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비석의 장편 소설
1954년 1월부터 8월까지 서울신문에서 연재되고 이후 단행본으로 출간된 베스트셀러. 작가는 정비석.전쟁 후의 대학 교수 부인의 불륜과 가정 귀환을 통한 퇴폐한 사회 풍조와 주변 인물들을 통한 미망인의 재기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미망인에 대한 묘사와 불륜 관련 문제에서 많은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어려운 전후 상황에서도 4만부가 단시간에 팔려나갔다.
21세기에 흔히 보는 막장 드라마와는 차원이 다른 작품이고 작중에서 묘사되는 불륜이라고 해 봤자 연인과 함께 댄스홀에 다니는 정도로 끝난다. 물론 이 당시까지도 권세가와 부유층들이 남자들이 많이 죽어 노처녀와 미망인들이 많았던 당대의 사회상 속에서 첩을 두어서 두집, 세집살이를 한 경우는 많았지만, 부인이 대놓고 불륜을 저지른다는 주제는 파격적이었다. 나름 선정적인 주제로 사회에 화제가 되었으며 당시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였던 황산덕(훗날 법무부장관)은 지식인이 양공주에게 굴복하고 대학교수 부인이 대학생에게 희롱당하는 불량한 내용이 신문지면에 연재되는 있을 수 없다고 연재중지를 요청했으나 정비석이 작품을 먼저 읽고 논평을 해 달라고 반박하자 "중공군이 나라에 쳐들어왔으면 쳐부수면 될 것이지, 왜 쳐들어왔는지 먼저 알아내자는 소리나 다름없다"고 맹비난하며 정비석에게 "야비한 인기욕에 사로잡혀 에로작문을 희롱하는 문화의 적(賊), 문학의 파괴자, 중공군 50만명에 필적하는 적(敵)"이라고 폭언을 박아 버렸다. 참고로 정비석은 이에 대해 "폭력단 이상으로 무서운 무지에서 오는 폭언"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런데 이 작품이 어떤 높으신 분의 실제 가정사를 빗대었다는 소문에 휩싸여 정비석 작가 자신은 개인적으로 테러 협박도 당했고 아예 이승만은 종교적으로도 문제가 있다는 이유[1]로 특무대에 연행시키도록 명령을 내렸으며 특무대 경찰관들은 그에게 김일성의 지시로 남한을 음란, 퇴폐하게 만들어 적화를 기도하지 않았느냐며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2][3] 이 때문에 일본과 대만, 북한에서까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승만 정권이 4.19 혁명으로 몰락하면서 이 책도 금서에서 해제되었다. 이후 정비석은 르포 형식으로 가정으로 돌아와서 모범적으로 사는 자유부인의 후일담 류의 작품도 발표했다.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이것도 컬쳐쇼크였다.
2. 영화
자유부인 시리즈 | ||
자유부인 (1956) |
속편 자유부인 (1957) |
자유부인 (1969) |
자유부인 '81 (1981) |
자유부인 2 (1986) |
1990년 자유부인 (1990) |
원작의 인기가 높아 영화로도 상영되었는데 자유부인(1956), 속편 자유부인, 자유부인 '81은 모두 상영한 해의 흥행 1위를 거머쥐었다. 1981년작은 당시의 부동산 열풍 세태를 반영하고 있어서 1956년작과 다른 시대적 흐름을 느낄 수 있다.
2017년 영화 자유부인 2017은 제목만 유사한 에로 영화로 소설과는 관련이 없다.
3. 네이버 베스트 도전 웹툰
자세한 내용은 자유부인(웹툰) 문서 참고하십시오.
[1]
이란의 호메이니가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에 파트완을 내린 것이 연상된다.
[2]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트집이었느냐면 정비석은 황해도 출신의 지주로 이북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빈털터리로 월남했던 경력을 지닌 사람이라 철두철미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경찰이 잡아가서 고문했던 것이다(...).
[3]
또한 김일성은 이런류의 통속 문학에 대해 호의적이지도 않았었다. 오히려 사소한 주제를 다루는 작품에서도 공산당 찬양 대사가 나오도록 해서 멀쩡한 드라마와 영화에서도 공산당 찬양 대사가 나와서 전개가 어색해지는 일이 다반사일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