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02:55:02

이문열 평역 삼국지

이문열 삼국지에서 넘어옴
三國志
삼국지
파일:이문열 평역 삼국지.jpg
<colbgcolor=#000> 평역자 이문열
원작 삼국지연의
출판사 알에이치코리아
권수 초판 10권 (1988. 05. 10.)

1. 개요2. 특징
2.1. 서술 기법2.2. 조조에 대한 긍정적 시각
3. 비판
3.1. 개요3.2. 용두사미3.3. 내용 오류 문제3.4. 자의적 인용의 오류 문제3.5. 심리묘사 문제
3.5.1. 반론
4. 만화판
4.1. 제목
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소설가 이문열이 평역한 삼국지연의. 1983년 10월 24일부터 1988년 1월 20일까지 경향신문에서 연재되었고[1],그해 5월에 민음사에서 단행본 10권으로 출간했다. 모종강본을 평역한 삼국지이며, 평역소설로는 심각하게 하자가 많은 소설이지만 문학적으로는 이문열의 글솜씨로 크게 성공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논술에 도움이 된다는 입소문을 타고 1990년대에 불티나게 팔리면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 1위를 기록했다.[2] 리즈 시절에는 이문열에 들어오는 인세가 그 당시 돈으로 한 달에 2000만 원 정도였다고 한다. 이 인세 중 대부분이 이 삼국지로부터 나온 것. 한동안 삼국지 인세로 생활비를 해결했다고 한다.

2020년 민음사와 계약을 해지하고 알에이치코리아와 계약을 하여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개정판 작가의 말 ▼
||평역(評繹) 『삼국지』 개정 신판에 부쳐

이제 벌써 마흔 해 가까이 되어가는가. 그해 이른 봄 어느 날 나는 바로 받아들기에는 망설여지고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데까지 있었지만, 그렇다고 못 들은 척 물리치기 또한 곧 쉽지 않은 제의를 하나 받았다. 그 무렵 기세 좋던 어느 신문사로부터 받은 『삼국지연의』 연재 요청이 그랬다.

망설임은 그때 내 나이 서른넷이었고 당시로서는 문단 늦깎이로 이제 겨우 세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은 등단 사 년차라는 데서 왔다. 버젓이 ‘통속 연의’라는 표제를 달고 있는 이런 책을 정색하고 우리말로 풀어놓는 일에 내 젊은 날의 소중한 몇 년을 써도 될 것인가. 세월과 더불어 언젠가는 쇠잔해갈 내 문학적 재능과 열정을 이런 분명치 못한 문화적 효용과 함부로 맞바꾸어도 좋은가.

그때의 걱정은 좋은 사전 가지고도 주석서 없이는 사서(四書)조차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 성싶지 않을 만큼 엉성한 내 한문 독해력이나 『주자서(朱子書)』의 주(註) 가운데서 이따금 눈요기한 송대백화(宋代白話) 말고는 한번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는 백화문에서 비롯되었다. 아무리 내 독학과 사숙(私淑)을 넉넉하게 셈해준다 해도, 그리고 『삼국지연의』가 원전 제목에 통속(通俗)이라고 못 박을 만큼 읽기 쉬운 고전문(古典文)으로 쓰여 있다 해도, 그 책을 우리 말로 평역(評譯)할 만하다는 근거는 내 학력이나 이력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그 제안에는 앞서의 망설임이나 걱정을 덮기에 넉넉한 끌림도 있었다. 먼저 당시 주요 일간지 문화부장의 월급과 맞먹을 정도라는 연재 고료에다 일본 일주일, 타이완 열흘의 자료 수집 및 보충 취재를 위한 여행 경비와 보조 인력(주로 단기 고용 통역과 그 지역 특파원) 지원 약속이 있었다. 거기다가 연재 원고 매수가 그 무렵의 일간지 평균의 두 배에 가깝고 연재 기간도 오 년 가까이 되어 그 제안의 경제적 매력을 더욱 키웠다.

그러나 그 매력을 주저 없는 수락으로 바꾸게 만든 것은 이미 여러 해 전에 고인이 되신 박맹호 회장님의 사려 깊은 충고와 권유였다.
“이 형이 오랜 세월 지켜내야 할 문학과 이 형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도 알맞은 때에 받은 좋은 제의 같소. 띄엄띄엄 내는 베스트셀러나 근근이 발행되는 문예지 원고료로는 그 둘을 지키고 보살피는 데 그리 넉넉하지 못할 테니. 진지한 작가도 가질 수 있는 아주 효율적인 부업 정도로 여기고 한번 해보시오. 흔치 않은 기회를 축하하고 또 뜻있는 결실을 기대해보지요.”

그 뒤 얼마간 더 뜸을 들이기는 했지만 결국 나는 그 봄이 다하기도 전에 먼저 타이완으로 떠났다. 전해 오공 정부의 연좌제 폐지로 내게도 겨우 나라 밖으로 나갈 길이 열리기는 했으나 1983년 그때만 해도 해외여행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에 가까웠다. 거기다가 타이완 여행은 대륙이 아직 굳게 닫혀 있을 때라, 중국을 전생의 아득한 고향쯤으로 여기며 꿈꾸어온 내게는 여러 가지로 새롭고 별난 기억을 남겨주었다.

그중에서도 타이중(臺中)박물관은 마오쩌둥의 용인 아래 장제스 군대의 군함에 실려 양쯔강을 타고 내려왔다는 대륙의 보물들과 고적, 고문서로 사람을 압도하였다. 나는 거기서 어느 하루 내내 나관중 『통속 연의』의 여러 판본들을 복사해 왔는데, 기억으로는 홍치본에서 모종강, 이탁오본을 비롯해 이립옹본, 주왈교본 같은 것들로 그 일부는 지금도 내 서재 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중심이 아직 타이완에 머물러 있던 중국 고전 출판물 국제 시장에서 이름만 듣던 고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거리를 지나는 것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나는 거기서 당장 서가에 비치해둘 필요가 있는 사사(四史, 『사기』·『한서』·『후한서』·『삼국지』)에다 남은 17사(史, 사사에서 『남사』·『북사』까지) 대강을 갈색 타블로이드판 크기 장정본으로 샀는데, 돌아올 때 항공화물 무게 초과로 고생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밖에 한 주일 가까운 타이완에서의 취재기간 중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나 그들에게서 받은 교훈이며 충고 같은 데도 별난 것이 많았다. 하지만 이 평역 초간본 서문이나 다른 회고 회상에서 이미 쓴 적이 있어 여기서는 되풀이를 피한다.

일본 간다(神田)의 헌책방 골목까지 돌며 요란을 떨고 돌아온 뒤 겨우 대여섯 달의 자료정리와 숙려 구상 기간 뒤에 서둘러 연재에 들어간 것은 다시 이듬해 초봄이었다. 그리고 사 년 반 남짓 지난 1988년 초에 신문 연재를 끝내고, 출판사의 편집 교정 출판 과정을 거쳐 그해 초여름에 초판 평역 삼국지가 전 10권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초간본 『평역 삼국지』 서문을 쓸 때 삽십 년 뒤에 내가 또 다시 ‘개정 신판 서문’을 쓰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삼국지연의』가 그 나라 말(또는 당대 일상 언어)로 번역, 평역, 편술, 재구성 등으로 엮여 시대에 따라 판본이 바뀌며 읽히는 동양 세 나라를 돌아보면서 그때 내가 얼핏 계산한 한 판본의 수명은 대략 길어야 삼십 년 쯤 되었다.

현대 중국어로 바뀐 『삼국연의』도 그렇지만 여러 대 전해온 일본의 번역 번안 판본들도 삼십 년을 넘긴 것은 거의 없어 보였고, 가장 많이 읽혔다는 요시카와 에이지의 『삼국지』도 한 이십 년 지난 그때는 시들해진 듯했다. 오히려 새로 나온 지 오래지 않은 진순신의 『비본(秘本) 삼국지』가 일본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 같았고, 심하게는 이제 삼국지가 그 시대 중국의 나라별 인물별 평전(評傳) 형태로 쪼개져 나오는 경향이 시작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비슷해서 해방 뒤 박태원을 비롯해 수십 종 삼국지가 나왔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때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80년대 초반 무렵 쉽게 구할 수 있던 것은 김광주 역 문고판과 『김구용 삼국지』, 『박종화 삼국지』 등이 있었는데, 시중 서점에서 의미 있는 판매고를 올리고 있던 것은 『박종화 삼국지』 정도였다. 그것도 출간 십오 년이 다 돼 가 벌써부터 매대 구석으로 몰려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제 초판 출간 삼십 년이 훨씬 넘은 『평역 삼국지』 개정 신판에 서문을 새로 쓰게 되니 그 감회 어찌 그리 만만할 수 있겠는가.

전판의 개정 윤문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살펴본 것은 그간 내 『삼국지』에 쏟아진 평이었다. 초반에는 우호적인 평이 많았으나 갈수록 비판이 늘어가고 나중에는 비난과 혹평까지 쏟아졌다. 대개는 나도 놀랄 만큼 폭발적인 내 『평역 삼국지』 판매부수와 비례했는데, 주로 그 뒤 새로 나온 번역판들과 서평에 곁들여진 것이 많았다. 대개는 오류나 무지를 지적하는 형태로 새로 내는 자기네 판과 대비시키기 위함인 듯했지만 터무니없는 비방은 아니었다.

그다음은 나도 놀랄 만큼 많은 삼국지 마니아들의 비평과 질정이었다. 그들은 대개 일생 열 번 이상 여러 판본을 되풀이 읽으면서 나름의 사유와 의식을 갈고 닦은 이들로 서 때로는 긴 편지로 때로는 분개를 참지 못한 격한 전화로 나의 오류 또는 편향을 꾸짖었다. 그중에서 어떤 분들은 삼국지 연구가를 자처할 만큼 식견을 키운 이들도 있어 자주 나를 뜨끔하고 민망스럽게 했다.

그런 이들 가운데 한자를 수천 년 자신들의 글자로 쓰고 현대 중국어를 표준어로 살아온 두 사람의 견해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 사람은 옌볜 교포로서 거기서 나고 자라고 배우고 읽어 삼국지 전문가가 된 리동혁이란 젊은 동북 저술가였고 또 한 사람은 중국 고전문화를 현대적으로 잘 풀이해 수백만 독자를 누렸다는 이중톈(易中天)이란 샤먼대학 교수였다. 앞 사람은 두툼한 책 한 권( 삼국지가 울고있네)으로 내 불학과 무지를 통렬하게 비판하며 비웃어 나를 오래 부끄럽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뒤 사람은 짤막하지만 어리둥절해할 만큼 과분한 평가로 또 오래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2000년대 초 중국 CCTV에서 삼국지 강의로 몹시 인기를 누린 이중톈 교수는 한국에서의 어떤 대담에서 내 『삼국지』 평역을 ‘고명(高明)하다’는 두리뭉실한 언급으로 넘어갔는데, 한국어를 배워 읽었을 리 없는 그이고 보면 지나가는 덕담이었음에 분명하다. 결과로 보면 그렇게 자신만만하고 통렬하게 내 천학(淺學)을 짚어준 우리 교포 전문가 쪽이 내게 훨씬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그 뒤 내 『삼국지』를 손볼 기회가 올 때마다 제일 먼저 그의 지적과 질정을 떠올리고 손을 보았다.

이제 그런 개정 신판 교정과 감수도 끝나고 다시 서문을 쓰는 감회가 어찌 지난 세월에만 머물 것인가만 새 판에 거는 부질없는 자부나 후회, 소망과 기원을 길게 늘어놓는 일이 이제 와서 또 무슨 소용이랴. 이쯤에 서문이 더 길어지는 것을 그친다.
2020년 2월 15일 부악 기슭 蒼友坡에서
李文烈||

2. 특징

우리나라의 삼국지 중에서 김구용 선생의 삼국지는 거의 대역(對譯)이 가능할 만큼 충실히 모본을 따랐고, 월탄삼국지는 대강 의역한 듯 싶다.
따라서 판본을 모종강본으로 결정하자 이내 번역 방식에 문제가 생겼다. 그대로 번역만 한다면 약간 문장이 현대적이 되고 본질적으로 앞서 말한 두 삼국지와 다를 바가 없고, 따라서 쓸데없는 노력의 중복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 다음에 참고로 떠오른 것이 일본의 요시카와 에이지나 진순신의 방식이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나는 몇 가지 방식을 절충하기로 했다. 전체의 구도는 모본을 따르되, 시와 평문(評文)은 가감하거나 내 자신의 것으로 대체하고, 필요한 곳은 변형, 재구성한다는 것이었다.
-구판(민음사판) 1권, '삼국지를 평역하면서'
구판 작가의 말 ▼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흔히 우리가 『삼국지』라고 부르는 책에 대해 여기서 새삼 장황하게 얘기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삼국지』는 적어도 수백 년간 민간의 얘기꾼들, 저잣거리의 재간꾼, 불우한 서생(書生), 할 일 없는 문사(文士) 등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발전되고 정리돼온 역사소설이다. 우리가 흔히 『삼국지연의』의 저자로 알고 있는 나관중(羅貫中)은 그 마지막에 나타나 이전에 있던 모든 것을 수집하고, 취사 선택과 정리를 거쳐 오늘날의 형태로 완성시킨 사람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정사(正史)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와 용의주도하게 비교, 검토해가며 — 흔히 일곱 푼[分]의 진실과 세 푼의 허구로 얘기된다 — 완결된 나관중의 경이로운 작업 뒤에도 『삼국지』는 여러 판본(版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로 체제나 평문, 곁들인 시(詩) 따위의 차이로, 오늘날 중요하게 드는 것만도 홍치본(弘治本 또는 嘉靖本), 이립옹본(李笠翁本), 이탁오본(李卓吾本), 모종강본(毛宗崗本) 등이 있다.
내가 이 평역 『삼국지』를 시작하기 전에 굳이 대만을 찾은 것은 이미 전해지지 않거나 전해지더라도 우리로서는 입수할 수 없다고 알려진 여러 판본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길지 않은 체류기간 동안 나는 여러분의 도움을 입어 다행히도 이립옹본을 제외한 위의 여러 판본을 모두 입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검토한 결과 기대와는 달리 각 판본의 우열은 대개 시대순으로 나왔으며, 결국 그 힘든 수집에서 내가 얻은 것은 어째서 오늘날 모본(毛本)만이 살아남게 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삼국지』를 평역하면서 모본은 그 앞 이탁오본(원명은 李卓吾先生批評三國志)에서 역사나 인물에 관한 평(評)과 시(詩)를 나름의 안목에서 바꾸고 김성탄(金聖嘆)의 서문을 단 것인데 (여기 대해서는 김성탄의 이름만 빌렸을 뿐, 위작이라는 주장이 많다) 오늘날 우리나라 『연의 삼국지』의 대부분이 그걸 역본(譯本)으로 쓰고 있다. 참고로 말하면 우리나라의 『삼국지』 중에서 김구용(金丘庸) 선생의 『삼국지』는 거의 대역(對譯)이 가능할 만큼 충실하게 모본(毛本)을 따랐고, 월탄(月灘) 『삼국지』는 대강 의역(意譯)한 듯싶다.
따라서 판본을 모종강본으로 결정하자 이내 번역 방식에 문제가 생겼다. 그대로 번역만 한다면 약간 문장이 현대적이 되고 매끄러워질 뿐, 본질적으로는 앞서 말한 두 『삼국지』와 다를 바가 없고, 따라서 쓸데없는 노력의 중복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다음에 참고로 떠오른 것이 일본의 요시가와 에이지[吉川英治]나 진순신(陳舜臣)의 방식이었다. 이 역시 참고로 말하면, 우리나라에서는 고(故) 김광주(金光洲) 선생의 그 도입부에서 독창을 보이신 것 외에 대개는 요시가와의 아류라는 혐의가 가는 것들이었다. 일본식의 중국 이해가 간간 눈에 거슬리는 데다 연대와 사회상이 잘 맞지 않는 곳도 더러 보였다. 진순신의 경우는 아직 씌어진 지 얼마가 안 돼 그 아류는 눈에 띄지 않는데, 무거운 것을 너무 가볍게 만들어버린 것 같아 별로 호감이 가지 않았다.
여러 가지로 생각한 끝에 나는 몇 가지 방식을 절충하기로 했다. 전체의 구도는 모본을 따르되, 시와 평문(評文)은 가감하거나 내 자신의 것으로 대체하고, 필요한 곳은 변형·재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특히 힘주어 밝혀두고 싶은 것은 변형과 재구성의 의도이다. 그것은 구태여 내 『삼국지』를 다른 것과 구별시키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삼국지』에다 현대적 소설 감각을 주기 위함 쪽에 더 큰 목적이 있었다. 흔히 『삼국지』가 우리에게 재미있고 유익하면서도 어딘가 허황된 전설이나 신화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 인물들의 등장 방식 탓인 듯하다. 어디서 무얼 하던 사람인지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한번 등장하면 곧 천하의 영웅이요 관인후덕한 군주거나 천지조화를 마음대로 하는 재사(才士) 또는 만부(萬夫)를 홀로 이겨내는 신장(神將)이 된다. 따라서 도입부와 군데군데 필요한 곳에서 나는 변형과 재구성을 통해 중요한 인물들에게 리얼리티를 주려 했다. 그러나 그 변형과 재구성은 철저하게 정사에 의지한 것이라 독자를 한낱 말재주로 현혹시켜 역사를 그릇 알게 하는 잘못은 저지르지 않았다고 믿는다.
그다음 이 『삼국지』의 특색으로 밝혀두고 싶은 것은 내가 곁들인 평문이다. 그 평문을 활용하면 이 『삼국지』 한 권으로 얘기하지 못할 게 없다. 혁명, 권력의 정통성, 전쟁 같은 것들뿐만 아니라, 역사·철학·과학까지도 모두 거기 끌어들일 수 있다. 처음에 내가 가장 야심을 부린 곳도 이 부분이었는데, 결과는 솔직히 부끄럽다. 모든 것은커녕, 처음에 내가 의도했던 것도 다 얘기한 듯싶지 않다. 그러나 이 『삼국지』의 한 특색을 이룰 것임만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란 점에서 감히 밝힌다.
끝으로 하나 더 말할 것은 뒷부분에서의 변형이다. 원전은 제갈량의 사후가 거의 책 한 권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나는 그 3분의 1로 줄여버렸다. 어차피 정사가 아닐 바에야, 박진감과 흥미에서 현저하게 그 앞부분에 떨어지는 얘기들을 장황히 늘어놓을 필요가 없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무턱댄 삭제가 아니라 주의 깊은 요약이었던 만큼 중요한 사실(史實)은 원전과 다름없이 남아 있다.

이제 사 년 사 개월에 걸쳤던 곤혹스러웠던 작업은 끝났다. 내가 여기서 곤혹스럽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일간지 연재라는 발표 양식 말고도 이 작업이 순수한 문학적 창조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나이는 삼십 대 중반으로 접어들었지만 겨우 등단 사 년차의 신예 작가에게 『삼국지연의』 평역이 온당한 창작 활동일 수 있는가, 하는 울적한 자문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면 반드시 지난 사 년이 시간과 재능의 낭비였던 것 같지도 않다.
세월이 가면 똑같은 내용이라도 표현하는 방식과 이해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이제 이 땅에서 번역되거나 재구성된 『삼국지』는 대개가 한 세대 가까이 오래된 것이 됐다. 『삼국지』가 이 이상 더 읽혀서는 안 될 책이라면 모르되, 그게 아니라면 이 작업은 이 시대의 누군가가 해야 했다.
거기다가 듣기로 젊어서는 『삼국지』를 읽고, 늙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말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중국 방문 때 들은 말을 허술하게 인용했다. 원래 속담은 ‘젊어서는 『수호지』를 읽지 말고, 늙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말라’는 중국인들의 속담이라고 한다. 젊은이들이 『수호지』를 읽고 도둑 떼에 들까 봐 걱정한 부분은 빠뜨린 게 민망스러우나, 늙어 『삼국지』를 읽는 해악은 뒤집어보면 읽은 젊은이에게 유익함으로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어쨌든 부정확한 속담 인용은 여기서 뒤늦게 정정한다.- 평역자 주). 바꾸어 말하면, 그만큼 『삼국지』에는 젊은이들의 용기와 포부를 길러주고 지혜와 사려를 깊게 하는 어떤 것들이 담겨 있다는 뜻이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나를 통해 그 풍성한 『삼국지』의 과일을 누릴 수 있게 된다면, 그러잖아도 꾀 많은 늙은이들이 더욱 잔꾀에 밝아질 우려가 있다 하더라도 지난 사 년여의 내 작업이 반드시 뜻없는 일이 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1988년 3월
李文烈||


전체적으로는 모종강을 따라가되 이문열의 스타일에 맞게 개작되었다.[3]

현대소설의 문체로 번역을 했고, 중간 중간에 작가의 생각을 많이 덧붙여서 만들어졌다. 문체가 매끄러워서 현대소설을 읽는 감각으로 미려한 표현을 즐기면서 읽을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사실 문체면에서만큼은 평역 삼국지 중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이문열 자체가 맛깔나게 글을 잘 쓰는 데다가, 특유의 호흡과 문체가 이런 류의 군담소설 내지는 역사소설과 가장 잘 어울리기도 한다. 그의 작품 중에서는 "황제를 위하여"가 삼국지와 가장 호흡이 비슷하다.[4] 따라서 굳이 원전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나쁘지 않다.

그러나 문학적으로 좋은 소설인건 맞지만 좋은 '평역' 소설은 절대 아니다. 평역의 핵심은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논리적으로 서술하는게 중요한데 이문열 삼국지는 이부분에서 매우 심각한 오류와 논리적 비약을 보여주고 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후술할 평가 부분 단락을 참조하자.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 만족해서 본래의 삼국지연의도 이렇겠거니 하고 더 이상의 관심을 끊고 찾아서 더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 역사를 정확히 알고 싶다면 연의가 아니라 아예 사서를 챙겨 봐야 하지만 녹록지 않다. 일단 공식 출판된 사서 번역본이 있기는 하나 문제가 참으로 많다. 김원중 문서 참조. 이외에도 파성넷에서 정사 번역을 올려 놓았고, 실제 한국 삼국지 팬덤에서도 이 번역본을 중심으로 기타 부수자료( 자치통감 등)와 함께 정사를 얘기한다. 한학을 어느 정도 배운 팬들의 경우 본인이 직접 원문을 번역하는 시도를 하기도 하는데, 원문을 보는 것이야 굉장히 좋은 일이지만 번역본을 만드는 것은 그것과는 또 다른 문제다. 즉, 기본적으로 한 글자 한 글자의 번역에 신중하고 정확해야 하는 것이 한문 번역이니만큼, 박사급의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번역한 것은 기본적으로 신뢰도의 문제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문열이 이 작품을 연재할 때만 해도 냉전 시대였기 때문에 중국 방문이 불가능에 가까웠고, 2000년대와 달리 삼국지 팬덤도 두텁지 않았으며 자치통감 등의 사서도 대만을 통해서 한문 원본을 구해야 했다. 모종강본 연의를 직접 번역했던 과거 문단 선배들이나 일어중역을 참고한 이들과 이문열은 중화권의 자료를 섭렵하려고 했던 노력은 가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문열이 한문이 아닌 중국어로 된 대만의 2차 연구자료를 해독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기 때문에, 별로 도움이 안 되었을 것이고, 1980년대라면 중국에 갔어도 어차피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평가도 있다. 중국에선 "황건기의" 등 민중주의적 스타일의 해석이 농후했고, 유비대신 조조 덕질이야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 레닌 사관 때문에, 구체제를 존속시키려고 한 유비가 상당히 비판받았다. 문화대혁명 시절 비림비공운동(공자와 린뱌오 비판하는 운동)으로 이 경향은 더욱 심해졌고, 사인방이 몰락한 후 이런 경향은 조금 사그라들지만, 조조는 확실히 재평가되었다.

이문열 옹호측은 어차피 나관중 창작의 삼국연의가 역사서도 아닐 뿐더러 현대에 재창작한 역사소설이 딱히 실제 사실에 딱 맞아야 하는 것이 작품성의 기준도 아니며, 어차피 이들의 비판의 근거는 자신들의 팬덤내의 컨센서스이지 학문적 엄밀성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라는 논거를 펴고 있다. 그러나 이문열은 순수하게 소설을 쓴게 아니라 현실에 기반을 두고 평가하는 평역 소설을 쓴것이다. 따라서 평역의 기반이 되는 논리가 맞아야 하는데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는 논리적 비약이나 자료의 오류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 것이다.[5] 그리고 연의와 비교해 정사에서는 이러이러하다고 소개하는 부분에서도 오류가 많다는 점도 비판을 받는다. 정사에 버젓이 나오는 내용을 정사에는 없는 내용이라고 거짓 정보를 알려준다면 이것은 역사왜곡이지 소설의 영역이 아니다. -- 나관중 연의나 이전의 평화삼국지처럼 무협 판타지로 썼으면 이런 비판도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삼국지를 전공한 중문학자 정원기 교수는, 본문에 충실한 번역이 없었었던 걸 아쉬워하면서도 황석영 삼국지보다 이문열 삼국지를 오히려 더 높이 평가했다. 다만 아래 평가내용을 보면, 독자의 관점에서 이문열 삼국지가 내용적으로 더 낫다는 의미는 아니라, 학자의 관점에서 황석영 삼국지의 번역방식에서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흥미도나 소설 구상 면에서 평가하면 이문열이 정말 대단한 작가라는 걸 실감한다. 하지만 원문 번역에서 오역한 부분이 많아서 어느 중국 교포 무려 1천 군데가 넘는 오류를 지적하기도 했다. 인명인 '예양(豫讓)'을 지명으로 오역하는 식이다. 이런 걸출한 작가의 번안본이 나오기 전 제대로 된 정역본이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 백화문 원문을 기준으로 적벽대전 부분인 43~50회 내용을 집중 검토한 결과 황씨의 삼국지는 중국 옌볜인민출판사의 '삼국연의'와 동일 오류가 반복되고 문장 흐름도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그 문제를 두고 모 일간지에서 반론·재반론을 거듭하다가 황석영씨 측에서 감정적으로 나오는 바람에 토론을 중지하고 말았다.[6] 그만한 대형작가라면 이문열이나 장정일처럼 번안본을 내는 게 더 당당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 출처

2.1. 서술 기법

이야기를 진행하다가, 갑자기 "독자의 흥을 깨겠지만, 잠시 언급할 게 있다. 여기서 ~(이)란 인물은 ~을/를 하게 되는데, 이것을 ~(이)라고 부른다. 이 ~에 대해 후대 역사가들은 이것을 ~(이)라고 해서..." 같은 식으로 글의 흐름을 갑자기 끊고 포커스를 무대 바깥으로 돌려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이는 기법을 자주 구사하였다.

이 평역 방식이 독자들의 교양주의를 자극했기 때문에, 이문열 특유의 능수능란한 이야기 전개방식과 시너지 효과를 보여 상업적 성공을 거두는 데 일조하였다. 이런 류의 서술의 원조 격은 일본 역사소설계의 신기원을 이룬 시바 료타로인데, 이문열도 상당히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런 기법을 《삼국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구사하였다.

이 서술 기법에 대해 이야기의 흐름을 깨뜨린다고 비판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독서물의 이름은 애초에 '이문열 번역 삼국지'가 아니라 '이문열 평역 삼국지'다. 즉 이 소설은 현대소설로서 이문열이 삼국지연의를 읽고 번역하고 자신의 논평을 싣는 형태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애초에 평역임을 밝혔으니 독자는 이 기법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어야 했다. 이 기법이 맘에 든다/재미없다는 당연히 독자의 몫이지만, 평역 삼국지임을 밝혔는데도 이 기법을 왜 한 것이냐 식의 비판은 통하지 않는다.

다만 후술하겠지만 이문열이 평역을 풀어내는 문학적 기법과는 별개로 평역의 내용 즉 역사적 논리적인 부분은 심각할정도로 오류가 많아 비판을 받는다. 이점이 이문열 삼국지를 입문서로도 쓰기 어렵다는 혹평을 받는 주된 이유다

2.2. 조조에 대한 긍정적 시각

이문열에게서 보이는 일관적인 주제 의식은 영웅주의와 상황윤리이다. 쉽게 말해 영웅이 뒤집힌 세상을 구하며, 이 와중에서 그 사람이 범할 수 있는 실수나 무리수는 그 결과 (회복된 질서나 평화)가 합리화한다는 것이다.

이문열의 영웅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모든 작품을 통틀어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에서의 '엄석대'이다. 엄석대는 폭력으로 학급내 질서를 바로잡고 혼란을 막고 있지만, 착한 인물은 절대 아니며, 그 폭력으로 유지되는 질서 속에서 상당하게 사익을 챙기고 있다. 서울에서 전학온 한병태는 이런 엄석대의 악행을 참지 못하고 담임에게 계속 일러바치지만, 담임은 오히려 엄석대를 옹호하면서, 서울의 학생들처럼 개개인이 똑똑하면 엄석대식의 관리는 필요 없지만, 시골 학생들은 멍청하기 때문에 엄석대식의 관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엄석대는 새로온 담임선생에게 그 악행이 덜미를 잡혀 학교에서 쫓겨나지만, 엄석대가 사라진 이후 중학교 입시철(가을)까지 학급은 혼란과 무질서로 점철되었으며, 자신은 냉소적으로 바라봤다는 이야기를 한다. 즉, 한병태는 엄석대가 질서의 이면에서 저지르는 비리나 악행을 개인적으로 혐오하면서도 결국은 이렇게 유지되는 질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인데, 이는 이문열 개인의 견해로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에 조조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연의의 유비 세력이 이미 문제가 확실히 드러나 망해버린 한나라의 문제점을 고칠 생각을 안 하고, 그냥 옛 것으로 돌아가겠다는 대안 없는 복고주의에 현대인들이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연의 속의 유비 세력이 이러한 점에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였다면, 조조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확실히 줄었겠지만, 연의 내에서 두 세력 다 현대인의 관점으로 봐서는 문제점이 확실히 드러나니, 자신이 우선하는 가치에 따라 선호도가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조조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현대의 한중일 삼국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삼국지 평역작이나 2차창작물에서 나타난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삼국지의 배경을 이루는 유교적 세계관이 20세기 들어 완전히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7권 말미 조조의 한중 정벌 부분에서 조조가 장로를 배반한 양송을 처형하는 대목에서, '조조는 일개 군웅에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욕심에 눈에 멀어 주인을 배신한 자는 용서하지 않았다.' 라고 작가는 칭찬한다.[7] 그런데 7권 맨 끝 부분, 조조가 경기 등의 거사날 문 밖으로 나온 백관들을 처형한 것에 대해서는 변명 일색이다. 일부러 사람이 무른 왕필을 임명해 놓고 함정 수사라며 조조를 합리화한다. 하지만 이건 견강부회. 끼워 맞추기 해석이다. 조조의 행동에는 일관성이 없다.

다만 조조를 마냥 높게 띄워주지만은 않는다. 이를테면 주불의를 언급하며 조조가 냉혹하고 잔인하다는 건 인정하며 헌제의 아이를 임신한 동귀비를 죽인 것만은 지나친 잔혹의 열정에 사로잡힌, 지나친 일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8권에서 유비가 한중왕으로 오르는 일을 서술할 때에도 지나친 조조 찬양과는 거리를 두고 있으며 조조가 세운 체제가 한나라의 무능과 오점을 그대로 답습했다고 말하는 등 조조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유현덕의 경우에도, 장사 태수 한현을 죽이고 황충을 구한 위연 - 제갈공명이 위연을 반골이라 하여 죽이라고 했지만, 장사 공격 바로 직전에 무릉태수 금선을 배신한 부하 공지가 무사하고 칭찬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 우리 독자들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다 나중의 끼워맞추기식이다. 난세에 주인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주인을 바꾸는 과정에서, 이전 주인에게 해를 입히느냐 마느냐 하는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8]

여포는 동탁에게 의지했다가 수차례 주인을 바꾸면서 이전 주인을 죽였다. 서황, 장합 등은 그냥 투항했다. 뭐 대략 이런 차이다.

서문에 쓰기를, 이문열 본인은 조조를 주인공으로 삼국지를 쓸 구상을 처음에는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조사차 대만에 방문했을 때 대만의 교수가 "조조 재평가에 대해서는 찬성하지만, '촉한 정통론'과 '관우'를 깎아내리면 그건 삼국지연의가 아니라 삼국지를 베이스로 한 다른 소설일 뿐이다" 라고 말한 것에 강한 인상을 받아[9] 기본적으로는 촉한정통론에 기초한 삼국지연의로 노선을 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촉, 위, 오에 각각에 어느 정도의 비중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는 하지만 유독 조조에 대한 찬양이 강하다. 이 책이 나오던 시점에서 조조는 전형적인 간웅, 악당의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인식되어왔는데,[10] 이는 나름 굉장한 혁신으로서 한국에서 "조조 재평가"을 널리 알린 공헌자이기도 하다. 특히 이문열 삼국지의 판매권수를 감안한다면 더욱더 그러하다. 한국에서 위빠, 혹은 조조빠가 많은 것에도 이문열 평역 삼국지의 역할이 적지 않은 편으로 어느 정도의 중립성은 지키고 싶었는지 유비에 대해서도 대놓고 나쁘게 쓰지는 않지만 조조의 과오는 생략하거나 옹호하는 한편으로[11] 유비에 대해서 효웅으로써의 측면을 강조했다.[12]

유비(유현덕)에 대해서는 인덕이 있으나 내심 야심을 품고 있는 다소 비열한 효웅으로 묘사하며, 실제로 한조를 뒤엎다시피한 조조에 대해서는 젊은 날에는 충의를 가졌으나 한조에 실망해서 허자장의 "치세지능신, 난세지간웅"이란 평가를 듣고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식의 옹호가 작중에서 몇 번인가 나온다.

이는 이문열이 일관적으로 권위주의 정권, 군사정권을 옹호하는 등의 성향을 보여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이문열이 체제를 조금 개혁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권위주의자였던 조조를 옹호하는 조빠라는 사실은 딱히 이상한 게 아니고 자연스러운게 사실. 그래서 조조가 이 작품에서 상당히 복권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을 이 작품의 문제점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이야기. 이것 역시도 작가의 하나의 관점으로 볼 수 있으니깐 말이다. 어차피 이렇게 어려 번역이 존재하는 작품은 번역자의 성향이 강하게 묻어나오기 마련이다. 만약에 박종화본처럼 이문열이 그냥 대역수준으로 번역했다면 이문열 평역 삼국지는 그렇게 히트를 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한계 때문에 21세기에 이문열 삼국지는 그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데, 21세기 들어서 삼국지 미디어들의 쇠퇴로 삼국지는 기존의 광범위한 인기에서 소위 매니아로 불리는 전문화된 소수의 문화로 축소되어 갔는데 그 과정에서 삼국지 팬들이 연의등 소설 중심에서 벗어나 정사 삼국지나 자치통감같은 정식 역사서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런 수요와 적절하게 맞춰 삼국시대 정사기록들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는데, 어린시절 접했던 이문열 삼국지와 많은부분이 상충됨을 확인하게 되고 특히 조조를 옹호하는 부분에서 이문열이 정사인거 마냥 평역한 부분들 상당수가 역사서에 없거나 이문열이 왜곡한 부분이 많은것을 보게되면서 이문열 삼국지가 평역소설로서 심각한 오류가 많은 소설임이 확인되어 이문열 삼국지는 입문서로도 쓰기 어렵다는 평가가 강하다.

다만 촉까는 아니었는지 촉의 인물들 중 절대적 충성심을 보여준 이들에 대해서는 표현이 나쁘지 않다. 촉한의 인물들은 소위 '닥치고 충성'하는 보수주의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보수적 성향의 작가가 이들을 나쁘게 표현할 이유가 없다.[13]

3. 비판

3.1. 개요

이 책은 출판당시 (1990년대 초반) 대학별 본고사가 도입되었고, 논술에 도움이 된다는 식의 마케팅이 있었지만, 사실 이건 그냥 단순한 광고카피일 뿐이다. 이문열의 문학적 재능은 대단하지만, 특히 그가 쓴 정치평론은 항상 비판의 대상이었다.[14] 본인도 이런 정치적 활동을 하면서 크게 욕을 먹은지라 2010년대 이후로는 정치적 견해를 밝히거나 발언을 하는 것을 매우 삼간 것을 보면, 이 책에 간간히 나오는 작가의 견해나 논리가 논술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별로 근거가 없다.

일부 삼덕들은 이 책이 입문서라고 평한다. 그들의 견해에 의하면 이 책은 해당 분야의 기본적인 이해를 돕고, 같은 분야의 다른 책들로 잘 전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어디까지나 흥미 위주의 접근으로만 좋은 것일 뿐, 삼국지를 진지하게 고찰할 만한 책인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단 이문열은 한학자나 역사가가 아니라 여러 해석에 문제점을 보이기도 한다.

책 내용으로 보면 상당히 무책임하다. 적어도 정사와 연의를 토대로 쓴 것이니만큼 흥미 본위로만 읽을 수도 없는 것으로, 그러한 측면에서 볼 때 작가가 너무 자기 식대로 사료를 곡해하고 아전인수하는 부분이 많다.

1990년 청년사에서 '정본삼국지'를 내면서 이문열 삼국지를 가리켜 '너무 현대적인 해석에 치우쳐 고전의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라고 깠다.

3.2. 용두사미

삼국지 개역이 거의 그렇듯이, 1권 전반에는 작가가 창작한 스토리(상산초옹, 장독목 등)가 많이 있지만 후반에는 별로 없다. 이를테면 우리가 아는 도원결의 대신 나무를 보면서 새로운 시대를 구상하는 유비나 스승과 함께 나오는 조운이나, 거의 유협격으로 등장하는 유관장 형제들의 모습, 조조가 지방관으로 돌아온 원소, 원술과 만나서 백성들의 참상를 논하는 일화. 이 부분은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는데 특히 나무를 보고 새로운 시대를 다짐하는 유비의 모습은 유비의 야망과 의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뭐, 도원결의는 원작의 분위기에는 미치지는 못하지만...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알려진 스토리를 충실히 유지하다보니 용두사미가 된다. 아마도 처음에는 이문열 자신이 삼국지를 완전히 재창작을 하려 했으나, 귀찮아서인지 혹은 시간상 재구상이 어려웠는지[15] 그랬었던 듯. 꽤 무성의하게 느껴지기조차 한다. 특히 후반부의 생략은 꽤나 심각한 수준인데, 문앙의 경우 존재만 언급되고 활약이 아예 잘려있다든지, 원본 연의에서는 강유와 궁술 싸움을 하다 당한 곽회의 죽음을 "강유는 퇴각하다 운좋게 곽회를 잡아죽여 위신은 세웠다"라는 한 마디로 날림처리해버리기도 했다. 이문열은 이에 대해 다른 삼국지는 제갈량 사후 분량을 전체의 1/7이나 되게 넣었는데, 자신은 이 지루한 분량을 축소하여 더 재밌게 재구성했다고 자화자찬한다.[16]

어떤 장면에서는 삼국지에 다른 중국 고사를 슬쩍 치환해 넣기도 한다. 가령 "글은 이름 석자만 쓸 줄 알면 됩니다."는 손견과 손책의 일화는 사실 항우의 일화를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다. 초한지에 나오는 항우의 일화를 아는 독자에게는 갑자기 김새는 장면이라고 할까.

3.3. 내용 오류 문제


가장 큰 문제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잘못 표기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점이다. 그나마도 적은 제갈량 사후 부분을 더 줄이면서 제갈량의 사망 연도를 232년, 서진의 천하통일을 282년이라고 했는데 각각 234년, 280년이 맞다. 이 오류는 2020년에 판권이 민음사에서 알에이치코리아로 넘어간 뒤에도 전혀 수정되지 않았다.

소설 사이사이에 붙여둔 작가의 독자적인 해설은 대체로 자료가 없던 시절에 작가가 통박으로 때려맞춘 것이 대부분이므로 별로 신뢰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정사 삼국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당시 정사 번역이 제대로 된 것이 없어서인지 지금 보면 오류가 수두룩하다. 당시 중국과 수교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만에 가서 각 판본을 섭렵하는등 자료를 찾아본 것은 물론 합리적인 일이다. 그러나 각 판본의 차이는 나관중 원저의 마이너 체인지에 불과하므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문열 자신도 그렇게 말한다.) 그가 가끔 인용하는 정사 삼국지는 전문 연구자도 읽는 게 어렵기 짝이 없는 물건인 데다가 중어중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인기 작가인 이문열이 꼼꼼히 찾아볼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읽은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해 볼 만하다.

현대에 쓰인 2차 연구의 경우는 일본어 자료라면 집필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문열이 현대 중국어로 쓰인 대만 측 2차 자료의 해독이 가능한지는 의문이기 때문에, 이문열의 대만행은 그다지 도움이 안 되었을 것이라고 보는게 타당하다. "노력했다" 정도. 나관중의 연의 원문인 백화문은 한문과 중국어를 둘다 공부한 사람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정사 삼국지는 문장의 난이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일단 연의와 기사를 대조하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었다. 요즘처럼 간편하게 시간이나 표제어로 원문을 검색해 볼 수 있던 시절이 아니다.

후반부에 가면 작가의 무성의가 두드러지는데, 허유를 죽인 게 허저가 아니라 장료라고 하지 않나, 나이가 더 많은 장포 관흥에게 형이라고 하지 않나.[17][18] 제환공과 진문공을 혼동하기도 한다. 또한 마초가 조조를 급습했을 때 허저가 안장을 들어 화살을 막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정사에서는 허저가 아닌 장합이라고 써놓았는데 정사에서도 허저가 맞는다. 그리고 관구검과 무구검 두 가지 표기가 다 나오지 않나... 후반부를 보다보면 초반부를 쓴 작가 본인이 썼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오류투성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황당한 부분은 관우와 제갈량의 관계를 표현한 부분인데 6권 적벽대전 이후 화용도에서 관우가 조조를 놓아준 일은 정사에 나오지 않으므로 이것으로 둘의 관계가 나쁘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억지다라고 평해놓고 8권에서 관우가 사망하는 장면에서 화용도 사건 이후 유비 군영의 2인자였던 관우와 제갈량의 상하관계가 뒤집혔고 이로 인해 감정에 응어리가 생겼다라고 스스로 억지라고 말한 주장을 번복했다.

소설로서의 삼국지연의와 정사로서의 삼국지를 헷갈리고 무리한 비약을 해놓은 경우도 있다. 가령 서서가 유비의 참모로 들어와 조인의 팔문금쇄진을 격파하는 장면을 고대의 전투가 개인과 개인의 싸움에서 병력과 병력의 전법 싸움으로 도약하는 큰 의의가 있는 장면이라고 서술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미 삼국지 시절에 고대 전투의 병법은 완성된지 오래고[19] 연의에서 개인과 개인이 접전을 벌이는 장면은 단지 군담소설의 재미를 위해 추가된 창작일 뿐이다. 팔문금쇄진이나 일기토나 다 창작의 영역에서 비롯된 내용일 뿐인데 이를 이용해 고대의 전투에 대해 논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뿐만 아니라 유비가 배신의 명수임을 말하면서 여포와 비교하는 서술을 하기도 하는데[20] 유비는 유장을 팽한 것을 제외하곤 딱히 배신이라고 할 수 있는 행동을 한 적은 없는 데다, 여포는 정원, 동탁을 연달아 죽이고 몰래 유비의 세력을 송두리째 뺏는 등 확실한 배신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무리한 비교라고 할 수 있다.[21][22], 위의 대표적인 사례 외에도 원소와 반목하고 원술의 통수를 여러 번 쳤고[23] 장양의 휘하에서도 원소가 편지를 보내자 스스로 의심하여 도망쳤다.[24]

또한 서량 전쟁의 결과를 서술하면서 마등을 드는데 마등이 조조에게 살해되었다는 건 정사에 없다고 서술하고 중앙에 입조하여 편하게 일생을 보낸 것처럼 이야기했는데, 이건 사실과 다르며 마등 일가는 죽은 시기가 서량전쟁 이후로 서술되어있을 뿐이지 정사에서도 조조에게 참살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조조가 마등 일가를 멸족한 것은 후한서 헌제기 등 다른 정사에서도 나온다. 만화판에서는 개정하여 마대 빼고 다 죽은 걸로 수정되었다.

조운에 대한 나이 설정도 문제다. 처음 등장할 때 소년장수라고 표현했으면서[25] 제갈량의 북벌 때 70이 넘은 유비보다도 나이가 많은 인물로 나온다. 단 이는 이문열 삼국지에만 있는 내용이 아니라 중국 원서에도 나오는 오류이므로 이문열 삼국지만의 문제는 아니다.

관우의 수술 장면 또한 오류가 있다. 이문열은 관우전은 물론 화타전에도 수술을 한 기록은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지만, 화타가 집도의가 아니었고 바둑을 둔 게 아니라 담소를 나누었다 정도의 차이점만이 있을 뿐 어깨를 수술한 기록 자체는 관우전에 떡하니 나와있다. 그것도 배송지가 추가한 배주가 아니라 진수가 쓴 본전에 당당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하튼 이 이문열판 삼국지의 많은 오류들로 인해, 보다 못한 삼국지 마니아 중 하나인 본삼국지의 저자 리동혁이 이런 오류들을 까는 삼국지가 울고있네란 책을 쓰기도 했다. 아마 이 여러 문제점은 처음 집필했을 때와는 달리 이문열 본인이 나이가 들어서(또는 그 이유 때문에 별 개의치 않아서)일 가능성이 높다.

3.4. 자의적 인용의 오류 문제

소설 전반적으로 조조에 대해서는 정사를 근거로 쉴드치면서 유비에 대해서는 연의를 근거로 비난하는 등 좌충우돌하는 모습도 보인다. 가령 유비의 자주 우는 모습을 가지고 비판하는데 정사의 유비는 울보에 유약한 모습과는 거리가 먼 카리스마가 있는 군주였다.

이런 경향은 제갈량에 대한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정사가 아닌 소설상에서만 등장하는 제갈량의 활약에 대해서는 "정사에는 없는 이야기고, 제갈량은 그렇게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고 폄훼하면서, 정작 정사가 아닌 소설상에서만 나타나는 제갈량에 대한 '의혹'[26]에 대해서는 "역시나 제갈량은 그렇고 그런 인물이었다"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27] 반대로 조조의 경우 정사에서 중요한 사건인 서주대학살 같은 사건은 일말의 설명도 없고 연의 내용도 대부분 삭제되었다. 전형적인 내로남불식 해석.

웃긴 점은 관우가 죽는 부분의 묘사를 하면서, 제갈량의 지략이 그렇게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관우를 죽게 만든 것은 제갈량의 2인자에 대한 질투다라는 식으로 해석을 하고, 나중에 제갈량이 뛰어나게 묘사되는 장면이 나오면 ‘이건 허구다.’ 라고 단정을 짓는 아전인수격의 해석이다. 육손을 죽게 할 뻔한 팔진도는 그냥 별 거 없다는 식으로 제갈량 거품설을 부추기는 발언을 했으나 실제로는 당연히 연의에서 묘사된 마법 수준의 전술이 아닐 뿐, 매우 높이 평가받았고 실전성도 뛰어났던 전술이 맞다. 도리어 이문열이야말로 제갈량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만 증명한 사례. 단, 육손의 팔진도와 실제 병법에서 사용한 팔진도는 다르며, 육손이 당한 팔진도는 돌무더기들이 알아서 움직여 출입구를 뒤바꾸는 도술적인 허구다.

한 마디로, 깎아내릴 때는 악의적으로 해석해 유능한 인물로 묘사하고, 뭔가 활약을 하면 소설의 과장으로 치부해버리는 이중적인 잣대가 너무 자주 나온다.

3.5. 심리묘사 문제

문체가 현대소설화 되었는데, 그래서 본래 고전소설인 삼국지연의의 의도를 크게 왜곡했을 가능성이 있다.특히 인물의 심리묘사가 그러한데 삼국지연의는 고전소설인 만큼 심리묘사라고 할 만한 부분이 거의 없는 데 비해 이 소설은 상당히 심리묘사가 풍부하다.

이 책이 현대소설임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묘사가 당연하지만 달리 보면 원전에는 없는 심리묘사를 작가 자신이 붙여놓은 것인데 이로 인해 원작이 의도한 것과 묘사 자체가 달라져버린 것이 많다. 사실 정사 운운보다는 이 부분이 더 큰 문제다. 운을 끊는 부분이야 독자가 보고 다른 자료를 찾아서 보충할 수 있지만, 이렇게 해버리면 연의와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사건의 전개는 비슷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전혀 다르게 풀어냈거나, 잘못된 방향의 해석을 고정시킬 우려가 있는 것이다.

삼국지연의 인물들은 본질적으로 무심(無心)이며 언행이 완전하게 일치되어 있다. 이는 영웅호걸이든, 잡스러운 소인배든 다를 바가 없다. 생각보다 마음이 먼저 나가며 마음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 하나같이 신념이 뼈와 하나가 되어 있으며 뒤에서 꿍꿍이를 꾸미는 잡스러운 소인배들조차 본질적으로 무심하다. 계획을 꾸미는 것도 모두 무심하다. "잡스러운 소인배들"을 포함한 삼국지연의 속 모든 인물은 본질적으로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현대에는 재창조된 이미지가 널리 퍼져 있지만, 삼국지연의는 본질적으로 고전소설이다. 입체적인 인물상을 의도하고 그에 맞게 묘사를 넣을 여지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세 영웅이 여포와 싸우다."라는 대목에서 작가는 의도적으로 "유비가 유비, 관우, 장비 세 명 중 가장 약하다."는 묘사를 넣었지만, 본래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장면에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묘사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왜곡으로 볼 수 있는 소지가 있다. 뭐 그래도 이 상황에서의 묘사는 정황상 대부분의 독자들이 보기에 유비가 제일 약한 게 맞기 때문에 큰 문제는 안 되긴 한다. 여담이지만 고우영 화백은 본인이 그린 만화 삼국지에서 이 장면에 (여포, 관우, 장비 세 명의 호걸이 싸우는데) 쬬다[28]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유비가 예술을 깨뜨렸다라고까지 적어놨다.

3.5.1. 반론

위 부분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18세기 이후 현대소설이 내면을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내면이 드러나지 않는 소설은 '소설이 아니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현대소설은 고전소설과는 완연히 달라졌다. 이문열 삼국지가 <삼국지연의> 현대식으로 재구성한 평역 삼국지인데, 윗 글의 주장처럼 그렇게 고대소설인 삼국지연의의 의도를 왜곡하지 않으려면, 정말 옛날 식으로 원전을 해석하고, <논어>나 <맹자> 같은 고전이 흔히 하는 방식대로 주석을 달아야 하는 것인가? 현대소설임을 감안한다면 내면 묘사가 있는 게 전혀 문제될 필요가 없다.

삼국지연의 자체가 사서를 기반으로 한 소설이니만큼 소설을 표방하는 한 연의 원전에 지나치게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삼국지연의 원전의 고수를 걸고 넘어진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현대의 삼국지 관련 매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윗 글에서는 현대 소설과 고전 소설의 차이를 다소 어설프게 짚어 두었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비판의 여지가 많다. 이문열 삼국지 말고도 황석영이나 박종화 등등 거의 모든 삼국지 관련 독서물들은 내면 심리 묘사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고전 시대와 현대 시대의 소설 문법이 다른데, 어떻게 심리 묘사가 드러나지 않을 수 있나? 이 문제는 이문열 삼국지를 포함한 현대의 모든 삼국지 관련 독서물들이 다 안고 있다. 이문열 삼국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사실 고대소설을 평역하는 과정에서 현대적으로 구성하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므로, '심리묘사를 넣었다' 부분 비판하기 힘들다. 본인이 자의적으로 해석해 심리묘사를 넣어서 문제인 것이지.

4. 만화판

파일:external/image.aladin.co.kr/photo_759069163629037.jpg

이문열 판을 기초로 만화가 이희재가 그린 아동용 만화. 펜 선까지는 이희재 본인이 손수 맡았고, 채색은 다른 어시스턴트들이 담당했다. 하후무/기타 창작물 문서에 있는 육도삼략 드립도 이 이희재 만화판에서 나온 것이다.

기본적으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만든 책이라 만화체에 가까운 화풍이지만, 주요 전투씬이나[29] 인물들의 사망 장면은 그야말로 극화체 뺨치는 진중한 화력을 자랑한다. 묘사가 지극히 현실적이라 유혈 묘사가 전혀 생략되지 않으며, 참수되는 장면은 (목의 단면이 빨갛게 칠해지는 데에만 그치지만) 피투성이인 잘린 머리가 그대로 나오며, 하후돈이 눈에 화살을 맞자 뽑는 장면도 그대로 나온다.[30] 특히 8권 이후, 유비 삼형제가 죽음을 앞둔 무렵에는 작화가 점점 발전해서 실사체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특징으로, 전권을 본 사람들은 눈치챘겠지만 장수해서 오래 출연하는 인물들의 노화가 아주 꼼꼼히 묘사되어 있다. 처음에는 새파랗게 젊던 인물들이 후반으로 갈수록 조금씩 수염이 자라고, 주름이 지고, 머리가 허옇게 세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죽기 직전까지 가면 얼굴은 반쪽에 낯빛은 창백해지며 수염과 머리가 완전히 세 버린 모습이 '아, 이제 이 사람은 죽겠구나'라는 걸 쉽게 눈치채게 만든다.

의상 면에서는 하후무의 관복이라든가, 강유와 제갈량의 복장처럼 84부작 삼국지의 의상을 그대로 차용한 듯한 장면도 제법 있다. 특이점이라면 중반부 이후로 거의 공명이라고만 불리는 제갈량이나 조운이란 이름은 딱 한 번 나오는 조자룡, 맹덕신서가 언급되는 조조 정도를 제외하면 등장인물들의 자를 들을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삼국지 판본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제갈량 사후의 일은 에필로그 챕터를 통해 하나로 압축되어 대강 지나간다. 위군이 성도로 쳐들어오기 직전까지 가자 더는 버틸 수 없게 된 유선이 항복을 결정하고, 5남 유심은 이에 반대하다가 쫓겨나 슬피 울며 일가족을 모두 죽이고 자기도 유비의 사당에서 자결하는 부분만이 세세히 그려졌다. 그래도 석양이 지는 배경 위에 지금까지의 등장인물들이[31] 희미하게 그려진 장면은 여운이 크게 남는다는 평을 받는다.

글 작가인 이문열이 보수주의자로, 그림 작가인 이희재는 진보주의자로 인식되기 때문에 두 사람의 콜라보레이션 소식을 접한 일각에서는 의외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내용 면에서는 어린이 대상 만화답게 정치색은 거의 들어가지 않았고 분량 상 삭제된 부분 외에는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 묘사된 인물상과 줄거리를 거의 변형 없이 만화화했다. 이문열 평역에 등장한 목차의 이름이 그대로 만화의 한 챕터의 이름으로 쓰였고, 대신 어린이들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몇몇 호칭을 이름으로 바꿔놓은(익덕 → 장비, 운장 → 관우, 오주 → 손권 etc.) 정도의 수정만이 가해졌다.

여담이지만 만화라서 그런지 개그씬이 많다.
  • 2권에서 유표군이 손견에게 화살을 듬뿍 날려대는데 그 중 하나가 손견군 졸병의 항문에 맞아 "으악 내 똥꼬!"라며 비명을 지른다. 다음날 손견군은 유표군이 날린 화살을 주워다가 다시 날려주는데, 유표군 병사 한 명이 "어제 내가 날린 화살이 오늘 내 머리에 꽂힐 줄이야!"라고 한다.

    원소가 기주를 차지하는 장면에서는 한복이 기겁하며 공손찬이 날 잡아먹는다고 SOS를 외치고, 다음 장면에서 원소가 한복을 걷어차며 기주를 먹어버린다. 대상이 달랐지만 결국 잡아먹혔다

    그 외에도 이각&곽사가 여포한테 거하게 깨진 뒤 "이게 내 목이 아니야..."라고 한다던가, 손견군과 유표군이 붙을 때 황조가 "강동의 도둑놈들이 여기까지 오느라 간이 땡땡하게 부었겠구나!"라고 하자 손견군이 "유표 목 잘라서 옥새 받침대로 쓰자!"라고 한다.
  • 3권의 손책 VS 태사자 전투에서는 서로 엎치락뒤치락 싸우다가 둘 다 지친 상태에서 태사자가 "새끼 호랑이쯤은 맨주먹으로도 충분하다!"라는 식으로 주먹질을 날리자 손책이 "흥! 갓난아기 주먹이로군!"이라고 맞받아치고,[32] 유비가 손부인과의 혼담에서 고구려산 호피(!)[33]와 꿀떡, 시베리아 직수입 아이스케키(...)를 교국로에게 선물로 주는 장면도 있다.
  • 4권에서 장비가 유대를 잡아들인 장면에서는 유대가 도망친 곳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장비가 유대를 직접 잡고는 포로가 되어 꽁꽁 묶인 유대를 바치며 유비에게 "펄떡펄떡 산 채로 잡아왔소!"라고 말한다.[34]
  • 6권 중반부에 유비의 명령으로 조운이 계양을 치기 위해 오자 계양태수 조범이 "그냥 항복할까?"라고 하지만 진응은 한 번 붙어보자고 나갔다가 그대로 조운의 창에 나가떨어진다. 이후 조범이 항복하러 나오자 한 장수가 패배한 진응에게 대가리 박으라고 하고 진응은 진짜로 대가리를 박는다. 또 영릉의 장수 형도영은 "씨앙놈의 씨애키들!"이라는 쌍욕을 내뱉고는 몇컷 뒤 한 합에 나가 떨어진다.
  • 7권에서 마초와 조조가 싸울 때 마초의 부하 장수가 조조에게 " 환관 집안의 후레자식 놈아!"라고 패드립을 시전하고 이를 들은 조조가 발끈하자 조조의 부하 장수인 이통이 "이놈! 승상께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다니!"라 하면서 달려나오다가 한 컷 만에 마초의 창에 찔려서 사망하고[35] 서량군 병사가 조조군 병사를 창으로 고환을 찌르면서 "이 졸개들, 알맹이를 따서 조조 할애비처럼 만들어 주마!"라고 말하자 창을 맞은 병사는 " 으악 안 돼!!"라고 외친다.
  • 서량군이 조조를 잡으려고 할 때 마초가 "조조를 잡으면 열 계급 특진이다!"라고 외치자 부하들이 "우와! 열 계급 특진이면...장군!?"이라고 소리지르며 조조를 향해 끝없이 달려드는데, 이때 "붉은 전포 입은 놈이 조조다!"라고 외치자 조조가 전포를 벗고, 이번에는 "수염 긴 놈이 조조다!"라고 하자 조조가 수염을 잘랐지만 서량군이 " 수염 짧은 놈이 조조다!"라고 하니까 조조가 "질긴 놈들!"이라고 하면서 옆의 깃발을 찢고는 천조각으로 입을 가린다. 입 가린 놈이 조조다! 이건 연의에서도 나오는 장면이지만 그걸 골자 그대로 옮기면서 개그씬으로 바꾼 것이 포인트. 이후 몇 컷 동안 조조의 수염은 멋들어지던 이전과 달리 장비와 비슷하게 짧고 엉망진창인 텁석부리 수염으로 나온다.
  • 7권에서 서천 정벌을 나선 장비가 엄안이 성에서 나오지 않고 굳게 지키기만 하자 성질머리가 돋아 "욕 잘하는 병사들 집합! 너희는 지금부터 엄안이 성 밖으로 기어나오도록 욕을 퍼부어라!"라고 명령해 병사들이 성 앞에서 고래고래 "나이 헛먹었구나 너 열두 살이지?, 두더지 고기 먹고 햇볕도 못 보는 노인네야!"라고 욕하다가 밤이 돼서 입이 퉁퉁 붓고 목이 쉬는 바람에 켁켁대는 장면은 시리즈 최고의 개그씬으로 손꼽힌다.[36] 이 욕배틀은 8권인 한중 공방전 때도 이어져서, 장합과 장비의 부대가 "장합, 이 머저리야! 조조 뒤꿈치에 붙어 있는 파리만도 못한 놈아!" / "야, 이 털보야! 안주하게 니 목이나 보내라!"하며 50여 일 동안 욕지거리를 주고받는다.[37] 그 외에도, 문빙이 사투리를 구사하는 장면 역시 소소한 웃음을 자아낸다. 조조에게 적벽대전 이후 귀환을 알리는 장면이라 작중 분위기는 사뭇 진지하지만.[38]
  • 9권에서 유비가 죽고 촉과 오가 동맹을 맺기 위해 제갈량이 등지를 오나라로 보내는 장면에서는 등지가 손권에게 일갈을 하고 옷통을 벗은 뒤 기름솥으로 다이빙(?)을 시전하자[39][40] 손권이 "스톱!!!"예?이라고 소리지르며 등지의 다리를 붙잡아서 넘어트린다. 당연히 돌바닥에 떨어진 등지의 얼굴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손권은 땀을 흘리며 웃으면서 대충 사과한다.
  • 진지한 분위기가 극에 달하는 10권에서도 개그씬이 나오는데, 사공명주생중달에서 사마의가 목각 공명을 보고 부랴부랴 후퇴한 뒤, 숨을 몰아쉬면서 "내 목이 잘 붙어있느냐?"라고 묻자[41] 부하가 "예, 아주 잘 붙어 있습니다요."라고 답해준다. 촉의 병사 하나가 이걸 보고 "사마의는 간덩이가 좁쌀만한 놈이야."라고 디스한다.
  • 가장 압권은 "군사들의 멀미를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소?"라는 조조의 질문에 "멀미약을 사먹이면 됩죠!"라고 말하고 태연히 연환계 설파로 넘어가는 방통... 그리고 그의 청산유수를 듣던 조조는 장간에게 "네가 홈런을 쳤다!"라고 감탄한다사실은 피홈런이었다.

한편 이 작품에서는 조조가 장비에게 쪼는 장면이 유독 많다.
  • 4권에서는 안량의 목을 한방에 베어돌아오는 관우에게 장비는 이보다 더 뛰어나다는 소릴 듣고 "뭣이? 얘들아! 앞으로 싸움터에서 장비를 보면 무조건 토껴라!"라고 말하는가 하면,[42]
  • 5권에서는 조운을 쫓아 장판교까지 닿은 조조군앞에 장비가 혼자서 인상쓰고 서있자, 그 위엄에 감탄하다가[43] 장비의 호통 한 번에 소름이 바짝서며 "작전상 후퇴!!"를 외친다.[44] 이때 허둥지둥 내빼느라 병사들이 말에서 떨어지거나 넘어져서 말에 깔리는가하면 서로 밀지말라며 우왕좌왕하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 6권에서는 적벽대전에서 화공에 당하고 퇴각하던 중 장비군을 만나자 "나 장비 싫어!!!"라고 말하며 뒤도 안 보고 냅다 줄행랑쳤다.[45] 제갈량의 꾐에 빠진 주유가 약속과 달리 주전론을 설파하자 경악하는 문신들 속에서 노숙이 몰래 미소를 지으며 브이를 날리는 장면도 있다.

내용이 조금 축소된 부분이 많으며, 그 절정은 9권에 등장한 맹획의 칠종칠금. 말 그대로 한 컷에 한 번씩 잡힌다(...).[46] 그나마 타사대왕과 올돌골을 상대하는 부분은 조금 축소하긴 했어도 상세하게 나오지만 목록대왕을 나무 맹수로 물리치는 것도 4컷으로 끝.

책 뒤쪽 지도에서 유주에서 요동 반도에다가 한사군(정확히는 한사군의 낙랑군 대방군)까지 잘라버린 고증 오류를 저질렀다. 낙랑과 대방이야 어쩔지 몰라도 요동 반도를 잘라버린 건 명확한 오류다.[47][48] 정확히는 만화가의 고증 오류라기 보다는 당시에 범람하던 과도한 민족주의랑 사이비 역사학의 영향이나 이덕일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을 곧이곧대로 믿던 그 때의 역사 관련 책에는 흔하게 나오던 오류였다.

총평하자면 여러 한계가 있으나 기본적인 재미는 보장했기에 삼국지 입문 만화로는 나쁘지 않은 도서이다. 각 권 말미에 진영별 장수 소개나 삼국지 인간학 등의 부록을 통해 내용을 보충하기도 했다.

한때 절판되었다가 이희재 삼국지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구판에 비해 추가된 내용이 많고,[49] 구판을 그대로 사용한 부분도 대사가 일부 변경되는 등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그래도 아동용이라 어느 정도 수위에 신경을 쓴 구판에 비해 혈흔 묘사가 더 자세해지거나 등장인물들이 찰진 욕을 하는 등 청소년용이라 봐도 될 정도로 수위가 상당히 올라갔다. 그 외에도 주유의 수염이 그려지거나 정사대로 손권의 눈을 파란색으로 변경하는 등[50], 작화도 많이 바뀌었다. 2021년 2분기부터 2022년 4분기까지 카카오페이지에서 연재되어 인터넷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4.1. 제목

  • 1권: 도원에 피는 의 - 삼국지의 시작인 도원결의. 표지 모델은 유관장 삼형제.
  • 2권: 구름처럼 이는 영웅 - 표지 모델은 조조.
  • 3권: 헝클어진 천하 - 표지 모델은 손책과 주유 등 오나라의 핵심 인물들.
  • 4권: 칼 한 자루 말 한 필로 천리를 닫다 - 관우가 조조의 다섯 영역을 지나며 여섯 장수를 베었던 오관돌파를 나타낸 제목. 조조의 북방 평정도 묘사되었다. 표지 모델은 관우와 적토마.
  • 5권: 세 번 천하를 돌아봄이여 - 삼고초려를 나타내는 제목. 표지 모델은 제갈량.
  • 6권: 불타는 적벽 - 삼국지 최고의 클라이맥스 적벽대전을 다룬다. 불타는 산을 배경으로 표지의 절반을 차지하며 서 있는 주유가 압권.
  • 7권: 가자 서촉으로 - 유비가 서천 땅을 정복하며 제갈량이 말했던 완벽한 천하삼분지계가 완성된다. 표지 모델은 장비.
  • 8권: 솥발처럼 갈라선 천하 - 관우와 조조가 죽고, 조조의 아들 조비가 후한을 멸망시킨다. 표지 모델은 관우.
  • 9권: 출사표, 드높아라 충신의 매운 얼이여 - 제갈량의 그 유명한 출사표가 올려지며, 기나긴 북벌 여정이 시작된다. 표지 모델은 유비.
  • 10권: 오장원에 지는 별 - 표지 모델은 제갈량과 유비. 5권의 젊었을 적 모습과 나이 든 모습의 대비가 강하다.

5. 관련 문서



[1] 이문열은 연재하는 동안 쓴 글이 매일 지면에 올라야 한다는 중압감에 4년 동안 술도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라고 연재 종료후 대담에서 밝혔다. [2] 1800만 부가 팔렸다고 한다. 출처 지금은 2000만 부 넘었다고. 1990년대 서울대 수석 합격생 몇 명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공부하다가 지루하면 삼국지를 읽으며 머리를 식혔다', '삼국지는 ○번 읽었다' 등으로 답한 것이 '서울대 수석, 삼국지 읽고 논술고사 합격'으로 와전되었다. [3] 원문의 정직한 번역을 추구하는 21세기의 감수성과는 달리 이문열 삼국지의 초판이 나온 1988년에는 요시카와 에이지 스타일의 개작에 대한 반감이 덜했다. [4] 비슷한 게 아니라 완전히 똑같다. <황제를 위하여>라는 작품은 고전 소설 양식을 패러디한 것으로, 삼국지연의라는 고전 소설을 현대에 맞춰 평역한 것과 완전히 똑같을 수밖에 없다. [5] 이문열 삼국지에서 비판받는 부분은 상당수가 이문열이 평가한다고 중간에 끼워넣은 사견부분이다. [6] 당시 정원기 교수는 황석영 삼국지가 "정역이나 개역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며 "원작에 충실한 표준판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비판하였다. 해당 토론은 마지막에 황석영이 자신은 전문가가 아니니 시비 걸지 말리는 요지의 발언을 남기며 감정적으로 나와 논쟁이 중지되었다.( #1 #2 #3 #4) 정 교수의 입장에서는 정역이라고 큰 소리치는 황석영보다 번안작을 낸 이문열이 훨씬 낫게 보였을 것이다. [7] 진짜 그럴지는 의문이긴 하지만 6권쯤에 마등과 황규를 팔아먹은 묘택을 처형하긴 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상사-부하가 아닌 아예 혈연지간임에도 고작해봐야 조조가 "너는 매형을 팔아먹은 놈이다. 너같은 구더기를 어디에 쓰겠느냐" 라고 한 게 전부 [8] 가령 유비는 여포에 비해서 여러 곳을 전전하며 (명목상) 상관이 바뀌긴 했지만 욕은 여포가 더 많이 먹는다. 적어도 유비는 조조, 유장을 제외하면 상대방에게 큰 해를 끼치고 나간 건 아니었지만 여포는 정원과 동탁의 사례를 보듯 아예 상관을 죽이고 배반하기까지 했다. 조조에 대한 배신도 명목상 최고자인 헌제의 지시를 따른 일이니 까기엔 뭣하다. 실제 친 조조적인 역사가들도 유비의 배신으로 불리는 일 가운데 유장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크게 비판하지 않는다. 조조 목 치는거 성공했으면 오히려 충성스러운 배신으로 추앙받았겠지. 애초에 조조가 유비를 객장으로 받아들이고 대우한 것도 자기의 야심에 이용하려는 수단이었을 뿐으로 연의나 정사나 조조의 모사들 내부에서 갓 망명한 유비를 두고 '유비를 당장 죽이십시오.'라고 참소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은 데다가 조조 본인도 유비의 인재들에게 따로 관직을 줘가며 빼먹으려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배신은 오히려 조조가 했다. [9] 본질적으로 삼국지연의와 이를 바탕으로 한 창작물은 대부분 '유비(를 포함한 그의 세력)=주인공 / 조조(를 포함한 그의 세력)=악역'의 구도이다. 때문에 주인공을 조조로 설정하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10] 이는 실제 조조의 행적을 보면 타당성이 있는 캐릭터 설정이기도 하다. 현대에 들어선 서주 대학살을 필두로 한 각종 악행들이 재발견되면서 다시금 냉혈한 주제에 다혈질인 인성파탄자, 중2병 걸린 경박한 잼민이 같은 놈, 괜히 악당 취급 받은 게 아니다 등의 평가가 우세해졌다. [11] 물론 연의 그 자체에서도 조조의 과오가 생략된 게 있긴 하다. 대표적으로 서주 대학살. 그러나 어디까지나 두 차례에 걸친 학살을 묘사하지 않았지 조조가 서주에 쳐들어가는 장면을 묘사할 때 명백하게 "조조는 처음부터 서주 백성들을 몰살시킬 의도를 가졌다."라고 나관중이 언급했다. 마냥 생략된 건 아니라는 의미. [12] 만화판에선 서주 백성들을 닥치는대로 죽이면서 쳐들어오고 있다는 보고로 짤막하게 언급된다. [13] 사실 조운(조자룡)은 익주 평정 후 주인이 없는 땅을 유비가 부하들에게 포상으로 나눠주려고 하자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줘 안심하고 생업에 다시 종사할 수 있게 하자고 직언한 적이 있으며, 유비가 이릉대전을 하러 갈 때 제갈량과 더불어 반대하였다.(그래도 유비는 조운에게 후방을 감독시키고, 제갈량은 촉의 관리를 계속 맡겼다.) 연의에는 안 나왔지만 거병동지이기도 한 간옹은 유비가 금주법을 시행할 때 돌려서 반대하여 유비가 금주법을 철회하게 만드는 등 이들처럼 충성심은 분명하지만 할 말이 있을 때는 망설이지 않고 하는 신하들도 엄연히 존재했다. [14] 여러가지로 무리한 논리를 끌어다 지나치게 보수 정치 세력을 옹호하는지라 중도적 시각의 독자들에게도 거부감을 준 면이 있었다. [15] 일간지의 연재소설이었다. [16] 그래도 일단 제갈량 사후 벌어진 사건들을 충실히 넣고는 있다. 이전에 비해 매우 축약해서 서술한 게 문제지. 제갈량 사후는 아예 "그리고 50년 후 사마염이 삼국을 통일했습니다" 한 마디로 퉁쳐버리는 작품도 많은걸 생각하면 나름 충실한 편이긴 하다. [17] 이 두 장면은 모두 이희재의 만화 판과 수정 이후 바르게 고쳐진다. [18] 이런 무성의함은 평역 수호지 10권에 수호후전 줄거리를 요약하면서도 반복된다. [19] 연의 작중에도 나오는 손자병법이 언제 나온 병서인지 알아보자. [20] 사실 현대에 들어와서 "유비는 여러 군웅들의 휘하에 지냈던 적이 많으니 여포보다도 더 심하게 배신을 밥먹듯이 했다." 이런 식으로 유비를 까는 언론은 자주 보인다. 이미 연의 원작에서 채모도 비슷한 발언이 있기도 했고. [21]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문열의 해석이 "무리한 비교라고 할 수 있다"기 보다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질 여지가 있다. 실제로 유비는 생각보다 다른 주군의 객장 신세를 자주 진 편이다. 초기에 공손찬에게 의탁했었고, 여포에게 서주성을 넘기고 자신은 소패로 간 적이 있으며, 여포와의 다툼에서 지자 조조에게 가서 신하가 되었다. 조조 품을 떠나 차주를 죽이고 기주의 원소에게 갔으며, 원소가 유표에게 보내자 유표에게 의탁하여 신야와 강하 수비를 맡았었다. 의탁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유장을 포함하지 않더라도 다섯 명의 주군을 모셨다가 버렸다고 오해받기 좋은 셈인데, 현대인들에게 주인을 다섯 번 바꾼 정치인이라고 하면 누구라도 철새 정치인을 떠올릴 것이다. 신하와 객장은 엄연히 입지 자체가 다르지만, 어쨌든 유비가 여러 군주를 거치며 신세를 자주 졌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이고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유비는 간웅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조조와 자신을 차별화시키기 위해 일평생을 군자로서 행세하였고 자신의 이상인 한실 부흥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왔다. 한나라 경제의 후손이라고 했지만 한나라 경제만큼 후사가 많은 황제도 드물고(아들만 120명이었다) 어찌보면 유비는 황제와는 팔촌도 훨씬 넘는 그냥 족보상의 아저씨일 뿐인데, 그 '족보상의 아저씨'임을 지키고 실현하기 위해 자기 평생과 촉나라를 거의 다 바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정리하자면 그가 진짜 군자인지 사이비인지는 알 수 없거나 애매하다. 그러나 유비는 객장 신세라도 필요할 때는 주저없이 받아들였고 그런데도 백성들이나 자기를 따르는 신하들에게 최선을 다한, 현실적인 이상주의자로 볼 수 있다. 컨셉질도 평생을 하면 인정해 줘야지 이런 의견은 이중톈이나 최근의 다른 소설 매체에서 여러 번 등장한 바 있다. [22] 다만 앞 서술에서 유비의 행보에 대해 서술한 부분은 재고할 필요가 있는데 신세를 진 것과는 별개로 처음부터 유비가 신하로 들어가 주인으로 섬겼던 군주는 없다. 기반이 없어서 이리저리 방랑했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세력을 가진 한 명의 군벌이었고 다른 군벌들에게 아랫사람 취급받더라도 어디까지나 객장이었지 그 사람들을 신하로서 보필한 게 아니다. 이와 비슷했던 게 이통과 장패, 이들은 결국 조조의 세력권으로 들어가지만 유비는 이를 거부했던 것이다. 사실 중요한 건 유비가 세력에서 이탈할 만한 명분의 여부인데 공손찬의 경우 명망높던 황족 유우를 살해해서 스스로 명분을 버렸고(유비 뿐 아니라 조운도 이 시점에서 공손찬을 버렸다. 연의에서는 크게 다루지 않는 사건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파장을 갖고 온 사건이다.) 여포는 받아줬더니 배신하고 유비의 뒤통수를 쳤다. 조조의 경우 헌제의 밀명도 밀명이나 조조가 유비의 최측근인 장비를 인척으로 포섭하거나 유비의 지지자인 미축에게 따로 벼슬을 줘서 자기 라인으로 삼으려 하는 등 오히려 배신은 조조가 먼저 시도한데다 조조 세력 내부에서 유비를 죽이자는 참언이 꾸준히 나왔기에 유비 역시 이런 분위기를 파악하고 더 늦기 전에 도망쳐 서주에서 다시 세력을 갖추려다가 조조가 기민하게 공격을 해버려 의거에 실패하는 바람에 원소에게 간 것이다. 또한 원소는 유비를 충분히 도울 수 있었으며, 실제로 지원군을 보내주기는 했으나 우금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독자적으로 정리할 수준에 불과한 미미한 지원이라 유비에게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것도 아니니 사실상 생색내기였을 뿐으로 결국 유비가 박살나 도망쳐오자 자기의 프로파간다에 이용하였다. 만약 유비가 서주에서 죽었다면 순교자로 포장해 자기가 유리하게 이용해먹었을 인물이 원소다. 이후 유표에게 간 것도 배신은 아니며(유표와 원소는 동맹이다.) 오히려 유비가 명분을 바치고 팽당한 것에 가깝다. 유표도 먼저 유비를 견제했음에도 끝까지 배신하지 않았고 유표가 죽은 뒤에야 독립적으로 행동했다. 유비가 유일하게 명분에서 처지는 건 촉의 유장인데 이것도 사실 유장의 부하들이 그 땅을 유비에게 먼저 갖다바친 것이므로 명분이 없다고 할 수 만은 없다. 즉, 실제로는 유비가 배신했다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23] 원술과의 동맹이 이래저래 타당성에서 문제가 제기되긴 하지만 그럴거면 아예 처음부터 승낙하지 않는게 옳았다. 여포는 원술에게서 단물만 빨아먹고 약속은 하나도 지키지 않아서 문제. 원술의 꿀물은 여포가 전부 빨아먹었나 보다 [24] 훗날 장양이 여포를 구하려 하다가 부하 양추한테 살해당한 걸 생각하면 장양은 여포에 대해 나쁜 마음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5] 당시가 191~192년으로 유비의 나이가 30이 넘었다. [26] 예를 들면 위에 언급된 화용도 사건, 정사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27] 물론 현대에 와서는 잘 알려진 부분으로 제갈량이 뛰어난 인물은 맞으며 정사에도 언급되어 있다. 소설처럼 신출귀몰한 전략을 짜는 사람은 아니었어도 빠른 시간 내에 나라의 기반을 착실하게 다진 행정가와 정치가로서는 뛰어나다는 것이 차이점. [28] 쪼다가 아니다. 원문에 [29] 적벽 대전의 하이라이트인 조조의 수군 진채가 불타는 장면에서는 한 페이지를 통째로 할애하여 그야말로 불바다가 된 진영의 모습을 배경으로 망연자실한 조조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릉 대전에서도 유비의 진채가 타는 장면 또한 같은 방식으로 연출된다. [30] 그 외에도 처형 장면이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된 캐릭터는 여포. 다른 만화에서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으로 마무리짓는 경우가 많지만 여기서는 정사대로 교수형을 당하는 것으로 그려졌는데, 교수대에 매달린 채로 질질 짜면서 애걸복걸하는 모습이 자세히 묘사된다. 여포가 "이게 아니다!! 승상(조조)께서는 내가 꼭 필요하실 것이다!!!"라고 울부짖자 집행인이 "승상께선 이미 자리를 비우셨소."라고 말하며 발받침을 치우는 바람에 공중에 매달린 여포의 시체로 한 페이지를 채워넣은 마지막 장면이 압권. [31] 유관장 삼형제, 조조, 하후돈, 장료, 원소, 유선, 조자룡, 황충, 마초, 방통, 제갈량, 순욱, 곽가, 여포, 손권, 손책, 주유가 등장했다. [32] 이 대화는 원전에도 존재한다. [33]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대치하던 시대도 같은 시기였기 때문에, 고구려 호피를 예물로 보내줬을 가능성은 실제로 있다. 하지만 유비가 장악한 형주와 손권이 장악한 양주 일대는 한반도와는 육로로 단절된 지역이고 오나라도 딱 1번 고구려와 교류하려다 실패한 게 전부일 정도로 한반도와 교류가 너무 없었다. 물론 그랬기에 진짜로 바쳤다면 엄청난 고가의 사치품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34] 유비는 장비가 적장을 죽일까봐 안 내보내려고 했는데 그러자 장비는 산 채로 잡아오면 되는거 아니냐고 해서 출전했다. [35] 실제로 조조의 집안은 천한 환관 집안이 맞다. [36] 이래도 엄안이 나오지 않자 장비가 열받아서 나무 기둥이 움푹 파일 정도로 박치기를 하는데, 다음 장면에서 기둥이 찌그러진 채 이마에 혹이 난 장비와 눈물을 흘리는 개그신이 나온다. [37] 여담으로 실제로 이렇게 성을 굳게 지키는 장군을 향해 병사들이 욕설을 퍼부은 사례가 있는데 형양 · 성고 전역 당시 성고를 지키던 조구를 끌어내기 위해서 유방군 병사들이 엄청난 욕설을 날려댔다. 결국 어그로가 끌린 조구가 밖으로 나왔고 조구는 그대로 대패하여 자살하고 성고는 함락된다. [38] 문빙은 적벽대전 당시 황개가 화공선을 이끌고 돌격할 때 이를 막다가 화살에 맞는 부상을 입었는데, 이후 화공선이 조조의 함선들에 충돌하는 장면으로 곧장 넘어가 여기서 문빙이 죽었다고 오해하는 독자들에게 사실 그가 죽지 않았다는 나름의 반전을 선사하는 장면이다. 참고로 문빙은 당시 화살에 맞고 물에 빠졌다가 헤엄쳐 올라와 겨우 생존했으며, 정사의 기록을 보면 조비의 남정 시기에도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39] 실제로 연의에서 등장한 장면으로, 등지가 짐짓 거만하게 들어오는 장면도 나온다. [40] 이때 등지는 손권에게 "큰 나라에서 온 사신은 작은 나라의 왕에게 절하지 않는 법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촉한은 황제국이고 오나라는 명목상 위에 종속된 왕국이니 작은 나라라고 한 것. 게다가 촉한이 한나라의 계승국을 자처한 걸 감안하면 역적 조비의 괴뢰정권이라고 디스한 셈. [41] 이건 연의 원전에도 나오는 대사다. [42] 개그씬으로 묘사돼서 그렇지, 관우와 조조의 말은 정사나 연의에서 허언은 아니라 장판파 전투에서 결국 관우의 말은 거짓이 아님이 드러났다. 묘사가 연의에서 뻥튀기된 감이 있지만, 정사에서도 다리를 끊어놓은 상태긴 했지만 (이마저도 끊긴 다리 뒤가 아니라 다리 앞에서 그랬다는 해석이 더 많다. 그러니까 아예 돌아갈 길도 안 만들어놓고 배수진을 친 것.) 장비 혼자서 조조가 이끄는 5천 명의 병사들 앞에서 기백을 드러내 보인 바 있다. 시기가 어떨지는 몰라도 조조가 "장비 저 색휘는 인간흉기임 ㅎㄷㄷ"이라는 식으로 생각했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43] 조조가 "저 인상 굵게 쓴 녀석이 누구냐?" 라고 하자 부하가 "장비인데요?"라고 하니까 조조가 관우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 "저놈이 장비냐?"라고 말한다. 조조군에서 상당히 능력 좋은 장합을 패퇴시켜 조홍이 "아오 저 색휘 목잘라버려!" 라고 길길이 날뛰게 만들었다. [44] 나중에 장비가 다리를 끊은 실수를 저지른 것을 알아채자 유비군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유비군을 다시 추격한다. 유비는 백만대군이 있으니 다리 한두 개쯤 만드는 건 일도 아니라고 한다. [45] 당시 사정을 보면 그럴 만 했다. 화공에 당하고 손권군에게 계속 다구리 당하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데 관우가 "적장의 목을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듯 합니다." 라고 말하는 데다가 이미 장판파에서 대차게 겁먹게 만든 장비가 눈앞에 있으니 겁이 날 만도 하다. 특히 연의에서는 조조가 개인적으로 관우를 존경하며 자신의 부하로 삼고 싶기까지 했던 장수인 만큼(정사에서는 일단 후자는 확실하다.) 그의 충고를 절대 흘려듣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장비가 장판파에서 조조군을 향해 한판 붙어보자고 한 것은 정사에도 나오는 기록이다. 다만 정사에서는 단지 그것만 나와서 도대체 어떻게 조조군을 물리친 것인지 나오지 않아서 연의에서는 장비가 진작에 먼지가 크게 일게 하여 복병이 있는 것처럼 위장했다는 창작내용을 넣었고 이 만화에서도 장비가 부하들을 시켜 먼지가 일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청소하는 거냐고 물었다가 장비에게 꿀밤맞는 부하는 덤 [46] 사실 도원종언 파트를 너무 자세히 묘사하는 바람에 칠종칠금 분량이 반대급부로 축소된 것이다. [47] 그나마 3권에서 공손강이 나올 때는 세력적인 면모로는 나오지 않았지만 공손강을 표시하긴 했다. 또한 만화 끝부분에 나오는 부록에서도 요동 공손 정권에 대하여 소개하는 내용이 한장 분량의 글로 나오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뿐 그 이후로는 나오지 않았다. [48] 물론 이 당시에 요동 반도랑 한사군은 위나라가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는 지역이었다. 요동 반도는 공손씨 세력이 장악해 있었고 이 세력을 완전 제압하는건 조방 시기의 일인데 제갈량 사후를 한 파트로 압축한 특성상 반영할만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보다 더 멀리 있는 한사군도 마찬가지로 요동 공손씨 세력이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즉 엄밀히 말하면 요동과 한사군 지역이 후한-위나라 땅은 맞지만. 영향력으로 치면 이 지역은 거진 반독립 상태였다. 거기다가 그나마 태수직만 나눠먹고 영향력이 당대로 끝난 교주의 사섭과는 달리 50년 가까이 세습을 이어나가며 영향력을 유지했다. [49] 삼국지 이전의 중국 고대사와 유비의 어린 시절 등. [50] 몽땅했던 구판과 달리 코도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