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2 12:31:35

켄 그리피 주니어/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켄 그리피 주니어
1. 개요2. 시애틀 매리너스 1기
2.1. 1989 시즌2.2. 1990 시즌2.3. 1991 시즌2.4. 1992 시즌2.5. 1993 시즌2.6. 1994 시즌2.7. 1995 시즌2.8. 1996 시즌2.9. 1997 시즌2.10. 1998 시즌2.11. 1999 시즌
3. 신시내티 레즈
3.1. 2000 시즌3.2. 2001 시즌3.3. 2002 시즌3.4. 2003 시즌3.5. 2004 시즌3.6. 2005 시즌3.7. 2006 시즌3.8. 2007 시즌
4. 시카고 화이트삭스
4.1. 2008 시즌
5. 시애틀 매리너스 2기
5.1. 2009 시즌5.2. 2010 시즌
6. 국가대표 경력7. 연도별 기록

1. 개요

켄 그리피 주니어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시애틀 매리너스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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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드래프트[1]에서 전체 1순위로 시애틀 매리너스에 지명되어, 마이너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2.1. 1989 시즌

그러나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아 1989년 시즌 개막과 함께 메이저 리그로 콜업된 이후, 127경기에 출장해 .264 .329 .480 16홈런 61타점 16도루를 기록하며 올해의 신인 투표에서 3위에 올랐다.[2][3]

2.2. 1990 시즌

파일:external/projects.seattletimes.com/GriffeyTop10_02.jpg
아버지와 즐거웠던 한 때
다음 해, 신시내티 레즈에서 방출된 아버지 켄 그리피 시니어가 8월 29일에 시애틀과 계약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팀에서 뛰게 되었다. 아버지가 합류한 지 이틀 뒤에는 아버지-아들이 백투백 안타가 나온 뒤, 후속 타자의 적시타로 같이 득점을 하는 진기한 기록을 세우더니, 보름 뒤인 9월 14일에는 급기야 아버지-아들이 백투백 홈런을 기록하면서, 메이저 리그에서도 전무후무한 한 경기 부자(父子) 홈런이라는 기록을 세워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메이저 리그 역사상 전무후무한 부자(父子) 홈런
그 해를 155경기 .300 .361 .481 22홈런 80타점 16도루로 마친 그리피는, 다이나믹한 수비 능력을 보여주면서 아메리칸 리그 골드 글러브 외야수 부문 10연속 수상의 스타트를 끊는다[4].

2.3. 1991 시즌

1991년 154경기 .327 .399 .527 22홈런 100타점 18도루를 기록하며 팀의 주전 중견수로 자리매김했다.

2.4. 1992 시즌

이듬해인 1992년, 141경기 .308 .361 .535 27홈런 103타점 10도루라는 준수한 성적과 함께 그 해 올스타전에서 톰 글래빈을 상대로 적시타를 뽑아내고, 그렉 매덕스를 상대로 홈런을 터뜨리면서 올스타전 MVP를 수상하게 된다. 시즌이 끝나고 4년 $24M에 재계약을 맺은 그리피는 1993년, 자신의 장타 포텐셜을 터뜨리게 된다.

2.5. 1993 시즌

1993년 156경기 .309 .408 .617 45홈런 109타점 17도루를 기록하면서, 자신의 장타 포텐셜을 터뜨리며 본격적인 시애틀의 레전드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2.6. 1994 시즌

이듬해인 1994년, 111경기에 출장해 .323 .402 .674 40홈런 90타점 11도루를 기록하고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에서 2위에 올랐다. 그러나 8월 12일을 기해 선수노조가 파업에 돌입하면서 당시 로저 매리스의 시즌 최다홈런인 61홈런을 경신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5][6]

2.7. 1995 시즌

파업의 여파가 이어지던 1995년, 다이빙 캐치를 하다 손목이 골절되어 72경기 .258 .379 .481 17홈런 42타점 4도루에 그치게 된다. 하지만 그 해 부상에서 복귀한 그리피는 팀의 아메리칸 리그 서부 지구 우승을 이끌었고,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승리하기까지 하면서 선봉장 역할을 했다.

2.8. 1996 시즌

파일:켄 그리피 주니어 4년.jpg
1996년 또 다시 다이빙 캐치 도중에 손목 골절을 입은 그리피였지만, 그럼에도 140경기에 출장해 .303 .392 .628 49홈런 140타점 16도루를 기록하면서 49-56-56-48-40홈런의 스타트를 끊었고, 팀 역시 그리피에게 4년 $34M 계약을 선사했다.

2.9. 1997 시즌

그리고 1997년, 그리피는 선수 생활 최고의 시즌을 보내게 된다. 157경기에 출장해 .304 .382 .646 56홈런 147타점 15도루를 기록하면서 1961년 로저 매리스가 세운 61홈런 다음으로 아메리칸 리그 최다 홈런 기록을 세우고, 거기에 타점과 득점에서도 1위를 석권하면서 아메리칸 리그 역사상 아홉 번째로 만장일치 MVP가 된다.[7]

2.10. 1998 시즌

그러나 이듬 해인 1998년, 161경기에 출장해 .284 .365 .611 56홈런 146타점 20도루를 기록하고 홈런 더비에서 우승한 그리피였지만, 옆 동네에서 약쟁이 듀오가 전설로 남을 홈런 레이스를 벌이는 바람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2.11. 1999 시즌

1999년에도 .285 .384 .576 48홈런 134타점 24도루를 기록하고 올스타전 홈런 더비를 2연패한 그리피였지만, 새 구장인 세이프코 필드가 악명 높은 투수친화 구장이었기 때문에 선수들의 의견을 모아 펜스를 앞으로 당겨줄 것을 요구했지만 팀은 이를 거부하게 된다.[8] 그리고 어느 날 홈런일 줄 알았던 타구가 펜스 앞에서 중견수에게 잡히게 되자 그리피는 팀에게 트레이드를 요구하게 된다.[9]

시애틀은 뉴욕 메츠가 내민 옥타비오 도텔, 로저 세데뇨, 아르만도 베니테스 또는 데니스 쿡이라는 카드가 맘에 들었으나, 그리피가 이를 거절하자 결국 신시내티 레즈가 내민 마이크 카메론, 브렛 톰코, 안토니오 페레즈, 제이크 메이어라는 카드를 수락하고 그리피를 신시내티로 보낸다.[10]

시애틀에서 그리피는 11년 동안 연평균 140경기에 출장해 .299 .380 .569 36홈런 105타점 15도루 wRC+ 142 OPS+ 136 fWAR 6.2 bWAR 7.9를 기록했다.

3. 신시내티 레즈

파일:20210413_073442.jpg
아버지가 전성기를 보냈던 팀에 합류한 그리피지만, 초장부터 뭔가 꼬이고 말았다. 시애틀 시절부터 24번을 사용했던 그리피는, 신시내티에 와서도 24번을 계속 사용하고 싶어했지만 트레이드가 성사되자마자 빅 레드 머신의 일원이었던 토니 페레즈의 24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해버리면서 결국 아버지의 등번호인 30번을 사용하게 되었다.

트레이드 직후 신시내티와 9년 $112.5M 연장 계약을 체결했는데, 이 당시에는 역대 두 번째로 1억 달러를 넘는 계약[11]이자 당시 역대 최대 규모의 계약이었다.[12]

3.1. 2000 시즌

2000년, 145경기에 출장해 .271 .387 .556 40홈런 118타점 6도루를 기록한 그리피는 공교롭게도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타격 코치를 하고 있던 아버지의 앞에서 통산 400홈런을 기록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그리피는 급격하게 부상으로 주저앉게 된다.[13][14]

3.2. 2001 시즌

부상으로 인해 그리피의 시련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2005년 다시 부활하기 전까지 그동안 쌓아온 커리어를 깎아먹게 된다. 2001년에는 111경기 .286 .365 .533 22홈런 65타점 2도루로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지 못했다.

3.3. 2002 시즌

2002년에는 부상이 더 심각해져 70경기 출장에 그쳤고 .264 .358 .426 8홈런 23타점 1도루로 성적도 처참하며 마이너스 WAR에 그치고 말았다.

3.4. 2003 시즌

2003년에도 부상으로 53경기 출장에 그쳤고 .247 .370 .566 13홈런 26타점 1도루에 그치며 먹튀의 오명을 벗지 못했다.

3.5. 2004 시즌

2004년 6월 21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경기에서 통산 500홈런을 기록했다.[15][16] 부상만 아니었어도 최연소 500홈런을 기록했을 그리피지만, 지미 폭스의 말년이 그랬던 것처럼 부상에 발목잡혀 당시에는 네 번째로 어린 나이에 통산 500홈런을 기록했다. 하지만 성적은 83경기 .253 .351 .513 20홈런 60타점 1도루에 그치며 시련의 연속을 보여주고 말았다.

흔히 '위대한 전반 10년과 처절한 후반 10년'의 예시로 2000년대와 2010년의 알버트 푸홀스를 드는데, 그 이전 시대인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예시가 바로 주니어였던 것이다.

3.6. 2005 시즌

2005년, 그리피는 128경기에 출장해 .301 .369 .576 35홈런 92타점을 올리며 부활을 알리게 되고, 갓 재정된 올해의 재기 선수상의 내셔널 리그 첫 수상자가 된다.

3.7. 2006 시즌

하지만 당시 30대 중반이었던 그리피 역시 나이를 이기지는 못하고 2006년에는 109경기 .252 .316 .486 27홈런 72타점에 그쳤고 마이너스 WAR을 기록하며 빼박 먹튀로 전락했다.

3.8. 2007 시즌

2007년에는 144경기 .277 .372 .496 30홈런 93타점 6도루를 기록하는데 그쳤고 전년도에 이어 2년 연속 마이너스 WAR을 기록하며 대체선수보다도 못한 성적을 기록하고 말았다.

===
= 2008 시즌 ===
2008년 6월 9일 플로리다 말린스 원정경기에서 통산 600홈런을 기록했다. 그러나 당시 102경기에서 .245 .355 .432 15홈런 53타점을 기록하고 있던 그리피를 팀은 트레이드 마감시한 전인 7월 31일에 닉 마셋과 대니 리카르를 대가로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한다.

신시내티에서 그리피는 9년 동안 연평균 105경기에 출장해 .270 .362 .514 23홈런 67타점 2도루 wRC+ 118 OPS+ 121 fWAR 1.5 bWAR 1.5를 기록했다.

4. 시카고 화이트삭스

4.1. 2008 시즌

시카고 화이트삭스에 합류한 그리피는 41경기에서 .260 .347 .405 3홈런 18타점에 그쳤고, 재계약에 실패해 자유계약선수가 되었다. 이 해 그리피는 두 팀에서 143경기에 출장해 .249 .353. 424 18홈런 71타점을 기록했다.

5. 시애틀 매리너스 2기

새로운 팀을 구하던 그리피는 친정팀인 시애틀 매리너스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의 접촉을 받게 되었는데, 윌리 메이스의 조언으로 친정팀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기 위해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하게 된다.

5.1. 2009 시즌

다시 돌아온 친정팀에서 그리피는 밝고 성실한 성격으로 클럽하우스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다. 실제 시애틀에서 그리피를 다시 데려온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었지만, 나이를 이기지 못했으며 투수 친화 구장이던 세이프코 필드의 특성상 성적은 117경기 .214 .324 .411 19홈런 57타점에 그쳤다.

5.2. 2010 시즌

2010년 33경기에 출장해 .184 .250 .204에 홈런 없이 7타점에 그친 그리피는 그 해 6월에 은퇴 선언을 했다.[17] 참고로 그의 마지막 안타는 토론토전에서 때려낸 끝내기안타.

6. 국가대표 경력

6.1.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파일: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
2006 WBC ALL-WORLD TEAM AW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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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미국 대표팀 일원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본선 2라운드 대한민국 전에서 3회초에 솔로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18] 이후 시즌에서 자신의 번호 30번에서 3번으로 바꿔 달았는데, 3번으로 바꾼 이유는 그의 세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한다.[19]

7. 연도별 기록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파일:MLB 로고.svg 켄 그리피 주니어의 역대 MLB 기록
<rowcolor=#c4ced4>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1989 SEA 127 506 120 23 0 16 61 61 16 44 83 .264 .329 .420 .748 2.5 3.3
1990 155 666 179 28 7 22 91 80 16 63 81 .300 .366 .481 .847 5.0 5.2
1991 154 633 179 42 1 22 76 100 18 71 82 .327 .399 .527 .926 6.9 7.1
1992 142 617 174 39 4 27 83 103 10 44 67 .308 .361 .535 .896 5.3 5.8
1993 156 691 180 38 3 45 113 109 17 96 91 .309 .408 .617 1.025 8.4 8.8
1994 111 493 140 24 4 40 94 90 11 56 73 .323 .402 .674 1.076 6.8 6.9
1995 72 314 67 7 0 17 52 42 4 52 53 .258 .379 .481 .860 3.3 3.3
1996 140 638 165 26 2 49 125 140 16 78 104 .303 .392 .628 1.020 9.7 9.7
1997 157 704 185 34 3 56 125 147 15 76 121 .304 .382 .646 1.028 9.0 9.1
1998 161 720 180 33 3 56 120 146 20 76 121 .284 .365 .611 .976 6.6 6.6
1999 160 706 173 26 3 48 123 134 24 91 108 .285 .384 .576 .960 4.9 4.9
<rowcolor=#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2000 CIN 145 631 141 22 3 40 100 118 6 94 117 .271 .387 .556 .942 5.4 5.5
2001 111 417 104 20 2 22 57 65 2 44 72 .286 .365 .533 .898 1.8 1.9
2002 70 232 52 8 0 8 17 23 1 28 39 .264 .358 .426 .784 0.2 -0.7
2003 53 201 41 12 1 13 34 26 1 27 44 .247 .370 .566 .936 1.5 1.3
2004 83 348 76 18 0 20 49 60 1 44 67 .253 .351 .513 .864 -0.2 0.7
2005 128 555 148 30 0 35 85 92 0 54 93 .301 .369 .576 .946 2.9 3.7
2006 109 472 108 19 0 27 62 72 0 39 78 .252 .316 .486 .802 -0.6 -0.1
2007 144 623 146 24 1 30 78 93 6 85 99 .277 .372 .496 .869 -0.6 0.7
<rowcolor=#fff>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2008 CIN
CHW
143 575 122 30 1 18 67 71 0 78 89 .249 .353 .424 .778 -0.5 0.4
<rowcolor=#c4ced4> 연도 G PA H 2B 3B HR R RBI SB BB SO AVG OBP SLG OPS fWAR bWAR
2009 SEA 117 454 83 19 0 19 44 57 0 63 80 .214 .324 .411 .735 0.0 0.6
2010 33 108 18 2 0 0 6 7 0 9 17 .184 .250 .204 .454 -1.0 -0.8
MLB 통산
(22시즌)
2671 11304 2781 524 38 630 1662 1836 184 1312 1779 .284 .370 .538 .908 77.7 83.8


[1] 이 해 드래프트에서 크레이그 비지오가 1라운드 22순위로 휴스턴 애스트로스에 지명되었다. [2] 1989년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신인은 5승 2패 27세이브 ERA 1.96을 기록한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그렉 올슨이었으며, 2위는 163이닝 17승 9패 ERA 3.64 153탈삼진을 기록한 캔자스시티 로열스의 톰 고든이었다. [3] 아무리 전체 1순위 지명의 특급 유망주라고 해도 이 정도로 빠르게 메이저 리그에서 자리잡는 케이스는 드물다. 약쟁이임이 들통난 뒤 몰락했지만, 역대급 포텐셜이라고 평가받은 알렉스 로드리게스도 1993년 지명된 후 1년여 만에 메이저 리그 무대를 밟아보긴 했지만 자리를 잡은 건 1996년부터였고, 현 시점 메이저 리그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 마이크 트라웃도 2009년 지명된 후 약 2년 만에 메이저 리그 무대를 밟고, 그 다음 시즌에야 정착할 수 있었다. 그리피보다 더 빠른 케이스는 역시 배리 본즈 같은 케이스를 제외하면 찾기 쉽지 않다. [4] 같은 시기 내셔널 리그 배리 본즈와 함께 최고 수준의 수비를 보여줬으며, 골드 글러브 경쟁자였던 버니 윌리엄스와는 다른 수비 스타일로 비교되었다. 윌리엄스는 튀진 않지만 흠잡을 데 없는 수비를 보여주었고, 그리피는 펜스를 넘어갈 것을 막아내고 또 잡아내는 화려한 수비를 보여주었다. [5] 그 해 아메리칸 리그 MVP 수상자는 프랭크 토머스였고, 투표 3위는 알버트 벨이다. [6] 이 해 슈퍼 패미컴용으로 Software Creations이 제작하고 닌텐도가 발매한 켄 그리피 주니어 프레젠트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이라는 게임이 발매되었다.단 메이저 리그 선수 노조의 네이밍 사용권을 따낸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게임 제목외에 실제 메이저 리그 선수들의 실명은 없고 대부분은 가명 처리되었다. [7] 그 해 아메리칸 리그 MVP 투표 2위는 티노 마르티네즈였고, 투표 3위는 프랭크 토머스다. [8] 여담으로 킹돔의 고별경기인 1999년 6월 27일 경기에서 그리피는 킹돔에서의 마지막 홈런을 기록했다. [9] 트레이드를 요구한 다른 이유로 추측되는 것은, 이웃이자 친한 친구였던 PGA 골퍼 페인 스튜어트(니코보커 패션으로 유명했음)가 비행기 사고로 급사하는 모습을 보게 된 그리피가 최대한 가족과 같이 있기 위해 트레이드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리피는 네 팀에만 트레이드 거부권을 풀었는데, 신시내티 레즈,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뉴욕 메츠, 휴스턴 애스트로스였다. 그리피는 집이 있던 올랜도에서 가장 가까운 강팀이자 아버지가 잠시 뛰었던 애틀란타로 향하는 것을 원했으나, 당시 애틀란타는 터너 필드 개장 이후 팀 내의 좌타 거포를 정리하던 중이었다. [10] 해당 선수들의 행보를 놓고 결과적인 평가했을 때 레즈에서 제시한 트레이드 카드가 더 나았다고 볼 수 있고, 사실상 해당 트레이드는 매리너스의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이크 카메론은 매리너스의 위대한 시즌인 2001년 주전 중견수로 활약했고, 브렛 톰코도 4~5선발에서 자리를 지켜줬다. 메츠에서 비슷한 스펙을 가진 선수를 대응한다면 로저 세데뇨와 옥타비오 도텔 정도일 텐데, 도텔이야 MLB 역사상 최고의 저니맨으로 활약했지만, 메츠에서의 첫 두 해에 리그에서 준수한 리드오프로 활약했지만 기량이 급격히 하락한 로저 세데뇨, 그리고 맨날 불만 질러댄 마무리 아르만도 베니테스를 생각한다면 매리너스는 최고의 스타를 떠나보내면서도 남는 장사를 했다. [11] 첫 번째로 1억 달러를 넘긴 계약은 1999년 케빈 브라운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맺은 7년 $105M 계약이었다. [12] 그러나 이듬 해 알렉스 로드리게스 텍사스 레인저스와 10년 $252M 계약을 맺고, 데릭 지터 뉴욕 양키스와 10년 $189M 연장 계약을 맺는 등 메이저 리그의 계약 규모는 더욱 커져갔다. [13] 이 때 고질적인 부상 부위가 햄스트링이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시애틀 시절부터 제대로 워밍업을 하지 않고 경기에 나서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14] 이 부상으로 인해 윌리 모 페냐가 주전 자리에 올라오게 된다. [15] 이 경기의 선발 투수가 봉중근이었다. 봉중근은 이 경기에서 메이저 리그 첫 선발승을 거뒀다. [16] 그리고 세인트루이스 원정경기임에도 카디널스 팬들은 그의 500호 홈런 달성에 관중들 모두가 기립박수를 보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팬들은 원정 팀에서 기록이 달성되면 너나 할 것 없이 기립박수를 보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2004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86년 만의 우승 당시 구장에 남았던 카디널스 팬들 모두가 박수를 보내주어 품격을 보여줬다. [17] 원래는 시즌 종료 후 정상적으로 은퇴하기로 되어있었지만, 경기 중 덕아웃에서 졸았다는 일명 냅게이트(Napgate)라는 구설수에 올라 생각보다 빨리 은퇴를 선언했다. [18] 모두 다 알다시피 그 경기는 최희섭이 댄 휠러의 공을 통타하는 쓰리런 홈런이 터지면서 대한민국이 7-3으로 이겼다. [19]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이 중에 큰 딸은 류현진보다 겨우 1살 어린데, 그것도 할아버지인 시니어와 백투백 홈런을 쳤을 때 이미 2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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