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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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28AD1><colcolor=#000080> 출생 | 1903년 5월 9일 | ||
평안북도 의주군 | |||
사망 | 1972년 7월 11일 (향년 69세) | ||
서울특별시 마포구 서교동 384-1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 | ||
복무 | 대한민국 공군 | ||
1948년 ~ 1959년 (11년) | |||
재임기간 | 제4대 공군참모총장 | ||
1956년 12월 1일 ~ 1958년 12월 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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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28AD1><colcolor=#000080> 자녀 | 아들 장문희 | |
임관 |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1기) | ||
최종 계급 | 중장 (대한민국 공군) | ||
최종 보직 | 공군참모총장 고문 | ||
주요 보직 |
공군항공기지사령관 공공군비행단장 공군본부 행정참모부장 겸 제1훈련비행단장 공군참모차장 공군참모총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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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4대 공군참모총장.2. 생애
1903년 5월 9일에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양정고등보통학교를 나왔고 일본으로 건너가 이토비행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항공기 조종술을 배웠다. 1922년에 비행사 면허시험에 합격하여 안창남에 이어 조선인으로는 2번째 비행사가 되었다. 오사카에서 일본항공수송연구소에서 근무하였다. 민간 항공인으로 근무하던 중에 광복을 맞자 귀국하여 최용덕 장군이 주도한 항공건설협회에 참여하였으며 당시 모임의 장소가 장 장군의 자택이었다고 한다.공군 창설의 7인의 한 사람으로 이후 육군 항공대 시절에 항공기지 부대장을 지냈고 공군 독립 후 공군 기지 사령관을 지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장군은 8월에 비행단장으로 보임되어 물밀듯 남하하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적정 정찰 및 출격작전 등에 솔선수범하며 진두지휘에 전력투구하였다. 8월 15일 공격에 실패한 북한군은 일부 병력을 투입하여 통영을 점령한 다음 진해를 위협하고 부산에 압력을 가하고자 시도하였다. 우리 공군은 8월 15일부터 9월 11일까지 낙동강방어선 후방의 적 병력 이동과 보급품 집적소를 집중 공격하였다. 이때가 6·25전쟁의 분수령이었다는 점에서 장군의 비행단장으로서의 진두지휘는 특히 의미가 깊다.
한편, 우리 해병대는 적의 의도를 간파하고 통영반도에 상륙, 적 섬멸계획을 수립하고 항공지원을 요청했다. 8월 17일 우리 공군은 T-6 4기 편대로 출격하여 통영반도로 침입하는 적 지상군을 발견하고 F-51 전폭기에 연락하여 공격하도록 유도하였다. 우리 공군은 8월 17일부터 20일까지 해병대 작전을 지원하는 한편 남부 해안으로 수송되는 적 보급선 2척을 파괴시키고 진주 및 고성지역의 적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낙동강방어선 서남부지역의 사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는데, 그 중심에 일선지휘관 장덕창 장군이 있었다.
이후 장군은 1, 2차에 걸친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1951년 준장으로 승진하였다. 장군은 1951년 10월 전투비행전대를 강릉기지로 이전시켜 한국군 단독출격작전을 수행토록 하는 등 창군 초기의 군 발전과 전쟁 기간 중 탁월한 전투지휘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특히 비행단장으로서 장군의 후덕한 덕망과 탁월한 지휘역량은 연일 출격에 지친 조종사와 정비사들을 포근하게 감싸며 단합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1953년 장군은 공군참모차장으로 보임되었고, 이때 아시아 최초로 1만 시간 무사고비행을 기록하였다. 1956년 12월 1일 공군중장으로 승진하면서 제4대 공군참모총장에 취임하였다. 장군은 항상 공군력의 전략적 운용 및 지휘통제, 그리고 전투조종사의 육성, 전략항공기지 확보 등을 위해 진력하였다. 이 같은 평소 지론을 바탕으로 참모총장 재임 중 그는 전투부대를 증설하고 미 공군의 레이더기지를 인수하는 등 오늘날 막강 대한공군의 성장기반을 착실히 다졌다.
1958년에 12월 1일에 이임하고 잠시 참모총장고문으로 재직하다가 1959년에 퇴임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 제7번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반대하여 전국구 국회의원 후보를 사퇴하였다.
1972년 7윌 11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9세
3. 여담
동아일보는 ‘새로이 조선인 비행사 한 명이 탄생했는데, 서울 다동 31번지의 장덕창(19) 씨는 1921년 10월 30일 일본 이토비행연구소를 졸업하고 11월 말이나 12월 초순경 고국에 돌아와 상쾌한 순회비행을 계획하는 중이라더라.’고 보도했다.1925년 6월 10일 장군은 한강변 시범비행 중 엔진고장으로 불시착하여 동승자가 크게 다치는 사고가 있었다. 1929년 5월 설립한 조선비행학교는 유람비행사업도 병행했는데, 서울상공 유람은 5원, 인천 유람비행은 10원이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1930년 경성시민의 달콤한 유혹 중 하나는 비행기 놀이였다. 인천까지 단 7분 동안 비행하는데 10원이다. 사람들은 10원짜리 지폐를 던지고는 ‘죽어도 말 없다’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고 다시 돌아올는지도 모르는 위대한 길을 떠난다.>라고 썼다. 당시 대졸 초임은 40원이고, 500원이면 웬만한 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는데, 조종면허증을 따려면 2천원이 들었다고 하니, 조종사가 되는 길이 쉽지 않았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장군은 오사카 일본항공수송연구소에서 대도시를 비행하며 우편물 운송, 선전 삐라 살포 및 시범 홍보비행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해방 직전까지 그는 비행시간 9,820시간의 수석비행사로 승진하여 명망 있는 항공인의 반열에 올라섰다.
훤칠한 체구에 누구에게나 친근감을 주는 인상의 장군은 항공계의 중진다운 기품으로 손수 군용기를 조종하여 각 부대를 훌쩍 불시에 순시하기도 하는 등 의전형식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 야전형 지휘관이었며 또한 “무인의 끓는 피를 가라앉히려면 부드러운 손길이 있어야 하고, 젊음을 불태우려면 우선 한 잔 술이 있어야 한다.”며 젊은 참모들과 함께 명동의 대폿집을 자주 찾던 낭만을 아는 지휘관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