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5 10:02:24

조사(전국시대)

趙奢
생몰연도 미상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전국시대 조나라의 무장.

동시기의 무장인 염파, 인상여 등과 함께 조나라를 지키면서 일대강국으로 부상시킨 명장이다. 또한 장평대전에서 진나라 명장 백기에게 참패한 조괄 아버지다.

2. 생애

조사는 본래 세금을 징수하는 하급관리였으며, 본격적으로 조나라에서 유명해지기 전에는 기원전 280년에 제나라의 맥구를 점령한 적이 있다.

전국사군자 중 한 명인 평원군의 집에서 세금이 걷히지 않자 평원군의 집을 관리하는 9명을 죽였다. 자기 집의 사람들이 하급관리에게 죽었다는 말을 들은 평원군은 노발대발하며 조사를 문책하였는데, 조사는 얼굴빛 하나 변화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공께서는 나라의 귀중한 분이신데 나라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신다면 나라의 힘은 약해질 것이고 그리한다면 결국 나라는 멸망할 것입니다. 나라가 멸망하고도 공께서는 부귀영화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십니까?
이 말을 들은 평원군은 크게 깨닫고 조사를 에게 천거하였다.

이후 기원전 270년에 진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조나라의 연여로 쳐들어오자 왕은 군신들을 소집하고 염파에게 승패를 물었다. 그러자 염파는 길이 좁고 험한 지형이기에 승리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왕은 다른 장수들에게도 승패를 물어보았으나 모두 염파와 비슷한 대답을 하였기에 실망하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오직 조사만이 당당한 태도에 두려움이 없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기에 조사에게 승패를 물어보았더니 조사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길이 좁고 험한 지형이지만 그 형세가 좁은 쥐구멍에서 두 마리의 쥐가 서로 싸우는 꼴이니 용맹하고 재능있는 사람이 승리하게 되어있습니다.[1]
이 말을 들은 왕은 기뻐하며 조사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출진을 명하니 조사는 위염, 호양을 격파하면서 진나라에게 대승을 거두어 명성을 알렸다. 이 공으로 조사는 마복군(馬服君)에 봉해졌으며 그 권세가 염파·인상여와 나란히 할 정도가 되었다.

《전국책》에서는 기원전 269년 화우지계로 유명한 전단과 전쟁에 관련하여 설전을 벌인 일이 있다고 한다. 전단이 "장군님은 전쟁에 지나치게 많은 병력을 동원하는데 이것 때문에 농사를 지을 장정들이 부족해집니다. 옛 제왕들은 3만의 군대만으로도 충분히 제후들을 복종시킬 수 있었습니다."라고 하자, 조사는
당신은 병법도 모르고 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구려. 오나라의 간장검은 말과 소를 토막내고 그릇을 자를 수 있으나 기둥에다 부딪히면 세 동강이 나고 바위에다 내려치면 백 조각으로 박살이 나는데, 지금 3만의 군대로 강한 나라의 군대와 맞선다면 칼로 기둥이나 바위를 치는 것과 같소. 옛날에는 수많은 작은 나라들로 갈라져 있어 아무리 큰 성이라고 해도 둘레 300장에 인구 3,000호가 고작이었기 때문에 3만의 병력도 충분했소. 하지만 지금은 일곱 강국만이 남아서 수십만 병력을 동원할 수가 있게 되었소. 제나라는 20만 병력으로 초나라와 전쟁을 벌였는데 5년이나 걸렸고 조나라도 20만 대군으로 중산국을 평정하는데 5년이 걸렸소. 지금 둘레는 1,000장에 인구는 1만 호인 큰 성들도 있는데 이런 성들은 3만의 군대로는 한 모퉁이도 포위할 수 없고 야전을 치르기에도 역부족이오.
라고 반박해서 전단이 데꿀멍했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전국시대에는 툭하면 여섯자리 숫자를 동원한 전투가 자주 일어나는데, 이는 춘추시대만 해도 전쟁이 아옹다옹한 동네 패싸움 정도였던 반면 전국시대에는 국운을 건 총력전 양상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같은 책에서는 몇 년 뒤 조나라가 평원군의 주도로 제나라에 3개 고을을 떼어주고 전단을 초빙해오려 하자 조사가 "아까운 고을을 3개나 내주다니, 조나라에는 군대를 이끌 대장이 없다는 말인가? 제나라 사람인 전단이 남의 나라인 조나라를 위해 힘껏 싸울 것 같은가?" 라고 불만을 표하며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실제로도 전단이 싸움을 질질 끄는 바람에 조나라 국력만 깎아먹었다는 결말인데, 위의 병법 논쟁과 엮어서 해석해 보면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한편 생전에 아들 조괄은 신동이라며 주변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으며, 심지어 조사가 아들과 병법을 논하다가 먼저 말문이 막힐 정도였지만(…) 끝내 조사는 아들을 천거하지 않았다. 아내가 궁금해하여 이유를 묻자 조사는 걱정스레 답했다.
무릇 전쟁이란 목숨을 거는 것인데 조괄은 목숨을 가볍게 여기며 입만 살았을 뿐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하니 저 아이가 후일 장군이 된다면 필시 군대를 파멸시킬 것이오.[2][3]
훗날 조사가 우려한 일이 기어이 터지고 마는데, 무려 조괄의 어머니(조사의 아내)와 병중에 있는 인상여마저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왕은 조괄을 중용했고 조나라는 장평대전에서 끔찍한 대가를 치렀다. 자세한 내용은 조괄 장평대전 문서로.

후한서 마원전에 의하면 조사의 후손이 마원이라고 한다. 조사가 마복군이란 호를 받아 마씨 성을 칭했다고 하는데, 조괄의 후손인지 아니면 조사의 다른 아들의 후손인지는 알 수 없다.

염파, 이목 등과 함께 조나라를 지킨 명장이나 이상하게 인지도는 저 둘보다 못 해서 "조사? 그게 누군가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혹여 조사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있어도 대개는 조괄의 아버지로 알지 자세한 업적은 잘 모른다. 아들이 안 좋은 의미로 너무 유명해서 어느 정도 가려진 케이스. 그렇다고 조사의 능력이 염파나 이목보다 떨어진다는 건 아니며, 조나라 전성기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다만 전국시대 말기 상황이 급변하면서 수많은 인재들이 각축을 벌이는 와중에, 조사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죽어버린 탓이 크다. 그렇기에 활약도 연여 전투 이후로는 없다.

3. 대중매체에서

3.1. 킹덤

삼대천
구(舊) 삼대천
인상여 조사 염파
신(新) 삼대천
이목 방난 사마상


하라 야스히사의 만화 킹덤에서는 조나라의 삼대천의 한 사람으로 회상신에서 등장한다.

그런데 작중시점에서 동료 삼대천이던 인상여와 (염파 본인 및) 염파의 수하들이 나와 과거의 명성 및 주인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활약을 하고 있지만, 정작 조사의 부하들은 전혀 안 보이는데, 추정상 아들인 조괄을 보좌하다가 함께 쓸려나간 것으로 보인다.

3.2. 삼국지

삼국지 12에서는 끝내 고대무장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 대신 전국칠웅 시나리오에서 마등일족이 업땅의 재야로 나오는데, 마원의 조상이 조사이기 때문이다.

[1] 이 드립은 후에 이시애의 난에서도 갑사 유자광이 써먹었다. 사림파에게 간신으로 유명한 그 유자광 맞다. 이 상소로 세조에게 총애 받아 일약 승진을 시작하고, 자신과 같이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운 신공신들을 배신하고 ( 남이라든가..) 다시 한 번 승진한다. [2] 사실 병법을 논하면서 발렸던 것도 아니다. 같이 병법을 논하다가 막히는 부분에서 조사는 오래 생각하거나 알 수 없다고 하는 부분에서 조괄은 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즉, 임기응변식으로 전략을 얘기하는데 조사는 조괄이 전략을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고 봤다. [3] 정확히 말하면 오히려 반대다. 조괄은 병법서를 통달해 책에 씌어있는 내용이라면 뭐든지 기억해 즉답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전쟁을 치러야만 알 수 있는 것, 책에 씌어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무지해 전혀 응용을 하지 못했다. 인상여 역시 조괄에 대해 평가할 때 병법서만 읽었을 뿐 임기응변이 부족하다고 했으며, 아예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할 줄 모르고 외워둔 것만 할 수 있음'을 뜻하는 교주고슬(膠柱鼓瑟)이라는 성어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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