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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Karl Maria Wiligut 카를 마리아 빌리구트 |
출생 |
1866년
12월 1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빈 |
사망 |
1946년
1월 3일 연합군 점령하 독일 프로이센 자유주 아롤젠 (現 독일 헤센주 바트아롤젠) |
종교 | 신이교주의( 북유럽 신화) |
복무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슈츠슈타펠 (1933년 ~ 1939년) |
최종계급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대령 슈츠슈타펠 소장 (여단지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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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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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행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인 빈에서 태어난 카를 마리아 빌리구트는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았으며 17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징병되어 보병부대에 배속된 후 1888년에 중위로 승진했다. 평소 고대종교에 심취했던 빌리구트는 여러 권의 종교관련 서적을 출판했는데, 1906년에 결혼 후 1908년에 자신이 일루미니즘(Irminism)이라는 고대종교의 후계자라 주장했다.3.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 중 남부 및 동부전선에서 종군한 빌리구트는 1917년 8월 1일에 대령으로 승진해 린베르크 근처의 요양수용소 사령관이 되었다.4. 신비주의자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인 1919년 1월 1일에 군에서 사직한 그는 40년 가까이의 군생활을 접고 잘츠부르크 근처의 몰츠크로 이사해 오컬트 연구에 몰두했으며 신문 <Der Eiserne Besen>을 발행했다. 그는 암흑의 힘을 가진 음모세력이 세계에 숨어 있다며 확신하여 반유대주의, 반프리메이슨, 반가톨릭 교회주의를 주장했다. 빌리구트의 아내는 그의 기괴한 사상에 괴로워하다가 정신병원으로의 입원을 권했다. 이를 거부하다 1924년 11월 29일에 난동을 부려 경찰에 체포된 빌리구트는 실제로 몇년 간 정신병원에 구금되었다. 빌리구트의 의료기록에 의하면 자신의 아내에게 죽이겠다고 협박을 서슴치 않는 등 가정폭력주의 경향에 변태행동, 오컬트 심취로 과대망상과 정신착란 증세를 진단받았다고 한다. 잘츠부르크의 법정에서도 그를 정신적 책임능력이 없는 자라고 판결했다. 1927년부터 1932년까지 잘츠부르크 정신병원에 구금되었던 빌리구트는 아내와 이혼 후 가족과도 등을 지고 뮌헨으로 이주했다.5. 친위대 입대
나치당이 정권을 장악한 후인 1933년 9월에 친위대 전국지도자였던 하인리히 힘러와 알게 된 빌리구트는 힘러의 맘을 사서 북방인종문화정치협회의 멤버로 초빙되었다. 그리고 친위대에 입대했는데 이 때 <카를 마리아 바이스토어>란 가명으로 입대했다. 그는 친위대 인종 및 이주본부(RuSHA)의 선사학(先史学)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34년 4월에 친위대 대령계급을 받은 빌리구트는 1934년 10월에 RuSHA 7부(공문서 보관부) 부장이 되었다. 11월에는 친위대 상급대령으로 승진 후 1935년 봄에 베를린으로 이동하여 카를 볼프가 장관으로 있던 친위대 전국지도자 개인참모부에 배속되어 힘러 개인의 참모요원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1936년 9월에 빌리구트는 친위대 여단지도자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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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위대 여단지도자 빌리구트 |
6. 기행
1934년에 <세계의 중심>이라는 우화에 나오는 고성(古城) 베벨스부르크성을 친위대에서 구입해 힘러에게 헌상한 빌리구트는 이 성에서 독일민족이 구세주의 후예라는 일루미니즘의 종교관념에 근거하여 괴상한 마술의식을 거행했다. 친위대의 결혼식도 이 성에서 이루어졌으며 빌리구트는 사제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구이드 폰 리스트가 일으킨 민족주의적 게르만 이교사상인 보타니즘과는 서로 적대시했다. 빌리구트는 힘러에게 요청해 보타니즘 신자들을 차례로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그리고 보타니즘이 주장한 아르마넨 룬 문자에 대항하여 빌리구트 룬 문자를 창작했다. 아넨엘베의 초대장관인 헤르만 뷜스는 빌리구트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빌리구트를 알콜중독자, 구이드 폰 리스트를 도둑질한 놈이라며 그를 적대했다. 그러나 힘러의 빌리구트 신임은 두터워 1937년에 힘러는 뷜스를 장관직에서 추방했다.7. 추방과 최후
그러나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후인 1938년 10월에 오스트리아에서 빌리구트의 전력과 정신병원의 과거가 카를 볼프에게 제출되었다. 볼프는 곧 힘러에게 이를 보고하였다. 빌리구트는 그 사이 힘러의 측근 여성에게 < 친위대 전국지도자는 내 아이를 원한다, 결국 나와 당신의 아이다. 당신은 대단히 명예스러운 지명을 받은 것이다.>라며 수작을 걸며 협박하다가 이 여성대원이 힘러에게 이를 고함으로서 빌리구트는 힘러의 신임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1939년 8월 28일에 빌리구트는 고령과 병을 이유로 친위대에서 제대당했다. 빌리구트와 완전히 관계를 끊은 힘러는 SS해골반지와 장검, 단검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빌리구트는 < 최후의 연대 증거다>라고 하며 자신의 물건임을 주장했다. 제2차 세계 대전때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이사해 살았던 빌리구트는 1946년 1월 3일에 뇌출혈로 고생하다가 아롤젠[1]에서 사망했다. 그의 묘비에는 <우리들의 인생은 허무한 수다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새겨져 있다.
[1]
구
발데크피르몬트 후국의 수도로, 1929~1946년에는
프로이센 자유주 영역이었다. 1997년 '바트 아롤젠'으로 개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