도적인 숫자를 앞세워 공격하자 오래 버티지 못하고 대부분 죽거나 포로로 전락하고 나머지는 칼키스로 퇴각했다. 이후 안티오코스가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칼키스에 도착하자, 로마-아카이아군과 친 로마 정치인들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고. 칼키스 시는 안티오코스 3세에 항복했다.

하지만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주겠다는 안티오코스 3세의 주장에 지극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스에 남아있는 로마군은 얼마 되지 않았고 로마 정부로부터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의 부당한 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안티오코스 3세야말로 그리스를 정복하려고 여기에 왔다는 의심이 강했기에, 다들 그에게 가담하기를 꺼렸다. 다만 그리스 북부의 도시 국가인 아타마니아의 국왕 아마닌드로스는 자신의 처남인 메갈로폴리스의 필리포스를 마케도니아 국왕으로 등극시킬 절호의 기회라고 여겨 안티오코스 3세와 동맹을 맺었고, 엘리스는 아카이아 동맹의 위협으로부터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려면 안티오코스 3세를 도울 필요가 있다고 여기고 셀레우코스 제국 지지를 표명하고 1,000명의 셀레우코스 군인들을 도시 내부에 수용했다.

기원전 192/191년 겨울, 셀레우코스-아이톨리아 동맹 연합군은 로마 덕분에 마케도니아 왕국으로부터 독립했던 테살리아 동맹을 침공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테살리아 도시 대다수를 공략했지만 라리사 공략은 악천후로 인해 실패하고 칼키스로 돌아갔다. 그는 함대를 본토로 보내 추가 병력을 수송하게 했다. 그러면서 그리스에 대한 자신의 애착을 보여주기 위해 칼키스 여인과 결혼했다. 한편, 로마 원로원은 안티오코스 3세가 그리스로 건너가서 군사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2개 로마 군단과 15,500명의 라틴 동맹군을 브루티움에 집결시킨 뒤 기원전 191년 봄에 아폴로니아로 파견했다. 이들의 지휘관인 마르쿠스 바이비우스 탐필루스는 로마 편에 선 마케도니아 국왕 필리포스 5세와 함께 테살리아 탈환 작전에 착수했다.

테살리아에 남겨진 셀레우코스 수비대는 거의 없었기 때문에, 테살리아 북동쪽 지역은 탐필루스에게 빠르게 함락되었다. 그러나 필리포스 5세의 마케도니아군은 테살리아 서부에서 펠린나 시에 자리잡은 아타마니아인들의 저항에 부딪쳤다. 이후 기원전 191년 집정관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가 1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건너와서 탐필루스의 군대와 합류한 뒤 펠린나 시로 가서 마케도니아군과 합류하자, 펠린나 시는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다. 그 후 필리포스는 아타마니아를 침공했고, 아마닌드로스는 저항을 포기하고 암브라시아로 망명했다. 또한 글라브리오는 테살리아 남부에 잔존한 셀레우코스 수비대를 몰아내고 테살리아 전역을 탈환했다. 한편, 안티오코스 3세는 아카이아 동맹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시도했다. 그러나 아카이아 동맹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라이벌인 아이톨리아 동맹이 안티오코스 3세와 손잡은 것에 반감을 품고 그를 적대했다.

결국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안티오코스 3세는 칼키스로 돌아간 뒤 로마군을 대적할 채비에 착수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그에게 좋지 않게 흘러갔다. 10,000명의 셀레우코스군이 소아시아 해안가에서 함대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셀레우코스 함대가 로마-페르가몬-로도스 연합 함대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묶여 있기만 했다. 그리고 아이톨리아 동맹은 필리포스 5세의 자국 영토 침공을 우려해 4,000명만 보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군이 30,000여 명인데 비해 전력이 미약한 것을 보고 회전을 벌이지 않기로 마음먹고 테르모필레 협곡에 자리를 잡았다. 셀레우코스군은 테르모필레 동쪽 입구에 주둔했고, 아이톨리아 동맹군 2,000명은 협곡의 서쪽 입구인 헤라클레이아 시에 주둔했으며, 나머지는 산길을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로마군이 테르모필레 협곡으로 진군하면서,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의 첫번째 대규모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경과

테르모필레 협곡은 길고 좁은 통로로, 한 쪽은 항구가 없는 바다로 둘러싸였고 다른 한 쪽은 접근하기 어려운 늪지대와 산비탈로 둘러싸였다. 길 위에는 칼리드로몬과 티치운트라는 두 개의 산봉우리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이 있어서 '테르모필레(Thermopylae, 따뜻한 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안티오코스 3세는 테르모필레 협곡에 자리를 잡은 뒤 도랑을 파고 2개의 제방을 차례로 건설했는데, 전면 제방은 후방의 제방보다 높이가 낮은 편이었다. 여기에 수백 명의 궁수, 투창병, 투석병을 오른쪽이 바다와 접해있고 왼쪽에는 제방과 접해 있는 요새 성벽에 배치했다. 경무장병들이 제방 앞에 자리잡았고, 팔랑크스는 성벽 앞에 포진했다. 마지막으로, 바다와 맞닿은 오른쪽 측면에는 500명의 기병과 6마리의 전투 코끼리를 배치했고, 데메트리아스와 칼키스 함대가 바다를 경비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기원전 480년 테르모필레 전투 당시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뭉친 그리스 전사들이 이 협곡에서 아케메네스 왕조군의 압도적인 군세를 상대로 사흘간 굳건히 버텼지만, 아케메네스 왕조군이 우회로를 통해 후방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궤멸되었던 전례를 잘 알고 있었다. 로마군이 우회로로 진입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아이톨리아 동맹군 2,000명을 협곡의 서쪽 입구인 헤라클레이아 시에 주둔시켰고, 나머지는 우회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맡겼다. 아이톨리아인들은 우회로가 내려다보이는 칼리드로무스, 테이키우스, 로툰디아의 산악 요새에 자리를 잡고 로마군이 올 때까지 대기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이 정도로 방비를 해두면 로마군이 쉽사리 뚫지 못하리라 여겼고, 그 사이에 소아시아에 있는 증원군이 자신에게 가세하면 로마군과 회전을 벌이기로 했다.

기원전 191년 4월 23일, 글라브리오는 30,000 로마군을 이끌고 헤라클레이아 시 인근에 도착했다. 그는 아이톨리아인들을 유인하기 위해 주변 지역을 황폐화시켰지만, 아이톨리아인들은 도시에 계속 남았다. 이에 글라브리오는 2,000 병력을 헤라클레이아에 남겨서 계속 포위하게 한 뒤, 2,000 기병대를 숙영지에 남겼다. 그리고 대 카토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에게 2,000 분견대를 맡겨서 각각 우회로로 돌아가서 적의 배후를 치라고 지시했다. 두 사람이 그날 밤 이동한 뒤, 글라브리오는 4월 24일 새벽 18,000명의 주력군을 이끌고 테르모필레 협곡으로 진격했다.

플라쿠스의 2,000 분견대는 야간 행군을 하는 동안 길을 좀처럼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향하는 바람에 전투가 끝날 때까지 참여하지 못했다. 반면 대 카토는 분견대를 이끌고 야밤에 신속하게 이동했다. 그러던 중 칼리드로무스 고개를 식별한 카토는 포로를 심문해 그곳을 지키는 병사가 600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카토는 즉시 칼리드로무스 고개로 돌진했고, 고개를 지키던 600 아이톨리아군은 한동안 항전했으나 끝내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항복했다.

한편, 글라브리오는 협곡을 막고 있는 셀레우코스군을 향해 공세를 개시했다. 셀레우코스군은 수적으로 열세했지만, 유리한 지형을 선점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버텼다. 그러나 카토가 우회로를 통해 후방에 침투하자, 전의를 급격하게 상실하고 패주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500명 밖에 안 되는 병력만 수습하여 칼키스로 도주했고, 많은 병사들이 로마군에 사살되거나 생포되었다. 수천 가량의 셀레우코스군은 로마군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후퇴한 뒤 안티오코스 3세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안티오코스 3세는 그들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채 소아시아로 급히 철수했다.

4. 이후

안티오코스 3세가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참패한 뒤 소아시아로 물러간 후, 글라브리오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안티오코스 3세를 격파한 뒤 헤라클레이아 시를 공략한 후 포키스, 보이오티아, 에우보이아 등 여러 도시의 복종을 받아내고 그들을 온건하게 대했다. 다만 미네르바 성소에 안티오코스의 동상을 세운 코로니 주민들에게 무거운 벌금을 매겼다. 이후 아이톨리아 동맹 쪽으로 눈길을 돌린 그는 나프팍토스 시를 2개월간 포위 공격했다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의 중재에 따라 그들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뒤이어 아이톨리아 동맹에게 안티오코스 3세와 동맹을 끊고 로마의 보호를 받으라고 권고했으나 무산되자 라미아를 기습적으로 공략한 후 암피사를 포위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한편, 로마 원로원은 셀레우코스군이 발칸 반도에 추가로 넘어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로마 함대를 파견해 에게 해를 봉쇄하려 했다.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 해군이 페르가몬 해군 및 로도스 해군과 합세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플리크세니다스에게 200척의 함선을 맡겼다. 이후 양측 해군은 기원전 191년 가을 코리코스 해전을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