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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태극무공훈장 약장.png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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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태극무공훈장 부장.png
||<tablewidth=100%><table bgcolor=#fff,#191919><tablecolor=#373a3c,#ddd><width=2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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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원수 ||<width=20%>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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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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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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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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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하
육군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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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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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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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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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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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최범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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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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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퍼켓
미 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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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이용문
李龍文
출생 1916년 1월 22일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평양시
사망 1953년 6월 24일
대한민국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본관 안악 이씨
학력 일본육군사관학교
육군사관학교
가족 친형: 이용운
장남: 이건개
군사 경력
복무 일본제국 육군
1937년 ~ 1945년
대한민국 육군
1948년 ~ 1953년
최종 계급 소좌 ( 일본제국 육군)
준장 ( 대한민국 육군)[1]
참전 세계 2차 대전( 남방작전)
6.25 전쟁

1. 개요2. 생애3. 박정희와의 관계

[clearfix]

1. 개요

일본군 장교 출신의 대한민국의 군인이며, 6.25 전쟁에서의 공훈으로 사후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916년 1월 22일 평안남도 평양의 부유층 상인 가정 출생으로, 1934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4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1937년 12월 제50기생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 도쿄 주둔 제1기병연대에 배속되었으며, 1943년 남방전선으로 전속되었고, 1945년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할 당시에는 남방전선의 인도차이나의 사이공전선에 있었다. 당시 계급은 소좌로서 말레이시아, 수마트라, 버마 등 동남아 각지에서 근무했으며, 이후 베트남에 계속 머무르다 1947년 9월 인천을 통해 귀국했다.

이후 1년간 무역업에 종사했으나, 채병덕 이종찬 일본군 출신 선후배들의 권유로 1948년 11월에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했다. 육군사관학교 제 8기 특기생으로 들어와 곧바로 소령으로 임관, 한 달 뒤는 중령으로 승진, 이듬해 4월 대령으로 진급 8월 초 육군본부 정보국장으로 취임했고, 당시 남로당 숙군에 연루되어 불명예 강제전역을 당한 뒤 정보국에서 비정규직 군무원으로서 일하던 박정희와 친분을 맺었고, 대북 첩보원의 보고 및 북한 병력 배치 및 이상 징후를 여러 번 발견하여 남침임박 보고서를 국방부에 여러 차례 보고했으나 번번이 무시당했다.

6.25 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10일 육군참모학교 부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개전 초에 서울 방어선에 투입되어 성북 경찰서에서 500명의 장병을 지휘하다 전차의 공격을 받아 남산으로 숨어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한강 철교 폭파 뒤 도하하지 못하여 9월 28일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기 전까지 투항하지 않고, 3개월 동안 상인으로 은신생활을 하며 북한군의 정보를 수집했으며 서울 끝까지 사수한 유일한 장군으로서 당시 명성을 떨쳤다.

국군이 서울을 수복한 이후 동안 군에 복귀했으며, 1951년 3월 박정희가 참모장으로 있는 9사단 부사단장으로 임관하였고, 5월 현리전투를 치루었다.[2] 1951년 6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연이 있던 이종찬 참모총장으로 취임하자, 준장으로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으로 임명되어, 박정희를 육본차장으로 발탁했다. 전쟁 중 발생한 부산정치파동 때는 확고한 반이승만 계열의 군인사로서, 육군 참모총장 이종찬과 함께 군의 중립을 내세워 국방장관 신태영의 병력 차출 명령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육군 참모총장 이종찬은 해임되었고, 이용문은 육군본부에서 좌천 7월 11일에 수도사단장으로 전보되었다.

여담으로 부산정치파동 당시 측근인 박정희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는 5·16 군사정변과 유사한 군사 반란을 계획했던 것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이후 1952년 9월 6일부터 9월 20일까지 15일 간에 걸쳐 수행된 수도고지와 지형능선 고지 쟁탈전에 지휘관으로 참여했으며, 당시 인해전술로 공세를 일삼던 중공군 방어에 성공하여 휴전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하는 공훈으로 태극무공훈장에 추서되었다.10월 남부지구 경비사령관으로 부임해 지리산에 잔류하고 있는 공비토벌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1953년 6월 24일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지휘하던 중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상공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사후 육군 소장으로 추서되었으며, 장례는 육군장으로 치러졌다.

3. 박정희와의 관계

나이 및 일본육군사관학교 기수가 모두 하나 아래였던 박정희와 전쟁 이전부터 정보국에서 함께 근무한 친한 형 동생 사이이자 유일하게 존경한 선배 군인이였다고 하며, 시인인 구상과 함께 서로서로 막연한 술친구 사이이기도 했다.

1949년 정보국장으로서 남로당 숙군으로 연루되어 정보국에서 비정규 군무원으로 복무하며 어려움을 겪었던 박정희를 개인적으로 챙겨준 것으로 인연을 맺었고, 이후 1951년 9사단에서 부사단장과 참모장으로서 잠시 같이 복무하기도 하였다. 현리전투 이전 최석과의 불화 이후 육군정보학교 교장이라는 한직으로 복무하던 박정희를 개인적으로 육본차장으로 천거하며 중앙의 요직으로 불러들었으며, 이후 부산정치파동 때는 함께 의기투합하여 이승만 정부를 전복하고 장면을 내각제 총리 앉힐려는 군사반란 계획을 모의하기도 했다.

조갑제는 박정희의 전기인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서 박정희의 반골적 태도와 당시 엘리트 집단으로서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이후 군사반란의 지도자이자 정치군인으로서의 박정희는 이용문에게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했으며, 당시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던 이용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박정희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조갑제는 만약 이용문이 사고로 사망하지 않았다면 5.16 군사정변의 지도자는 이용문이였으며, 박정희는 그 측근에 머물렀을수도 있었다며 가정하기도 했다.

이용문의 사후 박정희는 돈을 모아 유족의 생활비를 보태주었으며,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도 박정희는 의장의 자격으로 대구 근교에 있던 이용문의 묘소를 서울 수유동으로 옮기는 이장위원회 위원장 맡기도 했다. 대통령 된 이후에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68년부터 매년 ‘이용문 장군배 승마대회’를 개최하으며 이용문의 장남 이건개가 장성하자 그를 불러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하게 해주며, 31세에 서울시경국장으로 보내주는 등의 뒤를 봐주었다.

이용문의 장남 이건개는 이러한 친분으로 30대의 나이에 서울지검장과 치안국장,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 파격적인 혜택을 받았으나, 친형 이용운 5.16 당시 부정축재 혐의로 체포된 이후 해외로 망명하기도 하였으며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1] 사후 소장으로서 추서. [2] 참모장 박정희는 현리전투 직전 사단장이 최석과의 불화가 이유가 되어 지병을 구실로 전보되었기에, 현장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