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 관련 문서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수여 공신 | 선무공신 |
인물 관련 | 원균옹호론 · 원흉 | |
관련 전투 | 1차 출정(기문포 해전) · 2차 출정(가덕도 해전) · 3·4차 출정(칠천량 해전) | |
가족관계 | 동생 원연 · 동생 원전 · 아들 원사웅 |
적절한 예시.[1] |
[clearfix]
1. 개요
元均擁護論. 원균이 명장이거나 맹장이었다며 옹호하는 억지 주장.2. 설명
원균은 원래부터 능력이 부족하고 성질이 포악해 그다지 평가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 사실 당대에도 정치논리에 의해 원균을 고평가하던 여론이 일부 있었으나, 칠천량 해전의 대패 이후 그마저도 전부 사라지면서 희대의 졸장임이 다시 한 번 증명되었다.그러나 현대에 들어 군사정권이 이순신 장군을 성역화하기 시작하자, 이에 대한 반발심으로 오히려 원균을 옹호하는 주장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대중들이 이를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은 믿을 만한 논리로 받아들이면서, 이 황당한 헛소리가 힘을 얻게 된다.
박정희는 대통령 집권 후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같은 집단주의적 이념을 중시하며 상무정신과 화랑도 #, 의병과 국난극복, 삼별초의 항쟁, 충무공 이순신과 같은 애국선열과 호국영웅들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으며, 박정희 정권의 '호국 영웅 만들기'. 민족중흥의 기치아래 이순신 장군을 ‘국민멘토’로 삼고 멸사봉공, 선공후사, 살신성인 등 이순신 정신을 ‘국가지도 이념’으로 정하였다. 박정희는 1962년 3월 1일 아산 현충사 일대의 성역화를 지시하여, 1967년에 현충사의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완료되었으며, 1965년 남해 충렬사 경내 이순신 가묘 옆에 기념식수를 했고, 노량해전 이순신 전사지인 이락사 경내에 친필현판을 걸었다. 1975년에는 통영 한산도 이순신 진영의 제승당 정화사업을 실시하였고, 특히 1968년 4월 27일 서울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을 세웠다. #1 #2
이러한 이순신 성역화에 대해서는, 박정희 개인의 존경심이나, 군사정권의 정당화, 이순신의 대리 우상화로 박정희 자신과의 동일시하려는 목적 등을 원인이라 보는데, 이런 박정희정권의 프로파간다에 대한 반발에서 이순신이 지나치게 영웅화되었고, 원균은 폄훼당했다는 수정주의적 시각이 등장한다. 유신정권 말기인 1978년에 이정일이[2] 고려대 석사학위논문 '임란시 원균의 공과에 관한 일고'를 통해 원균의 복권을 최초로 시도했다. # 군사정권에 대한 반감에서 일부 소장파 학자들이, 박정희가 이순신을 대대적으로 띄운다는 이유만으로, 이순신에 대항하여 원균을 옹호하게 된 것이다. # 386운동권 출신을 많이 기용한 노무현 정부때는 심지어 정부에서 운영하는 정책뉴스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제3공화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통치 기반 강화를 위한 일환으로 많은 부분을 미화하고 과장시켰다' 라며 원균옹호론을 주장하는 글을 등재시키기도 하였다. # 물론 운동권들에 의해 원균옹호론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모든 운동권들이 원균을 옹호한 것은 아니며, 현재 원균 옹호를 하는 사람중 하나인 원유철은 원균의 백부인 원수량의 후손으로 원균과 같은 원주 원씨라서 옹호하는 경우이다. 원균의 직계후손이라고 인터넷에 알려져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직계냐 방계냐의 문제를 떠나 만약 그가 김씨나 이씨였더라도 그렇게 원균을 옹호했을까?[3]
원균옹호론은 1978년 이정일의 고려대 석사학위논문 '임란시 원균의 공과에 관한 일고'를 시작으로 1983년 이재범의 《원균정론》[4]에서 소개되고, 소설가 고정욱의 《원균, 그리고 원균》[5] 소설가 김탁환의 《불멸》, 소설가 김훈의 《 칼의 노래》 및 이를 2004년에 드라마로 만든 《 불멸의 이순신》으로 이어지며 원균 옹호론을 퍼트리는데 앞장섰다. 이덕일 또한 1999년 《우리 역사의 수수깨끼》 1권에서 원균 옹호론을 전개한 바 있다. 다만 이건 1999년 당시의 일이며, 그 이후 다른 책에서 원균을 옹호한 적은 없다. 1970~80년대의 원균 재평가 기류는 단순히 학문 연구가 발달하는 과도기에 나온 서적이며, 이덕일 단독 저서가 아니라 이희근과의 공저이기 때문에 원균옹호론은 이희근이 저술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이 책에 나온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설은 이후 출판된 이덕일의 한국 고대사 서적에 다시 나오지만, 이 책에 나온 원균옹호론은 다시 다룬 적이 없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자세히 읽어보면 원균보다는 선조를 재평가했음을 알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원균을 기용하고 칭찬한 선조가 무능하지 않았다는 서술이 많다.
원균 옹호론자들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가문 기록인 《원균행장기》를 내세우며,[6] 난중일기와 장계들을 비롯한 이순신의 기록들은 무시한다. 또한, 선조수정실록의 기록들은 이순신의 친척이 원균을 고의적으로 왜곡했다고 주장한다. 논파당하면 "역사는 승자의 역사", "옛날 일을 네가 봤냐? 어떻게 아냐?", "원균도 열심히 싸웠다"라는 소리로 일관한다. 악명 높은 환빠들과 주어, 목적어만 바꾸면 완전히 똑같다. (예 : 강단사학이 진실을 은폐한다. 숨겨진 진실을 찾아야 한다 등등)[7]
이러한 책이나 당시의 오류는 너무나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원균정론》 : 원균 옹호론을 처음으로 묶어서 만든 책이다. 하지만 원균을 옹호하기 위해서 무리한 해석이 많다. 일례로, "이순신이 원균 몰래 장계를 올렸다" 면서 실록 기사를 내놓는데, "이전 한산도 해전(옥포의 오기)의 장계와 같습니다" 라면서, 이순신이 원균을 따돌렸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 위의 기사가 적힌 날짜는 한산도 대첩 직후이다. 그 밖에도, 경상 우수영 병력이 1만이면 조선 수군은 10만이고 육군은 50만이다라는 주장이 실려있는데, 이건 일본 학자들의 주장으로서, 당시 조선 병력이 얼마였는지는 경국대전과 실록에 아주 잘 실려있다.
《선조수정실록》에 대한 이해 부족 : 선조수정실록은 선조에게 미움을 받은 장수(이순신, 의병장)들에 대한 평가를 다시 쓴 기록이다. 1970년대 사학계에서는 이순신을 지나칠 정도로 찬양했기 때문에, 선조의 평가가 담긴 선조실록을 다시 연구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원균 옹호론은 선조와 이순신을 심층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이전에도 수정실록만을 참조해서 이순신을 찬양했던 학자들은 없었다. 학자들은 처음부터 실록에 버금가는 신뢰도를 가진 임진왜란 기록들을 교차검증하면서 연구했다. 결과적으로, 선조가 이순신과 의병장들처럼 능력자들을 숙청했던 이유는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서였음이 분명해졌다. 애초부터, 선조수정실록은 몇몇 충신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준 기록일 뿐이고, 원균의 평가는 선조실록의 원본을 보더라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
원균 칭찬에만 도취하는 이론: 당시의 과도기적인 연구에는 이미 해답이 내려졌다. (원균은 왕권 강화를 위해서 이순신의 제거에 사용된 간신배가 맞다). 하지만 원균 옹호자들은 선조 - 원균 - 이순신을 재평가하려고 했던 1980년대의 연구 중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이론들만 인터넷과 책에다 무작정 퍼나르고 있다. 원균 옹호론을 펼치는 사람들은 그동안 발전한 연구를 무시하거나, 원균에 대한 사학계의 결론마저도 부정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받아들이는 건 오직 원균의 칭찬 뿐이다.
결국, 원균 옹호론은 한국 역사 재해석의 최대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그야말로 아폴로 계획 음모론에 필적할 만큼 근거 없는 의견이다.
처음에는 선조를 재평가했던 이론에서 원균이 포함되자, 원균 옹호자들이 원균의 간신배적인 행보를 부정하고 이순신을 깎아내리는 통에, 반감을 느낀 역사학자들은 원균을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원균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 공식적으로 조선 정부에 보고된 기록에는 이순신과의 연합 작전을 제외하면 아무런 전공이 없기 때문이다. 속된말로 이순신 버스나 얻어탔을 뿐이다.
하지만, 불멸의 이순신 같은 작품에서는 원균을 이순신의 멘토로 만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지상파 대하사극에서 이런 짓을 저지르자 분기탱천한 김경진 등은 공저한 소설 《임진왜란》에서 원균 옹호론을 공격했고, 다음 토탈워 카페지기 도현신은 자신의 책인 《원균과 이순신》에서 원균 옹호론을 반박했다. 그럼에도 《원균, 그리고 이순신》, 재미교포 작가 백지원이 쓴 사이비 서적 《 왕을 참하라!》, 《 조일전쟁》 등 원균 옹호론 저서들은 계속 나오고 있다.[8] OTL. 이우혁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슬픈 시각으로 본 원균 명장설'이란 글을 올렸으며 이 글은 토론할 때 종종 인용이 된다. 보러가기
현대의 원균 옹호론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마초적인 지휘관 동료로서 팔아먹기 좋은 캐릭터라서 유행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우혁에 의하면 마지막에 싸움터로 향했으므로 군인에 대한 보편적인 동정심을 이용하는 사람들, 학문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이 이순신의 명성에 편승하려한 점에 대한 반발,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조선, 이순신, 한국인을 깎아내리기 위해서 국까 컨셉을 잡으려고 원균을 옹호하는 경우도 있다. 원균 옹호론을 보면 이러한 심리가 꼭 하나씩 섞여있다. 궁예, 광해군 등이 재평가 되는 것과는 질이 다른 것이다.
오해를 고치기 위해서 말하자면, 원균은 절대로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전형적인 권력 숭배자이자, 권력층과의 유착이 깊었던 간신배이다. 또한 철저한 이기주의자였기에, 부하와 백성들이 위험에 처하자 방패막이로 써먹고 도망치기만 했다. 당대의 같은 친척들도 원균을 부끄러워했을 정도였다.
근본적으로 따지면 원균 옹호론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은 선조였다. 현대의 원균 옹호론은 선조를 재평가하는 이론에서 시작되었으며, 원균 옹호론자들이 내세우는 사료는 원균행장기와 선조의 변명을 짜집기한 것이다. 현대인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겠지만, 원균은 이순신보다 권력자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것이 많았고[9], 결정적인 순간에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10][11] 당시 조정에서는 이순신처럼 우리 편임이 명확하지 않은 장수에게 미련이 없었다.
정리하자면 나라 말아먹을 뻔한 정치 군인, 권력자에게 이쁨받은 꼴통, 혈연만 끝내줬던 간신. 원균 재해석 운운하는 소리가 나오면 혹시 왜곡된 정보로 억지 주장하는 것인지 잘 살펴보자.
똥별도 별은 별이라고 영어 위키에선 원균을 Korean admirals 카테고리에 등재시키고 있는데, 미국과 영국 해군 교과서를 집필한 이들이 쓴 책인 '해전의 모든 것'(휴먼 앤 북스 펴냄)에서도 이순신을 전설적인 명제독으로 설명하면서 원균은 조선 수군을 매장한 최악의 무능 제독으로 비꼬고 있으며 심지어는 원균을 '비극적인 영웅'으로 포장하기 위해, 전쟁 후에도 멀쩡히 살아서 천수를 누린 아들 원사웅을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과 함께 장렬히 싸우다 죽었다고 왜곡하기까지 한다. 다만 이 부분은 왜곡이라기보다는 진짜로 몰라서 그렇게 알고 있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조선 시대 역사 문헌들이 한글로 번역되어 대중들한테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공개된 시점은 아무리 빨라야 1990년대 말엽이고, 그 이전까지는 일반인들이 조선 시대 역사 기록에 대해서는 근거나 출처도 알 수 없는 야사나 민간 전승들을 통해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3. 원균 명장설?
원균을 이순신에 필적하는, 혹은 능가하는 장군이라고 보는 견해가 원균 명장론이다. 이순신의 전공은 모두 우상화한 승자측의 역사왜곡이라는 극단적인 주장.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원균의 후손인 원주 원씨들이며, 근거는 주로 숙종때 대사헌을 지낸 김간의 통제사원균증좌찬성공행장(統制使元均贈左贊成公行狀)이다.그러나, 행장기의 사료적 가치는 없다고 해도 좋다. 문중에서 조상들의 이름을 높이려고, 한참 후에 지어낸 책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전쟁 당시 당사자가 쓴 기록이며 다른 공식 기록과 교차검증이 되지만, 원균행장기는 다른 기록과 교차검증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 행장기를 사료로 삼는 원균빠들을 놀리면서 나온 농담이 바로 김억추 명장설. 똑같이, 김억추 행장기를 근거로 하면 김억추는 항우를 한참 능가하는 판타지스러운 장수가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검강으로 적선을 파쇄했다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의 선비들은 기록광이었다. 유학에서 배척하는 괴력난신(즉 괴담 따위)부터 뜬소문에 야사 할 것 없이 일단 자기가 보고 들은 거면 일단 기록하고 봤고 거기에 대한 의견을 덧붙이곤 했다. (국가 공인 기록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외에도 개인이 직접 적은 용재총화, 어우야담 등이 있다.) 그리고 이런 기록을 남길만한 지식인들은 하나가이 원균의 탐욕스러움, 권력 숭배주의(간신배), 권력자들의 감투 놀음이 나라를 망쳤다며 한탄했다. 선조만이 "원균을 그런 식으로 헐뜯지 말라"고 했으나 당대 지식인들에게 원균이란 인물은 간신이자 소인배였던 것이다. 원균 명장론은 제대로 사료에 대한 교차검증만 해봐도 불가능한 이론이다.[12]
결론부터, 원균은 명장이 아니다. 아군 학살과 도망의 명수라고 보면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원균은 싸우다가 패색이 짙어져서 '적의 손에 넘겨줄 바에야 없애버리는게 낫겠다.' 라는 심정도 아니고, 아예 싸우지도 않고 70척의 함대를 불태우고 줄행랑을 쳤다. 이후에도 130척의 대함대를 버리고 자멸로 몰아넣었다. 원균이 불태우고 포기했던 배는 대부분이 판옥선이며 함포를 기본적으로 배치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일본의 전선은 갑판 위에서 활이나 총을 쏘는게 전부인 사실상 수송선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으니 지고 싶어도 지기 어려운 정도의 전력차였다. 굳이 충무공 정도의 전략 전술을 쓰지 않더라도 멀리에서 대포만 쏴대면 일방적으로 이길 수 있는 싸움에서[13] 그냥 겁먹고 도망친 것이다. 무엇보다 시작부터 원균은 싸워볼 생각도 안하고 75척 ~ 100척 가량의 경상우수영 함대를 불태우고 줄행랑을 놨다. 정발이 목숨 걸고 시간을 끌면서 침공 사실을 급보로 보냈을 때 그 정보를 받은 자는 바로 원균이며, 성의 군민이 전멸하는 대가를 치른 피묻은 급보를 받고도 싸우지도 않고 함대를 자기 손으로 불태우고 자취를 감췄는데, 이런 경우는 세계 어느 국가를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시 휘하에 있던 옥포만호 이운룡이 "나라의 중책을 맡은 장수로서 강토를 사수할 것이며 더욱이 이 지역은 남방의 주요 방어선으로서 최대의 관문입니다. 전라수군과 힘을 합쳐 왜적을 쳐부숴야지 도망은 직분과 국가에 대한 배신 행위입니다"라고 항명했으나 원균은 임무를 내팽겨지고 적전도망을 저지르고는, 이순신에게 묻어서 그의 공을 뺏으면서 그를 모함하고, 칠천량 해전에서 막강한 조선 함대를 순식간에 소멸시켰다. 이에 대해서 원균 옹호론자들은 ' 권율의 부당한 처벌'[14] 탓이라고 하지만 권율이 원균에게 이런 망신을 준 이유는 단순히 싸우러 나가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원균은 권율을 통해서 '이순신이 칠천량으로 싸우러 나가지 않는다'며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고, 그 결과가 바로 이순신의 파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삼도통제사 자리를 빼앗고 난 원균은 그냥 관사에 틀어박혀서 음주가무로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군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원균을 비판하는 이들은 아예 한 술 더 떠서, 명예 왜군 장수라고 하지메 사토루라는 일본식 이름까지 지어서 까기도 한다. 조선 수군에게 박살나기 일쑤였던 일본 수군은 원균이 출정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규모를 알아본 후, "드디어 우리가 죽는가 보다."라며 하나같이 유서를 쓰고 "어차피 죽을 거 마지막까지 해보자!"였으나, 뚜껑을 열어보니 그 공포의 조선 수군은 순식간에 오합지졸로 전락해있었고 일본측은 그런 조선 수군을 철저히 궤멸시켰다. 굳이 유능한 점을 찾으려 한다면, 혈연을 이용하여 권력층에 아부하는 능력 정도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군인으로서는 폐급, 간신배로서는 만렙이라고 할 수 있다.
4. 원균 맹장설?
원균 명장설이 너무 말도 안 되고 쪽팔리니까, 명장은 아니었지만 차라리 용맹한 장수였다는 절충안이 나왔다. 고정욱의 소설 원균에서 이런 관점이 다뤄진다. 1980년대 MBC에서 방영한 조선왕조 500년에서도 원균이 무능한 밥벌레는 아니었고 맹장 타입이었다고 옹호를 해주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채택한 '해전에는 능숙하지 못하지만 육전에는 능숙해서 북방의 명장이었다'란 주장도 원균 맹장설에 포함된다. 사실 아예 뜬금없이 나온 주장은 아니고 선조실록 권82 선조 29월 기해(1596년 11월 9일) 기사에서 류성룡이 원균을 두고 그는 용맹하긴 하나 병사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선조에게 아뢴 말에 근거를 둔 것인데, 류성룡의 누구의 친구였지를 생각하면 원균에 대해 좋은 말을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에 꽤 신빙성이 높다는 것이 원균맹장론자들이 드는 근거다.그러나, 원균은 육전에서도 활약이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원균이 육군 전문이라는 말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신립은 기병을 잘다룬다는 서술이 있으며, 전형적인 맹장에 어울리는 인간 흉기였다는 점이 기록되어 있다. 여진족과 매우 잘 싸운 인물로 기록되어있다. 즉, '일신의 용맹은 우수하나 지휘관으로서 미숙해 잘못된 선택으로 결국 큰 전투에서 대패한 맹장' 이미지로는 신립이 훨씬 적절하다. 하지만 원균은 뭘 잘하는지에 대한 묘사가 없다.[15] 원균이 선조의 빽을 믿고 출세욕 때문에 고위직만 받고 제대로 전투에 임하지 않았다고 보는게 적절할 것이다.
이 경우는 안방준이 지은 은봉전서에서 원균이 안중홍에게 "적? 그까짓 거 무기로 때려잡다보면 이기는 거잖소?"[16] 라는 식으로 말했다는 내용이 근거로 제시된다. 허나 당연하게도 원균이 진심으로 이런 말을 한 건 아니고 그의 행실을 보면 알 수 있듯 당연히 허풍에 가깝다.
또 난중잡록 중 "한 끼에 밥 한 말, 생선 5마리, 닭이나 꿩을 3~4마리 먹는 대식가였다"는 내용도 한 말의 밥을 먹고 열 근의 고기를 먹으며 80넘은 나이에도 건장함을 과시한 염파나 하루에 1만 칼로리 이상을 먹는 마이클 펠프스 같은 여러 운동선수들의 식단과 비교당하며 그의 건장함을 나타내는 내용처럼 꾸며지지만, 원균의 경우는 그 다음 내용이 " 평소에 배가 무거워 제대로 걷지 못했다."다. 즉, 앞뒤 잘라먹고 유리한 기록만 취사선택 한다는 것이다.
단 이건 논란이 있을 수 있는데, 원균이 비만이었단 기록이 맹장설과 모순되는 건 아니기 때문. 원균의 실제 무덤으로 추정되는 통영시 엉규이 무덤에 얽힌 일화 중에, 새마을 운동 때 이 무덤자리에서 도로확장을 하던 중 나온 뼈가 매우 장대했기 때문에 당시 통영 시민들이 '이 뼈는 보통 사람의 것이 아니다. 필시 장군의 것이었을 것이다'라고 수군거렸다고 하는데,[17] 이 일화를 토대로 추정해 보건데 원균은 단순히 살만 뒤룩뒤룩 찐 물렁살은 아니고 상당한 근육질 체형 위에 살이 붙은 스모선수 같은 체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궁수가 대부분이던 조선시대 무관들은 죄다 어깨가 떡 벌어진 체형이었을 가능성이 큰데, 조선시대 군궁과 장력이 비슷한 영국 장궁을 쓰던 영국 궁수의 유골을 보면 어깨가 비정상적으로 벌어져 있기 때문이다. 위의 엉규이 무덤 일화에서 언급되는 '장대한 뼈'도 이걸 말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 원균맹장론과 별개로 원균의 무력이 아예 형편없었는지에 대해선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있는데, 원균은 무과시험을 첫번째에선 부정입학으로 한번에 붙었다가 떨어지고, 그 다음 시험에서도 한번에 붙어서 합격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 첫번째야 당연히 부정입학이니 한번에 붙었다 쳐도 두번째 무과시험은 어떻게 한번에 붙은 것일까? 부정입학으로 떨어진 전적이 있는 응시생은 당연히 요주의 인물이 되어 감독관들이 부정입학 감시를 더 빡쎄게 했을 텐데도 말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원균은 의외로 자기 가문의 빽 없이도 충분히 무과를 합격할 수 있는 기량 자체는 갖고 있었던 거 아닐까 싶다.[18] 당시 무과 과목들은 죄다 활을 쏘는 종목들이라 말을 타야 하는 기사를 제외하면 딱히 몸집이 육중하다고 불리한 과목은 없기 때문이다.
난중일기 1597년 5월 8일자에 적힌 바에 따르면 원균이 한 부녀자를 강간하려다 놓친 적이 있어서 이 기록 때문에 원균은 여자와의 격투에서도 못 이기는 ㅂㅅ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위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원균은 그냥 비만해서 육탄전은 형편없지만 활솜씨는 무과에 한번에 붙을 급의 실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궁수 자체가 육중한 무장을 하고 굼뜨게 움직이는 병과다 보니 원균처럼 몸이 비대하고 둔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앞서 비유한 스모 선수의 경우, 의외로 스모 선수들도 분명 근육질인데도 격투기에서의 전적은 형편없다는 것은 생각해 보자. 실제로 엎어지면 일어나는 동안 얼굴에 발차기나 주먹이 날아와서 여러번 KO 당한 기록이 있다.
사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신립, 황진, 정기룡, 한명련, 유경천[19], 정충신, 정운 등 온갖 별의별 희한한 무대포 인간흉기들이 난립하던 시절인데, 원균은 하필 이 시기에 활동하던 장수라서 상대적으로 더더욱 무력이 초라해 보이는 감도 있다. 사실 일본의 잡병 취급인 아시가루조차 일당백의 프로 용병들이었으며 심지어 ' 명회'라는 이름의 한 조선 농민은 편곤 하나 들고 혼자서 왜군 400명을 쳐죽였다는 괴담같은 얘기도 있고, 단순 지략가로만 알려진 이순신과 문약한 이미지가 강한 김명원은 의외로 둘다 당대의 명궁으로 유명했으며, 하다못해 까이는 이일조차 혼자서 왜군 여러 명을 죽일 수 있는 전투력의 소유자다.[20] 말 그대로 당시 조선의 파워인플레 땜에 원균이 저평가받는 것 뿐이지 실제 원균의 무력은 최소한 1인분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이일은 신립과 여진족을 토벌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는데, 원균의 행보는 맹장과는 1억 광년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예로 들면 원균이 임진왜란 발발 당시 판옥선을 자침한 사건의 경우, 물론 원균의 판단이 마냥 틀린 건 아니었지만 맹장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란 문제가 있다. 애초에 맹장이 무엇인가? 앞뒤 생각 다 집어치우고 일단 돌격!하고 보는 게 맹장이 아닌가?[21] 예로 들어 맹장의 대명사인 신립이나 척준경의 경우, 이들이 원균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아무 고민없이 판옥선 끌고 왜선들에게 그대로 돌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원균은 신중하게 우선 판옥선을 자침시킨 다음 병력을 데리고 육지로 올라갔다. 즉 원균은 맹장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는 신립이나 정기룡이 진짜 맹장이고 원균은 맹장은커녕 제 목숨만 챙기려던 똥별일 뿐이다. 당장 신립은 니탕개의 난에서 얼마나 거대한 용맹을 보여줬는지 선조 임금이 직접 곤룡포를 벗어다가 신립의 몸을 감싸며 치하한 일화까지 있으며 정기룡은 말 그대로 임진왜란의 조운이었다. 다만 신립이 탄금대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은 조총 대 기병의 싸움인지라 안 봐도 비디오스러운 전투결과일 뿐이지 신립의 용맹이 약한 것은 아니다.[22] 되려 녹둔도에서 종군하던 시절 이일의 후퇴명령을 무시하고 남아서 싸워 이긴 이순신과 이경록이 되려 원균보다 더 맹장같다. 적어도 이순신은 도망은 안쳤기 때문이다.
원균이 지상전을 잘하는 장수라는 가설은 헛소리에 가깝다. 조선 시대의 무관 시험에는 수군 무과, 육군 무과가 따로 있지 않았다.[23] 훈련 방법은 크게 차이가 났지만, 지휘관들이 배우는 기초적인 병법은 비슷했다. 물론, 해상에서는 군선이라는 별도의 도구를 써야 했으므로 이순신처럼 유연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적응 기간은 길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원균은 수군을 맡으면 잘 싸울 것 같다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수군을 맡았으며 되려 일각에서는 원균이 승마에 능하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수군으로 배치됐다는 주장까지 나올 지경이고 실제로도 원균이 무과에서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도 승마 관련일 수도 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해 육지로 도망은 갔는데 뭐하러 말 놔두고 뜀박질로 도주했는가도 설명이 된다.
결국, 원균의 행적은 낙하산 인사의 파멸 기록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원균이 '최후에 군인으로서 싸우러갔다' 면서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원균의 지휘 기록이란 자신의 도주로를 우선하다가 전멸했던 황당한 사례밖에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원균은 걸핏하면 백성이나 군인들을 버렸으며, 이렇게 인명을 내팽겨친 만큼 성공한 업적조차 없다. 이런 장수에게 맹장이라는 평가를 붙여주는 것은, 그의 명령을 따르다가 허무하게 산화했던 군인들을 모욕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즉 원균은 맹장이 아니라, 단순히 정치적인 유착과 권력 숭배에 취해서, 백성과 부하들의 목숨을 값싸게 낭비하면서 살았던 인물임이 분명하다.
권력은 맛보고 싶고 그렇지만 그에 상응하는 능력은 안되는 인물이 원균인데 이럴 거면 차라리 글공부나 열심히 해서 문관이 되었어야 했지만 그러기엔 원균의 학식이 높은 것도 아니다.[24] 결국 원균은 관직부터도 가문과 인맥을 이용해 올랐고 그렇게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주제를 모르고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 상황에서 전투지휘관이 되길 고집했다. 거기에 탐욕이 지나칠 정도라서 부하들이 제대로 따르지 않아 지휘하는 데에 어려움도 많았다.
5. 옹호론이 나오는 이유
- 높은 인지도가 자본주의 시장에서 가지는 가치: 원균은 재평가를 들먹일 이유가 전혀 없는 간신배지만, 억지 논리와 사료의 취사 선택으로 '재평가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나오는 것은, 높은 인지도 때문에 관련된 뭔가를 살짝 붙여도 '돈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인지도가 높은 화제에 대해서 기존과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것 자체가 충분히 화제성이 담보되는 행동이다. 때문에, 역사적 신뢰성과 관계 없이 마구잡이로 자극적인 주장, 기존 학계의 연구를 '강단사학' 운운하면서 마구 비난하는 재야저술가들은 그것만으로도 일정한 수입과 유명세를 얻을 수 있다.[25] 참고로, 환빠들도 기존 학계의 연구를 '강단사학'이라고 비난해댄 걸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 종친회와 지역 사회의 이기주의: 원주 원씨 종친회와 평택시에서 '지역 위인'을 만들려고 원균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평택시의 5선 국회의원이자 새누리당 원내대표까지 지냈던 원유철도 원주 원씨로서 원균 띄우기에 적극적인 인물중 한명 이다. # 이는 원균과 이순신을 동급으로 포장하여, 자신들도 그 후광을 얻어보고자 하는 심사의 발로다. 그러나 원주 원씨는 정작 정말로 자랑스러운 조상인 원연에 대해서는 가문의 서자 또는 서얼로 여겨 취급 조차 하지 않고 외면한다.[26] 원균에게는 알려진 동생이 둘 있었는데, 둘째 동생인 원연은 임진왜란 때 왜적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의병장이다. 이 승전을 계기로 현감 직을 제수하였고, 원연의 아들이자, 원균의 조카인 원사립은 아버지 원연 장군이 전사했던 정유재란 때 서천군수로 있으면서 왜적을 막아낸 전공도 있다. 원균의 막내동생인 원전은 원균의 부관이였는데,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은 튀었지만, 원전은 끝까지 남아 싸우다 전사했다. 단지 직계 자손이 아니라는 이유로 원균의 동생들과 조카들은 완전히 외면 받고 있다.[27] 차라리 원연 장군을 기렸다면, 이순신과 비슷한 급으로 포장할 여지라도 있었을지도. 다행히 원균의 아들 원사웅만큼은 제정신이었다고 한다. 혹은 강직한 무관으로 마지막까지 항전하다 장렬하게 전사해 지역민들은 물론 적들마저 그 기개를 인정했던 원호(무관) 같은 사례도 있지만, 이쪽은 그냥 있는지도 모른다.
- 당대 임금 / 권력층과의 친분: 원균이 이순신을 쳐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권력, 혈연적인 기반이 탄탄했기 때문이다. 물론 실력이 밝혀진 이후에는 원균이 선무공신 1등에 추서될 때 죄다 반대했지만, 이때는 선조 혼자 박박 우겨서 집어넣게 된다. 따라서, '원균이 엄청난 중책도 맡고, 죽고서도 공신이 되었는데, 찌질이로 나오면 이상하지 않겠느냐'하는 논리를 토대로 원균에 대한 선조의 호평을 팔아먹을 수 있게 되었다.[28] 당장에 원균이 저지른 짓은 족보에서 제명당해도 시원찮은 것이었지만, 선조의 두둔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평가가 유보되었다. 선조는 거의 원균 빠돌이에 가까웠다. 사관이 원균 비판을 하자, "원균 탓하지 말라"고 사관에게 욕을 날렸던 양반이다.
- 가공 매체에서의 극적 효과: 불멸의 이순신 부류라고 할 수 있다. 가공 매체에서는 원균을 약간 옹호해야 '작품의 재미'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원균옹호론이 논파가 끝난 헛소리라도, '이순신의 라이벌' 운운하기에는 굉장히 좋은 캐릭터인 것은 사실이다. 지장 이순신과 맹장 '이미지'인 원균[29]을 대비시키면 흥미로운 전개가 만들어진다. 역사 그대로 묘사한다면, 원균은 처음부터 끝까지 찌질거리는 매우 평면적인 캐릭터라서, 현실적이고 재미있는 인물 설정을 위해서 조금은 옹호하는 각본을 짜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실제 이순신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평면적인 먼치킨이고 실제 원균은 비현실적으로 평면적인 최악의 빌런이다.[30] 따라서 현실적인 설정을 위하여 현실을 왜곡해야 한다는 흠좀무한 부조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물론, 재미에서는 플러스가 될 수 있어도, 욕은 오지게 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 능동적이고 마초적인 맹장에 대한 갈망: 보편적으로, 군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멋있고 영웅적이어야만 팔린다. 일회성 삼류악역이면 몰라도 핵심 등장인물이 속된 말로 찌질이라면 발암을 유도한다면서 등을 돌리는 고객들이 많다. 당연히, 임진왜란을 다룬 전쟁물에서 어쨌든 주역일 수밖에 없는 원균은 이런 마초적, 자본주의적인 요구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막장도가 낮아지고 나름 용맹하기는 한 장수로 미화되는 측면이 생기게 된 것이다.[31] 헌데 정작 임진왜란에는 정운 같은 왜곡 안 하고 맹장 이미지를 넣을 수 있는 장군이 있다.[32]
- 지나친 프로파간다에 대한 반발: 박정희가 이순신을 존경[33]하면서 프로파간다에 써먹었다는 의혹이 사회에 퍼진 점도 원인이다. 이후 이 프로파간다를 균형 있는 시각으로 분석해야 한다며 원균 옹호론이 사회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당시의 프로파간다에서 나온 역반응에 불과하다. 반대로, 이런 흐름에 대한 비판자들도 이순신의 업적을 엿먹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 항목에는 북한에서도 이순신의 활약에 인민의 희생이 있다고 주장한다면서, 이런 여론에 대한 음모론을 써놓을 정도였다.[34]
- 왕권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권위주의 혹은 권력자 중심적 시각: 선조실록과 권력자 중심적 시각, 국력지상주의를 견지하는 자들의 역사관이다. 사실 이 케이스는 원균옹호론보다는 선조 옹호론에 더 가깝다. 군사정권 프로파간다에 대한 반발심리로 인한 옹호가 진보 쪽에서 나타난 형태라면, 이쪽은 보수 쪽에서 간혹 나타나는 형태.[35] 이순신이 없어도 선조와 명의 힘으로 승리할 수 있으므로, 확실한 권력 배경을 지닌 원균을 이용해서 이순신처럼 아군임이 확실치 않은 실무자를 제거한 것은 타당한 책략이었다는 관점이다. 전형적인 선조 옹호론이자 강대국에 대한 종속주의를 드러내는 관점이다. 물론 이순신 없이도 승리했을 거라는 관점이 무조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명나라 병사들에게는 조선 남부를 목숨 바쳐 지킬 이유가 없으며, 혼란기에 조선이 해체되는 입장에 놓였을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무책임한 권력자 중심 이론이다. 당연히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조선까들에게 매력적인 학설이기도 하다. 그러나 명군의 역할에 대한 해석과 상관없이 원균 개인의 졸렬한 행적은 바뀌지 않는다.
- 자칭 역잘알들의 지적허영: 남들이 상식처럼 알고 있지만 정작 깊이 있게 연구해 봤을 경우는 드물 경우 아는척하기 좋은 주제였다. 하지만 요즘은 오히려 인터넷에서 원균을 옹호하면 역알못이나 환빠 취급을 받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줄어들었다.
- 권위에 대한 반발: 원균옹호론과 동전의 한 면이라고 할 수 있는 이순신 폄하가 동시에 일어나는 이유는 바로 권위에 대한 반발심리 때문이다. 이순신이라는 영웅의 권위에 대한 반발, 박정희라는 인물의 권위에 대한 반발, 민족주의라는 이념의 권위에 대한 반발. 이 세 가지 반발심에 기초하여 탄생한 이론이 바로 원균옹호론과 이순신 폄하론이다. 실제로 원균옹호론 및 이순신에 대한 폄하를 줄기차게 내세우는 인사들중에 '권위에 대한 반발'을 핵심 이론으로 삼은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하부 이론인 탈민족주의에 영향을 받은 진보 계열의 인사들이 있었다. 다만, 당시에 이러한 복합적인 반발심리로 연구되기 시작했던 원균 재평가의 큰흐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니 연구를 하면 할수록 드러나는 원균의 실책은 옹호해줄만한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36] 유념해야 할 부분은 한국에서 민족주의는 보수 진영보다는 오히려 진보 진영에서 상대적으로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어서, 그 연장선에서 진보 인사들 중에서도 이순신을 나라와 민족의 영웅으로 고평가하는 사람은 매우 많다. 모든 진보 인사들이 이순신을 폄하하고 원균을 옹호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진짜로 진영논리에 함몰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
무능하긴 했지만 아주 수준 이하는 아니었다는 설: 아예 무능했다면 칠천량해전 때까지 원균이 조선의 군대에 붙어있지는 못 했으리라는 설이 원균옹호론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대표적인 반론은 조선은 너무 급속하게 전쟁준비를 하느라 조선 전체적으로 군사적 개념이 취약했고 그때문에 원균같은 존재를 미처 걸러내지 못했다 인데, 그러면 문제가 되는 점이 그런 환경 속에서는 상대적으로 무능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변함이 없지 않은가? 이다. 단적으로 말해, 이순신과 원균에게 빨리 부산으로 가서 싸우라고 닦달했던 사람들 중 누군가를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아 출정시켰다면 십중팔구 부산앞바다에서 조선 수군을 전원 수장시켜 아예 조선 수군을 재건조차 불가능한 수준으로 없애버렸을 것이다. 원균은 최소한 부산 앞바다에서의 작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았고, 미적미적대다가 곤장을 얻어맞고 강제로 출전한 뒤, 격군의 체력 방전을 감지하고 나서라도 어쨌든 후퇴를 시작해, 절대 좋은 작전이 아니었지만 아무튼 어떻게든 퇴각 작전을 수립한 뒤, 칠천량까지는 도달한 뒤에 섬멸당했다. 별 차이가 없어 보이고 원균이 더 추해보이긴 하더라도, 사소한 운만 개입되어도 전력을 온존한 패퇴 vs 완전한 몰살 까지 차이가 벌어질 수 있는 수준 차이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무능했던 사람은 맞으나 당시 조선의 군사적 개념이 그만큼 취약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이자 시대의 광풍에 휩쓸린 나약한 개인들 중 하나에 불과하며, 진짜 비극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본인의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어렵고 높은 직책이 주어진 점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사실 이런 식의 옹호는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운 것이, 상식적으로 무과에 급제하고 군 고위지휘관이었던 사람이 절대적인 기준에서 완전한 무능력자였을리는 없다. 그러나 원균은 자신의 역량에 비해 너무나 큰 책임을 맡았고, 그 일을 수행해낼 수 있는 능력이 없었으며, 심지어 비인간적이고 비겁하기까지 했다. 원균은 삼군통제사였다. 그렇다면 그가 무능하냐 유능하냐도 당연히 조선 수군 총지휘관 기준으로 평가하는 게 맞다.[37] 게다가 그를 마치 '취약한 조선의 군 체제에 휘말려서 능력에 비해 너무 높은 직책이 주어진 사람'으로 보는 것도 어폐가 있는 것이, 조선의 수군의 체계를 탄탄하게 다져놓아 강군으로 만들어놓은 이순신을 말도 안되는 억지로 모함해 쫓겨나게 한 것이 바로 원균이다. 지위가 주어진게 아니라 본인도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는 부산포로 출전을 호언장담하는 말도 안되는 허풍과 모함으로 빼앗은 것에 가깝다.[38] 원균이 무능한게 아니라 평균적인 능력치를 가졌다고 치자. 평균 밖에 안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보다 훨씬 적임자에 훨씬 능력이 뛰어난 자를 시기해 허풍을 통해 모함해 쫓겨나게 하고 그 자리에 앉았다면, 그건 재평가를 받거나 옹호를 받아야 할 게 아니라 더욱 더 욕을 처먹어야 할 일이다.[39]
- 극단적인 음모론 맹신과 정부 기록에 대한 불신: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하여 아예 조선 시대 정부에 만들어진 모든 기록들은 다 후대에 와서 날조되었거나 조작된 것이기에 믿을 가치가 전혀 없으며, 그렇기에 원균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것처럼 무능한 간신이 아닌 아주 유능한 장수인데 이순신 띄우기에 열광하던 후대의 한국 정부에 의해 악당으로 왜곡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극단적인 음모론을 맹신하는 부류인데, 특히 지금은 없어진 다음 아고라에 매우 많았다.[40] 이들이 조선왕조실록 대신 믿을만한 자료라고 들고 나오는 것이 임진록 같이 저자와 작성 연대도 알 수 없는 소설인데, 임진록이야말로 민중들이 만들었으니 믿을만한 문헌이라고 박박 우긴다. 헌데 더욱 황당한 것은 정작 임진록에서 추앙하는 영웅은 원균이 아니라 김응서인데, 이 임진록을 들고 나와 원균옹호론을 외치는 자들은 김응서라는 이름을 전혀 거론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김응서가 누구이고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자료라고 내미는 문헌조차 제대로 안 읽어 볼만큼 그저 어디서 들은 얕은 지식 몇 개에 자기들의 뇌내망상을 잔뜩 끼워다맞춰서 엉터리 음모론이나 펼치고 있으니 스스로가 얼마나 게으르고 무식한지만 증명하는 꼴이다.
6. 원균 옹호론의 사례(선양사업 포함)
6.1. 지역 사례(평택시)
- 평택에선 원균을 지속적으로 지역 유명인사랍시고 홍보하고 있으며, 심심하면 관련 행사를 열거나 책을 발간하고 심지어 사당과 묫자리까지 관리해 주는 세금 낭비를 하고 있다. 지역 유지인 원주 원씨, 혹은 원주시 국회의원인 원유철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원유철이 의원직을 그만둔 이후에도 시의 태도가 그대로인 것을 볼 때 # 원유철 한명만의 문제로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
'원균장군기념사업회'라는 곳에선 아래 그림에 적힌 발언을 '원균장군어록'이라며 홍보하고 있다. 굉장히 비장미 넘치게 묘사됐으나, 사실 이는 일본군의 함정에 홀라당 넘어가 한 말이다. 게다가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으로 실각하고 나서 그가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후에는 무서워서 출정 자체를 하지 않고 "밖에 적들 많으니까 육군 좀..." 하는 식으로 징징댔다가
권율 장군에게 곤장을 맞았다.
-
2013년에는 평택문화원에서 원균을 미화한 서적인 '원균평전'을 발간하는 데 평택시에서 약 2,500만원 정도를 보조금으로 지급했다. (책 발간은 2014년)
평택시에서 2차례에 걸쳐 약 2,500만원을 지원. 2014년 평택시 지방재정공시
-
2016년 ~ 2017년 기간 동안 원균 무덤(시체 없는 가무덤) 정비를 위해 평택시에서 약 4억 5천만 원을 집행하였다.
2016년 및 2017년도 집행금액의 합이 총 지출내역이다.
-
2018년부터 원균 제사에 평택시에서 매년 300만 원을 보조금으로 지급 예정이다.
- 매년 원주 원씨 종중 주관으로 진행하는 원균 제사의 모습이다. 이 행사는 2018년부터 평택시로부터 300만 원을 매년 지원받는다.
2017년도 원균 제사 |
6.2. 인터넷 사례
- 위키백과마저도 상당히 오랫 동안 원균행장록을 근거로 원균 문서가 작성되어 있었다. 당연히 지금은 객관적인 비판이 훨씬 많다.
- 네이트 백과사전도 비슷한 내용이었지만 서비스가 중지되면서 사라졌다. 네이트 백과사전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정보의 내용을 기본으로 작성했는데, 애초에 # 한국역대인물정보의 원균 내용의 집필자가 바로 원균의 재조명을 주장한 논문을 작성한 당사자이므로 이런 내용이 나온 게 당연하다.
- 불멸의 이순신 방영 때 역사를 제대로 모르고 원균 옹호론에 낚인 부녀자들이 실제 원균을 그네들 방식으로 모에화시킨 일이 있다.
6.3. TV 프로그램 사례
- MBC의 예능인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에서 이순신을 주제로 한 에피소드를 방영한 일이 있는데, 무려 역사 교양 프로그램에서 원균을 이순신의 라이벌이라고 표현한 오류를 저지른 바 있다. 덧붙여 자기보다 나이도 어리고 후배뻘인 이순신이 높은 직위에 먼저 오르니 원균이 불쾌했을 법하다란 말같지도 않은 말도 나왔다.
- KBS 1시사 프로 역사저널 그날 2018년 6월 분에서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을 보여준다. 원균의 후손이 방송에 나왔으며 조상 원균의 명예를 회복하겠다고 권율을 모욕하는 짓을 보여준다. 원균이 선무공신이 추대받을 만한 인물이라는 것 당시 선조가 추대할때 신하들 전부 그것도 이순신을 싫어하는 신하마저 반대했다는 역사적 기록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그저 후빨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칠천량 패전의 책임을 권율과 조정탓을 하는 전형적인 옹호론자들의 토론이 펼쳐지는 모습이 보인다. 유튜브
6.4. 대중 역사서 사례
위의 문단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현대 시장에서 원균이 뜨게 된 이유는 조금 더 복합적이다. 특히, 군인이면 보편적으로 강하고 좋은 존재라고 묘사되어야 팔린다는 자본주의적, 마초적인 측면에서 원균 캐릭터는 재창조되었다. 어찌보면 수동적인 이순신에 대응하는 화끈한 군인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원균에게 투영되었고, 여기에 자본시장에서의 특정한 이익분야가 결합되자 걷잡을 수 없이 번진 것이다.6.4.1. 이덕일의 서적
그의 여타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덕일/비판 문서로.『선조실록』 37년(1604년) 6월 25일자는 세간의 이런 평가가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준다. 임진왜란의 공신들에 대한 포상 기록인데 무신으로는 이순신 · 권율 · 원균이 선무일등공신이었다. 현재의 일반적 통념에 역적인 인물인 원균이 400년 전인 당시에는 당당히 일등공신으로 책봉된 것이다. 그것도 그가 모함했다는 이순신과 같은 반열에 올라 있다. 이 기록은 원균도 조조처럼 한 영웅을 위한 후세의 희생양인지 모른다는 의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년, 197쪽}}}{{{#!wiki style="text-align: right;"
그런데 원균이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된 것이 신하들의 합의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선조의 무한 원균사랑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마저도 원균은 본래 선무공신 2등이었는데,[42] 선조가 길길이 날뛰는 통에 1등으로 올라간 것이다.[* 원균은 당초에 군사가 없는 장수로서 해상의 대전에 참여하였고, 뒤에는 주사(舟師)를 패전시킨 과실이 있었으니 이순신·권율과는 같은 등급으로 할 수 없어서 낮추어 2등에 녹공했던 것인데, 방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으니 올려서 1등에 넣겠습니다. …… 사신은 논한다. …… 원균은 주함(舟艦)을 침몰시키고 군사를 해산시킨 죄가 매우 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원균이 상대적으로 억울한 것은 사실이다. 그의 경력은 그가 불패의 신화를 지닌 용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겁장(怯將)은 아님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순신 보다 다섯 살이 많았던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조산만호로 있으면서 변방의 오랑캐 토벌에 세운 공으로 부령부사에 특진되었으며, 병사 이일과 시전부락을 격파한 공으로 선조 25년(1592년) 경상우수사가 되었다. 이는 이순신이 자신의 실력이 아닌 유성룡과 정탁의 추천을 받아 종6품 정읍현감에서 정3품 전라좌수사로 파격 승진한 것과는 비교되는 것이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년, 200쪽}}}{{{#!wiki style="text-align: right;"
원균은 1564년 무과에서 부정 시험 의혹[43]으로 낙방했다가 15년 뒤인 1579년에 합격한 반면, 이순신은 1572년 무과에서 낙마 사고로 낙방했다가 고작 4년 뒤인 1576년에 합격했다. 따라서 원균 보다도 이순신이 선배다. 종성부사 원균은 인사고과에서 꼴찌를 기록한 반면, 발포만호 이순신은 인사고과에서 으뜸을 받았다. 시전부락 전투에서도 원균은 예비대인 계원장(繼援將)이었지만, 이순신은 포병대인 화열장(火烈將)으로 참전한데다 적장 우을기내까지 사로잡았다. 더군다나 이후 이순신은 부당한 이유로 픔계가 낮아진 적은 있어도 결코 합당한 이유로 떨어지지 않았다. 반면, 원균은 전라 좌수사에서 잘린 이유가 평판이 나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게다가 1591년 원균이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자, 사간원은 인사고과를 들어서 그를 경질시켰다. 원균이 딱히 무슨 공적이 있어서 승진했던 게 아니었던 것이었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좌수사 원균은 앞서 수령이 되어 고적(考積)이 거하(居下)였는데 겨우 반 년이 지난 오늘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출척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으므로 물정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시고 나이 젊고 무략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라 하니, 아뢴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게다가 원균 다음으로 임명된 유극량도 실력은 있지만 성품이 무르다는 이유로 경질되었던 것을 보면 전라좌수사 임명이 어지간히 깐깐했음을 알 수 있는데,[* "유극량(劉克良)은 인물은 쓸만하나 가문이 한미하기 때문에 지나치게 겸손합니다. 그리하여 군관이나 무뢰배들과도 서로 너니내니하는 사이여서 체통이 문란하고 호령이 시행되지 않습니다. 비단 위급한 변을 당했을 때에만 대비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방어하는 군졸을 각 고을에 보낼 때에도 틀림없이 착오가 생길 것이니, 곤외(?外)의 일을 맡기는 것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체차시키소서."
] 그 다음으로 온 이순신이 단지 승진이 빠르다는 것 만을 지적받았던 것은 오히려 그의 유능함을 보여준다. 이마저도 선조의 절대적인 지지로 유임되었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라 하니,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
주변 상황이 이런 마당에 원균은 착실히 전공을 인정받아 경상우수사가 된 인물이고, 이순신은 류성룡과 정탁이 앉힌 낙하산 인사라는 주장이 얼마나 웃긴 평가인지는 자명하다.[44] 실상은 오히려 그와 반대로 원균이 윤두수, 윤근수를 비롯한 조정의 서인 대신들과 교류가 많았다는 점 때문에 이들의 비호로 진급했다는 평가가 많다. 하지만 이들은 인과관계를 역전시켜 원균을 북인으로 만든다!
『선조수정실록』은 대체로 이순신에 대해서는 칭찬으로 일관하면서도, 원균에 대해서는 폄하를 일삼은 책으로서 '이순신 = 충신', '원균 = 역적'의 전거가 된다. …… 인조반정 직후 남인 이원익이 영상이 된 데서 알 수 있듯이 반정 정권은 형식상으로 서·남인 연합정권이었다. 이순신은 남인 영수 유성룡의 추천을 받았으므로 남인으로 분류된 반면, 북인이 집권했던 왜란 말기 조정에 비호자가 많았던 원균은 북인으로 분류되었으므로 『선조수정실록』이 이순신은 후하게, 원균은 박하게 기술했을 것이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년, 201쪽 ~ 202쪽}}}{{{#!wiki style="text-align: right;"
그렇다면 북인이 편찬한 선조실록과 북인 윤계선이 쓴 달천몽유록에서는 원균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선조실록』 31년(1598년) 4월 2일}}}{{{#!wiki style="text-align: right;"
긴 시냇가에서 여러 귀신들이 손뼉을 치며 웃으므로 그 까닭을 물으니 통제사 원균을 기롱하고 있는 것이었다. 배는 불룩하고, 입은 삐뚤어지고, 얼굴빛은 흙빛이 되어 기어왔으나 퇴짜를 맞고 참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언덕에 의지하여 두 발을 쭉 뻗고 주저앉아 주먹을 불끈 쥐고 길게 탄식할 뿐이다. 파담자 역시 크게 웃고 조롱하다가 기지개를 켜고 깨어나니, 그것은 한바탕 꿈이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윤계선, 『달천몽유록』}}}{{{#!wiki style="text-align: right;"
그야말로 이게 무슨 지거리야! 게다가 선조 생전에 이순신에 대한 모함과 원균에 대한 비호의 선봉에는 서인 영수 윤두수와 북인 영수 이산해가 다투어 나섰고, 정유년에는 남인 영수 류성룡까지 소극적으로 편승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윤두수가 북인이었다거나 윤계선이 서인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당파적 이해를 뛰어넘는 인식(이 경우에는 '선조에게 밉보이면 안 된다')이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45]
두사람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을 배제하고 원균과 이순신을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원균은 용감한 무장으로서 이순신만큼은 못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다. 둘째, 후배인 이순신이 상관으로 임명되자 반발하였다. 셋째, 이순신이 투옥된 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로서 도원수 권율의 명령을 받아 재침하는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다섯째, 선조의 호의로 선무 일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종합해 보면 원균은 불패의 신장은 아니지만 공적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한 사람의 용감한 장수이자 왜적과 맞서 싸워 목숨을 바친 공신일 뿐이다. …… 이순신을 추앙하기 위해 다수의 문신들이 왜적의 침입에 놀라 달아나기 바쁜 와중에 힘을 다해 싸웠던 원균같은 무장이 희생양이 될 필요는 없다. 하물려 나라를 위해 전사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으랴.
{{{#!wiki style="text-align: right;"
이덕일·이희근,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999년, 203쪽 ~ 206쪽}}}첫째, 원균은 용감한 무장으로서 이순신만큼은 못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다. 둘째, 후배인 이순신이 상관으로 임명되자 반발하였다. 셋째, 이순신이 투옥된 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삼도수군통제사로서 도원수 권율의 명령을 받아 재침하는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다섯째, 선조의 호의로 선무 일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종합해 보면 원균은 불패의 신장은 아니지만 공적이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한 사람의 용감한 장수이자 왜적과 맞서 싸워 목숨을 바친 공신일 뿐이다. …… 이순신을 추앙하기 위해 다수의 문신들이 왜적의 침입에 놀라 달아나기 바쁜 와중에 힘을 다해 싸웠던 원균같은 무장이 희생양이 될 필요는 없다. 하물려 나라를 위해 전사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으랴.
{{{#!wiki style="text-align: right;"
기껏 중립적인 척을 하고 있지만 내용물을 뜯어보면 하나도 맞는 게 없이 엉망진창이다. 원균은 불패의 신장은 아니지만 개념 있는 장수는 더더욱 아니고, 아니 어찌 보면 무타구치 렌야와의 비교마저 무타구치 렌야에 대한 실례이자 원균 본인에 대한 미화일 만큼 심각하다. 이런 사람을 전사했다는 사실만으로 추앙하는 건 반자이 어택을 조장하는 것이다. 5개의 주장에 대해 반박을 하면 다음과 같다.
-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다.
최선을 다해 싸운다는 사람이 함선과 무기를 불태우고 달아나고,[46] 칠천량 해전에서는 출정해놓고 술만 퍼마시다[47] 적이 다가오자 육지로 튀어 사라졌다. 운봉전서에 나오는 활 쏘고 칼 쓰는 열심히 싸우는 것조차 했는지 의심스럽다. 원균은 무능한 장수조차 못 되는 게으른 간신이었다. 자꾸 이 인간에게 졸장이라는 칭찬을 하여, 열심히 싸우며 목숨을 버려간 충신들을 폄하하지 말길 바란다.
-
후배인 이순신에게 반발했다.
나이는 원균이 5살 더 많지만, 무과 급제는 이순신이 3년 더 빨랐다. 원균은 1579년, 이순신은 1576년. 그리고 5년 나이차는 이이의 격몽요결에 나오듯 당시에는 그냥 친구 먹을 수 있는 나이로 쳤다. 원균의 진급이 빨랐던 것은 그가 유능해서가 아니라 이순신의 진급이 눈물겹게 굴곡졌기 때문이다. 이일이나 서익 같은 놈들이 이순신을 모함하지만 않았어도 되려 이순신이 훨씬 진급이 빨랐다 더군다나 원균의 진급의 진실은 그의 성씨부터 봐야 한다. 당장 원주 원씨는 조선 역사상 첫 후궁인 성비 원씨를 낸 가문이다. 이 정도 명문가이니 원균의 진급은 되려 느린 게 이상하다.
-
이순신이 투옥되자 통제사가 되었다.
그냥 사실이긴 하지만, 여기서의 뉘앙스를 고려하자면 이순신을 투옥'시키고'가 더 적절할 것이다. 지휘 계통까지 무시하면서 말도 안 되는 빌미로 요시라가 던진 떡밥에 다시 불을 지피고 이순신을 파직시킬 빌미를 선조에게 제공해 준 사람이 바로 원균이다.[48]
-
권율의 명령으로 싸우다 전사했다.
권율이 싸우라고 몰아붙인 게 아니다. 당시 조선 조정의 수군 운용 전략은 오히려 원균이 한산도에 머무르면서 소규모의 지속적인 파상공세로 보급선 자체를 교란시키는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권율이 원균을 곤장친 것은 원균이 이러한 역할은 수행하지 않고 직접 부산까지 갔다가 전력만 까먹고 돌아온 데 대한 문책성 차원이었다. 하지만 원균은 자포자기 모드로 들어갔고 망했어요. 그런데 사실 이건 권율이 원균에게 관대히 대한 것이다.
이 짓거리를 해서 권율 휘하에 있던, 진주성 근처 제석산성 주둔 병력 5천을 얻어 놓고도 여전히 부산을 칠 수 없다고 뻗댔는데, 이걸 군율대로 적용하자면 권율이 원균을 참수해도 아무 이상함이 없다. 전시에 탈영했던 배설이 수배령 떨어진 끝에 고향인 경상도 선산에서 체포되어 서울에서 참수형에 처해진 걸 생각해보면...
-
선조의 호의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말 그대로 선조의 호의였다. 선조는 위의 궤변들을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사용하면서 원균을 옹호했고, 그런떼쟁이선조의 의중이 반영되어 원균은 팔자에도 없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무슨 원균이 잘나서 일등공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원균을 이등공신으로 녹훈하는 소극적 저항은 있었지만, 녹훈 반대와 같은 적극적 저항이 없었다는 점은 분명 아쉬운 사실이다.[49] 녹훈 반대는 철저하고 완벽한 불가능이다. 원균이 선조의 호의로 일등공신이 된 것은 맞는데 이는 잘 생각해야 한다. 원균이 잘해서가 아니라 선조가 못했는데 원균도 선조와 같은 방법으로 못해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녹훈 반대? 선조에게 대놓고 " 빡휴"라고 외친 꼴이 되고 만다. 원균의 잘못을 문책하자니 같은 잘못을 저지른 선조도 문책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선조도 한양을 버리고 도망쳐 명나라 등 뒤에 숨었고 원균도 부산진을 버리고 도망쳐 이순신의 등 뒤로 숨었는데 한 쪽의 잘못만 지적하기 뭐하기 때문이다. 굳이 조선왕조가 아니라 하더라도 어느 왕조에서 감히 신하가 왕에게 "너, 잘못했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신하가 임금의 잘못을 대놓고 지적해버리면 가문이 통째로 날아간다. 이는 서양도 마찬가지로 에식스 백작이 엘리자베스 1세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통째로 날아가버렸다. 원균의 잘못으로 녹훈을 반대하면 같은 잘못을 저지른 선조에게 대놓고 "너, 잘못했어!"라고 말한 꼴이니 녹훈을 반대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다만 원균 항목에 나와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평가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 자체가 임금이 관여를 할 수 없고 열람할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임금이 열람할 경우 그 내용이 자기 마음에 안든다는 이유로 수정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원균은 대단히 운이 좋은 사례로 죄를 지어도 임금님과 똑같은 죄를 지으면 그게 되려 업적이 된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 것일 뿐이다. 선조의 해괴할 정도로 극심한 원균사랑 역시 자기가 수도를 버리고 튄 걸 문책당하지 않으려고 발악한 것일 뿐이다. 당장 원균이 녹훈되지 못한다면 선조 역시 수도를 버리고 튄 책임을 묻게 될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거 면피하려고 원균에게 호의를 베푼 것일 뿐이지 원균이 잘해서가 아니다. 이후의 왕들도 원균에 대해선 언급을 않는 반면 이순신은 인조, 효종, 숙종, 영조, 정조가 칭찬했을 정도로 후대 조선시대 왕들도 이순신을 찬양했지 원균은 개무시했다. 심지어 선조실록에는 사관이 대놓고 이순신을 파직하고 그 자리에 원균을 앉힌 것을 비판했으며 인조때는 인조 앞에서 대놓고 이원익이 "원균이 일을 그르쳤다." 라고 말했다.
여담이지만 역대 조선 임금들의 행보에는 정치력을 가미한 행동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선조의 원균사랑 역시 자신의 죄를 면피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며 후대에 이르러서 숙종이 장희빈을 간택하고 인현왕후를 버린 것은 송시열을 제거하기 위한 도구로서 장희빈을 선택한 것이고 나중에 그 장희빈을 버린 것 역시 송시열의 포지션에 남인들이 들어갔고 그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도구로서 숙빈 최씨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조나 숙종이나 자기 제위를 지키기 위해 부린 권모술수로서 각각 원균과 장희빈을 선택했을 뿐 원균이 선조에게 인정받을 정도의 능력자도 아니며 장희빈이 숙종을 바지사장 삼은 것 역시 아니다. 원균이나 장희빈이나 각각 선조와 숙종의 장기말일 뿐이다.
6.4.2. 기타 서적
-
<원균이야기 칠천량의 백파>
저자는 원주 원씨와 평택시의 지원을 받아 예전부터 관련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책부터가 원주 원씨와 평택시의 후원으로 쓴 비매품인 <원균 평전>을 출판용으로 다시 다듬어 나온 것이다. 원균 행장 21세기판이라 할 수 있는 책.
-
<난세에 간신 춤춘다>
원균은 경상우수영 바다에서 활동했으니, 자기가 길을 안내하지 않았으면 싸우지 못했을 텐데, 이순신이 혼자서 장계를 올려서 공을 훔쳤다고 생각했을 거라는 해석이 있다. 또한, 원균 논란은 무인들을 푸대접하던 조선의 체제가 만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50] 그래도 원균에게 좀 동정적인 서술이지만, 원균은 애초부터 혈연, 파벌, 정권 후빨로 성공한 권력 출신 간신배였기에, 원균의 행적을 두고 무인들을 천시했던 분위기를 문제삼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그런 문제 때문에 불이익을 받은 사람은 주류 권력의 백업을 받기에 애매한 계층에 속했던 이순신이다.
-
<교과서와 함께 읽는 만화 한국 역사 32권(임진왜란과 항전), 33권(성웅 이순신과 정유재란)>
한국 아문센에서 나온 아동용 역사만화.
아이들에게 소개하는 역사서로서, '조선 장수가 이렇게 무능할 리가 없어'라는 생각으로 만든 만화지만, 기본적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원균 옹호가 있는 책이다. 불멸의 이순신과 같은 원균 맹장론이다. 처음 적이 쳐들어 오자 부하를 보내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한다. 그런데 이순신은 "전라도에도 적이 쳐들어 오면 막아야 하니 지원은 불가하오."라며 반대하고 결국 원균의 부하가 설득해서 이순신이 함대를 출동시켜서 적을 격파시킨 것처럼 나온다. 이순신이 원균과 육지에서 처음 만나 "장군", "오~ 이순신 장군"이라고 부르며 해맑게 뛰어오며 서로 포옹하려는 장면도 있다. 기본적으로 이순신이 전과를 세웠다는 설명이 없다. 즉 이순신의 전과는 원균과 함께 싸운 전투만 공로를 인정하고 있다. 때문에, 원균이 꼴랑 배 4척 타고와서 이순신 뒤만 졸졸 따라 다니며 싸움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린이들은 이 책을 읽고 이순신과 원균이 대등했던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51] 한산도 전투에서는 쌩뚱맞게 중위장 권준이 왜적 함선 수십척을 격파하였다고 써있는게 전부이며, 철저하게 이순신의 전과를 없애놓고 있다. 그나마, 이순신이 누명을 쓰는 장면은 "김응서는 왜국의 첩자 요시라의 말만 듣고 이순신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를 잡게 하라는 청원을 상부에 올렸다."라는 부분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두페이지 뒤에서 "이순신이 철저한 전략가라면 원균은 용장이였다."라며 원균 용장론을 주장한다. 이어 원균이 충청병사로 떠날 때는 부하들이 다같이 원균이 떠나간다며 운다. 나중에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돌아오는데, 원균이 싸우기 싫어서 병영에서 술만 먹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용맹을 자랑하던 원균도 신중을 기해 싸움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도 늘리고 지휘 체제도 바꿔야 해'"라며 아예 왜곡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원균의 싸움 준비가 졸렬했던 이유는 전부 이순신이 거느리던 부장들과의 불화 때문이라고 하는 등 철저하게 원균의 책임을 면피해준다. 이어 도저히 싸울 수 없는 상황이지만 명령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출전한다는 점을 몇페이지에 걸쳐 설명한 후, 백여척을 이끌고 출전하여 웅천 앞바다에서 십여척의 적을 무찔렀다고 소설을 쓴다.[52] 위의 문장에도 나오듯이 이순신이 구체적으로 적 몇척을 격파하였다는 것은 원균과 합동으로 싸운 단 2건만 표기하고, 원균이 없는 전투를 소설을 써가면서 십여척을 무찔렀다고 표기하는 것을 보면 작가가 쓸데없이 원균을 옹호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후 풍랑이 심하여 군사들이 지쳐 있을 때 적의 함대를 만나 칠천량에서 적의 기습을 받고 결사적으로 싸웠지만 패했다고 나오는데, 역시 왜곡투성이의 거짓말이다. 조선의 대함대는 김완의 <해소실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일본군 40여척의 야습에 깜짝 놀란 원균이 명령하여 강제로 육지로 튀어서 도망갔고, 비어있는 배들은 전부 불타버렸다. 전반적으로 이순신의 전과는 축소되고, 원균은 없는 전과를 만들어서 양쪽의 균형을 잡으려고 했다.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애초부터 원균을 이순신의 동료 장수로 설정하고, 원균을 팔아먹는 쪽의 지원을 받은 것이 실수였다고 볼 수 있는 책이다.
-
<조선왕조실록 43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
2008년 삼성비엔씨(주)에서 나온 아동용 역사만화. 위의 책보다 훨씬 심각한 원균빠 만화, 위의 아동용 학습만화가 그냥 커피라면 이쪽은 T.O.P.
교과서 따라잡기 논술 학습만화라는 모토는 위의 책과 비슷하다. "원균은 안골포 앞바다에서 기습을 감행하여 적의 선단 십여 척을 침몰시켰으나 중과부적으로 물러나야 했다."라는 구절부터 확실한 원빠 확정. 43권 제목이 이순신이지만 어지간히 이순신에 대해 쓰기 싫은지 거의 끝나가는 89페이지에서 처음 언급되는데 첫 구절이 "이때, 이순신과 원균 장군의 활약으로 기사회생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원균은 불과 십여 척의 전함을 기습 작전을 펼쳐 적선을 무너뜨렸다."로 원균과 공동 언급했고 그 아까운 페이지에 없는 원균의 전과를 두 번 언급했다. 그림만 보면 누가 이순신이고 원균인지 구분 못하게 비슷한 주인공 포스는 덤. 이어지는 장면도 모두 용감한 원균 사마께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장면 뿐. 여기에 "원래 원균은 성미가 급하여 두려움을 모르는 맹장이었다."라는 구절은 덤. 이어서 4페이지에 걸쳐 계속 원균 사마가 싸우기 싫어하는 이순신을 억지로 끌어내어 싸우게 만들고 직접 선봉에 서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등, 뒷목잡고 쓰러질만한 내용만 가득하다. 제목만 '이순신과 임진왜란'이지 작가가 이순신을 등장시키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치욕이기라도 한지 신립, 김시민보다도 적고, 그나마 등장할 때도 원균과 이순신은 동격이다. 이후 칠전량의 무너짐 챕터에서도 권율에게 곤장을 맞은 후 "더 이상 말하지 마라. 내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니 죽어 주리라"라면서 주인공 포스 넘치게 읊조린 후 "이렇게 하여 원균은 100척 함대를 이끌고 출진하였으나 500여 척의 왜군 함대에 대패하고 말았다."라며 끝까지 소설 쓴다. 아무리 학습만화 특성상 재미를 위해서 조작을 해야 되기 때문에 따지는 것 자체가 뻘짓이긴 하지만, 위의 두 학습만화 같은 것들을 읽고 자라는 어린이들이 걱정된다.
-
<해군> 2017년 5월호
대한민국 해군에서 발간하는 잡지 '해군' 2017년 5월호에서마저 선조가 하사했다는 말의 이야기를 다루며 '원균은 임진왜란 때 수군으로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던 명장이다. 중종 35년(1540년) 경기도 평택의 도일동 마을에서 태어나 무과에 급제한 뒤 여진족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 때는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이순신 제독의 도움으로 옥포 해전에서 적선 30여 척을 섬멸하였다. 그 뒤 합포 해전, 적진포 해전 등 여러 해전에서 승리하여 명성을 얻었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 원균을 옹호한 사례 중에서도 가장 질이 나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기관도 아니고 대한민국 해군의 기관지에서, 한때 나라의 해군을 완전히 박살내 버린 인물을 기리니 코미디 수준이라고 할 만하다. 이런 것은 해군만이 아니라 육, 해, 공군 공히 흑역사라 볼 수 있는데, 아주 조선 시대 장군이건 대한민국 장군이건 그냥 별만 달았다 하면 일단 덮어놓고 물고 빨고 치켜세워주는 악습이다. 원균 옹호론이 군에서도 활개를 치고 있는 이유도 결국 이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
<원균 그리고 이순신>
이순신이 공적을 취하기 위한 거짓 장계와 선전으로 원균을 모함, 폄훼했다고 주장.
-
<새로 쓰는 원균 이야기>
저자가 원균의 후손 원종섭이다. 임진왜란 일등 공신에 빛나던 원균은 왜 후대에 이르러 무능과 모함의 대명사가 됐는가! 라느니, 시대에 따라, 필요에 따라 이순신 영웅 만들기에 몰두한 집권 세력들이 원균을 희생양으로 삼은 이후 후대 역사는 그를 인격 살인하기 시작했다! 라느니, 이순신이 원균의 말을 들었다면 병자호란도 일어나지 않았다느니 그야말로 개판의 극치다. 2022년 5월 31일에 출간된것을 감안하면 2022년에도 아직도 옹호론자들이 원균 옹호를 주장하는 짓을 벌이고 있다는걸 알수 있다.
-
<이순신의 두 얼굴>
원균이 벌인 기문포 해전이 무슨 엄청난 대승리인 것처럼 과장을 해서 묘사했다. 하지만 기문포 해전의 진상은 알고 보면 해전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운 일이었다.
7. 기타
사실 원균 정도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 장수들중에선 멀쩡한 축에 속한다. 최소한 원균은 임진왜란 초기 경상우수영이 있는 거제를 지키기라도 했으니까. 당장 경상좌병사 이각은 동래성 전투에서 도망을 쳐 무려 임진강까지 갔다가 한응인에게 참수당했다. 심지어 안동부사 정희적은 무려 함경도 길주까지 도망갔다. 거기다 이 두 졸장들은 안동성 전투때 함께 진을 쳤다가 일본군을 보고 사이좋게 도망갔다. 경주성 전투에서는 경주 판관 박의장과 기장군수 이수일은 항복을 권유하러 온 일본군 병사 1명을 보고 성을 버리고 달아나는 추태를 부렸다. 경상도 방어선 항목을 보면 경상도 방면의 수령방백들은 도망치느라 바빴다. 그외에도 허구헌날 조정 신하들에게 찍혀서 제발 이놈 좀 파직시켜달라는 상소가 쏟아짐에도 선조의 비호로 자리를 지켰던 전라도병사 최원이나 자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팀킬을 저지른 용궁현감 우복룡등 원균 이하의 장수들이 널렸다. 그중 제일 막장은 지금의 수방사 사령관 격인 유도대장 변언수로 한양을 지키라고 그 자리에 앉혔더니 일본군에 항복하려다가 붙잡혀 참수당했다. 진짜 문제는 원균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순신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것이다. 만약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탐내지 않고 그냥 평범한 수군 장수로 남았다면 설령 칠천량 해전에서 패배하더라도 그게 원균 본인의 책임은 아니게 되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원균이 선조의 이순신 숙청으로 인한 선의의 피해자로 기록되었을 것이다.8. 관련 문서
[1]
해당 장소는
여수시의 이순신광장이다. '이순신 장군을 도운 사람들 2'라고 쓰여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순신 휘하의 다른 장수들도 기리고 있는데, 그 사이에 원균이 끼어 있는 것이다. 여수시에 철거하라는 민원이 들어갔지만, 소위 전문가라는 작자들이 납득하기 힘든 논리로 원균을 옹호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으니 해결은 요원한 일이다.
https://youtu.be/Kn14iat5d-w
[2]
현재 울산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
[3]
다만
원유철도
고려대학교 총학생회 운영위원장 활동을 한 운동권 출신으로 민주당계 정당인
통일민주당 중앙청년위원회에서 활동을 하다가 김영삼 따라서 보수정당으로 옮긴 것이다.
#
[4]
불멸의 이순신이 방영되자 《원균을 위한 변명》으로 재출간됐다.
[5]
마찬가지로 드라마가 방영되자 《원균》으로 재출간되었다.
[6]
애초에 '행장' 이라는 것은 그 신뢰성이 입증이 안 된다. 왜냐면 행장은 그 사람에 극단적으로 우호적으로 서술되어서 하다못해 이런 행장 작성이 만연했던 조선시대에만 해도 허목이 살아서 공자, 주자가 아니면 죽어서도 공자, 주자가 아닌데 왜 살아서 공자, 주자가 아닌데 죽어서는 공자, 주자가 되는 것이냐고 디스했을 정도다. 예시를 하나 들어 보면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은 김유신의 후손이 쓴 김유신행록을 참고하여 서술했는데 이 때 김부식은 본래 10권짜리였던 행록의 분량에서 말이 안 된다 싶은건 거르고 믿을만한걸 취해 총 3권 분량의 김유신 열전을 만들었다. 내용의 반 이상이나 날아간 것. 그런데도 김유신 열전은 신라본기의 기록과는 분위기가 판이하게 다르다. 그만큼 행록이라는게 믿을게 못되는 것이다.
[7]
물론 이렇게 반박 가능하다. "옛날 그일을 너는 봐서 원균 옹호하냐? 어떻게 아냐", "원균보다 다른 의병장이나 관군들이 더 열심히 싸웠다"고 역관광시키면 된다.
[8]
왕을 참하라나 조일 전쟁은 기본적으로 인문학적 가치가 없는 사이비 서적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리고 백지원은
김운회와 같이 사이비 저술가로 악명이 높다.
[9]
세도가들에게 붙어 이순신을 모함하고 중상모략한게 한두번이 아니다.
[10]
선조가 강하게 밀어붙인 것도 원인이지만, 조정에서는 권력층과의 연줄이 애매한 이순신이나 의병장들이 기존의 권력 구조를 흔들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반면에, 원균은 각 분야의 실세들과 혈연이 깊었다. 위급시에 이런 판가름이 발생할만큼, 이순신과 원균은 근본적인 처지가 달랐던 것이다.
[11]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원균은 이것도 실패한 편인데 일단 선조 개인의 호감은 샀을지언정 선조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철저히 비판받았다. 당대의 기록이 전부 이순신에게만 우호적이고 원균에게 비판적인건 원균옹호론자들의 주장처럼 승자의 기록, 왜곡 이런게 아니라 그냥 두 사람의 행적 때문이다. 한두 기록이 그렇다면 해당 기록을 남긴 사람이 고의적으로 왜곡할 수 있지만 실상 원균행장록 같은 왜곡이 대단히 많은 종류의 기록 말고는 후대는 물론 당대 기록도 서로 일치하는건 승자의 기록이나 왜곡만으로 할 순 없다. 심지어 칠천량 해전 전만 해도 조정에서의 원균에 대한 평은 이순신만은 못할지언정 나름 잘 싸우는 명장쯤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12]
비슷하게 단종실록, 세조실록 등의 기록에 왜곡이 있음을 추정하는 것 등도 전부 기록이란 기록이 다 남아있어서 교차검증이나 기록 내부의 문제점 등을 짚으면 얼마든지 드러난다. 기록을 너무 많이 해서 왜곡된 기록도 많지만 반대로 기록을 너무 많이 하기에 교차검증용 자료도 많아 얼마든지 왜곡을 짚어낼 수 있는 것.
[13]
일본은 배에 대포가 없거나 있어도 적었고 그나마도 쏴도 판옥선이 견딜만했다. 멀리서 대포만 쏴도 반은 먹고 들어가는 수준.
[14]
심지어 KODEF에서 발간한 서적에서는 "해군 전략을 모르는 권율은 원균에게 무리한 출진을 독촉했다. 분을 못이긴 원균은..."이라는 서술까지 있다!
[15]
굳이 말하자면 모함을 잘 하는 듯하다. 선조라는 빽을 등에 엎고 일본군을 보고도 안싸우는 등 출세욕이 강했다. 이순신과의 불화로 경상우수사에서 쫒겨나듯이 물러나 육군직인 충청병사로 임명되었던 적이 있어서 그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16]
"내가 적을 만나 싸우게 될 때 멀면
편전(片箭)을 쓰고 가까우면 장전(長箭)을 쓰고
맞부딪치는 경우에는
칼과
정(기름칠한 곤봉을 말한다.)을 쓰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소"
[17]
#
[18]
사실 그의 가문인
원주 원씨 자체가 전통적으로 무반을 많이 배출한 가문인 만큼 이 가문 무반들의 피를 물려받은 원균이 활도 제대로 못 쏜다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일 것이다.
신립도 일신의 무예는 인간병기급이긴 했다. 원균이나 신립이나 다
필부지용이라 그렇지.
[19]
북관 대첩 문서 참고.
[20]
탄금대 전투로 조선군이 박살나고 도주하는 와중에 일본군과 마주칠때마다 그들을 죽이고 도주했다.
[21]
물론 맹장이라고 해서 꼭 무지성 돌격만 하는 것이 아닌 돌격할 때를 잘 알고 진짜 돌격할 때 무지막지하게 돌격하거나 그냥 안되면 되게 하는 식의 말도 안 되는 활약을 하는 타입도 있다. 즉 맹장이라고 다 같은 맹장은 아니다.
[22]
애초에 여기서 신립이 패배한게 자기랑 안 맞는 보직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최고 지휘관으로는 부적합하지만 그런 자리를 맡은데다 기병 전문이라 똑같이 기병전에 능숙한 여진족과는 잘 싸우지만 일본군과는 그 특기가 먹히지 않아서 패배했다는 것이다.
[23]
다만 이순신이 임진왜란 1년 전 고속 진급을 할 때 반대론자의 주장 중에서 "이순신, 걔는 육지에서만 뛰었는데 바다에서도 잘 뛰겠나?" 임을 생각해보면 따로 두지는 않아도 일단 육군에 맡기면 육군에 수군에 맡기면 수군에 오래 맡기거나 그냥 평생 그렇게 굴린 듯하다. 물론 이순신은 중간에 발포에서 수군 만호를 지낸 적이 있어 완전한 무경험자는 아니긴 했는데 이 때 이순신이 공훈을 세운게 없어서 반대론자들이 경험이 없다고 한 것으로 보인다.
[24]
그리고 원균의 가문은 대대로 무인이 많이 나왔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웬만하면 능력과 상관없이 무신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경우엔 예외적으로 대대로 문인 집안에서 무인으로 나온 특이 케이스다.
[25]
따라서 별다른 레퍼런스 없이 무턱대고 '강단사학'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재야 사학자들을 보면 각별히 주의하자. 제대로 배운 연구자는 절대로 그렇게 과격하고 자극적인 문언을 사용하지 않는다. 단, 원균 옹호론이 등장한 것은 이런 격렬한 어그로를 끌어봐야 돈벌이가 신통치 않았던 시절부터이기에 원균 옹호론이 주류적으로 퍼진 이유와는 연관성이 적다. 그런다고 보기에는 힘든 것이 전두환 때이다. 즉, 전두환 정권이 은밀하게 지원했다는 주장도 부정되기 힘들다.
[26]
웃픈건 조선시대에 서얼은 적어도 대놓고 외면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서자는 적어도 확실하게 자식대우 받았고 얼자는 최소한 노비 대우는 하지 않았다.
[27]
이런 의미에서 보면 원균옹호론은 절대로 순수한 목적에서 나왔다고 할 수가 없다.
[28]
오로지 군재만으로 따져서 비슷한 경우는 삼국지에도 있는데 바로
하후돈이다. 하후돈은
애꾸눈이 된 과정부터 장대한 삽질이고 박망파에서는 유비한테 패하고 도무지 승리한 업적이 없는 위인임에도 불구하고
조조의 최측근에 직책이 대장군이라는 이유로 인해
삼국지연의에서는 그야말로
관우와 쌍벽급의 무용을 가진 인물로까지 미화가 되었다. 물론, 하후돈은 군재만 떨어지는 것 뿐이지 다른 능력이 뛰어나고 인품도 훌륭했고 무엇보다 조조의 창업공신으로 고위직을 받을만한 큰 공을 세운 것은 맞기 때문에 원균과는 전혀 다른 케이스이다. 적어도 하후돈은 그 대우에 있어서 생전에도 사후에도 딴지걸어지지 않았고 사후에는 '충후'라는 매우 좋은 의미의 시호를 받았다. 반면 원균은 시호조차 없다. 똑같이 1등인 이순신은 충무, 권율은 충장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도 말이다.
[29]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맹장이 아니고 졸장이다. 진짜 맹장인
신립처럼 열심히라도 싸운 적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배를 버리고 도망가는 직무유기를 걸핏하면 저지르는 인간이였다. 원균은 맹장은 고사하고 졸장이란 말도 아까운 찌질이다.
[30]
실제로 이순신은 워낙 비현실적인 전공을 세웠기에 창작물에서 이런저런 너프를 겪는다. 예를 들어 명량 해전은 실제론 절망적인 전략차에도 불구하고 아군 전사자는 불과 10명이었고, 한산도 대첩은 전사자가 3명이었다. 물론 둘 다 왜군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말도 안되는 교환비이며 만화로도 이렇게 그리면 욕먹는다. 그렇기에 영화 명량에서는 실제론 있지도 않았던 백병전이 그려지거나, 한산에서도 유인 과정에서 아군 배 3척이 피해를 입는 등 모습이 그려져 긴장감을 연출했다.
[31]
신립 고증이 가장 잘 된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멍청하고 비중도 없지만 최후에 간지폭풍의 모습을 보여주고 퇴장하여 관객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실제 역사에서도 포위당했음에도 화살 한발로 적장을 쏴죽이고 혼자서 수십명을 쳐죽이는 등 충분히 맹장 반열에는 들 수 있는 행적을 보였다. 사실 어떻게 봐도 무예와 용맹이 뛰어나단 것은 확실한 신립 대신 겁쟁이였던 원균만 자꾸 띄워지는 것은 신립과 이순신 사이의 별 인연이 없는 것도 크다. 주인공이 이순신이라면 그와 대비되는 라이벌이 있어야 하는데, 라이벌이 찌질이라면 김이 새기 때문에 띄워지는 것이었다.
[32]
첫 출전에서 이억기가 아직 전력을 다 모으지 못하자 정운이 나서서 기다리지 말고 그냥 일본군을 쳐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이순신도 정운이 주장을 따랐고 옥포 해전에서는 아군이 나서서 싸우지 못하자 선봉장으로 나서 싸워 이겼으며 이후에도 선봉장으로 여러번 활약했다. '한 마디로 맨날 선봉장으로 나서서 맹렬하게 싸우는 장군' 컨솁을 잡는다면 원균보다야 이쪽이 적합하다.
[33]
학창 시절
춘원의 글을 보고 존경하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34]
웃긴 건 그럼 이순신 휘하의 이들 중 얼마나 전사했냐면 전사자는 적었다. 단지 군법을 어겨 처형된 군졸 숫자만 많았을 뿐.
명량에서도 고증된 부분이다. 그나마 이순신 휘하의 이들 중 전사자가 많았던(이순신 본인도 전사했지만)
노량 해전조차 이순신 본인을 포함한 당시 조선 수군 전체가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필사적으로 일본에 복수하려 하다 보니 그렇게 전사자가 늘어난 것이며 이순신의 장수로서의 역량과는 무관하다. 게다가 북한은
이미 수백만 인민을 개인 권력욕 때문에 증발시킨 전쟁을 일으켰으니 억지 궤변이다. 심지어 김일성은 남침으로 남한에게 선빵 쳐놓고 튀다가 자기 편한테 맞은 것까지 원균과 판박이다. 그나마 북한도 나중에는 이순신을 치켜세워주었다.
[35]
이런 시각의 대표적인 예가
조선일보 기자 출신 이한우의
군주열전 시리즈 중 선조편. 이 책에서는 원균을 '리더의 명령에 충직한 장군'이자 실록에 의지해 원균을 살펴보겠다고 본문에서 언급하면서 '역사에서 가장 폄하된 인물 중 하나'라고 평가하고 있다.
[36]
독재와 권위에 대한 반발로, 그때까지 주목되지 않았던 반대쪽(원균)에 관한 연구였으나 결론적으로 원균의 한계만 더 명확하게 드러난 꼴이었다.
[37]
예를 들어 EPL에서 뛰고 있는 축구선수를 평가할 때 "형편없는 선수다"라고 하면 당연히 EPL 기준으로 형편없다고 하는 것이지 일반적인 기준으론 매우 뛰어난 축구선수이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비판을 원천봉쇄하는 논리가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지'이다. 프로가 프로인 건 이유가 있고, 총사령관이 총사령관인 건 이유가 있다. 원균처럼 초엘리트 군인으로 막대한 책임을 짊어진 자의 능력을 평할 때 "일반군인치곤 무능한 건 아니다"란 건 전혀 의미가 없다.
[38]
선조 역시 머저리같은 짓을 저지른 셈이지만, 이 건에 대해서는 원균이 선조에게 사기를 친 셈이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가 수전에 약한지라 조선수군이 부산포로 출진해 위용을 보여준다면 알아서 물러날 것이라고 했는데, 나중에 미적거리거나 육군의 지원을 요청한 것에서 보듯이 자기도 수군의 힘만으로 점령하는 건 불가능하단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기도 불가능하단 걸 담보로 삼군통제사 직위를 받아놓고 딴 소리를 하는 건 당연히 사기다. 괜히 권율이 대노해 삼군통제사를 곤장치는 초강수를 둔 게 아니다.
[39]
위에서 계속 나오지만 원균과 달리 실제로 용맹이 뛰어난 맹장이었던
신립의 경우,
탄금대 전투에서 궤멸적인 전술적 역량과 조총에 대한 몰이해 등을 통해 조선의 정예군을 대패시킨 패장이다. 이 점에서 원균보다 죄가 적다고 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신립은 본인의 탐욕이 아니라 군인으로서 의무로 싸움에 나섰고 결사항전하다 패했다.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임무가 주어진 군인'이라면 기병대장이 어울림에도 총사령관 역할을 맡아 실패한 신립 쪽이 그나마 더 맞는다.
[40]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아예 세종대왕과 이순신은 조선시대의 실존 인물이 아니라 후대에 와서 민족주의자들이 날조한 허구의 가공 인물이라는 황당한 글이 버젓이 베스트에 올라가기도 했다.
[41]
이순신이 완벽주의자에 피해를 최소화하고 반드시 이길 수 있도록 준비를 철저히하는 무인이었단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명량 해전' 정도를 제외하고는 본인이 이길 확률이 매우 높도록 판을 짜놓는데 능한 인물이었지 결코 요행을 바라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군인에 가까운 인물이지만 너무나 모범적이고 완벽한 인물이기 때문에 대중들이 존경은 할 지언정 감정이입하기는 힘들다. 하다못해 술버릇이 고약하거나 포악한 면이 있던 것도 아닌 약점이 전무한 인물이니, 뭔가 단점이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원균의 캐릭터가 창조된 것이다.
[42]
물론 신하들이 미쳐서 2등에 집어넣은 게 아니라 선조 눈치가 보여서 올려놓은 것이다. 원래는 선무공신은 고사하고 관작 추탈이 아니라, 처형도 마땅하다는 건 다 동의할 것이다. 아닐 게 아니라, 원균 때문에 나라가 망할 뻔 했다.
[43]
조선시대에 웬 부정행위? 라고 할 수 있겠다만, 시험이라는 것이 도입되면서 부정행위는 늘 있어왔다. 그 당시 과거시험에도 갖가지 부정 행위는 횡행했다.
[44]
게다가 류성룡은 몰라도 정탁이 이순신을 추천했다는 말은 도저히 근거가 없다. 정탁의 문집인 약포집에 이순신을 대장(大將)으로 천거했다고 나오긴 하는데, 이 대목의 시점으로 보아 여기서의 대장이란
삼도수군통제사를 가리키는 것이다. 정작 정탁이 이순신을 추천했다면 좋아할 일이기는 하다. 각종 의병장 관련 사건이나 무고 사건에서 피해자를 두둔하는 건 정탁이었다. 이는 이원익이 자신이 이순신을 천거하여 통제사로 등용시켰다고 말했던 것(『승정원일기』 인조 9년 4월 5일)과 같은 맥락이다.
[45]
이미 선조에게 밉보였다가 정권이 뒤바뀌는 일을 4번이나 보았다. 그나마 이때는 숙종식 환국이 아니었던지라 물러나도 재기할 기회는 있었지만 실각은 참으로 큰 타격이었다.
[46]
물론 이건 아주 쉴드칠 구석이 없는 것만은 아닌데 이미 조정에서는 "적이 쳐들어오면 육지로 끌어들여 싸워라! 우린 수군은 약해도 육군은 강하니까!" 라고 결론을 내렸기에 일단 육지로 달아나려고 한 것 자체는 조정의 말을 잘 들은 거다. 게다가 조정에 거짓 보고까지 올렸으니 이쯤되면 막장이다.
[47]
그나마도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에서는 원균을 미화했다는 게 졸다가 기습을 당한 것으로 처리했다. 근무를 태만히 해 자다가 봉변을 당한 게 미화일 정도로 이 인간이 칠천량 해전에서 한 짓은 그야말로 막장 중의 막장이었다.
[48]
참고로 나중에 요시라는 조선 측에서 분풀이로 삼으려고 했는지 수교 조건으로 압송을 요청했고 결국 요시라는 처형당한다.
[49]
그렇지만 저항을 한들 얼마나 효과가 있었을지 미지수다.
[50]
다만 당시 동아시아는 일본 빼면 전부 문인 우대 국가였다.
[51]
함선 숫자가 대등한 지휘관은 이순신(24척)과 이억기(25척) 함대였다. 원균은 연합 함대의 1/10 미만의 규모이며 그것도 전투마다 후방에만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교묘하게 호도한다. 그에 반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같은 만화이지만 이순신의 24척과 원균의 4척을 그려서 둘을 확실히 비교하고 있다.
[52]
물론 이런 일은 없었다. 반대로 무서워서 도망치는 왜군을 무리하게 좇으라고 닥달하다가 조선군 12척이 떠내려 가는 비전투 손실을 입었을 뿐이다.