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11:37

최영필/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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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 유니콘스 시절2. 한화 이글스 시절3. 해외 리그 시절4. SK 와이번스 시절
4.1. 2012 시즌4.2. 2013 시즌
5. KIA 타이거즈 시절
5.1. 2014 시즌5.2. 2015 시즌5.3. 2016 시즌5.4. 2017 시즌
6. 은퇴

1. 현대 유니콘스 시절

수원 유신고등학교 경희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하고 1997년 현대 유니콘스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하였다.

유신고 3학년 당시 팀을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4강으로 이끌며 1992년에는 우수 투수상을 받은 적이 있다.[1] 1993년 대학 1학년 당시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대륙간컵 대회에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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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포토로)

가능성 있는 투수 유망주로 주목받았지만, 당시 현대 유니콘스 정민태, 임선동, 김수경이라는 다승 공동 1위(18승) 투수들을 원투쓰리 펀치로 보유한 후덜덜한 투수진이 있었기 때문에 최영필의 입지는 상당히 좁았다. 게다가 신인 시절에는 지금과 달리 101이닝 동안 76개의 사사구를 허용하는 제구불안까지 보이며 많은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래도 1군에서 1997 시즌에 101이닝, 1999 시즌 88이닝 출전했지만, 4~5점대의 평균자책점으로 뚜렷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고, 본인도 쉽게쉽게 하다보니 신인때는 기억이 각인되어 있지 않았다. 애석하게도 현대는 그가 활약하던 97 99시즌에는 좋지 못한 성적을 남겼고 정작 우승한 년도인 98 00시즌에는 최영필이 뚜렷한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2] 결국 최영필은 2번 다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지 못하며 우승반지를 끼지 못했다.

2. 한화 이글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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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포토로)

결국 2001년 김홍집과 함께 이상열을 상대로 한 3억 원의 현금 트레이드 한화 이글스의 유니폼을 입게 된다.

2003년에 선발로 등판하여 딱 한 번 삼성을 상대로 완투승을 거둔 적이 있었지만, 문제는 이게 2002년부터 2004년까지 3년간의 유일한 승리였을 정도로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평균자책점 5~7점대의 그저 그런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투수로 지냈다.

최영필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김인식 감독이 부임한 2005년부터인데, 8승 8패 5세이브 평균자책점 2.89로 에이스급 활약을 해 줬다. 이 해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무려 5승 1세이브에 32이닝 동안 무실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2005년 준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부진했던 선발 김해님을 구원해 7.1이닝 동안 1실점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으며 5차전에서는 홈런을 하나 맞긴 했지만 세이브를 기록하며 팀의 PO 진출을 확정지었고, 준플레이오프 MVP도 차지하였다. 플레이오프에서는 3차전에 등판하여 7이닝 비자책 1실점하였으나 팀 타선의 침묵에 의해 패전투수가 되었다.[3]

2006년에는 불펜으로 11홀드를, 2007년 5승, 2008년 7승을 거두는 등 나름대로 괜찮은 선발 땜방, 중간계투, 마무리 투수 역할을 해 주며 한화 마운드의 마당쇠로 활약했다. 그러나 2009년과 2010년에는 경기에 얼마 출전하지 못하며 부진했는데, 이 때의 여파가 FA 파동의 원인이 된다.

2010시즌 후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있던 FA를 신청했는데, 10년 동안 한화를 위해 뛰어 온 최영필이 FA를 선언하자 한화 이글스는 무시로 일관했고, 결국 이도형과 함께 2011년 1월 15일까지 어느 구단과도 계약하지 못해 1년 간 KBO 리그에서 뛸 수 없게 되었다.[4]

FA 선언은 다소 의외였고, 한화 이글스는 그의 FA 선언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솔직히 보상 선수를 줘 가며까지 최영필을 영입할 구단은 없을 것이라고는 하나, KBO FA 제도는 어디까지나 선수의 권리 증진을 위한 것이다.

FA를 신청하는 선수를 크게 두 부류로 나누면, 첫 번째가 '나는 다른 구단에서도 탐을 내는 아주 우수한 선수이니 원 소속 구단에서 알아서 잘 대접하라'라는 부류가 되겠고, 요즘 첫 번째로 구분되는 선수들 중 진짜 대어는 NPB, MLB로 가거나 매머드급 계약을 맺고( 김태균, 이대호 등이 그 사례) 그보다 약간 낮은 선수들이 몇몇 돈 많이 쓰는 팀에 간다.( 정성훈, 이진영 등이 그 사례) 이런 정도의 선수가 아니지만 두 번째가 '다른 구단에서 보상 선수까지 줘 가면서 영입할 정도로 탐을 내지 않는 것을 잘 알지만, 지금껏 팀을 위해 열심히 뛰었고 지금도 팀을 위해 뛸 만한 실력은 충분히 되는 만큼 이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은 해달라' 가 2번째 부류 되시겠다.(보상선수 엔트리 확보를 위해 팀과 사전 조율 후 신청하는 경우는 논외로 하자.) LG에서 오래 활동했지만 넘사벽 수준은 아니었고, 오랜 세월 함께하며 팀에 기여도가 있었던 최동수, 이종열, 최원호가 이런 식으로 LG에 잔류했었고 한화에서 오래 뛰었던 최영필은 누가 봐도 후자였다.

당시 한화 이글스 일본에서 복귀한 이범호조차 붙잡지 못해 KIA로 보내고, 수많은 선수들이 줄줄이 군대를 가는 등 전력 누수가 심각했다. 최영필이 A급은 아니라도 지금까지 팀을 위해 10여 년을 열심히 뛰고 선수 생활을 장기간 유지할 만큼 어느 정도 실력?이 되는, 한화에 충분히 도움이 되는 투수일지도 모른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FA를 선언하기 직전 2년간의 성적이 2009년 평균자책점 10.18, 2010년 평균자책점 7.45라는 완전히 형편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FA를 선언해 봤자 잡을 이유가 없다는 것, 박정진조차 2009년까지 성적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방출 일보 직전까지 간 것을 보면, FA를 신청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어찌 될지 모를 정도였다는 의견도 있다. 더군다나 최영필의 나이는 38살. 표면적인 성적을 종합해보면 하락세가 뚜렷하여 재기가 어려운 노장투수라고 볼 수 있었다.[5]

평소 레전드에 대한 대우가 좋기로 소문난[6] 한화 이글스지만, FA 선언을 한 것에 대한 보복인지 매몰차게 최영필을 내쳤다. 프런트 자리를 제안했지만 최영필이 선수생활을 지속하겠다며 거절 의사를 밝히자 곧바로 내친 것. 그리고 2011시즌 한화 이글스는 선발진은 어찌어찌 구축했는데 중간계투가 전멸한 처참한 상황이니….

3. 해외 리그 시절

같이 FA를 신청하고 한화에서 밀려나 은퇴를 선언한 동료 이도형과는 달리 선수 생활을 계속할 생각이며, 2011 시즌 미국, 멕시코 리그 등을 거쳐 일본 간사이 독립 리그의 서울 해치( 오사카부 연고, 2010~2011)에서 마무리 투수로 뛰었다.

4. SK 와이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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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2012 시즌

FA보상 권리는 3년간 유지되기 때문에 남은 2년동안 타 구단 이적이 힘들었던 최영필은 2012년 1월 3일 한화 구단이 원 소속 구단으로서의 보상을 포기함으로써 다른 구단에서는 한화에 대해 아무런 대가 없이 최영필을 영입할 수 있게 되었다. FA 미아에 대한 구단의 보상 권리 포기는 KBO 사상 최초 사례이다. 다만 투수로서 적지 않은 나이기 때문에 다른 구단에서 영입을 할 지가 걱정됐다.

그러다 SK 와이번스에서 아킬리노 로페즈와 함께 최영필을 계약금 없이 연봉 7,000만 원에 영입하여 최영필은 2012년부터 다시 마운드에 설 기회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계약 후 최영필이 공주중 야구부에서 뛰던 아들 최종현 군이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SK의 지역연고인 인천 제물포고로 진학시켰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3년 후 최영필 부자가 선수로 SK에서 함께 뛰는 것을 기대하는 팬들도 생겼다. 물론 최영필이 2012년의 모습을 유지한다는 조건에서.

그러나 이에 앞서 투수 전준호를 방출하고 그보다 1살 위인 최영필을 데려 온 것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전준호가 인천 동산고 출신인지라 이제 인천 SK이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실제로 신인 지명에서도 3년째 인천 출신은 없었다.

그렇게 2012 시즌 5월 1군에 올라와... 와이번스의 필승조로 활약 중이다. 한편 한화에서 최영필 버리고 비싸게 FA로 계약한 송신영은 기대에 못 미쳐 한화팬들은 이중으로 배앓이를 했다.

2012년 6월 15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한화와의 경기에서 8회초 2대2 동점상황에서 등판, 1과1/3 이닝을 2피안타 1탈삼진으로 막아낸 뒤 팀 타선이 8회말 2점을 내며 역전, 9회에 박희수가 마무리를 하면서 시즌 첫 승이자 728일만의 승리를 거두었다.

구속은 빠르지 않았지만 14⅔이닝을 던지는 동안 볼넷을 단 한개 밖에 내주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제구력과 노련한 피칭으로 SK불펜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 이후 체력적 한계를 노출하며 6월 말부터 급격히 털리기 시작하여 올스타 브레이크가 넘어갈 시점에는 평균자책점이 5점대로 상승하였다. 9월 이후 출전에서는 연속으로 무실점 경기를 이어가며 방어율 4점대까지 낮췄다. 필승조를 제외한 SK 불펜 대부분이 제구력이 엉망인지라 활약에 비해 이만수 감독의 신임이 두터운 편이었다. 주로 추격조나 동점 상황에서 출전했지만 선발 투수가 일찍 강판된 경우 롱릴리프로도 나왔다.

2012 시즌 46경기 53이닝 평균자책점 4.58 1승 2패 5홀드로서 불펜 추격조로는 무난한 성적을 남겼다. 투수진이 완전 붕괴된 2012시즌 한화 이글스에 이 정도 중간계투 한 명만 있었다면 대단히 유용했을 것이다.

롯데 자이언츠와의 2012년 플레이오프에서 1경기 ⅓이닝 무실점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 2경기 3⅔이닝 1피안타 1볼넷 1사구(死球) 5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2승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최영필은 2012년 포스트시즌에서 3경기 4이닝 1피안타 1볼넷 1사구(死球) 5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다.

4.2. 2013 시즌

2013년에도 여전히 불펜에서 제 몫을 다해줬는데, 박희수의 부상과 정우람의 입대로 불펜 전력 누수가 심해진 팀 사정 탓에 나이가 있음에도 상당히 자주 등판하였다.

4월 3일 잠실 두산전에서는 수비 잘 하기로 유명한 최정이 1이닝 2에러를 범한 암울한 상황에서도 침착한 모습을 보이며 예리한 포크볼로 타자를 삼진아웃시켜 주목받았다. 뛰어난 제구력에 연륜이 묻어나는 노련한 피칭, 정교한 변화구 등 뛰어난 투수의 자질을 모두 갖췄으나 나이 탓에 구위가 뛰어나지 않은 편이라 은근히 장타를 많이 맞는다는 점이 단점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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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에는 이만수 감독이 2번째 투수로 등판시키는 일이 잦았는데, 문제는 경기 승패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2번째 투수로 등판시키는 선수 운용. 결국 7월 2일 등판을 마지막으로 2군행을 통보받고 다시 콜업되지 못했다. 다행히 부상을 입거나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2군에서는 시즌 끝까지 꾸준히 중간계투로 등판했다.

11월 26일자로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SK 프런트는 코치 연수를 제의했지만 이번에도 그는 여전히 현역 생활 연장을 선택하며 그 제의를 고사하고 보류명단에서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2015 드래프트에서 신인 지명을 받을 아들과 현역 선수로 함께 뛰기를 간절히 바란 끝에 내린 결정이다. 하지만 뛸 팀을 찾지 못해 모교인 경희대학교에서 잠시 인스트럭터로 일하며 기회를 모색했다.

5. KIA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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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2014 시즌

2014년 3월 20일, 중간계투진에 비상이 걸린 KIA 타이거즈와 연봉 7,000만 원에 계약하며 동생이 뛰었던 팀에 입단했다. 당시 2군코치였던 정회열이 자리를 찾던 최영필에게 입단을 제안했다고 한다. 제 2의 최향남?? 그리고 이 기사가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영입에 관련된 기사들이 보도된 후 불혹을 넘긴 나이와 여러 차례의 은퇴 위기를 넘긴 데 대한 공통점이 주목할 포인트. 그런데 선수 등록 명단 공시일인 1월 31일이 지난 후 영입했기 때문에, 신고선수로 등록되어 실제 1군 등판은 6월부터 가능하다고 한다.

6월 1일 신고선수 1군 콜업이 가능해지자마자 1군에 올라왔다. 6월 1일 NC전에서 1점차의 아슬아슬한 리드를 잡고 있던 7회 등판, 1⅓이닝을 퍼펙트로 막아 내며 1홀드를 기록, 그동안 박경태 한승혁의 투구로 눈이 썩어가던 KIA 팬들을 환호케 했다. 그리고 6월 5일 KIA의 마지막 투수로 등판하여 마무리인 어센시오와 매우 대비되는 명품투구를 보여주면서 병맛경기에 지쳐가던 KIA 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자세한 내용은 605 대첩 참조.

반면 최영필을 방출한 SK는 대신 영입한 신윤호가 2군에서도 털리느라 1군으로 올려보지도 못하고, 박희수 박정배가 부상으로 시즌을 접는 등 불펜진이 완전히 무너져내리면서 한화가 밟은 전철을 그대로(…) 따라가며 대조를 이루는 씁쓸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6월 7일 LG전에도 8회에 등판, 1이닝을 10구로 깔끔하게 막았다.

6월 10일 경기에서는 초반부터 무너진 김병현을 이어 등판했고 2이닝동안 35구를 던지며 2실점(1자책)했다.

6월 12일 한화전에서도 7회부터 등판, 2이닝을 삼진 2개를 곁들여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총체적 난국을 겪고있는 KIA의 불펜진 중 몇 안되는 믿을맨이지만 적지 않은 나이를 생각하면 어느정도 관리가 필요할듯. SK에서도 잘 던지다가 출장이 늘어나면서 폼이 하락했다.

6월 15일 롯데전에서 심동섭 다음 투수로 등판, 2이닝을 1피안타만 내주고 무실점으로 막았고 승리투수가 되었다.

6월 19일 넥센전에서 8회초 2-1 상황에서 등판, 선두타자인 이택근에게 2루타를 맞았으나 유한준, 박병호, 윤석민을 침착하게 범타처리하며 양현종의 승리를 지켜냈다.

6월 24일 SK전에서 등판했으나 1이닝동안 4피안타 2볼넷으로 무려 5점을 헌납했다. ERA도 0.75에서 4.15로 치솟았다.

그러나 6월 26일 SK전에서 5회 심동섭의 뒤를 이어 다음 투수로 등판하여, 1⅓이닝 동안 1피안타 1탈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하였으며, 팀도 8:2로 승리를 하며 시즌 3승째를 올렸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최영필은 1~2이닝을 지킬 수 있는 불펜투수로 활용되었고 여전히 3점대의 평균자책점의 성적을 보이며 쏠쏠한 활약을 했다. 젊은 투수들보다도 베짱있는 승부와 제구력으로 승리조로 활약하고 있는 상황.

8월 12일 NC전에서도 양현종 다음 투수로 나왔다. 안타를 허용해 무사 2,3루의 위기를 맞았지만 박민우와 조영훈을 삼진으로 잡아낸 후 나성범을 포수 뜬공 처리하면서 위기관리 능력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었다.

10월 3일 기준으로 36경기 47.2이닝을 소화하며 ERA 2.83을 유지하고 있다. 타신투병, 기아가 개판화되어가는 상황에서 낸 기록이라 상당한 의미가 있다.그리고, 22살 한현희보다 ERA가 10월 3일 기준으로 0.24 낮고[7], 안지만보다 ERA가 1.13이 낮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 말하면 40을 넘긴 나이에 급하게 데려와서 시즌 중반쯤에야 1군에 올라온 선수가 승리조로 안착했을만큼 14시즌 KIA 불펜진의 상태가 심각했다는 말도 된다.

2014년 시즌 최종 성적은 40경기 53.2이닝 4승 2패 14홀드 52피안타 6피홈런 45탈삼진 16사사구 ERA 3.19로 마무리하였다.

시즌 이후 경향신문 포스트시즌 칼럼을 기재하기 시작했다. '최영필의 투수가 본다' 1회 노장 투수의 눈으로 기고를 하는데 필력이 괜찮은 편.

5.2. 2015 시즌

2015년부터, 다시 억대 연봉을 받게 되었다. 2009년 1억 이후, 6년만의 억대연봉 재진입이다.

3월 29일 9회에 등판해 1이닝 1피안타 무실점을 기록했고, 9회말 브렛 필의 끝내기 투런포로 구원승의 주인공이 된다.

6월 11일 8회말에 한승혁이 안타와 볼넷으로 만들어낸 무사만루의 위기는 3:5로 앞서가는 KIA에겐 큰 위기였다. 하지만 한승혁 뒤에 이어 최영필이 등판하여 실점없이 무사히 조쉬 스틴슨의 선발 승리를 지켜주었다.

6월엔 단 한개의 실점도, 4사구도 허용하지 않는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KIA의 불펜을 책임지고 있다.

7월 31일 대전 한화전에서는 6회초에 팀이 9대1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 올라와서 삼진 2개를 잡으며 좋은 모습을 보였다.

8월 1일 대전 한화전에서는 9:7로 이기고 있던 6회말에 등판하여 연속 2안타를 맞아 무사 1,2루 상황외 되었고 범타 유도 후 다음타자 상대중 공이 빠져 1사 2,3루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다음 두 타자를 연속 풀카운트 삼진으로 마무리하며 KIA 핵심 불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5년 8월 6일 진갑용이 현역 은퇴를 선언하면서, KBO 리그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8월 23일 한화전에서는 7회 등판하여 1이닝을 10구로 막아내고 승리투수가 되었다.

9월 21일 2번째[8] 투수로 등판해 2이닝을 막고 내려갔다. 9월동안 필승조로 자주 등판하고 있는데 훌륭한 완급 조절로 9월 21일 현재 평균자책점 2.86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이명기를 투수 앞 직선타로 더블 아웃을 만드는 과정에서 타구에 오른쪽 손목을 부딪친 것이 화근이 되어 손목 미세 골절로 시즌 아웃되고 말았다. 2015시즌에 나이가 무색치 않은 최고의 피칭을 보여주면서 영필로 등극했던 시즌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소식.

2015 시즌 후 NC 다이노스 박명환 손민한이 은퇴했지만, 이들과 달리 최영필은 내년에도 KIA 타이거즈에서 뛴다고 한다. 내년에도 현역! 최고령 최영필의 빛나는 존재감 KIA 타이거즈는 아직 최영필이 필요하다고..... 그러나 KIA 타이거즈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봤을 땐 최영필의 공백을 메꿔줄 젊은 선수층이 얇은 게 안타까운 현실인 걸 인증한 셈.아니 2점대 불펜이 필요없는 팀이 어딨어

5.3. 2016 시즌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진행된 체력테스트에서 유일하게 테스트 면제 판정을 받았다는 기사가 나왔다. 감독이 그의 체력관리를 믿고 있는 듯. 체력 테스트 진행 당시에는 모교인 경희대 야구 선수들과 함께 일본 와카야마현에서 훈련 중이었단다.

4월 5일 LG전에서 시즌 첫 등판을 하여 무실점으로 홀드를 기록했다.

4월 9일 kt전에 9회말 마무리투수로 등판해 1이닝 1피안타 무실점으로 세이브를 달성했는데 이날 기록한 세이브는 KBO 최고령 세이브이다. 시즌 첫 SV' 최영필, KBO 역대 최고령 세이브 달성

4월 12일 SK전에 9회말 마무리투수로 등판해 ⅔이닝 1피안타 2K 무실점으로 세이브를 기록했다. 2사 1루에서 SK의 4번타자 정의윤을 루킹삼진으로 잡는 장면은 백미. 그리고 이 최고령 세이브 기록은 2018년 5월 13일 후배 임창용이 9일 차이로 기록을 깨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진화하는 중이다.

그러나 4월 14일 SK전에선 9회말 마무리로 등판해 0.1이닝 3실점으로 극장을 열었다.(...) 박정권에게 끝내기 안타까지 맞으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이후에는 급격한 구위 저하가 보이면서 많은 경기에 투입시키지 않게 되었다. 주로 1~2경기 건너뛰어 중간계투로 투입.

4월 24일 롯데전에서 1이닝 1실점으로 5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KBO 리그 33번째 기록이다.

5월 11일 kt와의 홈경기에서 500경기 출장 달성 시상식을 열었다. 이날 경기에서는 1.1이닝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다시 부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5월 15일 한화전 2,095일만에 선발로 등판했다.[9][10] 전날 헥터의 완봉으로 불펜에 여유가 생겨 윤석민, 임준혁의 부상으로 공석이 생긴 선발 자리를 대신해 등판한 듯 보인다. 실제로도 이 날 경기 1, 2회 불안한 출발을 보이다 3회 연속 안타 2개를 맞고 박준표와 교체되며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이 날 경기 자신의 기록은 2.1이닝 5피안타 1볼넷 2K 1실점.

6월 28일 LG전에 다시 선발로 예고되면서 2016년 시즌에만 두 번째로 선발로 등판했다. 당연히 이 때에도 온전한 선발 역할이라기보다는 '첫 번째 투수' 역할이 강했던 등판이었다. 2.2이닝 4피안타 무실점 48구로 임무를 완수하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시즌 최다 이닝, 최다 투구수를 기록한 경기였다.

8월 4일 한화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에 선발로 예고되었고 불붙었던 한화 타선을 상대로 3⅔이닝 2실점으로 막아주었다.

8월 25일 홈 삼성전에 등판해 ⅓이닝 1자책을 기록한 이후 9월 4일까지도 등판 기록이 없다. 사이버투수?

9월 7일 긴 휴식을 끝내고 등판하여 1.2이닝 1자책을 기록하였다. 그 후 23일까지 2~5일 간격으로 등판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0월 8일 한화전 경기는 끝내기로 패했지만 3년 연속 10홀드를 달성했다.

참고로 2016시즌은 최영필에게는 굉장히 운이 없는 시즌이었다. K/9과 이닝당 피홈런 수치가 모두 좋아지고, 심지어 FIP까지 내려갔음에도 불구하고[11][12] BABIP이 3할 8푼이나 되는 탓에 3점대 초반의 ERA를 기록하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작년과 비슷한 수준을 기록해야 하지만...

5.4. 2017 시즌

지난 3년 간의 활약으로 2017년에도 KBO 리그에서 최영필을 다시 볼 수 있게 되면서 현역 최고령 선수 기록을 계속 이어 나가게 되었다. 다만 지난시즌 고군분투에도 연봉이 고작 1천만원 인상되는데 그쳐 말이 많은 상황이다.[13]

참고로, KBO 의 최고령 투수 기록은 대부분 송진우가 가지고 있다. 그런데, 최영필 선수가 2017년에도 계속 등판 기회를 잡게 된다면, 일부 기록을 경신할 가능성이 있다.

일단 시즌 개막 전 모교 경희대학교 야구부 선수들과 부산에서 전지훈련 도중 충수염으로 인해 초반에는 합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아 불펜은 火펜이 되면서 그의 공백을 뼈저리게 느끼는 중. 돌아와요 엉엉

드디어 5월 28일에 1군에 등록되었다.

5월 31일 마산 NC전 9회말에 등판했다. 10점 차이의 여유있는 상황에서의 등판이었으나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놓고 연속 안타에 아들 뻘 외야수 두 명이 아주 좋은 수비를 보여주며 2실점하였으나, 흔들리지 않고 여전한 칼제구를 보여주며 마지막 타자를 몸쪽 삼진으로 잡아내며 무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6월 2일자로 1군에서 말소됐다. 그 후로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가 7일 후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오는데...

6. 은퇴

6월 9일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하면서 개요에 서술한 “1이닝 못버티니 옷 벗는게 당연하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기아 팬들은 그저 통곡 중.

후에 인터뷰에서 밝히길 기아에서의 4년은 축복이었고, 결혼을 좀 일찍 해서 아이들이 고등학생 정도 될 때였는데, 욕 먹지 않은 것, 다행스럽고 고마운 기억이었다고 밝혔다.

전설의 타이거즈 홍우태와 출연해 2017년 시즌 및 은퇴 과정에 대해 술회했고 2017년 한국시리즈 우승 기념품을 본인도 지급받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으나 구단에서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옆에 있던 홍우태는 '김기태 감독에게 이야기 했다면 분명 챙겨줬을 것이다. 아마도 프런트 중간에서 전달이 안 된 것 같다'고 설명하면서 아직도 서운한 감정이 남아있는지 최영필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고 전설의 타이거즈에서도 최영필을 클로즈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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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승 배명고, 준우승 경남고, 4강 유신고, 동산고 [2] 본인도 종합병동이라고 밝혔고, 2000년에는 한달 뛰고 꼬박 쉬었다. [3] 당시 한화 타선은 두산 베어스와의 플레이오프 세 경기 동안 달랑 1점만을 뽑는데 그쳤다. [4] 1월 15일까지 계약하지 못하면 1년간 뛰지 못하는 이 규정은 2012 시즌에 사라졌다. 하지만 정작 진짜 문제인 FA 보상 규정에는 거의 변화가 없으므로, 구단에서 보상 규정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보상 문제가 없었다면 애초에 1월 15일까지 계약하지 못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5] 똑같이 한화에게 외면당한 이도형은 그나마 최영필보다 사정이 더 나았던 것이, 09시즌에 0.318의 타율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부활했고,, 10시즌도 부상으로 조기에 시즌 아웃되어 인상깊은 성적을 남기지는 못했으나 3할에 조금 못 미치는 타율을 기록하며 재기를 노릴 수 있는 성적을 기록했다. 물론 한화는 둘 다 내쳤다. [6] 다만 이 당시 한화 프런트 구대성의 영구결번 추진 의지조차 없을 정도로 맛탱이가 가 있었다. [7] 다만 한현희가 22경기 22.2이닝을 더 소화했다. 콩콩경기 콩콩.콩이닝 [8] 선발 양현종 6이닝 무실점 [9] 마지막 선발등판은 2010년 6월 20일, 공교롭게도 당시 한화 소속이었다. [10] 2016시즌 아시아 최고령 선발투수이다. [11] 그것도 FIP는 4점대에서 3점대 중반으로 수직하강했다! [12] 대신 삼/볼 비율은 약간 나빠졌다. [13] 도박 혐의로 인해 시즌 초 출장정지 징계를 받고 시즌을 절반만 뛰었던 임창용은 연봉이 2억이나 인상되어 이에 관해 말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